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22. 일명경인(一鳴驚人)(2)
등주(登州)는 당태종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지역이다. 지금 시대 등
주의 수군 수영은 산동의 북쪽과 발해만(渤海灣), 다시 말해 명·청 양조(兩
朝)의 사타구니와도 같은 급소를 관할한다.
그리고 로드 암허스트의 습격은 그 급소를 직격으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아우스터리츠 같은 전열함 앞에서는 망설여진다고 해도, 현재 바다의 전장에
서 주력 전투함은 전열함이 아니라 프리깃이다.
그중에서도 아르미드급 프리깃 알세스트는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군함
이자 영국 해군의 자랑이다(원래 프랑스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부심을 더할
지언정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 족적이란 다른 게 아니다. 알세스트는 원 역사에서 1811년 나폴레옹이 발
칸 반도로 실어 나르는 대포 수송선을 요격하는 대공을 세운다. 이는 나폴레
옹이 침공 방향을 그의 무덤, 러시아로 바꾸는 계기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공을 세우는 함선인 만큼, 알세스트는 여전히 건재한 그녀의 18파운드
롱 건으로 불꽃과 같은 외침을 토했다. 마치 지친 영국 수병들을 꾸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꽝!
물론 아무리 영국 해군이라도 초탄 명중은 좀 과한 바람이다. 실제로 맞는 포
탄은 한 개도 없었다. 열 개 가까이 되는 물보라가 청군 함대의 주변에서 탄
식하듯 끓어올랐다.
그러나 청군은 정신적으로 대포를 맞은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총병관
황상신(黃象新)은 부채와 모자를 떨어뜨린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황상신은 절강성의 수사총병관(水師總兵官)이었다가 직무를 태만히 한 죄로
강등당하였지만, 일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다시 등주 해진(海陣)의 총병관으로
복귀한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조선으로 밀항하는 어선이나 해적선을 조금 묵인해 주면 돈깨나 모
아 중앙 정계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 알짜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자리지만 사
람이 욕심이 과하면 좋은 꼴 못 보는 법이다.
그런 소박하고 정직한 청운의 꿈을 품은 벼슬아치 황상신에게 이러한 사태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뭐냐, 저 해적놈들은 대체 뭐냔 말이야!”
“기, 기치를 보니 해적이 아니라 영길리국의 배 같사오이다!”
사실 해적과 영국은 이음동의어인 만큼 별로 상황 타개에 도움을 주는 설명은
아니었다. 황상신 역시 누가 쏘는 대포이건 맞으면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간단
한 진리를 재빨리 깨닫고 함대를 어떻게든 정렬시키려 했다.
강건성세에 이 등주의 수군은 크게 강화되었다. 여진족이 수전을 잘 모른다
하여도 청은 중국이다.
수십 척에 달하는 전함과 수군이 이곳을 지속적으로 순찰하며 빈틈없는 경계
를 펼친다. 다만 너무 의욕이 넘치다 보니 조선까지 가서 몰래 고기잡이하다
가 황해도에 떠밀려가거나 조선 수군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는 있다.
물경 50척의 최신 전선이 배치되어 있다고 호언하는 게 바로 등주 수군이었
다. 지금 황상신의 휘하에 있는 배만 해도 스무 척. 지금 까닭도 없이 내습한
영길리군의 네 배는 되는 숫자다.
허나 근육질의 쥐가 네 마리 있다 한들 비루먹은 고양이 한 마리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첫 명중탄은 알세스트의 휘하에 소속된 슬루프함 HMS 킹피셔(Kingfisher)에서
나왔다. 18파운드 함포에서 발사된 이중 포환이 널(batten)을 부러뜨리고 돛
을 찢었다.
돛이 많지 않은 중국식 정크선은 승조 인원의 절약이라는 이점과 함께 쉽사리
항행 수단을 잃어버린다는 단점도 있었다.
삭구가 날아가고 밧줄이 춤을 추며 사람과 널빤지가 아울러 뒤집혔다. 당대
동아시아에서 절찬리 사용되던 원거리 무기인 석회 가루가 통과 함께 터져 나
가자, 청 수군은 자기 눈을 잡아뜯을 듯 움켜 비비고 내장을 토해낼 듯이 기
침하며 나뒹굴었다.
“쏴! 우리도 쏘라는 말이야!”
“너, 너무 멉니다!”
가까이 간다 해도 사실 쏠 수 있는 것은 조총이나 활 정도다. 황상신 함대는
현재 화약과 포환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찰 시 마주치는 최
대의 위협은 잠상이나 도망자 정도인데, 그런 놈들 상대로 대포를 쏠 것도 아
니지 않은가.
