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22. 홍경래의 난(1)
이공에게는 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근왕군을 학수고대하는 그의 바람과 달리
저 고풍스러운 의대조의 영광을 누린 홍경래는 지금 유비와 비슷한 처지에 빠
져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아직 서울로 진군하여 핍박받는 군주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임상옥이 시준에게 전해 주었던 송방 방화 및 대량살해 소식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홍경래는 그것이 효과적인 장악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홍경래의 생각이 맞았다.
오히려 홍경래 일당이 조급하게 드러내는 폭력성은 많은 상인들을 등 돌리게
했다. 거친 수단을 쓴다는 것은 사정이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평안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모금’한 끝에 홍경래 일당의 자금은 늘어났으나,
그 자금을 적재적소에 유통시키고 필요한 물건으로 바꿔 줘야 할 ‘사람’이 계
속해서 이탈하고 있었다.
이건 단지 홍경래 하는 짓이 아니꼬워서만은 아니다. 명분의 문제도 중요했다.
봉건 타파의 기치를 높이 든 반역자에서 갑자기 우국충정의 열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모두가 찬성할 거라고는 홍경래 자신조차 믿지 않았다.
허나 현실은 예상보다도 심각했다.
홍경래는 자기가 10년간 사람을 모은 기반이 되는 이념을 배신해 버렸다. 그
래서 홍경래군의 이탈은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부에서 이루어졌다. 홍경래군의
핵심부는 바로 조선 왕조 말살과 정 진인의 도래를 믿으며 모여든 사람들이었
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타격이었다. 홍경래는 이제 무리의 비중에서 믿을 만한 동지보다
이득 따라 오가는 뜨내기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좌절했다.
그리고 지금, 홍경래는 두 가지 소식 중에 어느 것에 더 무게를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홍경래가 당장 어디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야 할지 아니면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떨쳐 일어나야 할지가 결정되
기 때문에 쉬운 고민이 아니었다.
왕의 파발이 의주부에 내리는 어명으로 위장하여 은밀히 도착해, 홍경래에게
드디어 거병의 때가 왔음을 알린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마침 홍경래가
의주에 있었다는 행운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홍경래가 의주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러니까 본거지인 가산 다복
동의 실질적 지배자인 오랜 친구 이희저가 절연을 통보한 일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큰 타격이었다.
홍경래는 아직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핵심 인물인 우군칙을 보
고 물었다.
“정말 그 친구가 그런 웃기는 소리를 했다고?”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한 말도 웃기는 소리가 되지만, 뭐, 맞는 말이니 할
수 없지.”
우군칙도 해탈했는지 그렇게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우군칙이 이희저를 포섭한 방법은 유치한 점복이었다. 우군칙과 그 아내
는 쌍으로 점술가 행세를 하며 다녔는데, 이희저에게 ‘성씨에 삼수변(氵) 들
어간 사람과 친하면 좋다’고 밑밥을 뿌려 놓고 우연을 가장해서 홍경래와 접
촉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희저가 정말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씨(洪氏) 성 가진 자의 도
래는 실제로 이희저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이희저는 홍경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문제는 역사가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희저는 김창시나 임상옥이 대영 무
역으로 많은 수익을 내는 것을 지켜보며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처음의 높은 뜻도 잊고 권력에 붙어먹기로 작정한 홍경래가 이득마저 줄
수 없다면, 자기가 그 편을 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희저는 10년쯤 전 그곳을 살펴보러 갔던 임상옥을 통해 줄을 대었다. 그는
대영 무역의 중심인물들이 홍경래가 아니라 홍득주 쪽에 있음을 쉽게 파악했다.
그런데 홍득주의 성도 마찬가지로 홍씨다.
“내가 삼수변 가진 자를 잘못 보았구나!”
이희저는 거창하게 탄식하며 줄을 바꿔 서기로 결심했다. 중국 가 있는 시준
이 들었다면 왜 자기가 진작 생각하지 못했나 하고 땅을 칠 만큼 완벽한 핑계
였다.
홍경래는 물론 이희저가 미쳤는지 의심하며 왕의 밀지를 다시 내보여 설득했
다. 그러나 이희저는 만약 왕이 교지를 만민 앞에 당당하게 발한다면 신민으
로서 엎드려 받들겠노라고 대답했다. 되도 않는 거짓말 집어치우라는 뜻이었다.
