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32화 (32/284)

32화

10. 서울 가는 길(2)

서울은 소란스러운 긴장에 가득 차 있었다.

정약용을 예조 참의에 임해 불렀다 하나 조정에 인재가 그리 없어서 정약용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기려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일종의 와일드카드에

가깝고, 지금 강화도 앞바다에 떠 있는 이양선을 처리하는 일은 조정에서도

엄연한 관례가 있다.

실제로 지금 조정은 로크 선장의 선단에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

었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니, 청 황제의 허가 없이 다른 나라와 교역하지 못한다.”

앵무새의 말이 그렇듯 이것도 영국인들의 예상 범위 안에 있는 답변이었다.

로크 선장은 영국인들이 즐겨 쓰는 강철제 허가증을 강화도에 날려줄까 하는

유혹을 꾹 참았다.

대신 그는 유럽인다운 시각에서 조선을 자극하였다.

“언제까지 남의 속국으로 살 생각입니까? 평안도의 항구를 개항하면 영국 함

대가 출입할 수 있고 공관과 거류지를 세우면 영국 신민이 살게 됩니다. 그렇

다면 북경의 황제는 두 번 다시 조선을 깔볼 수 없습니다. 조선의 좋은 친구

인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그런 압제를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거짓말이 아니다. 영국은 (다른 열강의) 압제를 좌시하지 않는다. 그들

이 해방시킨 사람들은 자의로 강대한 영국의 보호하에 속하기를 원할 뿐이다.

솔직히 조선 사람들을 다 바보로 본 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조순이 보

호국(protected state)이라는 말은 몰랐지만, 영국인들의 속셈은 다 짐작할

만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 겨우 저 남쪽에 어촌 몇 개 허락

받아 점포 열고 아편 파는 영국인들이 대청을 이길 수 있다고 떠드는 것도 허

황된 소리였다.

“허허! ‘청과 교우한 지 백 년이 훨씬 넘었고, 강토와 호구는 청을 능가하며

병사로는 천하 만국이 다 덤벼도 따를 수 없다’라, 오랑캐 허풍이 이 정도라

니 웃기지도 않는구먼.”

다만 김조순은 로크 선장보다는 자기 뜻을 숨길 줄 알았다. 그래서 ‘호랑이

쫓자고 승냥이를 불러들이라는 말이냐?’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조신들이라고 청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동방 선비들이 아직껏 숭정 연

호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을 당당히 공표할 수도 없다. 그저 불충한 소리라 꾸

짖어 물리칠 뿐이었다.

충성스러운 번방이 이런 불충불의한 대사를 어찌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고 역마도 정약용 한 사람만을 위해 의주까지 간 것은

아니다.

시준이 정약용도 갸웃할 만큼 멍한 손길로 아무거나 행장에 때려 넣으며, 홍

득주가 그 꼴을 전해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때쯤 성경부에도 그 소식이

도달했다.

“영길리국 놈들이 선황제(건륭제)의 은혜를 어찌 이다지도 저버릴 수 있다는

말이냐! 그놈들의 수작이야 등불 보듯 뻔하지. 처음엔 용천부와 평양 정도로

시작해서 평안도 전체를 집어삼켜 감히 보전(寶殿, 천궁보전. 자금성의 내성)

에 손가락을 겨누려는 셈이다!”

쾌속으로 보고된 급전을 받아든 가경제 역시 어이가 없었다.

천하 만물이 모두 있는 이 대국에서는 원래 무역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거늘,

관중(管仲)이 발조선(發朝鮮)의 무늬 있는 가죽[文皮]을 보물로 대우해 그들

을 입조케 한 것과 같은 이치로 너그러이 보잘것없는 물산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 오랑캐들은 봐주니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모양이었다.

“광주의 그들 상관으로 칙을 내려라. 조선에 간 배는 즉시 돌아오게 할 것이

며, 그동안 영길리국의 무도한 무리는 장사하지 못한다.”

그냥 돌아오라고 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 뻔하니 인질을 잡은 것이다.

