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5. 골든 트라이앵글(1)
정대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호, 영길리국이라. 청국이 아니고? 인삼이며 모자 같은 것을 바로 가지고
오면 자네들로서는 돈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너무 대놓고 떠보려 해서 시준도 뒤퉁스럽게 대꾸했다.
“노인장께서는 누굴 바보로 아시오? 서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는 신
의를 중히 여깁니다. 송상에 팔던 것을 다시 우리가 직접 갖다 팔 수는 없소.
영길리국 것만 매매하겠다는 거요. 그거야 고래로 누구도 관례로써 독점하지
못했던 물건이니 상관없지 않겠소이까?”
“흐음. 그래. 미안하이. 내 자네가 허풍 치는 것인지 알아보려 했지. 만약 이
일을 응낙했다면 그냥 여기서 죽였을 걸세.”
시준과 기랑만 빼고 모든 의주 사람들이 움찔했다. 시준은 혹시 자기 옆에 따
라왔던 김모지리가 무슨 일 낼까 봐 그에게 들려서 온 삼척검을 얼른 빼앗았다.
“어린 녀석이 만상의 일을 좌지우지하는 듯이 말하니 의심될 수밖에. 하지만
진짜요. 나는 몰라도 여기 박 재봉장은 송상과도 인연이 깊어서 들어보셨을
텐데.”
악연도 인연이다. 모자 사건 당시 뭔가 오해한 박광유 때문에, 송상에서는 어
디서 도술 부리는 어린애를 데려다가 사람을 두들긴 모주가 되어 있는 박득출
이 얼른 나섰다.
“그렇지. 우리 서장관은 의주 도중의 좌주 홍씨네 어르신이 아들로 여기는 바
요. 깔보면 아니 되지. 이번에 도성 들어가서 임금님도 뵙고 왔는걸.”
시준이 본 건 왕이 아니라 왕의 장인이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정대
운이 믿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시준은 아까 빼앗아 두었던 삼척검을 척 내밀었다.
“일은 빨리 끝낼수록 좋지. 할 얘기는 다 끝났으니 용돈이나 얻어 갈까. 이거
나 하나 팔아 주시오.”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정대운은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쩌면
이 칼을 두들긴 게 정대운이나 그 수하 야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대운이 알아본 것은 검의 정체만이 아니었다. 시준은 반 시체가 된
덕순을 그냥 넘겨주고 대신 자기가 칼 값만은 가져간다고 말함으로써, 서울의
세력 구도를 어떻게 정할지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만상은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너희가 갈라 먹되, 공백지
에 만상을 끼워 주어라.
정대운은 만족스럽게 곰방대를 던지고 칼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덕
순의 이빨을 뽑아냈던 집게를 놀려 슴베와 칼자루를 분리했다.
지금은 많은 야장을 총괄하는 행수라 직접 메질을 한 지 오래되었다 하나, 그
의 손놀림은 재빠르면서도 섬세했다. 밥숟가락 놀리는 듯한 자연스러운 손질
끝에 쇠로 된 칼날 부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에 쑤셔 박히고 자루는 화로
에 던져졌다.
박득출이 눈을 크게 뜨고 삿대질했다.
“저, 저…….”
조선에서는 모든 종류의 쇠가 귀물이다. 칼은 소를 팔아 산다고 했을 정도로
비싼 물건이며, 전설적 검계인 표철주의 쇠막대기도 무기의 의미와 함께 부를
과시하는 뜻이 있었다.
박득출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대운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어디서 개 모가지라도 친 모양이군. 뼈를 치면 칼날이 메지지. 내가 잘해 둘
터이니 돌아가 보게. 나중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대금을 들려 보내겠네.”
여기에서 관 쪽을 쳐다보지 않은 것은 정대운 정도 되는 자만이 발휘할 수 있
는 세련된 노련함이다. 시준도 정대운의 응답을 알아들었다.
증거품은 확실하게 없애 주겠다. 하지만 아직 너희에게 칼 값을 지불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도중의 좌주들일 테니 당연하다. 어차피 만상을 서울에
받아들여 줄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던 시준은 뭐라고 말하려는 박득출을 제
지하고 꾸벅 목만 숙여 인사했다. 상놈끼리 이 정도의 예의면 충분하다.
“고맙소이다. 노인장.”
나오는 길에 박득출이 물었다.
“정말 저놈들이 순순히 장바닥을 내어줄까? 차라리 제 문상(門商, 도제 상인)
들 갈라 주고 말지 우리한테 양보할 것 같지는 않은걸.”