결국 홍경래는 이희저가 평안도 금점에서 끌어모은 구사대 장정들과 자기 군
을 충돌시키느니 다복동에서 일단 핵심 주력을 이끌고 철수하는 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일종의 세객으로 우군칙을 다시 보내 보았으나, 자기가 해놓은 말이
있어 반박도 못하고 쫓겨나온 우군칙은 홍경래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의주에
온 참이었다.
홍경래는 빠르게 물었다.
“지금 동원할 수 있는 군세가 얼마지?”
“남정(男丁) 5백에 어중이떠중이 주먹잡이까지 끌어모아도 6백을 넘지 못할
걸세.”
원 역사에 비하면 반밖에 안 되는 초라한 병력이다. 훈련도감 하나만 해도 그
수의 열 배에 가깝다. 홍경래는 왕의 교서를 깃대에 내걸어 앞세운다 하더라
도 과연 그 병력차를 극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를 더 모을 수가 없다. 장사꾼은 대부분이 등을 돌렸거니와 홍경
래의 난에서 또 하나의 큰 축인 향임마저 이제는 도움이 안 됐다.
정 진인의 도래와 김조순 일당 타파도 중요하지만 홍경래의 난은 어디까지나
지역 차별이 중심 요인이었다. 따라서 지역에 기반한 향임층의 도움이 절대적
이었다.
양계의 행정은 중앙의 간섭에서 많이 벗어나 있으며 따라서 평안도와 함경도
는 아전들이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홍경래뿐만 아니라 북청의 민란
같은 경우도 향임이 주도했다.
허나 홍경래가 전국구 칼잡이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 명분이 흩어지고 말았다.
향임들은 자기 고향을 지키거나 자기 이권을 확대하는 데에는 참가할 것이지
만 서울로 진공하여 대의를 이루는 대에는 주저할 것이다.
“군량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것만 계산하면 한 달 정도.”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의 홍경래에게 김사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거병할 거라면 닥치는 대로 부잣집을 털어서 치중을 채우고 출발하는
건 어떻습니까? 뒷일이야 임금…… 아차, 위에서 막아 주시지 않겠소이까?”
홍경래는 진절머리가 났다. 김창시나 이희저 같은 사람이 떨어져나간 사실은
당장의 돈보다 더 큰 손해를 유발했다. 도대체 머리 굴러가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렇게 되면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앞의 관군과 뒤의
폭도를 한꺼번에 맞아 싸워야 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혹시 자네가 다음에 또
이 말 할지 몰라서 미리 말해 두는데 영길리군도 지금은 안 돼.”
지금 강화도의 영국군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그 영국을 끌어들여서 친위
쿠데타를 하면 이공은 왕이고 나발이고 당장 국적(國賊)이 되어 버리기 때문
이다. 왕은 그것을 밀지에 오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명시했다.
김사룡은 홍경래 속 터지는 것도 모르고 머리를 긁었다.
“그, 그렇군요. 이 사람의 생각이 짧았소이다.”
그 뒤 잠시 동안 홍경래와 우군칙은 김사룡을 내버려두고 자기들끼리의 심각
한 대화에 들어갔다. 아까의 일로 깎인 자기 평가를 올려 보고 싶었던 김사룡
은 눈치를 좀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의주 홍가네 집에 기이한 손이 들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디
정승 댁 아들이라던가요.”
이 사달의 3할은 홍득주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홍경래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김사룡의 설명을 들은 홍경래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복잡하게 꼬인 사
정을 타파할 열쇠가 거기 있을 것도 같아서였다.
홍득주는 안채에 김유근을 모셔 놓고 공손히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나이로는 홍득주가 거의 백부뻘이 되고, 김유근의 거인(擧人) 신분 역시 그
자체로는 그리 대단하다 하기 힘들다. 허나 그 가문은 홍득주가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지체가 아니었다.
“일전에 오셨을 때는 미처 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해 송구하오이다.”
“그때는 부친의 명으로 일부러 숨긴 것이니 집주인께서 개의할 바는 아니오.
금번에 이리 잘 대접해 주신 은혜 또한 글 배운 집안의 말예로서 어찌 잊으
리. 지금은 나랏일로 사세가 좀 급하나, 나중에 보답이 있을 것이오.”
홍득주는 김조순에게 신산귀모가 있다 하더니 자식은 잘 가르치지 못한 모양
이라고 생각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줄줄 사정을 늘어놓다니 말이다.
의주는 조선의 땅끝이다. 여기에 ‘급하게’ 왔다면 당연히 중국에 볼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준을 통해 정약용과 조정의 세태를 좀 얻어들은 홍득주는 그 볼일이
무엇인지도 몇 가지 가능성 내에서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홍득주는 김유근보다 똑똑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근은 자기 속내를 마구 드러냈다.
