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10. 서울 가는 길(1)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정약용은 시준이 막 뭔가 다른 반대 의견을 꺼내
려는 순간 그 말을 잡아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아직 관례(冠禮)를 하지 않았구나.”
“상놈이 관례가 웬 말입니까.”
시준이 입이 나와 그렇게 쏘자 정약용은 웃었다.
“나라의 법에는 양천(良賤)의 분별만이 있을 뿐이다. 혼인은 좀 미루더라도
네가 이제 자신의 뜻을 편 지도 오래되었으니 능히 관을 쓸 만하다. 지금 서
울 가는 일이 급하기는 해도, 내 스승으로서 대례를 챙기지 못한다면 어찌 글
을 가르쳤다 하겠느냐?”
시준은 지금까지 배운 예서를 재빨리 검토하여 잔머리를 굴렸다. 관례는 길일
을 택하는데, 정월에 하지 못하면 사월이나 칠월 초하루에 한다. 그리고 지금
4월은 이미 지났으며 7월은 많이 남았다.
‘그럼 아쉽지만 양부인 홍득주에게 관례를 맡겨야 하니 의주에 남겠다고 한다
면…….’
하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었다. 정약용이 그 정도를 생각하지 못할
리 없다.
“관례는 서울에서 여러 학식 높은 선비들을 증인으로 모시고 하도록 내가 꼭
주선하겠다.”
시준의 인상이 구겨졌다.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곧 정약용의 진짜 목적이 드
러났다.
“허나 상감을 뵐지도 모르니 먼저 명자(名字)와 의관은 권도로써 정히 하여야
한다. 내가 그간 죽 생각해 왔던 것인데 여기에서 내가 사제의 의리로 너에게
이름[字]을 지어 주마.”
갑자기 관례 운운하더니 그것을 위해서였다. 하긴 시준도 자기의 참 상놈 같
은 아명이 어전이나 조정에서 불리면 좀 창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시준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게 된 뒤에는 그 토속적이기 짝이 없는
이름 안 부르고 서장관이라 불러 주지 않았던가.
정약용은 부엌에 때기 위해 쌓아 뒀던 나뭇짐[柴]을 바라보았다. 삐죽삐죽한
나뭇가지 위로 달빛이 드리워지니 운치 있는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였다.
“공자의 제자 중 혈통이 고귀하지만 학문이 엷다 일컬어지는 자로 제나라 사
람 공성후(共城侯)가 있는데 이름을 시(柴)라 한다. 공자는 그가 비읍(費邑)
의 재(宰) 벼슬 하였을 때 사람을 그르쳤다며 탄식하였으나, 나는 그 일을 맡
긴 자로(子路)의 대든 말이 옳다고 본다. 인민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새삼
책을 깊이 읽어야만 학문을 아는 자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이때 자로와 더 말도 하기 싫었는지 “이래서 나는 원래부터 주둥이 잘
터는 놈이 싫었어.”로 대꾸하고 말아 버린다. 어떻게 보면 반박할 말이 없었
다고도 볼 수 있다.
시준이 전생에서의 자기 이름을 떠올리고 굳어 있는 동안, 정약용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관솔 하나를 들어 달에 비추어 보았다.
“나무 중 으뜸이라는 소나무는 가파른 산에서 자란다. 가파르다[埈, 준]는 뜻
은 천천히 걸어야[夋] 하는 땅[土]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벽에서 걸음을 조심
하듯 삼가고 또 삼가며 수양하는 사람[人]을 뛰어나다[俊, 준]고 평한다.”
시(柴)와 준(俊). 조선에 온 뒤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전생의 이름이다.
시준은 이 상황이 어떤 우주적 농담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약용이 여
기에서 고개를 돌렸다면 울 것 같은 제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제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 감히 성현의 뒷이야기를 들추어보건대 고시(高柴, 공성후)는 실사에 뛰어
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공자가 그를 둔하다 여긴 꾸짖음 또한 명심하고
한껏 정진하여 다른 반가의 동량들도 미치지 못할 사람이 되거라. 이로써 너
에게 나는 시준(柴俊)이라는 이름을 주겠다.”
이제 그는 사회적 이름, 자(字)를 얻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 설사 연장자
라고 하더라도 – 공무가 아닌 이상 그의 조선식 본명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피하고 정시준(鄭柴俊)이라 불러 줄 것이다.
