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41화 (41/284)

41화

13. 풀리는 빗장(3)

성균관(成均館)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는 지금 기준으로도 300년 가까운 수

령을 자랑하는 성균관 은행나무가 있다.

아직 더위가 고개를 완전히 숙이지 않았으니 밖에 나와 있는 것도 부자연스럽

지는 않다. 그러나 이 계절에 은행나무 아래 있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전근대 사람들이 위생에 별 관심이 없다 한들 그들이 후각도 없는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고대의 식물은 고조선 사람과 현대인을 동세대로 취급할 만한 역사를 가지

고 있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 사람이건 조선 사람이건 현대인이건 은행나무

열매에서 견디기 힘든 악취를 느끼는 것은 똑같다.

과거 성균관의 유생들도 마찬가지 사유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그들은 은

행나무 앞에서 공부 좀 하게 해달라며 큰 제사를 지냈고, 그래서 은행나무는

자신의 성별을 바꿔 수나무가 되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냄새에 코를 싸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 전설적인 은행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펼쳐 놓고 단정히 앉은 정약용이 물었다.

“그들이 소위 말하는 전권대사를 위해 재외공관(在外公館)을 청하지 않은 이

유는 무엇인가?”

“동인도양행은 일개 상행일 뿐, 나라가 아닙니다. 비록 비할 데 없이 큰 땅과

호구를 다스린다 해도 그렇습니다. 모든 권한을 일임받았다고 큰소리를 쳤지

만 결국 장사에 대한 권한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감히 재자관(齎咨

官) 혹은 정사(正使) 및 부사 따위를 보내거나 청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상한들인데, 몇 푼 돈에 약조를 배반하고 군함과 병사를 내어

변경을 어지럽히지는 않겠는가?”

“장자도는 큰 싸움배를 대기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눌러앉아 오래 살

땅 역시 못 됩니다. 만약 그들이 작변한다면 다른 곳을 칠 터인데, 그러면 장

자도에 있는 저들의 소위 감독관이니 사환이니 하는 자들의 목숨이 위험해집

니다. 만약 영길리국이 양행을 제치고 조선에 오려 한다 해도 지금은 서양국

을 온통 종횡하는 패왕 나씨(나폴레옹)가 있어 그러기 어렵습니다.”

대답한 시준은 은행나무를 힐끔 바라보았다. 시준은 은행나무의 처지가 자신

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지.’

이 자리에서 시준만이 아는 초고대의 사건 이후 은행 열매는 고객을 잃었다.

나중에 그 자리를 차지한 지구의 생물들은 코끼리부터 딱정벌레까지 하나같이

은행을 싫어했다.

그래서 은행은 1개 문(Division)에 단 1종만 남은 절멸의 위기까지 몰렸다.

물론 특별한 일은 결코 아니다. 이 행성에서 수도 없이 명멸한 흥망성쇠의 운

명을 은행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 덕에 은행의 대는 끊기지 않았다.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문명을 상징하

는 생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공자가 이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

은 시간을 꿰뚫은 명철이었을까.

어쨌든 아마도 공자 역시 은행 열매가 잔뜩 떨어진 곳에서 수업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지냈든, 아니면 제사 지내고 나서 나무를 바꿔 심었든

성균관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그 냄새나는 물건들은 없다.

그래서 시준도 평온한 기분으로 이 나무와 자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평온한 기분이라는 말은 다분히 의식적이다. 시준이 은행을 쳐다본 이유는 이

자리에 몰려든 여러 명가 자제들이 보내는 눈빛을 잠시 무시하기 위해서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시준과 정약용만이 아니었다. 이 문답 자체는 두

사람이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 자주 해 오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왕이 특별히

뽑고 자원을 받아 보낸 여러 사대부들을 앞에 두고 해야 했다.

질시와 분노, 호기심과 자격지심이 뒤섞인 시선은 이 문답을 간단히 고문으로

만들었다. 시준은 그런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은행나무에서 눈을 떼어 하늘을

보았다. 느려터진 태양도 이 정도 시간이 지나니 꽤 많은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문답은 지금까지 두 시진 가깝게 이어졌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 중

하나이고, 21세기 사람에게도 크게 낯설지는 않다.

