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66화 (66/284)

66화

20. 기사지변(己巳之變)(3)

이런 중대한 사안에서, 사절단의 단독 행동은 사죄를 면할 수 없는 중죄다.

그것이 전투라면 말할 것도 없다.

허나 지금은 아주 간단한 논리가 조선 사신단을 움직이게 했다. 왕은 자기들

을 죽일지 살릴지 불확실하지만, 만약 북경이 사교도에 의해 점령된다면 아마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싸우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려면 그 행동은 러시아

인과 함께 하는 편이 좋았다. ‘쟤도 같이 했는데요.’는 5살짜리 악동부터 50

살짜리 벼슬아치까지 모두에게 좋은 핑계다.

시준의 생각대로, 조선인과 달리 러시아인은 무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속국이지만 러시아는 대등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 봐야 의전용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으로 고위 관리들의 사냥 정도에나 걸맞아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총은 총이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했다. 대충 사정을 들은 남공철은 체면도 접어 두고 시준에

게 직접 물었다.

“네게 무슨 계교가 있느냐?”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만, 먼저 저들의 흉계를 알아야 합니다. 잠시

정사 앞에서 무례를 범하는 것을 용납하여 주십시오.”

죽이고 밥이고 가릴 처지가 아닌 남공철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준은

잠깐 밖으로 고개를 내민 뒤 예상하던 풍경을 발견했다.

“사, 살려 주세요!”

“되놈들에게 몸 바쳐서 이 도성에서 호의호식한 이 더러운 년, 이 어르신이

무생부모(無生父母)의 이름으로 정화해 주겠다! 가만히 있어!”

죽기는 싫지만 욕심은 채우고 싶은 천리교도 한 명이 일부러 행렬에서 낙오된

뒤, 상점을 깨부수고 그 집 딸을 끌어내 겁간하려 하고 있었다. 시준은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폭도 중에는 꼭 이런 놈들이 있지.’

시준은 다른 놈 없는 틈에 재빨리 달려가 그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놈은 누

군가 자기를 온건하게 말리려는 줄 알았는지 자신의 폭력성을 과시하며 험악

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시준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그놈의 팔꿈치 뒤쪽에 손

을 대었다. 그러고는 힘껏 눌렀다.

“끄아악!”

팔이 거꾸로 꺾이고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놈은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었다. 시준은 괴력을 발휘해 그를 들쳐 업고 다시 회동관으로 들어왔다.

고위 관리들이며 스승이 보는 데에서는 되도록 점잖게 행동하려 했으나 상황

이 급하니 어쩔 수 없다. 시준은 그놈을 내팽개친 뒤 한 손으로는 샅을 움켜

잡고 친절하게 물어보았다.

“너희 어디로 가?”

“악! 아악! 사람 죽네! 이 냄새나는 까오리[高麗] 놈들이 무엇 하는 짓이냐.

동지들! 여기…….”

그 순간 연시를 밟아 터뜨렸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나며 폭도의 입에서 휘파

람 비슷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시준이 다시 전혀 어조 변화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한 개 남았다. 너희 어디로 가?”

“서, 서, 서, 서화문이오! 다, 다른 패는 천안문과 동화문으로 갈라져서 담을

넘기로 했습죠! 사, 살려줍쇼!”

남공철과 정약용, 그리고 김정희며 기타 통관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사내

라는 것이다. 고위 조신들은 하나같이 얼어붙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체

면 차릴 것 없는 마두나 관속들은 자기 바지춤을 가리며 벌벌 떨었다.

기랑만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 꼴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시준은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암호.”

“예?”

다시 예의 그 소리가 나고 정약용은 눈을 감아버렸다. 자기가 제자를 잘못 가

르친 탓이 아닌가 싶었다.

“너희끼리 대기로 한 신호가 있을 거 아냐. 다음은 왼쪽 눈이다.”

“끄어억……. 끄윽……. 백포(白布)를 머리와 허리에 감고…….”

“백포? 이거?”

