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43화 (43/284)

43화

14. Gangs of seoul(2)

의주를 떠날 때는 영국과 조약을 맺을 줄 몰랐기 때문에 시준이 처음 요청한

데님 천은 시장 개척 정도의 소량이었다. 하지만 임상옥은 기왕 정식으로 영

국과 교역하는 김에 과감하게 자본을 투자했다.

영국인들에게 대조선 교역의 민간 거래는 만상이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아직 무슨 일인지 파악도 못 하는 용천부 시골 아전들에게도 세

를 과시하며 동시에 시준에게도 빚을 지우는 일석삼조의 계책이다.

‘평안도에서 외국 상인과 거래하는 일이라면야, 나랏일 하느라 바쁘신 나리들

심부름해 드릴 사람이 우리 만상 말고 누가 있습니까? 맡겨 놓으시지요.’

‘자네들이 청나라 사람은 잘 알아도 영길리 사람은 어찌 잘 알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임상옥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아무 말이나 유

창하게 좀 해 주면, 서울에서 여기로 몸만 던져진 통무아문 관리들도 얼떨떨

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타이밍이고 좋은 감각이다. 그래서 그 판단에는 시준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서 갚아야 할 빚이 생겼다는 것은 입맛이 좀 썼다. 대충 양을

헤아려 보니 자기가 주문한 것의 족히 5배는 되었다. 게다가 꼼꼼한 임상옥은

옥양목까지 적지 않게 실어다 줬다.

‘이건 서울에서 영구적이고 대규모의 사업을 개시해 달라는 의미지.’

박득출은 시준의 추측을 명확하게 확인해 주었다.

“임 행수도 자네와 비슷한 말을 했네. 그냥 물건 떼다 팔아치우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끈을 좀 잡아 보라는 거였어.”

“그렇겠지요.”

단순히 큰 가게 하나 내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장사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객주와 선상(船商) 사이의 인맥을 확보하고, 조정에 줄

을 대어 놓으며, 더하여 서울에 모이는 물건의 생산지까지 손을 뻗칠 수 있다

는 뜻이다.

그런 체제를 구축하려면 정약용이 조정에서 한창 뜨고 있는 지금보다 더 적합

한 때는 없다. 통무아문 관리들에게 상황을 얻어들은 임상옥의 결심이리라.

그런데 그러려면 경상의 양해를 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상과 서울 시전에

대한 유통망을 갈라먹고 있는 송상은 완전히 제쳐야 한다.

시준은 경상에게 만상이 송상보다 더 적합한 동반자라는 것을 알려 줄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성균관에 있던 선비들은 그래도 개항에 대해서 잘 아는 축이었다. 그래서 심

각한 소요까지는 번지지 않았다. 하지만 경강상인들이 남부럽지 않은 교활함

을 갖췄다 해도 지식인 계층일 리는 없으며, 보통 적게 아는 사람일수록 자기

가 아는 것만을 완고하게 믿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만상이 대영국 무역의 주도권을 쥐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납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대외 무역이란 게 이 시대에서

는 내수보다 큰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

규모로는 영국보다 훨씬 큰 대청 무역도 만상의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상이 조선 상계에서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그 증거다. 경

상이 시준의 제안에 콧방귀를 뀐다고 해도 불합리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음……. 앉아서 끙끙대기만 해 보아야 소용이 없지. 우선 사람들부터 좀 만나

러 가 볼까요.”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 영업사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시준은 막막했지만 일

단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박득출이 친근하게 물었다.

“그럴 텐가? 하긴 그래야겠지. 애들 몇 명 붙여 주는 게 낫겠나?”

“아니, 점잖은 분들 뵈러 가는 것이니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먼 길 왔으니

대충 정돈 끝나면 그냥 쉬게 하세요.”

시준은 경상 도중(길드) 관계자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다. 어차피 의주 사람

들이 객줏집에 묵고 있는 이상 이 소식은 벼락처럼 번져 갈 터. 그들이 접촉

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우위를 차지하기 편하다. 그래서 시준은 다른 쪽을

뚫어 보기로 했다.

“아니, 대갓집에 다니러 가려면 미리 연통을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연

이라도 터놓은 분이 있어? 벌써 해가 중천인데 높으신 분들은 지금 다 대궐

가 있는 거 아냐?”

박득출의 소박한 예상 중 맞는 게 두 가지 있었다. 시준이 관리를 만난다는

것이 그 첫째요, 중요한 관리들은 당연히 지금 출근해 있다는 게 둘째다.

