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49화 (49/284)

49화

16. 얽히는 양극(1)

아득한 고대, 탕(湯)이 걸(桀)을 물리치고 상나라를 세웠을 때 그는 이것이

반역이 아닌 천명이라 포고했다. 또한 그릇에 날로 새로워진다[日新]고 새겨

놓고 거기에다 매일 세수하며 초심을 되새겼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권이나 대국민 홍보는 중요하며 쿠데타로 세워진 정부라면 더더

욱 그렇다. 허나 인생은 그런 어딘가의 와인 회사 같은 캐치프레이즈 몇 개를

발표한다 해서 그대로 잘 될 만큼 만만하지 않다.

제사도 화끈하게 바쳤으니 장단 좀 맞춰줄 만도 하건만, 하늘은 눈치 없게도

탕왕 즉위년부터 시작되는 7년간의 대가뭄을 선사했던 것이다.

누가 봐도 하늘이 탕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였다.

지금이야 식성을 바꿨지만 당시 하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라

고 생각되었으므로, 무당은 매뉴얼대로 사람을 태우거나 찢거나 삶거나 아무

튼 잔인하게 도륙내서 기우제를 지내자고 진언했다.

여기에서 탕이 유능한 정치가인 이유가 드러난다. 물론 무당의 말대로 자신의

천명을 의심하는 녀석들 몇 명(다스리는 나라가 마을 수준이라 그 정도면 충

분하다)을 잡아 해체하여 잠재적 반란자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달하는 일은 전

통적인 처방이며, 그래서 안전하다.

하지만 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재난에는 새로운 대

응책이 필요했다.

그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 자신의 각오를 드러낸 후 뽕나무 숲에 나가 자

신의 여섯 가지 잘못을 반성[六責]하며 기도했다.

어쨌든 비는 왔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내는 게 기우제니까 당연하다. 그리고

탕이 위대한 임금으로 기록되는 것도 당연하다.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잘라도 안 아프지 않느냐는 말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 후의 상나라 행적으로 보아 인신공양이 딱히 금지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

다. 누구도 다음 가뭄이 올 때 ‘효험 있는’ 제물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한마디로, 탕왕은 반대 세력에 대한 군사적 진압 대신 한발 양보하여 대통합

을 이루는 선택을 한 셈이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배울 만큼 배운 왕과 조신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을 뻔히 알면서도 육책의 기도를 수차례 올리고 사면령을 남발한 이유를 이해

할 수 있다.

원래 역사의 순조는 이 가뭄 중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탕왕을 수도 없이 언

급했다. 겉으로는 엄중하기까지 해 보이는 자아비판이었다.

“대저 임금이 된 사람이 기근을 만나게 되면 진실로 성인의 세상에서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여 은연중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부당하

다. 옛날 성탕(成湯, 탕왕) 때에도 또한 7년 가뭄이 있었는데, 성인의 세상에

도 또한 이와 같은 재변이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금의 순조 이공도 같았다. 그는 탕왕처럼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반포하며

막대한 백급(白給, 무상 환곡)을 풀고 날씨에 관한 소식은 가장 빠른 파발로

입수하게 했다.

물론 신하들은 바보가 아니므로 정말 ‘왕 너 말 한번 잘했다. 네가 똑바로 못

해서 이 사달이 났지 않느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공이 지금 자꾸 탕 타령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같은 성인의 치세에도

비가 오지 않았던 걸 보면 한재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니, 총구에서 탕 소리

나는 거 보기 싫으면 이 핑계로 까불지 말라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인 시준에게도 낯설거나 불가해한 일은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국제 경제나 투기자본의 개입, 아이작 뉴턴도 계산할 수 없었다는

인간의 광기가 결합된 현대 경제위기에서의 발단과 진행은 경제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이해되기 힘들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학자들도 설명하지 못한다.

과거 사람에게도 경제와 직결된 날씨는 예측 불가한 리스크였다. 정확히는 알

아도 못 막는다에 가까웠다.

그런데 현대에서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듣기 싫은 사람들이

그냥 집권당을 욕하는 것처럼, 과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근대라고 해도 지배권이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에게서 나온다

는 진리는 같다.

현대 경제학자들 중 누가 대공황의 원인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시대 지식인들 역시 가뭄의 원인을 못 찾았고, 백성들은 속 편하게 왕 탓

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행동으로 표출되면 어느 나라 지배층이든 자리 위에 칼을 매달아

놓은 형국이 된다.