광저우 등지의 영국 상관에 대한 봉쇄는 청이 지금 취할 수 있는 가장 강경한

조치였다.

다만, 이미 조선에 배를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동인도 회사가 이 일을 각

오했다는 사실까지는 청이 헤아리지 못했다.

영국에게 있어 중국 무역은 통계에 따라서는 영국 정부 재정 수입의 1/6을 담

당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고, 중국 당국의 변덕에 따라 툭하면 무역

이 방해되는 이 사태는 동인도 회사에게 불안 요소였다.

그래서 이번 조선 일을 이용해 중국에게 압박을 주고,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

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평안도 지방의 매입 같은 것은 중

국이 거부하면 양보한다 치더라도, 조선에 대한 ‘자유 무역’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런저런 고려 끝에 대응 방침은 이미 확립되었다. 영국인들은 백 년이 넘게

당해 온 중국 관리들의 수작을 그대로 배워 되돌려주었다.

“엥? 조선에 우리 회사 배가 갔다고요? 난 못 들었는데?”

“아니, 내 소관이 아니라서……. 우린 모르는 일이오. 저기 가 보시오.”

“어라, 아까 그분이네. 어이쿠, 아니, 점잖으신 분이 왜 소리를 지르시고. 여

기 앉아서 한 대 피우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시죠. 틀림없는 파트나 진품입니다.”

“상관을 닫는다고요? 아니,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나리. 진짜 우린 모른다니

까요. 어디 해적놈들이 영국 왕실의 의지를 사칭했겠지요. 우리가 안 지도 몇

년인데 확실치 않은 일로 이리 강짜를 부리시면 섭섭합니다.”

“에이, 꼭 그렇게 야만적으로 군사 풀어 사람들 놀라게 해야 되겠습니까. 저

기 북경에도 저희 아는 어른들이 있는데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헤

헤, 파총(把摠) 나리. 그러지 마시고 일단 오늘은 돌아가셔서 다시 알아보시

죠. 이봐, 먼 길 오신 손님 그냥 보낼 참이야? 한 상자 챙겨드려야지!”

영국인의 음습한 취향에 대충 맞는 즐거운 일이긴 했으나, 이는 본래 영국의

방식이 아니다.

사실 영국이라면 이런 기나긴 술래잡기는 필요가 없다. 그냥 하던 대로 대포

로 초토화시키고 땅과 돈이며 사람에 황제의 사과문까지 뜯어내면 그만이다.

이제 광저우나 마카오 등지에는 유럽 세력도 별로 없다. 비실대는 포르투갈이

야 오래전부터 자력갱생 상태이니 적당히 협상하면 되고 프랑스의 경우는 언

급할 가치도 없다.

이럴 때 ‘불운한 사고’가 일어났으면 딱 좋겠다는 것이 영국인들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해군이 없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상

사 직원들의 일반적인 애로에 마주해야 했다. 거래처 상대방이 더러워도 굽실

거리며 비위 맞춰주고 시선을 돌리는 그런 일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욕지기나는 아시아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은 영국인

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편 장수들에게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을까마는 아무튼 하느님과 국왕의 이름으로 굴욕은 감내할 수 없었다.

영국인들의 인내심은 곧 떨어졌다. 다행인 것은, 마침 중국인들의 인내심도

비슷한 시점에 바닥난 것 같았다는 것이다.

“감독관님. 중국 놈들이 눈치를 챈 것 같은데 어쩌죠? 우(Wu) 총독(당시 양광

총독(兩廣總督) 오능광(吳能光)을 말한다)이 최후통첩을 보냈다는데요. 당장

조선에서 꺼지지 않으면 8만의 군대를 광저우에 모아서 토벌하겠답니다!”

“야, 너 몇 년 됐어? 중국 놈들 허풍을 아직도 믿냐? 일전에도 그놈들은 주둥

이로만 몇십만을 운운하면서 기껏 한 일은 밥 안 준 것밖에 없어. 그 새끼 분

명히 황제 허락도 안 받은 상태야. 페킹의 그 미친 페르시아 궁전 같은 의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앞으로 한 달은 걸린다. 신경 쓸 것 없어!”