이번 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궁금해하던 조정 조신과 젊은 동량들의 의문은 시

준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대가로 많이 풀렸다. 정약용의 적절한 대본은 낯선

유럽식 외교관례, 국제 무역의 개념 등을 피상적으로나마 인식시켰다.

그래서 시준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귀사족들에게 이번 조약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왕의 혜안을 설파하여 국왕과

자신의 의도를 둘 다 만족시킨 정약용은 바로 진짜 목적에 들어갔다.

바로 선비들의 눈을 트이게 해 주는 일이었다. 백탑파가 몰락하고 천주교가

사교로 몰리면서 조선은 서양에 대해 불안한 의도적 무관심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이전에 이것은

이미 눈앞에 닥친 현안이다. 눈 밝은 사람들은 이제 대청이 조선을 버린 것이

나 다름없음을 잘 알았고, 그건 많은 선비들이 은근히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아직 이해 못 한 사람들을 위해 작금의 난세에 대한 배경 지

식을 풀었다.

“저 영길리국은 12만 리 떨어진 섬나라로서, 일 년 내내 부슬비가 오며 겨울

은 춥지 않고 여름이 덥지 않다. 음양이 너저분한 구정물처럼 뒤섞여 있어서

사람의 심성 또한 잔악하고 음탕하여 싸움을 즐기며 예의가 없다. 강토에 잡

풀이나 무성할 뿐 오곡을 기를 수 없으므로 소를 길러 잡아먹고, 목화가 자라

지 않아 양을 길러 그 털을 깎아 옷을 걸친다.”

정약용이 의주에 있을 때는 영국과의 무역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변함이 없으나, 영국에 대한 평가는 많이 박해진 상태였다.

말을 잠깐 쉰 정약용은 모여든 선비들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아낸 사람은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고관이고,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도 거의 그에 근접하기 때문에 원래 여기서

구경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본인의 요망으로 굳이 관복까지 벗고 청중을 자임했다.

그 뜻을 정약용이 모를 리 없다. 정약용은 마치 이 자리에 이조 판서가 없는

것처럼 말했다.

“이로써 본다면 영길리국 사람들은 왜인과 같은 무리다. 하지만 어찌하여 자

그마한 섬나라가 그렇게 강성하게 될 수 있었는가?”

시준은 참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지구의 극히 일부 지

역에 불과한 서유럽이 전 세계를 호령하였는가에 대해서는 21세기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학자라면 할 말이 아주 많겠으나, 역사학자가 아닌 시준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옳은 답변이 아니다. 정약용이 원하는, 그리고 어쩌면 왕도

원할지 모르는 답변이다.

“오곡은 없더라도 이맥(귀리)과 밀은 있습니다. 끼니는 물론 부모의 상중에도

육즙을 거리끼지 않아 뼈대가 튼튼하고 힘이 셉니다. 목화가 자라지 않으나

다른 따뜻한 남쪽 땅을 점거하고 노비를 부려 목화를 심게 합니다. 또 이것을

위해서는 섬에서 다른 곳으로 자주 나가 보아야 했으므로 옛날부터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시준은 청중을 배려하여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관헌들이 모두 그 멀리까지 나갈 수 없어, 장사꾼들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그

큰 상행에 나라가 돈을 선대하여 주었습니다. 동인도양행이 본국보다 훨씬 큰

강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변란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 도방이며 행

수, 계원을 겸하는 무리가 그 나라의 유서 깊은 사족이기 때문입니다.”

“국인(國人)들이 장사에 뛰어들었다는 말인가?”

정약용이 간단히 정리해 주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실로 야만스

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배로 멀리 나가면 각종 기묘한 풍습을 가진 나라를

떠돌게 되는데, 이 세상에는 천만 가지의 사나운 족속과 짐승, 험한 산과 깊

은 골, 빠른 바다와 뜨거운 황무지가 있어 부득불 선원들은 무비(武備) 갖추

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영길리국이 강대한 대박과 화포를 가진 연유인가? 하지만 장사를 하

려면 팔 물건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해적의 무리이니 노략질도 거리끼지 않

았겠으나, 서양국 장사꾼의 도로 말하자면 노략질은 이문이 안 남는 일이다.

언제 외국의 병선과 마주칠지 알 수 없고 돈 많은 자들은 병사도 많기 쉽기

때문이다. 영길리국은 과연 그 부족한 물산에서 무엇으로 장사를 하는가?”

