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50화 (50/284)

50화

16. 얽히는 양극(2)

강화도와 예조 관리들의 신경질을 몇 번 겪은 뒤, 동인도 회사는 ‘천박한 장

사꾼들을 감히 어전에 보내는’ 일을 포기했다.

동인도 회사는 선물 준다는데도 지랄이냐고 조금 구시렁댄 뒤 본사에 요청을

보냈다. 천년만년 대표이사 해먹고 있는 윌리엄 아스텔은 여기에 대해 고심하

다가 런던의 정계를 움직였다.

귀족원(House of Lords, 영국 상원)도 아니고 어떤 공식 청사도 아니지만, 영

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런던의 모처에서 아스텔은 힘있게

말했다.

“자칭(Ja Qing, 가경) 황제는 사실상 자유 무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서쪽에

서 인도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동인도 회사 아시아

함대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은 과거 중국의 수도 인근까지 점령한 적도 있는

군사강국이며 중국의 압제에서 독립할 희망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매카

트니 자작도 분석하였듯이, 누런 바다(황해)에서 약간의 근대적 해군을 갖추

게 해 주면 충분히 중국을 동서에서 내리눌러 시장 확대를 꾀해 볼 만 합니다.”

동인도 회사는 이미 조선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해 두었다. 그래서 풍부한 보

고를 확보한 윌리엄 아스텔은 그중 입맛에 맞는 얘기만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스텔은 고구려 때는 딱히 북경이 지금 같은 대제국의 수도가 아니었

으며 그나마 천 년도 더 전에 잠깐 해 본 것뿐이라는 사실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의회의 의원들이 그 허풍에 대해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직전, 아스텔은

의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미 프랑스는 안남의 해적을 지원하여 국왕 폐하의 배를 닥치는 대로 약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못 할 건 무엇입니까? 다만 우리는 저 악독

하고 비열한 프랑스인과는 질적으로 다르므로, 정정당당히 조선에 힘을 빌려

줌으로써 약자를 돕고 강자를 누르는 선행을 실천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지하

는 유럽의 균형을 왜 아시아에서는 유지할 수 없겠습니까?”

사실 지금의 영국은 유럽의 균형을 별로 유지하지 못했다. 한 번은 이겨 볼

만도 한데, 아득바득 결성된 5차 대프랑스 동맹은 바그람(Wagram)에서 또다시

깨져 나갔다. 균형 잡을 추(鎚)고 저울이고 다 박살이 난 것이다.

이제 유럽의 누구도 나폴레옹과 정면으로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루앙의 철탑

처럼 거대하고 시커먼[Tall and black as Rouen steeple] 악마가 유럽을 공포

로 굴복시키고 있었다.

허나 나폴레옹과 땅에서 마주치는 일만 아니라면, 다시 말해 아시아에서 프랑

스 해적들을 섬멸하는 일이라면 영국도 자신이 있었다.

의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좋지만 어떻게? 아직 이베리아 전역에서는 전투 중이다. 함부로 함대를

뺄 수는 없어.”

“역시 지금으로서는 조선과의 우호를 더 강고하게 하는 편이 최선이겠군요.

되도록 조선의 함대를 이용합시다.”

“아니, 잠깐. 아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건가? 조선에 강력한 함대가 있다면

동인도 회사는 조선에 가자마자 격멸당했어야지.”

“아시아 국가 상대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뭣하면 인도에서 좀 더 보

내도 되고요.”

“조선이 우리가 자기네 나라를 기지로 써서 프랑스 해적을 토벌한단 얘길 받

아들일까?”

“아마 곤란할 거요. 왜인지 몰라도 조약도 너무 후하게 맺어 주어서 문제를

풀기가 어려워요. 세상에, 치외법권도 없고 비무장지대인 개항장이라고?”

“조약이야 나중에 수정하면 되지. 저 미친 보나파르트에게 하느님이 철퇴를

내리시면 그다음에 해군을 끌고 가서 다시 체결하면 될 일일 뿐이야.”

“글쎄요. 문제는 아직 조선에서 이렇다 할 수익이 안 나고 있다는 겁니다. 만

약 왕의 해군(Royal Navy)을 쓰고 싶다면, 동인도 회사는 중국으로의 발판이

라는 탁상공론 대신에 조선에서 뭔가 실제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어요.”