따라서 가뭄이나 홍수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이 아닌 자연 현상이라는 점

을 잘 알았던 조선 시대 왕과 조신들도 별수가 없었다.

운이 좋으면 작은 수고로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내 잘못이

아니어도 머리를 박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 정치다.

한마디로 순조는 탕 정도의 양보를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며, 신하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런 국정 운영의 미묘한 흐름 안에서는 항상 뜻하지 않은 피해자가

나타난다. 시준은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를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래서, 시장을 옮긴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시전이 가뭄과 대관절 무슨 관계

가 있습니까?”

정약용이 대답했다.

“장터는 곧 음기(陰氣) 가득한 곳이라. 국초에 시행하던 대로 종로 시전을 남

문으로 옮기고 문을 닫아 극에 달한 양기를 억제하며, 북문을 열어 음기를 받

아들이려는 뜻이다. 내가 역(易)을 네게 강의하지 않았더냐?”

시준이 음양의 이치를 몰라서 그렇게 되묻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흉년

이라 장사 안 되는데, 시장을 남대문으로 옮기고 거기에 남대문을 막아 버린

다면 장사꾼들 다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게 없다.

막대한 피해를 볼 장사꾼들에겐 어떻게 보상할 것이며 물류가 제대로 돌지 않

을 한성부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다못해 구휼미 나르기 위해서라도 경

강 상인들과 싸전은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시준은 조선 왕조를 너무 깔보았다. 순진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상인

들의 원망 따위는 전제 군주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사기 쳐서 백성들에게 부를 착취하는 것이 장사꾼의 일. 범죄에 보상

은 언감생심이며, 지금까지 가져간 것 일부만 도로 내놓으라는데 뭐가 문제냐

는 것이 왕과 사대부의 공통된 인식이다.

부의 재분배를 화끈하게 실현하는 왕의 교지는 정약용이 대신 말해주었다.

“또 분화(焚火, 산 위에서 막대한 나무를 태워 지내는 기우제)를 거행할 것이

니 시전 장사꾼들은 옮기는 길에 버려질 여러 수레며 상자, 문짝과 기둥 같은

것을 모으라는 영이 계셨다. 구휼미를 내놓는 상인은 차후 시전을 복구할 때

에 우대를 받을 것 같더구나.”

정약용이 이 말을 시준에게 해주는 이유는, 왕이 세세하게 장사에 신경을 쓰

고 있으며 그 정책의 틈을 시준이 노린다면 손해를 덜 볼 수 있을 거라는 말

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매우 관대한 정책이다. 땔감 바치라는 말이나 다

름없지만 대신 타는 쓰레기 버리라는 식으로 돌려 말했고, 쌀 내놓으라는 직

설적 명령 대신 안 내놓으면 나중에 시전 자리 배치할 때 재미없을 거라는 우

회적 협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준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치킨집 하나도 정부 마

음대로 못 치우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이 새끼들이 지금 보상금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 김에 뭘 뜯어낸다고?’

뻔뻔한 뇌물 요구와 약탈은 시준 역시 의주에서도 많이 봐 왔다. 하지만 딱히

지방관의 고립도 없는 이 한양도성에서, 그것도 왕이 직접 이런 정책을 결정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서울 시장 철수? 아니야. 아직 손익분기점이 안 됐다. 게다가 내가 철수하고

싶어도 왕이 보내 줘야 말이지.’

가뭄이 오기 전, 시전의 재정리 과정에서 왕은 상당한 비자금을 접수했다. 대

부분은 왕의 인척인 박윤수를 통해서 들어간 것이다.

물론 모든 상인들이 납작 엎드려 돈 바친 것은 아니다. 정식으로 격쟁을 제기

하는 우직한 자도 있었고 아예 광주군의 송파진(松坡津) 쪽으로 옮겨 뭘 해

보자는 자들도 있었다.

가장 소극적이고 광범위한 방법은 태업이었다. 점포가 다 작살 났는데 뭘 할

수 있겠냐며 드러눕고 모은 재산 까먹으며 추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었는데

꽤 많은 자들이 여기 동조했다.

처음에 김조순이 생각했던 대로 공시인들이 납품을 안 하면 조정 살림이 당장

궁핍해진다. 이때는 금은이나 엽전 꿰미 있다고 해서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물건이 없으니까.

