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48화 (48/284)

48화

15. 골든 트라이앵글(3)

이공이 몇몇 신하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반역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의 근시를 살해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패역을 저지른 검계와 그들을 후원

한 장사치들에게는 용서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을 두둔하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김조순은 일단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김조순이 침묵하자 다른 신하

들도 그 뒤를 따랐다.

원래 잡범들에게는 잘 안 하는 조치지만, 이공은 특별히 명을 내려 이번에 잡

힌 검계 무리의 목에 전부 대역부도(大逆不道) 팻말 걸어 남대문에 내걸도록

조치했다. 고풍스러운 구례를 되살려 사지와 창자는 젓갈이 되어 경계 삼아

돌려졌다.

이공은 이로써 왕의 위엄을 보임과 동시에 자기 친위세력을 초법적으로 우대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내수사와 종친의 횡포는 더욱 심해지겠지만 어차피 왕

입장에선 알 바 아니었다.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는 계층을 만드는 일이 더 중

요했다.

시준도 그런 사고 과정은 이해했다. 하지만 단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

다. 시준은 황화방 정약횡 집 사랑방에서 종잇장 하나를 펼쳐 놓고 분개했다.

“아니, 우리 쪽에도 다친 사람만 너댓이 넘는데 한 푼 약값도 안 되는 이런

것으로 무얼 어쩌겠다는 말이야?”

현대에서 정부가 정책을 시행한다는 것은 대개 돈 주고 다른 데 일 시킨 다음

그것을 감독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보도자료에는 해당 부

서가 한 일로 기록되지 하청업체를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체포도 공식적으로는 우포도대장 이요헌이 도성의 검계 무리를 토

벌한 것이었다. 물론 21세기의 다른 하청업체들처럼 시준도 그것에는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하청업체에게 마땅히 줘야 할 대가를 주지 않은 것에는 매우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시준은 전생의 뉴스에서 어떤 악덕고용주가 상품권으로 임금 줬다던 기사를

떠올렸다. 지금 시준의 심정이 딱 그거였다.

강진 갔다가 다시 배움을 이으러 올라온 이강회가 허허 웃었다. 형 이유회는

장남이라 고향에 남았지만 이강회는 정약용과 얽히고 싶은 가문의 적극적 지

지로 다시 서울에 발을 딛게 되었다.

“사형(師兄)께서는 역시 뜻이 웅대해서 일개 종이품 자리 정도로는 성이 안

차는 모양일세.”

“지금 저를 놀리십니까?”

시준이 홱 노려보자 놀리는 게 맞았던 이강회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준에게 너무 밉보이면 그가 서울 머무르는 비용을 대 줄 사람이 없거니와

그 묘한 책도 얻어 보기 힘들다. 어쨌든 학문의 뜻이 깊은 이강회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부인도 떼어 놓고 온 처지다.

그래서 이강회는 열 받은 시준 대신 그가 펼쳐놓은 공명첩(空名帖)에 눈길을

돌렸다. 적혀 있기로야 당당히 동지(同知, 동지중추부사)이니 이강회의 말대

로 종2품이다.

영길리인들의 면포야 인심 쓰듯이 나눠주었으나, 원래 조선 왕이 뇌물에 보답

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그 대표가 바로 유명한 공명첩이다. 돈 받고 직위 내려주니 훌륭한 수뢰행위

라 아니할 수 없다.

국가가 운영한 긴급 부세제도라는 변명은 두 가지 면에서 반박된다. 일단 나

라와 왕은 이 시대에서 동치였거니와, 양란이 끝나서 긴급 상황이 종료된 다

음에도 후대 왕들은 서얼직첩(庶孼職帖), 노직첩(老職帖) 등 오만가지 공명첩

으로 돈을 모았다.

공명첩이 조선 환곡 비축의 주요 수단 중 하나라는 것도 소용없는 핑계다. 환

곡은 어디까지나 군량이요, 관군은 왕의 군대니까.

‘아니, 유럽처럼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세금징수인 같은 거라도 주던가? 양심

이 없어, 양심이!’

이 방면에서 조선의 왕들은 유럽 군주들보다 더 뻔뻔하고 더 똑똑했다. 시준

이 만약 이 가설동지(加設同知) 직첩 하나 덜렁 들고 실제로 중추부(中樞府)

에 발 들여놓으려 했다가는 박살이 날 것이다.