“정부 전복?”

“가장 빠른 해결책이죠. 포르투갈이 소팔라에서 한 것처럼 적당한 왕족을 찾

아 앉히면 백성들이야 뭘 알겠습니까. 조선군 고위 장교들은 돈으로 매수하면

됩니다. 아니, 매수를 먼저 하는 게 낫겠군요.”

“그럴 테면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는 편이 좋지. 조선에 반란의 기미는 없는

가? 토착민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라던지…….”

거기까지 듣던 윌리엄 아스텔이 손을 올렸다.

“그러면 존경하는 의원님들께서는 이제부터 이 보고를 보아 주십시오. 다만

이건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열람하신 뒤에는 모두 반납하셔야 합니다.”

윌리엄 아스텔이 나눠 준 팜플렛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 편의상 존 도우(John Doe)로 명기되었다 – 지역 토호가

무기의 수입을 요구했고, 그는 조선에서 아편을 생산해 동인도 회사에 공급하

는 것으로 대가를 지불했다는 얘기였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의원들이 요구한 두 가지 문제 – 조선에서의 수익성 사업

및 비협조적인 조선 정부에 대한 전복 방안이 모두 담겨 있었다.

“확실히 운송비가 절감되었겠군. 그러나 파트나의 수익이 그만큼 줄지 않았는가?”

아편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아스텔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생산량이 미미해서 영향은 없습니다. 차후 늘어나더라도 파트나의 고

급품은 중국 귀족들에게 유통하는 방식으로 선회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조

선 것은 파트나 상품만큼 품질이 좋지는 않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대는

면이 있어서……. 하지만 또 값싼 물건은 값싼 대로 수요층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가. 존의 계획을 지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함대가 필요하지?”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존이 반란자라는 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 상황

이어서요. 게다가 꼭 지지한다고 결정된 것도 아니고요. 원래 상품이란 더 좋

은 조건으로 구매해주는 사람에게 파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선 정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는 영국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쪽으로

도와줄 수도 있다.

그 말을 가장 먼저 이해한 사람은 현직 수상인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이었다. 그는 팜플렛을 흔들었다.

“이걸 보면 이미 존에게 무기를 판 것 같은데?”

“그건 우리 회사는 모르는 일이올시다. 그 문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담에

불과하지요. 필시 프랑스 놈들이 써댄 중상모략일 테고.”

의원들과 윌리엄 아스텔은 공모자의 미소를 지었다. 스펜서 퍼시벌 역시 마찬

가지였다.

물론 그는 휘그당으로서 제국주의에는 회의적 입장이다. 그러나 그를 세계 시

민주의 사상에 넘치는 반제 반봉건주의자라고 생각하면 또 곤란하다. 어디까

지나 영국의 귀족 중에서 그렇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 퍼시벌의 사정이 좀 좋지 않았다.

그가 경제장관이었던 당시 노예 무역 폐지안을 통과시킨 이후, 스펜서 퍼시벌

이 영국의 부유함에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정치가의 정책이 마음에 안 들 때 이 시대 유럽인들이 통상 취하는 방

법은, 낙선 운동이나 가두시위 같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원래 유럽인들은 의견 충돌을 항상 전사적인 전통에 따라 조율해 왔다. 함포

가 있는데 왜 공정무역을 하며, 권총이 있는데 왜 청원 따윌 한단 말인가.

실제로 스펜서 퍼시벌은 몇 년 뒤에 하원 바로 앞에서 암살당한다. 총 맞은

영국 정치인이 드물지는 않지만 현직 수상이 피살된 것은 21세기 초까지 그가

유일하다.

게다가 갈수록 광증이 심해지는 국왕 대신 현재 웨일스 공 조지(조지4세)가

섭정을 맡는 일이 잦아졌는데, 조지는 퍼시벌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런저런 사정 때문에 퍼시벌 역시 뭔가 보여줘야 했다. 퍼시벌은 팜플렛을

툭 던졌다.

“좋아. 조선왕의 의중을 한 번 떠보도록 할까. 우리가 정의로운 인류를 대표

해 프랑스 놈들에게 대적한다는 상징성도 주는 것이 좋겠군. HMS 알세스트

(Alceste)는 아직 이베리아에 있지?”