당대 청의 수군은 기술이나 장비 면에서 명대에 비해 크게 진보하지 않았다.
복선(福船)은 세계 일주도 충분히 가능할 만큼 우수한 항해 능력을 가졌으나
전투 능력, 특히 포격전 능력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킹피셔의 함장 조지 시모어(George Seymour)가 유쾌하게 외쳤다.
“좋아, 좋아! 과연 물총새(Kingfisher)로군!”
영국 해군이니만큼, 여기에서 해병대의 도선 건의가 나온 것도 당연하다. 하
지만 시모어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제독의 지휘 방침은 중국 해군의 파괴를 통한 무력 시위지 나포나 상륙이 아
니다. 게다가 저따위 뗏목 같은 배를 빼앗아 봐야 뭘 하겠어? 적어도 프랑스
해군의 군함 정도 되지 않으면 남는 장사가 아니야.”
“그럼 계속 이대로 포격을 지속할까요?”
“물론이지. 있는 대로 쏴 버려. 자네는 내려가서 포수들 엉덩이나 좀 걷어차
게. 깃털과 부싯돌이 다 닳아빠질 때까지 줄을 당기라고 해! 보급은 왐포아에
서 동인도 회사 놈들에게 뜯어오면 되니까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칼 뽑고 돌격하라고 하면 돌격 방향을 자기 배 함교로 설정할 태세 만반이던
영국군 역시, 그냥 마음 편하게 실사격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라는 자비로운
명령에 욕설만 퍼붓고 점화끈을 잡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 등주 해군의 배 20척 중 무사한 것은 4척뿐이었다. 7척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고 9척은 떠 있기만 했다 뿐 침몰한 배와 상태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대청국의 수군이 임무를 방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석회를 뿌
리거나 조총과 화살을 쏘고, 혹은 망가진 돛으로 접근하려 애쓰다가 기우뚱대
며 옆 배에 부딪쳤다.
실제로 영국 배에는 쇳조각 하나 닿지 않았다. 허나 여기저기 고함치며 내달
리고 땀 뻘뻘 흘리던 청군 자신들은 엄청나게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고
착각했다.
노력한 과정이 아름답다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또한 대인의 기풍이다.
게다가 로드 암허스트는 충분한 파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서신을
실은 보트 한 척을 떠내려 보낸 뒤 철수했다.
반 광란 상태였던 청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용전분투에 놀라 도망쳤다
고 해석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시끄럽게 굿 하면 귀신도 물러간다 하지 않는가. 이 시대로서는 꽤 많은 사람
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메커니즘이다. 발해만 방어 함대가 사실상 전
멸했다는 사소한 일에 신경 쓰면 대인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가경제에게는 상당히 각색된 보고가 올라가게 되었다.
<영길리국 수적(水賊)이 큰 배 다섯 척을 몰고 묘도(廟島, 현대의 산둥 옌타
이 시 미아오다오)를 지나 대고구(大沽口, 다구 포대)의 관문(關門) 바다로
들어와, 함부로 포를 쏘고 사람을 살상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병관 황상
진 이하 등주 수군이 순병(巡兵, 순찰) 중에 수적을 마주쳐, 총포를 우레처럼
쏘고 화살과 돌을 빗발처럼 날려대며 힘껏 분전하니 영길리 배는 곧 물러갔습
니다. …… 연해(沿海)의 백성들이 터럭 하나도 다친 것이 없고 재물을 잃은 바
도 없으니 어찌 천조의 홍복이며 천자의 위엄이 만방에 비친 일이라 하지 않
겠습니까?>
등주 함대가 입은 처참한 피해 얘기가 왜 없는지는 회사 생활을 조금만 해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 수 있다.
관찰한 데이터를 그대로 전달할 거면 중간 관리직은 필요가 없다. 목적에 맞
게 가공해서 정리해 보고하는 것이 관리의 임무다.
물론 그거야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청 조정의 관료들은 그 대상을 상당히
폭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천자는 천하의 주인이고 중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일은 중국의 ‘국내 사안’이다. 청 예부는 조선을 포함한
외국 사신단의 의례적 감사 표문도 자기 마음대로 수정해서 황제에게 올리곤
했다.
전복(기내)의 관문인 대고구를 지키는 수군이 그렇게 약체라는 말은 감히 아
뢸 수 없다.
