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71화 (7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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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22. 홍경래의 난(2)







    의주 부윤 조흥진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나와 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오륙백

    명에 달하는 폭도가 텅 빈 홍득주의 집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 뒤였다.



    “이런 참사가 고금에 있었던가! 백주대낮에 큰 집 하나가 폐허가 되고 사람이

    여남은이나 죽다니!”



    조흥진은 홍득주가 사는 동리의 호장이며 군뢰, 아전들을 불러다가 질책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목소리로 증언할 뿐이었다.



    “홍경래 그자는 옥새가 찍힌 교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감히 어떻게 상

    감의 뜻에 반대하여 그들을 막아설 수 있사오리까?”



    김조순도 정확히는 모르는 홍경래와 왕의 결탁을 의주 부윤이 알 리 만무했

    다. 조흥진은 자연스럽게 향임 아니면 홍경래가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일개 지관 따위에게 교지가 웬 말이냐. 너희들이 그 혓바닥이 뽑히고 싶어서

    아무 소리나 나불대는구나. 에이! 더 들을 것 없다. 병방(兵房)에게 명하여

    토병과 군관들을 죄다 모아라!”



    그러나 조흥진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명령을 취소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의주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홍경래를 추격한다면 국경이 텅 비게 된다.


    거기까지 헤아림이 미치고 나자 조흥진은 일단 머리를 식혔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조흥진은 아랫사람들을 몰아대는 대신 아까 아전들이 입을

    모아 한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왕이 정말 그러한 명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면, 그 일은 바로 며칠 전 자기 아들을 보냈다는 김조순의 전갈이 도착했던

    일과 무관할 수가 없다.


    조흥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 영안부원군 댁 김 공자(김유근)는 어디 있느냐? 너희 중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느냐?”



    관속들이 서로 멍청히 얼굴만 쳐다보는 꼴은 조흥진을 미치게 했다. 이제 일

    개 백성의 집이 문제가 아니다. 만약 김유근이 이 사달에 휘말려서 해를 입었

    다면, 조흥진은 벼슬자리가 아니라 모가지를 걱정해야 한다.


    지금 시대에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말은 그저 생계가 끊긴다는 온화한 뜻이 아

    니다. 물리적으로 머리가 몸에서 분리될 위기에 처한 조흥진은 재빠르게 대응

    방책을 짜내었다.



    “우선 평양 감영, 그리고 철산과 가산, 운산에도 모조리 파발을 띄워라! 말이

    없다면 내 서신을 가지고 가서 역참에서 있는 대로 끌어내! 당장 일어서서 뛰

    어나가지 못할까!”



    그러나 홍경래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계획과 달리 아직 평안도 수령들은

    이 근왕군의 대의를 모른다. 그러므로 이 사고를 쳐놓고 남진하면 조흥진이

    어떤 식으로든 주변 영진(營鎭)에 연락하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홍경래는 형편없이 모자란 군세에도 불구하고 조흥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에

    얼마간의 병력을 나누어 둔 상태였다. 조흥진의 파발은 함흥 가는 차사나 다

    름없었다.



    다음 날, 귀소 본능에 따라 다시 의주부 동헌으로 돌아온 말 한 마리가 조흥

    진이 보낸 사자 대신 둘둘 말린 종이를 잔뜩 싣고 왔을 때 조흥진은 그 자리

    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시준의 과거 계획, 그러니까 홍경래의 조직에 홍득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침투시켜 반란을 와해한다는 계획에서 만상 임상옥은 중요한 역

    할을 할 예정이었다.


    시준이 중국 가면서 임상옥에게 특별히 부탁했던 것이 바로 홍경래의 감시와

    사전 차단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멋지게 실패했다.


    그럴 만한 사정은 있었다. 허나 그런 게 죄다 꼬박꼬박 참작될 정도로 인생이

    만만했으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운 곳이었을 터이다.


    만약 시준이 이 일을 알면 그가 맡겨 둔 막대한 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 게

    다가 중국 무역품이나 향후 밀무역 판로, 잘못하면 목숨까지 날아간다.


    그래서 임상옥은 미친 듯이 분노했다. 아마도 의주 부윤 조흥진만이 지금의

    임상옥과 공감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놈들이! 의주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그

    새끼들이 제멋대로 저지레를 쳐놓을 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이제 와서 뭘 어쩌

    자는 거야!”



