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11.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2)
“미용(정약용)의 제자라 하니 알아듣겠지. 역아(易牙)가 환공(桓公)에게 자기
아들을 삶아 바쳤고, 석숭(石崇)이 미녀의 젖을 먹여 기른 돼지고기 중에서
겨드랑이 살만 먹었으니 모두 비루한 일. 기괴한 미식을 탐하는 자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했다.”
시준은 김조순이 정약용을 자(字)로 부르는 것을 듣고 놀랐다.
‘김조순이 정약용을 알았어? 그런데 왜 귀양지에 냅뒀어?’
시준이 몰랐을 뿐 사실 둘은 당파를 초월해서 어느 정도 교유가 있었다. 단지
당파가 더 우선이었을 뿐이다. 김조순은 자기 가문 내의 사람들도 진영논리에
따라 냉혹하게 숙청해 버린 남자다.
조선의 19세기를 규정지은 철인, 김조순이 말했다.
“그래서 태조 때, 이인수(李仁壽)가 오로지 요리 잘한다는 재주 하나로 상의
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오르자 선비들이 성총을 거스름을 알면서도 간언한
것이다. 물론 우리 태조께서는 덕이 밝아 애초에 이인수에게 실직(實職)은 하
나도 주관하지 못하게 하셨음에도 말이다.”
옛일을 들어 시준의 기선을 제압하려 하면서도 왕실에 대한 모독으로 트집 잡
힐 거리를 봉쇄하는 김조순의 철두철미함에 시준은 약간 긴장했다.
‘하지만…….’
세게 나온다는 것은 자기가 꿀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과연 김조순은 나름대
로는 물 흐르듯이 용건, 그러니까 아쉬운 소리를 꺼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훈계하니, 윗사람을 뵙는 데에 있어 보여야 할 것은 이런 작
은 잡기가 아니라 큰 뜻과 세밀한 계책이니라. 네 스승과 너는 영길리국에 대
해 많은 것을 보았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을 터. 네가 아는
것을 말해보아라. 미욱한 재능이라 하나 내가 취하여 나라의 일에 사용하겠다.”
시준은 프랑스 혁명 때 어째서 남녀노소도 죄의 유무도 전혀 가리지 않고 오
로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학살당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귀족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맞는 것 같았다.
‘원래 조선 시대 귀족놈들이 다 이래?’
원래 이렇다. 그나마 김조순이면 너그러우면서도 합리적인 축이다. 나라를 위
해 장사치 어린아이 따위와 이야기하는 치욕마저 감수했으니 말이다.
의주에서는 홍득주의 보호하에 있었고, 어느 정도 큰 뒤에는 인맥과 돈을 쥔
덕에 감내할 만한 정도의 신분 차별밖에 겪어보지 않은 시준으로서는 잠시 화
를 삭여야 했다.
‘만화라면 이렇게 되겠지. 여기에서 내가 일부러 당돌한 말로 대들면 옆에 있
는 저 젊은 놈이 화내고, 김조순이 ‘재미있는 놈이구나.’ 하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대충 그런 그림……. 하지만 여기는 현실. 지금 분위기는 주둥이 잘못 놀
리면 그냥 재미있게 곤장 맞고 어디 개골창에 처넣어질 각이다. 참자, 참아.’
김조순은 이쯤에서 당연히 나와 줘야 하는, “저의 미천한 학문과 엷은 재주를
대감께서 써 주시겠다니 황공무지로소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고개를 갸
웃했다.
‘옆에 있는 저 젊은 놈’, 그러니까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金逌根)이 아비를
대신하여 막 꾸짖으려 할 때 시준은 입을 열었다.
신임 예조 참의 정약용은 조선 국왕 이공의 앞에서 엎드린 채 낭랑한 목소리
로 말했다.
“두 가지 이로운 점이란 하나는 병(兵)이요, 나머지 하나가 교(交)입니다. 영
길리국은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 그 요체는 선대왕 때 당시 천자에게
바쳤던 기기와 같이 정묘한 재주를 총포와 선박에서 발휘하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과 통교하면 반드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장사 밑천과 같은 것이거늘 쉽게 가르쳐주
려 하겠는가?”