어차피 영길리군은 물러갔는데 무엇 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는가. 모자란
것이 있으면 고북구제독 부찰복장안 같은 사람의 지휘하에 적당히 보충하거나
정비하면 된다.
그러므로 로드 암허스트가 영국군(동인도 회사군이지만) 장교 살해 사건의 책
임을 엄중히 묻는 서한 역시 당연히 중간에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런 무
도한 글을 황제에게 올리자는 멍청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광저우에 있던 온승혜 역시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무마하려고 하는 중이라,
영길리 군교 1명이 드잡이질 끝에 죽었다는 ‘사소한 사고’ 또한 아직 보고되
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가경제는 로드 암허스트가 전달하고자 했던 두 가지 중요한 요소, 즉
영국이 가지고 있는 명분과 힘 모두를 인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마음 편하게 격노할 수 있었다.
영국인을 다 몰살해도 모자랄 죄를 공정한 수사로 처리하려 하였더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대포를 쏜 것이다. 천조 수군에게 맥없이 패배해 물러날 정도의
도적 떼 수준밖에 안 되는 자들이 말이다.
“천지가 열린 뒤로 영길리 사람처럼 무도한 자들이 또 있었다는 말인가!”
말이야 천하에 더 옳을 수가 없는 말이지만 중간 과정이 틀린 것이 유감이었다.
그리고 잘못된 전제는 대개 잘못된 결론을 부른다.
가경제는 흠차대신 온승혜에게 황포에 있는 영길리인을 전부 체포하여 심문할
것을 명하였다. 천진 습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흠차대신의
판단하에 처형해도 된다는 엄청나게 강경한 명령도 함께였다.
하지만 영국 이전의 문제가 또 있었다. 아직 하남의 사교도가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명령은 장강 남북에 상당한 불안감을 불러왔다.
먼저, 지금 하남은 지역 전체가 사교도의 둥지 취급을 받아 무지스러운 학살
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광저우에 집결한 5만 군대가 영국인만 약탈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이다.
말이 쉽지, 5만 명은 단지 하루에 내놓는 대소변만으로도 광범위한 범위에 생
물학적 재앙을 발생시킬 수 있는 숫자다. 그들이 배고프고 탐욕스럽기까지 하
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가경제가 쓸데없이 위엄을 보이겠답시고 불필요하게 많은 군사를 동원하는 바
람에 그 넓고 부유한 양광이 아주 초토화될 지경이었다.
‘영길리 오랑캐와 내통한 간민들’이라는 간판만 있으면 범죄 허가증을 발급받
은 거나 마찬가지다. 방화, 살인, 약탈, 강간이 막 돋아나기 시작한 땅서리와
함께 두서없이 피어올랐다.
원래 중국은 남의 나라 코피 터뜨리려면 자기부터 각혈해야 하는 것이 역사적
전통이다. 강건성세의 선조들이 물려준 육군은 아직 강건했지만, 상대가 육지
에 있지 않았다는 한 가지 문제 때문에 중국에 일종의 자가 면역질환을 일으
키고 있었다.
한편 로드 암허스트가 천진을 치기로 결정한 것은 단지 기발한 작전을 실행하
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은 아니었다. 암허스트는 광저우 일대의 중국 해군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강남의 수군이 약해서는 아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 강남은 전통적으로
뱃사람의 고장이고 강남의 수군은 강북보다 훨씬 노련하다.
하지만 영국은 그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
암허스트는 포탄과 화약을 거의 소진하고 쾌속으로 남진하는 배에서 즐거운
듯이 펜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중국은 광둥 근해를 함대로 지킨 적이 없어. 그곳을 지킨 건 유럽과
안남의 함대야.”
강남 수군이 아무리 정예하다 한들 그건 강북보다는 좀 봐줄 만하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나라 망할 것 같은 파멸적 가성비에 경악한 청 정부는 강희제가 정
(鄭)씨 왕조를, 옹정제가 대두(大肚)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남해의 무법자들
에 대한 대응책을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선회시켰다.
바로 올해 홍기방(紅旗幇)의 악명 높은 여해적 정일수(鄭一嫂)를 사면하여 이
름뿐인 항복을 받은 것이 그 예다.
그 외에 응우옌 왕조를 지원하여 베트남 해군과 협조 관계를 수립하는 등 청
정부도 모자란 해군력을 외주로 보충하려 애를 많이 썼다. 당장 파워풀한 제
독 윌리엄 드루리마저도 궁여지책을 써야 했던 이유가 베트남 해군이다.
