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73화 (73/284)
  • 73화

    23. 일명경인(一鳴驚人)(1)

    사행길에야 붐빈다 하여도 압록강 북안은 기본적으로 대규모 거주지가 아니

    다. 그러다 보니 평상시의 이쪽 동네는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보다는 사람 눈

    이 두려운 범죄자들에게 더 걸맞은 지역이다.

    물론 흉터투성이의 육식 동물 같은 마적단을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지만 돈을 벌고 싶다면 강도질은 상당히 불안정한 수단이다. 일단

    자기가 죽을 확률도 반은 된다는 게 제일 크다.

    알 카포네와 그 조직이 총탄과 주먹을 직접 써서 갈취한 모든 재산을 모아 봐

    도, 그가 세계 최초로 시작한 신선우유 배달 사업보다 더 수익성이 좋지는 못

    했다.

    그래서 이 근처에 도망쳐 살던 간민들도 평소에는 이런저런 비폭력적인 생업

    으로 먹고살았다. 그중 하나가 시준과 기랑처럼 불법 도강하려는 사람들을 실

    어 날라 주는 일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이 무허가 뱃사공들은 온갖 사정 가진 사람들을 다 봐

    왔다. 그래서 시준과 기랑에 대해서도 깊이 알려 들지는 않았다. 고객의 사생

    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이들의 직업 윤리였다.

    강도질에 그런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뱃사공 무리는 그 많은 돈을 단 두 애

    송이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서는 알 바 아니었다.

    시준이 만약 좀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조금 뒤에서 천천히 오고 있는 사신단

    을 언급함으로써 이들을 자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 권력과 정면 대치

    하는 것은 원래 범죄자가 가장 꺼리는 바이니까.

    그러나 시준은 의주로 돌아가서 할 일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이렇다 할 경고를 듣지 못한 뱃사공 일당은 시준에게 별다른 뒷배가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시준은 지금 누구 사정 봐 줄 기분이 아니었다.

    짐 그대로 놔두고 뛰어내려서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라는 요구에, 시준은 옆에

    있던 금불상을 휘두르는 것으로 답했다.

    과연 판첸 라마의 사절들이 판매한 금불상이라 그런지 거기 담긴 준엄한 법력

    은 도적놈의 머리에 똬리 튼 마구니를 일격에 분쇄해 버렸다.

    시준은 고함치지도, 웃지도 않았고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다. 그놈이 들고 있

    던 칼을 시준이 집어다가 물 흐르듯 옆 녀석의 목을 찔렀을 때는, 이미 기랑

    이 뒤쪽 녀석을 권총으로 쏘아버린 뒤였다.

    이제 한 놈 남았다. 혹시 시준이 북경에서 하던 것처럼 저놈도 어딘가를 터뜨

    려 배후를 불게 하고 싶은 것 아닐까 생각한 기랑이 빠르게 물었다.

    “살려?”

    시준도 빠르게 대답했다.

    “죽여.”

    탕!

    막 배에서 뛰어내리려던 녀석의 뒤통수가 박살 나며 그 자리에 엎어졌다.

    시준도 사람 죽는 꼴 많이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람이 급소를 맞아 일

    격에 살해당하면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는다. 누가 들었다 놓는 물건처럼 아

    래로 툭 퍼질 뿐이다.

    시준은 기랑을 힐끗 쳐다보았다. 기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가 묻지 않도록

    도적들의 옷을 조심해서 벗겨냈다. 그러고는 그 몸뚱이에 무거운 물건을 비끄

    러매기 시작했다.

    알몸이라고는 하나 둘 모두 신경쓰지는 않았다. 기랑이 그 정도로 성적 관념

    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시체들의 몰골은 외설

    적 어색함보다 병리학적 위협이 더 걱정되는 판이었다.

    기랑은 시준을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안 도와줘?”

    “아, 미안.”

    시준이 기랑을 쳐다본 것은 시체를 압록강 바닥으로 처박으라는 지시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랑이 책문에서 시준을 끌어안은 일은 조선 시대의 가치관으로 설명할 수 없

    는 행동이다. 시준은 ‘기랑 현대인설’을 3초 정도 생각하다가 집어치웠다.

    따라서 시준의 시선은 굳이 진부한 말로 표현한다면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

    어?’에 가깝다.