원래 프랑스 해군의 아르미드(Armide)급 프리깃함 미네르바(Minerve)였으나

영국이 먹어치운 이 함선이라면 조선에게 영국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진수된 9척 중, 초도함 아르미드를 포함해 무려 4척이 영국 해군에게 나

포당한 굴욕의 함급인 아르미드는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해군 우위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사절로는 그런 것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신분이 고귀하고, 실패

해도 뒤탈이 크지 않을 정도로 비중이 적은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스펜서 퍼시벌은 수상으로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인맥에 대해 생각해 보았

다. 곧 해외 개척에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 하나 떠올랐다.

1810년 봄, 전쟁 패배의 후처리도 약간이나마 마무리되자 알세스트는 조선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동인도 회사의 조언을 얻을 수 있도록 세인트헬레나를

거쳐가는 그 항로였다.

캐나다 원주민을 거의 절멸시킨 인종청소 학살자 제프리 암허스트(Jeffrey

Amherst) 남작의 조카로서 로드 암허스트의 호칭을 이어받은 초대 암허스트

백작 윌리엄 피트 암허스트(William Pitt Amherst)는 역사보다 6년이나 빠르

게, 그리고 중국 방문이 목적이었던 역사와는 조금 다른 목적도 가지고 조선

으로 출항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열강 중 충분한 힘과 여유를 가지고 있는 자신들만

이 조선에 신경 쓰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윌리엄 아스텔의 말처럼 동인도 회사는 더 좋은 조건으로 구매해 주는 자에게

물건을 판다. 어차피 동인도 회사에게는 면포든 아편이든 무기든 같다.

게다가 일껏 마련해 놓은 무기 수출선을 홍경래 하나에게만 쓰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동인도 회사군에서 노후 무기를 폐기 처분하는 식으로 서류 만들어서

빼돌리는 일은 상당한 품이 드는 작업이며, 그만한 대가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동인도 회사 아시아 밀무역의 하청을 받은 윌리엄 자딘 박사는

레디 소령이 일전에 ‘망명을 도왔던 사상가’에게 접촉하게 되었다.

시준에게 받아 간 무기로 팔괘교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확보하여, 원

래 역사보다 약간 빨리 후천조사로 추대된 임청은 평안도에서 음란소설 구술

이나 해 주며 빌어먹고 살던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엔 돈이나 벌고 밥이나 먹으려고 했었지. 하지만 안 되겠더라고. 그 많

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따르는데 어떡하겠나. 결국 난 치세의 평민이 될 수는

없는 운명이야.”

위대한 군사적 모험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이 정신병은 많은

권력자나 권력자 지망생들이 시달리는 악독한 질병이며, 보통 그 감염원은 주

위에 모인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병이 그렇듯이 이 병도 감염원이 많을수록

환후가 빠르고 깊어진다.

자딘은 이미 외부인에게 이렇게 줄줄 얘기하는 반란 따위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자들이 청 정부를 엎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 돈만 받으

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돈은 같은 목적을 위해 영국이 더 효율적으로 써 줄

수 있다.

“뭐, 좋소. 나는 당신네 이교도 집회에 관심 없고, 지금 말도 못 들은 거요.

거래는 깔끔하게. 대금은 스페인 달러 은화로 받지. 여기가 광저우이니만큼

구하기 어렵지는 않겠지요?”

“자금성에는 막대한 보화가 있어. 먼저 거사가 성공하면 잔금은 나중에…….”

“이거 보쇼. 우리가 지금 원숭이로 보여? 시골 빵집도 안면 없으면 외상 안

해주는데 당신네들의 뭘 믿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설사 황제에게 팔

았다고 한들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임청은 몇 번 더 중국인다운 배짱을 부려 보았으나, 자딘은 임청이 가지고 있

던 돈에 해당하는 무기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도로 실어버리는 것으로 응

수했다.