조선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은

정약용이 아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정약용 대신 예조 참의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대사간이 되

었어야 하지만, 정약용의 특채 때문에 여전히 그냥 승지를 하고 있는 김회연

이었다.

김회연이 군비와 재정에 관한 한 조선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라는 것을 몰랐

던 시준도 그에게 유의했다. 그가 왕을 보좌하는 승지여서만은 아니다. 지금

까지 두 시진 동안 정약용이 아니라 시준에게 질문한 첫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준도 김회연이 무슨 배역을 맡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이것은 정치다.

왕은 지금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노고를 이 사제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김회연은 왕의 사자다. 적절하고 예측가능한 질문을 제시하여 여기의 사람들

로 하여금 자유로운 문답으로 설복되었다고 착각하도록 하는 게 그의 역할이다.

그래서 시준은 뒷일 걱정 없이 대담하게도 조정의 고관에게 직접 말했다.

“땅에서 나는 것만 갖다 파는 것은 가난의 첩경입니다. 천하에 여기만 있는

특산물이 아니고서야 수고에 비해 비싸게 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

길리국 사람들은 각종 기묘한 물화를 만들어서 파는데, 그 재주가 없는 나라

에서는 도무지 따라할 수 없으므로 값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입니다.”

본격적으로 돈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많은 선비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심지

어 일어나서 나가는 자도 보였다. 여기가 성균관이기 때문에 침을 뱉거나 난

동을 부리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시준은 그런 일들에 크게 상처받지 않고 계속 말했다.

“길쌈으로 말씀드리자면, 그 나라에 목화는 없으나 실 잣고 옷 짜는 기기는

있는데 이는 수천 명의 몫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싸게 솜을 사들여다 밥

안 먹어도 되는 기기를 부려 옷감을 짓는데, 기기는 실수하거나 게으르지 않

으므로 실이 촘촘하면서도 가볍고 빛이 납니다. 이것을 비싸게 파는 것이 그

들의 한 방편입니다.”

정약용은 그들 사제의 옆에 보자기로 잘 덮여 있는 천무더기를 힐끗 보았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고 빙그레 웃은 정약용은 이쯤에서 자기만 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면포가 없다고 하여 베옷을 입지는 않았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그처럼 검

(儉)을 모르는 짓은 낭비가 아니겠느냐?”

시준도 적절하게 대화의 방향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 스승에게 조금 편하게

말했다.

“나라에 비단옷을 입는 자가 없으면 비단옷을 짜는 자들도 있을 수 없습니다

[不服錦繡 而國無織錦之人]. 그릇이 비뚤어지는 것에 개의치 않으면 나라에

공장과 도야(陶冶)가 없습니다[不嫌窳器 不事機巧 而國無工匠陶冶之事, 『북

학의(北學議)』]. 조금만 수고하면 쌀을 얻을 수 있는데 검소를 말하며 느릅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은 검약이 아니라 태만입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물건은 쓰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팔

고 싶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은 물건을 만들게 유도한다.

조선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당장 시준이 인용한 것은 몇 년 전 작고

한 박제가의 북학의다. 초정이 누군지도 모르던 그가 이제 북학의를 술술 말

하게 되었으니 정약용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다 할 수 있었다.

그때 무리 중 사람 좋게 휘어진 눈을 가진 청년이 용감하게 나섰다.

“이 사람은 생원(生員) 김정희(金正喜)라 합니다. 여러 이름 높은 고관과 늙

으신 학자들 앞에서 송구하오나,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이 어린 사람이 먼저

참의께 여쭙겠습니다.”

그가 영의정이자 영조의 사돈이었던 김흥경(金興慶)의 증손이라는 것을 모르

는 자는 시준 하나뿐이었다. 추사(秋史)의 이름밖에 들어본 게 없던 시준이

김정희가 서예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알았나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김정

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초정 어른과는 우리 집도 교유가 있지요. 서사초빙론(西士招聘論)에 대해서

도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이번 조정의 용단은 저 강대한 서양 나라

의 기묘한 재주를 배우기 위해서입니까?”

시준도 정약용 밑에서 실학자들의 사상을 배우면서 알았지만, 서양 사람들을

들여 그 기술을 배우자는 말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일명 서사초빙론이라

하는 문화 수용론은 박제가를 전후해 많은 학자들이 주장했다.