영국은 사실 영국이니만큼 그 전에도 마카오를 노린 적이 있다. 핑계도 1808

년과 똑같았다. 프랑스가 마카오를 점령하려 하니 영국이 보호해 주겠다는 것

이다.

허나 그 1802년의 위기 때 청 정부는 영국 군함 6척에 대해 별다른 군사적 대

응을 하지 못했다. 마침 아미앵 조약을 맺은 영국이 얌전히 철수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 그럼 어떻게…….”

“버텨! 여기에서도 져 주면 이제 동인도 회사 아시아 무역은 끝이야! 그리고

마드라스에서 함대 더 오라고 전한 건 틀림없이 되었나? 오스트레일리아나 세

인트헬레나로 갈 함선도 여기로 돌려!”

“해, 해군은 정말 안 올까요?”

“이 멍청아. 망할 코르시카 촌뜨기가 칼레에서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해군

이 여기 어떻게 와!”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젊은 사람 하나가 참견했다. 이제 상인으로 변신한 윌

리엄 자딘 그 사람이었다.

“아뇨. 감독관님, 못 들으셨나 본데, 프랑스 놈들이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침

공하려고 준비하는 바람에 고아(Goa)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독점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아시아 상선 명의로만 환

적 운행하는 반 밀무역상으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조선의 일이 연관되어 있으

니만큼 이번 사건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려면 당연히 동인도 회사의 양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 무법

지대에서 서류 내밀고 우린 죄 없다고 뻔뻔히 대들다가는 그 자리에서 정말

죄도 목숨도 없어질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윌리엄 자딘은 동인도 회사와도 최소한 겉으로는 우호적인 연결고리를

유지하며 협업차 드나들고 있었다.

“안나미즈(Annamese, 베트남인) 해적들이 프랑스인과 작당하여 상선을 습격한

지 오래되었지요. 따지고 보면 1802년의 일도 그것 때문이고요. 윌리엄 드루

리(William O'Bryen Drury) 제독이 HMS 파워풀(Powerful)을 이끌고 자롱(Gia

Long) 황제와 협상하러 갔습니다. 그 일이 마무리될 때가 되었으니 반드시 여

기 올 겁니다.”

그 말에 감독관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인도 회사의 비밀 부서에서

긴밀히 보고된 이 내용을 그는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이 풋내기 무역상이 어떻게 자기보다 자세히 아는지 궁금했다.

조선과는 관계없지만 당시 원 역사에서 동인도 회사는 포르투갈 마카오 총독

부에 대해 ‘더욱 존경할 만한 방비태세(more respectable state of defence)’

를 요구했다. 다 망한 포르투갈의 사정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는 게 아

쉬웠다.

당시 나폴레옹의 의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영국인들은 프랑스가

마카오를 점령할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다.

변방에 있는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모르고 있었을 뿐, 올해 여름, 그러니까

바로 지금 나폴레옹이 이베리아를 침공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때려 엎어

버렸으니 나폴레옹이 아시아에서도 베트남과 연합한 프랑스 해적을 움직여 마

카오를 공격하려 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 둘 다 무시하고 있지만 마카오는 엄연히 포르투갈 땅

이라는 사실이다.

허나 지금 ‘야, 너 지금 무슨 짓 하려는 거야? 마카오 점령이지? 그런 거지?

중국에 원군 요청한다?’라며 미친 듯이 서한을 날려대고 있는 총독 베르나르

도 알렉시오(Bernardo Aleixo de Lemos Faria)의 입장 따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 너희 지금부터 잘 들어. 중국 놈들이 무슨 말을 하건 무시해! 순양함 선

단이면 여기 있는 정크선 따위 죄다 쓸어버릴 수 있어. 알겠나? 중국 놈들 피

해서 화약 실어 두고, 어차피 그놈들 기아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식량과 물은 최대한 끌어모아 둬! 뭐 해? 움직여!”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준비를 마치고 나자 진짜로 파워풀호가 도착했다. 윌리

엄 자딘은 드루리 제독과 안면이 있는지, 먼저 나가서 그를 반갑게 맞았다.

