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11.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1)
앉은 암탉의 부풀린 깃털 사이로, 마치 생겨나는 듯이 노랗고 뽀얀 병아리 대
가리가 쑥 나온다. 먼저 고개를 내민 맏이를 따라 나머지 병아리도 하나둘 혹
처럼 돋아난다.
답답하다는 자녀들의 – 사실 자기 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 보챔을 이기지
못한 암탉은 병아리 몇 마리를 데리고 마실을 나간다. 마당 한 바퀴의 장대한
여정이다.
이제 해도 기울어 쬘 양기도 없건만, 짐짓 햇살 즐기는 척 담장 위에 늘어져
있던 고양이가 엉덩이와 꼬리를 좌우로 움직이다가 퍼뜩 뛰어내린다.
가을 독사조차 따르지 못하고 단박에 눈깔을 후벼 파일 정도로 재빠른 게 닭
이라는 짐승이다. 하지만 고양이란 놈은 그것보다 한 수 위. 짧고 잔인한 푸
드덕거림 끝에 운 나쁜 병아리 한 마리가 대번에 물려 간다.
저것도 먹일 자식 있어 남의 자식 잡아채는 것이겠으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런 사정을 헤아릴 리 없다. 내 새끼 내놓으라고 고고성 지르는 닭 소리에 평
소 데면데면하기로 유명한 소도 눈을 급히 굴리고 거위도 그 사나운 성질을
이기지 못해 날갯짓한다.
지금은 조막만 하다 해도 잘 키워 놓으면, 우리 딸 매 맞고 살지 않게 해 달
라며 망나니 사위한테 내어줄 씨암탉이 될 터인데 어찌할꼬. 주막 주인은 성
이 났다. 우박 퍼붓듯 하는 욕설이야 인세의 어지러운 말 같은 것 모르는 고
양이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몽둥이 들고 나서는 여주인의 뒤로, 밥값 못 한다 걷어차일 게 두려워 화들짝
따라나선 누렁이 강아지의 달음박질이 따른다.
그러다가 마루에 늘어져 있으면서 고양이 보고 발 한번 구르지도 않은 손을
흘겨보거나 말거나, 시준은 학생으로서는 용납되지 않을 자세로 앉아 부채를
열성적으로 퍼덕이고 있었다.
부채가 식혀주는 체열과 시준의 팔 운동으로 발생하는 체열 중 어느 것이 높
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시준은 안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선생님, 방금 이 집 병아리가 화를 당했으니, 시원하게 참외라도 하나 씹기
는 글렀습니다!”
“그러냐. 안 됐구나. 네 지금 읊은 말이 제법 시문과도 같다. 시란 그런 것이
니라.”
“제자가 시재(詩才) 부족하여도 이 염천하(炎天下)에서는 가마솥 위로 뭉게뭉
게 김 떠오르듯 시상이 솟구치는군요. 아니, 어떻게 그런 데에서 잘도 앉아
계십니까?”
도대체 인간이 저 안에 들어 있을 수가 있을까 싶게 절절 끓는 것이 조선의
주막이라지만, 원래 북쪽에서 살던 시준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설마 한여름에도 구들장을 저리 지펴 놓을 줄은 몰랐다. 이 서울 부근에서는
땔감 값도 결코 보통이 아닐진대, 어찌 저런 낭비를 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
이었다.
정약용은 제자의 짜증을 듣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걸어 나와서 시준을 내
려다보았다. 시준은 그 차림에 한 점 흐트러짐도 없는 것에 기괴함마저 느꼈다.
‘인간이 아닌가?’
정약용이 시준의 부채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시를 들었으면 마땅히 대구(對句)하여야지. 내 너에게 시문을 베풀어 주마.
마음의 심지를 없애면 불 속에서도 시원하게 되느니라[心頭滅却 火中有凉, 두
순학(杜荀鶴)의 시문].”
시준은 조선 시대에서 스승을 한 대 후려치는 게 어떤 윤리적 파장을 일으킬
지 고민해 보았다.
그런 제자의 속도 모른 채 정약용은 시준의 부채를 들어 살살 부쳤다. 과연
시준의 상놈스러운 부채질과 달리 배운 선비는 더위 식히는 법도 고아했다.
“이 집 객주(客主)가 양화나루의 중도아(中都兒, 경강상인의 하청을 받는 유
통중개인)로서 큰돈을 벌었는데 병아리 한두 마리 정도야 어찌 심히 아까워하
겠느냐. 곧 손님 대접하는 도의가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거라.”