이미 명, 청이 서양 신부들을 북경에 들여 대포나 달력 만드는 데 써먹은 지

도 오래되었으니 못 떠올리기가 더 힘들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선비들이

반대했기에 서사초빙은 실현되지 못했다.

현대인과 달리, 이 시대 사람들은 기술이 다른 요건을 압도할 수 있다는 생각

을 하기 어려웠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산업혁명 이전의 사람들은 기술 발전

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명품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전근대에도 등자와 괭이,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

등 위대한 발전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출현하고부터 역사의 키잡이를 자

임하기까지는 수 세대에서 수십 세대가 걸렸다.

게다가 신기술의 도입이라는 번드르르한 말 뒤에 숨어 있을 대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서사초빙이라는 말에 격분한 한 선비가 외쳤다.

“배우다니, 우리 동방에 예악과 문물이 모두 있는데 왜 오랑캐의 하찮은 잡기

를 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눈을 속이고 귀를 즐겁게 하는 요사한 물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병(兵)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으로 군자가 가질 것이 못 된다!

그들의 소위 정묘한 기기라는 것은 모두 불충불인과 무군무부함에서 나온 물

건인데, 이런 일을 배우면서 어찌 근묵자흑(近墨者黑)을 면할 수 있겠는가?”

물정 모르는 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서양인들이 천구의를 만들고 큰 배를 만들며 잘 나가는 총포를 만든다는 거야

누구나 안다. 하지만 조선이 그것을 가져 봤자 무얼 어쩌겠다는 말인가.

당대 조선 수준에서는 총 따위 좋은 것으로 개비해 봤자 열흘도 안 되어 병사

들이 다 몰래 팔아넘길 게 뻔하다. 많은 전근대 사회에서 군대가 유지되는 이

유인 ‘그래도 가면 밥은 준다’조차 조선에선 해당이 안 되었다.

이 상황에서 외침을 감행할 것인가? 가능성은 둘째치더라도 끌려나와 죽을 수

많은 생령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사백 년 도덕국가, 예의지방 조선국

이 돈이 탐나 외국을 침공했노라고 과연 어떤 왕이 교시할 수 있을까? 이는

낯짝 두꺼우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어리석은 왕이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한 보름 뒤쯤 좋은 가르침 주

셔서 감읍하노라고 말하며 국고 탈취하러 온 반란군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이념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국가를 유지하기 위

해서다.

게다가 조선 사람들에게는 기술과 전쟁의 상관관계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명나라에 화포가 없어서 여진족에게 멸망했는가? 화약과 무기기술에 관해서라

면 여진족과 명나라는 이웃 나라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격차가 있었지만 결국

망국을 피할 수 없었다.

현대의 상식인 지동설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코페르

니쿠스 시대에 와서야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수학적 근거가 천동

설에 비해 너무 희박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준이 보기에는 쇄국론이 답답해 보여도, 지금으로서는 개국론보

다 훨씬 압도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가 사회 구조 변화로 일

어날 기득권의 훼손까지 합쳐지면 쇄국론자들의 절박함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곧 성균관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신들이야 왕의 뜻도 대충 알고, 입장이

있으니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관생(官生)이나 인맥 따라온 재야 선비

들은 책임질 것 없는 사람들답게 잘 떠들었다.

“간교한 서양인들은 반드시 사교와 함께 들어올 터. 역적 사영이 외국군을 끌

어들여 잠통모반하려 한 일이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지금

통교를 논하는가?”

“사교를 섬기는 것은 불랑국의 무리. 그들은 지금 서양국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어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한 말을 못 들었소?”

“누굴 바보로 아시오! 불랑국과 영길리국은 이웃 나라로서 옛날부터 왕실과

공후의 통혼이 있어 그 예악과 풍습의 유사함이 주(周)와 노(魯)의 그것과 다

름없소. 불랑국의 장삿길을 빼앗고 저들이 먼저 시장바닥 좌판을 차지하기 위

해 교언을 지껄여댄 게지! 어디 물어보시오. 그들이 과연 거리낌없이 사교의

책과 염주를 불태울 수 있는지!”

