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40화 (40/284)

40화

13. 풀리는 빗장(2)

이 일로 정약용 외에도 조선 정계에 약간의 개편이 있게 되었다. 노론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김조순이 책임 분산을 위

해 끌어들인 실학자들이 안 보이게 힘을 얻었다.

대표적 인사로는 이서구가 있다. 원 역사에서는 정약용이 해배되는 해, 그러

니까 1818년까지 관직에 다시 못 나왔던 이서구지만 이번엔 왕명에 의해 역시

10년이나 일찍 소환되어 다시 평안 감사를 맡게 되었다.

대간에서 침묵했던 것은 아니다. ‘천만 가지 죄악’으로 이서구의 잘못을 엄정

히 논한 사헌부의 의견에 따르면 이서구는 저 대역적 권유의 앞잡이다.

하지만 그들의 서릿발 같은 의기는 종이 위에서나 펼쳐졌을 뿐 실제로는 그다

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지금 이서구 대신 평안 감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아무

도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영길리국이나 청국과 잘못 엮여 벼슬만이 아니라 모가지도 날아갈

위험이 너무 높았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조선 개국 이후

평안 감사 자리가 이토록 인기 없었던 적도 드물었다.

이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천하에 다시없을 패륜아이며 대죄

인으로 포장하여 평안 감사 자리를 거부하려 하였지만, 평안 감사가 잠시 비

워 놔도 되는 자리는 아니거니와 지금의 사세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조선에서 관직 임용은 제안이나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별수 없이

부임한 평안 감사 이서구는 흠차대신으로 온 부찰복장안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다시 말해, 이 서문은 결코 우리나라가 번방으로서 종주를 배반하겠다는 뜻

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숭덕(崇德) 정축년(1637년) 우리 장목대왕(莊穆大

王, 인조)이 아뢴 바를 명징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1637년,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은 청 태종 홍 타이지에게 공식적으로 표를 올

려 칭신하고 청의 번국이 되었다.

조선 최초로 여진족의 시호를 받는 영광을 누린 인조는 다행히 신하들이 잘

숨겨 줘서 시호가 실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허나 이서구쯤 되는 사람이 청국

흠차대신을 만나면서 그 정도도 예습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서구가 잘못하여 묘호를 말하면 호되게 꾸짖어 기선을 잡을 생각이었던 복

장안은, 어떻게 또 트집 잡을 것 없을까 하는 태도로 장정의 서문을 훑어보았

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전문(前文)이나 조회문이라고 해야 할 양식과 내용이었다.

<조선은 중국의 번국이며 조선 국왕은 중국 황제의 봉신(封臣)이다. 본래 사

대하는 사체(事體)로는 외국과 사사로이 교유할 수 없는데, 숭덕 정축년 이래

로 황상께서 동쪽 번방(藩邦)의 부탁을 조선 국왕에게 맡기셨으니 이를 정성

스럽게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조선국과 영길리국 양국은 이 대체를 삼가 받들고 이 아래에서 양국의

화호를 돈독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격분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반대의 이유에서

복장안도 이 조회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근대 아시아 사람이 보기에 이것은 자주독립 선언과 불과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만 남겨 둔 내용이다.

번방의 일을 부탁한다는 말이야 황제의 자애로운 조칙에서 흔히 사용되는 어

구이나, 조선 자신이 이 일은 언급했다는 것은 이제 동쪽의 일에 간섭 말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장안은 그 점에서의 불편함을 드러냈다.

“영길리국 상인들이 천자의 증빙을 가지고 왔다고 떠들어 댄 말에 넘어간 것

이 아닌가? 천자께서 영길리국으로 하여금 조선과 교우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

다는 그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 일의 근본은 조선에 들이닥친 병화를 풀려

는 데에 있었지 영길리국을 우대하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그냥 군대 물러나게 하려고 임시변통한 소리에 냉큼 좋다고 개항하다니 너희

의 마음이 딴 데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이토록 우아하고 책임 회피하기

좋게 해 버리다니 과연 흠차대신이었다.

이 시점에서 마카오의 일을 알고 있는 이서구는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대는 황제를 대행하는 흠차대신이며 일전에는 청의 사실상 최고

위직인 군기대신을 역임한 자. 격으로 따지면 조선 국왕보다 낮다고 할 수 없다.

이서구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일전에 조선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영길리국의 흉포한 대박거선이 매우 놀랍고 두려워 작고 약한 번방에서는 다

른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의 위엄 있는 칙이 아니었다면 저들이 어찌 땅을 휩

쓸고 인민을 노략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저희로서는 겁에 질려 있던 차에 마

치 구름을 헤치는 빛 같은 칙을 우러르니 어찌 급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

니까?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시기를 거듭 간청할 뿐입니다.”