드루리 제독은 활달한 오만함이 돋보이는 젊은 군인이었다. 특유의 까칠한 성

격 때문에 여러 군데에서 마찰이 있다가 동인도 회사 파견 해군 사령관으로

오게 되었지만 딱히 반성하는 기미는 없어 보였다.

“오셨군요, 제독.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안남에서의 일은 잘 되셨습니까?”

그런데 파워풀호는 이름과 달리 어째 별로 강력(powerful)해 보이지 않았다.

수병들이 매우 지쳐 보이고 배도 여기저기 깨진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지적

하는 일은 신사의 예의가 아니다.

자딘은 겸손하게 ‘대승이었소.’라는 말을 기대했다. 하지만 드루리 제독은 약

간 멈칫했다.

“흥. 비겁한 야만족들이 기습해서 배에 약간의 손상이 있지만, 결국 그놈들에

게 교훈을 주고 왔소. 뭐, 더 신경 쓸 건 없소. 마카오에서 보급을 좀 하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오.”

감독관과 윌리엄 자딘을 비롯해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

을 했다.

‘이 새끼, 설마 졌냐?’

1808년, 베트남 해군과 맞붙은 영국 해군은 자롱 황제의 해군에게 패배한다.

기적 같은 승리라고 말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 될 터. 실제 당시

프랑스의 조언을 얻고 우수한 현지 기술자들의 역설계를 통해 만들어진 베트

남 해군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대, 최강, 최신이었다.

1801년 기준으로 대포 수십 문을 탑재한, 전함이라고 불리는 물건만 무려 54

척. 그중에서 전열함만 해도 14척이고 나머지도 슬루프함으로 아시아에서는

맞설 배가 별로 없다. 영국 해군이라 해도 본격적으로 작정하지 않는 이상 일

개 지방함대로 압도하기에는 좀 무리다.

그러나 이건 현대의 분석이고, 영국인들이 아시아 야만족들의 함대에 패배한

일은 당시의 시선에서 치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드루리 제독은 자신이 적

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이탈하였다고 강조했지만 좀 긴 문장으로 말한다고

해서 패배가 승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거라도 아쉬운 게 현재 광저우의 상황이다. 베트남에선 패배했을지

라도 여전히 여기에선 쓸 만할 터. 그래서 아무도 드루리 제독에게 패배자는

꺼져 버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에 힘입어, 드루리 제독은 힘차게 선언했다.

“얘기는 들었소. 중국 황제가 안남 해군을 믿고 있나 본데 내가 있는 이상 어

림없지. 여기에서 마카오를 확고부동한 기지로 삼는다면 프랑스 놈들의 야망

을 좌절시키고 중국인들이 넘볼 수 없는 영토를 마련하며, 동시에 이 바다의

해적을 격멸시킬 기지를 얻는 셈이오. 다 내가 생각해 둔 작전이 있으니 회사

에서는 편의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윌리엄 드루리 제독은 이 패배 이후 거의 곧바로 마카오에

영국군을 상륙시키는데, 정치적 필요도 있었겠지만 추격해 올 베트남 해군을

맞이할 안정적 기지가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드루리의 함대 하나만 믿고 여태 중국인에게 배짱 부렸던 동인도 회사는 불안

하게나마 여기에 걸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 회사가 해군을 싫어한다 해도 지

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다.

다만 엄연히 부외자인 윌리엄 자딘은 헛웃음을 지을 여유 정도는 가지는 것이

가능했다.

‘조선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건가. 의외로 조선이 청 정부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한가 본데……. 알아둬야겠어. 존 로크 선장이 돌아오면 다음엔 나도 태워

달라고 접선하는 게 좋겠군.’

본래 진짜로 광저우에 8만 군을 집결시킨 청 정부의 대응 때문에 영국이 물러

나는 걸로 끝났을 1808년의 마카오 점령은, 사소한 변화에 의해 동인도 회사

가 강경하게 나옴으로써 그 뒤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자딘의 생각과 달리, 자기 때문에 광저우에서 웬 뜬금없는 중국 대 영국의 전

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조선에서는 청의

미친 듯한 생색이 짜증 났다.

