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59화 (59/284)

59화

18. 강철의 군주(2)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어찌 밥 한 그릇 안 먹여서 보낼 수 있느냐는 이공의

말 자체는 먹혔다. 조제프 푸셰와 그레테 자작은 스무남은 명의 장교 및 수행

원들과 함께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공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열성조가 옛날 여진족 추장들을 대접하던 예

에 따라서 연회를 열고 거기서 푸셰를 만나겠다고 했다.

여기서 또 정약용 핑계가 나왔다. 고증 결과 공작은 만족의 군주에 대응하니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회에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 게다가 이태 전 흠차대신도 퇴짜 놨으면

서 불랑국 놈들은 직접 만난 일 들키면 청에 어떻게 변명하려 하느냐는 신하

들의 간절한 애원은 모두 묵살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신하들의 마음속 불만까지 묵살해 버릴 수는 없다. 그들

은 집에 돌아가서 이래저래 뒤탈 없을 만한 말로 쑥덕거리기 시작했고, 자연

스럽게 사대부의 중의는 저 불랑국 놈들이 주상을 현혹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푸셰에겐 다행스럽게도 여긴 일본이 아니라서 누가 칼 뽑아 들고 협객의 이름

을 소리 높이 외치며 가마를 습격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일단 가마에 타고

오질 못했다), 석전 놀던 솜씨 발휘하여 돌을 던지다가 끌려가는 자는 종종

나왔다. 원래 조선 사람들이 좀 원거리에 특화되어 있다.

푸셰는 그런 분위기를 금세 파악했다.

“우리는 조선 신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레테 자작이 푸셰의 씁쓸한 말에 대꾸했다.

“야만족의 텃세는 익히 겪어 봤지요. 일반인이 국제정치나 외교를 어떻게 알

겠습니까?”

“아니, 내가 보기에는 이건 권력층 내부의 갈등이다. 십분 주의하게. 우리는

겸손하게 행동하면서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해. 조선 정부 내부에 반유럽파가

얼마나 되는지, 혹은 친영파가 얼마나 되는지 같은 것들 말이야. 필요하다면

회유를 시도할 수도 있고.”

“그렇게 여유가 넉넉할까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표류자 신세 아닙니까. 중국

처럼 건네주고 군주의 환심을 살 장난감도 없어요.”

그레테 자작은 말하던 도중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것도 아우스터리츠를 예물로 바쳐서 성사된 일이라 들었습니다. 각하께서

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해군 장교로서는 돌아가자마자 직책을 반납해야

할 치욕입니다.”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뭐, 꼭 돈만이 다는 아냐. 마지막까지 잃

지 않는 재산은 여기 갖고 있잖나.”

푸셰는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는 웃으면서 그레테

자작에게 당부했다.

“일단 자네들은 쓸데없는 소동이나 시비를 조심하게. 누가 대들어도 그냥 피

해 버려.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각하. 단속해 두겠습니다.”

조제프 푸셰는 자기 말을 지켰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정부와 나폴레옹 제정,

복고 왕정까지 3개의 극단적인 정치 체제를 노련하게 헤쳐 나갔을 뿐만 아니

라 그 모두에서 권력을 움켜쥔 그의 관록은 어설픈 것이 아니었다.

연회 자리에 나온 살기등등한 조신들은 어서 왕의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호령

했다. 그 이면에는 만약 저놈이 예전 건륭 황제 앞의 마알침니(매카트니)처럼

건방진 태도를 취하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쫓아내 버리려는 속셈이 있었다.

하지만 수행원을 모두 밖에서 기다리게 한 조제프 푸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저 멀찍이서 높이 앉아 있는 이공을 북면(北面)한 채 양손을 땅에 대고 공손

히 절하는 그의 자세는 가장 엄격한 예학자라도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양인의 오만방자함만 익히 들어온 김재찬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박윤수는

네가 한 말과 다르지 않느냐며 김조순을 쏘아보았다. 김조순도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대신들이 모두 그렇게 벙쪄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준에게서 그

가 불랑국의 사마중달(司馬仲達)과 같다는 평을 들은 정약용만은 푸셰를 날카

롭게 살폈다.