이서구의 언변도 화려한 것이었지만 복장안이 그만 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의

위인이었으면 가경제가 그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천자의 칙은 누구를 통해서 전하는 게 아니다. 조선 국왕 전하로서는

영길리국의 문서가 있더라도 마땅히 위에 명을 청하여 손을 모으고 공손히 확

정된 칙을 기다리는 것이 예에 맞는 일일 것이다. 하물며 전복(甸服, 기내(畿

內). 여기에서는 북경과 그 부근)과 극히 가까운 이 평안도임에랴?”

이서구는 긴장했다. 지역 안보를 이야기하는 복장안의 속셈이야 뻔하다. 과연

복장안은 이서구의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안심하라. 천조는 공손한 번왕을 외면하지 않으리니, 곧 천병 십만이

들어와 이 평안도에 둔치고 장자도를 경계하여 감히 영길리국이 딴마음을 먹

지 않게 할 것이다.”

일단 블러핑부터 크게 내밀어 보는 게 과연 대륙의 흠차대신다웠다.

청이 비공식적으로라도 요구했던 것은 장자도 하나뿐이며, 장자도에 십만 명

이 들어갔다가는 그들은 앉지도 눕지도 못할 것이다. 복장안은 처음에 평안도

를 이야기했다가 에누리를 좀 해서 장자도를 은근슬쩍 날로 먹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도 허세라면 어디서 지지 않는다. 게다가 청의 수법은 너무 익

숙해서 속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서구는 크게 놀란다거나, 혹은 웬 평

안도냐고 반문하여 일을 망치지는 않았다.

“지금 보신 그 장정 아래의 절목에 보면 장자도는 이른바 비무장지대(非武裝

地帶, DeMilitarized Zone)입니다. 아랫사람들이 천자의 뜻을 삼가 받들어 창

검을 치우고 총포를 물려 끝내 변경을 조용히 하였는데, 이제 다시 군병이 들

어온다면 사람들이 어찌 놀라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혹 의혹하여 이상한 말

을 수군거릴까 두려우니, 대신께서는 넓게 헤아려 주십시오.”

‘너희가 조선에 위험을 떠넘겨서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군대 끌고 와

거들먹거리면 체면에 똥칠 한번 단단히 할 거다.’라는 암시를 알아듣기는 어

렵지 않았다.

소국의 일개 지방관이 자기 말에 능란하게 대응할 줄은 몰랐던 복장안은 못마

땅한 소리를 냈다. 복장안 역시 수치를 알기에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가 흔히 쓰는 상투적인 수단이 필수불가결했다.

“하관(下官)과는 더불어 의논할 말이 없다. 관찰사는 이 자리에 대신을 맞이

하고 인사하러 나온 것뿐인데, 국가대사를 이러쿵저러쿵 길게 논할 직임은 누

구에게 있는가? 나는 예정대로 대동관(大同館)에 들 터이니 재상에게 나와 보

라 하라.”

본래 청은 조선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로 사신을 보내려 했

다. 하지만 지금 왕이 영길리국 함대에 놀라 기혈이 뒤틀려서 매우 위독하다

하기로 청도 한발 물러났다.

물론 가경제가 조선왕이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조

선 왕이 아프다고 하는 말은 내가 지금 중국 사신 만나기 싫다는 말로 이해되

어야 한다.

400년이나 써먹어서 이제 자동 번역 수준인, 서로 알면서도 양해하는 핑계에

가깝다. 물론 중국이 강성할 때는 개수작하지 말라고 윽박질러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경제는 조선을 되도록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이공의 예상대로, 이

제 조선은 영길리국이라는 패를 쥔 셈이다. 마카오를 피 흘리지 않고 탈환하

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나 껄끄럽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조선이 평양이나 삼화(남포)를 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장자도에는 대규모

군함 함대가 정박할 수 없다는 것, 또 굳이 절목에 장자도에서는 무장할 수

없다는 항목을 넣은 것을 볼 때 조선이 청을 크게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가경제가 당장 실질적 힘도 없으면서 조선을 핍박한다면 이공은

천진과 멀지 않은 평안도를 영길리국의 군함 기항지로 쓰게 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가경제는 굳이 서울까지 사신을 보내 조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면서,

동시에 멀리 나간 사신이 의도하지 않은 사고를 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복장안은 평양 대동관에 죽치고 앉아서 의정 대신급을 불러오라고 엄

포를 놓는 것이다.