프랑스 군주들이 돈 급하다고 실직(實職) 판매 남발하다가, 끝내 그 말예가

즐거운 모가지 파티에 주빈이 아닌 메인 코스 자격으로 참석해야 했지 않은가.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리스크 없는 자본 획득 수단으로 공명첩보다 더 좋은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의 도학군주들은 과연 서양 오랑캐 추장보다 현

명했다.

공명첩에 적힌 직위는 그게 설사 대장군이라 하더라도 병졸 한 사람 부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게 먹힐 수 있었던 것은 실권 없는 벼슬자리라도 체면치

레에는 적합했기 때문이요,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체면의 상승은 곧 실질적

이득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강회가 그 점을 지적했다.

“정 그게 싫다면야 사형 좋아하는 돈 얘길 하지. 이제 군포 안 내는 것만 해

도…….”

“저는 이미 의주의 군적에서 지워져서 애초에 군포 안 냅니다.”

그야 홍득주가 근문소 초기에 뇌물 주고 지운 거다. 이강회는 왕이나 쟤나 뻔

뻔하긴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대화가 이쯤까지 오면 옛날 관녕(管寧)이 자리를 잘랐듯이[割席] 비루한 사람

이라고 하고 일어서서 나갈 만도 하건만, 이강회는 관녕처럼 초연하기에는 아

무래도 아직 수행이 모자랐다.

어쨌든 그는 정월 보름 쇨 땔감과 곡식을 좀 받으러 – 겸사겸사 음란서적도

받으러 – 사형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강회는 뭔가 선비다운 위로의

말을 궁리하다가 한 마디 꺼내놓았다.

“그래도 벼슬은 벼슬일세. 이제 가죽신에 비단옷 꿰고 큰갓 쓴 채 도성 활보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핫핫. 돈에 벼슬에다 학문까지 있으니 무엇이 부

러울까. 선생님께 들으니 벌써 관례도 치렀다 하는데 이제 속히 혼처도 찾아

야 하리.”

흠칫한 시준은 옛날에 써먹었던 조운의 얘기를 다시 꺼내려 했지만 입도 열기

전에 이강회에게 반박되었다.

“분명 선생님께 사형이 말씀 올리기로 공 없음을 걱정하지 처자 없는 것은 걱

정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당당한 영감이 되었으니 누가 보아도 공명 작히 이

룬 게지. 뭐, 의주의 제자들과 연통을 주고받는 일은 이 사제(師弟)가 맡았으

니 걱정 말게. 사형이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며 정조 지키고 있노라 꼭 전해주

겠네.”

시준은 혹시 자기가 지유와 싸리울타리 뒤에서 헤어졌던 일을 온 조선 사람들

이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시준은 넌더리를 내며 일어섰다.

“이거 중신 서려는 자가 너무 많아 큰일이오이다. 아무튼 이군(李君)을 오랜

만에 뵈었는데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아야 하겠군요.”

“어? 어? 자, 잠깐만.”

희만당 학풍에 너무 깊게 물들었다 해도 원래 이강회는 과거도 포기하고 학문

에만 몰두할 정도로 벼슬과 재물에 초연한 선비라 차마 자기 입으로 돈 달라

는 말은 못 하고 에둘러서 잡담이나 한 것이 화근이었다.

돈 안 주고 가는 시준에 당황한 이강회가 저도 모르게 따라 나왔다. 시준은

다 알면서도 매몰차게 사제를 외면하며 걸었다.

정약횡 집이 있는 황화방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현대의 연세대학교 캠퍼

스를 지나 봉수대가 있는 안산(鞍山)이 나온다. 현대처럼 건물이 빽빽하지 않

아 황화방과 안산 사이에도 공터가 꽤 있었는데, 시준은 최근 김시택 건 직후

이곳을 구매한 상태였다.

“오늘은 이 땅을 보러 왔지요. 이제 대보름이 코앞이니 얼마 후면 곧 삼[大

麻]을 심어다가 베짜기를 할까 합니다.”

“오호, 베옷은 선비에게 사시사철 부끄러움이 없는 의복이지. 사형이 벼슬자

리 하더니 벌써부터 청백리의 기운이 보이네그려. 북쪽 베[北布]가 좋다는 말

은 나도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사형도 과연 조예가 있었구먼.”