“어흠. 그러고 보니 전에 이 집에 왔을 때 의좋은 남매를 보았는데, 장주의
자제들이었던가요?”
그 광경이 남매로 보였다니 머릿속 회로 어딘가가 맛이 갔다고밖에 할 수 없
었지만, 둘 모두 홍득주의 양자녀뻘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홍득주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아, 그 두 아이 말씀이로군요. 피가 이어진 자식은 아니지만 옛날에 조실부
모하여 사정이 딱하게 됐기로 어릴 때부터 제가 기르고 있습니다.”
“과연 주인장의 높으신 덕은 내가 벌써 알았습니다. 사내자식 쪽은 상투를 보
아하니 장가를 든 것 같고, 계집아이는 혼처를 정해 놓으셨던가요?”
홍득주도 이쯤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괜히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홍득주는 김유근의 풋풋한 희망을 싹부터 꺾었다.
“그 사내아이의 이름은 정시준이라 하는데 예조 참판의 제자로서 그분께 관례
를 받아 헛상투를 튼 것입니다. 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서로를 아끼는
것이 백년해로한 부부와 같아서, 이 늙은이도 수양딸을 어디 보낼지 걱정하던
터에 그냥 그 아이에게 맡길까 하는 참이지요.”
김유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벌컥 화를 냈다.
“의붓자식도 제사 모시고 재산 갈라 주는 자식이요, 양부모 역시 친부모와 다
름없이 효를 다해 모셔야 하는 법으로 보면 수양남매라 하더라도 의리가 친남
매와 다름없을 터인데 어찌 통혼이 되겠소이까?”
아버지가 양자 들이라고 했을 때는 벼루 맞아가며 버티다가 자기 필요할 때만
다시 법도 꺼내는 꼴을 김조순이 봤으면 이번엔 바둑판을 던졌을지도 몰랐다.
“허허. 공자(公子)께서 예에 합치하지 않는 일을 보니 격해지신 듯합니다. 다
상놈들이 무식한 소치일까 하옵니다만, 시준은 내 호적에 든 아이가 아니라서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이미 딸년이 그 아이가 아니면 시집을 가
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는데, 이미 양기 쇠한 늙은이가 젊은것들의 정분을 어찌
말릴 수 있으리까.”
김유근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일단 혼인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거행
하거나 그만두는 일이 아니고 여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홍득주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쯤 말했으면 당장 그 시준인가 하는 녀
석을 잊어버리고 딸을 자기에게 내주어야 정상이다. 시골 부가옹(富家翁)으로
서 이보다 더한 출세의 기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마땅히 시비로라도 거두어 주십사 청해도 모자랄 판에 이미 혼처가 있다는 되
도 않는 핑계로 자기를 돌려보내려 드는 짓은 이미 화를 낼 단계를 넘어서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영안부원군의 아들씩이나 되는 자신이 매파도 없이 체통 뒤로하고 이리 직설
적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김유근은 자기 아버지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의주 부
호의 집 따위는 터도 안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자가 과연 모르는가 싶었다.
하지만 홍득주도 조선 사람이다. 그는 김유근의 마음속을 다 들여다본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직 합환주(合歡酒) 나눈 것도 아니니, 아비로서는 또 좋은 혼처가
있다면 마땅히 재고를 권해 볼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공자께서는 뭔가 나라의 긴한 일을 맡아 북쪽으로 가
시는 길이지요?”
김유근은 자기가 다 말해 놓고서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홍
득주는 사람 좋게 웃었다.
“시준은 지금 사신행을 따라 장사하러 북경에 가 있소이다. 그 아이도 내 자
식인데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파하기가 민망하니, 혹시 공자께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되신다면 높으신 학문으로 예법을 설하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시준이 감화되어 제 딸과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한다면야 따로 다른 집을 알아
봐야겠지요.”
그 말은 김유근에게 솔깃한 제안이었다. 영안부원군의 아들이 친히 예법을 설
파한다면 천하 상놈 시준일지라도 어찌 감명받지 않겠는가.
그 감동이 김유근의 희망처럼 지유를 포기하는 결과로 표현될지, 아니면 부고
전해 줄 사람 하나 없는 되땅 어딘가에서 칼 꽂혀 묻히는 쪽으로 표현될지는
홍득주도 몰랐지만 어느 쪽이든 관계는 없었다.