중도아에서 객주까지 출세하였다면 수완이 보통을 넘는다는 뜻이다. 하긴 아
까 몽둥이 든 팔이 여자치고 여간 억세 보이는 게 아니었다.
거시사는 잘 모르는 시준이지만 미시사는 웬만큼 안다. 직접 겪었으니까. 시
준은 아마 이 여자가 대갓집 뇌물 접수처 역할 해주던 천첩으로, 이제 나이도
들고 하니 한 살림 갈라 받아 기둥서방 따로 세워 놓고 객주 영업하는 사람일
거라 추측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준은 정약용이 기다려 보라고 한 말에 대해 어떤 가
능성을 떠올렸다. 정약용은 이제 의주 희만당 잔소리꾼이 아니라 조정의 고위
관료다.
설마하니 정약용이 서울에 첩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겠지만, 귀양지에서 인심
많이 쓴 의주 부윤 조홍진처럼 서울의 누군가가 정약용을 배려했을 수는 있다.
“이 집이 선생님 아시는 집입니까? 그러면 주인장에게 나와 보라고 하시지 않고.”
“아니, 나도 아까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서 들은 그 말이 전부다. 하지만
곧 아는 사람이 될 게다. 그 얘기는 굉보와 다른 제자들이 돌아오면 할 수 있
을 테니 너는 충분히 몸 식었거들랑 들어오려무나.”
시준은 어리둥절한 대로 일단 방 안에 들어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각오했던 바이지만, 묵은 공기가 뜨거워지기까지 해서 온몸의 감각에 고루 고
통을 주었다. 시준은 온돌의 과학 어쩌고 하던 학교 국사 교과서를 저주했다.
안에는 정약용이 지금까지 쓴 종이 여러 장이 있었다. 시준이 힐끗 보니 아까
말하던 시문 몇 개였다. 살짝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내용인지 알 만큼 한학을
습득하였으니 전생으로 돌아가도 어디 연구원쯤은 할 수 있을 터이다.
“선생님이 이래서 시를 말씀하셨군요. 어디 제자도 한 번 볼…….”
“어흠! 그건 네가 볼 것 없다. 그저 낙서일 뿐이니. 너와 더불어 이야기할 것
은 이쪽이다.”
그러나 시준의 눈은 보통 사람보다 좋다. 그는 이미 내용 일부를 보았다.
<예악과 문물이 열조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대성인(大聖人)의 아름다움이…….>
시준은 그만 보기로 했다. 배움 짧은 시준이 알기로도 저런 표현을 받을 수
있는 건 왕뿐이다.
‘정약용 힘내라. 역시 직장 생활 힘든 건 21세기나 19세기나 마찬가지구나.’
귀양 죄인을 옥사에서 풀어주고 높은 관직에 임용했으니, 왕의 성덕을 찬양하
는 시 정도는 그 자리에서 5천 자 정도 술술 나와 줘야 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에서 요점은, ‘절대로 미리 준비한 게 아닌데도 왕을 대면한 그 자리에서
감동에 북받쳐서 나오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정조 휘하에서 기습 과제와 시작(詩
作)에 단련된 정약용이라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그 연습을 마친 모양인지 정약용은 종이를 황급히 치워 두고 시준을 앉혔다.
“벽제역에서 받은 성지를 너도 기억하고 있으렷다.”
시준은 미뤄 두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오자 속으로만 인상을 찡그렸다.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제자들은 다 스승 심부름하러 나갈 때, ‘수
제자’이며 ‘선배’ - 정약용이 이렇게 선언할 때 시준의 허리가 좀 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인 시준이 스승 모셔야 한다 핑계하고 남은 이유가 그것이니까.
예조 참의의 공석에 추천할 사람이 없어 이리됐다는 조홍진의 얘기를 들었을
때, 정약용은 자리 채우기 위해 선대의 유신을 불러들인 것쯤으로 생각했다.
파벌 싸움이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쯤 자신이 처신을 단정히 하면
괜찮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벽제역에서 영국 배의 강화도 도래 소
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일을 정약용이 예조 참의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
을 알았을 때 시준은 진지하게 밤에 북쪽으로 도로 도망칠 생각도 해 보았다.
“혹시나 해서 다시 아룁니다만, 만약 제가 그 더러운 영길리국 오랑캐놈들과
조금의 연관이라도 있으면 바로 하늘의 죄를 받아 죽을 겁니다. 어찌 감히 제
자가 잠통모반하겠습니까?”