하지만 하나는 틀렸다. 시준은 대궐 가 있을 만한 높으신 분들, 그러니까 조

정의 중신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다. 그건 너무 뜬금없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

이다.

물론 시준도 아는 고관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이조 판서 남공철 같은 사

람은 비눗방울의 인연이 있어 시준을 그리 심하게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집 하인들은 매우 심하게 박대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

면 정약용에게 즉시 피해가 간다. 시준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이 고른 사람은, 여차하면 정약용 선에서 침묵시킬 수 있을 정도

로 지위가 낮으면서도 상인들과 접촉하기에 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관

리였다. 다행히 조선에서 장사는 천한 일이기에 그 두 속성은 교집합을 갖고

있다.

“기랑아, 바쁜 일 있냐?”

“아니.”

“같이 가자. 좀 도와다오.”

“나도 한 마리 주면.”

“……넌 내가 양반들만 만나러 가면 닭 가져가는 줄 아냐? 그리고 지금 잡아다

가 튀길 시간 없어.”

뇌물은 의전과 비슷하며, 어떤 면에서는 의전도 정신적 뇌물의 한 종류다. 그

래서 뇌물을 줄 때는 의전처럼 위아래를 잘 살펴야 한다.

평안 감사는 첫 번째였던 데다 지방관 중 최고의 반열이니 그렇다고 치고, 김

조순에게 치킨 줬는데 지금 만나러 가는 하관에게 또 치킨을 주면 김조순이

다시 곤장 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 불운한 하관도 같이 옆에서 맞을

확률이 높다.

김조순이 치킨을 땅에 던지고 안 먹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장이 소

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명절에 사장은 삼겹살 선물하고 직원들

한테 소고기 돌리는 부장 따윈 없다.

하지만 언제나 총 한 자루 믿고 속세에 초연했던 기랑은 그 오묘한 사람살이

의 이치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 안 가. 돌아가서 잘래.”

박득출은 그럼 청년대원 하나 데리고 가라 하였으나, 시준은 과묵하여 사고

안 치면서도 위급할 때 도움이 될 사람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구사대 청년

들은 입이 무겁지도 않고 시준보다 싸움을 잘 하지도 않아서 별로 쓸 데가 없

었다.

하지만 기랑은 시준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이 있다. 권법이

니 각법이니 하지만 결국 최강의 무술은 건(gun)법인 것이다. 시준은 서울 시

장의 개척 과정에서 기랑을 호위자 겸 비서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결국 시준은 좀 나중에 기랑이 아쉬워할 때 봐서 생색 엄청 내고 내어줄 예정

이었던 카드를 급하게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야, 그러지 말고 좀 이리 와 봐라. 동무 간에 어찌 그리 박하다는 말이냐?

저기 가서 얘기하자.”

시준은 기랑의 어깨와 허리를 덥석 잡고 감싸 안듯 하여 질질 끌어갔다. 박득

출 앞에서 보여 줄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으나, 기랑의 반

응은 의외였다.

“……!!”

기랑에 대한 시준의 평가는 정확했다. 과묵한 성격의 기랑은 욕설을 퍼붓거나

거부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준의 아랫배에 강렬한 무릎차기를 날렸다.

“크억! 야, 너, 너 이거 무, 무슨 짓이야?”

너무 거리가 가까워서 천하의 시준도 미처 방어할 수가 없었다. 시준은 허리

를 구부린 채 몸을 떨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배 속에 있는 것을 몽땅 게워

냈을 정도의 일격. 만약 기랑의 키가 한 뼘만 더 작았어도 지유는 의주에서

대성통곡을 해야 했을 것이다.

“……놀랐잖아.”

“왜 놀라? 엉? 왜 놀라느냐고? 내가 뭐 돈이 없어서 표낭자(剽囊者, 소매치

기) 짓거리라도 한다는 게냐?”

낄낄거리는 박득출을 뒤로한 채 기랑은 새침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투덜거리

며 그 뒤를 따라간 시준은 분노를 다스리려 노력했다.

기랑이 방금 보여준 솜씨는 시준이 요구하는 바와 부합한다. 실험대가 자기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결국 시준은 객줏집에서 나와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간 뒤, 등에 메고 있던

짐에서 예의 그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뭔데? 총?”

“피스톨이라는 거다. 영길리국 사람에게 얻어 왔지.”

임청 건을 부탁할 때, 시준이 막후에서 암약하는 국제적 정보요원이라고 착각

한 레디 소령이 앞으로 잘 해보자는 뜻으로 선물한 플린트락식 권총이었다.