시준은 이 순간만큼은 의주 청바지도, 감자도, 금광 사업도, 그리고 포르노
소설도 잊어버렸다. 그는 얼른 눈물을 닦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 이 은혜는 부모만큼이나 깊으니, 제
자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조선에 와서 폭력과 협잡 속에서 지낸 15년,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 해보는 진
심 어린 말이었다.
진심을 부정하려는 치기 어린 생각을 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바로 어
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뭇짐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두꺼비와 뭔가 끼니 할 것 있을까 하는 느낌
에 이엉 위로 조용히 앉아 있었던 올빼미 정도만이 증인으로 참석한, 두 사람
만의 관례는 그렇게 끝났다.
원 역사의 정약용은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제자나 지인들과 함께
유명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다.
선비들 모임이야 한두 개가 아니지마는, 원래 사람이 모이면 아무리 고상하고
우아한 선비들이라도 별수 없이 돈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여기에 대해 자세한 합의가 없으면, 현대의 준비되지 않은 친구 모임 같은 것
이 그렇듯 대충 만만한 사람들에게 잡일이 암묵적으로 떠넘겨지다가 모임이
와해되거나 분란이 일어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은 조선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야, 너 삼겹
살 가져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미안. 내가 지금 나가서 사 올게. 마트가
어디 있더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그런 명백한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신계의 절
목(節目)에는 현대의 세부 사무규정이나 예산 집행지침 뺨치는 자세한 규칙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 만신계(彎信契)도 마찬가지였다.
희만당 제자 중에는 의주가 고향이고 여기에 생업과 가족이 있어 남는 사람도
많았다. 시준도 솔직히 남아야 하겠지만 정약용이 억지로 끌고 오는 것에 가깝다.
정약용은 다음 날 아침 그런 제자들을 모아 놓고 역할을 분배했다.
“……해서, 백윤구(白潤九) 등 이 의주 사람 5인이 동지(冬至)가 오기 전까지
초당의 이엉을 해서 얹어라. 만약 그렇지 아니하거든 이듬해 봄 모임은 그들
이 오로지 준비하며 다른 사람은 거들 필요 없다. 단, 나머지 외지에 있을 이
유회(李維會, 이강회의 형), 이강회 등은 매년 계전(契錢, 곗돈)에 3냥씩 반
드시 보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거꾸로 이들이 그 일을 맡는다.”
본래 생선이나 차 등속을 준비하는 잡일도 있었지만, 그런 건 이제 형 따라
서울 안 돌아가고 의주에 남는 정약횡이 대어 주기로 했다. 정약횡이 없어지
면 의주의 의료복지가 추락할 판이니 어쩔 수 없다.
정약용은 그 절목을 의주에 남아 있는 제자 중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백윤구
에게 맡겼다. 나이도 제자 중 최연장자인 백윤구는 과연 그 무게에 어울리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제 떠나시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제자들이 비록 공자를 따
라 열국을 주유한 칠십자(七十子)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저 길리시단의 말
한마디에 부모를 버리고 따라나선 어부 형제(베드로와 안드레아)보다 신의만
은 어찌 깊지 못하겠습니까? 부디 저희도 선생님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차후 『삼성기(三聖紀)』를 계연수(桂延壽)에게 전했다고 하는 백관묵(白寬
默)이 이 사람의 아들이다. 계연수나 삼성기, 그리고 『환단고기(桓檀古記)』
모두 진실성이 의심되는 만큼 백관묵의 일도 진짜인지 미심쩍긴 하지만, 백관
묵이라는 사람과 이 가문 자체는 실존했다.
그것도 대대로 이 지역의 명문 무가인 태인(泰仁) 백씨 가문의 장손이다. 그
러므로 고향 버리고 정약용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몸에 밴 예절의 표현이지 정
말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다.
군사부일체라 하여도 가문을 지탱하는 것은 조선 사람들의 최우선 사항이다.
부모가 죽으면 아무리 절실한 군주도 신하의 사직을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으
며, 이걸 어긴 왕은 저 전설적인 악덕고용주 세종을 포함해도 정말 드물다.
정약용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형식상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의 학문 또한 공부자(孔夫子)에 미치지 못하고 괴력(怪力)을 보임은 길리
시단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런 일을 허락하겠느냐? 또 내가 너희에게 사교
의 책 일부를 전수함은 그것을 따르라는 뜻이 아니라 차후 외국에서 올 사교
도들의 현혹하는 말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므로, 너희는 앞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 근본이 갖추
어지지 않은 학문은 다 쓸 데가 없느니라.”