시준을 보면 아마도 친하게 아는 척하고 싶을 레디 선장, 아니 소령이 들으면
많이 섭섭할 얘기였다. 정약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는다. 배 한 척 가진 것 없는 네가 어떻게 외국과 통하였겠느냐. 너
를 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는 것을 모두 정리하여 이번에 왜 왔는지를
고찰해 보려는 것이야. 내가 힘써 주청해 볼 것이니 잘만 되면 너도 성상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기 싫은데요.’라는 말은 시준의 목구멍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공무원
사이에서도 공채 행정고시 출신들이 민간 경력직을 따돌리는 일은 흔하다.
(물론 이런 세태가 다 그렇듯이 그 안에서도 계층이 나뉜다.)
그리고 조선은 더 심했다. 왕의 특지를 입은 선비가 남의 괄시 더러워서 관직
에 있는 채로 과거를 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끝내 과거 합격 못 한 박지원
이 은퇴할 때까지 말직이나 전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굳이 펄쩍 뛰며 사양할 건 없다. 어차피 안 될 테니까. 정약용도 예의
상 말한 거지 시준의 신분상 특채는 힘들다. 그건 이미 선비들의 기득권 네트
워크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준은 한숨을 쉬고 바로 정약용의 용건으로 들어갔다. 곧 있으면 이
강회 등이 돌아오기도 하거니와, 이 일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시준도 이 찜통
에서 나갈 수 있다.
“성지에 적힌 대로 영길리국은 통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통상이란 곧 장사
[商]로 통한다[通]는 것입니다. 자기네 물건을 팔고, 조선의 물건을 사 가며
사람과 물자, 서책과 학문을 바꾸어 친하자는 말이지요.”
전생의 시준 역시, 조선도 개항하여 무역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면 좋았을 게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조선에 와서 많이 바뀌
었다.
지금 조선의 원시적 경제로 유럽에 대해 대책 없이 항구를 열었다가는, 즉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착취당하고 인도 꼴이 될 뿐이다. 게다가 영국이라면 반
드시 아편을 판다.
정약용도 아편만 모를 뿐 비슷한 생각이었다.
“장사는 선비가 손대어서는 안 될 말류이고 외국과 통하는 자는 군주를 배반
하는 간사한 신하라. 둘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러나 이 가난한 나라
에 그자들이 사갈 것이 무엇이 있느냐? 보나 마나 금과 은이며 구리나 쌀처럼
어느 나라에나 똑같이 나는 물건뿐인데, 이것들을 그들의 기기묘묘한 물화며
기기와 바꾸었다가는 삼 년 내로 나라가 망한다.”
원료의 수입과 완제품의 수출. 그리고 경제의 파괴.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무
역이며 알기도 쉽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유럽과의 교역이 어떤 결과를 초래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쇄국론의 이론적 근거도 그리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생각은 지금껏 영길리국이 집어삼킨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알면서도 포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
던 것은 그들의 강성한 대박거포(大舶巨砲)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넓이는 청
을 능가하고, 군병은 땅방울[地球] 전체의 모든 나라와 대적할 만합니다.”
아직 대영제국의 시대는 아니라서 시준의 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선 입장
에서는 개미가 상대할 인간이 어린아이냐 어른이냐 정도 차이다. 짓눌려지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정약용 또한 박윤수와 달리 우리도 배 모아 영국에 대적하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조선 수군이 전멸을 각오하면 그 대가로 이번에 온 ‘통상 함대’ 정도는 쫓아
버릴 수 있을 터이다. 아직 증기 철갑선 같은 게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도저
히 극복 불가능한 무력 격차라고까지는 하기 힘들다.
하지만 영국이 본토 해군을 끌어올 것도 없이, 동인도 회사의 무력 사용 승인
만 하여도 조선은 멸망한다. 동인도 회사군은 이 당시 7만에 가까웠다.
실제로는 머나먼 거리, 인도 통치에 할애할 잔존 전력의 필요, 그리고 국제
관계와 정치적 문제 등 수많은 난관 때문에 동인도 회사의 조선 침공이 실현
되기는 어렵겠지만, 순수하게 전투력만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시준은 정약용이 준비하기 쉽도록, 공무원 식으로 간결하게 정리해서 이야기
해 주기로 했다.
“이 일을 살피는 데에는 두 가지 이로운 점, 그리고 세 가지 해로운 점이 있
으며 조정에서는 이 모두를 잘 살펴 상께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오냐. 듣겠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쯤, 이유회와 이강회 형제를 비롯한 제자들이 돌아
왔다. 맨 뒤에서 없는 사람처럼 따라오는 것은 기랑이고, 맨 앞에서 서울 구
경에 신나 껄렁대는 것은 만득이다.