“그것은 두 번째 이로운 점과 연관됩니다. 영길리국 사람들은 풍속이 비열하
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하여 돈이라면 뭐든지 하는데, 그래서 천하 만국이 그들
을 꺼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청국에서도 천자의 자비로 작은 포구 하나만을
내어주었을 뿐이며, 영길리국 사람들이 걸핏하면 독약을 팔아대어 조정에서도
싫어합니다. 이런 사세에서 우리가 너그럽고 관대하게 그들을 대한다면 필시
우리를 붙들기 위해 더 친하려 들 터입니다.”
정약용은 일부러 거기까지만 말했으나 이공 또한 제왕학을 익힌 자였다. 그
역시 숨긴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약용이 사해는 모두 동포라는 마음으
로 교린 이야기를 했을 리는 없다.
영국이 있다면 청이 껄끄러워할 패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일전 이존경 강제
복직건 때문에 청에 좀 서운한 게 있었던 이공으로서는 유혹적이었다.
“말이 간결하고 빨라 좋다. 그렇다면 세 가지 해로운 점은 무엇인가?”
이공은 정약용이 시준에게 배워 온 공무원식 보고를 그렇게 치하했다. 아무래
도 아직 젊어서 우유부단과 심사숙고를 원숙하게 구분할 나이는 아니다 보니
답답한 우회 표현 없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정약용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첫째는 방금 아뢴 독약, 아부용이라고도 불리는 아편이라는 물건입니다. 이
는 앵속각에 칼집을 내어 짜내는 물건인데 사람을 취하게 하여 타락시키는 것
이 술에 비할 바 아니어서 어떤 사람도 끊지 못하니 지금 청국의 인민 절반이
병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영길리국의 가장 번창한 특산물이며 그 나라 사람들
은 어딜 가든 이것을 팔기 좋아하는데, 바로 손쉽게 이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엄금해야 합니다.”
“이런 괴악할 데가!”
이공은 크게 놀랐다. 그도 왕이니만큼 아편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이렇게 무서운 물건일 줄은 알지 못했다. 정약용은 곧바로 두 번째 해로
움을 아뢰었다.
정약용에게 다소 과장된 도광 연간의 세태를 불어넣었던 건 당연히 시준이다.
김조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준에게 물었다.
“오호, 그렇군. 둘째는?”
“이들은 근본부터 모리배이며 장사꾼입니다. 그들은 옷감을 사 가고 옷을 팝
니다. 나무를 사 가서 서랍 달린 가구와 선박을 팝니다. 또한 금은을 사 가서
시계(時計)를 팝니다. 옷감은 옷에 비해 싸고 선박은 나무에 비해 비싸며 시
계도 금은보다 훨씬 귀물입니다. 자연 그들이 이득을 얻고, 당하는 쪽은 피폐
해집니다. 이것이 두 번째 해악입니다.”
“시계란 무엇인가?”
시준은 정조 시절 있었던 일을 정약용에게 배운 뒤였다.
“선대왕 때 영길리인들이 청국 조정에 시각을 알리는 기기를 바쳤는데, 좌종
(坐鍾)이라고 일컫는 그 기계와 같은 부류입니다.”
시계의 제작은 정밀 기기공업의 정화다. 그러나 김조순은 그것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정약용이 제자에게 외교 사안을 불어버렸다는 것만 기억해
두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김조순은 아들의 재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턱을 쓱 치켜들었다. 김유근이 물었다.
“허나 그런 것을 만드는 데에도 돈이 들어갈 것 아니냐? 영길리국이라고 사람
손 없이 면포 짜고 배 짓는 건 아닐진대.”
“서양국 사람들은 사람 손 없이 그렇게 합니다.”
“뭐라? 네 지금 무슨 희롱을…….”
“뜨거운 김이 오래되면 무쇠 뚜껑도 뒤엎습니다. 그 힘을 써서 극히 오묘한
기계를 돌리는데 여러 가지가 있으나 먼저 바퀴를 돌게 하고, 그것으로 때리
거나 꽂거나 천을 짜거나 노를 젓습니다. 그저 물만 끓여대면 되는 것이므로
이미 영길리국에서는 천 짜는 사람들이 밥 굶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
들고 일어나서 기계를 때려 부수기도 하였지요.”