“아마 양보할 겁니다.”
시준은 그렇게만 말했다. 박득출에게 이 심모원려를 모두 설명하는 게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다.
조정은 시전 상인들을 잡아들이고 덤으로 돈도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자영업자 등록 전산시스템이 있는 세상도 아닌데 솔직히 누가 시전 출신인지
육의전 상인인지, 아니면 야장이나 소매업자 혹은 조졸(漕卒)인지 정확히 구
별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전왕 때 세 차례의 통공(通共)으로 안 그래도 서울에 소매상이 늘어서 구분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왕의 목적이 재산이라면 구분할 의지조차 없을 터.
아마 무차별적인 국가 폭력이 서울 시전을 휩쓸 것이다.
그리고 이 난맥은 인맥과 풍문에 의지해야 하는 상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
용된다.
왕이 체제를 박살낼 서울 상계는 이제부터 암중모색을 통한 합종연횡의 시대
로 들어간다. 전체적인 세력비와 나와의 격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누구
도 함부로 적으로 돌릴 수가 없으며, 확실한 동맹은 무엇보다 귀중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 증거나 근거도 없지만 시준은 만상만
이 영국산 물화를 수입할 수 있다는 인상을 서울에 심어주는 데에 성공했다.
왕도 김조순도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러나 시준 스스로 그것이 당연하
다는 전제로 행동했기에 협상 과정에서 이는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되었다. 경
상 역시 굳이 만상을 적대하면서까지 그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다.
서울 상인들은 ‘유일한 영길리국 중개상’인 만상을 외면할 수 없다. 물론 어
디까지나 그들의 착각이지만, 곧 현실과 유사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
따라서 임상옥과 홍득주는 용천부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전국의 영국산 물화
유통을 통제할 수 있다. 합의가 되었다고 오해한 송상은 여기에 함부로 끼어
들지 못한다.
시준은 슬며시 웃었다. 너구리의 꼬리에는 줄무늬가 없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너구리를 그려 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라쿤과 같은 줄무늬를 같이 그린다.
아무 실체 없는 공통 무의식적 인식은 곧 실체를 불러올 것이다. 만상의 서울
침투라는 이름은 실체보다 선언이 먼저 완성되었다.
비슷한 시기, 홍경래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가 만상에 대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시준을 통한 홍득주와의 협상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원인은 홍경래가 만상의 밀무역이라는
약점을 쥐고 있었던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개항과 조약으로, 그때까지의 밀
무역은 공무역이 되어버렸다.
지금 통무아문 관리들이 속속 들어오고, 번영의 노래 부를 준비 다 마친 용천
부 사람들 앞에서 사실 만상은 그 전부터 밀무역을 했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상이 제공하는 여러 보이지 않는 용역이 사라지면 통무아문 관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동인도양행 사람들은 화를 낼 게 뻔하다.
물론 나라에도 반역하는 홍경래가 남이 화내는 것 정도를 두려워하지는 않는
다. 문제는 동인도양행이 한 나라쯤 우습게 멸해 버릴 수 있는 무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홍경래는 조선을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영국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장사는 인맥이며, 오래전부터 영길리인과 상종해 온 만상이 아니면 그 역할을
대신할 자가 없었다. 홍경래는 통무아문 관리들이나 평안 감사 이서구가 이걸
다 알았으면서 묵인한다는 인상마저도 받았다.
홍경래는 가산의 본거지에서 여러 장부며 문서를 뒤적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건 그게 아니지.”
홍경래가 가장 대타격을 받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안도 사람들이 갈수록
살 만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본래 홍경래는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과 (이제 곧 올) 대흉년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기반으로 거병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대흉년이 오지 않았으며, 평안도민은 앞다투어
영길리 배에 몰려가서 물건을 떼다 팔아먹고 있다.
그리고 만상은, 특히 임상옥은 공격적인 사업 확장으로 그런 사람들을 거의
전부 만상 도중의 휘하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근문소를 기반으로 용천부를 장악한 임상옥과 홍득주는 송상을 효과적으로 막
았다. 만상은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 무역이고, 청의 전례를 따라 영국 상대
로도 우리가 맡을 것이니 밥그릇 빼앗는 일은 곤란하다’는 점을 송상에게 납
득시켰다.
홍경래가 없었다면 송상이 막대한 자본을 살포하거나 자객들을 대량으로 보내
어 거래망 탈취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경래는 몇 년 전 시준도 참여한 금광 사업을 기반으로 평안도 지역
송상과 만상의 연합을 꾸렸으며, 같은 편끼리 싸우면 손해가 더 많다.
