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18. 강철의 군주(3)
홍경래가 유비를 본받았을 줄은 상상도 못 하는 시준에게 현재 근심이라면 지
유 쪽이었다. 정확히는 지유 자체가 아니고 이것도 홍경래 때문이기는 했다.
요사이 홍경래가 영세 금점이나 작은 상인들을 유례없이 거칠게 짓밟고 흡수
하는 것이 눈에 걸려서, 주위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혼례는 온갖 핑계로 미루
고 있었다. 아무래도 반란이 임박한 것 같았다.
홍득주와 논의한 대로 홍경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홍득주가 어른으로서(명
색이 의숙부다) 버티며 지유를 보호하는 동안 시준이 뛰어다니며 반란을 무력
화시켜야 하는데, 홍득주의 집안 아이들 중 하나인 지유는 홍경래가 주목하지
않겠지만 시준의 아내인 지유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좋은 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적령기 커플에게 흔히 일어나는 문제가 따라왔다. 지유는
시준이 돈 좀 벌더니 자기를 버리려는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지유를 본 홍득주는 시준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떠넘
겼다. 시준은 입술만 질겅질겅 씹으며 그냥 홍경래를 선제 급습해서 모가지
따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는 중이었다. 대마 몇 상자 있으면 어찌어찌 무마될
듯도 했다.
아무튼 그런저런 일로 시준도 바빴다. 그래서 시준은 빨리 정약용을 보내려고
말을 돌려 보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설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간찰을 주셨으면 되었을 텐데요.”
시준은 제발 그것 때문에 왔길 바랐다. 정약용이 또 이상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용건 들고 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준은 데이트하러 가다가 차에 치었을 때부터 자기 인생에 행운이 좀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정약용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 내가 심란하여 미처 말하지 못했구나. 내가 온 건 공무 때문이다. 이제
곧 만수절 아니냐. 진하사(進賀使)가 가는 길에 평안도와 의주의 대비가 잘
되어 있나 볼 겸, 통무아문과 영길리인도 단속할 겸 해서 나왔다. 불초한 나
도 금번에 부사(副使) 직위 맡았으니 마땅히 진력해야지. 아, 네 서장관 자리
는 탐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핫핫.”
시준은 하나도 안 웃기다고 생각했다. 역시 아저씨들은 19세기건 21세기건 거
기서 거기였다.
시준은 뚱한 표정으로 정약용을 마주 보았다. 부사씩이나 되는 정약용이 기껏
와서 그 말 한 이유가 짐작되어서였다.
가경제의 생일은 시월이다. 조선은 평소 황제 생일에 의례적 선물이나 보냈지
만 건륭제 칠순 때는 특별한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에도 명목은 진하사이나, 최근 국제관계의 급격한 변동을 청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떠보려는 목적이 클 것이다.
그 외에 곧 일본에 보내야 할 통신사 일정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등 여러 외교
적 현안이 있었다. 원래 한참 전에 출발했어야 할 진하사가 이제야 서둘러 가
는 이유는 그간 영국 건으로 이공이 되도록 청과 얘기 안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 정사, 서장관과 함께 대궐에서 임금에게 장엄하게 인사 드리고
와야 할 정약용이 선발대 노릇한 이유도 알 만했다. 이건 혁신 좋아하는 임금
의 뜻이다.
영국인이 청인과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 시준을 비롯한 의주
근문소 일당에게 충성자금 좀 바치라는 얘기였다. 진짜 북한이 따로 없었다.
강철군주 이공이 장인 좀 이겨먹어 보겠답시고 친정 초기에 모자 무역을 금한
탓에 이제 사행길엔 돈이 꽤 많이 든다. 그리고 이공은 그 돈을 메울 방법을
아직까지도 딱히 제시하지 않았다.
시준은 조금 전의 정약용처럼 한숨을 쉬었다. 감자 건도 있고 해서 제자 눈치
보던 정약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옛날 건륭 황제의 칠순 진하사 때 금성위(錦城尉, 박명원)가 정사로 갔었는
데, 곧 연암 선생의 삼종형이 되므로 그 배려로 무관무직의 연암 선생 또한
연경에 갈 수 있었다. 이번 진하정사인 병판 대감(남공철)은 너도 안면이 있
지 않느냐? 내가 한번 말씀드려 보겠다.”