    하지만 기랑은 그저 언제나처럼 시준의 보좌 역할에 충실했다. 기랑은 괜히

    시준의 눈을 피하지도 않았고 손끝이 마주칠 때 화들짝 놀라지도 않았다. 그

    태연자약함은 시준이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었다.

    시준은 신호등 색깔을 잘못 해석했다가 개망신당한 수많은 사람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자신을 단속했다.

    ‘그래, 시준아. 네가 지금 뭐 하러 가고 있는지 잊었냐.’

    시준은 그때의 일을 잊기로 했다. 어차피 그리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지

    금 의식적으로 독하게 깎아내고 있는 시준의 마음 안에는 기랑에게까지 할애

    할 여분이 없다.

    시준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서비스 제공자가 사라지는 바람에 둘은 나머지 거리를 스스로 노 저어 건너야

    했다. 시준은 건너편에 도착하자 아까 그 금불상과 칼을 적절히 활용하여 배

    에 큼지막한 구멍을 냈다.

    증거는 완전히 사라졌다. 기랑은 가라앉는 배를 보다가 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서울로 가?”

    “아니. 지금 땅으로 쫓아가 봐야 소용없다.”

    시준의 생각에 홍경래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남진 중일 것이었다. 지금 홍경

    래는 호란 당시의 청과 비슷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하이패스 카드 같은 것이다.

    조선군은 진격하는 청군을 잠시도 멈추게 하지 못했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 게 확실했다. 물론 홍경래가 청 태종의 환생은 아니며 그가 거느린 군대도

    여진족 강병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교지가 있다.

    조선군은 잘해 봐야 묵인, 최악의 경우 홍경래에게 합류하는 형태로 해체되는

    중일 것이다. 시준은 만약 북경에서의 반란이 잘못되어서 청이 조선을 적대하

    는 사태가 일어났으면 텅 빈 평안도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준이 단신으로 남쪽 내려가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시준은 장사꾼으로서 협상의 철칙을 알고 있었다.

    여의치 않을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협상 테이블에는 내가 우위에 서기

    전까지는 나가면 안 된다.

    시준은 홍경래가 자신을 적대하기보다 회유하는 게 낫다고 판단될 만한 세력

    을 만들고 나서 본격적으로 홍경래와 접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 판단에는 미칠 듯한 조급증을 억누르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시준은

    입술을 깨물며 주문처럼 되뇌었다.

    “지유는 죽지 않을 거야. 장주님도. 본격적으로 중앙에서 세를 이루기 전에는

    그 근간이 되는 평안도를 무시할 수 없다. 부하들이 있으니까. 눈에 혈안이

    되어 자기편을 늘려야 하는 홍경래의 처지에서 선생님(정약용)을 비롯한 백탑

    파, 평안도 유지들, 그리고 나를 한꺼번에 적으로 만들 수는 없어.”

    기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랑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면?”

    “의주에 들렀다가 바로 용천부로 간다. 서둘러서 영길리국 사람들을 만나야 해.”

    시준은 북경에 있을 때 내려왔던 조정의 훈령을 잊지 않았다. 분명히 영길리

    국 대박이 내왕했다고 했다. 아마 개항파인 왕과 쇄국파 신하들 사이에 충돌

    이 있었을 터. 그리고 거의 곧바로 홍경래가 거병한 것을 보면 영국과 이번

    일은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아마 시준에게 나쁜 쪽으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컸다.

    왕이 제정신이라면 영국군을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를 하겠다는 생각까진 안

    하겠지만, 세력 구도로 보아 영국이 홍경래나 왕에게 반대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준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나라나 임금을 팔아먹는 정도는 ‘할 수 있는 일’ 중 아주 쉬운 것

    에 속했다.

    의주에 도달한 시준은 임상옥의 협조하에 깨강정이 된 근문소 유지들을 모아

    의주 부윤을 뵈러 갔다.

    유지들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시준 혼자 가면 또 천하다고 괄시할까

    봐 그런 것이었지만, 그런 배려까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워낙 정신이 없었던 의주 부윤 조흥진은 왜 사행길에서 멋대로 떨어져 너 혼

    자 왔느냐는 말도 하지 못했다.

    조흥진은 그저 바보처럼 놀라서 되물을 뿐이었다.

    “영길리국이라고?”