    범죄 계획의 정밀함과 성공률은 반드시 비례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홍경래처

    럼 급작스럽고 조악한 방식으로 저지르는 사고가 막기는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임상옥은 팔을 확 휘둘러 탁자에 있는 모든 물건을 내팽개쳤다. 휘하의 행수

    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도 많은 문상을 거느리는 대방(大房)이

    었다.



    “당장 튀어나가서 애들 전부 모아!”


    “대, 대방. 설마 지금 오륙백 명이나 되는 미친놈들과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요?”



    그 ‘애들’을 담당하던 양시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 홍경래 휘하의 용맹한 무사였으나, 몇 년 전 미니에 탄에 팔을 맞고 시

    준의 마비산 야매 수술 1호 시험체가 된 다음 다시는 활을 당길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던 그 사람이다.


    그래서 그 후로는 홍경래군에서도 자연스럽게 떨려 나왔다. 그러고는 시준이

    권한 대로 임상옥 밑에 들어가 청바지 관련한 소소한 분쟁을 처리하고 있었는

    데, 갑자기 옛 주인이 난리를 일으켜 버린 것이다.



    임상옥은 헐떡이며 양시위를 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과 생

    각이 뒤엉켰다.


    당연히 십 년이나 반란만 준비한 것들하고 싸울 수는 없다. 지금 애들 모으라

    고 하는 이유는 일단 용천부의 만상 민병대에게 연락하고, 근문소를 장악하여

    수령들과의 소통 체계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홍경래가 분탕질 치고 간 의주 홍가장(洪家莊) 근처에는 시체와 폐허만이 남

    았다. 뒷수습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보고서 써야 하는 수령은 남은 만상들을 족칠 것이요, 그 사태를 깔끔

    하게 막으려면 홍경래를 쫓아가는 것보다 의주를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차분히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만 봐도

    임상옥이 입은 손해는 엄청나다. 홍경래가 뻑적지근하게 쳐놓은 분탕질은 임

    상옥의 그물 같은 상업 유통망 상당 부분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했다.


    임상옥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질렀다.



    “내가 너보다는 똑똑하니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어서 바삐 달음박질치지

    못하겠느냐, 이놈들!”



    행수들은 황급히 흩어졌다. 혼자 남은 임상옥은 신음을 흘렸다. 대체 돌아온

    시준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준과 임상옥의 연은 스승 정약용보다도 오래됐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콧물

    이나 마실 나이부터 시준에게는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그 재주는 상재만이 아니었다. 같은 장사치였기에, 임상옥은 시준이 스승 앞

    에서는 단정히 글 읽으면서 뒤로는 얼마나 많은 인간을 묻어버렸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한 동네 사람인 만큼 지유가 시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잘 알았다.



    임상옥은 정말 시준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차형기나 홍총각 같은 구

    체적 위협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임상옥은 시준이 필요하

    다면 기꺼이 발휘할 수 있는 잔혹함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임상옥은 자신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격문이 들어왔다. 염병과 학질이 하루에 열 번씩 갈마들어

    가지고 사지가 덜덜 뒤틀리며 끔찍하게 뒈져 마땅한 홍경래 놈의 오만방자한

    문서였다.


    격문은 급히 오가는 사람들의 바람에 밀려 아직도 살랑살랑 떠다니고 있었다.

    임상옥은 그 격문에 혹시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것

    을 집어 들어 다시 읽었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

    (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보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학식과 관등(官等)이며 문물이 한

    가지로 발전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

    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


    그러나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유령(幼齡)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광휘를 가지셔

    서 이 사정을 밝게 헤아리셨다. 임금께서 개국공신 조준과 호란 때의 정 장군

    (정봉수)을 잊지 않으셨으므로, 서도 사람을 아끼시고 옳지 않은 학대와 균등

    하지 못한 뜻을 일찍이 철폐하고자 하셨다.


    그런데 권신들이 간악한 술수를 부려, 마치 구름이 해를 가리듯 임금의 성총

    을 막았다. 이 때문에 어진 하늘조차 재앙을 내려 눈보라에 번개가 겹쳐 치고

    땅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삿된 별이 떨어지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한가지로

    원통해하며 김조순·이시수 등의 생살을 씹고자 했다.