‘스승에게 배운 예를 말 한마디에 우습게 바꾸니 의(義)가 없는 것이요, 자기

군주보다 높은 예를 타방의 왕에게 취하니 이는 충(忠)이 없는 것이다. 시준

의 말이 옳았다. 저자는 곧 군왕을 배신할 자다. 패왕 나씨는 실로 항우와 같

구나. 영포(英布)와 같은 자를 신임하여 중신으로 두었으니 곧 망할 것이다!’

정약용의 눈은 정확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가 공산주의 선언문을 쓴

뒤에 다시 열렬한 황제주의자도 한 사람인데 푸셰에게 그까짓 무릎 운동 따위

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혹시 푸셰가 진짜 사마의처럼 낭고상(狼顧相)인지 목을 좀 돌려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정약용이 하는 동안, 푸셰는 궁정에서 쓰는 중후하면서도 거세지

않은 외침을 발했다.

“조선 국왕 폐하의 장수를 축원합니다[Long live the king]. 폐하의 앞날에

하느님과 인민의 총애와 찬사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저는 프랑스 인민의 황제

[Emperor of the French]인 나폴레옹 폐하의 뜻을 받들어 온 사절, 오트란토

공작 조제프 푸셰입니다.”

조선 궁정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다. 그

래서 푸셰는 영어로 말했다. 이런 유연한 자존심의 왜곡도 푸셰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이공은 그런 푸셰에게 뒤처지지 않는 감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일찌감치 시준과 친해 둔 보람이 있어 영어 실력으로 어전에 입시하는 기회를

잡은 김시택은 방금 푸셰가 “국왕 전하 천세”라고 했으며 자기 소개도 하였다

고 아뢰었다. 그러자 이공은 모든 예법을 걷어치우고 위엄 있게 말했다.

“내가 바로 조선국의 왕 이공이다. 불랑국의 사절은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기사관과 봉례랑 등 하급 관리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들은 왕이 자기 입

으로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처음 들어 보았다. 이제 꽤 겪어서 다 포기한

고위 조신들만이 쓸쓸하게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김조순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왕은 저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아니, 말 자체

를 해서는 안 됐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왕이 할 말이 있더라도 근시를 통

해 전하는 게 예법이다. 어느 외국인이 왕과 직접 말을 하던가?

여진족 추장의 예가 어쩌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

은 너무나 심각했다.

‘사절이라니, 사절이라니!’

저 불랑국 놈이 사절이니 뭐니 떠들더라도 조정은 그걸 인정해선 안 된다. 하

지만 이공은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아직 프랑스의 위치에 대한 조정의 합의도 없는 상태다. 그러나 왕은 ‘불랑국

의 사절’을 왕이 맞이한다고 말해 버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남아일언 중

천금이라 하지만 왕의 말은 그보다 천 배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역을 들은 조제프 푸셰는 – 그래도 명색이 궁정이라 그런지 상놈 영

어는 아니었다 – 너무나 생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고개 숙인 채 미소지었다.

‘역시 반대하는 것은 기득권층 귀족들이고 왕 자체는 전향적이다. 좋아. 자신

감만 넘치는 젊은 군주와 이권 잃기 싫은 토착 귀족 관료들이라. 손쉬운 구도지.’

이래 봬도 혁명 열사였던 푸셰의 눈에 조선의 귀족들은 앙시앵 레짐 당시의

1, 2신분과 같이 보였다. 조선 사대부가 무사는 아니었지만 유교의 성직자 겸

세습 기득권층인 건 맞으니 아주 틀린 분석은 아니었다.

혁명의 이름으로, 구체제는 깨져야 한다.

푸셰는 이 군주에게 자신이 유럽 문명의 빛을 전함으로써 그 역할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거라 보았다.

그리고 대프랑스 제국의 아시아 전략, 나아가서 귀양살이에도 불구하고 혁혁

한 공을 세워 복귀할 자신의 영광에도 말이다.

영국 녀석들은 분명 공식 외교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멍청한 놈들이다. 어떻

게든 조선과 국가적 외교를 트고, 군사고문이든 전권대사든 뭐든 좋으니 중앙

정부에 사람을 심었어야 했다.

전제 군주국에서는 그까짓 작은 개항장 따위 왕의 손가락질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다. 유럽 해군이 무서워서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은 순진한 예측이다.

그건 전쟁 시 최소한의 여론을 살펴야 하는 유럽 국가들 얘기다. 전제 군주

입장에선 노예 따위 몇 만, 몇 십만이 죽건 그 무게는 군주의 자존심보다 무

거울 수 없다.

