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75화 (75/284)

75화

22. 일명경인(一鳴驚人)(3)

장사나 한다고 뒷말이 많기는 하지만 이강회는 엄연히 선비 집안 자손이다.

시준과는 격이 다르다. 게다가 지금 김조순의 권위도 공고하다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강회는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한 방에 마주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부친의 성명은 이기준(李基俊)이요, 윤 충헌공(忠憲公, 윤선도)의 외가 6대

손이라. 호남의 학문을 익히 하였겠구먼. 거기에 예조 참판의 제자라면 청요

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으리.”

김조순은 이 만남이 일상적인 선비의 교우라는 인상을 주려 애썼다. 그렇게

한다면 전통적 질서에서 까마득한 상위인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강회는 그것을 무시했다.

“과찬이오나, 이 사람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은

외국 배에 대한 배움을 궁구하고 있으며, 업으로 말하자면 바늘 장사 하러 다

니는 자올시다. 오늘 영돈녕부사를 특히 찾아뵌 것도 큰 부고(富賈)인 저의

사형(師兄), 시준의 일 때문이지요.”

김조순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긴장했다. 한갓 장사치가 국가의 대사에 끼어

들 줄은 전연 몰랐다. 그래서 김조순은 이것이 북에서 그 난리판을 보았을 정

약용의 뜻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가져온 수탉은 어떻게 요리해야 하겠는가.”

용건이 무엇이냐는 고풍스러운 질문에 이강회도 은유로써 대답했다.

“이는 일전 씨암탉을 보내신 부원군의 뜻에 보답하여 바치는 예입니다. 대저

늙은 수탉은 살이 질기나 그 연륜을 뼈에 감추고 있으므로 당장 가슴과 허벅

다리를 잘라내어 굽거나 튀기기보다는, 다섯 가지 약재와 함께 천천히 삶아

국물이 배어나오게 해야 합니다. 오직 서두르지 않고 성실하게 불을 보는 것

만이 진정 혀를 진미로 기쁘게 하고 속을 보양하여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지금 당장 왕과 정면충돌하지 마라.

시준은 홍득주와 지유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한 얘기였지만, 현재 아들 김유근

이 홍경래에게 잡혀 있음을 파악한 김조순의 입장에서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리고 김조순은 잠시 후 다른 뜻도 알아챌 수 있었다.

천지와 음양의 이치처럼 자웅(雌雄)은 그 분별이 있어 서로 섞이지 않는다.

시준은 암탉의 답례로 수탉을 보냈다. 조선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암시다.

‘너보다 내가 우위다. 이것을 인정해야 동맹이 성립된다.’

김조순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더 분노했다.

이런 건방진 짓거리는 한 소리 일갈로 물리쳐야 마땅하다. 설사 이게 정약용

의 뜻이라 해도 아랫사람이긴 마찬가지다. 장사치 따위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럴 수도 없는 처지에 몰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김조순은 기혈이 들끓는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다섯 가지 약재의 처방은 어떻게 되는가.”

“급환이 들어서 명재경각인 환자에게는 우선 청심환 같은 극약으로 깨어나게

하고, 다음으로 죽을 쑤어서 순한 약재와 함께 먹이며, 그 연후에 부자나 인

삼 따위의 독한 약재와 기운을 북돋는 육즙(肉汁)을 써서 병의 뿌리를 뽑는

법입니다. 우선 병세가 화급하다면 부득불 서둘러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김조순은 좋게 말해 집에 틀어박힌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딸과 마찬가지로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다. 집 밖으로 한 발짝

이라도 나갔다가는 수경포도청이나 의금부의 나졸들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일단 끌어갈 것이다.

일단 끌려가면 다음은 김조순이 아무리 왕의 장인이라 하더라도 살아 나갈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사위가 장인 모가지 날리기는 어렵겠지만, 여기는 조선이다.

죽이고 싶은데 사형 판결 내기는 부담스러운 죄인을 ‘실수로’ 염라태수 앞에

대령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판의금부사 한만유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이공이 아직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김조순의 영향권인 훈련도감이 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금위영과 포도군관처럼 원래 서울에 있던 병력이 움직이고 있기에 훈

련도감도 웅크린 상태였다. 그러나 만약 어영청이나 총융청이 서울에 들어온

다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훈련도감은 그들이 도성 바깥에 도달하기도 전

에 창덕궁을 습격할 것이다.

