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19. 북경 가는 길(1)
홍 장주네 싸리나무 울타리는 이미 의주 연인의 명소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
에 시준은 밀회 장소를 희만당 뒤로 옮겼다.
지유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저번에는 서울이고, 이번에는 북경이니? 왜, 되사람 색시라도 데리고 오게?
이것 그냥 가져가서 중국에서 실컷 쓰고 거기 아주 눌러살거라. 난 이제 일
없다.”
그러면서 시준이 일전에 주었던 사금 주머니를 내팽개치는 게 어지간해서는
달래기 어려워 보였다.
시준은 결국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계획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지
유도 이해하기 쉬워야 하므로 약간의 윤색은 들어갔지만.
“흉년으로 민심이 안 좋고, 영길리며 불랑국 사람들이 나라에 무시로 드나들
어 의주가 위태위태하다. 돈은 많이 벌었어도 외국인하고 자주 어울리다가는
의심을 받아. 너도 장삿집 딸이니 자칫하면 높으신 분들 손가락질 한 번에 집
이며 논밭에다 돈과 목숨까지 다 날아갈 수 있다는 건 알지? 내가 악착같이
돌아다니는 건 나중에 너 데리고 멀리 떠나 살면서 난리를 피하기 위함이다.”
“지금도 어디서 놀고먹을 만한 돈은 있잖아.”
그냥 이 길로 야반도주 해버리자는 지유의 말에 시준은 잠깐 마음을 다스렸다.
“그냥 집하고 땅만 있으면 되는 게 아냐. 스승이 예조 참판이라 여기저기 높
으신 분들한테 인사해야 될 때가 많고, 다시는 서울에서 부르는 일 같은 거
없이 편하게 살려면 재산 나갈 데가 한둘이 아니야. 근문소 어떻게 돌아가는
지 너도 다 알면서 왜 그래? 게다가 지금은 임금님 명령이라 그걸 거역하면
돈이 얼마가 있든 편하게 살 수는 없어. 그걸 면하려면 아예 외국으로 도망쳐
야 하는데 그건 너도 싫지?”
지유의 눈에서 어쩔 수 없는 조선 사람의 두려움이 드러났다. 시준은 조곤조
곤 말했다.
“삼 년만 기다리거라. 우리가 스무 살 되는 해에 꼭 장주께 말씀드려 성례 올
릴 테니 그건 갖고 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장사치 시준도, 세도가 아들 김유근도, 지존인 이공조차도 나라의 상하가 죄
다 여자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실로 그 옛날 키케로의 말이 옳았다.
모든 위대한 영웅의 머리 위에는 여인이라는 패권자가 있는 법이다.
지유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중국 가서 그 임씨 소개로 난봉질하러 다니는 건 아니지?”
시준은 의외로 지유가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반란 정세를 파악해야 하니
시준은 임청에 대해 알아보긴 해야 한다.
허나 그리 쉽게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만난다 해도 난봉질 하러 다닐 여
유는 더더욱 없다. 솔직히 임청이 아직까지 살아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준은 마음속에서 21세기의 김시준을 꺼내어 속삭였다.
“중국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너보다 어여쁜 사람은 없다. 내가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안 그러려고 애썼지만 지유의 표정이 약간 풀어진 게 보였다. 시준은 그 틈을
타 지유가 던져버린 사금 주머니를 다시 쥐여 주었다.
“사행은 나라의 엄정한 공무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으니 안심하거라. 어릴 때
문간에서 주었던 그 과자도 중국서 많이 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지유는 한참 시준을 올려다보다가, 발돋움을 했다.
시준이 입술의 감촉을 즐기면서 지유를 끌어안으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21세
기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지유는 잽싸게 빠져나갔다.
“누가 볼라. 조심해서 갔다 와.”
시준은 뭐라고 대답도 못 한 채 멀거니 서서 총총 사라지는 지유를 바라다보았다.