조용히만 처리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홍득주는 양심의 가책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시준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면 자기가 김유근을 떠넘긴 뜻을 잘 헤아
려서 ‘처리’해 줄 것이다.
김유근도 과연 묘계라고 감탄했다.
약간 수고를 들여 달래고 아버지 이름 살짝 내보이면 그 건방진 녀석도 알아
들으리라.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장주께서는 이 몸과 더불어 길이 복락을 누릴 것이오이다.”
“원 별말씀을.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의 흉한 쑥덕거림이
있을까 두려우니, 공자께서는 급히 국무를 수행하러 출발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축객령이었으나 김유근은 장인이 사위에게 그 정도쯤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유근은 그 말대로 다음 날, 날이 새기가 무섭게
홍득주 집을 나섰다.
이제 그는 공과 사를 멋지게 결합시킨 노련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북경으로
한시라도 빨리 도달해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왕의 폭정을 전하고, 동시에 시
준도 만나야 했다.
한가지로 도리를 바로세우는 일이었다.
공자는 능히 열국을 경영할 지혜와 도덕을 가지고 있었으나, 살아 있는 동안
에는 인정받지 못해 제자들을 데리고 대륙을 주유해야 했다.
김유근이야 알 도리 없지만 저 서양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공자는 상팔
자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 모두를 사랑하라 가르친 길리시단은 기둥에 못박
혀 잔혹하게 죽었고, 최후의 예언자라는 마씨(무함마드) 역시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러므로 김유근이 지금 겪는 고난도 좋게 보면 위대한 성취를 위한 장애물이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유근은 이 무도한 도적놈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읍! 으으읍!”
김사룡은 재갈 물린 채 버둥거리는 김유근을 기세 좋게 걷어찼다.
“시끄럽다, 이 역적의 씨앗 같으니! 네놈은 필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로되, 지
금은 쓸모가 있어 목을 붙여 두는 줄이나 알거라!”
분명 압록강까지는 순조로웠다. 조선에서 청으로 가는 사람이 꼭 사신들만 있
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의주 부윤이라고 해 봐야 김조순의 입김을 벗어날 수는
없다.
김유근은 아버지의 권력으로 가능한 모든 배려를 받으며 ‘몰래’ 압록강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허나 김유근이 편하게 강을 건널 채비를 마쳤다는 것은 곧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입이 많을수록 누설은 쉬워진다.
홍득주와 비슷한 방식으로 김유근의 목적을 짐작한 홍경래는 이미 뱃사공을
강바닥에 처박아버린 뒤 직접 나루터에서 진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김유근이 거드름 피우며 뱃사공에게 업히자마자 사공은 그를 배에 내팽개치고
꽁꽁 묶어놓았다.
김조순은 의주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안해 하인을 서너 명 딸려 주었
다. 허나 그들은 고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뒤에서 입 틀어막힌 채 비수에 의
해 목이 쩍 갈라져 쓰러졌다.
김사룡이 자랑스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무엇을 하면 되오리까?”
“병귀신속이라, 지금부터는 오로지 번개같이 움직여야 한다. 말은 적게 하고
대신 손과 발을 재게 놀려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야 부원군의 아들을 납치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홍경래는 빠
르게 지시했다.
“이자는 홍득주의 집에 묵었다. 내가 의주는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으나 이
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난폭한 짓은 하지 말고 그 일가붙이들을
데려오라. 우리의 진군에 함께한다면 어떤 해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얘기해.”
우군칙은 그것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득주의 신병을 확보
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홍득주를 포섭할 수 있다면 홍득주를 따르는 여러
상인들로 하여금 이 ‘의병’의 뒤를 치는 일을 재고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홍득주의 막대한 재산도 마찬가지다. 홍경래는 부잣집을 닥치는 대로
털었다가는 근거지인 평안도 인심의 이반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신중
하게’ 턴다면 얘기가 다르다.
마지막으로, 홍득주가 산 채로 같이 간다면 홍득주마저 홍경래의 높은 뜻에
동감하여 재산을 공출했다는 식으로 말을 만들 수도 있다.
즉시 사람들이 출발했다. 차형기와 홍총각이 요즘 영길리인 때문에 용천부에
주로 머물고 있어서 지금이 적기였다.
시준이 원래 김유근만 걱정하여 마련해 둔 오죽당 청년들도 이때쯤에는 낌새
를 눈치채고 집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절벽 끝에서 악에 받친 홍경래군
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공안 당국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역할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착각에 빠지나 말
그대로 즐거운 착각일 뿐이다.
