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21. 흔들리는 균형(2)
로드 암허스트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푸셰가 일깨워 준 대로 이 함대는 조선 국왕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온 것이
지 굳이 조선 침공을 위해 편성된 병력이 아니다. 푸셰의 말은 이치에 어긋나
지 않았다.
암허스트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싶은 귀족적 자아와 그냥 당장 눈앞에 있
는 프랑스 놈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 영국인의 자아 사이에서
힘겹게 투쟁했다.
결국 전자가 이긴 모양이다. 암허스트는 마른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
게 문지른 후 말했다.
“좋습니다. 눙치는 짓거리는 집어치웁시다. 그래, 조선 국왕의 비공식 사절이
라 이거지요. 조선 국왕은 왜 영국과 전쟁하는 프랑스인을 받아들인 겁니까?”
“외교에 중립은 항상 있어 왔던 일이잖나.”
“외교에는 힘만이 있습니다, 각하. 어물어물 넘어가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을 텐데요. 조선을 집어삼켜서 그 웃기는 편집증적 봉쇄령을 아시아에서
도 이루고자 하는 보나파르트의 뜻을 우리가 모를 것 같습니까?”
“내가 아는 조선의 금언 중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지. 유감
일세. 우리는 안남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 2백 년간 평화롭게 교류해
왔네. 어디도 집어삼키지 않았어. 자네는 지도도 볼 줄 모르는가? 얼음 위를
다닐 수 있는 배가 없고서야 조선에서 러시아로 어떻게 간다는 말이야. 그런
속셈은 거꾸로 자네들이 중국을 침범하려는 일에서 찾아야 마땅하겠지.”
남작은 돼지 어쩌고 하는 말을 무시했다. 화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
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조선 수도에 프랑스 병력이 있는 이유는?”
“이 늙은이와 수행원 몇 명을 병력이라고 칭하겠다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그
게 말장난 이외의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아까부터 프랑스가 조선에서
영국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듯이 얘기하는데,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
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 조선 국왕은 외교를 아는 자일세. 우리와도
아직 정식 수교는 거부하고 있어.”
사실 이공이 외교를 알아서가 아니라 다른 신하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
어서이기는 했지만 푸셰는 그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조선 국왕이 불법 아편 판매를 통해 무장세력을 육성하여 노루섬 주변을 장
악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프랑스의 지원, 혹은 조언으로 이
루어진 일입니까?”
“나는 지금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자네들이 괜히 누명을 씌운다고 생각했는데.
아편이야 자네들 전공이잖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각하. 오세앙급 전열함이라 하더라도 보급
없이 언제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 야만족 국가가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식량과 식수입니다. 아우스터리츠의 대포 중 몇 문이나 작동하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요?”
“좋지. 지금 아무 전투함도 없을 왐포아를 안남 자롱 황제의 해군이 습격하는
사태는 나 또한 꼭 보고 싶군.”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결국 푸셰는 깍지를 끼고
몸을 뒤로 젖혔다.
“아까부터 입 아프게 말했지만 나는 조선 왕국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게 아
냐. 좋아. 얘길 진행하지. 무장 세력이라고? 하지만 그건 자네도 알다시피 노
루섬을 어쩌려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아. 그런 거야 조선 정규군을 쓰면 돼.
하지만 조선왕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걸. 우리 프랑스인은 조선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네. 이미 안남에서 한 번 봤으니까.”
조제프 푸셰는 프랑스가 자롱 황제에게 기술을 지원하여 근대군을 건설한 사
례를 잘 알고 있었다.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강군을 보유하고 싶다는 욕망
은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괜히 유럽 개항장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그 말을 이해한 암허스트
남작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러면 역시 친위 쿠데타입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지금 조선의 권신은 왕의 장인이고, 대부분의 신하들은
젊은 왕 대신 그 권신을 따르고 있거든. 한 번쯤은 유혹을 느낄 만도 하지.”
“프랑스가 안남의 선례를 따르고 싶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근대군 육성보다
조선 국왕에게 병력을 빌려주는 게 가장 빠를 텐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따르고 싶은 건 정의야. 그리고 조선 사람들이 다
바보인 줄 아는가? 외국군의 힘을 빌려 신하들을 찍어누른 왕을 누가 섬기겠
나? 조선 국왕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푸셰는 거짓말을 했다. 이공이 그런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
게 멀리 앞날을 내다봐서가 아니라 그냥 프랑스인들에게 병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드 암허스트는 그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일전 레디 소령의
앞에서는 조선인이 그 정도의 시민 의식은 없을 거라고 무시했지만, 지금 프
랑스인‘만을’ 보낸 조선 국왕의 행동은 그 평가를 수정하게 했다.