사실 남공철은 지금 개성 유수로 잘 살고 있어야 한다. 허나 지금 조정의 대
격변 때문에 교역과 개항에 호의적인 대신이 너무 부족해서, 그 이공마저도
남공철은 사직도 안 받아주고 외관으로도 안 보낸 채 병조 판서로 계속 두었다.
그러다 이번에 청과의 외교를 전담할 사람으로 뽑힌 것이다. 왜 정약용이 아
닌가 하면, 청과의 외교에 참판은 너무 급이 낮아서 그렇다. 기실 남공철도
약간 모자라기는 하나 이공은 이럴 때 조선이 흔히 대던 핑계를 채택했다.
‘의정 대신들이 늙고 병들어 먼 길을 버틸 수 없으니, 규장각과 대간의 중임
을 두루 역임하여 학문으로 이름 드높은 병판이 황제에게 잘 인사하고 오라.’
조선의 평균 수명이 짧다 하지만 영양 상태가 좋고 나름대로 의료 관리도 받
는 귀족들은 70을 넘겨서까지 재직하는 일도 허다했다.
올해 쉰밖에 안 된 남공철은 힘들다는 말도 못 하고 수락했다. 이공의 ‘그런
데 육로 고생길 얘기하니 말인데 우리도 서양처럼 배를 써서 천진에 가면 어
떨까? 국초 중국의 경도(京都)가 강남에 있을 때는 그리한 전례도 있지 않은
가?’라는 미친 제안을 막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시준은 정약용의 제안, 아니 사실상 관의 명령에 대해 생각했다.
확실히 청에 따라가서 무역하는 일은 웬만한 장사꾼은 얻을 수 없는 특전이
다. 밀무역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워낙 급하게 진하사가 추진되고 미묘한 국제적 갈등도 있어
서 만상이 책문에 따라가는 일이 금지되어, 의주 사람들은 죄다 울상이었다.
시준이 독점의 묘를 아주 제대로 발휘할 기회다.
그런데 그러려면 한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지금 홍경래의 기세가 심상
찮다는 사실은 시준이 빨리 도망치고 싶어하는 이유도 되었지만 동시에 의주
를 쉽게 떠날 수 없는 이유도 되었다.
시준이 의주에 있다면 홍경래의 조직을 잠식하고 있다가 배신할 수 있다. 원
래 계획처럼 말이다. 그러나 만약 두어 달쯤 청에 가 있는 사이 홍경래가 사
고를 친다면 미묘한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다.
어차피 정약용의 말로 보아 남공철과도 이야기가 되었을 터. 남공철은 일전
시준의 비눗방울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니 별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준은 여태까지 슬슬 피하던 홍경래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약용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자를 이렇게 살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네게 힘입은 바 큰데, 이 정도도 못 해주겠느냐.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안심한 정약용은 그렇게 무슨 탐관오리 같은 소리를 하며 웃었다. 원래 친분
과 유착은 현대에도 분간하기가 꽤 어렵다.
쾌속으로 준비된 진하사가 폭풍처럼 북상하는 동안, 시준은 홍경래를 찾아갔다.
왕의 밀조를 힘써 수행하는 홍경래는 요새 야학에도 잘 안 나와서 시준이 가
산까지 사람을 보내야 했다. 예전의 시준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으나, 지금은
정시준의 이름으로 얼굴 좀 보자고 하면 평안도에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홍경래로서도 시준과 홍득주에 대한 탐색은 필요했다. 결국 홍경래는 근왕군
건설을 잠시 접어 두고 의주로 왔다.
근문소에 자리한 홍경래는 시준과 소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예
전 첫 번째로 직접 대면했을 때와 다른 점은, 이제 그 앞에 조기 상차림 대신
시커먼 차가 한 잔씩 있다는 것이었다. 영길리에서 들여왔다는 양탕국(커피)
이었다.
홍경래는 여상한 듯이 입을 열었다.
“서장관께서 날 보자고 하다니 별일이로군.”
시준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 방식이 아니라 현대인
방식으로 말했다.
“행수께서는 조영수호통상장정의 조목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홍경래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시준이 입을 열려고 하자마자 자기가 먼저 잡아
채어 말했다.
“왜, 아편을 팔고 무기를 들여오는 것에 대해 꾸짖으려고 부르셨는가. 그러면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 사욕이 아닐세.
하늘에 떳떳하고 군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이야.”