서양 학문을 가르치느라고 성경도 강의에 넣을 수밖에 없긴 하였으나, 두 번
다시 사교도로 몰려서는 안 되는 정약용은 그렇게 제자들을 단속했다.
“이번에 데리고 가는 아이들은 인보(夤甫, 이유회)나 굉보(이강회)처럼 고향
이 남쪽이거나, 따로 처자나 부모가 없어 먼 길을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이다.
내가 누구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른 것이니 너희는 괴이쩍게 여기
지 마라.”
백윤구도 동의했다.
“인보나 굉보는 명가의 자손으로 학문을 익힌 자로서 마땅히 고향에 한 번 가
보아야 하겠고, 그 상인(商人) 제자도 본래 돌아다니는 것이 업이니 먼 길에
선생님을 요긴하게 모실 수 있겠지요.”
시준은 그 출신 때문에 다른 선비 제자들의 질투를 많이 받고 있었다. 허나
원래 강자는 악의에 둔감한 법. 시준은 돈이 많으므로 선비 자제들이 자신을
깔보든지 말든지 잘 알지도 못했다.
정약용은 다소 엄하게 말했다.
“그가 연치는 어리나 가장 먼저 이 학당에 들어 너희 모두의 선배가 되는 제
자[首弟子]이다. 나중에 필히 대성할 인재이니 너희는 그를 장사한다 하여 깔
보아서는 아니 된다. 자공(子貢)도 장사꾼이었지만, 십철(十哲)에서 안연(顏
淵)의 버금 자리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가?”
암암리에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정약용이 시준을 수제자라고 공언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백윤구는 정약용이 쓴 호칭에 유의했다.
정약용은 처음으로 ‘그 아이’라던가 아명을 쓰지 않았다. 정약용은 시준이 정
식으로 스승에게 성인으로서 인정받고 이름을 얻었음을 공표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절개도 없으면서 몸을 누추한
오막살이에 감추고, 명아주나 비름의 껍질로 배를 채우며, 부모와 처자식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는 언필칭 선비가 많다. 벗이 찾아와도 술 한 잔 권할 수
없으며, 명절에도 처마 끝에 고기 하나 걸려 있지 않고, 오직 빚쟁이들만 대
문을 두드리며 꾸짖고 있으니,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졸렬한 것으로 지혜로운
선비는 하지 않을 일이다. 너희는 오히려 부모 없이도 그 생업 열심히 하는
바를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그 연후에야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니라.”
백윤구도 그리 소견머리 없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쯤에서 인정하고 고개를 끄
덕였다.
“실로 제자의 말이 우둔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같이 떠
난다 하여도 이 자리에는 마땅히 참석하여야 할 텐데요.”
“나도 그리하고 싶었지만 왕명이 급하니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룰 수밖에. 인
보나 굉보처럼 그 아이도 주변을 급히 정리하고 물정 어두운 스승 먼 길 갈
채비를 대신하고 있어서 올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 정약용은 다시 평소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둘러
보았다. 특출난 재주를 가지고 정약용과도 친밀한 시준이나 이유회, 이강회
형제가 아니라도 모두 그가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너희는 한나라 고조가 밖으로는 팽월과 영포를 데리고 갔어도 안으로는 소하
를 믿고 있었음을 명심하고, 언젠가 내가 걸해하여 돌아올 이 희만당 보살피
기를 게을리하지 말아 다오.”
“예. 선생님.”
정약용은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정약용의 믿음과 달리 시준은 지금
스승의 먼 길을 힘써 준비하기보다는 자기 가산 정리에 바빴으니까.
밤의 감동도 잠시, 아침이 되자 시준의 머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시준은 상단
의 자기 세력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부피가 큰 인맥 관리를 맡기고, 나머
지는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급하게 금은으로 바꾸었다.
금은점이 대성하고 있는 평안도, 그리고 그 사업의 중심지 의주라서 반나절
만에 가능한 일이었다. 짭짤한 거래를 마친 홍득주가 양자를 기꺼이 보내주기
로 하자 시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서울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여기 사업을 남겨 둬선 안 돼.’
전화로 사업을 지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남겨 둬 봐야 시준이 돌아올 때
쯤엔 홀랑 사라져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애당초 시준이 열다섯에 의주 뜰
생각뿐이어서 상당수의 재산은 이미 현금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을 자기만 아는 곳에 잘 숨겨둔 시준은 홍득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
다. 덕담도 겸한 충언이었다.