이공이 아무리 대계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왕이라 해도 이는 용납하기 힘들

었다. 가장 반항적인 상인이나 그들이 거느린 장정들을 손봐줘야 했는데, 특

별히 죄를 지은 게 없어서 작년 섣달과 같은 방식을 동원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오죽당이 활약했다. 물건을 감춰 두는 상인들은 밤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되거나, 대낮에 쳐들어온 무뢰배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후원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방식으로 탄압당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어둠의 세력은 몇 개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독주를 방지

해야 하나, 왕이 검계 조직의 중추를 군대로 깨버렸기에 지금 서울은 무주공

산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정치깡패의 말로가 어땠는지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이용 가치 없어지면 그냥 버려질 거다. 도성에서 일어난 모든 폭력사

건을 뒤집어쓰고 살처분되겠지.’

시준은 ‘나는 깡패 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팻말과 함께 서울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싶진 않았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보통 이런 일을 방지하는 방법은 상대의 약점을 잡는 것이다. 허나 여기가 전

제 군주국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인군(人君)은 무치(無恥)라. 왕이란

강간이 은혜가 되고 살인이 처벌로 둔갑하며 사기가 묘책으로 칭송받는 자리다.

무슨 도덕적 스캔들을 제기한들 개미처럼 짓눌리는 것은 당연히 시준 쪽이다.

시준은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이번에도 얌전히 권력에 굴복했다.

그러나 이토록 자존심을 꺾는 이상 대가는 확실히 받아야 했다. 시준은 정약

용에게 다짐해 두었다.

“자식 같은 백성들의 굶주림에 애통해하며 단비를 바라는 나랏님의 말씀이 지

극한데 하민으로서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미력한 가산이나마

털어 성심껏 마련하겠습니다. 추후로도 아래위가 화합할 수 있도록 선생님께

서도 잘 아뢰어 주십시오.”

“네 마음이 기특하다. 그 일은 내게 맡겨두어라.”

순진한 정약용은 시준이 장사 자리 몇 개나 탐낸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

만 조선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공은 돈 많은 제자를 설득하여 타의 모범이 되게 한 정약용을 공개적으로

상찬했다. 그리고 그 칭찬은 조신들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다.

경상이나 시전, 육의전 상인들에게서 개인적인 물건을 납품받던 고위 조신들

은 언제 왕 명령에 따라 박살 날지 모르는 기존 거래처 대신 좀 더 안전한 곳

을 찾게 되었다. 연좌제가 있던 시대니만큼 당연하다.

시준에게는 며칠 뒤부터 많은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태와 경로는 다양

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가 소소한 집안일을 장사꾼에게 맡겨 물건을 사들이는데, 요즘 값이 너

무 오르고 행패가 심해져 걱정이 많네. 요즘 장안에 도는 말로 만상이 도리를

안다 하니 더 싸게 해 줄 수 있다면 제수며 요릿값, 광대 부르는 돈 같은 것

은 자네들에게 대신 맡기도록 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집사 어른. 첨지 댁은 저희도 평소부터 높으신 이름 많

이 들어왔으니 이번에 있을 잔치판에는 서초도 한 쌈지 그냥 넣어드리지요.”

대갓집의 집사며 문객들은 기존보다 후한 값을 제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거래

끊으면 깽판 칠 검계 잔당이나 시전 무리를 치워 주는 값도 포함된 것이다.

만상들은 오해하는 대신 행동을 개시했다. 여러 객줏집에서 술과 음식을 사들

여 도성에 공급하던 장사꾼 강씨는 검은색 대나무 패를 차고 온 오죽당 당원

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이봐, 강씨. 낼모레 이(李) 첨지 댁 딸 혼인하는 일에 닭이랑 과자며 떡 대

기로 했지? 거기는 이제 우리가 맡기로 했으니 물건 내놓고 돈 가져가라구.”

“아, 아니. 그건 분명히 동소문(東小門) 애들이 한다고 했는데? 나도 신용으

로 장사하는 사람일세. 칠득이 그 사람이 좋다고 하지 않으면 못 팔아.”

검계 아니라도 서울에 폭력 조직은 많다. 강씨가 자기 뒷배 봐 주는 주먹패

겸 도매상을 언급하자 이제 오죽당에서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김모지리는

침을 뱉었다.