거기에서 유럽이 한 축을 담당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영국 해군은 1세기 전부터 광동, 복건의 관리들과 협조 – 물론 그 관리들은
‘통솔’이라고 표현했지만 – 하여 남해의 여러 군소 해적을 토벌했다. 해적은
당장 동인도 회사로서도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왐포아의 중국 연안 방어 책
임자들은 황제보다 영국군을 더 높이 평가한다.
프랑스를 통해 영국의 힘을 잘 아는 응우옌 왕조는 청에게 충분한 대가를 받
아내기 전까지 영국과 정면충돌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최
강 대해군이 아무 대가 없이 이뤄진 것도 아니어서 지금 그쪽도 빈발하는 민
란과 기울어진 국가재정 때문에 제 코가 석 자다.
결국 암허스트는 사실상 아무 방해 없이 왐포아에 배를 댈 수 있었다. 물론
왐포아 주변에 어정거리는 중국군은 함포 사격 몇 방으로 쫓아 버린 뒤였다.
흠차대신 온승혜는 턱이 배꼽까지 떨어질 정도로 놀라서 당장 저것들을 가라
앉히라고 악을 썼지만, 강남 사람들은 여진족 정부를 위해 한 몸 불사를 생각
이 추호도 없었다.
원 역사에서도 상하이는 베이징을 함락하고 황궁을 불사르러 가는 영국 군함
에 기꺼이 물자를 지원했다.
물론 지금의 청이 그때처럼 막장은 아니므로 차마 면전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광동의 관리들은 황제를 대리하는 흠차대신 앞에 공손하게 아뢰었다.
“주즙(舟楫, 선박)과 화포, 기기가 한가지로 모자라고 민생이 피폐하여 병사
들의 사기도 높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흠차대신께서 경병(京兵, 중앙군)을
몰아 진두에 서서 호령하신다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의분을 떨
쳐 뒤를 따를 것입니다.”
‘강남의 호걸들’이 암시하는 바는 명백했다.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사실상 도
적 떼의 지휘자 온승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알량한 인수 하나 믿고 까불었다가는 영길리에 맞서다 장렬하게 전
사한 것으로 처리되어 장강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온승혜는 왜 전대 황제
들이 강남을 좀 더 자주 순시하지 않았는지 원망했다.
존 레디 소령은 로드 암허스트의 경솔함을 원망했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남작의 멱살을 잡지 않은 채 말했다.
“모험적 외교를 위해 국왕 폐하의 신민과 재산을 위험에 빠뜨린 일은 어지간
한 대가로는 수습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 일을 의회에 알리겠습니다.”
“중국의 범죄를 왜 내가 책임져야 하지? 이건 그들이 누명을 씌운 일이잖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러 정당한 항의까지 하였네만.”
레디 소령은 한 번만 더 참았다. 이 자리의 유일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지
휘자의 턱뼈를 부숴버려 정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 꼴보다는 나을 것 같
아서였다.
“차라리 그 ‘항의’라도 안 하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이제 영국과 중국은 완전
히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왐포아의 2백 년 무역은 각하의 손에서 끝장났습니
다. 이제 중국의 차와 도자기를 어디에서 사들인다는 말입니까? 아시아가 어
둠의 땅이었던 17세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로드 암허스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입가를 실룩
거리다가,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런 세상에. 동인도 회사가 왜 계속 엉망이었는지 이제 알겠군. 정
말 그렇게 생각하나?”
레디 소령이 말없이 암허스트를 쏘아보는 동안에도 남작은 계속해서 웃었다.
눈물까지 흘리던 암허스트는 조금 후에야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중국의 차와 도자기를 어디서 사느냐고? 그야 중국이지, 어디긴 어디야. 바
보인가?”
레디 소령은 정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건 암허스트의 이어지는 말을
듣자 올라가지 못했다.
“자네들이 마치 정당하게 은을 주고 차와 도자기를 샀다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런 웃긴 소린 처음 들어 보겠군. 이봐. 어차피 그거 다 아편 팔아 얻는 밀
무역이었잖아. 아편을 팔아 은을 사고, 그 은으로 차와 도자기며 실크를 구입
한 것이었지. 내 말이 틀렸나?”
틀리지 않았다. 아편 판매를 결심한 계기 자체가 차와 도자기 살 은을 감당
못 해서였으니까. 결국 목적은 유럽에서 없어서 못 파는 중국의 물화이지 은
자체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밀무역이라고 해서 허공에서 거래하는 것은 아니다. 파크 선장이 시준
에게 말했듯이 최소한 책상과 의자 놓을 자리는 필요하다. 눈에 띄는 유럽인
이 중국에서 완전히 추방당한다면 무역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레디 소령이 그것을 지적하려 하자 암허스트는 손을 내저었다.