“어허, 밝으신 성총이 모두 헤아린 일인데 어찌하여 이리 불경한가? 정종대왕

(정조)께서 정학이 일어서면 사학이 스러진다고 하신 말을 듣지 못했는가! 국

가의 대사는 한낱 더벅머리 선비가 단견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장사치를 성균관에 들인 이 치욕의 어디가 그리 자랑스러

운 국가의 대사인가? 이런 일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지는 못할망정…… 에이,

쯧쯧!”

“거, 장사치 가득한 과거 시장(試場)에서 좌판처럼 우르르 거벽, 사수 앉혀

놓고 입시하신 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커, 커억! 이, 이놈이 지금

성균관에서 뭐 하는 짓이냐! 네 눈깔에는 저 문묘가 보이지 않느냐? 놔라!”

“오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바름을 지키고 사악함을 배척하는[衛正斥

邪] 충의뿐이니 무엇이 두려우리. 오늘 너 죽고 나 죽……. 으억! 어, 어딜 움

켜잡아! 당장 놓지 못, 악! 제, 제발 놔주십시오! 형님!”

몇몇 덕망 높은 선비들이 당장 그 흉측한 짓들 그만두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나졸들이야 여기 못 들어오니 둘째치더라도, 참

의도 승지도 눈에 안 보인다는 듯한 조선 선비들의 강맹함에 정약용과 김회연

이 어쩔 줄 모르고 남공철을 쳐다보았다.

이조 판서 남공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장사치 아이의 말 몇 마디에 놀아날 정

도로 이 나라 유생들의 수준이 낮다는 사실에 그는 매우 실망했다.

그래서 거창하게 한숨을 내쉰 남공철은, 그 숨결에 밀려 무언가 동그랗고 반

짝이는 것이 떠다니는 사실을 처음 눈치챘다.

“이게 뭐지?”

물방울 같기도 했지만 물방울이 하늘에 떠다닐 이치가 없다. 남공철은 그것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툭 하고 가볍게 터진 그 방울은 남공철의 손에 약간의

미끈거림을 선사했다.

이조 판서는 놀라워하며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이미 주

변 여기저기에서 그 오색의 방울이 떠다니고 있었다.

남공철의 눈에, 아까 정약용과 마주 앉아 있던 제자가 담뱃대 비슷한 것을 물

고 이 난장판을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담뱃대에서는 연기 대신 희

한한 방울이 올라오고 있었다.

“네 짓이냐?”

시준은 대답하지 않고 입에 문 것을 다시 불었다. 무게 없는 진주 같은 오색

방울이 한 무더기 날아들자 싸우던 사람들도 하던 짓들을 멈추었다.

구경 좋아하기로는 천하에 조선 사람만 한 자들이 없다. 구한말 서양인의 면

도를 수십 명씩 몰려서 구경하던 그때의 조선인들처럼, 여기에 몰린 내로라하

는 선비들이 모두 멍청히 입을 벌린 채 조선 최초의 비눗방울 공연을 관람했다.

시준은 물부리를 입에서 떼고 씩 웃었다. 이조 판서의 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늦게라도 대답해야 했다.

“점잖으신 어른들이 문묘 앞에서 소란을 피우시기에 지루하여 그러신가 하고

잡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 그 물건을 무엇이라 하느냐? 서양인의 물건이냐? 내게도 좀 다오.”

시준은 기꺼이 그 빨대를 남공철에게 넘겨주었다. 이조 판서는 시준이 시키는

대로 병에 그 주둥이를 담갔다가 빼고 꽁무니의 물부리에 입을 댄 다음 담배

연기를 뱉듯이 불어내었다. 그러고는 마치 전설 같은 그 몽환적 광경에 감탄

하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구한말, 이 땅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항상 시퉁하고 적대적인 조선 백성들이나

시빗거리를 계속 창조해 내는 관리들을 달래기 위해 이런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져갔다. 아메리카에서도 했던 일이니 특별히 놀랄 만한 발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잘 먹혔다. 아전인수식의 조선류 검문을 모조리 피해갔던 절기

가 한 세기 정도 일찍 시준의 손에서 발휘되었다. 시준이 당시 선교사들의 일

화를 아는 건 아니었으나, 의주에서 이미 수차례 해 본 일이기에 서울에서도

먹힐 거라 확신한 것이다.

