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65화 (65/284)

65화

20. 기사지변(己巳之變)(2)

조금 뒤에야 사태는 정리되었다. 시준은 이거 어쩔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방물장수에게 가짜 청심환 다섯 알을 주어 조용히 시키고 두 사람과 평상에

마주 앉았다.

왜 이런 고관이 지금 러시아에서 별 관심 없는 중국까지 와 있느냐 하는 시준

의 의문은, 먼저 블루도프가 소개한 베니그센의 직함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으

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어마어마한 직함 두 개에는 모두 전(前) 자가 붙어야

한다.

외국인으로서 러시아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베니그센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

실상 은퇴 상태였다. 원 역사에선 후일 나폴레옹이 무슨 삼국지스러운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복귀하기는 하나, 지금은 그저 고위 귀

족으로서 황제를 모시고 리가 순방이나 다녔던 처지다.

“뭐, 그러니까 자네 모가지가 날아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게지. 프랑스어

를 잘하는구먼. 혹시 독일어도 하는가?”

베니그센은 시준이 내놓은 훈제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옆에서는 기랑도 맛있

게 먹고 있었다. 치킨 만능설에 빠진 시준이 혹시 중국 고관을 만날까 싶어서

장기 보존용으로 해 둔 것인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시준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각하. 독일어는 할 줄 모릅니다.”

베니그센은 역사상의 까칠한 이미지 – 시준이야 어차피 모르지만 – 와는 다르

게 의외로 사람 좋은 노인이었다. 독일 출신이라 러시아어를 못 해서 상당히

외로운 여행길을 걸었던 베니그센은 시준을 친근하게 대했다.

“자네가 준 이걸 붙이니까 좀 낫는 것 같은데, 이게 바로 내가 평소 듣던 동

방의 신비한 약인 모양일세.”

“자랑은 아니지만 조선은 약재의 대국으로 알아주지요.”

물론 시준이 내놓은 전근대식 파스는 별로 치유 효과가 없다. 고대부터 약재

였던 장뇌에다가 대충 길가의 허브 같은 것 몇 개를 조합하여 습포에 바른 물

건일 뿐이니까.

그러나 어차피 치료 효과 없는 거야 현대의 파스도 마찬가지니 이것만 해도

이 시대에서는 명약이다. 의주 정약횡 의원집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일

정도다.

조금 후 진흙 청심환 다섯 개에 싱글벙글한 방물장수가 어디서 구했는지 계란

볶은 요리에다 술 한 병까지 내어왔다. 베니그센이 별로 꺼리지 않는 태도로

그 술을 마시자 시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그 소동은 괜히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번 조선

차석대표(부사)의 수행원으로서, 대청 외교에 대해 몇 가지 논의할 것이 있어

아랫사람을 만나보려 했는데 그만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베니그센은 그 나이치고는 꽤 많이 남아 있는 이빨로 치킨을 죽 뜯었다.

“그래, 그림자의 밀사라 이건가. 여기 있는 이 친구 드미트리도 자네와 비슷

한 위치지. 모스크바의 촉망받는 젊은이로서 뛰어난 문사(文士)이기도 하다

네. 황제가 왜 자기 생일에 문 닫고 안 나오겠다는 어린아이 짓거릴 하는지는

우리도 궁금했지. 일단 삼가며 지켜보고 있었다만 자네가 이리 헐레벌떡 뛰어

온 것을 보니 조선에서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나 보군.”

시준은 감탄했다. 베니그센은 대충대충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시준의 말에서 요

점을 정확히 알아듣고 있었고 대화 진행도 빨랐다.

“그렇습니다. 각하와 같은 고관이 온 것을 보면 또 다른 생각도 드는군요. 어

쩌면…….”

“이 일이 조선이 아니라 러시아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인가? 허허. 당

돌한 친구일세. 하지만 이 사람은 책임자가 아니라 그저 모스크바 궁정의 악

다구니를 피하기 위해 임페라토르의 배려를 받아 온 귀양자일 뿐이야. 외교

얘기라면 드미트리와 하게.”