사실과 약간 다르다. 러다이트 운동은 홍경래의 난과 비슷한 시점에 시작되며
유럽의 공업은 여전히 절대다수가 수공업이었다. 허나 시준은 자기도 잘 모르
는 영국 역사를 설마 여기 사람들이 알겠냐며 마음 놓고 뻥을 쳤다.
“그래서 그들은 옷이며 여러 물건을 극히 싸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얼마나 싼
가 하느냐면, 그 큰 배로 여기까지 멀리 실어와서 팔고도 이문이 남을 정도입
니다.”
평안 감사 이서구가 알았던 것은 김조순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날카롭게 미
소지었다.
“그러니 제발 통상하자고 저리 바다에 드러눕는 것이겠지. 내 듣기로 영길리
국에서 여기는 12만 리. 그들이 편지에 교언하듯 우리 군왕의 성덕을 사랑하
여 왔다는 말은 반드시 허튼소리렷다.”
“그렇습니다. 다만 중국은 워낙 사람 품이 싸서 그래도 물건이 잘 안 팔려,
아까 말한 아편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금하지 않는가?”
“몇 차례나 금하고 수없는 사람들을 참수했습니다. 허나 원하는 사람이 있으
니 소용이 없습니다. 영길리국 사람들을 다 쫓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
면 영길리에서 함선과 대포를 끌고 와서 해구(海寇) 노릇할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 해로운 점입니다. 만약 한번 드나들게 놓아두면 지리와 천시를 이미 살
핀 그들의 침노를 막기 힘듭니다.”
김유근이 다시 화내었다. 시준이 보기에 아무래도 오늘 김유근의 롤은 이것인
것 같았다.
“강노지말(强弩之末)이라. 아무리 군세가 정예하다 한들 십만 리를 배 타고
온 피로한 군사 몇 천으로 저 대청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네가 지금 어느 안
전이라고 아무 말이나 떠드느냐? 아까부터 예의 없이 따박따박 대꾸하는 것이……!”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명확하고 간결하게 말해 주면 좋은 설명 듣는 줄 알아
야지, 대체 여기에서 뭘 하란 말인가. 김조순의 덕에 대해 칭찬이라도 늘어놓
고 얘기하란 말인가?
시준은 결심했다.
‘좋다, 한번 엿 먹어 봐라.’
시준도 한국 사람이다. 원래는 가능하면 조선 정부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돈 벌어야 하는 귀한 시간까지 쪼개 가며 고민한 결과는 역시 절충책
이었다. 지금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는 청을 방패로 내세워 시간만
질질 끌면서, 영국인에게 조금씩의 희망만 주어 기술이나 무기를 통제된 상태
로 접수하는 것이다.
철저한 쇄국이나 철저한 개방은 둘 다 단점이 있다. 전자는 원래 역사의 조선
을 보면 명약관화하고, 후자는 인도가 좋은 예시다.
허나 둘 중에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의외로 전자다. 지금 쇄국을 유지할
경우 당장 손해 볼 것은 크지 않으며, 개항을 서두를 이유도 조선에 없다.
역사대로라면 가장 빠르게 개항할 일본도 나라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은 한
참 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끔찍한 내란을 거쳐 메이지 유신을 이루려면 앞으
로 60년이 걸린다. 그 전 200년간 네덜란드를 통해 ‘예방주사’를 맞았던 일본
조차도 그러했다.
한마디로 조선은 아직 완전 개항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갑자기
미쳐서 문호를 열어버린다고 하면, 아마 조선은 홍경래의 난 따위 비교도 안
되는 화끈한 내전부터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청이 감히 군주를 배반한 죄
를 묻지 않는다는 희망적 관측하에서 말이다.
시준은 그래서 쇄국에 기운 제한적 개방을 할 수 있도록 정약용에게 조언했
다. 하지만 김조순이 이리도 재수 없게 나온다면 그도 참기만 할 수는 없다.
‘전면 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네놈의 실각
이다. 개화의 물결은 만만치 않을걸. 안동 김문 세도는 반세기 정도 빠르게
끝날 거야.’