이 자리의 흐름을 폭력적 소란에서 평화적 소란으로 바꿔 놓은 시준은 정약용

에게 공을 넘겼다. 정약용은 헛기침을 좀 하고 나서 이 자리를 기분 좋게 마

무리할 선언을 시작했다.

“이번 사업설명회(事業說明會)는 주상 전하의 지극하신 은혜로 마련된 것이

라. 앞으로 나라의 동량이 될 여러 명가 자제들을 빈손으로 보낸다면 어찌 성

은이 두루 미친다고 할 수 있으리? 일전에 일러두었던 서양의 목면이 여기 있

소. 모두 상감께서 내리시는 것이므로 공손히 사은숙배하고 가져가시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온 이유였다. 이공은 자신이 쪼잔하기 짝이 없는 가경

제와는 다르게 통이 큰 군주라고 생각했고, 영국인들이 협상 과정에서 조선인

살상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내놓은 서양 면포를 기꺼이 희사했다.

현대에 옥양목(玉洋木, calico)이라고 알려진 그 물건은 세계 최고(最古)이며

동시에 최고(最高)인 인도 면화다. 중국만 빼면 이 면포는 어떤 무역에서도

실패한 적이 없다. 향료 무역의 유행이 다 저문 지도 오래인 현재, 이것이야

말로 아편과 자웅을 겨룰 영국의 자랑이다.

그것까지는 몰랐던 선비들이 보기에도 상등품이었다. 오후 햇살을 받은 영길

리국 면포는 불타오르듯이 희게 빛났다. 문묘 앞에서 민망한 꼴을 보였던 선

비들은 오래된 백의민족의 기상을 다시 되새겼다.

“어흠. 길쌈이야 천하의 떳떳한 일이니 사이하다 내칠 수는 없겠지.”

“아무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기기 대신 상목(上木)을 바친 것을 보면 서양인

들 역시 조금은 도리를 아는가 보오.”

국왕 이공은 군주에게 사치는 필요 없다는 자못 모범적인 교시와 함께 옥양목

을 전부 내주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은 군주가 아니므로 별로 양심의 가책

없이 그것을 감사히 받았다.

분노에 찬 반대는 빠르게 일어났던 만큼 빠르게 끝났다. 왕의 하사품은 이 행

사가 왕의 의지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명확히 인식시켰다.

이 시대는 소비재가 그리 쉽게 버려지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이 옥양목이나

그것으로 지은 옷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항상 이번의 개국이 왕의 의지라

는 것을 되새길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제 얼마 후 의주에서 가득 배달 올 청바지를 비롯한 만상의 여

러 상품을 도성에서 팔아먹는 것에도 크게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인들이야 왕의 이름만 듣고도 움츠릴 것이고, 그렇게 소시민은 아니면서

도 영향력이 있을 만큼 똑똑한 자들은 이제 왕의 청나라에 대한 독립성이 더

강해졌다는 것도 알 것이니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정신 차렸을 때

는 이미 늦은 뒤. 빗장은 한 번 풀기가 어렵지, 풀리면 그다음엔 걷잡을 수

없어.’

시준은 비눗방울을 다투어 서로 빼앗아가며 불어대는 중늙은이들을 보고 회심

의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 말

1. 이 시대는 1세대 북학파 실학자들이 퇴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남인의 세가 망한 것이 큰 이유죠. 그러나 작중 나왔던 이유회, 남공철, 김정희 등에 의해 명맥은 이어졌고 이후 실학자들의 학문은 나중 19세기 후반기에 박규수 등에 의해 개화론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2.  추사 김정희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명문가의 자손이며(중간에 한번 가문이 망하기는 하지만요) 고급 관료였고 동시에 학문적 성취가 상당한 실학자이기도 했습니다.

3. 목화라는 게 애초에 인도 원산이고 이 지방에서는 면화를 기원전 3천 년부터 재배했다고 하죠. 캘리코는 오랜 역사와 경험, 기계의 도움, 원료의 품질에 힘입어 당시 경쟁할 면포가 별로 없을 정도로 가볍고 촘촘한 데다 또 표백이 잘 되어 희었습니다.

의외로 영국도 산업혁명 이전부터 인도산 면포의 수입 물결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몇 차례 금법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이런 종류의 법은 효과가 없었죠. 영국의 선택은 그냥 인도를 정복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14. Gangs of seou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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