<동쪽의 번방이 놀라고 황망하여 위에 아뢰는 일은 황제께서 잘 알았다고 답

하셨습니다. 이에 영길리국 사람들에게 즉각 물러나라 명하셨으니 뒤는 걱정

할 것이 없습니다. 아! 우리 천자의 은혜가 마치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와 같

으니 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

김조순은 거기까지 보고 예부의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청 황제의 칙

서도 있었다.

“요즘 좀 피로하군. 그래서 뭘 달라던가? 돈인가, 땅인가?”

금지된 물건을 사들인 죄 때문에 올여름 파직되어서 돌아온 재자관 김성채(金

成采)는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황제의 칙서와 예부의 자문을 모두 무사히 갖

고 나왔다는 능력을 영안부원군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예부에서는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어서, 올 동지사(冬至使)에는 반드시

특별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도 원본은 도저히 가

지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가 수역관(首譯官)과 함께 정말로 사정사정

하였지요. 아, 그런데 서반(序班, 벼슬 이름)이 뇌물 받으려고 책문까지 눈치

없이 따라오는 바람에 산통 다 깰 뻔하고…….”

칙서란 사방에 공표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 공문서를 내돌리기 싫은 것은

어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그것이 공개되어도 마땅한 것인지 아닌지는 기준이 아니다. 일단 무

조건 비공개하면 나중에 책임질 일은 없으니 그쪽 판단이 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조선은 칙서를 받아오기 위해 뇌물을 주는 희한한 일을 자주 해야 했

다. 뻔한 말을 다 들어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김조순은 말을 끊었다.

“그래. 수고했네. 그래서 그 특별한 감사가 뭐냐고 묻는 걸세.”

“……신도(薪島, 장자도)에 영길리국 배가 표류해 오던 것이 모든 사달이 난 원

인이니, 거기에 향후로 녹영(綠營)의 거진(巨鎭)을 두어 조선을 지켜 주겠다

고 합니다.”

김조순은 심호흡을 했다. ‘개나 소나 평안도가 제 땅인 줄 아는구나!’라고 외

치면서 옆에 있는 것을 후려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청이 설마 이렇게 무도한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이 말뜻은 동지사에서 장자

도의 할양 여부를 협상하자는 얘기. 적어도 겨울이 오기 전까지 영국 함대를

물러가게 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별수가 없어 청에 보고하기는 했으나 진짜로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청 황제의 칙령 때문에 영국인들이 돌아간다면, 조선으로서는 장자도를 내어

주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곧 김조순의 실각을 의미한다.

‘박윤수의 충심 어린 진언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의 밀항을 방치한 결과’가 이

것이기 때문이다. 앉은 채 탁자에 머리를 반쯤 박은 김조순은 신음처럼 말했다.

“정약용은 어디쯤 왔나.”

“예?”

“정약용이 지금 어디쯤 왔냐고! 아직 아니야. 저놈들이 천자의 말이라고 들어

처먹을 리가 없어. 실제로 전혀 떠나지 않고 있잖나. 우리가 물러가게 하면

돼. 정약용이 벽제역을 지나치면 바로 알려. 그 영길리국 사람과 잘 안다는

제자도 반드시 같이!”

김성채가 여기에서 ‘어라, 그건 제 업무가 아닌데요?’라고 할 만큼 멍청하지

는 않았다. 그는 부리나케 뛰어나가 빨리 자신의 일거리를 떠넘길 다른 관헌

을 찾기 시작했다.

김조순은 헐떡거리며 서안을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박윤수처럼 전 수군을 몰

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저 웃기는 해적 떼거리를 모조리 수장시키자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성공한다 해도 나라가 망한다. 그는 조선의 훈련대장이며 비변

사의 제조였다. 김조순은 자기 자신을 계속하여 꾸짖은 끝에 결국 평정을 회

복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갈았다. 영길리국 놈들이 동방을 깔보는 것이 매우 심했다.