설마 무기처럼 팔기 어려운 것을 다시 가져가겠느냐 하는 생각에 뻗댔던 임청

은 황급히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좀 봐주게. 당장의 보화만이 아닐세. 거사가

성공하면 자네들 좋아하는 장사도 크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벗이란 소중한

거야. 세상에 영길리국을 믿는 나라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거 우리 아니면

어디에 팔려고? ”

아무리 윌리엄 자딘이 동인도 회사와 친하다고 해도 영국이 세계에서 널리 신

뢰를 얻고 있다는 얘기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돈만이 우리의 친구요. 더 이상 재보는 일은 소용없으니 그만두시지. 우리

판로 걱정해 줄 여유 있으면 돈이나 더 가져오시오.”

결국 임청은 팔괘교 예산 중 자기 비자금으로 숨겨 두었던 돈을 내어줄 수밖

에 없었다. 교의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으니 참으로 살신성인의 교주라 할 만

했다.

만족스러운 거래를 마치고 많은 이득을 본 윌리엄 자딘은 휘파람을 부르면서

배에 올랐다.

하지만 뒤에서 구시렁댄 임청의 저주가 먹힌 탓이었을까, 그의 좋은 기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당직 보던 항해사가 급하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배가 나타났습니다!”

“뭐?”

현재 아시아에서 프랑스의 배는 해적뿐이다. 아직 인도차이나 식민지가 없는

프랑스는 베트남과 중국에 선교사를 좀 보낸 정도고 정규군이 주둔할 만한 곳

은 없다. 당연히 무역선도 있을 리 만무했다.

동인도 회사의 배를 노리는 사략선이 대담하게도 광저우에까지 나타났다고 판

단한 윌리엄 자딘은 즉시 선원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영국이라고 이 시대를 혼자 초월한 건 아니며, 동인도 회사는 군대도

아니다. 선원들은 대부분 왐포아의 사창가에 퍼져 있거나 술에 고주망태가 되

어 있던지 그도 아니라면 아편 몰래 팔아먹으러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타의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얻게 된 자딘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는 항해사를 돌아보았다.

“잠깐, 그런데 그게 프랑스 배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사략선이라면 프랑스 국기를 걸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배를 멀리서

보기만 하고 프랑스 배라는 것을 알 수야 없는 노릇이다. 깃발만 보고 그냥

생각 없이 보고했던 항해사는 허둥지둥하다가 다시 알아보겠다며 물러났다.

자딘은 보고 대충 하는 부하 직원을 마주한 상사의 심정을 정확하게 느꼈다.

그냥 내가 알아보는 게 빠르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딘은 곧 움직였다. 그는 도박으로 돈 다 잃는 바람에 할 게 없어서 배에 퍼

질러 있던 선원들을 닦달하여 보트를 내리고 망원경을 들었다.

자딘은 거기에서 고사가 재현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현 영국의 대조선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친 매카트니 자작은 과거 이곳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용오름을 보았다. 물론 지금 다시 그런 기이한 소용돌이가

발생한 건 아니지만, 영국인이 생각하기에 위험하기로는 그 폭풍보다 훨씬 더

한 것이 지금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 진짜 프랑스 배다. 깃발을 단 것을 보니 국가 함선이야. 저들이 조선으

로 간다!”

아직 런던의 결정이나 암허스트 백작의 선단은 여기 도달하지 않았으나, 자딘

은 이 미묘한 균형에 난폭자 프랑스가 끼어들 경우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상

상도 할 수 없었다.

야만인들이 아이처럼 무지스럽게 매달리는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며, 끝내 아

시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교사의 자격은 오직 영국에게만 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와 자딘 같은 하청 무역상들은 아시아에서 멋

지게 해내고 있었다. 덤으로 돈도 많이 벌고 말이다.

반면 프랑스 놈들은 전쟁과 강간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 말종이다. 프

랑스가 인류 문명의 대열에 설 자격이 없음은 이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써

증명되었다.

그리고 자딘은 조선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솔직히 조선에서 홍삼을 제외하면

뭔가 교역할 만한 건 없지만, 조선 사람들은 마약을 잘 만들어서 이익을 내게

해 주었다. 중국인들이 어리석게도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거부하는 서양 무

기도 그들은 잘 사 갔다.

특히 그의 친구인 조선 꼬마는 담배와 비슷해서 위장하기 쉬우면서도 괜찮은

품질의 약을 공급하고 있다. 자딘은 이것을 몰래몰래 실어다가 남중국에 아편

과 함께 팔고 있었는데, 만약 프랑스 놈들이 조선을 짓밟고 그 거래선을 빼앗

으면 바로 중국 시장까지 타격이 간다.

