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9. 걷히는 장막(3)
정약용이 일찍이 제자에게 공책 우려내려고 말한 것처럼 격물치지부터 치국평
천하까지 작은 일과 큰일을 꿰뚫는 근본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조정에서 밀매 건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영국 배에 혼비백산하는 동안
의주도 그만큼이나 분주했다.
우선 시준은 잠상 백대현이 조용히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다. 시준
은 백대현이 음모 꾸몄다 여기던 자기 생각이 과했다고 안심하였으나, 실제로
는 시준의 생각이 맞았다. 박윤수가 더 이상 쓸모없어진 꼬리를 뒤탈 없이 잘
라낸 것이다.
토포사 한응검도 당시 박윤수의 밀명을 받고 백대현의 확보에만 급급했으므로
실수로 죽였다면서 반쯤 묻어 놓은 임청에게는 눈길도 안 주었다.
주씨 또한 청이 쓸데없는 시비 걸지 않게 고이 돌려보내서 임청의 범죄를 증
거할 사람도 조선에 없었다. 백련교도 잔당이 지금 한둘이 아니라, 범죄자가
잡혀 고문받기만 하면 무슨무슨 교 이름을 대는 판국이다. 이 일은 곧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데이비스 스콧호가 강화도에 나타났을 때쯤 시준도 다른 사업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원래 하던 사업이었는데 그게 정약용의 눈에 걸린
게 그때쯤이었다.
“허어, 이런, 이런……. 나의 훈도가 부족하였구나!”
시준은 각오한 일이라 하나 낯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자기가 출판한, 기기묘묘한 삽화가 곳곳에 들어가 있는 초고수위 남색 음란소
설을 스승이 눈앞에서 넘기며 힐책하고 있는데 당당할 수 있다면 낯가죽을 벗
겨다가 성벽에 둘러야 할 것이다. 이건 현대인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이시수가 말한 대로 정약용은 불러 주기만 하면 견마지로를 마다할 사람이 아
니다. 그것은 굳이 조정뿐만이 아니라 의주에서도 드러났다. 정약용은 정말
자기가 개나 말이 된 듯한 수치를 느끼면서 ‘그 책’을 팔락팔락 넘겼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대 관념상 정약용이 질겁한 부분은 ‘동성애’보다는 ‘음란
함’에 있긴 했다. 물론 그것이 시준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벌써 백여 년 전부터 민간에 유행하던 것인데, 과거 선비들은 한목소
리로 추하다고 비난했다. 그 말이 극히 마땅하지. 근세의 선비만 보아도 충문
공(忠文公, 이이명)은 대국처럼 소설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인 순암(順菴, 안정복) 선생 또한 음희(淫戲)의 설을 가
까이하면 반드시 마음이 유탕(流蕩)해지므로 책을 가려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이 거론한 사람들은 모두 현대에 실학자로 분류된다. 허나 실학자고 뭐
고 어차피 조선 시대 사람임을 알려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시준은 충문공이
나 순암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고개를 더욱 숙였다.
“제자 면목이 없습니다.”
“또 이건 무엇이냐, 아비에게 효도 다하려던 소년을 돈으로 꾀어, 채찍으로
천 대나 때려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다음엔……. 어허! 이것은 바로 그
천하의 무도한 책인 『변이채(弁而釵)』의 내용과 같지 않은가? 이 뒤의 이
그림은 『금병매(金甁梅)』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 같은데? 고서를 힘써 읽고
좋은 부분을 뽑아내라 하였더니 음서를 읽고 동하는 부분을 뽑았구나!”
시준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고금의 음서에 통달하신 것을 보니 스승님께서도 그러한 책을 읽으신…….”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거기 제대로 꿇어앉지 못할까! 에에이, 내
가 음양조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다! 오늘은 강의고 뭐고 없
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먼저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학문이 무슨 쓸모가
있으리!”
오늘 강의가 없다는 것은 강의 시간만큼은 훈계하겠다는 뜻이다. 시준은 정약
용이 마음먹고 잔소리를 시작하면 평소보다도 말이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연은 말하자면 좀 길다.
제지 산업에 착수하던 시준이 출판에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민간에도 인쇄업이 꽤 퍼진 상태라 시설 기반을 구축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한 민간 인쇄업자들이 사서오경과 스물네 개 사서를 찍어낸다면야 교화가
하민들에게 미친 아름다운 소치이겠지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당대 조선에서 이런 민간 출판사들이 선호하는 상품은 위조 족보나 내용 뭣한
소설 등 어디 대놓고 말하기는 꺼려지지만 확실히 잘 팔리기는 하는 물건들이
었다.
그 와중 전에 지유가 시준에게 남녀 얽힌 책 어쩌고 했던 일은 시준에게 영감
을 주었다.