잠시 후에야 시준은 양손으로 뺨을 탁탁 치고 희만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
유랑 같이 돌아가면 너무 티가 나니까 지금 빈집인 희만당에서 좀 앉았다가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히 아까까지 없었던 정약용과 기랑이 들어앉아 있었다.
시준은 딸꾹질을 할 뻔했다.
“어, 어떻게, 아무 말씀도 없이, 여기를 오셨습니까? 기랑이 넌 또 왜?”
정약용은 그게 뭔 소리냐는 표정을 너무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어째 사제가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럼 내 학당 내가 오는 데에 나팔 불고 벽제(辟除)라도 하겠느냐? 기랑이도
내가 불렀다. 입 무겁고 손 날랜 견마잡이가 필요한데, 굉보(紘甫, 이강회)는
서울에서 장사한다고 바쁘고 다른 제자들도 사족이라 뒷말이 두려워서 적당한
사람 찾다 보니 이리되었다. 만득이는 집사 노릇하며 사창동의 가사를 보살펴
야 해서 안 되고.”
시준은 요즘 ‘닭만 주면 뭐든지 합니다’ 간판 걸고 있는 의주 프리랜서 기랑
이 많은 보수를 약속받고 참가했을 것이요, 보나 마나 그 보수를 지불해야 하
는 건 자신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 그런 종자 노릇이라면 제가…….”
“어림없는 소리. 당치도 않다. 네 재주를 그런 일에 썩힐 참이냐. 넌 가서 할
일이 아주 많아. 아, 기랑이 네 천품이 모자라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다 맞는 일이 있는 법이지. 험한 산 타는 걸음이며 총칼 다루는 재주는 기랑
이가 너보다 낫다.”
시준은 기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랑은 입 무겁다는 평판을 만족시
킬 양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뒷마당 쪽 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정약용은 오랜만에 놀림당하는 쪽이 아니라 놀리는 쪽이 되어서 신난 모
양이었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헛가르쳤구나. 그런 애틋한 석별의 정을 고
할 양이면 운치 있는 시 한 수가 마땅히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쯧쯧.”
그러면서 정약용은 펼쳐 놓은 옷에 일필휘지로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사행으
로 말하면 힘들고 위험하기가 귀양길보다 더하다. 서울에 있는 처자식에게 보
내는 글 한 폭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원 역사의 정약용은 귀양 7년째에 부인의 슬픔이 담긴 붉은 치마를 받는다.
결혼 30주년에 치마와 함께 온 홍혜완의 싯구는 이제 생전에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체념한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 전에 정약용이 금의환향했기 때문에, 홍혜완이 눈물 흘리며
장롱에서 치마 꺼낼 필요는 없어졌다. 더하여 정약용 또한 귀양살이 적적하다
고 첩질이나 하다가 망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리고 이제 먼 길을 가는 때를 당하여, 옷을 보내는 사람은 정약용으로 바뀌
었다. 편지지가 된 것도 붉은 치마가 아니라 푸른 의주바지였다.
아직도 검은색이 주류이긴 하지만 이제 의주바지를 꼭 광산 일꾼만 입는 것도
아니요, 데님 천을 굳이 다시 검게 물들이지 않는 게 더 싸기도 해서 요즘은
그냥 푸른색 청바지도 많아졌다.
아들들에게는 모친 잘 모시고 집안 건사하는 훈계를 언제나처럼 쓰고, 혼담
얘기가 나오는 딸을 위해서는 매조도(梅鳥圖)를 그렸다. 정약용의 글은 많이
봤지만 그림은 본 적이 없던 시준의 눈에도 정약용의 그림 솜씨가 의외로 꽤
좋았다.
시준은 만약 정약용이 정말 돈 될 거 잘 안 챙겨주면 그림이라도 뜯어서 팔아
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공무는 다 끝나신 겁니까?”