대보름이라는 말에 찹쌀 됫박 생각이 다시 떠오른 이강회는 삼베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아부할 핑계를 찾아내었다. 과연 정약용의 학풍을 잇는

대학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도 이것으로 베옷을 지어 소소하게 반찬값을

할 생각이오이다.”

시준은 다분히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객관적으로는 아무리 봐도 ‘걸려들었

구나’에 해당하는 표정이었지만 이강회에게는 시준의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강회는 편안히 대답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거야말로 떳떳한 일일세. 어디 의주처럼 길쌈할 사람이라도 모아 놓았던가?”

“타향에서 그게 어디 쉽겠소이까. 그래서 내가 특히 이군에게 부탁하고자 하

는 것이지요.”

“뭐? 아니,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장부로서 베틀을 어디 만져 보기나 했

겠는가.”

“베를 짜라는 게 아닙니다. 옷 짓는 데 실과 천만 필요하겠습니까? 비단 수백

동을 쌓아놓은들 바늘과 골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그 바늘을 사

야 하오이다.”

이 시대, 조선에는 바늘의 자체 생산량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

량을 중국에서 수입했는데, 많은 실학자들은 이것을 지적하여 공업의 진흥을

주장했다.

천한 장인바치 일이나 장사치의 일을 장려하자 하면 뭇매 맞기 딱 좋았으나,

의복을 만드는 일이라면야 천하의 떳떳한 산업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실학자

라면 안 써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북학의를 쓴 초정 박제가도 그러했고, 서유구는 한술 더 떠 ‘조선에는 바늘

만드는 법이 없어 중국이 유통을 막으면 망건조차 하나 짓지 못할 것이다’라

고 임원경제지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조선에는 기록상 분명히 조정에 속한 침장(針匠)이 있어서 그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국산 바늘을 구하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실학자의 제자인 이강회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옳아. 그럼 의주 근문소에 편지를 보내서 바늘을 좀 달라 할까? 청인들과 내

왕이 잦으니 그 정도는 쉬이 할 수 있을 걸세.”

“그것도 좋겠지만, 길이 멀어 사람 품삯이 너무 듭니다. 제가 근래 여기 서울

에서 역관들과 좀 얼굴을 텄는데…….”

김시택과 영어책을 공동 작업하는 일은 이제 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시준은

김시택의 소개를 받아 다른 역관들 또한 거기 참여시켰다.

물론 역관들이 조정에 대한 봉사정신이 넘쳐서 그렇게 한 건 아니다.

첫째로는 정약용에게 줄을 대어보려는 노력이고 둘째로는 이 책의 판매 대금

일부를, 현대로 치면 감수료나 저작권료 개념으로 시준이 갈라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얽힌 인연은 또 다른 사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인맥이란 재물과 같아

서 스스로 새끼를 치고 많을수록 더 빨리 불어난다.

바늘 장사는 꽤 돈이 되는 일이다. 얼마나 돈이 되냐면 일본국 태합 풍신수길

도 전직이 바늘장수였을 정도다. 역관들은 분명히 비장해 놓은 바늘이나 수입

경로를 갖고 있을 테니 거기에서 가져오면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국산화를 진행한다. 명품 메이

드 인 차이나는 비싸니까.

이번에 시전 상인들이 날벼락 맞아서 살판 난 야장들과 직거래하거나 조정 휘

하의 침장을 매수해서 자체적인 생산 라인을 세운다는 것이 시준의 계획이었다.

문제는 시준이 요새 한 푼 가치도 없는 왕명을 받드느라 좀 바쁘다는 점인데,

이강회 정도 되면 똑같이 정약용의 제자라 역관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데

다 학문으로 치면 시준보다도 훨씬 뛰어나서 체면을 잃고 오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과거 볼 텐데 조정 관리들과 미리 인사해 놓으면 좋지 않겠느

냐는 사탕발림에 넘어가기도 해서, 이강회는 기꺼이 역관과 시준 사이의 심부

름을 자임했다.

그렇게 쓸 만한 부하도 하나 얻자 시준의 씀씀이는 갑자기 너그러워졌다. 이

강회는 정약용이 서울 와서 받은 신참 제자 이택규(李宅逵)의 집에 머물고 있

었는데, 시준은 구사대원들 시켜 거기에 넉넉히 쌀과 포목을 보내 주었다.

7년 전 아버지 이승훈(李承薰)이 사교를 퍼뜨린 죄목으로 참수되고 피폐해진

집안이라 얹혀살기 눈치 보였던 이강회도 허리 좀 폈으니 다 잘 된 일이었다.