동인도 회사 놈들은 중국에서 그토록 겪고도 깨닫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장사꾼은 만년 장사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연회는 시작되었다. 신하들 중 누구는 푸셰에게 호기심을 드러내고,

누구는 끝나고 왕에게 상소라도 단단히 하리라 벼르며 누구는 뒷감당이 두려

워 곧 떠날 이번 만수절(萬壽節, 청 황제의 생일) 사신단에서 빠질 궁리를 하

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프랑스인을 불편함과 노여움으로 보고 있는 와중에, 푸셰는

태연하게 자기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푸셰가 유일하게 아쉬워한 점은 치킨과

삼겹살이 없는 것 정도였다.

‘역시 그 아이는 왕족이나 귀족은 아니었군.’

술이 몇 순배 돌자, 푸셰는 왕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세조나 정조

휘하에서도 살아남았을 법한 사회 생활력이었다.

“폐하. 일전 제가 올린 서신에 응답하셔서 여러모로 잘 보살펴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옛날에 갑질 쏠쏠히 하던 여진족은 이제 갑이 된 지 오래요, 일본도 태평성세

가 오래된 이후로는 조선에 잘 머리 숙이지 않아 오랜만에 외교에서 거드름

좀 피울 수 있게 된 이공은 편하게 말했다.

“타방의 관헌이라 해도, 나라 섬기는 일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신하에게 어찌

그 정도도 못 해주겠는가. 요사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국고가 곤궁하여 처음

에 대접이 박했음이 미안할 뿐이다.”

주위의 신하들 전부가 ‘야, 우리 집 가난하다는 말은 왜 해?’ 하는 심정이 되

었으나 곧 재빠르게 표정을 감추거나 음식을 노려보았다.

그 분위기를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기술로 파악한 푸셰는 은근히 말했다.

“폐하의 광명 가득한 통치에도 그런 불가피한 일이 있군요. 그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는데, 이런 자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지만 원래 유럽에서는 연

회 중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풍습이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실 조선도 국초에는 연회 자리에서 여진족이 주청 같은 걸 올리곤 했다. 당

시 누가 여진족 잘 잡나 겨루는 것 같았던 무서운 조선왕 기분이 그나마 가장

좋을 때니까. 이공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미 서양국의 사적을 익숙히 하였다. 서양 보로사국의 불씨왕도 그대

나라의 학자(볼테르를 말한다)와 수라를 같이하며 조언을 들었다 하지. 내가

마땅히 그를 본받으려 하므로, 이치에 맞는 말이라면 가납하겠다.”

“과연 폐하께서는 그 학식이 깊어 진정코 계몽된(Enlightened) 군주이십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는 군재(軍才)가 욕심에 못 따라가 나라를 망칠 뻔했던

군주인데, 어찌 지금 폐하께 비교되겠습니까?”

그 말로 다시 이공을 한껏 도취되게 한 푸셰는 용건을 말했다.

“저도 평양성에서 여러 가지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현명한 결단이 있

으시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셔야 하므로 이것이 군주의 무거운

책임입니다. 우리 프랑스의 신의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을지라도, 뭇 사람들

이 의심하니 이는 또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공은 좀 불편한 심정이 되었다. 프랑스와의 수교를 방해하는 대신들이 떠올

라서다. 정말이지 이런 것들을 데리고 외교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

까웠다.

“그래서?”

“그러나 아시아인이 유럽인에 대해 나쁜 평판을 갖고 있는 건 전부 영국 때문

입니다. 영국인은 원래 조상이 해적이라 지금도 지구 전역을 돌아다니며 해적

질을 하는데, 강력한 해군을 믿고 차마 어전에서 말할 수 없는 만행을 다 셀

수도 없이 저질렀습니다.”

정약용의 강렬한 텔레파시 덕분인지, 이공은 여기에서 정신을 좀 차렸다. 하

긴 지금 그가 원대하게 구상하는 것은 청-영국-프랑스의 삼국 균형 외교지 프

랑스에만 매달리려는 것이 아니다.