    “그렇습니다. 홍경래 그자는 예전부터 영길리국과 잠상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장주님께서는 그 증거를 모아 고변하려 하셨는데, 그러자 사정이 다급해

    진 홍경래가 장주님 댁에 쳐들어가 사람들을 납치하고 임금의 교서를 거짓으

    로 꾸며다가 도망친 것입니다. 만약 정말 인군의 명이라면 천하에 떳떳한 것

    인데, 무엇하러 그렇게 야반도주하듯 사달을 일으켰겠습니까?”

    실제로 만상은 그간 홍경래를 감시하며 쌓아 둔 자료를 가지고 있다. 홍경래

    군도 곡식과 재물에만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재산인 문서와 장부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시준은 그것을 고스란히 건져 올 수 있었다.

    “격문은 요란하였으나 무슨 수를 쓰든 500명의 군사가 도성을 범할 수는 없습

    니다. 그들이 믿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간 우의를 쌓아 온 영길리군

    입니다. 영길리국은 이제까지 쳐서 빼앗지 못함이 없고 싸워서 이기지 못함이

    없었지요. 그 위세를 빌리려는 겁니다.”

    조흥진은 이를 갈았다. 어쨌든 문서가 있는데 인정 안 할 수야 없다.

    “내가 밝지 못해 역적에게 속았구나! 그렇다면 당장 용천 부사에게 말을 보내

    어 영길리 놈들이라도 요절을……!”

    시준은 고개를 저었다.

    “영길리국 사람들이 장자도에 있는 것은 주상 전하께서 친히 약조하신 바인

    데, 방백이라 해도 임금의 명 없이 함부로 군을 내어 치는 일은 불가합니다.

    게다가 지금 영길리국의 대박은 강화도로 거의 다 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쳐도 죄인을 벌하는 통쾌함 이외에는 얻을 것이 없을 터입니다.”

    사실 지금은 강화도에 없지만, 그 일은 시준과 의주 부윤 둘 다 아직 알지 못

    했다. 시준은 자기 뒤에 꿇어앉아 있는 유지들을 의도적으로 돌아보고 다시

    부윤에게 말했다.

    “장자도는 장사하는 곳이니 저희 장사꾼들이 가 보겠습니다. 용천부의 상인들

    도 만상과 우애가 깊습니다. 부윤께서는 용천 부사에게 바칠 소개문 한 장만

    써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총명한 건 내 일찍부터 알았다만, 무슨 계책이 있느냐?”

    “예. 곡식과 고기며 야채, 술을 팔지 않으면 영길리국 사람들은 보름도 안 돼

    물러갈 겁니다. 군이 없으니 노략질도 할 수 없지요. 애초에 저들이 소위 ‘자

    유 무역’이라 한 바는 장사하고 싶은 사람이 장사하는 것인데 무얼 탄할 게

    있겠습니까? 이리된다면 사또께서는 화살 한 대 쓰지 않고 영길리 오랑캐를

    쫓아낸 공적이 있을 것이요, 잘 안 되어도 영길리국 사람들은 저희 장사치들

    만 욕할 것인바 아무 탈이 없습니다.”

    잘 되면 자기 공이고 안 되면 남의 탓이라니 공무원에게는 더 매력적일 수가

    없는 제안이다.

    게다가 이 경우 홍경래가 진짜 근왕군일 때도 면피를 할 수 있다. 조흥진은

    크게 솔깃하여 그대로 문서를 써 주었다.

    동헌을 나온 시준은 임상옥을 보고 일렀다.

    “부탁한 일은 잘 안 되었으나, 내 지금 그걸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이 사람의 재주가 모자란 탓일세. 벌충할 만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게.”

    임상옥은 민망해하며 설설 기었다. 그 말을 기대하고 있던 시준은 빠르게 지

    시했다.

    “곽산 사람 김창시, 가산 사람 이희저에게 제 서신을 전해 주십시오. 다행히

    그들이 홍경래를 뒤쫓아가지 않은 것을 보면 홍경래도 꽤나 외로운 처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든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 우리 편이라니? 홍경래는 근왕군이라 칭했는데 그럼 역적이 되자는 말인가?”

    임상옥이 당연한 의문을 제시하자 시준은 그를 일깨우듯 말했다.

    “저는 홍경래와 싸우자는 뜻에서 우리 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오이다.”

    “그러면?”