“그래. 만득이가 이것저것 잡물 좀 챙기러 갔는데, 돌아오면 이것 주어서 서
울로 보낼 생각이다. 그리고 아마 한 닷새 정도 있으면 병판 대감께서 의주에
도달하실 게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너도 쉬어 두거라.”
국가의 외교 사절치고는 일정이 대단히 촉박하다. 다 왕이 서양 놀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해서 그렇다.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대강 채비는 했습니다마는 저도 다시 한 번 살피겠습니다. 연암 선생처럼 뜻
하지 않게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야[一夜九渡河] 할지도 모르니까요.”
“열하 산장은 황제가 더위를 피하기 위한 별궁(別宮)이다. 그때야 황제가 연
경에 있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사절들이 그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 가을
이 깊은 지 오래인데 왜 그 짓을 하겠느냐? 그냥 연경으로 가면 된다.”
아는 척 좀 해 보려다 무식이 들통난 시준은 얼굴을 붉혔다. 딴 데 보고 있던
기랑이 슬쩍 웃는 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건 시준이 처음 보는 기랑의 웃
는 모습이었다.
정약용은 출발이 닷새 남았다며 쉬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정약용이 예조 참
판이고 부사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밑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이것저것 표시 나지 않게 개비해 둬야 하는 아랫사람
들 입장에서는 그 절반 정도로 가정하는 게 맞다. 높으신 분이 자기 늙어서
아침잠 없다고 오전 7시에 출근 같은 거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물론 시준이 사행길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공무원으로서의 경험으로 대강 여
유를 계산해 본 시준은 한 사람 정도 더 만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돈 될 만한 일은 전부 해야지.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시준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임상옥이었다.
늙은 홍득주에게 지유를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일을 부탁하기는 어렵다. 아직
젊어 정력적으로 일을 추진하면서도, 홍경래와 달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
중 밀무역선도 보유하고 있는 그가 적격이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시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얘기는 들었죠? 중국에 팔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게 주시고, 또 사오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원금에 얹어 이득의 3할을 드리지요. 아, 지금 흥정
할 여유는 없으니 싫으면 싫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난 갈 테니까.”
“자, 잠깐. 무슨 얘기가 그렇게 급한가?”
원래 물주가 사인보다 많은 이득을 점하는 법인데 7할을 가져가다니 그런 날
강도가 어디 있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항의를 대단히 박력 있게 하던 임상
옥은 시준이 말없이 돌아서서 나가려 하자 결국 소매를 붙잡았다.
책문 후시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후시는 여러 곳에서
공인된다. 북경 회동관(會同館, 조선 사신 숙소)도 그중 하나였다.
진짜 귀물은 경사의 안목 있는 고객 상대로 거래해야 이문이 많이 남지 않겠
는가. 무엇보다 연경에서 중국의 귀한 물건을 사들여 팔면 몇 배나 많은 이득
을 남길 수 있다. 북경 회동관 개시(開市)란 이름뿐이고 이제 후시야말로 진
짜 장사였다.
임상옥은 그 거래에 동의하는 대신 자기가 주문하는 물건도 사오는 것으로 시
준과 계약을 체결했다.
본래는 이런 배짱 계약은 할 수가 없다. 중국 사신행에는 만상이 으레 동행하
는데, 경험 많은 만상들은 북경 상인들과 ‘창자까지 통한다’고 할 정도로 잘
알고 있어 압록강만 넘어가도 허둥대는 조정 대신들 따위야 손바닥 위에서 가
지고 노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까 시준보다 훨씬 중국 무역에 노련한 자들이 의주에는 많다는 의미다.
임상옥 역시 그런 상인 중 하나다.
그런데 이공의 친정 초, 모자 무역 금지로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든 데다(대신
밀무역이 창궐했다), 이번에는 워낙 급하게 결정되고 추진된 탓에 정약용이란
뒷배가 있는 시준 말고는 참가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임상옥으로서는 굴욕
일 것이다.