그래서 이공은 이 장대한 친위 쿠데타의 마지막 국면을 주의 깊게 조율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결과는 군대를 부딪칠 필요도 없이 이기는 것이라는

이치 정도야 이공도 알았다.

그러므로 지금 김조순이 마주한 최대의 위협은 암살이다. 모략 부리기 좋아하

는 왕의 특성상, 적어도 홍경래군이 도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면으로 군을

휘몰아 쳐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김조순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바라건대 그 처방을 좀 보여주게.”

이강회는 한가롭게 주위를 둘러보고 ‘처방’을 말했다.

“우선은 저희와 함께 새문안 쪽으로 산책을 나가시지요. 묵은 악취는 병의 원

인이 되니 가벼운 차림으로 바람이라도 쐬시는 게 좋습니다.”

김조순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새문안이라면 경희궁(慶熙宮)이 있는 곳이다.

이강회가 갑자기 궁궐 구경 좀 하자는 얘기를 할 리는 만무하다. 이강회가 말

하고 싶었던 것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훈련도감 본영(本營)이다.

하지만 김조순은 그다지 신통한 방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조순도 물론 자

기를 지지하는 훈련도감의 군세에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러

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집 바깥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무뢰배들이 나를 덮쳐 그 자리에서 물고

를 낼 걸세.”

의금부야 김조순도 지인이 많으니 그렇다 쳐도, 조제프 푸셰의 조언으로 성립

된 수경포도청은 김조순조차 손대기 어려울 만큼 정예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몇 마디 호통이나 엽전 주머니로는 물리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대학(大學)』의 도를 잊지 않는 조선 프리드리히 이공의 서구화는 역시 집

안을 다스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조제프 푸셰가 구상한 수경포도청의 조직은 나폴레옹이 수립한 정치경찰의 체

제를 적당히 답습한 것이었다. 전문 치안 및 첩보요원의 구성과 실무자를 통

제하는 관리직의 상설화 및 겸직 금지, 밀고 장려, 요원에 대한 충분한 자금

제공 등이 그 요체였다.

각 부서는 기존처럼 적당히 손 남는 사람이 일하는 게 아니라 엄격한 구획에

따라 분리되었다. 이들은 서로의 일을 알 수 없었으며, 따라서 충성경쟁은 심

화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오랜 관료제의 전통이 있던 조선에서 이 일은 훨씬

쉬웠다.

지금도 그 포도군관들이 김조순의 집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다. 만약 훈련도감

군사가 몰려든다거나 김조순이 도망친다거나 하면 이공은 즉각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강회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들으니 근래 부원군 댁에서

망극한 흉사가 있었다지요.”

김조순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려졌다. 자기 아들 얘기하는 건가 해서였다.

굳이 말하자면 그놈이 태어난 게 흉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강회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한 고조와 왕태조(王太祖, 왕건)는 모두 가신과 옷을 바꿔 입고 도망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마침내는 와신상담하여 원수를 갚았으니 한순간의 치욕은

군자가 꺼릴 바 아닌 것입니다. 이제 준비하시지요.”

김조순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곧 수십 명이나 되는 검은 옷

의 청년들이, 몰래 감시하던 포도군관들의 당황한 표정을 뒤로하고 당당히 부

원군의 집을 둘러싼 채 꿇어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확립되기 시작한 프랑스식 경찰 체제의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 전

에는 은퇴 군인이나 일 없는 모험가, 심지어 전과자 등이 한가할 때 맡던 ‘경

찰’이란 직업이 하나의 존경할 만한 관료 커리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선 포도군관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 직업적 자부심에 가득

찬 군관 이창록(李昌祿)은 통곡하는 오죽당 무리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물었다.

“거, 무슨 일이 났소?”

안타깝게도 이창록의 연기가 의주 상인들을 속여 넘길 만큼은 아니었다. 가장

요란하게 부르짖고 있던 정시준 상단 서울지부장(이제 솔직히 임상옥에게서는

반독립 상태였다) 박득출은 나지도 않은 눈물을 쓱 닦는 척하고 말했다.

“아이고, 부원군 댁은 평소 우리 장사치들에게 후한 값을 쳐 주어 그 인정 높

음이 서울 시장바닥에 칭송 자자했는데, 갑자기 이 댁 며느리(김유근의 부인

민씨)가 남편이 화 입음에 슬퍼하여 목을 매달았다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

습니까? 우리 같은 무식한 것들이야 뭘 알겠소이까마는 그저 이집 저집에서

약소한 돈이나마 추려 상여나 메어 드리려 이렇게 모였소이다.”