    “원래 모든 역적은 자기가 근왕군이라 칭하는 법입니다. 홍경래가 정말 근왕

    군인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홍경래가 역적이라면 싸워야겠으나, 근왕군이라

    면 싸울 필요가 없지요.”

    시준은 태연하게 새빨간 거짓말을 일삼았다. 시준은 홍경래가 신이 보낸 천상

    의 군단장이라 할지라도 모가지를 따 버리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을 셈이었다.

    “홍경래가 무엇 하러 서울 갔든 간에 서울에 간 건 확실하고, 그러면 어차피

    차후로도 평안도에서 장사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김창시, 이희저 같은 부호와

    끈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지금 황망할 터이니 도와준다

    고 얘기 잘 하면 금세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마침 홍경래 때문에 홍득주 관련한 여러 상업망이 깨져 나갔던 임상옥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홍경래와 같은 편이었던 송상의 영향권으로서 만상과는 좀 거리를 두고 있던

    이희저나, 만상과 사업은 같이했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강했던 김창시를 이 기

    회에 얻는다면 장기적인 이득이 된다.

    임상옥이 알아들은 것 같자 시준은 불안한 의주를 안정시키는 일도 함께 맡겼

    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하지만 지금 임상옥보다 나은 파트너가 없었다.

    임상옥도 기대에 부응했다. 임상옥은 엉망진창이 된 근문소를 수습하여 주재

    하고, 괜히 필요도 없는 잡초 뽑기나 제방 관리에 의주 소조직들을 동원했다.

    일상이 정상적으로 바쁘게 돌아간다는 착각을 임상옥이 만들어내는 동안, 시

    준은 대영 무역에 종사하는 소상들을 데리고 용천부로 향했다.

    용천부에는 아직도 무슨 일이 났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던 차형기와 홍

    총각이 있었다. 그들은 시준이 오자 맨발로 뛰어나가서 맞아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들려오는 소문이 다 흉흉하고 괴이한 것들뿐이라 함

    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네. 서장관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준은 정말로 짧게 설명했다. 너무 짧아서 그런지 두 사람은 잘 이해를 못

    한 것처럼 보였다. 차형기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면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장주님이 이제 홍경래 그 새끼에게 끌려가셨다고?”

    “예. 우리는 장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홍총각은 거세게 주먹을 내리쳤다. 개다리소반이 박살 나며 나뭇조각이 사방

    으로 튀었다.

    “좋아! 알아듣기 쉽군. 가자고!”

    “야, 총각이. 너 좀 찌그러져 있어. 방금 교지라는 말을 못 들었어? 임금님

    명일 수도 있잖아. 잘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아아니, 그럼 형님께서는 우리 먹여주고 거둬 주신 장주님을 배반하자는 말

    이우? 임금? 임금이 다 무어야. 매번 우리한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여름

    밤 악머구리처럼 왜각대각 시끄럽기만 했지 그놈의 임금이 뭐 곯은 닭알 하나

    라도 챙겨 준 적이 있어?”

    “저, 저 주둥이 하곤. 누가 그러자고 했나. 그걸 지금 서장관이 얘기하러 온

    거 아냐!”

    그들은 본래 좋게 말하면 홍득주의 무력 집단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주먹

    으로 밥 먹는 깡패들이라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클

    럽이 없어졌는데 기도가 혼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좀 머리 쓴다는 축인 차

    형기도 그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다.

    홍득주를 구하려면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일단 홍총각을 진정시킨

    시준이 말했다.

    “이제 제일 연장자이신 차 행수(차형기)께서 만상 도방들을 하나로 모아 주십

    시오. 지금까지 어른 노릇 하시던 장주님이 사라졌으므로 후계가 필요합니다.

    아마 나머지 일은 의주로 가시면 임 대방(임상옥)이 말씀드릴 겁니다만, 너무

    그자가 하자는 대로만 하지는 말고 적당히 주거니 받거니 하셔야 합니다. 무

    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만상 최고위인 홍득주의 자리라면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시준은 당연히 넙죽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차형기는 기겁하여 손사래를 쳤다.

    “잠깐. 왜 이리 급한가? 나는 원래 술 먹고 싸움박질하는 불효자 놈들을 다루

    는 데에는 자신이 있으나, 사실 장사는 그렇게 많이 해 보지 않았어. 이런저

    런 일 하느라 평안도 장사꾼 중에 원수진 녀석들도 꽤 있고. 장주님 뒷배 없

    이 내가 나서면 아마 뒷말이 많을 게야.”