암허스트 남작은 이제 조선을 맘대로 요리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없음을 인
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각하. 그리고 조선에서 전권을 대리할 수 있는
인사를 내보내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와 협상하겠습니다. 조선이 먼저 공격하
지 않는 한, 왕의 해군은 무력 행사를 금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글쎄, 난 조선 국왕에게 봉사하고 있지는 않아. 하지만 우정으로써 말을 전
달하는 정도라면 해 줄 수 있지. 자네들의 요구사항은 뭔가?”
끝까지 능청을 떠는 푸셰를 로드 암허스트는 강철같이 무시했다.
“즉각적인 정식 국교 수립, 수도를 포함한 최소한 2개 대도시의 추가 개항,
최혜국 대우. 그 경우 영국은 지금까지 조선이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국제
적 범죄를 묵인하고 프랑스가 시도했던 것처럼 조선에 군사적 보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두렵다면 중국에 대한 안보를 확립하기 위해 평안도 지
방을 영국 정부나 동인도 회사가 매입하는 안도 적극 환영입니다.”
‘프랑스가 시도’라는 말은 아우스터리츠 함대를 일컫는 게 아니다. 프랑스가
하지 않은 친위 쿠데타 시도를 영국이 도와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물
론, 국왕이 거부할 경우 쿠데타의 방향은 반대가 될 것이다.
푸셰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노릇은 또 처음 보는군! 지금 청이 그걸 용납할
거라고 보는가?”
“자칭(가경) 황제의 용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입
니다. 대답은?”
“난 대답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두지. 나의 추측이기는 하나, 아
마 조선 국왕은 협상의 선결 조건으로 함대의 철수를 요구하리라 짐작되네만?”
“그렇게 에둘러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조선의 요구 조건입니까? 좋
습니다. 어차피 왐포아에서 조선이야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
선이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는 즉시 철수하지요. 물론 프랑스 함대도 안남까지
철수하셔야 합니다.”
푸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그의 할 일은 끝났다.
있지도 않은 함대의 철수 약속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조선도 마음에도
없는 전권대사 파견 약속쯤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조선이 처리해야 할 문제다. 조선 국왕이 머리가 있다면
영국군이 왐포아로 철수한 사이에 청과 협상하여 영국을 압박해야 한다. 푸셰
는 이공이 그 정도 감각쯤이야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푸셰는 이공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조선의 신하들을 너무 과소평
가했다. 지중추원사 푸셰가 돌아와서 영국인들의 의사를 전하자, 조선 조정에
서는 거의 남한산성에 비견할 만한 거센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대노한 김조순의 목소리가 비변사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이 오랑캐놈들이 눈 아래 사람이 없기가 어찌 이리 심한가! 당장 삼남의 수
군을 올라오게 하라. 그 불랑국 놈(푸셰)의 목을 돛대에 내걸고 나아가, 전선
백 척이 깨어진다 한들 저들을 파해야 할 것이야!”
왕의 명을 받고 온 박윤수는 그것에 반박했다. 처음에는 밀무역 수사에 앞장
섰던 그도 어느새 왕을 따라 소위 ‘개항파’가 되어 있었다.
“그 무슨 흉한 말씀이시오이까. 이는 저들의 강대하고 급박한 대박을 임시로
멈추게 한 지중추원사의 권도요. 마땅히 적당한 말을 주어 돌려보내고 뒷일은
불랑국의 힘을 빌어 막아 보는 게 타당하오이다.”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무슨 외교니 조약이니 하는 도깨비 장난질
에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그래서 어쩌자는 셈인가. 일단 허튼소리로 영길리
국을 물러나게 하고 모른 척함으로써 신의를 잃고 서양 해적떼와 맞서 싸우자
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저들이 원하는 대로 이놈저놈 서양 나라 모두와 조약
을 맺어 다시 한 번 오랑캐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오게 만들자는 셈인가?”