“사절은 어찌하여 두 나라를 이간하는 말을 하는가? 영길리인이 싸움 좋아하

는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껏 장자도에서는 아무 말썽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다만 영국을 저희와 비교해 보시면 금세 선악을 분간하실 수 있

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국교를 맺는 것은 폐하로

서도 쉽게 결단하실 일은 아니시겠죠. 물론 폐하께서 저 솔로몬과 같은 지혜

로 영국의 악덕을 꿰뚫어 보신 덕분이겠지만 영국과도 정식 수교는 아니 하셨

으니까요.”

정약용은 시준의 평가가 좀 틀렸다고 생각했다. 사마의는 자손들이 문제지 솔

직히 생전에는 저렇게 딱따구리 나무 쪼듯 아부하고 다니지 않았다. 저 정도

면 안록산이나 진회(秦檜)도 못 따라갈 솜씨였다.

하지만 안록산과 진회가 왜 성공했는지 푸셰가 지금 보여주고 있었다.

이공은 푸셰의 말을 경청했다. 가려운 데를 싹싹 긁어 주는 푸셰의 교언이 청

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면 저희에게 영국인과 같은 기회를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국교 없이,

아편 없이, 무장 없이 평화롭게 사람과 물산만 오가는 겁니다. 중국은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다 알아서 황제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저희는 중국과 2백 년

전부터 신실한 성직자들의 교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일이 성사된다면,

우의의 증표로 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강군 건설을 위한 차관 제공의 용의가

있습니다. 당연히 군사와 기술적 조언을 할 고문도 파견해 드리죠.”

이공의 귀가 번쩍 뜨였다. 김조순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여기서

왕의 대화를 방해할 수 있는 자는 왕의 장인인 자신뿐이다.

허나 이공은 김조순을 엄히 바라보았다. 김조순조차도 더 이상 정면으로는 어

쩔 수 없었다.

이공은 신하들에게 댈 마지막 핑계를 푸셰에게서 얻기 위해 물었다.

“너희는 다른 나라와 교유하면 꼭 교사를 파견한다고 들었는데, 무군무부한

너희의 교는 우리나라에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사

람이 많다.”

푸셰는 사제로서의 자신을 내버리고 혁명 열사와 공산주의자로서의 자신만 능

숙하게 남긴 다음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건 옛적 부패한 왕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혁명으로 일신한 프랑스 제국

은 정치와 종교를 엄히 분리합니다. 왕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사제도 조선에

들어올 수 없게 하겠습니다. 북경교구와 외방전교회를 제가 책임지고 단속하

지요.”

이공은 슬몃 또 다른 욕심이 들었다. 자신이 절묘한 외교로 실리를 취한다고

생각하던 그는 뭐 하나 더 캘 것을 떠올렸다.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이들의 벨

테브레화 계획이다.

“병기 제도에 도움 줄 사람을 보낸다 하나, 그대 나라에서 여기까지는 워낙

오래 걸리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필시 황제가 특별히 뽑아 보낸 준재들로서

타인이 미칠 바 아닌 재주를 갖고 있을 터인데 그대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

는가?”

이 시점에서 질문을 한 이공과 질문을 받은 푸셰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가!’

푸셰는 즉각 대답했다.

“어전에서 감히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할 수는 없지요. 저는 전쟁이나 기계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허나, 이미 보고받으셨겠지만 저는 경찰장관으로서 오래

재직했고, 제국의 모든 첩보와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폐하께서 무엄한 반역자

와 음흉한 범죄자를 엄히 다스리시어 왕국의 질서를 확립하시는 데 도움이 될

여러 방편을 조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유능한 해군 장교인 그레테 자작에 대한 것은 숨긴 채였다. 그건 조선이 더

아쉬워할 때 내놔야 했다.

하지만 이공은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운세에 크게 기뻐했다. 그가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 정시준이라는 장사치는 워낙 천해서 관의

권위를 업기가 힘들어 활용에 한계가 있었다.

홍경래의 반란군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국가체제 자체를 무너뜨릴 각오가

되지 않고서야 대놓고 내놓아 써먹기 힘든 집단이었다. 적어도 당장은 곤란하다.

그러나 푸셰의 도움을 받아 조정 관청을 정비하면 그것은 합법적이고 표면적

인 기구다. 그래서 사용하기 부담 없는 왕의 권력이 된다.

왕은 몇 번이나 푸셰를 치하하며, 그를 옛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의 전례에

따라 왕의 조언자 역할을 임시로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김조순은 설마설마 했지만 불랑국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의 명예직을 내린다

는 대목에서는 현기증마저 느꼈다. 여진족 추장에게 내리던 이 관직은 프랑스

인에 대한 우대의 의미와 동시에, 조선이 여진의 상국이던 시절을 아직 그리

워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 위험한 얘기가 된다.