사실 반대로 쇄국을 고르게 하는 편이 더 쉽기는 하다. 거기에 더해 영국의
군세를 과소평가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후회할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억울하게 죽어갈 조선 수군 병사들이 마음에 걸렸기에 영
국군의 무력을 과장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다.
제한적 정보만을 흘려 민원인으로 하여금 그다지 이득되지 않는 – 그리고 상
대하는 공무원은 편한 –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짓이야 물리도록 해 봤다.
시준의 말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졌다.
“청은 10만 리를 건너 배를 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길리국은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저들이 마음 놓고 상관을 세워 무역하는 것은, 변란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지킬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중국과 넓이가 같은 천축국이
전부 저들의 땅이고 그곳의 무수한 백성을 군사로 부리므로 굳이 십만 리씩이
나 갈 필요도 없습니다.”
김조순은 턱을 만지며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반면 청은 어떻습니까? 개원지치(開元之治, 당 현종 때의 성세)가 지나자 안
록산이 일어났고, 삼등지세(三等之世, 송 인종 때의 성세)가 지나자 정강(靖
康)·덕우(德祐)의 참변이 있었습니다. 화평이 오래되면 사람이 느슨해져 반드
시 썩는데 지금의 대국이 이런 꼴입니다.”
“장사치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사서와 문자를 논하느냐.”
“송구하오나 조금만 더 논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대국도 건륭 연간이 지나자,
녹영(綠營)은 종이 위에만 있을 뿐이고 팔기(八旗)는 숭정 연간 그대로 말 위
에서 창 든 채이올시다. 단 하루도 전쟁하지 않는 날이 없는 영길리국의 대포
와 무수한 서양총 앞에서는 천병 백만이라 한들 짚검불만도 못할 것입니다.
이건 그들의 배를 본 제가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김조순의 입술이 꿈틀하자 김유근이 발을 쾅 굴렀다.
김조순네 집과 달리 왕의 정전은 애초 시준의 의도, 그러니까 제한적 개국 쪽
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힘을 들은 이공은 심각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더더욱 대적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허나 저들은 우리의 허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근래 서양국
사람들이 군신을 속이는 네 가지 조목을 아뢰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태조께
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말씀하셨듯 결단코 윤허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의 약한 점을 잘 숨기고 이것만 막을 수 있다면, 서양국과 통하는 데에 있어
과히 우려될 점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국왕이 다가들 듯 묻자 정약용이 한 치의 막힘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 시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첫째는 세(稅)입니다. 나라의 세수는 오로지 전하께오서 완전히 전제(專制)
하실 뿐 다른 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곧 불충. 하물며 외국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들은 내파는 물건에 물리는 세[關稅]를 반드시 자기들과 의
논하자고 할 것인데, 이는 허락하셔서는 안 됩니다. 저들의 의논이란 대포와
총으로 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교활한 놈들이로다.”
“둘째는 소위 말하는 조계(租界) 및 거류(居留)입니다. 자신들이 머물러 살
곳을 달라고 할 것인바,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또 치
외법권(治外法權)이니 영사재판(領事裁判)이니 하여 자기 나라 사람은 자기가
판결한다고 떠들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한 나라에 두 군주가 있는 것이니 도무
지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중국의 예를 살피건대, 애초에 관리 따위는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공으로서는 처음 듣는 개념이었지만 정약용이 그 자리에서 글을 써서 바치
자 대충 뜻을 알 만했다. 이공은 혀를 찼다.
“그야말로 당치도 않도다. 그렇다면 영길리국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마음대
로 죽이고 약탈하여도 다 무죄하다며 풀어줄 것이 아닌가?”
“실로 전하의 높으신 헤아림 그대로입니다. 또한 셋째는 방곡(防穀)인바 곡식
은 인민의 목숨이니 저들 먹으려고 사는 것 정도를 제하면 곡식은 함부로 팔
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당연한 일을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못 했지만.
“또한 넷째는 측지(測地)인데, 영길리인들은 아마도 학문을 위한다느니 하는
요언을 뿌리며 학자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남의 나라의 바다와 성새
(城塞)를 자세히 보고 재는 간자의 속셈입니다. 이를 내버려두면 적로(敵路)
가 환히 트이게 되어 적이 강짜를 부릴 때 막아내기 힘듭니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긴말을 끝내고 다시 공손히 머리
를 땅에 대었다.