이창록은 눈을 번득였다. 이것은 중요한 첩보였다.

“아니, 생전 금시초문이구려. 부원군 댁 아들이라면 저번 전시에도 일등을 차

지할 것이라 다들 말하던 학문 높은 생원인데 어떤 괴변이 있었다는 말이오?”

“소문도 못 들으셨소? 저 북쪽에 난리가 나서 의주가 죽사발이 나고, 무슨 성

상의 교지를 받들었다 칭하는 망극한 역도의 무리가 감히 부원군의 아들을 해

하였다 하오! 세상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도적놈이 아니고서야 정승

집안을 칼로 쑤실 리가 있나!”

당연하지만 지금 조정의 암투는 알려지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 양쪽에서 개망

신이기 때문이다. 긴장한 이창록은 돌아가면 왕의 대의를 드높여 공표하는 것

이 좋겠다고 건의하리라 마음먹었다.

이창록의 생각에 잘 모르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근왕군’이 정승의 아들을 죽

였으니 – 아직 안 죽었지만 – 조정에 대적하는 것이요, 그러면 나랏님에 거역

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백성의 입장을 일일이 고려하다니 훌륭한 민중의 지팡이가 될 자질이 벌써부

터 보였다. 지금까지 조선에 이런 경찰은 없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보면 지금 박득출을 어떻게든 엮어 끌어가 김조순의 지지세력

이 될지도 모르는 상인 집단을 거세하겠다는 발상도 할 수 있겠지만, 이창록

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했다 하더라도 주위의 오죽당 당원들이

너무 많아서 위험했다.

모범적인 경찰 이창록은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나

는 돌아가서 보고할 테니 잘 지켜보라는 의미였다.

상이 났다면야 아무리 난리판이라도 김조순 집에 문상객이 안 올 리는 없을

터요, 그런 자리는 역모를 꾸미기 아주 좋은 기회다. 한두 놈 잡아가서 족쳐

보면 훈련도감마저 김조순 편에서 돌아설 역모의 증거가 나올 것이 확실했다.

그랬기 때문에, 3일 내내 아무런 조문객이 오지 않자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인의 인심이란 게 맹상군(孟嘗君)의 식객들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무

리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그리고 오죽당 청년들이 구

슬픈 곡을 하며 상여를 내어갈 때까지도 포도군관들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

했다.

푸셰가 봤다면 통탄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프랑스 경찰이라면 반드시 그 행렬

을 덮쳐서 관짝을 까 봤을 터이나, 조선 포도군관들은 명령이 내려온 것도 아

닌 터에 차마 그런 무도한 짓을 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공의 결심은 좀 뒤늦은 것이 되고 말았다.

“없다고?”

이공은 왕 같지 않은 말투로 되물었다. 판의금부사 한만유가 황송해하며 머리

를 조아렸다.

“상중이라며 감히 관헌을 가로막는 노복들을 채찍으로 쫓아내기까지 하면서

문을 들부수고 들어갔으나, 금부도사가 갔을 때는 이미 집안이 텅 비어 있었

습니다. 남아 있는 자는 종놈들뿐인데 아무리 문초해도 아는 것이 없어 난망

합니다.”

어차피 지금 간언할 관리도 별로 없는 틈에 전격적으로 사약을 내려 김조순이

받고 죽으면 좋고, 거부하면 그걸 빌미로 토벌하겠다는 급조 계획을 세웠던

이공은 어이가 없었다.

이 나라 신민의 생살여탈은 모두 자신의 손에 있다. 그들은 스스로 살거나 죽

기를 꾀해서는 안 됐다. 설사 그랬더라도 자신이 정해주면 그 길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법도다.

시준이 들었다면 단두대가 생각났겠지만, 지금 이공의 심정은 자판기에 돈 넣

었는데 음료수가 안 나올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

“이자가 감히 도망을 쳐! 지금 찬역을 하자는 것인가!”

김조순이 멋대로 사라졌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내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공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어디로 갔을지 능히 짐작할 만했다. 왕은 지금

당장 어영대장 이해우에게 군을 이끌고 도성에 입경하라고 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모든 조직이 그렇듯 어영청도 혼자 움직일 수는 없다.

병사를 소집할 명부, 소식을 전달할 수많은 파발, 군대를 유지할 곡식과 마

초, 무기를 지탱할 화약과 총탄, 화살 및 포탄 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필요한 게 수십 가지다.