항상 침착했던 김조순이 평정을 잃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기
로이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야. 사람을 뽑아 밤낮으로 책문을 향해 달리게 해
서 황제에게 이 변괴를 고해야 돼! 옛 조송의 일을 모르는가. 절조 없는 자를
하늘이 도울 것 같으냐는 말이야!”
이공은 푸셰를 보낼 때 청국에 알리지 않았다. 균형 중립 외교를 꿈꾸는 이공
으로서는 영길리인의 반응을 봐서 결정하겠다는 쪽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청에 알리고 청의 지시가 내려오면 조선 조정이 운신할 폭은 크게 좁아
지게 된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는바 소위 중립 외교라는 것은 성공한 사례가 적다. 중
립국은 대개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안전한 친구라는 인상보다는, 언제든지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라는 인상을 주로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김조순이 하고 싶은 말은 송나라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줄타기
잘못하다가 흑역사가 비석에 박제되어야 했던 조선 열성조의 이야기였다.
나라 간의 힘이 비등비등할 때는 좀 더 약자의 편을 들어 균형을 맞추는 영국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조선 수준에서 넘볼 역할이 아니었다.
강자를 잘 골라서, 철저하게 그쪽 편을 들어야 한다. 인조의 척추에 새겨진
교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조선왕과 그 근신, 그리고 김조순 일파가 의견 충돌
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옛날 여진족이 그토록 강성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누가 있겠소? 대명이 하
루아침에 무너지고 숭정 황제가 비단 끈에 목을 매달리라고 어느 선비가 점쳤
겠소이까? 주상 전하의 계책은 만리를 내다보신 것이오. 이제 바야흐로 서양
국이 대박을 몰고 오는 때를 당하여 그 시절과 같은 치욕은 다시 없어야 하오!”
“지금 청국에 그때 이자성과 같은 자가 어디 있는가. 황제들이 강남을 각자
대여섯 번씩이나 순시하여 호걸을 내리눌렀고, 만몽한(滿蒙漢) 팔기는 나라
곳곳에 주둔하여 감히 대들 자가 없소! 그런데 지금 서양국이 배가 좀 크다
한들, 닥닥 긁어모아 봐야 삼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세로 무얼 어쩐단 말이
오이까? 여진족 또한 숭정 연간 자기 힘으로는 끝내 산해관을 넘지 못했소이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가장 빠른 파발로 배달된 사신단의 치계가 도착했을 때,
양 진영은 서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생겼다고 확신했다.
양쪽이 워낙 다급한 탓에 공무의 품위도 벗어던진 논쟁이 벌어졌다.
“아까 이자성이 어쩌고 하였으나, 지금 바로 나오지 않았는가. 과연 되놈의
권세가 천년을 갈 턱이 있으려고! 만리 밖에서 성상의 뜻을 헤아린 예조 참판
(정약용)이 일한 바가 어떻소? 대국의 스승이라고 이른 바는 바로 이것이거
든! 이제 황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 자기 집도 못 지키는 자가 어딜
번리를 수호해 준다 나설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서양국과 당당히 교유할
때요!”
“한 치 깊이도 못 보는 자들 같으니. 그래, 도대체 장계를 읽기나 하였는가!
영길리국이 사교 무리에 총을 팔지 않았는가 말이야. 여기에서 영길리나 불랑
국과 함부로 친하려 들었다가는 의심이 단박에 우리나라로도 튀리라는 것쯤이
야 등불 보듯 밝은 이치 아닌가! 삼사가 하민까지 몰아 급히 자금성을 지킨
뜻이 무엇인가? 오히려 지금은 우리의 배신을 두려워하는 황제를 안심시켜야
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성상의 명도 없이 함부로 나선 예조 참판과 그 정시
준이라는 하민을 징계해야 하지 않겠소? 이건 중대한…….”
“아, 좀 가만히 있어! 눈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청 황제가 상을 줬는데 조선에서 처벌할 수는 없다.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만
빼고 나머지는 사신단의 독단 행동 자체를 논하기보다 그 행동에서 얻어지는
결과를 어떻게 자기편에 유리하게 활용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여진족 앞에 굽실대는 짓 집어치우고 서양과 손잡자는 근왕파는 영
길리국이 원하는 대로 정식 수교도 고려해 볼 만하다는 쪽이었다.
반면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김조순의 노론 시파는 아예 장자도의 영국인
도 쫓아내고 외교 질서를 원래대로 돌리자고 외치고 있었다.