    ……


    구중궁궐에서 핍박당하던 성상께서는 끝내 나라를 구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셨다. 악적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지난날 옥 허리띠에 뜻을 숨겨 막부

    (幕府, 홍경래군)에 간곡히 교시하신 그 뜻은 바로 손가락을 깨물어 쓰신 혈

    서 한 획마다 붉게 아롱져 있다. 이를 읽고 눈물이 턱밑까지 흐르지 않는 자

    에게 어찌 충의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수령과 이속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우리는 다만 도성으로 진격하여

    역적들의 목을 베려 하므로 이는 곧 위로는 군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는 뜻이다. 나와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의군을 영접한다면 인민의 목

    숨과 재산에는 티끌만 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어리석게도 인군의 명에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오천으로 밟아 무찔

    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시준은 격문을 구기며 쌍욕을 내뱉었다.



    “이 개새끼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그 철부지 중2병 새끼가 혈서?

    구국의 결단? 염병을 하고 자빠졌네! 대체 왜 이 미친놈이 왕당파가 된 거야?”



    홍경래의 격문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건 말 그대로 사방이었는데, 지금

    책문에 와 있던 시준마저 임상옥이 비밀히 보낸 밀수상 편에 그것을 받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수상은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시준에게 대가를 받자마자 흔적도 없

    이 사라졌고, 그래서 혼자 남은 시준은 마음대로 왕과 홍경래를 싸잡아 욕할

    수 있었다.



    임상옥은 사실을 거의 정확히 전달했다. 시준의 이성적인 부분은 임상옥의 변

    명을 이해했다.


    원래 예상되던 추세와 달리 홍경래가 왕의 교지를 내세우며 거병했기 때문에

    반역자가 될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방법이 홍경래의 지난 행보

    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거칠고 급했기도 했다.


    그러나 시준의 나머지 부분 전부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유의 납치를

    막지 못한 임상옥을 용서하지 못했다.


    시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뜨겁고 눈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시준 역시 전혀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침착하자는 말만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보통 생각이 말로 나온다고 여기는 게 일반적이지만 거꾸로 말이 생각에 영향

    을 주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강인한 의지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신을 보

    유한 시준은 곧 어느 정도 자기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홍득주도 분명 홍경래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손쉽게 털려 버

    린 것은, 오히려 홍득주와 시준의 공작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원 역사처럼 단단하지 못한 조직은 홍경래가 노선을 바꾸자마자 해체되었으

    며, 해체되었기 때문에 그자들은 홍득주와 연결해 배반할 준비를 마칠 수 없었다.


    배신이란 신뢰를 전제로 하는 행위인데 그 신뢰가 너무 빨리 사라진 것이다.



    시준은 일전 홍경래와 대담할 때 분명 홍경래가 암시하였음에도 이게 ‘군주

    앞에 떳떳한’, 즉 왕명에 의한 봉기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단 5백 명만을 데리고 폭풍 같은 남진을 개시한 홍경래의 태도로

    보아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아니라면 시준이 격문을 받기도 전에 평안 감사

    에게 전멸당했을 테니까.



    실제로 격문에는 원 역사에는 있었던 ‘오대산에서 정 진인이 탄생했으니 지금

    이야말로 거사의 때’라는 이야기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왕이라는 더욱 현

    실적인 권위가 있는데 그깟 잡스러운 미신을 끌어댈 필요가 없다.


    물론 시준이 홍경래의 격문을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다. 허나 정감록 신앙은

    시준이 현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인으로서 종종 접해 본 얘기이기도 했다.

    홍경래 쪽 사람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홍경래가 그 일당의 핵심 사상이었던 정감록을 완전히 버렸다는 사실은, 시준

    으로 하여금 홍경래가 왕에게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약속받았으리라는 추론에

    도달하도록 해 주었다.



    동시에, 이는 시준의 방금 다짐대로 홍경래를 “내 손으로 죽여” 버리는 순간

    시준이 반역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정을 다 깔아뭉개듯이 튀어나온 시준의 혼잣말

    은 거의 즉각적이었다.



    “반역자? 해 주지. 반역이 아니라 더한 것도 해 주겠어.”



    시준은 곧바로 정약용을 찾아갔다. 그는 정약용에게 사정을 담백하게 말했다.

    먼저 일행을 앞질러 의주로 돌아가겠다는 시준의 말에 정약용은 잠깐 아연했

    다가 곧 달래듯이 말했다.



    “사행은 국무라. 서울에 도착해서 상께 앞뒤를 모두 아뢰어야 끝나는 것이다.

    이번 북경에서 있었던 일에 네가 깊이 관계하였으니 중간에 달아나는 것은 곧

    군사가 전쟁 중에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차피 네 말대로라면 홍경래

    는 서울로 갈 텐데, 너도 서울에 있어야 홍 장주 댁 식구들을 구명하여 보지

    않겠느냐?”