“저는 이제 서울 가지만, 보살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 계책을 올리겠으니 들어 주십시오.”
“오냐. 네 말이라면 어찌 듣지 않겠느냐.”
“첫째로, 홍경래 그자는 상에 항상 살기가 있고 품은 뜻이 작지 않으니 나중
에 필시 난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제가 그 일을 마무리 짓지는 못하나, 장주
님께서는 홍경래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주시되 만약 그자가 손아귀
를 벗어나거든 빨리 국가에 충심을 보이십시오.”
원 역사에서 홍득주의 행보와 같다. 홍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제 희만당 제자 중 영길리 말 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영길리국 배가 또
오더라도 능히 통할 것입니다. 표착한 자를 구휼하는 예는 잃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금광 경영이며 의복과 서책 만드는 일도 백성에게 도움 되는 일로서
위로 관에 복종하고 아래로 덕을 쌓는 일이니 자식으로서는 권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밀무역이며 포르노 산업, 금광 노동착취를 계속하라는 의미다. 그래야 돈뿐만
아니라 평안도 여러 군데의 판로와 인맥을 움켜쥘 수 있다. 시준이 홍득주와
임상옥에게 넘긴 모자 산업도 포함이다.
“알겠다. 내 명심하마.”
홍득주가 돈을 좋아할 뿐이지 사람이 악한 건 아니라서 그도 아쉽다는 듯이
양자를 위로했다.
“네가 서울 가면 또 어디 좋은 일이 없겠느냐. 다만 차후 문상(門商, 만상의
풍습으로, 급여 대신 재산을 갈라 따로 가게 차려 주던 일 또는 그 상인) 되
기 전에 너 장가나 보내려고 했는데 일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구나.”
시준은 또 나온 장가 얘기에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홍득주가 지나가는 말처
럼 쐐기를 박았다.
“떠나기 전에 지유나 보고 가거라. 너 서울 간다고 어찌나 울던지 나로서는
달랠 수가 없었다.”
“예? 지유요? 설마…….”
시준이 말한 ‘설마’는 ‘설마 정약용과 얘기한 상대라는 게 걔냐’라는 말이었
지만, 홍득주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곡해하는 노련한 말재주로
그것을 구부러뜨렸다.
“설마라니. 너희가 어릴 때부터 남매와도 같이 자랐는데 서운하지 않으면 그
게 사람이겠느냐. 아무튼 얼굴이라도 꼭 보고 가야 하리.”
시준은 그 말대로 자신과 지유는 친척 양남매간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시준은 자기 성이 아직도 홍씨는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들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대접하기도 했으나, 홍득주는 굳이 시준을 호적에
까지 올리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유와 결혼하는 데에도 문제는 없다.
법이 아니라 시준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소꿉친구 필승론이야 만화 얘기일
뿐, 시준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람과 혼인한다는 게 낯설고 버성겼을 뿐
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가정을 차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시준은 갑자기 서울에서 두고두고 살 꿈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의주만 뜨면 되지 않는가. 홍경래의 난을 피하려면 서울보다 안전한 곳도 크
게 없다.
‘3년, 아니, 안전하게 5년 정도면 되려나? 그러면 지유도 그냥 시집가겠지?’
그렇게 결심을 굳힌 시준이었지만, 곧 나와서 만난 지유는 퉁퉁 부은 그 눈만
으로도 시준의 결심을 흔들리게 했다.
집 뒤 무성하게 자란 싸리나무 울타리 뒤에서, 지유는 시준을 붙잡고 꺼이꺼
이 울었다.
“그러게 왜 장사꾼이 팔자에도 없는 선비 제자 같은 건 해가지고 서울까지 불
려가니. 으응? 언제 와?”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아마 선생님도 서울에서 자리 잡고
하시면 나도 명절 핑계하여 고향에 올 수 있겠지. 한두 해 걸리려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준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그러면 다시 여기서 사는 거야?”
시준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지. 혹시 나랏님 명이 있으면 서울에 있어야 할지도.”
“그냥 냅다 내빼서 와. 나랏님이 뭐 대수야?”
“……너 그런 말 함부로 다른 데서 하면 안 된다.”
역시 지유도 의주 만상이었다. 시준은 넌더리를 내며 의주 덧옷(조끼) 주머니
를 뒤져 손에 잡히는 걸 꺼냈다.