임상옥은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는 말에 얼굴이 노래져서 뛰어다녔다. 결국 원
래 송상에게 넘기려고 했던 홍삼이며 호표피(虎豹皮), 부채와 (몰래 싸가야
할) 금은 등이 급하게 꾸려졌다.
“며칠만 일찍 말해 주었으면 어디가 덧나는가, 이것 참.”
임상옥의 투덜거림은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면 네가 서울에서 그랬던 것
처럼 사신단 짐보다 더 많은 스케일로 실어올까 봐 그랬지.’라는 말을 시준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시준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송상에게는 무어라 말할 생각이시오이까? 그야 이쪽 이득이 더 크긴
하겠지만 이것도 약조하신 물건일 텐데요.”
입상옥쯤 되는 사람이 당장의 돈보다 신용이 더 큰 재산이라는 것을 모를 리
는 없다. 그는 입맛을 좀 다시다 대답했다.
“사실 그 친구들, 큰소리는 뻥뻥 치더라마는 아마 값을 못 치를 거야. 흉년이
라 삼이나 호피 같은 사치스런 물건 살 데도 많이 없거니와 요즘 행세깨나 하
는 도고들이 맥을 못 추고 있어. 거 왜 옛날에 모자 건으로 사람 보내서 행패
부렸던 그 장시영이라고 알지?”
그 행패를 더한 행패로 막았던 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죽교 17 대 1의 남
자 박광유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알죠.”
“요즘 영길리와 무역해서 부자 된 평안도 사람들이 송상에 이득 나눠주기 싫
어하여 직접 장사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장사가 잘 안 되니까 평안도에 직
접 사정 살피러 왔다가 그대로 물고가 났어. 저어기 삼화(남포) 근처의 송방
에 묵던 중 불이 나서 아랫사람 여러 명과 함께 타 죽었다네.”
그러니까 관청의 장계에는 그렇게 기록될 것이라는 얘기다. 임상옥의 어조에
는 그 소문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하게 묻어났다.
당연히 누가 칼부림 한번 거하게 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지른 것이다.
조선에서 장삿일 좀 해본 사람이라면 다 짐작할 일이리라.
시준은 요즘 무슨 일만 났다 하면 대충 만악의 원인이었던 인간의 이름을 중
얼거렸다.
“홍경래……?”
“아냐. 그 친구가 겁 없기는 하지만, 이쪽 송상은 홍경래와 친한 사람이 많지
않은가. 전에 얘기한 대로 홍경래가 천벌 받을 준비를 한다 해도 어쨌든 돈이
필요한데 그런 건 말 그대로 제 살 깎아먹는 짓이지.”
임상옥도 곧바로 부정하는 것을 보니 마찬가지 생각을 해본 모양이었다.
허나 시준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홍경래는 일전 싸전 김씨네에 대한 폭행이
우발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흔한 범죄자의 변명이라고 생각해서 신
경 쓰지 않았지만, 정말 그렇다면 홍경래가 휘하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한다는 의미가 된다.
여태까지 상당한 장악력을 발휘했던 홍경래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
다. 어쩌면 반란이 진짜 가시화되자 겁먹은 수하들이 이탈하는 것일지도 모르
고, 아니면 거꾸로 수하들의 동요로 인해 홍경래가 거병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선후야 어찌 되었든 그렇다면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하다. 홍경래 휘하이거나
느슨한 동맹을 유지하는 송상들은 이 변화를 눈치챘을 터. 그동안 만나서 더
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는 송상들에게 홍경래는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주종
이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나 증거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시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임상옥과 이 얘
기를 길게 하는 것은 별로 소득이 없겠다고 판단했다.
어찌 됐건 시준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다른 상인은 다 털어먹더라도 의
주는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홍경래가 잘 알아들었기만 바랄 뿐이다.
그래서 시준은 간단히 대꾸했다.
“그도 그렇겠군요. 아, 그리고 장사와는 별개로 내가 특히 행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값은 제대로 쳐 주는 거겠지?”