만상도 패거리를 받는 데 있어 아무래도 동향 평안도 사람을 우대할 수밖에
없다. 용천부와 의주의 평안도민은 대영 무역이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 이
시점부터 부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홍경래의 잠재적 동료가 되어 줄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 홍경래가 보고 있는 장부는 그 사실을 웅변적으로 나타냈다. 장부에 적
힌 사람 중 많은 수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동맹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홍경
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던 상인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새로 모집하는 일
은 쉽지 않았다.
우군칙은 만사가 다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몽초(김창시) 그 사람조차 지금 금점 덕대 자릴 만상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장자도에 한 다리 껴서 옥양목을 사들이겠노라 하고 있네. 속히 결단하지 않
으면 일은 갈수록 어려워질 거야.”
우울한 소식이었다. 금점은 단지 금이 나오는 이득만이 다가 아니다. 시준이
잡아 놓은 평안도 금점 체계가 사람 빼돌리는 데 방해되기는 하였지만, 바로
그 체계 덕분에 홍경래 휘하의 금점만큼은 손쉽게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근
거지이기도 했다.
우군칙의 말처럼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재빠르게 거병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무릇 질질 끌어서 좋은 반란 따윈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거병하면 반드시 만상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현재 만상의 번영
은 갑자기 왕이 미쳤는지 개항을 해버린 덕분이며, 서북통상사무아문을 지키
기 위해서라도 만상은 홍경래에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물론 홍경래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의 깊게 구축한 반란군의 규모는 작
지 않다. 만상의 여러 구사대는 그에 비하면 소수다. 밥만 먹여 주면 좋다는
부랑패와 망나니 따윌 끌어모은 병력의 질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홍경래의 반란군이라고 무슨 정예군인 것은 아니다. 조선군도 오합지
졸이지만 반란군은 더 오합지졸이다. 관군 상대하기도 벅찬데 만상까지 적대
하면 반란 성공률은 한없이 낮아진다.
홍경래는 수도 없이 해 본 고민을 반복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금은 아니야.”
“그럼 무슨 수가 있나? 이제 1년만 더 있으면 우리 군사들이 환곡이라도 꾸어
다 먹어야 할 지경이란 말일세.”
“나도 알아. 조용히 하게.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니.”
답은 항상 문제 속에 있는 법이다. 홍경래는 이 모든 문제가 영길리인에 의해
서 발생했다는 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의 돌파구도 그곳에 있다.
홍경래는 쉬운 해결을 위해 상황을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만약 필
요한 것이 재물이라면, 거리낄 필요는 없다. 밀무역은 만상만 하는 것이 아니
다. 애초에 만상들도 잠매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홍경래의 머릿속에서 그 두 가지 개념이 빠르게 결합했다. 이제 공무역으로
바뀐 덕에 만상은 영국과의 밀무역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래서 그 자리는
비어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가 그곳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홍경래는 장사꾼이 아니
라서 그쪽은 전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방면에서는 홍경래와 친한 전문가
들이 이미 있다.
‘송상 쪽 사람들에게도 만상을 거치지 않고 매매할 수 있다고 하면 좋아하겠
지. 문제는 뭘 팔아먹느냐인데, 영길리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분명…….’
늦은 나이에 영어 배우느라 고생하고 있던 홍득주는 갑작스러운 홍경래의 방
문에 놀랐다. 그리고 그가 직설적으로 꽂은 요청에는 더 놀랐다.
“뭐라고 했나?”
“이 조카가 뭘 잘못 먹었는지 요사이 곽란(癨亂, 급성 복통)이 너무 심해서
요. 이럴 때는 앵속(양귀비)이 제일이라고 하던데 어른께 좀 얻으려고 왔소이다.”
홍득주는 도저히 복통 환자 같지 않은 홍경래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다가 안경
을 벗어 놓았다.
아편 지분을 나눠 주지 않으면 관에 밀고하겠다는 뜻.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암시이고, 동시에 홍경래치고는 너무나 섬세하지 못한 방식이다.
이것은 그가 홍득주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하는 증거일까, 아니면
사정이 다급하다는 증거일까? 홍득주의 머릿속에서 최근의 구사대 배치와 무
기 밀매 현황, 그리고 홍경래 쪽에 꾸준히 첩자를 잠입시킨 결과들이 뒤섞였다.