홍경래는 그럼으로써 자신이 왕의 밀명을 받았다는 암시를 전달하려 했다. 허
나 홍경래가 반역자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했던 시준은 그냥 흔한 반란자의
프로파간다라 여기고 무시했다.
건조하게 나온 시준의 말은 이 시대 기준으로 무례라고 여겨질 만큼 직설적이
었다.
“어차피 사욕으로 난리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자 고금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행수가 뭘 하든지 관계치 아니합니다. 다만 의주나
장자도를 건드렸다가는 영길리군이 쳐들어오는 사태를 결단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주상 전하께서는 서양과 친하려 하시며, 제 스승은 조선국 예조 참판
이니 절대 허풍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겠죠. 중국도 한 수 접어야 하는
세상 최강의 병사들과 관군을 모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홍경래는 시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기들이 관군이며, 영길리군
역시 자기들을 도와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허나 상대가 말해 준다고 자기도 정보를 노출시켜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홍경래는 ‘자신과 같은 근왕파’라 할 수 있는 정약용과 시준을 굳이 적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홍경래는 부드럽게 말했다.
“홍 장주님은 바로 내 의숙부가 되시는데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 일
전 싸전 김씨네 일 때문이군. 아랫것들이 멋대로 벌인 행패는 내가 사과하지.
단속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게 하겠네.”
홍경래는 자신이 군대를 모으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준은 그 틈을 노
려 제안했다.
“저는 이번 진하사의 부사로 가시는 선생님을 따라 연경에 갈 생각입니다. 그
리고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2년 전 평안도에 잠깐 살았던 청국 무뢰배 임
모(林某, 임청)가 동인도양행의 배려를 얻어 중국으로 건너갔지요. 그때 임씨
가 말했던 망극한 일을 아마 이제는 행수께서도 들으셨겠지요?”
평안도에서 음란소설 구술이나 하며 먹고산다고 사람들이 깔보아서 그렇지 임
청은 청조를 진감케 했던 반란자다. 기나긴 중국사 전체를 뒤져봐도, 내부인
도 아닌 주제에 세 자리수가 될까 말까 한 인원으로 황궁을 습격한다는 용자
는 찾기 힘들다.
그리고 지금의 팔괘교는 천리교(天理敎)와 혼합 또는 잠식되어 더 규모가 커
졌다. 후천조사 임청은 시준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원한 무기와 본인이 윌
리엄 자딘을 통해 다시 끌어모은 무장으로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는 세력을 갖
추었다.
그리고 홍경래가 평안도에서 반란이든 존왕이든 군사 행동을 하려면 청의 정
세를 모르고서야 말이 안 된다. 그 정세가 자금성 습격의 대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큰일을 도모하려면 사세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갔다 오면 연경 유람기
나 들려 드리지요. 제가 학문이 엷어 연암 선생의 글(열하일기)만은 못할지라
도, 심심풀이 정도는 될 겝니다. 욕속부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청에서 정세를 파악해 와 본격적 거병 시기를 조절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홍경래가 의주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시준을 높이 평가하는 홍경래는 요즘 단속도 잘 안 되는 부하 열을 버린 것보
다 이 불안한 동맹자가 같은 편으로 들어왔다는 데에 더 기뻤다.
홍경래로서도 고민이 많았다.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반란군에서 왕의 근위군으
로 태세 전환하는 일이 쉬울 턱은 없다. 벌써 예전에 영길리 무역으로 돌아서
서 데면데면해졌던 김창시 같은 사람은 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손을
놓았고, 이제초(李濟初)처럼 성격 괄괄한 무장은 거의 공개적으로 홍경래를
절조 없는 인간이라 비난하는 판이었다.
그래서 왕이나 시준의 생각보다는 사정이 많이 안 좋았던 홍경래에게, 이건
지역 호족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다. 벌써 의주를 정복한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큰 과장까지는 아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 1, 2년쯤 더 못 기다리겠는가. 어차피 그들은 이제 왕의
근위군이니 급하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홍경래는 자기가 부하들에게
했던 말이 시준의 입에서 다시 나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홍경래는 커피잔을 찻잔 쥐듯 감싸 쥐었다. 아직 그렇게 많이 식지는 않은 커
피를 홍경래는 단 한 모금에 술처럼 들이켜 버렸다.
예전 조기를 한입에 처먹을 때도 그렇고 시준은 대체 홍경래의 입과 목이 뭘
로 이루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홍경래는 씩 웃었다.