우선 기존에 있는 책을 베껴다가 찍어 파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꽤
벌렸다. 저작권료 지불도 없고, 대형 서점의 책 반품 횡포도 없이 완전 현찰
박치기니 재미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도대체 인간이 입 터는 것 말고 쓸모가 없는 임청에게 공밥 먹여 주기
싫었던 차에, 시준은 그의 좋은 용도도 하나 찾아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엽색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의 생생한 경험담을 채록하여
추가 증보, 창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건전한 공무원이었던 시준은 그런 파렴
치한 곳에 드나든 경험이 없다 보니 큰 도움이 되었다.
“이건 따지고 보면 그때 조정의 시책이지. 전조(명) 때에는 문지기 노릇들 하
는 소백검(小白劍, 미소년을 말한다)과 자는 건 되었어도 여인 기생과 자는
건 엄금이었거든. 아, 물론 나 정도 되면 나라가 아무리 금해도 기생들이 알
아서 치마끈 풀었겠지마는 보통 사람들이야 어쩌겠소? 그러다 보니…….”
“어이, 임씨. 자네 자랑질이 지금 여기서 팔릴 얘기라고 생각해? 오늘 안에
이 장(章) 다 못 쓰면 떨어진 글자 수만큼 자네 밥그릇을 감할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멍석말이할 때도 그랬지만 역시 숫자가 알아듣기 쉽다. 임청은 찔끔하여 다시
만상들이 바라는 얘기로 돌아갔다.
사실 이것에 가장 처음 분개한 선비는 정약용이 아니었다. 만상과 긴밀한 연
계를 유지하던 곽산의 부호이며, 과거 시준과 함께 세곡 창고의 폐단을 의로
써 단속하였던 김창시는 만상이 팔아먹는 이 책을 얻어 보고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요망한 책이 시중에 나돌아다닌다는 말인가! 내가 명색이
관 쓴 진사로서 이걸 놔둬서는 안 되겠다. 내가 이걸 모조리 사들여서 불태워
버려야 향화의 책임을 다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김창시는 과연 부호답게 막대한 돈을 풀어 결코 싸지 않
은 책을 전부 사갔다. 허나 분명히 불태워 버렸을 책은, 무슨 조화인지 곧 평
안도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김창시의 사개치부(四介置簿, 4개 항목으로 정리하는 송상의 장부. 복식부기
의 한 발전 형태) 중 방입질(放入秩, 매각) 부분에 많은 돈이 추가된 거야 곧
은 선비에게 마땅한 복이라고 쳐도 불탄 책이 사람들 손에서 읽히는 조화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말은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는 뜻이다. 사서오경이 수많
은 선비의 손을 거치며 방대한 주석과 해설서로 교열되고 학동들이 하나같이
그것을 베껴 쓰듯, 만상들의 책 또한 이치가 같다.
한 달도 안 되어 시준의 책을 그대로 베끼거나 아니면 좀 급한 사람들을 위해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추려낸 해적판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적당한 시점에 이 일을 알게 된 평안 감사 조득영도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황음한 일은 감히 장계에 쓰기도 부끄러워 서울에 올리진
않고, 다만 들킨 책을 엄중히 압수하여 선화당 뒤주에 넣어 놓은 조득영은 곧
아랫사람들에게 호령했다.
“의주 근문소에서 아뢴 바가 과연 틀림없다. 얼마 전엔 감히 총포를 매매한
잠상이 있고 이번에는 음서가 날뛰는데 실로 기강을 잡지 못한 본관의 불찰이
다. 각지에서는 이 해괴한 책을 엄히 단속하라.”
평안 감사의 당연한 업무이니 누가 막겠는가. 곧 각지에서 나졸들이 몽둥이
들고 잡서 파는 노점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예법을 조심스럽게 지키는 이
동방에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베스트셀러 잡았다고 생각한 불법 인쇄업자들이 울상이 된 사이, 뒤
에서 시시덕거리는 것은 시준 혼자뿐이었다.
‘이 시대에는 또 이때 나름대로 불법 복제물을 응징하는 법이 있지. 나도 아
는 걸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왜 모를까. 이 조선국의 법이란 죄가 있는
놈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처벌하고 싶은 놈에게 죄가 있는 거란다.’
따지자면 시준도 로열티 안 내고 베끼긴 했으나, 그는 전직 공무원답게 이미
법률적 검토를 완성한 뒤였다. 그가 베낀 책들은 이미 시일이 너무 많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자신마저 만족시킨 시준은, 왠지 나졸들이 그 앞만 지나가면 장님이
되는 만상 전용 서방에서 뻔뻔하게 음란소설을 팔아댔다.
사람들은 왜 저기는 단속 안 하냐고 소용도 없는 불만을 제기하기보다 조용히
그곳에 와 책을 사 가는 지혜로운 길을 택했다. 겉장에 삼강행실도니 농사직
설이니 적힌 세심한 배려로 밖에 자랑스럽게 끼고 다녀도 문제없었다.