    시준은 당신 가족이 납치됐어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대꾸를 꾹 눌

    러 참았다. 조선 남자들은 속마음이야 어쨌건 처자식 아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사내의 수치로 여긴다. 무의미한 시간 낭비다.



    “선생님의 말씀이 이치에 닿습니다만, 제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

    다. 먼저 의주에서 사람을 모아 사정을 듣고, 사세가 허락한다면 곧바로 다시

    서울 가는 사신행에 합류하겠습니다.”



    정약용은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보기에

    시준은 ‘사람을 모아’ 홍경래군에 맞부딪쳐서라도 뜻한 바를 이룰 것 같았다.


    정약용이 다시 한 번 시준을 멈추어 보려 했을 때, 시준이 입을 열었다.



    “지금 선생님을 찾아뵌 것은 절연장(絶緣狀)을 써 주십사 부탁하기 위해서입

    니다. 오늘부로 저는 선생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저를 파문하여 주십시오.”



    정약용은 시준을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감정의 동조는 스승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약용은 그 순간 시준

    의 아버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약용은 소매를 떨쳤다.



    “내가 그까짓 종이 한 장으로 화를 피해 보려 하는 졸렬한 자로 보였더냐. 나

    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절연장을 써 주겠다. 너의 재주와 그릇은 본디

    작은 데에 있지 않았지. 길리시단의 교에 이르기를 천주는 사람에게 앙화를

    주어 그를 정철처럼 단련시킨다 하였다. 이제 스승은 생각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시준은 고개를 숙였다. 정약용이 일필휘지로 글을 써서 시준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러나 네가 일전에 말한 대로, 내가 네게 이름을 주었으니 나는 너의 아비

    이기도 하다. 사제의 연은 이제 끊어버렸지만 부자의 연은 자를 수 없는 법.

    홍경래 그자가 왕명을 칭한다면 조정의 신하를 업수이 여길 수는 없으리라.

    내가 급히 서울로 가서 구명에 나서겠다.”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아마 홍경래는 홍 장주의 재산을 탐내어 역

    모의 죄를 뒤집어씌웠을 터. 장주님을 돕는다면 반드시 선생님을 모함하는 자

    가 생길 것입니다.”


    “절연장까지 받아내고서 나를 걱정하는 게냐? 그 건방진 버릇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필요치 않다. 자, 무엇 하느냐. 어서 가라! 정사께는 네가 발병이 들

    어 뒤따라오라고 하였다 아뢰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튀어나오는 정약용의 대꾸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

    다. 시준도 더 질질 끌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약용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기랑이 역시 네가 데리고 가거라. 너를 부축할 사람이라고 일러둘 테

    니. 이제 조선이 코앞이니 나는 기랑이가 없어도 능히 혼자 걸을 수 있지만,

    기랑이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네게도 그 아이의 재주를 쓸 데가 많

    을 것이다.”



    시준은 눈을 크게 떴다. 하긴 정약용 정도 되는 사람의 눈썰미를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정약용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모른

    척 해왔다는 것은 실로 예상 밖이었다.


    정약용은 진짜 선비였다. 그는 제자와 아랫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시준은 일어선 자세 그대로 나가지 않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절을 올렸다. 제자로서 올리는 마지막 구

    배(九拜)였다.


    정약용 역시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빨리 가라는 재촉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앉

    은 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시준은 북경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좀 헐어 마두나 관리들에게 여마(餘馬, 사

    행길의 예비 말)를 사들인 다음 재산을 실었다.


    돈은 포기할 수 없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앞으로 시준이 할 일에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해질 것이 뻔했다.


    시준은 조선에 온 뒤 처음으로 담배를 물었다. 이 화급한 때에 대마를 피울

    수는 없기에 일반 궐련이긴 했다.



    “제기랄, 어쩌다가…….”



    임상옥의 말로는 홍득주 집에서 상한 사람은 없다고 하니 지유도 일단은 무사

    할 것이다. 시준은 가지각색 방향으로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을 떨쳐내려 머리

    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정약용은 기랑을 데려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준은 기랑을 앞으로의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맞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랑의 재능은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유용하기는 하다. 허나 그건 일

    개 상인으로 활동할 때 얘기고, 앞으로 수틀리면 반역자가 될지도 모르는 시

    준의 처지로서는 조금 얘기가 다르다.