“내 명심하겠네.”
이서구는 끈질긴 상소 끝에 드디어 서울로 올라가서 이조 판서 자리를 얻었
다. 왕으로서는 노론 견제의 목적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역사와 같이 이만수(李晩秀)가 평안 감사를 하고 있는데 그는
노론 시파로서 김조순의 계파라고 할 수 있었다.
원 역사의 홍경래가 몰지각한 지역 차별을 다소 과격한 방식을 통해 교정하기
로 결심한 순간 하필 평안 감사를 하고 있었다는 죄 때문에 경주로 유배 가는
고생도 하지만, 이 시대 극옹(屐翁) 이만수의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규장각과 승지부터 해서 각종 판서, 삼사의 최고위직 등 조선의 영달이라는
영달은 다 누려 본 명신이고 글씨도 잘 썼다. 세도가이기는 하지만 원로라고
는 할 수 없는 나이인 김조순 대신 노신의 무게감으로 노론 시파의 좌장 노릇
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만수에게 남공철이 선배에 대한 예의로 한번 사행길에 인사 드리겠다
고 하며, 과거 왕이 바뀐 중요한 시기에 사은정사로 갔던 이만수의 조언을 청
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만수의 반응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는 점잖게 말했다.
“인군의 명은 밤낮없이 달려 준행할 뿐이다. 하물며 국가의 중요한 사업을 하
고 있는 지금 사사로운 지체는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부족한 나의 실덕으로
지금 서도 백성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주린 빛이 떠도는데, 임금께서 서도에
베푸는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감히 게으르겠는가? 정사(남공철)는 이 늙은이
를 만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정해진 물목을 받고 급히 길을 서두르도
록 하라.”
남공철은 지금 빨리 안 가면 황제 생일에 늦어서 외교적 트집을 잡힌다는 것,
그리고 왕의 외교정책을 시파가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만수가 왕이 평안도에 총애를 내린다고 오만 곳에 광고하는 주제에 실질적
도움은 별로 안 된다고 불평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
사실 모두 반박할 말이 별로 없었다. 특히 마지막은 더욱 그래 보였다.
남공철은 얼굴이 누렇게 떠서 빛 없는 눈으로 길가에 물러서 있는 백성들을
둘러보다가 말채찍으로 군자창을 가리켰다. 시준이 옛날 김창시와 함께 의를
펼쳤던 그곳이었다.
“본래 나라의 행사에 잡인과 훤화를 엄히 금한다 하나 오래 주린 사람이란 단
한나절을 먹느냐 주리느냐에 따라 양기가 급작스럽게 꺼져 죽고 사는 일이 갈
리니, 예법으로서 지체할 수 없다. 건량(乾糧, 여기서는 죽에 대비되는 마른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사행길의 행차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말고 수행하도
록 하라.”
엄밀히 말해 남공철은 그런 지시를 할 권한이 없다. 허나 관속이며 아전들은
기뻐했다. 굶어서 뵈는 것도 없는 백성들의 눈이 점점 난폭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전 시준이 보았던 것처럼 행패를 부리던 때에 비교하여 그들이 개과천선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일도 원래 일종의 사회적 합의에 따른 연극에 가깝다.
지금 거꾸로 세곡을 나누어 주는 마당에 뜯을 뇌물도 없는 백성들에게 관성적
으로 야료를 부렸다가는 이 굶주린 백성들이 관속들을 몰매 쳐서 잡아먹을지
도 몰랐다. 남공철이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도 사신단에 대한 충동적 습격을
우려해서였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비단옷 걸치고 예물 바리바리 실은 사절단이 지나가고, 백
성들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곡식 자루 받아 갔다.
지금 의주에서 사신단 기다리고 있는 시준이라면 그 곡식이 과연 며칠분이나
되는지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조선에서 더 오랜 경험이 있는 남공철의
생각은 좀 달랐다.
저들은 보나 마나 저걸로 배 터지게 먹고 또 굶주릴 것이다. 어떤 자는 술 같
은 것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백성들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만큼 멍청해서는 아니다. 곡
식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필연적인 부작용이 따라온다.
남공철은 씁쓸하게 말했다.
“사행길에 임금의 은혜를 보여야 하니, 환곡의 환수를 좀 지체시키는 것이 어
떻겠냐는 글을 주겠다. 마부 하나를 시켜 감사께 서신을 전하고 뒤따르게 하
라. 후배로서 방백의 정사에 참견하는 일이 온당치 못하나 내가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예. 대감.”