그들이 무슨 대단한 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만득이 등이 앞질러 가서 수
선해 두었던 조복(朝服) 찾아오고, 기랑이가 의주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를 서
울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바꾸는 동안, 제자들은 정약용 자신이 직접 찾
아가지는 않아도 되는 곳에 인사를 다닌 정도다.
이유회가 단정히 앉아서 말했다.
“내일 성에 들어가시면 바로 입조하실 테니, 그동안 저희는 황화방(皇華坊)에
가서 사숙(師叔, 정약횡)의 집을 깨끗하게 치워 두겠습니다.”
이번에 굳이 내려오지 않은 정약횡은 기꺼이 사창동(司倉洞) 자기 집을 내주
었다. 어차피 그가 의주로 올 때 부인 한씨(韓氏)와 자식들도 같이 와서 집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한씨가 주문모 신부의 밀고자 한영익(韓永益)의 누이다. (아마 한
영익의 밀고를 알아채고 주문모에게 통보하여 도망치게 했을) 정약용이 주선
한 일종의 가문 보호책이었으나 그것으로 완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울 조정에서는 여전히 의심받고 암약하는 천주교도들에게도 배신자
라 백안시당하는 처지라 서울에 돌아갈 마음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다.”
정약용은 그렇게 치하하며 시준과 나눈 문답을 정리했다. 그리고 정말 그가
말한 대로 주막에서 시원한 참외며 물에 담근 수박 따위가 나왔을 때도 정약
용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시준은 놀랐다.
“아니,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었으니 이게 웬 조화입니까?”
“네가 날고 긴다 해도 서울에 오니 글만 읽은 스승보다도 영 물정을 모르는구나.”
정약용은 그렇게 빙긋 웃을 뿐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려 본 시준은 곧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정약용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볼일 보는 동안, 우리 선생님이 예조 참의 벼
슬하여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안 했을 리 없다. 특히 만득이는 정약용의 오른
팔 행세라도 했을 것이라는 데에 뭐든지 걸 수 있었다.
경강의 상인들만큼 서울 소식이 빠른 자도 없을 터. 아마 제자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 주막에도 퍼졌을 것이요, 결국 주막 여주인도 병아리 한 마리 정도는
대범하게 잊어버리고 잘 대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정약용 자신은 한 마디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다. 그건 선비로서 졸렬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외는 나왔으며, 이것이 조선 사회가 움직이는 방
식이다.
시준은 소원대로 참외를 씹으면서 그에 대해 생각했다. 자식 잃은 슬픔이 아
직 사무치는지, 밤에도 횃대에 올라가 자지 않고 서성대는 암탉이 시준의 눈
에 다시 들어왔다.
“이보시오, 만득이. 얻어온 물건 중에 기름 있소?”
이제 시준은 권리를 갖춘 양민 성인이고, 만득이는 노비라 아무리 불학무식한
만득이라도 예우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기름이야 있지만 어쩌시려고요?”
“평양에서 일 기억나지요? 다시 한 번 닭 튀길 테니 내일 새벽 일찍 준비하시오.”
“아아, 이번에는 나랏님 바치시려고? 암. 평안 감사 맛보셨으니 이번엔 마땅
히 나랏님께도 올려야지. 헤헤. 그러면 아예 몇 마리 튀겨서 우리도 좀 먹고…….”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나랏님 수라는 말도 꺼내지 마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쓸 돈도 없어. 기랑아! 너도 그때 좀 도와다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랑이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한 마리 주면 도와줄게.”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외관에 임명되어 나가는 벼슬아치는 가기 전에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는데 이
를 배사(拜辭) 또는 숙배(肅拜)라고 한다. 물론 조직 생활 다 그렇듯이 그다
음엔 공경대부와 양사에게도 인사를 가야 한다.
통상 지방관이나 변경 무관에게 해당되지만, 정약용 같은 경우는 왕의 은혜로
풀려난 것이므로 왕에게 절하여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 날, 정약용은 깨끗한 물로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드디어 입궐
했다. 8년 만의 관직 복귀였다.
정약용을 인견(引見)한 국왕 이공은 대충 위에서 위유(慰諭)하고 아래에서 죄
를 빌며 너그러움을 보이는 단계가 끝나고 나자 더 참을 수 없어 단도직입적
으로 물었다.
“저 영길리국의 기세는 과거 왜국보다 강성하고 사납다. 그대에게 이를 물리
칠 방도가 있는가?”
정약용이 대답했다.
“헌책할 바를 글로 적어 두었습니다만, 먼저 아뢰겠습니다.”
조선의 보고는 왕에게 보고서를 보여 주면서 설명하고 결재를 받는 현대식 체
제가 아니다.