“드루리 제독 어디 있나? 저들이 조선에 가기 전에 나포, 아니 침몰시켜 버려

야 한다!”

“그, 못 들으셨습니까? 그저께 레디 소령과 크게 언쟁하고 나서 고아로 다시

떠났는데요.”

“하여간 바보들은 다 똑같지. 필요할 때 꼭 쓸모가 없어! 제기랄, 야. 너 지

금 달려가서 레디 소령님 불러와. 그리고 감독관 이상 간부들에게도 다 전하

라 그래. 프랑스가 조선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동인도 회사는 황해를 오가는 영국 선박들에게 지령을 내려 프랑스 배를 찾으

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국이라도 지금 레이더를 발명하지는 못했다. 망망

대해를 하릴없이 오가던 선박들은 곧 악천후로 인해 수색을 중단하고 돌아와

야 했다.

물론 장자도에도 선을 넣어 보았으나 조선 관리들은 그런 배가 오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영국인들은 프랑스인의 악덕에 대해 저 카이사르 시절부터 지

금까지의 역사를 인용하여 장황한 설명을 한 뒤 힘이 빠져 돌아왔다.

어쨌든 자딘과 그 휘하 선원들은 배를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실제로 프랑스

배는 황해에 있었으며, 영국에 따라잡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는 조선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만약 동인도 회사가 이리 총력을 기울여 프랑스를 경계하고 있다는, 다시 말

해 프랑스의 힘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사신단의 총책인

경찰장관 겸 오트란토 공(Duc d'Otrante) 조제프 푸셰는 기뻐했을지도 모른

다. 그에게는 정말 그런 만족감이 필요했다.

“웨에엑!”

푸셰는 뱃전에 손을 짚고 다시 한 번 요란하게 토악질했다. 주춤주춤 떨어지

는 빗물과 지저분한 오물이 황해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대프랑스

제국 제2인자의 꼴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호위단장 겸 부사(副使)라고 할 수 있는 미래의 프랑스 해군장관 프랑수아 조

제프 데 그레테(François Joseph de Gratet) 자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푸셰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평생 해군에 있었던 경력 탓인지 그리 힘들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을 터. 그도 지금은 푸셰처럼 좌천된 처지다. 푸셰와

혐의도 같았다.

그레테 자작은 4년 전 영국과의 내통 혐의로 한 번 체포된 적이 있고, 요주

인물로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 와중 영국과의 비밀 평화 협정을 황제의 승인

없이 추진한 푸셰의 대형 사고에 그도 말려들어 간 것이다.

포기하고 초연한 그레테와 달리 푸셰는 억울했다. 그는 정말로 황제와 인민을

위해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려고 욕지기나는 영국 놈, 수상 스펜서 퍼

시벌과 접촉하는 부끄러움도 감수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노고를 몰라주고 이 아시아 땅끝으로 하찮은 사절 임무를

맡으라며 보내 버렸다.

인과응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튀어야 했던 - 미국에는 끝내 배멀미 때문에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푸셰이

니 방향만 반대이지 어차피 고된 항해는 겪어야 했다.

물론 아무리 똑똑한들 미래인이 아닌 푸셰가 그걸 알 도리는 없다.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인이 중국에서 조선을 발판으로 시장을 확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폴레옹은 조선 자체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지만, 조선

의 위치에는 관심이 있었다.

만약 조선이 영국과 손잡고 중국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러시아를 남쪽(만주와

연해주)으로 끌어들인다면 영국이 프랑스의 눈을 벗어나서 러시아와 더 활발

히 접촉할 수 있게 된다.

대륙 봉쇄령의 사활을 걸고 그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악독한 영국인에게서

조선을 구해야 한다는 사설이 파리 각지의 신문에 실렸다. 수년 전 동인도 회

사의 누명 사건 조작 건도 함께였다.