기랑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발전이 없는 벗에 대해 한숨을 폭 쉬었다.

“짧은 총은 쓸모없어. 스무 걸음만 떨어져도 다 빗나가거든.”

“하지만 가까이 있는 것을 쏠 셈이라면 문제없지. 게다가 짧아서 숨겨 가지고

다니기도 좋지 않으냐.”

“누구 죽이려고? 돈 많이 줘야 한다.”

“……여기 의주 아니다. 제발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소리 막 하지 마라. 내 옆

에 있다가 누가 우리를 죽이려 하면 쓰라는 뜻이야.”

“나 주는 거야?”

“너 주는 거다.”

기랑은 냉큼 총을 받아 챙겨 넣었다. 시준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레디 소령

도 안 아까워한 것을 보면 진귀한 물건은 아닐 거고, 시준이 강대한 군사를

건설해서 대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홍경래 이 썩을 놈을 대비해서 준비해 놓는 건 나쁘지 않지. 윌리엄

에게 부탁해서 다음에는 그…… 뇌산수은 맞지? 그거라도 좀 수입해 달라고 해

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시준을 기랑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준은 아차 하

고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 이제 가자.”

사역원 생도 김시택은 생도답게 공부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첨언하자면, 세상 더러워서 공부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영길리국 배에서 김시택은 그 나라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 무도한 오

랑캐놈들은 자기 편하다는 이유로 근본도 모르는 장사꾼 아이놈과만 이야기했다.

배운 것 없고 직임의 중함도 모르는 평안도 놈이 말을 어떻게 뒤틀었을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김시택은 그런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협상을 통해 국가

대계를 결정한 왕과 조정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아온 김시택은 자기를 거기 꽂은 박윤수에게 그 생각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김시택보다는 똑똑했던 박윤수는 그 장황한 말을 반도 듣기 전에 상황

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뭔가 적실한 증좌로서 아뢸 것은 한마디도 없고 그저 그 사제(師

弟)가 나랏일 주무르는 것을 멍청히 구경만 하다 왔다는 뜻이렷다?”

김시택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김시택의 부친은 원하던 상은을 받지 못했다. 김시택 역시 근신이 풀리

지 않았다. 건방지다는 평판을 얻은 부자의 난처함은 계속되었고, 거기에 추

가해서 이조 참판 박윤수의 눈에 들 좋은 기회도 날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박

윤수가 김시택에게 관심 없던 이전의 상황보다 더 나쁘다.

하지만 김시택은 발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존심을 포기하고 예조 참의에

게 – 아무리 그래도 차마 그 아이에게는 할 수 없었다 – 고개를 숙여 책을 얻

어 왔다.

그간의 무례를 사과하느라 역관 가문다운 재물을 털어 귀한 예물도 많이 준비

했다. 예물 때문은 아니지만, 그러지 않아도 통무아문 관리 후보를 찾고 있던

정약용은 그 면학의 자세를 칭찬하며 쾌히 자신의 저서를 내주었다.

그 결과로, 김시택은 지금 자신의 집에서 『성문종합영어절요(成文綜合英語切

要)』라는 최신 서적을 혼신의 힘을 다해 읽고 있었다.

절요라 함은 요체만 뽑아내었다는 뜻이다. 그 아이가 책만으로 그리 능통한

영길리 말을 깨우쳤다는 성문종합영어의 드높은 이름은 김시택도 주워들었다.

김시택은 도움 받는 처지임에도 주저하며 이것의 원본이 된 진짜 성문종합영

어는 혹시 없는지 물었다. 허나 정약용 역시 탄식하면서 자신도 찾고 있는 중

이라 말할 뿐이었다.

제자의 구술을 자기가 정리한 것일 뿐이라 원본은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결

국 정약용을 더 추궁할 입장이 아니었던 김시택은 감사만 표하고 하릴없이 물

러 나왔다.

편찬 방식은 김시택도 익히 아는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등과 비슷했다.

정약용이 아는 외국어 학습서가 그런 종류였으니까 당연하다. 그러나 김시택

은 역관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다른 학습서도 두루 읽었고,

더 효율적인 방식도 많이 알았다.

그래서 김시택은 책을 정독하며 그 절요를 다시 베껴서 학습자에게 더 쉬운

방식으로 정리하는, 전형적인 조선식 공부법을 시행 중이었다.

하지만 영어 공부가 책 한 권으로 다 될 거였으면 21세기 서울에 편의점과 맞

먹는 수의 영어학원이 들어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스승이 필요했다. 그리고 김시택이 아는 범위 내에 스승이 될 수 있는

자는 그 평안도 놈 하나뿐이다.