“네가 시집가서 애 낳는 것도 다 보고 해야 하는데 서운하구나. 이건 얼마 안
되지만 혼수 밑천 하고, 나중에 꼭 다시 보자. 아, 그때는 조신한 안방 새댁
이 되어 있을 테니 얼굴은 못 볼지도 모르겠네.”
강철같이 평정을 유지한 시준은 홍득주에게 했던 말을 지유에게도 반복했다.
“나 없는 사이 난리라도 나거든, 도망치든 숨어있든 장주님 말을 틀림없이 따
라야 해. 네 기침약도 내 방에 많이 걸러 놓았다. 봄마다 꼭 먹어라.”
지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다만 이번에는 슬픔이 아니라 다른 감정 때
문이었다. 지유는 손에 들고 있던 머릿수건으로 시준의 가슴팍을 되게 후려쳤다.
“이 바보야! 누가 이런 게 필요하대? 누가 시집간댔냐고!”
“어?”
시준이 떨어뜨린 사금 주머니를 낚아챈 지유는 비틀대던 시준의 품에 뛰어들
었다. 그녀는 시준의 가슴에 이마를 세게 누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책을 그렇게 읽으면 뭐하니. 개뿔도 모르는데. 잔말하지 말고 어서 갔다 와.
이건 내가 너 올 때까지 쓰지 않고 갖고 있을 테야.”
지유는 고개를 홱 들어 다잡듯 시준을 올려다보았다. 시준도 그런 지유를 피
하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세상에는 나중에 후회하면서도, 그때로 돌아가면 반드시 똑같은 짓을 저지르
고야 말리라 확신하는 일들이 있다. 사람이 그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것
은 착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 역시 지유의 입에서 자기 입술을 떼고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
는지 알 수 있었다.
멈춰 버린 시간, 자기 맥박 소리만이 기이하게 들리고 시야가 극도로 축소되
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첫 입맞춤을 겪어 본 모든 사람에게 그리운 느낌이다.
시준은 전생에서 연애도 적잖게 해 본 자기가 왜 이런 중학생 같은 짓을 하였
는가에 대해 심각한 자괴감을 느꼈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만큼 육
체도 정신에 영향을 주며, 자기 나이가 딱 열다섯 살이라는 것은 무시한 생각
이었다.
“……너, 서울 갔다고 바람만 들어서 여우 같은 색시나 얻어다가 오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처음 입을 다시 연 것은 지유였다. 다행히 그 말에 시준도 조금 여유를 찾았다.
“아하하, 천 리를 걷는 동안 선생님 수발이나 들어야 하는데 그 고생길에 무
슨 여자가 있다는 말이냐? 걱정 마라. 다 시커먼 장정들뿐이란다. 아, 기랑이
는 그래도 시커멓지는 않나.”
지유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 숙인 채 도망가 버렸다. 반면 시준은 약간 가벼워
진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굳이 따라간다고 나선 기랑이까지 해서 사내놈만 대체
몇 명이야. 어휴. 냄새나겠다. 비누라도 많이 싸가야겠어. 기랑이 놈, 이번엔
꼭 씻기고 말아야지. 남으면 서울에서 바꿔다가 여비하고…….’
서울 가는 길에도 여전히 그는 상인이었다.
작가의 말
1. 지금까지 읽어 주신 독자분들은 시준의 조선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겁니다. 하하. 앞으로도 안 나오겠네요.
물론 공성후 고시에 대한 논어의 기술에 관련하여, 정약용이 본문과 같은 해석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2. 본문에서 선비는 가난한 게 자랑이 아니라는 정약용의 대사는 실제로 한 말입니다. 실학자답게, 정약용은 생계 유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주로 상품작물 재배라던가 길쌈 쪽이었죠. 뭐, 그렇다고 해도 시대의 한계가 있어 장사나 의원 같은 일은 질색했지만요.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한 '서울을 사수하라. 아무리 힘들어도 서울을 떠나면 끝이다!'는 명언은 21세기에도 농담으로 종종 인용되죠.(이거 아마 교과서에도 나오죠?)
3. 당연하지만 백윤구는 본래 정약용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 외 서술은 사실입니다.
4. 길리시단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존경을 나타내는 호칭이라는 것은 당대 조선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득공의 저서를 보면 '크리스찬'이라는 발음도 정확하게 풀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라는 칭호이니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10. 서울 가는 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