<동양의 평화로운 땅에 뻗치는 영국의 마수! 본지(本紙) 르 모니퇴르 유니베

르셀(Le Moniteur universel)은 이 야만적 침략을 규탄한다!>

<순박한 비문명지를 함포로 협박하여 연약한 원주민을 마약에 물들이는 동인

도 회사!>

<존경할 만한 신사들에게 널리 신뢰받는 제국신문(Journal de l’Empire)이 취

재한, 더할 나위 없는 진실 최초 공개! 1803년 중국인 학살 누명 사건의 경과

와 동인도 회사의 충격적인 비양심!>

원래 나폴레옹이 용병만큼이나 잘하는 게 언론 통제였다. 파리의 여론은 당장

문명인의 책임을 지고 동방 수호에 나서야 한다며 들끓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조선에게 ‘우정으로써 경고를 전달’하기 위한 사절로서 마

침 숙청해야 하는 명사인 경찰장관 조세프 푸셰를 보냈다. 죽이기 아까운 인

물인 푸셰의 능력도 활용할 겸, 푸셰 반대파에게 그럴듯한 명분도 줄 겸 선택

한 합리적 결정인 셈이다.

물론 푸셰에게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를 여기로 보내버린 황제에 대해 걸쭉하게 욕설이나 퍼붓고 싶었지만, 천

성적 배신자이자 세계 최초의 공안정보 공예사로서 단련된 그의 교활함은 푸

셰로 하여금 순식간에 냉정을 회복하게 했다.

“괘, 괜찮네. 내가 원래 배멀미가 좀 심한 편이야.”

“하긴 이런 폭풍우 속에서라면 건장한 선원도 나동그라질 겁니다. 선실에 들

어가서 쉬십시오.”

“거기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 적어도 바람이라도 부는 데에서…… 우웨엑!”

그레테 자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보건

대, 비록 사납긴 하여도 곧 날씨 자체는 갤 듯했다.

처음에야 그레테 역시 놀랐다. 그는 매카트니 자작의 보고에서 인용된 기이한

회오리가 몰아닥친 것인가 하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냥 황해의 풍랑이 원

래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그레테 자작은 푸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다에서 떠돌다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탐욕

스러운 동인도 회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 바다에서 조류를 탔을 때 반드시 그

개항장, 노루섬(장자도)으로 간다고 합니다.”

동인도 회사가 표류 무역을 할 때 조선 정부에 변명하기 위해 조작한 논문은

이미 파리에도 퍼져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그거 하나 믿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안타깝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영국의 죄악이 너무 깊었다.

하지만 푸셰는 거기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그, 그래. 뭐, 어디든 육지에 닿으면 좋겠지. 날씨가 개면 배를 장자도 방향

으로 직진하게 하게. 그러다 보면 조류를 타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그레테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 투쟁에서는 졌

지만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예. 맡겨 두십시오. 비록 뱃길을 잃어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지만 한 사람

도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틀 뒤, 그레테 자작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작가의 말

1. 조제프 푸셰 이 양반 오랜만에 나왔군요. 진짜 오랜만입니다. 시준이 정약용 제자 처음 할 때 파리에서 시민들을 선동하는 모습으로 나왔었죠.

그 당시 오트란토 공이라는 호칭이 안 나왔던 이유는, 푸셰가 나폴레옹에게 오트란토 공작위를 받은 게 1808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전통 있는 봉건 귀족은 아니고 나폴레옹이 만든 작위입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능력을 귀하게 쓰면서도 그의 교활함과 배신력을 항상 경계했습니다. 작중 나온 것처럼 푸셰는 원 역사에서 이때쯤 나폴레옹에게 밉보여서 귀양 비슷하게 갑니다. 그 와중 비밀 서류 일부를 숨겨서(파기했다고 주장) 최후의 패를 마련하는 푸셰의 정치력이 돋보이죠.

2.  프랑스 해군은 이 시기 영국 해군의 37% 정도의 예산을 썼다고 합니다. 전력도 그 정도였던 모양인지;;; 이때 프랑스 해군 선박 함급 자료를 보면 뭐 영국에 안 뺏긴 배가 없습니다. 아르미드급이 특별히 더 많이 뺏긴 거라고도 하기 힘들 정도. 뺏기지 않았으면 침몰하던지.. 하여튼 무사히 살아남아 스크랩 처리된 배를 찾기가 오히려 더 어렵더군요. 다만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 건조된 배는 전쟁을 안 해서(영국 해군에 개기지 않아서) 대부분 무사합니다.

16. 얽히는 양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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