‘하지만…….’

김시택이 아무리 사대부 아닌 중인이라도 조정의 관리가 장사꾼 따위에게 고

개를 숙일 수는 없다. 그 장사꾼 놈이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치고 스스로 몸을

낮추며 김시택을 모시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결국 김시택에게는 정말 공부뿐이었다. 통무아문의 핵심 인물인 정약용과도

오해를 풀고 안면을 텄으니, 어느 정도만 공부해서 아문에 뽑히면 그다음엔

영길리국 사람을 직접 만나 그 아이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배울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김시택은 문간에서 집주인 찾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하인

이 나갈 것이므로 김시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중대한 학문을 수련하고 있어서 한눈팔 새가 없다. 조정 고관 같은 사람만

아니면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인이 누가 왔는지 일러주자 김시택은 그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결심

하게 되었다. 고관이라서는 아니었다.

김조순과 김시택의 신분 차는 김시택과 시준의 신분 차보다 훨씬 심하게 난

다. 그래서 시준은 그때처럼 마당에 엎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랑과 함께 김시택의 앞에 단정히 꿇어앉아 있었다.

“그래서, 일전의 실례는 소인이 사죄드리겠습니다. 부모 없이 자라 예절을 익

히지 못했고, 물려받은 가산 없이 궁핍하여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서 목마

른 사슴이 물을 찾듯 재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준은 만상 서장관 노릇하고 나서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 옆에 있는 기랑

이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을 김시택도 보기는 했으나, 그 아이는 짐꾼 비

슷한 것이려니 생각하고 관심을 끊었다.

“으음. 사람 품성의 귀천은 본래 타고나는 것이 많은바 반드시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다. 옛날에도 배우지 못한 자는 그 불쌍함을 살펴 작은 죄는 용서

하고 타일렀다. 뒤늦게라도 이리 찾아와 인사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싹수는

있도다.”

이 시대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정약용과 주로 얘기했던 시준은 스승과 사뭇

다른 김시택의 화법에 고개를 갸웃했다. 중인 정도 학문을 배운 자가 안간힘

을 다해 아는 척하려는 흔적이 말 곳곳에서 보였다.

한학으로 따지면 김시택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시준은 그 흔적을 점잖게 모른

척해 주었다.

“과연 그렇습니다. 저도 스승의 명으로 그리한 것이지 건방지게 나랏일에 나

설 생각은 없었습니다. 물론 나리께서도 영길리 말을 잘 아시지만 저희 선생

님의 체면을 보아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그 깊은 헤아림은 저도 잘

압니다.”

“어, 어흠! 네가 제법 눈치가 있구나.”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맞다고 넘어가면 지금 김시택이 시준에게 요구하

고 싶은 사항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 김시택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던 시준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찾아뵌 이유는, 역시 스승의 명 때문입니다. 나리께서는

조정의 중신이시니 상관은 없지만 이번에 통무아문을 꾸리려면 이속이나 도필

리들 중에서도 영길리 말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들이 장사꾼에게 배우는

것은 필시 치욕으로 알 터이므로 책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혹시 성문종합영어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정약용이 절요를 만들었다는 사실, 김시택 외에도 몇 명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사실, 그 책 하나 갖고는 아무래도 기초 회화밖에 안 되리라는 사실은 정약용

의 제자이며 성문종합영어의 유일한 전인인 시준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김시택은 처음부터 시준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

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꿈에도 모르는 김시택은 얼른 대답했다.

“그, 그렇지. 네가 거기에 재주를 발휘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참의께

서 나눠 주셔서 지금 나도 공부하고 있던 참이었지.”

김시택은 제발 이쯤에서 시준이 자기가 영어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채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시준은 태평했다.

“과연 학문을 이루셨음에도 그치지 않고 절차탁마하는 용맹정진의 기세는 일

개 장사꾼인 저라도 본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저는 애초에 배운 것 없는 하민

이라, 통사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의 깊음에 대해서는 감히 알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스승님께서는 특히 저를 보내어 생도 어른의 지혜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물론 정약용은 시준에게 그런 명령 내린 적이 없다. 사실 통무아문의 일에 있

어 언어는 다급한 일이 아니다. 말을 배우는 일은 다급하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선원들은 대개 중국어를 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준은 김시택이 절대로 정약용에게 진위 확인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

했다. 설사 만에 하나 그런다 하더라도 정약용은 제자 놈이 영어 교습서 하나

만들어서 팔아먹으려고 스승 이름 팔았구나 생각하고 묵인할 것이다.