하기야 시준의 신분으로 아무리 전직이라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과 대등하게 얘

기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도 베니그센이 많이 봐준 것이다. 시

준은 떼쓰지 않고 곧장 그 말대로 했다.

하나는 나라에서 대우받고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각자 양국의 젊은 준재인 두 사람은 약간의 탐색전 끝에 본격적인 대화로 들

어갔다.

“아마 영국 때문일 거요. 조선도 최근에 영국과 교류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야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영국 때문인 것이 당연하지. 하지만 조선은 영

국과 공식 국교가 없고, 장사꾼들이 드나든 지도 얼마 안 됐소이다. 대륙 봉

쇄령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청 황제는 영국과 러시아가 한편이라고 생

각하는 게지요. 아마 그건 사실일 테고.”

“거기까지 알다니 식견이 제법이군. 물론 저 보나파르트의 무도한 짓거리를

우리 황제께서는 좌시하지 않으셨소. 처음에는 우리도 프랑스와 오랜 우의가

있으니 참여하려 했지요.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대영 무역 손실분을 대체할 어

떠한 이득도 제시하지 않았소. 게다가 전통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폴란드를

여봐란듯이 집어삼킨 일은 또 어떻소? 근본 없이 황제를 참칭한 자가 어찌 별

수 있겠냐마는.”

프랑스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쏟아내던 블루도프는 베니그센이 기랑과 술잔을

세게 부딪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준은 이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을 알

만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그로 인해 생긴 손해를 좀 보충하기 위해 중국과 새로운

무역을 터 볼까 해서 온 것이오. 영국이 조선을 속이고 러시아와 손잡아 중국

을 압박한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가 본데, 누가 일러준 것인지 모르겠

지만 새빨간 거짓말이고 탁상공론이외다. 이 머나먼 극지에서 그런 일이 어떻

게 가능하겠소?”

‘거짓말이다.’

평생을 사기와 협잡 속에서 살아온 시준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물론 블루도프가 말한 것처럼 푸셰의 음모론은 현실성이 별로 없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과 달리 여기로 병력을 보낼 여유도, 수단도 부족하다. 네르친스

크 조약은 청이 패배해서 맺은 조약이 아니었다.

영국의 사정도 약간만 나을 뿐이다. 전 세계에 걸친 저탄고와 그 사이를 누빌

증기선이 없이 목조 범선만으로 동아시아에 중국을 압도할 병력을 투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어찌 됐건 패왕 나폴레옹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모두 무의미한 일이

다. 현재 유럽 어느 나라의 집권층도 극동 패권 확장의 꿈 따위는 헛소리로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저 무역로 확장을 위해 왔다면 군사 관계자인 베니그센은 필요가 없다.

한직으로 돌린다고 해도 모스크바 궁정에는 귀족이 할 만한 한직이 많이 있

다. 벽지로의 귀양? 러시아에는 훨씬 더 전통적이고 안전하며 미래 소비에트

시절까지도 유용성이 입증된 최적의 귀양지가 이미 있는데 무엇 하러 중국으

로 보내겠는가?

시준은 베니그센이 선선히 이 약식 회담을 허락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본래

대로라면 위압하여 쫓아내거나 시준을 처벌하면 그만이다. 허나 그러면 시준

은 다른 건 몰라도 ‘러시아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확고한 사실 하나는

가지고 돌아가게 된다.

지금 베니그센은 자비를 베푸는 척하면서 시준에게 역정보를 넣어 보낼 셈이

다. 과연 블루도프는 미리 준비해 놓은 말처럼 유려하게 떠들었다.