“그래. 그 칠득이. 나도 알지. 지금 데려왔으니까 얘기해 봐.”

사람 하나를 죽일 때마다 자랑삼아 판 자자(刺字, 문신)가 일곱이나 된다는

동소문 미친개 칠득이가 순순히 왔을 리 없다. 강씨는 설마 이 무도한 평안도

놈들이 칠득이의 모가지라도 잘라 온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저번의 검계 같은 대역죄인도 아닌데 도성 한가운데에서 만상들이 누

구 목을 따기는 힘들다. 모지리의 손짓에 따라 끌려온 칠득이는 살아 있었다.

허나 모지리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강씨는 그가 칠득이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얼굴이 끔찍하게 부어터지고 옷도 전부 발가벗겨져 있었으니까.

박득출의 훈화로 각성한 김모지리는 꿈틀대는 칠득이를 한쪽 발로 내리밟은

채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주사(朱砂)보다 훨씬 싸고 흔한 염료로 찍은

듯한 지장이 이미 하나 찍혀 있었다.

“칠득이는 허락했어. 여기 문건 보이지? 임자만 손가락 대고 눌러 찍으면 그

걸로 다 되는 거야. 알겠어?”

시준이 확보해 놓은 만상의 서류적 전통은 서울에서도 발휘되었다. 그들은 다

른 상인들 역시 사용하는 장부 외에도 수많은 계약서, 동의서, 허가서, 요청

서 및 출장 서류까지 엄청난 문서를 생산했다.

이는 시준이 자칫 외지에서 와해되기 쉬운 조직을 단결시키고 외부에 대한 신

뢰를 확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부에서는 증거가 다 남아 있으니 함부로 배신할 수 없고, 아랫사람들이 멋

대로 빼돌리는 잡손실도 최소화되며 아랫사람 입장에서도 일을 빠르게 이해하

기가 쉽다.

바깥 사람들에게도 잘 먹혔다. 오죽당원들은 정갈한 검은색 옷차림에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달고 정해진 만상 서식의 편지를 내밀었는데, 주요 소비자인

관료층과 선비들에게 이 방식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는 바가지 쓰거나 엉터리 상품을 납품받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상황을

전부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겉만 번드르르한 문장

과 단어로 높으신 분들의 혼을 빼놓는 일이라면 시준의 특기다.

게다가 아직은 글과 문서라는 것이 특수한 지식이었던 시대. 지금 유럽에서

알아준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의 장서를 다 합쳐보

아야 21세기 동네 도서관의 장서보다도 훨씬 적다. 따라서 문서에 대한 사람

들의 존경은 현대보다 매우 강한 것이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금발 푸른 눈의 서양인 선교사도 먹 갈아 한문 몇 자 써

주면 밥상에서 바로 양반 자리를 차지하게 해 주던 나라가 조선이다.

복잡한 장사꾼들의 송사도 만상이 얽히면 확실한 증명으로 처리가 쉽게 가능

하니 관리들도 반가웠다. 차츰 서도에도 학문이 있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김모지리는 지금 무지막지한 폭력과 협박을 일삼으면서도 자신이 뭔가

문서에 기반한 공무를 보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자, 그러고 보니 은 닷 냥 이상은 다 초계(初計, 견적)를 내어야 했지. 이놈

들아. 어서 문건의 별도(別圖, 별표)를 그리거라. 강씨, 지금부터 우리 애들

이 받아 적을 테니까 술 한 병까지도 세어서 하나하나 값을 다 불러. 이상한

장난질 하면 임자는 물론 처자까지 죄다 나무에 묶어놓고 간만 빼다가 문둥이

들한테 팔아먹을 줄 알아.”

“아, 알겠네.”

이 상황에서 견적을 올려 부를 수 있으면 강씨는 식자재 장사나 할 그릇이 아

니다. 상당히 싼 값에 잔치 용품을 사들이는 데 성공한 만상들은 싱글벙글했다.

강씨는 모지리가 가리키는 대로 ‘(말썽이 있으면) 이 문건을 들고 가서 관아

에 증빙할 일[此文記 憑考事]’이라는 조선 계약서의 마지막 서식 옆에 자기

이름을 그렸다. 그러고는 칠득이의 넘치는 피로 지장을 찍었다.