시준은 말하면서 그놈의 머리에 둘러진 흰 천을 잡아 벗겼다. 쓸 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뭐 있는데?”

“드, 득승(得勝)입니다. 그리 소리치면 우리 동지인 것으로 됩니다. 다, 다

말했습니다. 제, 제발 살려 주시면…….”

시준은 당장 필요한 건 다 들었다고 판단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영원

성에서부터 눈여겨보았던 마두 칠복이를 불렀다.

“어른들 보시기에 흉측스러우니 어디 조용한 데 끌고 가서 배후를 불게 한 뒤

‘풀어주시오’. 잘 되면 내 의주에서 크게 사례하겠소.”

이미 흉측의 끝을 보여주고 그 소릴 하니 좀 이상하긴 하였지만, 시준의 위명

을 이미 알고 있는 칠복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잘 보여 오죽당 간부쯤 되면 마두 따위보다 돈벌이 훨씬 쏠쏠하게 할

수 있다. 풀어주라는 말에 이상한 강세를 둔 시준의 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심지어 선비 중에도 없었다.

사신단 전체가 ‘네가 저거 키웠지’ 하는 눈으로 정약용을 바라보았기에 정약

용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이제 어쩔 셈이냐?”

시준은 수건에 손을 문질러 씻는 동안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어르신들께서는 정사의 분부를 받드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만 군교과 마두,

하인 중 몸 날랜 자들을 추려 주십시오. 제가 그들을 이끌고 아라사인과 함께

가서 조선국에 충의지사 있음을 널리 떨치겠습니다.”

정치적 고려를 해야 하는 고위 조신들에게는 먹히는 말이었으나 일개 노비까

지 중국을 되땅이라 깔보는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명분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준은 돌아서서 소리쳤다.

“팔심 좀 쓴다 하는 자들은 나서시오! 성공한다면 황제의 포상은 실로 어마어

마할 것이외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한 사람 앞에 은 닷 냥씩 주겠소.

여기 아마 평안도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의주 사람 정시준의 이름을 들어 보

았다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으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수염 허연 마두 한 명이 썩 나섰다.

“나는 장복이라 하는 종놈이오. 과거 금성위 대감의 삼종제 되시는 연암 선생

을 모시고 북경에 왔었소. 그때 자금성 구경도 얻어 하여 담장의 높이며 지리

도 좀 알지. 기운이야 젊었을 때만은 못하나 내가 길잡이를 하겠소.”

“좋소! 여기 늙은 사람조차 나섰는데 젊은이들은 무얼 하는가? 조선 사람이

황제의 궁을 대신 지켜 드린다면 그 얼마나 통쾌한 일이겠는가!”

그 말은 ‘만주족에게 눌린 것은 힘뿐’이라는 인식을 한족과 공유하던 조선인

들에게 유혹적인 것이었다. 곧 분위기와 포상 약속에 힘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0명쯤 되는 사람이 모였다. 시준은 기랑을

돌아보았다.

“너도 갈 거지?”

“나도 은 닷 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잘하면 너는 열 냥에다가 닭까지 얹어 주마.”

“좋아.”

선비들의 여러 근심과 걱정 속에서, 자금성을 지키러 분연히 떨쳐 일어선 백

성들의 ‘조선 충의부대’가 아라사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리고 정사 남공철은 시준의 재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준은 조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하지 않았다. 만약 시준이 그에 대해 한

마디라도 했다면 정사 남공철은 ‘건방진 장사꾼 애새끼’에 대해 화내는 사절

단 관리들을 통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공철은 시준이 알지만 말하지 않았던 지시를 자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자관은 종자 하나를 거느리고 북위문(北衛門)으로 가라. 보군통령(步軍統

領, 구문제독(九門提督)을 말한다) 길륜(吉綸)은 비록 됨됨이가 용렬하나 내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니 서신을 써 주겠다. 이 일을 고변하여야 한다.”

“저, 저 말입니까?”