홍득주는 일단 말을 돌려 보기로 했다.
“앵속이야 봄에 꽃이 피지 않는가. 이 겨울에 앵속이 어디 있어?”
“양귀비 씨앗은 이태를 묵혀도 싹이 난다는 것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아는
일. 어르신의 곳간에서 좀 나눠 주시면 제가 명년에 한두 뿌리 길러다가 약에
쓰려는 것이지요. 원래 농사는 지혜로운 노인에게 묻는 것이므로 그 기르는
방법도 꼭 가르침을 듣고자 하오이다.”
창고에 아편 재어 놓은 거 다 아니까 눙치지 말라며 싱글싱글 웃는 홍경래 앞
에서 홍득주는 등에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사실 양귀비가 필요했다면 홍득주에게 말할 것도 없이 구할 수 있다. 홍경래
의 말은 흡연용 아편의 제조 비법과 그 판로까지 내놓으라는 소리다.
허나 홍득주와 홍경래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홍득주 역시 홍경래의 약점
을 쥐고 있다. 홍득주는 설마 홍경래가 그것을 잊어버렸는가 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래. 조카가 달라는데 어찌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될 수 있는 한 많이
내어 주지. 자네 부리는 사람이 많으니 들고 갈 손이 모자라지는 않겠지?”
이 맥락에서 홍득주의 말은 ‘부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고 있다는 협박이
다. 그래서 홍경래 역시 약간 지체했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머지 사소한 궂은일이야 조카가 다 맡을 테니 아저씨께서는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야 있겠지만 신
묘한 마비산의 고장인 이 의주에서 사는 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홍경래 역시 날로 먹으려고 들진 않았다. 협조한다면 홍경래가 파는 아편은
그 재료인 양귀비를 모두 홍득주가 독점 공급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제안
에 홍득주는 조금 생각해 보고 응낙했다.
아편 시장은 무한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가진 청의 판로는 조금 침해당하
겠지만 홍경래의 제안을 거절하는 위험보다는 그쪽이 낫다.
“그래. 천천히 하게. 밭이며 곡창은 여기가 아니라 남쪽 무산(영변)과 그 부
근에 있어. 그리고 청국 흠차대신이 아직 떠나지 않아서 평양 쪽이 좀 어수선
해. 사람 보내려면 좀 기다려야 할게야.”
복장안은 오랫동안 평양에 머무르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협
상 중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한참 뒤에 체결될 조영수호통상장정에 이어 조선이 서양 나
라들과 조약을 맺기 시작하자, 청은 조선을 확실하게 속국으로 묶어두면서 근
대적 무역을 개시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때야 태평천국운동과 아편전쟁 등으로 청이
싫어도 유럽에 대한 열위(劣位)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지금
청이 허겁지겁 조선과 유럽식 조약을 맺으려 드는 것은 청의, 나아가 중화의
국체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복장안은 처음에 조선으로부터 다른 땅이나 재물을 뜯어내려 했다. 하
지만 김재찬은 땅의 경우 평양의 대유럽 개항마저 암시하며 강경하게 거부했
고, 재물은 조선에 먹고 죽으려도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흠차대신 부찰복장안의 심기가 불편해질수록 청국 사신단 일꾼들이 부리는 행
패는 더 심해져 갔다. 안 그래도 대화재 겪은 지 얼마 안 된 평양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평안 감사 이서구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죽을 맛이었다. 여기에서 근문소는
상인들만 이득 보는 구조가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는데, 평안 감사의 압력을
받은 근문소 향사들의 내리갈굼 때문에 만상도 청인들을 달래기 위한 재물을
꽤 많이 내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상들은 ‘탐욕스러운 되놈의 벼슬아치’를 욕하면서 그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만상들이 법을 우습게 안다 해도 대국 사
신이 근처에 있는 상황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청 관리들 역시 뇌물 좀 주면 아편 아니라 더한 것을 판다 해도 모른 척
할 것이다. 허나 복장안은 조선에 대한 트집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상
태. 만약 외교적 문제로 비화된다면, 조선 관리들 또한 급작스럽게 청백리가
되어 철저히 수사할 것이다.
홍경래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래 나라 백성으로서 대국 사람들과 사사로이 상종하는 것은 죄라. 경
거망동하지는 않겠습니다.”
네놈이 언제부터 죄를 두려워했느냐고 비아냥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던
홍득주는 홍경래가 지나가듯 한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홍경래는 청에 아편
을 팔지 않겠다고 말한 셈이다.