“아, 그래.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근거지가 중국 밖에 있으면 비용이 증대된
다는 거지? 하지만 제대로 계산해 보면 좀 다를걸. 중국 국영상사(공행)와 관
리들이 제멋대로 징수하는 비용이며 뇌물은 꼬박꼬박 장부에 적고 있나? 아닐
거 아냐. 이중장부에나 있을 테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중국 외 거점 신설은 탁상공론입니다. 아
마 지금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Bingley Raffles) 차관보의 계획을 믿고
계시나 본데, 리아우(Riau, 싱가포르 인근의 군도)는 중간 기착지로는 쓸만할
지 몰라도 본격적 무역지로는 쓰기 어려워요. 중국인들은 그 근방의 지리를
잘 모른단 말입니다.”
지금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그러니까 인도네시아는 본국 바타비아 공화국(네
덜란드)의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짜증 나는 괴뢰국을 합병하려는 시도 중이고 그것은 거의 성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인은 자바섬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영국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서 동남아시아의 전문가인 래플스는 해군의 협조를
얻어 프랑스에 저항하는 한편, 말라카를 대신할 새로운 근거지를 물색하는데
그것이 바로 싱가포르다.
아직은 네덜란드가 간판은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디까지나 만약을 상정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레디 소령과
영국 해군을 이끄는 암허스트 남작은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암허스트 남작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런 뻔한 핑계로 이 정도 일을 벌일 것 같나. 아직도 생각이 안 난다면 내
가 알려 주지. 중국인들이 많이 드나들 만큼 익숙하며 가깝고, 보기에 따라서
는 왐포아보다도 중국의 가장 부유한 지역에 훨씬 근접해 있으며, 완전히 적
법한 개항장이 이미 따로 있지 않나. 굳이 왐포아에 집착할 이유는 이제 없다
는 말이야. 아, 물론 자네 말대로 리아우를 확보하여 네덜란드인을 걱정할 필
요가 없다면 그곳과도 바다로 이어지겠지.”
레디 소령은 그곳이 어딘지 바로 알아챘다.
“노루섬! 조선 말씀이군요. 하지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에요.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개항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각하의 말씀에 따르면 조
선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노루섬을 봉쇄하려 한다면서요?”
“프랑스 놈들은 머나먼 자바와 안남 말고는 보급을 받을 데가 없어. 게다가
그들이 추가로 끌어올 수 있는 건 사략선 몇 척뿐이야. 하지만 우리는 다르
지. 의회에 고발하려면 거기에 내 서신도 추가로 첨부해 주게. 왕립 해군의
정예를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차출하여 프랑스 놈들의 봉쇄를 뚫는다.”
“그, 그런 짓을 했다가는 노루섬의 우리 회사 직원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윌리엄 암허스트는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었다.
사실 그 인질극을 자초한 게 암허스트다. 그러나 강경한 아시아 정부에 대해
더 강경하게 나감으로써 그러한 비난은 피해갈 수 있게 되었다. 암허스트는
레디 소령이 그것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인질범과 협상은 없다. 만약 조선이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노루섬
을 포함한 평안도 지방 전체는 개항장이 아니라 영국의 영토가 될 것이야.”
김조순은 절망했다.
평안 감사의 목을 내걸고 ‘보국충정(保國忠情)’, ‘난신토벌(亂臣討罰)’ 깃발
건 채 남으로 짓쳐들어오는 저 미친 도적 떼 무리는 실로 두려워하는 것이 없
었다.
압록강가에서 일부를 돌려보내기로 했던 하인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아니, 상당히 높은 가능성으로 김유근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임금을 오랑캐에게 팔아먹은 권신을 처벌’한다 외치고 있는 게 좋은
증거다.
왕은 왕비 김씨마저 사실상 유폐시킨 채 김조순의 목을 치라고 명할 기회만
노리는 태세였다. 어떻게 서도 상놈 반적들의 말만 믿고 공신을 처벌할 수 있
느냐며, 대간과 삼사 등 김조순의 오랜 지지세력인 청요가 목숨 걸고 막았기
에 아직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수경포도청을 통해 도성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어영대장마저 과거 금위장을 지냈던 이해우(李海愚)로 갈아치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푸셰에게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들은 이공은 권력이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진
리를 맹신하는 상태였다. 이해우는 원래 왕의 계파라고는 하기 힘들었지만 과
거 금위장으로서 왕과 인연이 깊은 데다 김조순에게 명분이 사라지는 것 같자
재빨리 줄을 바꾸었다.