녹음 수단도 없는 이 시대 아랫사람이 아무 데서나 권세 있는 윗사람 이름 대

는 일이야 흔해 빠졌다. 만득이도 일일이 정약용 허락 받고 시전에서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이 일은 정약용 입장에서도 권할 만한 일이어서 아무 문제 없을 터이

다. 정약용은 오히려 제자가 만드는 책이 남색 음란소설이 아닌 것을 알고 자

신의 훈육이 효과 보았음에 기뻐할지도 모른다.

실리적인 이유도 충분하다. 시준이 말한 대로 번역서 자체를 만드는 지식과

언어 교육 체계에 대한 요령은 김시택이 낫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시택은 자존심의 손상 없이 슬쩍슬쩍 영어를 배울 수

있다. 과연 김시택은 어둠 속에서 광명을 보았다는 듯이 다가들었다.

“참의 영감의 명이라면 내가 하관으로서 어찌 수고를 아끼겠나. 자네는 위로

스승 섬기는 도를 다하고, 나는 조정 보필하는 도를 다하는 것이니 천하에 이

보다 떳떳한 일도 없겠지.”

말투마저 갑자기 바뀌었다. 아무래도 폭력 사태의 조짐은 전혀 없어서 멍하니

정신 놓고 있던 기랑은 김시택이 태도를 돌변시켜 내오게 한 약과를 씹으며

안정을 찾았다. 기름과 꿀이 아낌없이 들어간 이 과자는 김시택이 시준을 얼

마나 존중하는지 보여준다.

“어른 같으신 분이 조정에 많아 나랏님을 지혜롭게 보필하니 저 같은 사람도

안심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업을 할 수 있는 것이군요.”

시준은 그렇게 운을 띄워 놓고 진짜 용건을 말했다. 마치 지나가는 잡담이라

는 투였다.

“생업 하니 생각나는데, 요즈음 제가 고향을 떠나 있어 여비가 다 떨어져 걱

정입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만고의 청백리시라 재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아

서 통 아뢰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못 배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밥을

안 먹고야 학문이나 공명도 뒷일이 아니겠습니까.”

굶주리다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뜨면서도 끝까지 돈은 안 만지려 하는 사대부들

을 은근히 비웃으며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던 역관 계급의 김시택도 동감했다.

물론 일전의 예물을 정약용이 딱히 강하게 사양하지 않았다는 눈치 팔아먹은

소린 하지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 내 안 그래도 일전에 예물을 좀 들고 찾아뵈었네. 자네 말대

로 그분은 깨끗한 선비시라 내게는 책 한 권을 내주셨을 뿐이지.”

“과연 헤아림이 깊으십니다. 그래서 저도 스승을 좀 편안하게 모시고 싶은데,

이곳이 의주에서 너무 멀어 아는 사람이 도통 없습니다. 제가 북쪽에서 가져

온 귀물들을 조금 갖고 있는바, 나리께서 혹시 통교하시는 부자 댁이 있으면

제가 인사 한번 가도 되겠습니까?”

정약용이라면 무슨 소린지 몰랐을 테지만 김시택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래

서 김시택은 정말 도성 내 부잣집 위치를 알려주는 대신 하인들을 불러 두런

두런 뭔가 일러주었다.

이후로는 기랑을 지루하게 하는 잡담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시준과 김시택

은 영길리국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는데 기랑에게는 관심도 지식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하인이 와서 소식을 알리자, 김시택이 의관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시준과 기랑은 그 뒤를 따랐다. 기랑에게는 당연히 그 ‘부잣집’

에 가려는 것으로 보였다.

기랑은 오늘 아무래도 자기가 할 일은 시준을 따라다니며 군것질거리나 얻어

먹는 일일 뿐이라고 짐작했다. 소매 속에 있는 쇳덩이며 몸 곳곳에 찬 비수

따위는 아무래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기랑의 예상은 틀렸다.

작가의 말

1. 퍼커션 캡은 1807년, 그러니까 작중 시점 1년 전에 개발되었습니다만 특허권 문제 등으로 2, 30년이나 지나서야 군에 채용되게 되죠.

2. 다시 안 나올 것 같았던 김시택이 나왔군요. 하하. 본문에 몇 차례 언급되었지만 김시택은 실존인물이며, 승정원일기에서 그 모습을 비춥니다. 사역원 생도였고 (마찬가지로 역관이었던) 아버지에게 상 주는 문제로 떼쓰다가 건방죄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14. Gangs of seou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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