“의심스러우면 우리 물건을 보시겠소이까? 어차피 이곳은 무역 시장이기도 하

니 조금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조선과 교역할 용의도 있소. 보아하니 영국에서

수입한 왁스 초를 떼어다 파는 것 같은데, 어차피 양초야 불 밝히는 물건 아

니겠소? 우리에게는 더 저렴한 수지(獸脂) 양초가 있소이다. 그 외에 가죽이

며 설탕, 쇠붙이 등속처럼 실어나르기 편한 물건부터 일단 가져왔지. 조선 국

왕 폐하에게 지속적인 우호 교류의 뜻이 있다면, 시베리아의 여러 목재 수출

선을 논의해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소.”

시준은 대화의 흐름을 조선-러시아 수교로 자연스레 틀어버리는 드미트리를

보고 이공이 참 좋아할 인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넘어가진 않았다.

“시베리아의 목재 수출이라. 확실히 흑룡강부터 압록강까지 통행할 수만 있다

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로군요. 지금은 러시아 배가 조선 동쪽 바다를 따라

내려올 수 있는 부동항이 없을 테니.”

갈급하고 귀중한 것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유전자에 새겨진 열망으로 영국

인에게 아편이 있고, 프랑스인에게 혁명이 있다면 러시아인에겐 부동항이 있다.

시준은 그것을 던져 놓고 나서 블루도프의 표정을 관찰했다. 미리 짐작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미세한 흔들림이 나타났다.

‘푸셰가 말한 것처럼 급진적이지는 않겠지만 이자들은 분명히 만주에 뜻이 있

다. 당연하지. 실제로 그랬으니까.’

시준은 블루도프의 실책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시준은

오는 길에 정약용이 책 좀 읽으라며 준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당신들도 행차를 보았는지 모르겠소이다만, ‘청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은 몽고 48부요, 몽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토번이기 때문에 황제

는 토번 사람들이 숭상하는 활불(판첸 라마)을 높여 황제의 스승으로 삼고 우

대했다’고 하지요. 중국을 압박하는 데에 꼭 러시아군이 동원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유럽에 대 조선시대를 촉발한 매카트니 자작은 건륭제에게서 티베트인을 선동

해 중국에 반란토록 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으나, 이를 전해들은 누군가는 그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주

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청 황제가 매년 여름 일부러 열하까지 가

는 이유는 바로 몽골을 비롯한 북쪽 오랑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블루도프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는 무슨 그런 부당한

의심을 하느냐는 취지로 말하려 했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쾌활하면서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술이 다 떨어졌군. 얘기 중에 미안하지만 노인네가 바깥바람을 오래 쐬니 으

슬으슬하네. 이만 작파하지.”

돌아보니 베니그센은 빈 술병을 거꾸로 들어 보이며 웃고 있었다. 외국인이라

는 이유로 설움 많이 받아서 러시아적 정체성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지 그

적지 않은 술을 벌써 다 마신 모양이다.

황제가 덥다고 피서 간 마당에 으슬으슬하다는 말은 일종의 위협적 농담이다.

시준은 짧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그에게 조선을 위해 목숨 바

쳐 첩보를 수집할 동기까지는 없었다.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유익한 만남이었네.”

시준은 일부러 대구한 그 말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베니그센

은 시준을 호의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또 만나길 바라며, 자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주지. 물론 이건 자네가 돌아

가서 러시아가 중국이나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고 거짓 보고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야.”

“경청하겠습니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를 기반으로 많은 정보를 추측한 자네의 판단은, 글쎄,

틀린 부분이 많지만 훌륭했어. 거기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그 지혜를 발전시

켜 보게.”

베니그센은 마지막 남은 닭날개 하나를 두고 눈치 보는 기랑에게 친절히 너

먹으라고 손짓했다. 손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동네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어디까지나 여기 와서 알게 된 거지만, 황제는 북부 별장(열하)에 있고

각국 사신도 거기 달려가고 있어.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지. 그리고 영국인

은 광동에 있다네. 아까 골치 아픈 일은 대개 영국 때문이라고 했지? 전적으

로 동감이야. 그럼 수고하게.”