서울 사람들 중 눈치 빠른 자들은 벌써 도성을 떠났다. 김조순이 안간힘을 다
해 붙들고 있는 훈련도감과 왕이 장악한 수경포도청 및 금위영은 벌써부터 곳
곳에서 부딪치며 내전 일보 직전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진(仕進, 출근)도 마다한 채 칭병하여 집에 틀어박힌 김조순의 관작은 이미
거두어졌다.
김조순도 이제 한 푼 가치도 없어진 관직은 신경 쓰지 않고 노론을 단합시킴
과 동시에 노비건 뭐건 인간이라면 있는 대로 끌어모으고 있느라 바빴다.
그 와중, 긴한 서신과 선물이 도착했다는 보고는 김조순을 짜증 나게 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모르느냐! 에에이, 아랫것들까지 이리도 물정을 모
르니 이 지경까지 된 것이겠지. 얘들아, 저놈을 흠씬 두들겨 내쫓아라! 앞으
로 내 명이 없으면 잡인은 일체 금하렷다!”
그러나 영안부원군 댁 집사의 판단력은 그리 모자라지 않았다.
자신을 예조 참판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라 밝혀 김조순을 잠깐 주춤하게 한
젊은 선비는 곧 그 점잖은 체모나 단정한 의관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꺼냈다.
투박해 보이는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그것은 한 마리의 수탉이었다.
이강회가 뚜껑을 벗기자, 갑자기 밝아진 세상 때문에 해가 떴다고 착각한 그
장닭은 다리가 묶인 상태에서도 자기 의무를 잊지 않고 고고성을 내질렀다.
작가의 말
1. 물총새는 정확한 다이빙으로 고기를 잡지요. 물론, 킹피셔는 당대 실존한 함선이며 알세스트의 휘하에서 프랑스와 싸운 경험도 있습니다. 조지 시모어 또한 (원 역사에서는 이때까지 복무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킹피셔의 함장이었죠. 황상신의 이력은 역사적 사실입니다만 북쪽 등주 수군으로 왔다는 건 창작입니다.
2. 800톤급 중국 복선 기영호는 실제로 19세기 중반 세계 일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이 기영은 당대의 권신이자 황족이며 2차 아편전쟁 때 책임을 추궁받아 자살한 기영(耆英)과 한자가 같은데, 기영호가 뉴욕과 런던에 입항했을 때는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 이름으로 배 이름을 지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 바타비아 공화국은 일전 나온 대로 이미 프랑스 혁명기에 괴뢰국이 되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장차 완전히 합병하기 위해 1806년 루이 나폴레옹을 왕으로 보냅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나폴레옹의 유럽 각국 통치 방식은 중국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이는 자기 이름을 네덜란드식으로 바꾸고 장관들에게 네덜란드어를 강제하며,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라고 하는 등 갑자기 네덜란드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짜증을 안겨줍니다. 아마 독립하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1811년 그냥 네덜란드를 합병해 버립니다. 이 여파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프랑스 영토가 되어 영국인들이 쫓겨나고, 저항 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남아시아의 다른 방향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점거한 곳이 싱가포르입니다. (이게 연속적으로 이어진 건 아니지만, 설명이 길어져서 생략하겠습니다.) 스탬포드는 말레이어를 능숙하게 하는 동남아 전문가로서 나폴레옹 이후 동남아 경영의 공으로 기사 작위도 받게 되죠.
4. 이해우는 홍경래의 난 당시 평안 병사로서, 사실 그 전 무관 커리어는 나쁘지 않았고 가문도 명문이었으나 어째 음서 출신은 어쩔 수 없었던지;;; 홍경래에게 연전연패하여 유배까지 갑니다. 뭐, 바로 복직해서 또 고위직 밟고 나중에는 군호까지 받으니 큰 벌은 아니었습니다.
5. 일명경인은 한 번 울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지만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이 3년간 니트질 하고 있던 것에 대해 순우곤이 닭에 빗대어 간언하자 그에 멋지게 대구 맞춰서 이제부터 내가 일이 뭔지 보여줄 테니 니들 좀 놀라보라고 했던 그 고사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놀라긴 했습니다. 부패 관리들을 적발해서 마구 삶아 죽였거든요.
22. 일명경인(一鳴驚人)(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