그런데 그것은 거의 전부 병조 휘하의 거대한 행정기구가 관할한다.

아무리 조선 관청의 대원칙이 각자도생이라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조직 유

지를 위한 부업 차원이지,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면 중앙의 지원이 필수다. 그

래서 조선을 중앙 집권국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병조를 포함한 조선 중앙정부는 이공의 무리수 남발 때문에

거의 마비 상태였다. 이공의 생각과는 달리 왕의 명령은 호통친다고 해서 어

디의 마법지팡이에서 불 나가듯 실현되는 게 아니다.

김조순을 따르던 노론 시파는 대부분이 고향 가거나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으

며, 이공이 자리 채우려고 급거 불러들인 임용 대기자들은 그들이 왜 대기자

인지만 여실히 보여주며 정부를 말아먹는 중이었다.

이공이 김조순에게 물리적 제재 대신 화학적 제재를 채택해야 했던 이유가 그

것이다.

지금 왕이 현실적으로 당장 출동시킬 수 있는 병력은 금위영과 수경포도청 정

도인데 아무래도 훈련도감과 정면충돌하기에는 좀 모자랐다.

같이 입시해 있던 수경포도장 이요헌이 아뢰었다.

“아무래도 근래 오죽당이라 일컬으며 서울을 누비던 장사치 무리가 간여한 듯

합니다. 요 며칠 사이 김조순의 집에 드나든 것은 일꾼들 몇을 제하면 그자들

밖에 없습니다.”

이공은 신음을 흘렸다. 이는 왕이 가지고 있던 상인들과의 연결점이 끊어졌다

는 증거다.

놀란 사람은 이공뿐이었다. 이공은 자신이 내린 무한한 은혜로 시전 소매상과

야장들이 엎드려 따라올 거라 믿었으나 오산이다. 솔직히 개도 그 정도로 박

대하면 주인을 문다.

소매상과 야장들에게 혜택을 내린답시고 뒤집어엎은 시전을 갑자기 남대문으

로 이전해 버린 게 바로 올해다. 정대운 이하 야장 패거리들은 지금 나하고

장난하느냐는 기분밖에 들 게 없었다.

언제나 은밀한 측근과 비선 정치를 선호하는 이공도 물론 그 낌새를 아예 고

려하지 못한 건 아니다. 허나 조제프 푸셰가 아뢴 정치경찰은 너무나 유혹적

인 것이었다.

수경포도청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도성 곳곳에서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이권

을 바탕으로 어둠의 세계와 통하던 액례나 금례 등 기존 하급 관원들의 위세

가 크게 축소되었다.

당연히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왕의 연락망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수경포도

청은 공적으로 드러난 조직이라 이런 면에서 그들을 대체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한성의 암흑가는 더 이상 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특히 쌀

을 나르는 경강 상인 중 일부마저 발을 뺀 것은 큰 타격이었다.

이공은 그 손해를 메울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애초에 왕 된 몸으로 신민과

동렬에서 세력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군주로서 끝났다는 증거이지만,

이공은 그것까지 깨달을 틈이 없었다.

의주에서 평양까지 빠른 속도로 내려온 홍경래군이지만 평양부터는 그렇지 못

했다. 평안 감사가 참수되자 지리멸렬한 감영군 중 일부를 흡수한 탓에 진격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기 때문이다.

감영군이 태업을 한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태업을 한 것은 홍경래였다.

500명의 한 달 치 식량만 가지고 출발했던 홍경래군은 불어난 군대를 먹일 군

량, 특히 마초가 없었다.

중간중간 들르는 관청에서 교지 내세워 곡식 뜯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흉년이라 먹고 죽을 곡식도 없는 게 컸지만, 있다 해도 수령이나 유지들이 비

협조적이었다.

평안도 유지인 홍경래나 그 일당들의 인맥은 황해도에서는 잘 먹히지 않았다.

교지 덕에 습격은 받지 않는 정도가 한계였다.

이공 역시 대놓고 수령들에게 홍경래군을 지원하라고 할 수 없었다. 평안 감

사 정도 되는 고위 인사를 법에 의하지 않고 참수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신하들의 질문에 이공은 전형적인 일부 이단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상태였고

이런 상황에서 홍경래군 내부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줄 잘못 선 것 같다고 생각한 감영 출신 항복병들이 다시 탈주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짐덩이가 추가된 꼴이었다.