치안이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자발적인 자제력에 의지한다. 그것이 공포
든 윤리든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자발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벌백계라는 말은 일견 엄혹하고 자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백
을 다 적발해 처벌할 수는 없다는 솔직한 인정이기도 하다.
뒷일 생각 안 하고 막나가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치안 체제는 인
류 역사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고 홍경래는 광기 어린 과단성 외에 다른 것도 가지고 있었다.
홍경래 일당이 내미는 왕의 이름에 군관들은 좋은 핑계 생겼다고 내심 안도하
며 모조리 도망간 뒤였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 오죽당 당원들은 모두 잔인하
게 살해당했다.
의주 한복판에서 갑자기 칼빛이 번뜩이고 피와 창자가 쏟아졌다. 아비규환이었다.
‘난폭한 짓’은 홍득주 가족에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 소란에 나와 본 홍득주
는 자기 집 앞에서 시체 여남은 구가 굴러다니는 끔찍한 광경에 혼절할 뻔했다.
“네놈들이 대관절 어디의 부랑패더냐! 너, 너는 군관 김사룡이 아니냐! 홍경
래 그놈이 드디어 흉한 마음을 먹었구나!”
김사룡이 칼을 든 채 으르렁댔다.
“흉한 건 역적과 잠통한 네놈의 집안이겠지. 감히 근왕병(勤王兵)에게 못 하
는 말이 없구나!”
“그, 근왕병이라고?”
홍득주는 왜 그간 쌓아 온 근문소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는지, 또 왜 자기를
돌봐 주기로 되어 있었던 토병 군관이며 이속들이 한 사람도 나서지 못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희가 지금 감히 임금의 뜻을 위조하여…….”
뻑!
김사룡이 칼자루로 턱 어름을 후려치자 늙은 홍득주는 그냥 나동그라지고 말
았다. 김사룡이 거칠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주둥이 함부로 놀리면 그땐 칼날이 날아갈 줄 알아라. 뭣들 하느
냐, 병아리 새끼 하나도 남기지 말라는 평서대원수의 엄명이다!”
“예!”
시준은 홍경래군의 규모를 많이 축소시켜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홍경래의 곁에 남은 자들은 상당한 정예였다. 그들은 장독
을 깨부수고 장지문을 박살내며 쌀자루와 궤짝을 거침없이 끌어내었다.
당연하지만, 사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아아악! 장주님, 살려주세요!”
지유가 자기를 붙들고 끌어내는 사내들에게 맞서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있
었다. 그리고 평생 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단련되는 이 시대 상민 여자의 ‘온
힘’이란 21세기의 영화 여주인공처럼 귀여운 앙탈 같은 게 아니다.
본격적인 드잡이질에 옷이 찢어지고 흙과 피가 튀었다. 되도록 폭행을 삼가라
는 홍경래의 명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지유야! 네 이놈들,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손댈 셈이냐!”
홍득주의 마지막 발악은 그를 둘러싸고 짓밟는 홍경래군에 의해 묻혔다. 홍득
주가 홍경래 견제에 사용해 왔던 수단 대부분은 조선의 체제 안쪽에 있던 것
이라, 모든 체제의 위에 있는 왕의 위명을 빌어 쓰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유가 보기보다 팔힘 좀 있다고 하나 그거야 같은 시대를 사는 남자들도 마
찬가지여서 지유도 결국 속절없이 끌려갔다. 홍득주의 가솔 수십 명은 ‘사소
한 언쟁 끝에 홍경래의 의병에 종군’하게 되었다.
순조 10년(1810년) 초겨울, 홍경래의 난은 기이한 방향으로 그 포성을 터뜨렸
다. 숫자가 훨씬 적고 시기가 일 년 빨랐을 뿐, 목적하는 바는 같았다. 나라
를 도탄에 빠뜨린 권신 김조순의 목이었다.
작가의 말
1. 홍경래가 원 역사에서 일으킨 반란군은 약 1~2천 명, 호왈 '철기 5천' 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숫자가 훨씬 줄어들었군요. 명분상 반란도 아니고..
2. 전근대 사람들은 귀족이 아닌 이상에야 일상이 육체노동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현대인보다 힘이 셌습니다. (싸워서 현대인을 이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신장과 체중이 개입되어 또 다른 얘기죠.) 구한말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일꾼들은 40킬로그램의 짐 정도는 쉽고 가볍게 옮겨 날랐다고 합니다.
22. 홍경래의 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