김정희가 경악하자 남공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반도들은 자금성을 에워싸고 있어서 그쪽에는 사람이 없다. 상한들에게

뒤처질 셈인가. 어서 직무를 목숨 바쳐 수행하도록 하라!”

그러고는 그 외 여러 통관에게도 이것저것 명령하기 시작했다. 청 황조에 대

한 특별한 애착은 없지만, 나라의 운명이 걸렸을 수도 있는 대사를 상민들에

게 의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곧 선비들도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리교도들은 이미 자금성으로 몰려가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좀 떨어진 회동

관 근처는 이제 길거리가 난장판이 된 것만 제외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자금성으로 가던 시준은 그래서 평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역시 각하께서도 오셨군요.”

“꼭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던 것처럼 얘기하지 말게. 아무리 은퇴했어도 여기

에서 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시준의 옆에서 거대한 러시아 흑마를 타고 걷던 레온티 베니그센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 뒤로는 사나워 보이는 카자크인과 러시아 무관들이 칼과 총을 찬

채 수행 중이었다.

“그 독일 전역에서 보나파르트를 상대한 지독한 전장에 비하면 유람이나 다름

없지만 말이야. 보고로는 한 사오백 명 되는 모양인데, 중국의 경찰병력도 곧

증원을 올 테니 그까짓 것 흩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 자네는 어찌할 텐가?”

베니그센은 마치 시준이 기발한 작전을 내놓길 바라는 것 같았다. 시준은 그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가 없어도 황궁이 함락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적들이

건천궁(乾淸宮)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되면 주요 인사가 살아남거나 그렇지 않

거나에 관계없이 정치적 파장은 감당하기 힘듭니다.”

“과연 금지된 성(Cité interdite, 紫禁城)이라 이건가.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뭐, 좋아. 그럼 조금 늦기는 했지만 잠입해서 적을 기다릴 셈인가? 자네들은

중국인과 옷이 비슷하니 그러기도 쉽겠군.”

베니그센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준도 이 노장이 매력적인 대화 상대라고 느꼈다.

“더 설명할 필요 없어서 좋군요. 그러면 여기서 갈라지도록 하죠.”

“그렇게 하지. 합류 신호는?”

“러시아로서도 인명이 상하는 것은 바라지 않겠죠? 후미를 기습해서 사격으로

시간을 끌다가, 안에서 이 총소리가 들리면 본격적으로 공격해 주십시오.”

시준은 그러면서 베니그센이 내어준 러시아산 툴라 머스킷(Tula musket)을 들

어 보였다.

임청의 무리가 갖고 있는 것은 대부분 조총이나 잘해 봐야 영국산 브라운 배

스 머스킷일 테니 프랑스 샤를빌(Charleville) 머스킷을 기반으로 한 이 총과

는 많이 다르다. 러시아인에게 무기를 얻어오면서 들은 정보였다.

베니그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병이라면 피아의 총소리 구분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 나이로 봐선 그렇게

안 보였는데 전장 경험도 좀 있는 모양이군.”

시준은 굳이 그 오해를 교정해 주지는 않았다. 베니그센은 자기 허리에서 칼

한 자루를 풀어 시준에게 칼집째로 던졌다.

“되도록 자네를 다시 볼 수 있길 바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도 관심이 생기는

군. 행운을 빈다.”

받아 보니 꽤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시준은 고개만 숙여 답례하고 다시 내

달렸다. 러시아 사람들과 시간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뛰어야 했다.

곧 사람들이 헐떡거릴 때쯤, 그들은 장복의 안내를 받아 나무가 많이 심긴 화

원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장복이 말했다.

“여기의 두 길 담만 넘어가면 바로 황궁 내성(자금성 안쪽)이지요.”

“좋소.”

시준은 기랑을 돌아보았다.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랑이 여기에

서 가장 가볍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기랑은 부끄러워한다거나 화내지 않고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시준은

기랑의 허리를 붙들고 발을 받쳐 지붕으로 올렸다.