바뀌는 새 시대의 선도자를 자임한 근왕파의 말은 얼핏 예리한 예지처럼 보이
기도 했으나, 엄밀히 따져서 지금은 김조순 일파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유럽은 청을 정면으로 박살 낼 수 없다. 박윤수 쪽 주장이 옳게 되는
때는 앞으로 30년쯤 후다. 게다가 효종 이후 세기 단위로 쌓아 온 대청 신뢰
자산을 내버리고 모험에 돌입하는 것도 비이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로 정리하면 간단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신하들이 동의하지 않는 명령을 강행하기는 힘들다. 이공이 한강 따라 직접
배 저어 내려가서 서신 전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감자 건으로 사보타
주가 뭔지 겪어 본 이공은 그러한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김조순의 엄포를 두려워한 강화 유수가 문서를 중간에 ‘컷’해 버리
는 개망신만 당할지도 모른다. 신하들이 임금 명령 마음에 안 들면 ‘신은 감
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배 째라며 드러눕는 사례가 400년간 한둘이
아니다.
결국 흐르느니 시간이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은 군신 모두의 마음이었다.
이공은 초조했다. 어리석은 신하들 때문에 자신의 절묘한 균형 외교가 박살
날 위기였다.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려 있는데 비변사에서는 쓸데없는 입씨름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국운을 백척간두에 올려놓은 바로 그 장본인이 하는 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보자면 꽤나 옳아 보이는 말이었다.
비밀히 입시해 있던 예조 판서 박윤수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은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실 때입니다.”
그 말이 옳았다. 지금 이공은 배짱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지중추원사는 만약 조선이 이대로 영길리국의 제안을 묵살한다면 강화도에 병
사가 상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사실 굳이 침공할 필요도 없다. 영길리국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강화
도 주변 물길을 틀어막아 조운을 봉쇄하기만 해도 한 달 안에 한성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왠지 조선에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이 아니다. 군을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고 조선에서 돈이라 함은 쌀인데, 이공이 아무리 외면
한다 한들 지금이 대흉년이라는 사실은 엄존했다.
이공은 신하들이 구휼 타령하며 쌀 풀어야 한다고 난리만 안 쳤어도 진작 영
길리국을 물리칠 함대를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일단 목전의 일을 해결하고, 방해되는 것들을 다
쓸어버린 다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여기 있는 사람은 박윤수뿐만이 아니었다. 이공은 자신이 새로 키울 풍양 조
씨의 척족, 판의금부사 한만유에게 비장한 지령을 내렸다.
“사태가 화급할 때는 무릇 권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판의금부사는
이 말을 알아듣겠는가?”
“신이 마땅히 분골쇄신하겠나이다.”
사관들이 입시해 있었기에 왕과 한만유는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기사관은 양사 소속이고, 청요가 모두 김조순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으니 이
도 곧 새어나갈 것이다.
이공은 신중하게 말했다.
“나는 지중추원사에게 다시 명하여 그들이 조운선을 납치하거나 파침시키지
않도록 다시 설유하라 이르겠다. 자칫 영길리국 사람들이 오해하여 포를 쏘고
병사를 내리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한다.”
이공은 나라 이끌기도 힘든데 신하들 뒤처리까지 자기가 해야 되는 이 상황을
더 견디기 힘들었다. 범용한 자들이 자신의 영도를 한마음으로 따라오리라는
기대까지는 안 했지만 최소한 헤살은 놓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이공은 한 나라의 왕인데도 교지를 무슨 보부상 사발통문 돌리듯이 몰
래 보내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처했다. 한강이 막혀 백성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서라 하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이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때가 왔다.
“그러는 동안, 부사는 곧 날랜 말을 뽑아 짐의 교지를 북쪽에 전하라.”
기록되어서는 안 될 경로를 통해 왕의 대화를 전달받은 김조순은 자기 집 안
채에서 이를 뿌득 갈았다.
“북쪽…… 관서로(關西路)다. 설마 또 의주인가?”
“예?”
김조순은 다시 벼루를 움켜잡았다가 간신히 놓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조순의 핵심 관계자들, 그러니까 노론 시파의 중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광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왕의 실정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의논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조순의 적장자 김유근이 자리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러나 여태 다른 심각한 얘기 할 때는 멍하니 방구석이나 쳐다보고 있다가 의
주 얘기 나오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되묻는 저 모습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김조순은 아들을 무시했다.