‘포도아국 놈들이 그 꼴이 된 이상 조선에서라도 뭔가를 얻어가야 한다.’

사실 황은을 가장 많이 입은 것은 공짜로 마카오를 되돌려받게 된 포르투갈이

다. 그래서 복장안도 먼저 그곳에 접촉했다. 그는 여기 오기 전 포르투갈 총

독 베르나르도 알렉시오를 불러 보았고, 그에게 엄청난 생색을 내어 뭔가를

뜯어내 보려 했다.

유럽 기준으로도 청의 처사를 욕하기는 힘들 것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청이

치러야 할 대가는 수도 목젖에 들이대진 영국의 칼날이었으니까.

그래서 베르나르도 알렉시오 역시 뻔뻔하게 나온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저

세상 불쌍한 사람의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정말 송구합니다만 포르투갈 정부로서는 드릴 수 있

는 것이 없습니다.”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입니다. 각하. 포르투갈 정부는…… 이제 유럽에 없습니다.”

그때쯤에는 마카오 총독부 역시 본국의 소식을 접한 뒤였다. 미친 보나파르트

는 정말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를 모래성 치우듯 허물어 버렸다. 왕은 수치

도 모르고 브라질 밀림으로 도망쳐 거기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복장안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주저앉아 아무래도 곧 울 것 같은 알

렉시오를 보면서, 복장안은 다 잘 될 거라는 위로밖에 해 줄 말이 없었다.

양광총독 오능광이 영국군의 재진주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마카오에 부대를

주둔시켰을 때도 알렉시오는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미 포르투갈에게 그 땅은 가치가 없었으며, 따라서 가치 없는 땅을 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되찾아 준 청국도 보람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다른 것이라도 얻어 가야 한다.

아마 명이었다면 체면상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땅을 요구하지는 못했을 것이

다. 하지만 복장안은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 출신 권귀였고, 따라서 한족들이

갖고 있는 체면은 필요하다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복장안의 사신단 전체에서 표현되었다. 그들은 중국 사신의 행패에 익

숙한 평안도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공공연히 뇌물을 요구하고, 수틀리

면 아전을 잡아다가 멋대로 매질하며, 일개 마부들까지도 관기(官妓)들을 잡

아 끌어갔다.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몽둥이가 춤추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평안도가 전쟁이

라도 겪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서구는 부글부글 끓는 심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잇달아 서울에

보낸 장계에도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왕의 심모원려를 위해 ‘그 정도 대가라

면’ 내어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렇게 기선 제압을 요란하게 하고 대동관에 든 복장안은 그 빌어먹을 장정인

지 뭔지를 탁자에 꺼내놓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분명 어딘가 사대하는 예에

어긋나는 조항이 있을 것이다.

“번신(藩臣)에 외교(外交)는 없는 법. 이 일이 전례가 되어서는 안 돼. 조금

더 연구해 보자.”

조회문과 달리 본문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잘 쓰지 않는 개념이 많고, 따라

서 오용되기 쉬웠기에 영어를 기준으로 한역이 되어 있었다.

<1조. 양국의 개항장은 조선국 장자도,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캘커타

(Calcutta)로 한다.

2조. 조선국왕의 위임을 받은 서북통상사무아문(西北通商事務衙門)과 영국왕

의 위임을 받은 동인도양행(東印度洋行, 동인도 회사)은 양국 신민의 무역과

유관하여 발생하는 모든 직무를 책임진다.

3조. 조선국과 영국은 각자의 항구에 수입되는 물품에 대해 관세를 자유롭게

부과할 권리를 가진다. 다만, 별표의 상한선을 초과할 수 없으며 해당 별표는

양국 정부의 위임을 받은 서북통상사무아문과 동인도양행의 협의에 따라 조정

할 수 있다.

4조. 개항장을 포함하여 양국의 영토 및 영해에서 일어나는 범죄 행위에 대해

서는 범죄자의 국적을 물론하고 해당국에서 각자의 법에 준거하여 판결한다.

다만, 범죄가 아닌 경제적 분쟁으로 발생한 소송에 대해서는 피고(被告)의 국

가에서 판결한다.

5조. 곡물·식수·육류 등의 식료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안보상 필요하다고 판단

할 경우 타방에 통고 후 수출을 통제할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사유가 해소되

면 지체 없이 무역을 재개하여야 한다.

6조. 개항장 이외의 밀무역은 해당국 관헌이 언제든 체포할 수 있으며, 가액

의 2배에 상당하는 벌금을 물리고 화물은 몰수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아편

과 무기는 사고팔 수 없다. 적발되면 양국의 법규에 관계 없이 국적을 물론하

고 조속히 사형에 처한다.