곧 나머지 높이를 어렵잖게 기어올라간 기랑이 밧줄을 받아 안쪽 처마쯤에 단

단히 묶었다. 이미 경비병은 우왕좌왕하고 있거나 천리교도를 막으러 몰려간

모양인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천리교도처럼 머리에 흰 띠를 맨 – 조선 사람이라 옷만 찢으면 흰 띠가

바로 완성이었다 – 조선 상민들이 엄중한 금지인 내성 안쪽에 하나둘 발을 디

뎠다.

저위밀건법(儲位密建法)으로 후계를 정하는 청에는 황태자라는 것이 없다. 그

래서 지금은 이아거[二阿哥, 둘째 황자]라고 흔히 지칭되는 아이신기오로 민

닝[綿寧]은 후대에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그렇게까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총관 상영귀(常永貴)가 평소보다도 더 높은 목소리로 진언했다.

“역적과 잠통자에 의해 불궤가 코앞에 닥친 지금, 황자께서 친히 군사를 휘몰

아 나아가셔야 합니다! 조총으로 마구 쏘아 적을 격살하시면 적은 그 위엄에

눌려 물러갈 것입니다!”

마제수(馬蹄袖) 펄럭이며 달려나온 황자 면녕은 상영귀에게 너 미쳤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지금은 정말 상영귀의 말대로 해야 할 때였다. 형제와

숙부들이 성내 각지에서 흩어진 관병을 규합할 때까지 이곳을 지켜야 했다.

천안문 쪽은 황제와 직면하는 남문인 만큼 규모도 크고 경비도 튼튼해서 능히

걱정이 없을 터였다. 적도들은 서남부에서 몰려오고 있으므로 주공격은 아마

서화문일 터.

면녕은 급히 모은 병사 오십여 명을 거느리고 건천궁 앞 광장 서문인 융종문

(隆宗門)으로 나아갔다.

면녕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다스렸다. 그도 명색이 만주족 황자인 만큼 사

냥도 적지 않게 했었고, 총도 물론 다룰 줄 알았다.

‘좋아. 일단 화승에 불을 붙이고……. 잠깐, 화약과 총알은 가지고 나왔던가?’

다행히 그런 건 병사들이 알아 모셔서 챙겨 나왔다. 면녕은 조금 연습할 시간

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 순간 갑자기 저 구석에서 스무남은 명의 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면녕은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는 준비가 안 되었다.

차라리 황자가 없었다면 그냥 쏘았을 것이건만, 황자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기

에 병사들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꼴은 중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옷차림이 하나같이 남루하고 얼굴은 험

악하며 기세는 흉흉한 게 여지없는 부랑당패 마적떼였다.

더 이상 다가오면 총을 내던지고 도망칠 것 같다고 황자가 마음속으로 설정한

딱 그 자리에서, 선두에 있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쳤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저희는 조선국 사람으로, 이 난리를 당하여 특히 천

조를 수호하고자 달려왔습니다! 이미 잠통한 배반자가 문을 열어주어 사태가

화급하니 바라건대 저희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서 시준은 스승에게 받아온 부절과 신표를 내밀었다. 면녕은 조선국을

항상 특별히 우대한 선황제의 정책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총관 상영귀가 시준의 부정확한 호칭을 지적하며 이 ‘귀하신 분’이 구체적으

로 얼마나 귀하신 분인지 알려주려 나섰으나 면녕은 그것을 제지하고 자비롭

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면녕이 대충 만주 권귀 누구라고 짐작한 시준은 별 망설임 없이 씩씩하게 대

답했다.

“부사 정약용의 제자, 조선국 의주부 사람 정시준입니다. 귀하신 분께서는 일

단 안으로 피해 계십시오. 저희가 역도를 참하겠습니다.”

서화문을 맡은 것은 천리교의 속권을 담당하는 이문성이었다. 과연 이자성의

환생답게 백색 모자와 청람색의 외투를 걸쳤지만, 이 복잡한 북경 거리에서

월장까지 하려면 말 타고 위풍을 뽐내는 짓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허름한 부하들과 함께 낑낑거리고 담 넘어간 이문성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

처럼 안에 들어와 있는 동지들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준은 그가 상황 판단을 하기도 전에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득승!”