가을걷이가 끝난 계절이라 응당 빌려주었던 환곡을 회수해야 한다. 여기서 백
급 받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빌린 환곡도 있고, 기껏 받아간 백급을 아전이
나 수령이 환곡 갚으라는 명목으로 도로 빼앗아가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수령들이 딱히 환곡의 유지라는 국가 사무에 불타는 충정을 갖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채워 넣어야 할 환곡이 한 섬이라면 석 섬을 징수해서 아래
위로 나눠 먹는 게 이 시대 조선의 공무원 성과급 지급 방식이다.
세금으로 거두었다가 다시 환곡 회수 성과 평가해서 나눠주는 행정력 낭비를
원천 봉쇄하는 지혜롭기 짝이 없는 정사였다. 그 놀라운 지혜에 감동한 백성
들은 얼마 전 북청에서 말 그대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수령을 인두
로 지져 버렸으니까.
거기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을 유지에게 빚진 걸로 되어 있는 곡식이나
내지 못하고 밀린 군포까지 고려하면 애초에 저축이란 개념 자체가 어리석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이 전근대 사람에게 얼마나 무의미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병조 판서인 남공철은 조선의 군량, 그러니까 환곡의 현황에 대해 잘 알고 있
었다. 왕이 서양식 신군(新軍) 만든다고 군량 일부를 풀지 않고 꿍쳐놓는 것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무비가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나, 지금은 일단 쌀을 대
량으로 풀어서 쌀값을 낮춰야 한다. 김조순의 말마따나 백성 다 굶어죽으면
지킬 것도 없는 군대가 있어 봤자 뭘 하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쌀을 먹지 않는다. 조선에서 쌀이 사실상 돈이라 해도 차
라리 금은으로 바꿔 두는 게 낫다.
허나 아무래도 지금 임금은 쌀값이 더 치솟기를 기다려 그것을 더 많은 돈으
로 남겨두려는 고려를 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주색잡기 즐기는 암군이
낫지 어리석은 천품으로 쓸데없이 국정에 힘쓰니 더 골치 아팠다.
평안 감사 이만수는 이 시대의 명필이기도 하다. 남공철은 무례를 약간 상쇄
하기 위해 사자관(寫字官, 글씨를 정서하는 양사의 관원)으로 따라온 김정희
를 불러 환곡 회수의 연장을 고려하도록 권고하는 서신을 쓰도록 했다.
이때는 아직 추사체가 완성되기 전이지만, 피카소가 정물화 못 그리는 것 아
니듯 김정희도 이 시점에서 능숙한 서예가였다. 그가 채제공에게 명필의 자질
이 보인다고 칭찬받은 건 이미 일곱 살 때다.
사행길이라 마필은 부족하지 않았다. 김정희가 솜씨를 발휘한 서신이 평안 감
영으로 달려가자 남공철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경제가 요새 좀 정신없다 해도 영국 해군의 대규모 병력이 광저우에 입항한
일은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열하에 있던 가경제는 영국의 의도를
묻게 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에 대해 암허스트 남작의 대답은 예상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매카트니 자작의 말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했다. 외교관계 설정과 공무역
확대였다.
청 관리들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암허스트 남작에
게 황제 앞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예법을 요구했다. 그리고 윌리엄은 매카트
니처럼 그것을 다시 거절했다. 여기까지는 시점이 좀 빠를 뿐 원 역사와 같다.
허나 로드 암허스트는 한 가지 말을 덧붙임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다시 틀었다.
“중국에서 우리의 입경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조금 더 전향적
인 조선으로 가서 대규모 공무역 개편을 협상하겠소.”
‘조금 더 전향적인 조선’이라는 말은 가경제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생각을 떠
올리게 만들었다.
일전 흠차대신 부찰복장안은 황제가 너그럽게 통상을 허락했음에도 조선이 뻔
뻔하게 아무것도 희사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아무래도 조선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자도에서 조선과 영국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청의 무뢰배나 도망자가
장자도로 몰래 건너가도 송환조차 잘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었는데, 청으로
서는 대국의 아량으로 소위 비무장지대라는 조약을 존중해 주기 위해 군사적
압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지만 조선왕은 영국을 방패로 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조선이 진하사 보내기 전 전례에 따라 먼저 성경부로 보낸
파발이 도착했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가경제의 눈에는 일개 제후국의 정2품 따위가 정사라는
점에서 이미 조선의 불손함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조선에 가서 아무것도 못 얻어온 전적 때문에, 부찰복장안은 이러한 조선왕의
불손함을 부채질했다는 탄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해 요란하게 주청했다.