“제가 언제 행수 서운하게 한 적 있소이까?”
“하하, 그도 그렇군. 말해 보게.”
시준은 그 용건을 말했다.
시준이 중국에 갖고 가는 물건은 임상옥의 상품 외에도 많았다. 홍삼은 홍득
주의 것도 많이 받아왔고, 무엇보다 정약횡 집에서 남아 있는 청심환과 조선
생약을 싹 쓸어왔다.
조선 청심환은 가벼운 데다 비싸고 금수품도 아니라서 사신단의 필수품이었
다. 대부분의 분쟁이나 요청은 부채에 얹은 청심환 두세 알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한 ‘무역품’의 대부분은 모종의 사정으로 여기 이미 없었음에도, 떠나는
날 새벽에 직접 챙겨가야 하는 짐만 말 세 마리가 필요했다.
시준은 제발 오죽당 청년들도 데려가게 해 달라며 애원했지만 정약용은 거절
했다. 대국에 조공하러 가면서 종자를 불필요하게 많이 딸려 위세를 과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양살이 동안 만득이 한 명만 있으면 안팎을 돌보기에 충분하였다. 너
도 명심하거라. 부리는 사람이 많으면 말썽도 많은 법이니라. 네가 보기엔 내
가 세수하고 머리 빗는 것도 혼자 할 수 없을 성싶더냐? 서울에서 관속들이
올라올 것이니 공무의 자잘한 일은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
시준은 전생에서 신세대적인 감각을 과시한답시고 “뭐 사무실에 앉아서 점검
회의 할 것 있나. 저기 카페에서 간단히 차나 한잔하면서 얘기하고 가지.”라
고 했던 과거 장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겁한 직원들은 급히 카페에 달려가서 분노한 시민들에게 끔찍한 욕설
맞아 가며 사람들의 이석을 부탁하고, 장관의 다음 스케줄에 늦지 않는 시간
내로 커피 20잔이 나올 수 있도록 직원을 커피콩처럼 들볶아야 했다.
제도를 ‘실질적’ ‘효율적’으로 개혁하려면 적어도 ‘구식’ 시스템을 만든 만큼
의 고민과 노력은 필요하다. 마냥 ‘소탈한’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결국 시준은 정약용에 대한 모든 설득 의욕을 잃어버리고 의주에서 준비하는
데에만 오죽당을 불렀다.
김모지리를 비롯한 청년들이 말 잔등에 짐을 바리바리 묶어 싣는 동안 뭐 하
나 슬쩍해서 주머니에 넣지 않는지 감시하던 시준은, 곧 준비가 완료되자 요
며칠간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 나가떨어질 뻔했다.
윗사람이라 시준의 고생을 잘 모르고 팔자걸음으로 걸어 나와 매어 놓은 말
타면 되는 정약용은 그런 시준에게 태연히 말했다.
“먼길 가는 말에게 더운 죽을 먹이는 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다. 네가 이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은 것 같은데 연암 선생이 말 기르는 법에 대해
논한 일곱 가지 폐단을 듣지 못했느냐? 죽은 좀 식히고, 소금과 찬물을 준비
하거라.”
조선에서 글 배운 선비가 이런 생활잡기에 대한 발언을 하는 것은 굉장한 수
치이다. 실제로 말에게 콩 좀 더 주라고 별생각 없이 말했다가 사족이 그런
천한 일에 좀스럽게 마음 쓴다고 벼슬자리가 막힌 사람도 있을 정도다(아마
다른 이유도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약용이 시준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 주는 일이다. 하지만
시준에게는 안타깝게도 성질만 뻗치는 훈계였다.
뱃대끈을 고쳐 매던 시준은 부아가 치밀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야, 견마잡이! 이놈 어디 있느냐. 선생님 말씀 못 들었냐? 이걸 왜 내가 하
고 있냐?”
“왜 소리를 질러.”