황해 병사 안숙(安橚)이 군대를 소집할 낌새를 보이자 홍경래는 황급히 다시

출발했다.

밥은 사람만 모자란 게 아니었다. 마초가 더 문제였다. 말은 길가에 난 풀을

뜯어 먹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행상 출신 채수영(蔡壽永)의 제안은 홍경래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그나마 군사에 대해서 좀 아는 김사룡이 그를 꾸짖어 내쫓자 홍경래는 결단을

내렸다.

“부로인(俘擄人, 포로)들에게 주는 양식을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하라. 병사

들은 주려도 조금만 참으라고 해. 곧 경기에 들어서면 분명히 성상께서 치중

을 보내 주실 것이다.”

왕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홍경래는 이것이 김조순을 필두로 한 비변사가

길을 막은 탓이라고 여겼다. 한시바삐 고통받는 군왕을 구해 내어야 했다.

하지만 홍경래에게 끌려가는 포로들, 그러니까 홍득주 가솔을 비롯해 홍경래

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거나 홍경래에게 대놓고 적대한 유지들은 왕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며 공감할 생각이 없었다.

홍경래와 간부들은 삼시세끼 맛나게 처먹고 있는 것을 뻔히 아니 더욱 그랬

다. 얼마 안 있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라는 심정으로 반항하는 자들이 나

왔다. 결국 홍경래는 포로 대부분을 김유근 같은 진짜 ‘죄인’처럼 묶어서 끌

고 가야 했다.

홍득주와 그 가솔은 아직 홍경래가 시준을 제어할 패로 남겨두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런 학대를 받지는 않았다. 지유는 주린 배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던 중 지유는 가슴께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걸리적대는 감각을 느꼈다.

품에 손을 넣어 보자, 그간 정신이 없어서 지유조차도 몰랐던 – 그래서 빼앗

기지도 않았던 – 주머니가 하나 끌려 나왔다.

시준이 중국 가기 전에 주고 간 사금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쥔 지유의 손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번졌다. 눈물은 손을 타고 흐르

며 지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지유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제발, 나는 여기 있어. 어서 달려와 줘.’

그때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홍득주가 요란하게 밭은기침을 했다. 노구에 고

생이 심했으니 몸이 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크흠! 지유야. 내 말 잘 듣거라.”

“예?”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는 다 죽는다. 시준이 구해주러 올 수도 없어. 그 아이

가 돈은 많다마는 병사를 부릴 신분도 아니고, 홍경래가 근왕군일 턱이 없으

니 서울 가면 그대로 토벌당할 뿐이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도…… 도망치자구요?”

홍득주는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비밀 유지 때문이라기보

다는 고통과 부끄러움 때문에 그 목소리는 드문드문 끊어졌다.

“갈 길이 급한 모양이니…… 달아난다고 해서 구태여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그

걸 내게 주면 내가 잘 달래 보겠다. 어차피 탐욕으로 모인 무리들. 돈을 좀

쓰면…… 간단할 게다. 그리고 이대로면 배가 고파 걸을 수도 없으니 길양식도

좀 하고…….”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를 꽉 쥐었다.

작가의 말

1. 사소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아무래도 '대왕'이라는 표현을 다른 나라 왕;;; 에게 쓰기가 꺼림칙했던지, 대신 염라대왕을 '염라태수'라고도 많이 불렀습니다.

2. 나폴레옹 시기에 근대적 의미의 경찰이 성립되고, 이는 제2제국 시기에 다른 맥락으로 완성된다고 평가됩니다. 영국은 또 약간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죠. 뭐 좀 뒤이긴 하지만 아르센 뤼팽이라던가.. 아니면 (프랑스인은 아니지만)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같은 데에서 프랑스 경찰이 어떻게 일하는지 대강 맛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학문적 분석이 필요하신 분들은 노스웨스턴 대학의 형법 및 범죄학 저널(Journal of Criminal Law and Criminology  -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저널입니다)에 게재된 Howard C. Payne의 원고 <19세기 프랑스 근대경찰의 초기 개념(An Early Concept of the Modern Police State in Nineteenth Century France)>을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3. 상여 얘기 관련해서... 조선의 민간 조직은 대개 농사를 돕기 위한 품앗이 조직이나 상례를 돕기 위한 향도계 등에서 출발한 게 많습니다. 검계도 마찬가지고요. 조직이 필요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였습니다.

22. 일명경인(一鳴驚人)(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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