시준이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러시아에서 온 두 사람은 휘적휘적 아라사관으

로 들어가 버렸다. 시준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닭뼈 문 기랑

이 시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거 먹었으니 오늘은 닭 안 튀겨줘도 되지?”

“이거하고 그건 맛이 달라.”

시준이 욕설을 중얼거린 것은 결코 기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답잖은 문답 하

는 도중 베니그센의 말을 뒤늦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작변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장 아라사 사람들의 뜻을 캐내지 못한 것은 분하나 지금은 그

일이 급한 게 아닙니다. 지금 황제가 황성에 없다는 사실은 여러 반도가 기화

삼을 만한 일입니다. 과거 정통 연간 명의 유신은 황제를 새로 세우고 나서야

몽고의 대군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황제가 있다고 해서 새삼 화포가 더 생기

고 병사가 더 강해질 게 무엇이겠습니까? 허나 천위의 유무는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듣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나서 다시 나직하게 물었다.

“혐의할 만한 자가 있느냐?”

“예. 팔괘교라 하여 사악한 요참을 믿는 무리가 있는데, 임 모라 하는 자가

그 수괴로서 조선에서 총포를 사가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이라

함부로 죽일 수 없어서 엄히 훈계하여 가둬 두었으나 그만 달아나 버리고 말

았지요. 이자가 말하기를 자신은 미륵불의 화신이며, 조사(祖師)가 되어 금궁

을 뒤엎고 뜻을 성취할 것이라 자백했습니다. 게다가 영국 상인들에게 듣기로

는 광동에서 많은 무기를 또 매입하였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임청을 만난 적 없기 때문에 시준은 자기가 한 짓은 쏙 빼고 그렇게

둘러댔다.

정약용 역시 지난 일을 탓하는 게 도움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 아라사인들이 짐짓 두루뭉술한 말을 흘려서 우리를 혼란케 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 말이 허튼소리라는 것만이라도 확정해야 합니

다. 만약 변란이 실제로 금궁을 덮친다면 우리는 위험해집니다.”

“반란군이 외국 사신을 굳이 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게다가 강대한 금군과

성벽이 있는데 그게 과연 쉽겠느냐?”

“쉽지는 않겠지요. 바로 그래서 문제입니다. 만약 선생님이라면 어떤 수를 쓰

실 것 같습니까?”

정약용은 그제야 알아챘다. 이만한 성을 사이비 종교단 따위가 정면 공격한다

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통자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임청은 계유지변(癸酉之變) 당시 태감 몇 명을 포섭하여 자금성을 열

게 했다. 도광제가 후일의 암군 평판과는 다르게 용맹을 발휘하여 친히 총을

쏘고 금군을 지휘하지 않았으면 임청은 잠깐이나마 뜻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황궁이 함락되지 않더라도 성문이 열린다면 내통자의 엄한 색출

이 있을 터요, 외국인으로서 청 황제가 대놓고 따돌릴 정도로 감정이 안 좋은

조선과 러시아의 사신들은 그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조선이나 러시아 사신들이 북경의 방어 체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은 의심을 청산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의심이란 건 하기로 결정한 뒤에 근

거를 찾는 것이지 근거가 있어서 의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적들은 아마 밤에 변을 일으킬 터. 공연한 의심을 받지 않도록

어서 정사께 말씀드려 일개 마부까지 전부 한곳에 모아 조용히 있게 해야…….”

“선생님, 벌써 회동관 개시가 한창인데 조선 사람들이 조용히 있으면 그게 더

수상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 몇 명에게 일러 동태를 살피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아라사 사람들이 비밀히 전하려 한 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느냐?”

“만약 아라사인이 이 변괴를 진작 알아챘다면 교사(사제)와 여러 살림을 빼돌

려 북경 밖으로 달아나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

리에게 알려주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정약용은 이제 예전 성문종합영어를 시준에게 가르침 받던 그때로 거의 돌아

간 것 같았다. 시준의 문답식 교습에 익숙한 정약용은 되묻지 않고 스스로 잠

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미친놈을 보는 눈빛을 제자에게 보냈다.