”이것이 미신의 어리석은 계책입니다. 신이 아뢴 두 가지 이점을 보시되 세
가지 해로운 점과 네 가지의 금하는 조목을 깊이 살피시어 용단을 바랄 뿐입
니다.”
이공은 숙고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정약용의 글을 그 자리에서 접수케 했다.
“네 이놈! 천한 것이 서책 찌꺼기나 좀 읽었다고 감히 국교의 대사를 아는 척
하느냐.”
차마 말로는 못 했지만, 시준은 그 외의 모든 비언어적 표현으로 ‘나는 지금
당신이 아니라 당신 부친과 얘기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김유근은 붉으
락푸르락한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김조순은 흥미가 일었다. 그 자신이야 조정의 최고 중신이니만큼 청국에서 비
공식적인 선을 통해 들어온 여러 실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어린아이가, 비록 의주에서 밀무역을 하였다 해도 어찌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말인가? 정약용이 제자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칭찬할 수는 없다. 김조순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영길리국과 친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냐? 역시 천한 녀석은 어쩔 수
없구나. 너의 말에는 도덕이 한 줌도 들어 있지 않다. 이득에 따라 군주를 버
린다면 천하 사람들이 어찌 조정을 따르겠느냐?”
시준은 이왕 막 나간 김에 더 가 보기로 했다.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를 죽이려 하면 탈출할 수는 있다. 공화국 시민의 기개가 발휘되었다.
“숭정 갑신년(명이 멸망한 해)의 뒤로 천하에 임금이 있었습니까? 조정은 반
드시 이번 일을 북경에 아뢰었을 텐데, 피국(저 나라, 즉 청나라)에서도 공짜
로 영길리국에게 조선에서 물러나라 하였을 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리배
라 깔보지만, 결국 장사치도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다는 천하의 공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시준은 김조순이 이례적으로 양인 중 가장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불
러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만큼 급한 것이다.
허나 단순히 영국 함대 때문일까? 그럴 리는 없다. 동인도 회사가 아무리 강
력해도 그들은 국가군대가 아니다. 병사가 오합지졸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정
치적 동기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군대는 진짜 전쟁을 하기 쉽지 않다.
결국 조선이 정말 각오한다면 동인도 회사 함대 정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
지 않다. 그리고 어차피 영국인을 쫓아낼 것이었다면 시준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을 터. 그 사이에 뭔가 골치 아픈 일이 끼어든 것이다.
시준은 그것이 아마 청이 관련된 일일 거라 추측했다. 아마도 청이 영국 함대
를 물러나게 해 주는 대신에 뭔가 곤란한 것을 요구했으리라. 일전 ‘프랑스
해적’의 장자도 사건 때 평안도 경내에서 관리의 출입권을 요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다. 차가운 칼날처럼 디밀어진 진실
에 천하의 김조순도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말
1. 공교롭긴 합니다만 오늘 첫머리에 나온 태조 때의 이인수와 현재 총융사 이인수는 둘 모두 실존인물이며 당연히 동명이인입니다.
2.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1785년생이므로 작중 시점에서 스물넷이로군요.
3. 정조 때 매카트니 사절단이 건륭제에게 갔던 일은 본작 초반에 등장했지요. 당시 좌종(자명종 비슷한 물건으로 보임)과 '포랍니대리옹(布爉尼大利翁)' 이라는 물건을 바쳤는데, 이 포랍니대리옹은 맥락상 천구의나 천체도와 비슷한 물건으로 보입니다만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더군요. 저 개인적으로 북극성(polaris)과 명칭상 연관이 있는 물건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4. 영국의 위치, 유럽의 대략적인 정세, 영국이 청에 스며드는 속셈, 제국주의적 무역구조 등은 당대 조선의 실학자(특히 유득공)들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먼 거리를 단지 조공하러 왔다니 그 말은 믿을 수 없다. 필시 해적의 무리다'라는 정확한 통찰을 해낸 기록이 있죠.
11.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