절대 손해 안 보는 장사꾼 시준은 검계의 빈자리에 이제 백 명 가까이로 불어

난 오죽당 청년들을 침투시켜 그들의 자리를 대신했다. 왕이 뺏어간 본전은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선은 도학국가다. 사람들의 뒷생각이야 어찌 됐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윤리다. 이제 슬슬 오죽당이 무슨 짓 하는지 눈치챈 정약용은 어느 날

시준을 불러 놓고 운을 띄웠다.

“네 상재가 놀랍구나. 서울에서도 오죽당이 여러 사업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고 들었다. 하지만 재물은 공부한 자가 뜻할 바 아니요, 많은 재물은 필시 화

가 되니 삼가야 하느니라. 저 석숭(石崇)도 고을을 모두 감쌀 비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목숨 하나 지키지 못했다. 당의 이름이라 하는 검은 대나무처

럼 수려하고 검박한 절개를 좇을 생각은 없느냐?”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선생님. 제자는 그저 고향 떠나 호구를 잇기 위해 이

일, 저 일 해보는 것뿐이지요.”

너 나 없으면 그 한심한 녹봉 갖고 어떻게 살겠느냐는 말까지는 시준이 차마

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똑똑하니까 다 알아들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단지 살림 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시준의 재물은 정약용이 어떤 청탁도 받

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지금 조정에서 한창 떠오르며 김조순의 견제를 받

고 있는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작은 스캔들이라도 철저하게 사양해야 한다.

어차피 조선 관리들 다 뇌물 받지 않느냐는 말은 필요 없다. 시준이 날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원래 죄는 처벌하고 싶은 놈이 있는 거지, 죄 있는 놈만 처

벌받은 사회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정약용이 틈만 보이면 김조순은 이때쯤

한번 정약용과 서북통상아문을 내리누를 것이다.

실제로 이미 그런 조짐은 보였다. 1년의 기간 동안 차곡차곡 준비하던 비변사

는 흉년을 빌미로 왕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지금 평안도에 영길리국 사람들이 들어와 장사하고 있는데 그들의 큰 배가

백성을 놀라게 하고 민간에서 닭이며 소, 곡식과 물을 매번 사들입니다. 근래

다시없을 천재(天災)가 있어 장정에 따라 나라에서 금하긴 하였으나 탐욕스러

운 장사꾼들이 잘 지키지 않으니 폐단이 우심합니다. 한때의 일을 피하기 위

한 권도가 마침내 나라의 큰 우환이 되었습니다만, 이제라도 밝으신 성단을

내려 아문을 폐하시고 영길리인들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소서.”

이공은 ‘어떻게 물러가게 할 건데?’라고는 묻지 않았다. 신하들의 답이 뻔하

기 때문이다. 영길리국에 맞상대할 나라는 천하에 대청뿐이니, 그들에게 다시

임진년처럼 청병하자는 말이 아예 귀에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공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력제 같은 호구가 예외인 거지 원

래 한 번 들어온 군대는 나가기 어렵다거나, 흉년으로 어려운 조선에는 그 군

대를 먹일 수단이 없으니 백성은 더한 도탄에 빠질 것이라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공은 이 땅에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의 지배권이 미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한번 맛본 자주독립 유사품의 열매는 달콤했다. 그래서 이공은 성난 표정을

지으며 하교했다.

“아문은 1년도 되지 않았고, 관소와 깃발이며 마필과 도구가 모두 새것이다.

이제 와서 아문을 폐하고 약조를 저버린다면, 그 아무리 상대가 오랑캐라 한

들 누가 여기 동방에 신(信)이 있다 하겠느냐? 소각(銷刻, 이랬다저랬다 함)

은 완령(玩令, 법을 우습게 여김)을 부를 뿐이므로 나랏일에 할 바 아니다.

하물며 시전의 장사꾼도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발길을 끊어 피

폐해지는 법인데, 나라 간의 사귐에 어찌하여 이리 해괴한 주청을 하는가?”

매매에서 거두는 세가 꽤 커지고 있고 영국 상인들이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예의’를 차린답시고 왕실에 부지런히 선물을 갖다 바치고 있었으니 이공의 입

장도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야, 이 장사꾼만도 못한 것들아. 약속을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냐?’라는 이공의 말은 좀 심한 것이었다. 사관들은 사초에다가 분노의 붓질

을 해대고, 조정 여론은 악화되었다.