7조. 장자도에는 함선주박(艦船舟舶) 모든 종류를 불문하고 싸움배가 드나들

수 없으며 무장한 군병이 주둔하지 못한다. 조선국 또한 해안 요새와 해안포

등을 배치하지 않는다.

8조. ……>

장정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딸린 별책과 부록은 더 많았다. 복장안

이 보고 있는 것은 중요한 조항만이 요약된 낱장이었다.

복장안은 그 낯선 문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일렁

이는 촛불은 마치 그것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밀무역과 국가 공인 무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대표적인 것을 하나

만 꼽자면 책임자가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관련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전 대영 밀무역을 사실

상 시준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은근슬쩍 설치된 서북통상사무아

문이라는 관청 전체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장부가 들어서고 치계(馳啟)가 휘날리며 새로운 관청과 딸려오는 여러 부대시

설의 물자 조달이 실무자들을 괴롭혔다. 시준이 결정하고 홍득주가 승인하면

끝났던 무역 과정은 서제(書題)부터 참의까지 복잡다단한 결재 체계를 거쳐야

했다.

따라서 의사 결정은 경직되고 지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관료주의의 폐해와 국

가 통제의 비효율성을 성토하는 익숙한 비난이 메아리처럼 울려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흔한 오해와는 달리 이러한 여러 방해와 견제야말로 신뢰성을 담보하

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증인이 많아질수록 신빙성이 높아진다는 삼인성호

(三人成虎)의 이치와 완전히 같다.

시준이 밀무역 시절 그랬던 것처럼 상품이 사기일까 봐, 만날 사람이 도착하

지 못했을까 봐, 접선지에 대규모 무리가 나타나서 모가지와 돈을 한꺼번에

가져갈까 봐 고민할 필요가 없다.

혼자 결정할 때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실수는 이 체제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교

정된다. 악의를 가지고 사업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지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기에 중복이나 누락이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정규 조직 체계가 보장하는 놀라운 속도의 비결이고 핵심이다.

독재자가 다스린 집단이 오랫동안 번영을 구가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전직 공무원인 시준은 그런 데에서 일할 수 있는 서북통상사무아문 사람들이

꽤 부럽다고 생각했다.

시준이 장자도에서 한 일이 날카로운 칼날 위의 외줄타기라면, 아문의 일은

대로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안 감사조차 고사한 조신들은 그렇게 생각하

지 않겠으나, 조선 사람의 입장에서나 두려운 미답지지 시준의 입장에서는 철

밥통 관리직이다.

물론 시준은 관리가 아니고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준은

정약용의 보좌를 위해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아쉽다고 생각

했다.

‘지금 내가 의주에 있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한몫 단단

히 잡았을 텐데.’

시준의 현직은 상인이기 때문이다. 의주 카르텔의 체계가 시준이 없는 사이에

도 잘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시준만큼 많은 이득을 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조선 국왕 이공 또한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지만.

이공은 옆의 계목(啓目)을 집어들었다. 흔히 조선 시대 문서 하면 스크롤 형

식의 글을 멋들어지게 펼치는 장면이 많이 인식되나, 당연히 불편하므로 일상

사무에서는 조선에서도 코덱스 형식, 그러니까 작첩(作帖)된 책자를 썼다.

만상 행정체계를 잡아 놓은 시준의 자부심에 상처가 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공문서도 현대의 것만큼이나 엄정한 양식과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이공은 자

기가 원하는 별단, 그러니까 첨부문서를 찾는 데 전혀 고생하지 않았다.

이번 건의 보고서 끝에 붙은 여러 첨부를 훑어보던 이공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개좌한 문건을 보니 이제 생각나는군. 정약용이 데리고 다닌다는 그 제자가

있었지 않소? 상한(常漢)이라 하지만 영길리국 말을 잘 하고, 정약용 정도 되

는 선비가 힘써 가르쳤으니 천한 티를 좀 벗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김조순은 주의해서 왕의 안색을 살폈다. 감히 왕 앞에서 진짜 고개를 든 건

아니고 이 시대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초감각으로 심산을 헤아려 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관료에게는 감시가 붙어 있다.

국가에서 비밀경찰을 운영한다는 말은 아니다. 보통 이는 암묵적이고 사적인

정보망이 대부분이며, 물 긷는 사람이나 똥거름 나르는 사람, 하인과 찬모,

기생과 문객 등이 주 구성원이다.