“같이 싸우자고? 아라사 놈들은 과연 제정신이라는 말이냐?”

“원래 아라사 사람들은 뒷일 생각을 잘 안 하는 습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

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황제의 의심을 피하려면, 역적을 직접 참하

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정약용은 좀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말하려 했다. 꼭 너희 고향

같은 방법을 써야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모든 말썽을 패 죽이는

걸로 해결하려 드는 태도는 좋지 못하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스승으로서 전해

야만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바깥에서 뭔가 깨지고 엎어지는 요란

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시준과 정약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준이 임청을 중국에 버려버린 것은 청이 혼란해지면 장사 좀 잘 되겠다 싶

은 소박한 사업 전망 때문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저지

른 업보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의주 색골 되놈 임청은 여기에 없었다. 그는 이제 천리교의 존귀한 후천조사

유 노야(劉老爺)였다.

가난한 부랑자 처지에 먼빛으로나마 훔쳐보았던 북경의 번화한 거리는 마치

허탄한 먼지처럼 그의 발아래에서 부유했다. 과거 그가 여기 발 딛는 것만으

로도 더럽다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 휘두르며 쫓아냈던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제 비명과 함께 도망칠 뿐이었다.

관군은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일부 병사들이 용감하게 나섰

지만 교도들은 수입한 서양총을 마구 쏘아대며 그들을 흩어 버렸다.

잔뜩 고양된 임청 또한 영길리 권총을 쏘아 청군 하나를 쓰러뜨렸다. 그는 목

이 터져라 외쳤다.

“하늘을 받들어 길을 열어라[奉天開道]!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得勝]!”

비록 50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지만 역사보다는 훨씬 많은 천리교의 결사대가

우레 같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북수(北水)가 한나라 황제에게 돌아오기를 오로지 기다렸다[專等北水歸漢

帝]! 큰 땅과 건곤이 다만 하나로 될 뿐이다[大地乾坤只一專]!”

상종 못할 파락호에 더러운 병자로 사방에서 멸시만 받았던 자신이 지금 천하

를 뒤엎으려 하고 있었다. 임청은 가슴이 들뜨고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뭐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년 일찍 일어난 계유지변, 아니, 기사지변은 원 역사보다 훨씬 치명적인 방

식으로 청 황실을 타격했다.

본래 청 정부는 천리교의 반란을 미리 포착해서 다른 주모자 이문성(李文成)

을 가두었다. 심지어 백련교 때의 전훈을 잊지 않은 채 대군을 일거에 투입한

다는 그럴싸한 전략도 세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성 습격을 허용한 게 청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정이 더 안 좋았다. 하남성 활현(滑縣)의 현청을 급습해서

현령을 죽인 이문성군은 대비되어 있지 않았던 청군의 포위망을 뚫어버리고

북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는 이문성이, 정확히 말하면 이문성의 부인 장씨가 부득이 거사를 앞당기기

로 결심하는 계기인 이문성의 체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준의 귀띔을 받은 레디 소령은 당시 윌리엄 자딘에게 밀수선을 위임했고,

자딘은 임청에게 막대한 무기를 팔았다. 그래서 천리교는 원래 역사와 같이

무기 공장 짓고 사람 모으다가 관에게 들킬 정도로 대규모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청이 천리교의 반란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니

당연히 군대를 미리 집중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역사처럼 이문성의 활현 반란군과 임청의 자금성 별동대가 시간

을 못 맞춰서 각개격파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으로서는 끔찍한 사태

였다.

또한 그만큼 임청에게는 하늘의 도움이었다. 계획은 엉성하고 보안도 허술했

지만 어쨌든 임청과 500명의 결사대는 태감 양진충(楊進忠) 등의 도움에 힘입

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북경성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들켜도 저 야만족 만인(滿人) 따위가 천명을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면 못 한다. 무릇 반란자란 누가

봐도 1할밖에 안 되는 승세를 진심으로 9할 이상이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객관적으로 봐도 원 역사보다 승산이 많이 올라간 이 상황에서,

임청은 천리교의 승률이 10할이라는 것에 어떤 의혹도 없었다.