지금까지는 저쪽이 그리 해를 끼친 바 없이 무례할 뿐이므로 피를 흘리고 싶

지 않았던 것이지, 조선의 힘은 일개 무장 상선단 따위에 굴복할 만큼 약하지

않다. 4백 년을 버텨 온 저력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나라는 20만 왜군의 침범에도 결국 이겨내었고, 되놈들이 남한산성을 에

워쌌을 때도 사직만은 보존했다. 고작 큰 배 하나 믿고 언제까지 떵떵거릴 수

있을 줄 아느냐.”

임진년과 정유년 왜군을 막은 것은 아무리 인색하게 쳐도 반은 명나라 만력제

의 공이요, 병자년의 여진족 군대를 물러가게 한 것도 군병이 아니라 인조의

유연한 척추 및 경추였지만, 아무튼 저리 표현해 놓으니 김조순도 스스로 설

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김조순은 즉시 왕과 대면했다. 이공 또한 지금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사감은

잠시 접어 두었으며, 김조순 역시 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훈련도감 군사를

움직이자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 협의의 결과는 곧 얼마 전 복직한 총융사(摠戎使) 이인수(李仁秀)가 입시

하는 것이었다. 이공은 자기도 믿지 않는 말로 유시했다.

“저 오랑캐놈들이 군왕과 나라를 깔보는 바가 매우 심하다. 충무공(忠武公)의

자손인 그대에게 기대하겠다.”

이인수가 부하들을 단속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7대조에게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 확실했다. 애초에 일전 파직된 것이 부하가 당시 좌의정 서용보를 모욕

한 것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였고, 원 역사에서는 얼마 안 있다가 또 부하

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고 삭직된다.

하지만 그의 경력상 장재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삼

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하여 해전의 지식도 해박하다.

이인수 역시 정해진 답을 말했다.

“신이 충무공에 비하면 한없이 불초하오나, 마땅히 힘을 다하겠습니다.”

끈질기게 배만 바꿔다가 왐포아를 왔다 갔다 하며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하는

동인도 회사에 대해, 드디어 인내심이 사라진 조선은 총융청 군사 30개 초

(哨)를 강화도에 급파했다.

과거 장용외영에 복속되었다가 다시 장용영이 사라지며 돌아왔다가 하는 풍파

끝에 조직이 걸레가 된 총융청으로서는 거의 전군이다.

전라우수영과 충청수영, 황해수영의 군함도 태세를 갖추라는 – 차마 나가 싸

우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 명이 떨어졌다.

비실비실하고 약하다고 너무 심하게 놀리면 순한 사람도 벌컥 화내면서 한 대

후려칠 수 있는 법이다. 조선은 영국의 도를 넘은 무시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점, 정약용이 인솔하는 정시준 이하 제자들은 서울 근교까지 다

다랐다.

작가의 말

1. 1808년, 윌리엄 오브라이언 드루리 제독은 베트남 해군에게 패배한 후 300명의 세포이 및 영국 해군을 동원해 마카오를 일시 점령하고, 중국의 압박에 11월경 철수합니다.

다만 이때는 조선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만 빼면 거의 당대 역사와 같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황과 전개 등은 호주 국립대학 고등연구소(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Advanced Studies) '아시안 히스토리' 2004년 12월 발간 28호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2. 파워풀 호는 정말로 드루리 제독의 배였습니다. 저도 어떻게 배 이름이 파워풀;; 이라 생각하면서 잠깐 아연했지요. 다만, 마카오 상륙전에 참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역사대로라면, 드루리 제독은 4년쯤 뒤 원인 불명의 급사를 하게 되지요. 워낙 적이 많았던 사람이라 사망 동기는 의문이라고 합니다.

2. 베트남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당대 아시아 최선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건설했습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군 근대화 시도 사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작중에서는 해군만 나왔지만, 자롱 황제는 유명한 사이공 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육군 제도도 함께 도입했습니다. 군대의 근대화가 꼭 식민지화를 피하는 길은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례로도 제시되고 있죠.

11.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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