    시준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차형기를 건너다보았다. 차형기가 말했다.

    “기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장주님은 이제 슬슬 뒷방으로 물러나고 계시던 중

    아니었던가. 그사이 우리 꼬마 서장관이……. 크흠. 시준 아우가 안살림하고 돈

    많이 벌어 온 거야 사람들이 전부 다 알지. 이제 나이도 웬만큼 찼으니 그 일

    은 자네가 맡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처럼 혼인도 안 한 어린아이의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응? 안 했나? 내가 용천부에 있으면서 들으니 지유랑 애까지 셋은 낳았다 하

    던데…….”

    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상황에 할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지, 차

    형기는 얼른 얼버무렸다.

    “내 말은, 아우가 장주님을 부친처럼 모셨을 뿐 아니라 이미 동네 사람들 다

    공공연하게 아는 사위라는 뜻이지. 따로 아들이 없으면 또 사위가 가산 물려

    받기도 하지 않는가. 높으신 분들 말하는 종통(宗統)입네 하는 것을 우리가

    왜 못 하겠어?”

    아직 시준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차형기는 급한 나머지 아무거나 끌어댔다.

    “그리고 요사이 점쟁이들이 중얼거리는 말로 정씨 성 가진 진인이 나타나면

    우리 살기가 좀 편해진다 하던데, 이봐, 총각이? 자네도 들었지?”

    홍경래 군단의 핵심 사상인 정감록은 비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널

    리 퍼질수록 좋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의 노력으로, 이제 평안도에서 정 진

    인 얘기 못 들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홍경래가 충신 되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물론 그만두었지만 그렇다고 한번 퍼

    진 신앙이 그렇게 쉽게 꺼지지는 않는다. 홍경래가 만들고 시준이 진흥시킨

    야학은 그것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래서 정감록은 평안도 판수와 무당의 표준 프로토콜 비슷하게 된 상태였다.

    과연 홍총각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거 들었지요. 마누라가 지금 밴 애 아들인지 딸인지 물으려고 만신(여

    자 무당)에게 갔다가 들어와서 나한테 일러줍디다. 그러고 보니 서장관도 정

    씨구려.”

    “그래! 바로 그거야. 나와 여기 총각이는 애들 끌고 시준 아우, 아니, 우리

    만상 대방을 따르겠네. 주먹 쓰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 주고, 머리와 혀는 대

    방 어른이 쓰시도록 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겠어.”

    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시준을 아기 때부터 본 차형기가 실제로 시준을 정 진인이라 믿어서 그

    런 말을 한 건 아니다.

    메시아는 본래 자기 고향에서는 잘 안 팔린다. 핵심 세일즈 포인트인 신비감

    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고향에서는 “뭐? 그 목수집 요셉네 아들이 그리

    스도?(웃음)“ 소리나 들어야 했다. 그래서 원 역사의 홍경래도 자기를 진인이

    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형기가 그런 말을 끌어대어서라도 시준을 만상 우두머리로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시준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정감록 얘긴 차치하고라도 ‘사실상의

    실세’와 ‘명실상부한 두령’은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다르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번에 응낙하면 시준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시준은 선위하겠다는 황제를 마주한 구석 제후의 기분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행수께서 고사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일단은 제 말을 들어 주시되, 대

    방 자리야 기필코 구명되실 장주님의 것이니 제가 아직은 감히 칭하지 않겠습

    니다. 이 얘긴 다음에 하고 지금은 저와 함께 영길리인들에게 가 주시죠. 그

    쪽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차형기는 자기가 생각할 필요 없다는 사실에 고무된 모양인지 즉시 찬성했다.

    당장 홍경래를 쫓아가자던 홍총각 역시 모든 게 정리됐다는 기분에 별다른 반

    론을 하지 않고 따라왔다.

    암허스트 남작이 함대를 데리고 조선을 협박하러 간 이후, 장자도의 동인도

    회사 인원은 크게 줄었다. 다들 눈치 보며 내뺀 탓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위험이 큰 만큼 이득도 크다는 진리를 신봉

    하는 자들이었다. 천성적 밀무역상으로 이제 의사이던 시절은 먼 추억거리밖

    에 안 되는 윌리엄 자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마침 아는 사람이 있던 것은 시준에게 행운이었다. 자딘은 시준을 살갑게 맞

    아 주었다.