“당장 천병 십만을 일으켜, 뻔뻔하게 건너오는 소위 진하사를 모조리 묶어 앞
장세운 뒤 패수(압록강)를 건너십시오. 조선왕을 다시 한 번 삼전도에 무릎
꿇리고 한성의 백성들을 전부 잡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영국이 마카오를 점령했을 때도 일으키지 못한 천병 십만이 그리 쉬울
리 없다. 가경제도 과연 이공이 제 선조처럼 부드러운 허리놀림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긴 했으나 지금 청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고 막대하게 유입되는 아편 때문에(조선 아편도 단단
히 한몫했다) 강남이 불안하고, 백련교도 잔당이나 묘족이 쉴새 없이 봉기를
일으켜서 전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무리 청이라도 이젠 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조선과 오래 교우한
청은 조선의 저력이 국가 정규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만 무사하면 각지에서 끈질긴 근왕군이 일어날 터. 솔직히 병자년 때도 조
선왕이 며칠만 빨리 도망쳤더라면 패배하는 쪽은 청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지
금의 거대 제국 청이라면 설마 지지는 않겠으나, 전비는 그야말로 밑빠진 독
에 물 붓기가 될 게 틀림없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국가 예산보다도 많은 가경제의 사비를 쓰면 물론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그런데 가경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 있으면 자기 생일이다. 생일에 전쟁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가경제가 쪼잔해도 그 거대한 만수절 비용을 전액 국고로 쓰자는 양심 출타한
소리까지는 못 한다.(일부는 국고가 맞다.)
그런데 여기서 전쟁까지 하면 황제의 재산은 불가피하게 급감한다.
“덕을 실천해야 할 천자로서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은 할
수 없다. 괜히 조선 사절을 박대하여 의심을 품게 하지 말고 아량으로 감싸
안되, 세심하게 살펴 만에 하나 실수가 없게 하라.”
결국 새로운 조치는 없다는 얘기다. 21세기에도 툭하면 관청에 배포되는 공직
기강 확립 공문처럼 전혀 아무 의미 없는 가경제의 명령이 반포되는 동안, 윌
리엄 피트 암허스트는 광저우의 청 관리들에게 뇌물을 퍼부었다.
‘어떻게든 알아서, 하지만 오랑캐에게 쟁단은 주지 않도록’ 영국의 출항을 방
해하라는 지시를 받은 광저우의 관리들은 ‘어떻게든 알아서’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결국 로드 암허스트는 큰 문제 없이 조선을 향한 출항 준
비를 진행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말
1. 조선은 외교(비슷한 것)를 할 때 무조건 청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도 원래 보내기 전 그 일정과 목적, 경로를 상세히 북경에 보고하는 게 원칙이었죠.
2. 조선은 여진족에게 머리 숙이는 게 싫었기 때문에, 조공으로 얻는 많은 이득에도 불구하고 진하 겸 사은정사라던가 진하 겸 동지정사라던가 해서 몇 가지의 조공 건을 한 탕에 해치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오만가지 명목으로 조공 늘려 보려던 국초 명나라 때의 조선과는 상반된 입장이죠. 작중 시점인 1810년의 진하사는 보내지 않은 건지, 기록을 안 한 건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3. 본래 조선의 구휼은 (쌀이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양을 불리기 위해 죽 형태로 배급되었습니다. 허나 조선 후기, 환곡이 넉넉히 비축되면서 작중 나온 것처럼 건량 - 다시 말해 그냥 곡식을 주는 것으로 바뀌죠. (건량에는 건빵이나 비스킷 같은 곡식 보존식품의 뜻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건 아니고 그냥 죽으로 끓이지 않은 마른 곡식을 말합니다.)
이는 쉽게 상상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습니다. 빨리 나눠줄 수 있고, 땔감도 안 들고, 빼돌려서 장난질 하기도 어렵고.... 근데 이 환곡이 7년의 탕왕급 흉년 이후로 급감하고 도로 채워 넣는 과정에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지면서 모두 아시는 것처럼 조선의 막장화가 진행됩니다.
19. 북경 가는 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