통상 신하들이 왕에게 무언가를 아뢴다고 하면 승지를 통해 글을 보내는 것이
요, 왕은 그것을 보고 알았다거나 안 된다는 대답을 다시 승지를 통해 내린다.
그래서 조회나 상참 때 봉례랑(奉禮郎)이 ‘각사에서 일을 아뢰라’라고 외치는
것은 요식행위에 가깝다. 현대의 웬만한 중요 정책회의와 마찬가지로 안건은
미리 문서로 올라가 있다.
그러니 아직 사진(仕進, 출근)하지도 않은 정약용의 경우는 해당이 없다. 이
미 완성형에 가까운 조선의 체제는 그런 돌발적 아이디어 제기를 거의 용납하
지 않도록 직조되어 있다. 승지는 이 ‘무례한’ 보고서를 받아주지도 않을 것
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시준이 작성을 도와준 보고를 모조리 외운 상태였다.
정약용은 엄숙하게 말을 시작했다.
김조순은 한가롭게 닭다리를 들고 들여다보았다.
“지금쯤 예조 참의가 전하를 배알하고 있겠구먼.”
시준도 정약용이 임금을 만나는 동안 실무자 누군가가 자신을 소환할 것이라
는 사실은 예상하고 있었다. 장계에까지 올라갔다는데 아무도 챙기지 않을 리
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 시대 최고의 권력자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일 것이라는 생각
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자식,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출근도 안 했어. 훈련도감이나 다른
관청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불렀다.’
김조순의 인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준의 신분으로 감히 부원군과 같은 방은커녕 올려다볼 수 있을 리도 없다.
사실 김조순이 시준과 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구설수를 감내해야 하
는 일. 그렇기에 김조순은 자기 집을 선택한 것이리라.
조선 사람들에게는 이것만 해도 대단한 두려움과 광영이다. 허나 널찍한 김조
순의 사택 마당에 꿇어 엎드린 채 부원군의 명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시준
은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조선에 익숙해졌어도 그 두 배가 넘는 세월을 그는 민주공화국의 시민
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과거로 갔을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을 꼽아 보자면 비
위생이나 폭력, 궁핍 등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허나 그것들은 시준이 아기
때부터 예상했던 바다.
시준이 군자창에서 채찍 맞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의 정신을 새롭게 환기시
켰던 것은, 여기에서는 이유 없이 내가 굴종해야 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
실이다.
그리고 김조순은 그 굴종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네 천한 재주가 이것저것 좀 있다고 들었는데 팽재(烹宰, 요리)의 재능도 있
을 줄은 몰랐구나. 하지만 입의 즐거움이란 하찮은 것. 나를 범용한 벼슬아치
와 같이 보았다면 참으로 건방지다.”
그렇게 말한 김조순은 그 귀한 프라이드 치킨 닭다리를 땅에 툭 내던졌다.
‘이 새끼가……!’
저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신성 모독이며 인류 전체에 대한 강상죄에 해당한다.
오늘 새벽 저걸 차지하려고 만득이와 기랑이가 얼마나 싸웠는지 기억하던 시
준은 전생에서 거의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말
1. '인견' 이란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는 것을 말하고 '위유'란 위로하는 것을 말합니다.
2. 18세기는 소빙기의 영향으로 온돌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 상식입니다만 사회 변화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보니 급속도로 퍼졌다고 하기에는 갸우뚱한 면이 있습니다. 영/정조시기, 궁인들이 사사로이 궁(의 자기 숙소)을 온돌방으로 고치고 그 땔감을 백성들에게 착취하는 바람에 폐단이 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궁도 전부 온돌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3. 작중 간단히 언급되었는데, 이 시기 조선의 대갓집 첩은 그냥 첩이 아니라 어둠의 비서였으며 뇌물의 접수창구이기도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조선 지방관은 가까운 친척 말고는 만날 수 없었으며,(감시도 했음) 부인도 임지에 못 데려가고, 데려간다 하더라도 정실부인은 (양반가니까) 바깥사람과 함부로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첩, 특히 기생 출신은 뒷거래에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정실부인과 달리 남자나 외간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기에 중용되었습니다. 이런 그늘의 보좌 역할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정난정이겠죠.(천첩은 아니지만)
18세기쯤 오면 이것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합니다. 일례로 작중 시점보다 약간 앞, 노론 4대신의 한 명이라 칭해지는 조태채는 각지 지방마다 첩사라고 불리는 집을 두고 첩을 배치해 전국 곳곳에서 뇌물을 빨아먹었다고 하죠.
11.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