    하지만 시준은 자딘을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시준은 뒤에 차형기와 홍총각

    두 떡대를 거느린 채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영국군은 조선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개항장 하나면 되었지,

    또 무엇이 얻고 싶어서 쿠데타 계획을 지원하는 거죠?”

    반은 넘겨짚은 말이었지만 자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동인도 회사의 뜻이 아니라 왕국 해군의 뜻이네. 그중에서도 솔직히 반

    은 저 미친 학살자 가문의 윌리엄, 그자의 독단이야. 우리는 진짜 장사 말고

    는 다른 뜻이 없었어. 자네도 알잖나. 장사꾼들에게 군사 분쟁은 최악의 불황

    이야.”

    “강화도에 배를 댄 건 수도에 군사를 진입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그건 아닐 거야. 범선으로는 강을 거스를 수 없고, 내가 알기로 그렇게 많은

    대군이 탄 것도 아니었거든. 조선 수도에도 성벽이 있다고 하던데? 장비 없이

    는 어렵지.”

    사실 한양도성은 전투용 요새라기보다 행정을 구획하는 담벼락에 가까운 물건

    이다. 높이도 하찮고 해자조차 제대로 된 게 없으니 전문 공성 장비까진 필요

    하지 않다.

    그러나 영국이 그것을 모른다면 함부로 시도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시준이 다른 가능성을 내밀었다.

    “조선 국왕이 만약 성문을 열어준다면 들어갈 수는 있겠죠?”

    자딘은 너무 직설적으로 진행되는 민감한 대화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친위 쿠데타 말인가?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아는 것을 전부 다 말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왕의 사병에게 가족을 잃

    은 평안도 사람들은 장자도가 홍경래군에게 협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

    니다. 미안하지만 막을 수 있다는 장담은 못 하겠군요. 영국인들은 지금 자신

    을 증명해야 합니다.”

    시준은 자기 개인적인 생각을 평안도 전 인구로 확대해서 협박했다. 자딘의

    밀무역단은 엄밀히 말해 하청업체일 뿐 동인도 회사 소속은 아니지만, 민중의

    습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위협은 그에게도 똑같이 작용했다.

    윌리엄 자딘은 자기 주먹 관절로 음악을 연주할 기세인 홍총각을 보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군. 항상 침착했던 자네가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

    니……. 알았어. 모두 말하지. 대신 조건이 있는데…….”

    “의주 상인 길드의 현재 최고 책임자로서, 장자도의 영국인들에 대해 식량 봉

    쇄와 직접 점령을 포함한 어떤 직, 간접적 폭행이나 도발 행위가 없을 것을

    맹세하죠. 빨리 말씀하시오.”

    거짓말이 아니었다. 윌리엄 자딘도 이제 의주 상계에 대해서 좀 알았기 때문

    에 차형기와 홍총각이 시준을 윗사람처럼 시위(侍位)하는 것을 보고 그 맹세

    를 믿었다.

    “좋아. 우선 친위 쿠데타 말인데, 왕이 성문을 열어준다 해도 지금은 수도에

    못 들어가. 지금 영국 함대가 강화도에 없거든.”

    “예? 거문도…… 가 아니고 어디 다른 곳을 타격하러 간 겁니까?”

    시준의 얄팍한 역사 지식으로는 거기밖에 생각이 안 났으나, 러시아가 동북아

    에 내려오지 않은 지금 영국이 그런 뻘짓을 할 이유는 없다.

    자딘은 좀 어색한 듯이 손가락을 비틀면서 입을 열었다.

    “음, 그래. 다른 곳이기는 하지. 하지만 조선은 아니야.”

    작가의 말

    1. '악머구리'는 참개구리를 말합니다. 여름 논 같은 데 보면 악머구리 끓듯 하다는 표현이 딱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2. 만신은 무당, 특히 (신내림을 받은) 여자 무당을 일컫는 말입니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초음파 검사 같은 게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아 성감별을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한반도의 무속은 대체로 북쪽은 강신무가 많고, 남쪽은 세습무(선대의 기술을 배워 영업하는 무당)가 많지요.

    22. 일명경인(一鳴驚人)(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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