한나라 황제를 계승하여 천리교의 정신적 지도자를 자임하는 임청, 아니 유

노야에게 이미 속세의 가치는 쓸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속권의 군대를 이

끄는 현세의 지도자를 위한 외침을 중후하게 발했다.

“십팔자(十八子)가 길을 밝히니[明道] 이씨(李氏)가 왕이 될 것이다! 대명순

천이진주(大明順天李眞主, 이문성)의 군이 곧 도달하니 길을 열어라!”

조선 사신들은 황망한 중에도 간과할 수 없는 소리라 생각했다. 십팔자위왕은

사백 년 전 조선이 내걸었던 참요의 기치다. 이건 표절이다.

이는 캐릭터가 겹친다는 정체성의 위협 외에도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충심 장한 통관이며 마두들이 분개하여 소매를 걷어붙였다(물론 걷어붙이기만

했다).

“저놈들이 왜 우리 성조(聖朝, 이씨 왕조)를 끌고 들어가는가!”

물론 지금의 이문성은 옛날 명나라의 정당한 계승자였던 이자성(李自成)의 환

생이라 홍보하고 있어서 조선과는 상관이 없다.

남공철이나 정약용도 아마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이게 청에

서 시비를 걸어볼 만한 한 꼬투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폭도들은 자금성 서쪽 서화문(西華門)과 남쪽 천안문(天安門)으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회동관이 자금성 서남쪽에 있어서 마치 풍랑에 휩쓸린 배 신세였다.

남공철은 황망하게 부사 정약용을 찾아 의논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겠소?”

방금까지 시준과 대화를 나누던 정약용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를 방법은 하나밖

에 없었다.

“옆 관 아라사인들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힘을 합쳐 빠져나가든, 아니면 싸

워 대국에 대한 충의를 보이든 두 나라가 함께해야 의심을 피하기 쉽습니다.”

남공철이 허락하자 정약용은 시준을 불렀다.

작가의 말

1. 영국은 이 시기 러시아에게서 양초를 많이 수입했습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야근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는데, 그러려면 조명이 많이 필요했거든요. 작중 나온 대로 더 품질 좋게 쳐 주는 것은 왁스 초이지만 아무래도 비싸다 보니 러시아에서 저렴한 수지 양초를 많이 들여왔죠. 설탕의 경우 러시아가 수입해서 외국에 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작중 나온 천리교의 구호는 십팔자명도를 포함해서 모두 실제 역사에서 그들이 주장하였거나 퍼뜨렸던 참요 또는 구호입니다. 임청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유 노야' 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천리교의 반청복명적 측면이 엿보이죠. 이전에 나왔을 때 임청은 팔괘교의 간부였습니다만, 전에 작중에서 서술된 대로 팔괘교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리교와 융합되어 이 시점에선 천리교입니다.

3. 실제 역사에서 내통자의 도움으로 열린 건 자금성 문이고, 자금성을 둘러싼 북경성은 이들이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작중 서술된 대로 천리교의 난 시점의 청조는 분명히 하남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왜 수도 성에 그만한 계엄조치를 하지 않은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때의 행정이 후진적이어서 그랬는가? 하기에는 사신단 관리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볼 때 그렇지 않았거든요. 조선 사신단에게 김치 한 줌까지 물목을 전부 기록해서 일별로 내어줄 정도로...(진짜 김치 줬습니다. 아마 절인 채소 얘기겠지만요.)

4. 실제로 임청은 자금성 습격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지휘한답시고 상황을 보다가 일 실패하고 체포되죠. 유명한 천안문은 '북경성의 문' 이 아니라 북경의 내성인 '자금성의 문' 입니다. 남대문과 광화문의 차이랄까요. 하하.

20. 기사지변(己巳之變)(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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