시준은 다시 집에 돌아와 영어사전 원고를 꺼내 놓으며 미소지었다.

사실 이강회가 사정이 급해서 미처 못 떠올린 거지, 비단과 면포 거래만 해도

넘쳐나는데 새삼 이제 와서 돈도 안 되는 베옷 장사에 이리 투자할 리가 없

다. 물론 적다 해도 돈은 돈이므로 베옷도 팔기는 하겠지만 시준의 의중은 베

옷보다는 바늘에 더 가 있었다. 그리고 삼으로 말하자면 줄기보다는 이파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홍경래가 북쪽에서 아편을 영국인에게 팔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으나 시준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셈이다. 영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약팔이는 영국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두 달 뒤, 흠차대신 부찰복장안이 김재찬과 이서구의 드러누워 배 째라 전술

에 더 견디다 못해 청국으로 돌아간 후 청에서는 장자도에 자국 관리를 주재

시키는 것으로 타협했을 무렵(가경제 마음속에서 타협되었다는 거지 조선이

받아들였다는 말은 아니다), 시준은 쑥쑥 커가는 대마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마는 줄기로 옷을 만들고 씨앗은 약으로 쓰며 잎은 비싸다. 아무튼 비싸다.

시준은 이강회의 말이 실로 옳다고 생각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니 삼을

어찌 고결한 풀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쪽 삼밭은 기술 실험용 겸 위장용에 가깝다. 시준은 인근의 삼 기르는 집을

찾아다니며 잎을 모아들였다.

조선에서도 대마의 약리 효과를 알고 있었지만, 이때까지의 대마 잎은 집에서

다른 것 없을 때 상비약으로 복통 달래려 달이는 정도지 대규모 판매를 계획

할 귀물은 아니다.

어차피 줄기 거두면 버릴 건데 시준이 적은 값이나마 쳐주기도 했고, 의주 사

람들이 서서히 서울에서 인심을 얻어가고 있어서 작업은 쉬웠다.

“죄인을 잡는지 저들이 죄인인지 분간도 안 가는 순라꾼보다 의주 청년들이

낫네그려. 저번에도 부랑당 화적패 놈들을 때려잡았다면서?”

“아이고, 저기 그 오죽당(烏竹黨)이 오는구먼. 말만 잘 하면 이까짓 삼 이파

리 나눠주고 의주감자도 얻을 수 있다던데.”

검은 데님천 바지에 검은 조끼를 입은 평안도 청년들의 차림은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맨 겉의 도포 따위는 색깔 있는 것으로 입긴 했어도 안의 기본

옷은 흰색이 대부분이었고, 험한 일 많이 하느라 의주바지가 많이 퍼진 평안

도와 달리 서울은 아직 그 전통을 고수했다.

게다가 조선 사람들에게는 배자(褙子, 민소매 웃옷. 평안도에서 주로 입었으

며 조끼와는 다르다)의 일종으로 보이는 등거리웃은 서울 사람들에게 더욱 낯

설었다.

평안도에서나 입던 특유의 복식인데다 – 이게 시준의 조끼가 쉽게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다 – 평안도에서도 보통 여자 옷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주 사람들은 그 옷차림부터 이목을 끌었다. 팔만 희고 머리와 얼굴

과 웃옷과 다리가 모두 검으니 멀리서 보기에는 검은색 나무줄기 몇 개가 우

쭐거리는 것처럼 보였기에, 어느 선비가 처음 끄적거렸는지 알 수 없는 오죽

당이라는 이름으로 으레 불리게 되었다.

시준은 그 이름이나 평판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긴 용만 충의신민 연락사라

는 정식 명칭은 너무 길고, 가산 용맹청년 구사대 같은 다른 평안도 민병대

조직을 한꺼번에 묶을 이름도 필요했다.

‘의주에서 검은 바지당이라고 불릴 때는 좀 그랬지. 마치 파시스트 봉기를 일

으켜 서울로 진군해야 할 것 같은 이름이잖아.’

프로파간다에도 쓸만했다. 옛날부터 대나무는 네 가지의 군자[四君子] 중 일

좌로 선비의 벼리가 되는 데다 그중에서도 검은 대나무라 하면 저 강릉의 오

죽헌(烏竹軒) 이래로 뭔가 대학자와 연관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나기 때문이

었다.