“마패 찬 기발이 북쪽으로 올라간다면 평안도요. 역시 그곳에 뭔가 있소. 우
리가 여쭈면 상께서는 장자도 때문에 보냈다고 하시겠지만, 그건 아닐 거요.
영길리국 놈들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오.”
왕이 평안도에 비밀히 길러 둔 친위군으로 서울을 제압하려 할 수 있다.
그 섬뜩한 암시에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김조순이 너무 오래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아 형식상 사직하고 그 뒤를 맡았던 김조순의
심복 이득제(李得濟)가 가슴을 쳤다.
“만약 서도의 불상놈들이 그 더러운 발을 경사에 들여놓았다가는 정예한 훈련
도감 군사에 의해 하나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오이다.”
이득제도 방계 왕족이자 명문 무가 출신으로서 능력이 없다고는 못 하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스럽고 가벼웠다. 정승의 몸으로 남의 눈을 피하느라 고생하
며 이 자리에 참석한 이시수가 날카롭게 주의를 주었다.
“생각을 하고 말하게. 만약 그 서도 놈들이 주상의 교지를 갖고 있다면 그래
도 그 정예한 군사가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서, 설마 그렇게까지야…….”
훈련도감은 분명 조선군 중에서는 최정예에 속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객관적으로도 정예군이었다면, 이공이나 김조순 모두 그
들을 써서 영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는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훈련도감 군사라고 해 봐야 저번처럼 검계 때려잡는
데에나 걸맞다. 영국군의 화력이나 평안도 군사의 권위를 마주한다면 깨강정
이 되어 흩어질 것이 분명했다.
오랜 기간 훈련대장이었던 김조순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
었다.
김조순은 내분이 일어나기 전에 말을 돌렸다.
“어쨌든 군주와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지[君臣有義] 않으면 이미 정도라 할
수 없는 법.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성상께서 황제에게 아뢰어 영
길리국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바르게 되돌릴 의지가 없으신 것 같으니 우리끼
리라도 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누군가 대벽을 각오하고 연경에 영길리국의 행
패를 알려야 하오.”
말은 그렇지만 여진족에게 왕을 팔아넘기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반대
하는 자는 없다. 자신들을 포함한 이 땅의 천만 목숨붙이의 무게와 암군 한
사람의 무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갑자기 서양 귀신에 씌인 것 같은 왕의 속셈은 뻔하다. 여기서도 청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종주국이 보호를 안 해줘서 어쩔 수
없이’ 핑계로 밀어붙일 생각이다.
그런데 만약 청이 정말 ‘보호’를 해주려고 하면 어쩔 셈인가?
이번 북경에서의 반란으로 영길리국을 결코 좋게 봐 줄 수 없는 가경 황제의
귀에 영길리가 조선마저 넘본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황제가 군사적 모험을 결
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벼랑 끝 외교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머저리 도박꾼들뿐이다. 가경제가 조선을
절대 잃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군을 압록강에 도하시킨다면 조선은 방법이
없다. 그 끝은, 오히려 지금까지 지켜 온 반독립도 유지하지 못하는 완전한
탄병(呑竝)이다.
김조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당연하게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 탓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들은 각자 조정의 고관으로서 잃을 게 많은 사람이
었다.
평소라면 김조순이 가진 방대한 인명록 안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었
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그 순간 이공과 김조순의 생각은 얄궂
게도 일치했다.
국가의 운명이 촌각을 다투는 순간이었다. 지금 바로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한 젊은이가 결연히 일어났을 때, 김조순은 차마 다시 벼루를 던질 수
가 없었다.
“아버님. 불초 소자를 의주에 보내주십시오. 기필코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작가의 말
1. 최혜국 대우는 11세기부터 그 연원을 찾는 설이 있습니다. 국가 간 차별적 대우를 기본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현대에는 국제 조약에서 대부분 전제하고 들어가는 개념이지만 이때는 상당히 큰 특권이었죠.
2. 쿠데타라는 말은 영국에서 프랑스어를 수입/번역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고 보입니다만 작중 시점 기준으로 최신 신조어에 속했습니다. 1802년, 영국의 신문에서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보도하면서 이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쓰였다고 합니다.
3. 관서로는 의주대로를 말합니다. 조선의 4개 대로 중 하나였죠. 연행로, 사행로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21. 흔들리는 균형(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