아무리 이번 왕의 예법 무시에 익숙해진 신하들이라고 해도 이리 맘대로 능욕

당하는 사서와 고전이 불쌍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이 소식은 내려친 얼음에서 금이 뻗어가는 속도로 퍼졌다. 삼남에서는 유생들

이 도끼 들고 올라오고, 조정에서는 상소가 폭풍처럼 나부꼈지만 강철의 군주

이공은 강철같이 그것들을 무시했다.

김조순이 끓어오르는 심화를 이기지 못해 끝내 앓아누워 버린 것도 이공의 자

신감에 한몫했다. 이공으로서는 기왕이면 장인이 이대로 영원한 안식을 취했

으면 싶었다.

사실 조선의 체제상 왕이 이렇게 나올 경우 진짜 반역이 아니고서야 방법이

없다. 그런데 왕이 선비들을 떼로 죽였다거나 어머니를 폐했다거나 동생을 처

형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어서 동지를 모을 명분이 부족했다.

관직 가진 신료들은 이 사태에 대해 대량 사직으로 시위했다. 그러나 이것도

왕이 백탑파나 심지어 평안도 진사를 대량으로 뽑아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부분이 슬금슬금 철회하고 말았다.

김조순의 혼신을 다한 설득 덕분이었다. 진짜 이렇게 되면 왕에게 사화 한 번

없이 조정을 손쉽게 갈아치우는 행운을 안겨주게 된다. 그 다음에는 정말 손

쓸 수 없다.

왕대비 김씨나 수빈 박씨에게 저 철딱서니 어떻게 해 보라고 선을 넣는 자들

도 있었다. 허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었다. 그 둘은 저번 경희궁 건으로

이미 신료들에게 감정이 안 좋아서 역효과만 났다.

왕대비는 차게 빈정거렸다.

“구중궁궐의 아녀자들이 약한 마음에 저어하여 방을 옮긴다는 것도 어리석은

말이라 떠들며 결코 용납하지 못했던 명철한 사람들이 왜 이 일은 주상께 제

대로 아뢰지 못하는가?”

신하들은 사람이 평소에 인덕을 잘 쌓아야 한다는 교훈만 되새기고 눈물을 삼

켰다.

이공의 파천황적인 행보는 아무도 멈출 수 있는 자가 없어 보였다.

한 달 뒤, 용천부에 공무 출장 온 정약용은 의주에 들러 제자를 만나 보았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판의금부사와 좌우 포도장은 오랑캐가 정사에 참견함이 부당하다며

정사장 내었지만, 오히려 그게 복공의 목소리가 더 커지는 기화가 되었다.”

이공은 정사장 낸 판의금부사 홍명호(洪明浩)를 한 번 잡지도 않은 채 보내

버리고 대신 한만유(韓晩裕)를 그 자리에 임했다.

한만유 자체는 별달리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지만 그 부인이 후일의 정경부인

조씨(曺氏)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녀는 장동 김문을 견제할 또 하나의 권문인

풍양 조문의 일가였다.

좌우 포도장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우포장으로서 검계를 토벌하였던 이요헌은

이때는 어영대장으로 있다가 대간의 얼굴을 모르고 질책한 죄로 양사의 탄핵

을 받았는데, 본래 좀 시간 끌다가 내년쯤 체직하고 다시 평안도 절도사에 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요헌은 이제 조선 최초로 수경포도청(守京捕盜廳)의 대장을 맡게 되었다.

동서로 관부를 나누는 전통적 조선의 체계 대신, 한성의 오부 행정구역마다

책임자를 명확히 하고 그 총책으로 하나의 수위를 두라는 푸셰의 조언이었다.

그 대신 원래 좌우 포도청이 함께 관할하던 동서 경기도의 구역은 그 책임이

수령에게 넘어갔다. 거기까지 경찰 만들 돈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기도 쪽 포도군관 전력이 서울로 흡수되었으며, 왕

은 한 푼도 새로 들이지 않고 막대한 직속 수도경찰 병력을 추가 소유하게 되

었다.