물론 시준이 보기에 오죽당 청년들은 대나무같이 머리가 비었을 뿐 대나무의

절개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그걸 굳이 밖에서 말할 필요는 없다.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직접 돌아다니며 각지의 삼밭에서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고를 많이 덜게 되었다. 돈이 썩어나는 의주 미친놈들이 풀

떼기를 담배나 감자와 바꿔 간다는 소문이 퍼져서다.

도성 밖으로 나온 시준과 오죽당의 앞에는 지게에 마 이파리 지고 온 백성들

이 줄을 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소. 여기 감자 있소.”

“어이구, 고맙소이다. 늙은이가 집에서 노느니 뭐 합니까. 가벼운 풀짐이라도

져야지요.”

힘든 일을 할 수 없어 어영부영 새끼나 꼬던가 담배 물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노인들도 제 몫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뭘 나르는지 꿈에도 모르는 노인들은

감자 한두 알 들고 가서 팍팍한 식단에 보탬 될 생각에 히죽히죽 웃었다.

개중에는 시준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의 선의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 나이면 농사일에 한창 바쁠 텐데도 한 건장한 청년이 남들 세 배나 되는

짐을 지고 왔다.

“이번에 제 막냇동생 놈이 검계 패거리들에게 잡혀가서 눈깔 뽑히고 팔 잘려

구걸하게 될 뻔했는데, 험한 꼴 보기 전에 구해 주셔서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

야 할지. 달리 드릴 것도 없이 가난해서 몸 둘 바를 모르던 차에, 삼이 필요

하시다니 줄기까지 뭉텅뭉텅 해서 많이 가져 왔소이다.”

“아하하. 우리가 뭐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겠소. 모두 나랏님의 은덕이지요.

이건 내 감사히 받겠소. 감자도 좀 가져가시오.”

시준은 별 필요 없는 줄기는 무게만 늘어나니 안 받고 싶었지만 성의를 무시

할 수도 없어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정약횡 집 창고에는 시준의 눈에 금덩어리로 보이는 이파리들이 착착

쌓여갔다.

대마초는 테세우스가 실패 풀어가며 미궁을 헤매고 삼황오제가 열심히 댐 공

사 하느라 삽질하기도 이전부터 인류가 애용한 약재였다.

그 외에 공무원으로서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유럽에서의 여러 경험 때문에 시

준은 이 식물 다루는 법을 잘 안다. 아무튼 영국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이파리를 잘 말리고, 그다음에는 여러 교육상 부적절한 방법을 거침없이 써서

대충 마리화나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시준은 금광 경영하면서 광부들이 편하게 담배를 피우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해 생각 없이 돈 쓰게 해서 빚더미에 가두기 위해 이미 궐련을 만들었

던 경험도 있다.

시준은 몇 가지 시제품을 시험해 보고 전근대치고는 만족스럽다는 결론을 얻

었다. 곧 시준의 ‘담배’는 의주 사람들이 실어온 ‘진짜 평안도 담배’라는 이

름을 달고 한성 유흥가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과연 서초가 좋다더니 실로 그러하구나! 이 천벌 받을 장사꾼 놈들이 서초라

고 한 건 다 가짜였구먼.”

“이제 다른 남령초(담배) 따위는 못 피우겠네그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담준론이 뱃속에서 뭉게뭉게 떠오르는 듯하이. 오석

산(五石散) 먹고 운수처럼 떠돌았다는 옛 선비들의 기분이 바로 이것이었구려.”

말하기는 뭣한 일이지만, 높으신 분들의 별로 깨끗하지 못한 술자리 뒤에 이

어지는 역시 기록될 수 없는 일에 이 평안도 담배는 썩 좋은 효과를 보였다.

한성에서 풍류공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서초를 먹을 줄 알아야 했다. ‘화로

들여라, 서초에 불을 밝히자’는 말은 20세기 히피들의 경구 ‘Light on the

fire’처럼 오늘 밤 한번 인륜과 예의를 벗어던지고 화끈하게 놀아보자는 은어

로 통했다.

시준은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아편처럼 사람을 완전히 폐인 만

들어 버리는 것도 아니고, 코카인이나 담배처럼 도저히 끊기 힘든 것도 아닌

데다가 LSD처럼 감당 못 할 정도의 환각 작용도 없다.