저편에서 돌아 나오던 기랑은 이제 그냥 들으면 아슬아슬하게 들킬 법도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준은 정약용이 말하기도 전 기랑이 소금과 물통을 들고
왔다는 것이 더 열 받았다.
정약용이 기대대로 다재다능한 기랑을 치하하는 동안 시준은 잠깐 숨 좀 돌리
면서 씩씩댔다. 복지 혜택으로 부여받은, 다양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살아남
을 재주 중 양마(養馬)의 지식은 당연히 없다.
‘애초에 조선이 청나라처럼 수레 쓰고 있었으면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잖아!’
시준이 뭐라고 투덜대거나 말거나, 기랑과 정약용은 아침 대신으로 삶아 둔
의주감자를 맛나게 먹었다. 시준이 처절하게 구른 보람이 있어 그들은 시간
맞추어 압록강가로 나갈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남공철의 사신단이 도착하자 고생은 몇 곱절로 뛰었다. 의주 근
문소는 몇 번 겪어 본 일이라 사절단에게 바칠 여러 생필품이며 먹거리들을
준비해 놓았지만 사정 급한 남공철의 눈에는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보였다.
의주 부윤이 국외 반출 물품의 검열을 위해 친히 나와 있는데도 아비규환이었
다. 사절단 따라온 관속이며 군교들의 쌍욕이 고함소리에 실려 의주를 온통
치달았다. 작대기와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상자와 꾸러미가 눈폭풍처럼 팽
개쳐지고 나부꼈다.
의주 부윤 조흥진의 명을 받은 군교가 호령했다.
“첫 번째 깃대를 지날 때 발각되면 장형과 몰수요, 두 번째 깃대에서 적발되
면 귀양을 보내며, 세 번째 깃대까지 숨기거든 그대로 군문효수(軍門梟首)다.
나라의 법이 이토록 지엄하니 감히 딴생각을 말렷다!”
물론 조흥진은 지금 일종의 부조리극에 출연한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
을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일종의 장대한 연극이다.
이미 ‘감히 딴생각을 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적발용’ 물건을 내놓
고 있었다. 물론 그런 충성스러운 백성에게는 관대한 처분이 내려져야 마땅하다.
‘진짜’는 이미 시준과 근문소의 수작으로 벌써 압록강을 건너간 뒤다. 시준이
괜히 바빴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검사라는 것도 이놈 다르고 저놈 달랐는데, 예를 들어 남은(濫銀, 정
해진 액수를 넘은 은) 같은 경우 어차피 고위 조신들도 전부가 한도를 넘긴
판국이라 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춘추에 이르길 법은 존귀한 데 미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결국 엄정한 율법 맛 보는 것은 만만한 상놈들이었다. 이 도리는 동
서가 같아서, 빵 훔친 죄로 사람 19년이나 가둬 놓는 불랑국도 이 추상같은
법치는 비슷했다.
교리며 나장들은 검열의 엄정함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며 하인들을 줄 세워
놓은 채 옷을 다 벗기고 짐을 탈탈 털었다.
어차피 하인들 또한 놀라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가 상전 오래 따라다녀 일 어
찌 돌아가는지 대강 안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몸에 대해서는 완전히 결백한
채로 왔다.
별 망설임도 없이 저고리고 바지고 훌렁훌렁 벗어 대니 이 압록강변에는 때
아닌 사내들의 시커먼 나신이 수십 명이나 줄을 섰다.
물론 시준도 머뭇대며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여자가 있을 리 없지
만 왠지 위축된 시준은 웃옷을 손에 든 채 바지춤을 붙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시준의 눈에 기랑이 들어왔다.
시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아무리 바빴다지만 기
랑을 적당히 챙겨 빼돌리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기랑은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서 있었다.