“과연 우리 동포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벌써 여기에?”

설마 동문을 들이쳐서 시선을 끌다가 달아나기로 되어 있던 풍극선(馮克善)이

벌써 황궁을 점거한 것인가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대명순천이진주 이문성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시준은 되는 대로 꾸며냈다.

“노야께서 미리 저쪽 담에 시운이 보인다 이르시기에 그쪽을 넘어왔습니다.

과연 아무도 없더군요. 그러나 저 안쪽은 황제의 아들들이 지키고 있어 섣불

리 다가가지 못했는데 이제 장군을 뵈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소이다.”

시준은 일반적인 중국어 존칭을 말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이문성이 제멋대로

짐작하도록 만들었다. 과연 이문성은 유 노야, 그러니까 임청이 자신을 위해

원군을 보낸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물론 주의 깊게 들었다면 시준의 발음이 어째 외국인 같다는 것을 대번에 알

았겠지만, 사실 그렇게 침착하고 이성적이면 반란을 왜 하겠는가.

이문성은 칼을 뽑아들고 호령했다.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니 이야말로 길이 열리는 뜻이다. 무엇을 망설이겠는

가, 바로 진격하자!”

그러나 그 장한 결심은 수행될 수 없었다. 아직 채 다 넘어오지 못한 담장 뒤

쪽에서 피에 젖은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들의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시준은 재빨리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적도가 뒤쪽에 바로 들이닥쳤군요. 장군. 천명이란 뒤에 있지 않습니

다. 오로지 앞에 있는 것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십시오! 건천궁이 바로 저것

입니다!”

그렇다. 성공한 사람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 미래와 희망은 등 뒤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 있는 것은 좌절과 후회처럼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일 뿐이다.

시준에게 감명받은 이문성은 쇠했던 용기를 다시 되살렸다. 다른 부하들이 이

미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전술적인 견지에서도 시준의 말이 옳다. 담 넘느라 총 쏠 준비도 안 된 그들

이 돌아가 봐야 무엇하겠는가. 여기에서는 하다못해 황제의 인척들을 인질로

잡기라도 해야 한다. 이문성은 몸소 고함을 지르며 시준을 지나쳐 앞으로 혼

자 달려나갔다.

그래서 시준은 이문성과 칼싸움을 하는 수고 없이 뒤에서 손쉽게 그의 목을

딸 수 있었다.

이문성은 청에 항의하는 표시로 변발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길렀다. 시준은 그

머리칼을 움켜잡고 마치 수확하는 것처럼 베니그센의 칼을 휘둘렀다. 과연 리

투아니아 공작의 검이 뭐가 달라도 달라서 첫 칼질에 뼈가 끊어지고, 두 번째

칼질에 머리가 완전히 떨어졌다.

“!!”

경악하는 천리교도들 앞에서, 시준은 그대로 이문성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사람을 직접 죽여 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살인의 무거운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깨가 아프다면 사람 목이란 게 의외로 질겨서

두 번이나 칼을 쳐야 했다는 이유밖에 없었다.

19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시준에게 그따위 생각은 배부른 고민이었다. 전근

대라고 더 부도덕하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죽였는가’이다. ‘사람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좀 맥락

이 어긋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윤리는 현대보다 명쾌한 점도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죽였

다.’ ‘당신의 뜻은 알겠으나 그래도 살인은 법적으로 죄…….’ 하는 따위의 흐

리멍덩한 짓은 없다.

‘누구를 죽였는가’에 따라, 야만스러운 살인은 한 치의 흠도 없는 통쾌한 의

거가 된다.

그러려면 실행자가 죄의식 따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시준은 아직도 콸콸 피

를 쏟아내는 목을 더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역적의 수괴를 여기 참했다! 반도들은 속히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서도 시준은 별다른 고양감이나 감흥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건 원래

죄의식과 같이 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준은 그 목을 내던지고 다음 사람에게 거칠게 달려드는 전사의 풍모

를 보이지는 않았다. 취향도 아니었거니와 가진 무기도 칼 한 자루뿐이었다.