그렇다면 국내에 판다는 얘긴데,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조선은 나라가
좁은 데다 사람들이 웬만해선 고향 뜨는 경우가 드물어서 흡연용 아편의 경로
를 쉽게 추적할 수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구매력이 없다.
그러나 홍득주는 자기가 한 생각이면 홍경래도 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홍경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다가 팔아먹으려는 것인가……?’
홍득주는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누가 들어도 탈 없는 암시와 우회적 질문으로
그것을 캐내려 애써 보았다. 하지만 홍경래는 홍득주가 적당한 말을 생각해낼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볼일 다 본 홍경래가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홍득주는 고민에 빠졌다.
‘그 녀석이 있었더라면 좀 일이 쉬웠을 텐데.’
가끔 건방지기도 하고 이해 못 할 기행을 벌이기도 하지만, 잔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던 그의 아들이 오랜만에 그리웠다. 홍득주는 남쪽을 보며 장죽에 불을
댕겼다.
제임스 할리버튼(James Halliburton) 선장은 벌써 10년도 더 전부터 왐포아를
드나들던 배 글래턴(Glatton)의 현재 선장이었다.
배수량으로 따지면 조선인들을 경악케 했던 데이비드 스콧보다도 큰 이 배는
본래 올해 왐포아에 왔다가 바로 브리스톨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원래 역사대
로라면 지금쯤 브리스톨에서 다음 중국 항해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올해 마카오를 둘러싼 영국과 청의 갈등이 일어나면서 동인도 회사는
인근의 배를 모조리 소환했고, 글래턴 역시 그 때문에 세인트헬레나로의 일정
을 취소하고 중국 연안에 머물렀다.
할리버튼 선장은 돈도 안 되는 초계 임무 대신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었
지만 회사는 그에게 한 가지 임무를 더 주었다.
할리버튼 선장은 제대로 된 항만 시설 하나 없어 선장이 보트를 타고 다리 다
적셔 가며 올라와야 했던 이 노루섬인지 뭔지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사회는 죄다 어디 골을 흘리고 다니는 건가? 이게 어딜 봐서 개항이라는
말이야. 그냥 조선놈들이 우리를 놀리려는 거지!”
안타깝게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중국의 악랄한 방해와
폐쇄적 정책을 뚫고 조선이라는 새 시장을 개척한 두 사람은 에누리 없이 큰
명예를 받았다.
물론 동인도 회사가 이들의 업적을 선전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들
은 왐포아로 돌아와, 드루리 제독에게 이제 볼일 다 봤으니 도로 좀 꺼져달라
는 통보를 점잖게 전달했다.
이 건을 자기 혼자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드루리는 어이없어하고 심지어 분
노했다. 허나 그가 아무리 파워풀한 제독이라 한들 언론과 정계에 대한 영향
력으로는 동인도 회사에 미칠 수 없다.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서 미적거리는 드루리 제독과, 그런 드루리에 대
한 오만가지 중상모략을 군에 쑤셔 넣고 있는 레디 소령이나 로크 선장은 둘
다 왐포아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배가 조선 무역을 대신해야 했으
며, 그간 수차례의 견실한 항해 실적이 있는 글래턴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아직 미개척지라 할 수 있는 조선 무역은, 로크 선장이 보여주었듯 기회의 땅
이기도 하다. 그러나 할리버튼 선장은 조선인들이 여전히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할리버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어내었다. 그러
고는 마치 통역 실수라면 지금 교정하라는 듯이, 발음이 썩 괜찮은 중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지금, 아편을 팔겠다고? 너 뭐 하는 녀석이야?”
할리버튼 선장의 어처구니를 실종되게 만든 것은 이것이 조약에서 엄히 금한
밀무역이라서가 아니라 영국 특산물을 영국인에게 팔겠다는 황당한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인어에게 선박 판매를 영업하는 쪽이 이보다는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젊은 조선인, 홍경래는 이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알아들으셨소. 나야 뭐 정해 놓고 하는 일은 아직 없지. 피차 이름 밝힐
처지가 아니니 아무려면 어떻소이까. 원하는 대로 부르시오.”
작가의 말
1. 세인트헬레나 섬이 자주 나오는군요. 나폴레옹의 유배지나 장수풍뎅이 서식지로 유명하긴 하지만, 당시 아시아와 유럽을 왕복하는 동인도 회사 선박의 주요 기항지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아시아에서 세인트헬레나를 거쳐 브리스톨(다운스)로 왔다갔다 했죠.
15. 골든 트라이앵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