시대 상황상, 존귀한 자들 및 그와 교우가 있을 만큼 비슷하게 귀한 자들은

그런 천인들을 사람이라고 인식하거나 상호 교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현대

인이 일반적으로 무선 전파가 향하는 방향에 별 신경을 쓰지 않듯이 그들에게

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첩자가 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천한 자들 역

시 입이 있고 눈이 있기 때문이다.

존귀한 자들 사이에서 뭔가 불화가 일어났을 경우 “신이 듣기로 누구 집에서

요사한 논의가…….”, “신이 가만히 듣건대 진실을 알 수 없으나 누구 군관

이…….” 하는 식으로 사화(士禍)의 포문이 열린다. 그 탄환을 재고 화약을 준

비하는 게 바로 그런 자들이다.

김조순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준을 직접 매질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왕은 마

음만 먹는다면 그의 빈약한 정치 세력 중 몇몇만 동원해도 김조순과 시준이

만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김조순은 모험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는 십분 주의하여 그 사적인 만

남에서도 위험한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문제 될 것은 없다.

“예. 예조 참의가 입시한 동안 신이 그 아이를 불러 보았사온데, 나이가 어려

혈기 방장하고 예절을 몰라 건방지기는 하나 말에 총명이 있고 행동이 민첩했

습니다.”

말에 총명이 있다는 것은 함부로 지존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요, 행동이

민첩하다는 말은 매를 때리려 할 때 시준이 난동을 삼갔다는 의미다. 김조순

의 눈에 그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정치력이었다.

그때 왕이 조금 엉뚱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서북사무아문에 뽑아 둔 관리들은 모두 나아갔소?”

김조순은 이조 참판 박윤수를 건너다보았다. 담당자니까. 그리고 박윤수는 말

을 하지 못했다.

조선 신료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보직 주면 흔히 하는 짓이었지만, 태반이

출근을 거부해 버린 상태였다. 명분도 당당하다.

‘내가 닷 되의 쌀을 위해 오랑캐 따위에게 허리를 숙일 것 같으냐?’

그리고 그 명언의 주인인 도연명(陶淵明)처럼 표표히 고향 가면 된다. 다른

점은 도연명과 달리 이들에겐 놀고먹을 막대한 재산과 노비가 있다는 점 정도

일까.

어차피 일할 사람 없으니 한 열흘 있으면 왕이 다시 부른다. 시준이 들었다면

사직이냐 휴직이냐 하는 점만 다를 뿐 시준도 전 직장에서 흔히 보던 일이라

고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윤수의 벌레 씹는 것 같은 자복을 들은 이공 역시 조선의 왕이니만

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왕명으로 억지로 출근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관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

을까. 결국 이 새로운 무역 이득에 침 흘리는 역관 계급으로 행정관원을 채워

야 하는데 이공은 사람의 품성에도 신분이 있다는 말을 믿는 쪽이었다.

“소위 중인(中人)이라 하는 자들은 대개가 인성이 비루하니 이는 뿌리가 바르

지 못하면 열매도 실하지 못한 이치. 그들은 이득을 보면 의를 잊고 위협이

있으면 용기를 버리게 되오. 당장이야 임시변통으로 관헌을 채운다 해도, 결

국 서양국 사정에 능통한 자들이 낭관과 주서 중에라도 많이 있어야 하오.”

김조순은 설마 왕이 그 장사치를 특임하기라도 할 것인가 의심했다. 그건 왕

이 미치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다.

천하기로는 시준과 별 차이도 안 날 장영실(蔣英實)을 세종이 등용한 전례가

있다 하나, 그 누구도 15세기의 영국과 19세기의 영국이 같은 나라라고 생각

하지 않는 것처럼 조선도 그러하다.

다행히 이공이 그 정도로 급진적인 왕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공은 예조 참의를 소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고는 정약용이 당혹해할 만한

명령을 내렸다.

작가의 말

1. 조약 내용 중, 캘커타는 동인도 회사령의 수도입니다. 또한 밀거래에 대해 2배를 징수하는 내용은 원 역사의 조영수호통상조약에도 있었습니다.

2. 스크롤은 두루마리를 생각하시면 되고, 코덱스란 지금 우리가 통상 책이라고 일컫는 낱장으로 넘기는 형태의 책입니다.

3.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무슨무슨 아문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요(통리기무아문이라던가) 사실 아문은 이때 등장한 신조어라기보다는 원래 관청을 일컫는 다른 말입니다. 개항기의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고전이나 사서에 전례가 없는 관청의 필요성이 생겨났기에 그냥 하는 일 뒤에 아문이라는 말을 붙여 만든 거죠.

13. 풀리는 빗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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