총은 시준이 알고 있는 조선 최고 명사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저놈이 애초에 간적(奸賊)이었구나! 죽여라! 진주(이문성)의 원수를 갚아라!”

충격에 빠져 있던 천리교도 중 아마 부장쯤 되어 보이는 직책의 사내가 노호

하며 칼을 치켜들었다. 자세도 제법 그럴듯했다.

교조 임청은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검법은 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무술 연

마에 게을렀지만 대부분의 천리교도는 검술을 수련했다.

사람들은 몰래 뒤에서 비웃었으나, 역시 임청이 후천조사 괜히 한 것은 아니

었다. 그의 말이 맞다. 검법은 도가 아니다. 건법만이 도일 뿐이었다.

담 넘어오자마자 재어 놓았던 기랑의 툴라 머스킷이 불을 뿜었다. 그 용감한

부장의 머리가 산산조각나서 날아갔다. 검계를 죽였던 권총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부장의 뒤를 따라 돌격하려던 천리교도들이 기겁하여 멈추었다.

대장이 죽고, 복수하려던 첫 번째 사람도 총탄에 쓰러졌다. 기세를 발휘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꺾인 것이다. 천리교도들은 이제 같은 숫자의 허수

아비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마침 총소리를 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그 천성적으로 흉맹한 기세를 드러내며

담 너머의 천리교도를 휩쓸자, 조선 사람들도 용맹하게 몽둥이며 부지깽이를

들고 몸을 날렸다.

이곳의 주인인 황자 면녕 및 다른 황족들조차도 아직 총소리에 움찔움찔하며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이 순간, 그들은 진실로 대국의 스승이었다.

작가의 말

1.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 당시에는 중국인이 조선인더러 냄새난다고 많이 비난했습니다. '고려취' 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죠. 도덕적 비난도 있었는데, 조선인들이 도적질을 잘 한다 하여 도둑맞았다는 뜻으로 '동이東夷하다' 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뭐, 어느 때나, 어디에나 있는 외국인 혐오 정도로 봐야겠죠.

2. 자금성의 높이는 현재 11미터라고 하고 있으나, 당대 조선의 기록에 '두 길 높이' 라고 되어 있기에 6미터가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솔직히 11미터면 공성 장비 없이 넘을 방법이 없고, 계유지변 당시 천리교도들이 성벽을 타넘은 것을 보았을 때 최소한 가경제 때는 이쪽이 맞을 것 같습니다.

3. '장복' 과 '창대'는 박지원이 중국 갈 때 데리고 간 두 하인입니다. 열하일기에는 이 둘과 박지원이 만담하는 재미도 쏠쏠하죠. 창대는 중간에 말에 발을 밟히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조선 사신들은, 심지어 박지원마저 길 급하다고 창대를 버리고 갔지만 중국인 제독이 명마를 빌려주어 구제해 준 눈물겨운 인류애 스토리도 있습니다.) 앞뒤 맥락으로 봤을 때 장복이는 중국행에 익숙한 것처럼 보여서, 여기에서도 또 관리 따라왔다는 설정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30여 년이 지났으니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요. 하하.

4. 태감 상영귀는 실제로 저 조언을 했고 면녕도 따라서 친히 총을 쏘아 2명을 사살합니다. 상영귀도 나중에 포상을 받죠.

이때 융종문의 상황은 황자가 직접 총을 쏴서 사람을 죽여야 할 정도로 상당히 급박했습니다. 심지어 반란군의 화살이 용종문 현판에 박힐 정도였는데, 돌아온 가경제는 이 교훈을 잊지 말라는 취지로 촉을 그대로 남겨두라고 지시합니다. 현재 21세기에도 자금성에 구경 가시면 아직도 현판에 그대로 박혀 있는 화살촉을 보실 수 있습니다.

21. 흔들리는 균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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