작가의 말
1. 정약용의 부인 홍혜완은(일전 52화에서 윤씨라고 나왔던 건 오류로, 수정하였습니다. 제가 정약용의 외가와 처가를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약용보다 연상의 부인이었는데, 작중 나온 대로 정약용에게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슬픈 감정을 담아 치마를 보냅니다. 정약용이 귀양간 지 오래되기도 했고, 홍혜완 또한 남편 없는 사이 살림 꾸리느라 과로해서 병이 있는 상태였거든요.
정약용도 이에 답하여 치마를 잘라 답장을 씁니다. 자식들에게(왜 부인이 아니라 자식에게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보호하고 힘써 모시라는 당부를 함과 동시에 시와 (딸을 위한) 그림을 그려 보냅니다. 결국 원 역사에서도 18년을 기다린 끝에 부부가 상봉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스토리 같습니다만 정약용은 사실 유배지에서 첩 정씨를 두고 딸까지 낳습니다.;;; 정약용이 귀양 복귀하자 딸과 함께 따라오기까지 하죠.
홍혜완이 이 일을 알았을 때 (당연히) 화를 냈고, 결국 정씨와 딸은 쫓겨나서 기구한 삶을 살다가 다산 초당으로 돌아갑니다.
그 와중 정약용은 시를 써서 '도량이 좁은 아내'를 탓하는 참 현대로 보면 적반하장의 짓도 하죠. 정씨는 주막 주인의 딸이라고 전해지나 어떤 방식으로든 한학을 익혔던 모양으로, 그녀가 지은 '남당사 십육수' 에는 이러한 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 작중 나온 의주에서의 국외 반출 물품 검열에 대해서는 역사 그대로입니다. 별로 과장된 건 없고, 생략한 건 몇 개 있습니다.;;; 의주 부윤이 직접 나와서 천막 쳐놓고 하는 게 상례였고, 신분 낮은 종자나 하인들은 옷 다 벗겨 탈탈 털었으며, 결과적으로 그게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도 맞습니다. 사신단 출발 전에 금수품 밑장빼서 압록강 건너보내는 것도 작중의 시준이나 근문소가 밀무역의 혁신을 개척한 게 아니라 원래 만상 밀무역이 저런 식이었습니다.
3. 박지원이 말한 말에 대한 조선의 일곱 가지 폐단은 첫째로 계속된 마구잡이 교배로 종자가 열등하고, 둘째로 우수한 말을 들여올 교역로가 부족하며, 셋째로 임금의 행렬에도 나귀 따위가 동행하며, 넷째로 대부의 집에도 마차가 없고, 다섯째로 기병 군관조차 말을 세 내어 타며, 여섯째로 팔도의 지방 군영에는 세 낼 말조차 없고, 일곱째로 말 다루거나 먹이는 법이 서툴러 그나마 있는 말도 죄다 일찍 죽이는 것입니다.
뭐 몇 가지는 좀 억지로 숫자 늘린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요점은 이 시대의 조선이 말이라는 최중요 전략자원에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박지원은 그러면서 말을 키우고 번식시키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합니다. 사실 이 시대 조선의 사족들이 말 키우는 일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서 그렇지 번식기, 임신한 암말과 종마 관리, 거세 처리 등의 매뉴얼은 조선(동아시아)에도 다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목축에 관심이 컸고, 수레도 그 연장선에서 논했죠. 연암(박지원의 호이지만 동네 이름이기도 합니다)에 가서 살았던 것도 본인은 노새와 나귀며 말을 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아홉 번 강을 건넌다는 것은 황제가 열하로 오라고 해서 지옥의 뺑뺑이를 돌아야 했던 건륭제 칠순 진하사 사신단의 이야기입니다. '일야구도하기'라는 박지원의 글로 교과서에도 나오죠.
그러니까 시준이는 교과서는 봤지만 열하일기 전체는 안 봐서 저렇게 된 겁니다. 열하일기는 이때 인쇄본이 없고 필사본만 있는 상태라 학맥 건너건너 아는 사람인 정약용은 읽었겠지만 시준이 못 읽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죠.
19. 북경 가는 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