결국 김조순에게 옆구리 찔린 공시당상 서영보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섰다.

“본래 남의 신하 된 자로서 타방과 사귀는 법은 없습니다[人臣無外交]. 이제

통무아문에 더하여 비변사에 외교당상(外交堂上)까지 설치하신 일은 반드시

대국에게 흠을 잡힐 것입니다. 송(宋)이 여진과 변통으로 화의했지만 곧 단평

(端平) 원년 통쾌하게 도읍을 탈환했는데, 후대 학자들도 계책이 부족함을 탓

할지언정 이것이 정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영길리국과의 통상은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고 보면 이는 바른길로 돌아가는 일이지 믿음을 저버리

는 일이 아닙니다.”

김조순은 단평입락(端平入洛) 건을 꺼낸 서영보가 고사를 잘못 선택했다고 생

각하며 속으로 한탄했다. 그건 여진을 배신한 것이고 여진족은 지금 세계의

지배자다. 이공은 과연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오활한 학자들의 말이다. 결국 조송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국인은

물론이고 천자마저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했지 않았는가? 이것이 배신의 값이

다. 또, 이미 대국 천자도 다 허락하신 일인데 그대들이 자꾸 다른 의론을 제

기하는 것이야말로 상국 섬기는 도리가 아니니라!”

흠차대신 부찰복장안이 와서 뻑적지근하게 진상 부리고 간 것은 기억에서 날

아간 모양이었다. 물론 여긴 조선이기 때문에 왕은 멋대로 기억을 취사선택할

수 있어도 신하들은 그럴 수 없다. 그날의 격론은 결국 임금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신하들은 자기가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공 역시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 일은 청에 들어간다. 그러면 청은 체면을 좀 접고 조선을 압박할 것

이며, 이공에게는 그것을 막을 수단이 제한적이다.

중국의 간섭을 억제하려면 인조실록에 여진족 시호 알아서 안 써 준 신하들처

럼 관료들이 협력해서 잘 숨겨야 한다.

조선 묘당에서 군신이 일치하여 중국 욕한 일이 결코 적지 않건만 중국에서

공개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새어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공이 보기에 지금의 신하들은 간첩질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이공은 흉년이라 보류했었던 계획의 시급한 필요성을 느꼈다.

‘군대가 필요하다. 장대(壯大)하면서도 미려(美麗)한 나만의 군대가…….’

작가의 말

1. 탕왕의 육책기도는 주로 왕이 흉년 나면 자책함 -> 신하들이 탕왕도 그랬다고, 니 잘못 아니라고 해줌 -> 어쨌든 백성들은 굶어 죽지만 훈훈한 분위기에서 마무리 정도의 용도로 자주 쓰였습니다. 아마 조선 사람들도 탕왕의 의도는 짐작했을 거예요.

2. 초계, 별도 등의 용어는 작중 창작입니다. '소각' 이라는 말은 새긴 것을 녹였다는 뜻으로, 역이기가 한고조에게 육국의 후손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고 고조가 그것을 받아들여 인장을 새기다가 장량이 '님 도르신?' 하면서 결사반대하자 다시 녹였다는 고사입니다. 조선 시대에 이 고사는, 장량의 지혜나 고조의 결단보다는 그냥 정책이 이랬다저랬다하는 일에 부정적인 뉘앙스로 주로 쓰였습니다.

3. 단평입락은 작중 얘기처럼 송이 몽골과 뒤에서 손잡고 금을 쳤는데, 몽골 영토로 되어 있었던 옛 수도를 낼름 먹어버린 사건입니다. 송나라 입장에선 우린 빈땅에 들어갔다 해서 입락(수도에 들어가다)이지요.

(낙읍(낙양) 이래로 낙이란 곧 수도를 뜻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 다이묘가 군대 끌고 올라가 쇼군 협박하는 것을 '상락(수도에 올라감)'이라 부른 것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물론 몽골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끔찍한 전쟁 끝에 송의 군신은 단체로 애산에서 입수합니다. 사실 이게 처음도 아니고, 금나라가 화북을 먹게 된 것 자체가 요를 같은 방식으로 금나라와 함께 협공한 송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외교적 신뢰란 중요하며, 자기만 똑똑한 줄 알고 곡예 함부로 하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좋은 예시가 되겠군요.

16. 얽히는 양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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