푸셰에 대한 왕의 신뢰는 공고해졌다. 푸셰 또한 무턱대고 나댈 인물은 아니

어서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예법을 지키니(왕이 내린 하사품을 전부 뇌

물로 썼다는 뜻이다) 일부 대신들 중에서도 뜻 자체는 좋은 게 아니었느냐는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조정의 권력구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시준은 한 가지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 이거 완전히 고등경찰 포진한 종로 경찰서잖아. 그러면 조폭 노릇 하

고 있는 박득출에게 피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정약용의 시큰둥한 태도를 본 시준은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조선의

치안은 이 나라의 다른 행정과 마찬가지로 권력자들의 동의가 없으면 절대 작

동하지 않는다.

푸셰도 서울의 치안을 정말 확립하는 일에는 관심 없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왕의 신뢰를 얻는 일이요, 그러려면 오죽당 같은 경제사범보다는 정치범

에 집중해야 한다. 오히려 오죽당은 푸셰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다소 안심한 시준은 정약용이 의주까지 와서 바라던 것, 그러니까 서양에 대

한 조언을 내주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차관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아마 조정에서는 저 멀리

있는 자들이 설마 빚 받으러 여기까지 오겠느냐 하는 생각인가 본데, 그들은

정말 옵니다. 그런 뒤에는 돈뿐만 아니라 땅에 사람에 정병(政柄)까지 탈취해

갈 겁니다. 아니, 처음부터 빚 감시한다고 서울에 군대를 두려 할지도 모르겠

군요. 일부러 빚을 지게 해서 종당에는 나라를 빼앗는 오래된 수법이죠. 경강

장사꾼들이 빚으로 조졸(漕卒)들을 묶어 노비처럼 부리는 일과 대개 같습니다.”

시준이나 정약용이나 조선이 그 빚 갚을 생각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동감하고

있었다. 공자는 예수나 무함마드와 달리 딱히 이자놀이 하지 말란 얘기 안 했

기 때문에 사채업이 매우 발달한 조선에선 빚 떼먹히는 놈이 등신이다.

“짐작은 하였다만 역시 그렇구나. 아직 말뿐이라 다행이다. 내가 죽음을 각오

하고 진언하여야 하겠다.”

시준은 정약용의 한숨에서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와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절대 감자 농서 때문에 삐진 건

아니고 시준의 사정도 그리 여유롭지 못해서였다.

시준은 이제 사업 확장을 자제하고 현금을 축적하는 상태였다. 기회만 되면

즉시 평안도를 떠야 한다.

아니, 이제는 홍경래보다 왕이 더 또라이 같다는 것을 안 이상 조선을 떠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둘이 같은 편이 되었을 거라는 상상은 아무리 현대인이라도 차마 하지

못했다.

작가의 말

1. 사실 사마의가 배신으로 유명한 캐릭터는 아니라서 좀 미묘합니다. 시준이 중국사의 수많은 배신자를 다 알 만큼 사서에 대한 역량이 깊지 않아서 시준이 말하는 인용 중에는 삼국지가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망탁조의 중 실제로 자기가 황위를 찬탈한 것은 왕망 하나뿐이네요.

2. 실제로 1810년 판의금부사는 홍명호에서 한만유로 바뀝니다. 한만유의 부인이 풍양 조씨였던 것도 사실. 물론 그것까지만 역사와 같습니다.

3. 이요헌은 작중 나온 평안도 절도사 복무 후 다시 포도대장이 되었다가 홍경래의 난이 발발하자 양서순무사로 가게 됩니다.

이요헌이 어영대장 시절 탄핵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언 박규수(朴奎壽)가(제너럴 셔먼호를 깨뜨린 그 박규수(朴珪壽)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평복을 하고 있어 대간 소속 관헌인지 몰랐는데 그가 말 앞을 지나간 모양입니다. 이요헌은 장신의 말을 막아선 죄를 꾸짖고 부하 관원을 가뒀습니다. (왜 본인이 아닌가 싶겠지만 조선도 왕명이 아닌 이상 귀족을 함부로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거의 아랫것들이 대신 잡혀갔죠.)

조선 시대에 대간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라, 감히 무신 따위가 대간을 범했다며 처벌 상소가 빗발칩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이요헌은 추고, 박규수는 파직으로 마무리되죠. 뭐, 박규수도 나중에 보면 복직해서 헌납 되어 있습니다.

18. 강철의 군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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