    ‘만약 군대 단위로 부딪친다면 개인의 무용은 별로 의미가 없어.’



    의미는 없지만 위험은 큰일이다. 기랑은 어쩌면 난전 속에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친구 목숨만 소중하고 시준에게 여러 방식으로 동원될 다른 사람 목숨은

    하찮은가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시준은 그런 불합리한 생각을 떨치

    기가 힘들었다.



    시준은 정약용의 명에 따라 어리둥절 따라 나온 기랑에게 말했다.



    “기랑아. 은 백 냥을 갈라 주마.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살아라.”



    기랑은 아무 말 없이 시준을 바라보았다. 시준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

    다. 기랑이 홍득주 집에 사는 건 아니었으나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준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겨워졌다.



    “난 이제부터 의주로 갈 거야. 장사 일은 아마 이제 그만 둬야 할 것 같다.

    홍경래에게 끌려간 장주님과 식구들을 구해내야 해.”



    시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보따리를 정신없이 끌러

    내렸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 지금은 돈 쓸데가 많아 그것밖에 못 주지만 일 끝

    나면 널 꼭 다시 부르겠다. 그때까지 이 돈 쓰면서 어디 숨어 있어.”



    기랑은 고개를 기울였다. 둘만 있는 자리였기에 기랑은 굳이 목소리를 둔하게

    하지 않았으나, 원래 성격인지 말은 간결했다.



    “이제 나 필요 없어?”


    “그런 게 아니야. 이젠 진짜 위험해진단 말이야.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동네

    깡패나 때려눕히면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 전쟁터가 될지도 몰라.”



    설명하던 시준은 기랑이 떨어져 나갈 만한 대사를 떠올렸다.



    “나도 이제 잘 먹고 잘살던 시절 다 갔어. 진흙 질퍽질퍽 씹히는 입으로 헐떡

    대면서 해진 옷으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녀야 할 거고, 너한테 닭 튀

    겨 주는 호사는 꿈도 못 꿀 거야. 너한테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단 말이다.”



    시준은 이제부터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정말 정성스럽게 설

    명했다. 그러나 기랑은 동조의 신호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다.


    기랑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닭 필요 없어.”


    “뭐?”


    “돈도 필요 없어.”


    “야, 그게 무슨 소리…….”


    “같이 가. 나도 도와줄게.”



    시준은 잠시 동안 기랑을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기

    랑은 드물게도 그것을 잡아챘다.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니야. 나도 네가 지금부터 뭘 할지 알아. 하지만 나도

    돈이나 닭 때문에 너 따라다닌 거 아니란 말이야. 너는 돈 받으려고 홍 장주

    댁 식구들 구하러 가는 거야?”



    시준이 여태까지 들어 본 기랑의 말 중 가장 장문의 연설이었다. 기랑 자신조

    차도 좀 어색한 표정이었다.


    시준은 반성했다. 인간관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류를 그도 저질렀다. 대부분

    의 경우 상대방도 내가 아는 것만큼은 안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은 자

    주 잊어버린다.


    그의 친구는 필요에 의해 말을 안 하던 것이지 말을 못 하거나 머리가 모자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은 시준을 돕겠다고 이야기하고 있

    었다.


    기랑은 손을 내밀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서양인들 하는 거

    보고 배운 버릇인가 보다. 시준은 그 손을 잡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준은 마치 기랑과 비슷한 말투로 물었다.



    “왜?”



    기랑은 한참 동안 손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 대답을 듣는 것도 어색해

    졌다고 생각할 즈음, 기랑은 다른 한 손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두 팔로 시준을 감쌌다.



    기랑의 입이 시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왔다. 귓불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랑은 소모품처럼 총잡이로 여기저기 팔려가던 자신을 유일하게 생각해서 일

    상으로 꺼내 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여자인 것을 눈치챈 후에도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위기 때마다 막아 주며 계속 데리고 다닌 사람이 누구

    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시준의 귀에 희미하게 들린 말은 단 한 마디였다.



    “……그러고 싶어서.”



    작가의 말


    1. 당시 박지원이 한탄한 대로 조선 사람들이 말 다루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긴 사행길에 말이 많이 지쳐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비 말을 많이 가져갔죠.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좋은 밀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여마라고 핑계 대고 말을 한 사람에 몇 마리씩 데려와서 짐이라고 속이고 밀수품을 싣는 게 보통이었죠.




    22. 홍경래의 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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