물론 그건 시준의 생각이고, 정책 결정자들이 그만큼도 몰라서 지구 대부분의

국가가 마리화나를 금지한 것은 아니다. 대마는 분명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

쳐 운전 등에 매우 위험하며 다른 강력한 마약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는 조선이다. 마약 따위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부도덕과

죄악이 횡행하는 데다 자동차도 없고 헤로인이나 코카인도 없다.

그래서 시준은 부담 없이 서초를 팔아 댔다. 이것은 의주로 건너가 역시 영국

에도 수출되었는데, 마약을 팔아 본 적은 많아도 사 본 적은 별로 없던 동인

도 회사는 꽤 당혹해했다. 그러나 성능이 워낙 좋아 선원들도 곧 궐련을 물고

다니게 되었다.

그해 늦여름이 되자, 시준은 그 자본을 기반으로 서울 서쪽의 양목(洋木, 캘

리코)이며 비누, 의주바지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고가 될 수

있었다.

임상옥이나 홍득주에게 투자금을 나눠 주기는 해야겠지만 이것은 시준의 온전

한 독립 사업이다. 그러나 서울을 좌지우지할 대부호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

운 것이 곡물이나 소금에 비하면 규모가 형편없는 데다 시준은 왕실이 헛기침

한번 할 때마다 뇌물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시준은 빨리 한영 사전이나 완성하고 빠지려 했다. 허나 이미 얽혀든

국왕 이공은 시준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공은 오죽당이 쓸 만한 정치깡패가 될 수 있음을 금방 알아챘다. 왕이 요구

하는 일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 갔다. 시준은 자기가 인질인지도 모르고 멀쩡

히 조정 출근하는 정약용의 모습에 한숨만 푹푹 쉬어야 했다.

예조 참판으로 승진, 통무아문 부제조를 겸하고 비변사에도 참여할 권리를 얻

게 된 정약용이 조선 최초의 한영 사전 『영학해설(英學解說)』의 초고 검토

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의 바람은 북풍이 아니라 남풍이었다. 비변사와 여러 관청에는 조선 최대

의 곡창지인 양호(兩湖)를 중심으로 아예 절멸 수준의 대흉년 보고가 속속 올

라왔다.

올봄부터 가뭄이 너무나 혹심하여 징조는 이미 보였으나, 소비도시인 한양에

살던 시준은 잘 모르던 일이 드디어 닥쳐온 것이다.

기록상 이때의 가뭄은 ‘100년 내에 없었던’ 재앙으로 묘사된다. 근래 풍년에

익숙해 있던 백성들은 순식간에 굶주려 떠돌고 추정 8백만이 넘는 기민이 발

생했다.

순조 9년부터 7년간 계속되어, 막대한 비축량을 자랑하던 복지국가 조선의 환

곡을 죄다 갉아먹고 장기적으로 조선을 무너뜨리는 한 원인이 된 장기 대흉년

의 시작이었다.

작가의 말

1. 오석산이란 다섯 가지 광물로 이루어진 약재인데 사실상 독약으로, 중국 한대부터 유행했습니다. 마약 같은 기분을 주긴 하지만 부작용이 너무나 극심해서 웬만한 현대 마약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장복했을 시(주로 술에 타 먹었습니다) 피부가 다 헐고 정신이 흩어져 미쳐버린다고 하죠. 다행인 건 재료가 너무 비싸서 광범위하게 퍼지지는 못했다는 점이랄까요..

2. 관녕이 자리를 잘랐다는 이야기는 후한 대 선비인 관녕이 화흠(그 화흠 맞습니다)과 친했는데, 속세의 가치에 솔직한 화흠의 태도를 보고 비루하다 여겨 그 다음부터는 앉은 자리를 잘라버리고 다시는 그와 동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난세 잘 타서 입신출세한 화흠과는 달리 관녕은 그 재주가 화흠과 동격이라 여겨졌지만 요동으로 도망가 숨어 삽니다.

3. 프랑스 혁명이 매관매직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닙니다.(그 복잡다단한 원인은 간단하게 요약해도 책으로 한 권이 나오겠죠) 매관매직은 장구한 역사 동안 일어났던 일이며, 관직이 사유재산의 하나로 취급되었던 유럽의 전통도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징세청부인이 민중을 심하게 착취하기는 했죠.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이 짓 하다가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래도 라부아지에는 친혁명파로 잽싸게 돌아서긴 했는데 공포정치기에는 그런 걸 가리지 않아서..

16. 얽히는 양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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