시준은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정약용이 제자들 가르
칠 교재에 참고하러 『자치통감』이 필요했기에 마실도 갈 겸 근엄하게 책 사
러 나왔다가, 서방 주인이 의미 깊게 히죽거리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해 책을
펼쳐 본 뒤 까무러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준이 그 천추의 한을 되새겨 보고 있는 동안 정약용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옆에서 줄줄이 무릎 꿇고 있는 이강회 등 다른 제자들은 이미 예전에 시준이
영어 가르친다는 핑계로 영문판 음서를 읽힌 뒤였으므로 공범. 감히 누가 나
서서 변호할 자 없었다.
“……해서, 행실의 정함은 곧 음양 대체의 조화를 발걸음부터 지키는 것으로 시
작되는 것이다. 밥숟갈을 뜨는 것부터 해서 …… 모두 그러하다. …… 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네가 …… 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
시준은 이제 거의 혼수상태였다. 정약용의 다음 말이 없었으면 시준은 혼나는
와중 졸다가 파문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 나이 이제 열다섯이나 되었으니, 내가 홍 장주에게 말해서 곧 장
가를 보내야만 하겠다. 실지의 일을 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글은
안 보겠지!”
“예에? 아니, 갑자기 웬 혼인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정신이 번쩍 든 시준은 자리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물론 시준이 남색 소설 썼
다고 해서 남자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요, 새삼 조선에서 비혼주의의 길을
걸으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결혼할 수 없다.
그의 즐거운 은퇴 라이프에 있어 결혼은 방해물이다. 결혼을 하려면 적어도
홍경래의 난이 완전히 끝나고 의주에 돌아온 뒤 해야 한다.
사람들은 노총각이라 들볶겠지마는, 전쟁 때 부인과 어린 자식들 이끌고 허둥
지둥하다가 죄다 관군 혹은 홍경래군에게 참살당하는 것보단 백번 낫다.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정약용은 정말 시준을 장가보내 왜곡된 성적 관념
을 철저히 바로잡아 줄 태세였다.
“네가 비록 부모 없다 하나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뭐, 일전에 장주
께서 내게 한 얘기도 있고……. 마침 잘 되었어.”
아주 황당한 얘기는 아니다. 이 시대에는 은근히 여자 쪽 가문에서 더 지체
높던 일이 잦고 나이가 더 많은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라 규방에서 잘 배워
온 신부가 새신랑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시준이 결혼한다면 신부는 보통 또래거나 연상일 터이다.
역시 아들 장가보내 본 사람이 뭐가 달라도 달랐다.
시준은 비명 지르듯 외쳤다.
“장주께서 어떤 얘기를 하셨다는 것입니까? 제게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요!”
“그야 그랬겠지. 세상천지 어느 오랑캐 나라에서 자기 혼인을 자기가 소관한
다더냐? 네가 잔재주 여러 가지 있음은 나도 알지만, 이런 일은 다 어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오랑캐 나라 출신 시준은 아연하여 재빨리 반박을 모색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이럴 때 두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가 나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 달라고 주
의를 촉구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끙끙대는 시준을 무시했다.
“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만득아, 만득이 이놈 밖에 있느냐?”
정약용은 자기 종과 웃기는 말싸움은 자주 할지언정 학대하거나 들볶는 사람
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득이는 마치 천하 대단한 호령이라도 들은 듯이 문을
부술 것처럼 뛰쳐들어 왔다.
“아, 아이고! 서방 마님, 서방 마님!”
정약용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래. 내가 부르기는 했다마는, 그렇게 급하게 야단을 할 것까지야 무에 있어?”
“헉, 허억. 아이고, 허리야. 그게 아닙죠.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역마(驛
馬)가 왔다구요. 교지(敎旨)를 받들었다 하는 것을 제가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요!”
사극에 자주 나와 그 중대함이 퇴색되지만, 교지, 즉 왕의 뜻이라는 것은 천
지 뒤집어지게 놀랄 일이었다. 정약용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평생 들은 적도 없고 들을 일도 없는 말이다.
시준은 다리의 통증을 잊었고, 정약용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자신을 간신히
제어했다.
“교지가? 무슨 일로 왔다 하더냐? 아니, 입 닫아라. 내가 가 보마. 어디지?
근문소냐? 아니면 부윤의 동헌이냐?”
“그야 동헌이 아니겠습니까요. 외지 사람이 근문소 무얼 안다고.”
평안 감사 때처럼 또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을 준비 다 했던 만득이는 억울
하다는 표정으로 그 한 마디만 겨우 만들었다. 정약용이 천재는 천재였다. 한
번 당한 일은 두 번 당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비인 것도 여전했다. 정약용은 서두르면서도 틀리는 법 없이 의관을
정제했다.
“아까 하던 얘기는 내가 나중에…….”
그 와중에도 시준의 결혼 얘기는 잊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그때는 이미 시준
도 그럴싸한 말을 완성한 뒤였다.
“스승님. 나라에서 필시 큰 은혜를 내려준 것임에 틀림없는데 제자의 하찮은
혼인이 지금 무엇에 중하겠습니까. 장부가 공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일이지 어찌 처자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어서 채비하십시오. 제자들이
따르겠습니다.”
공무원일 때에는 별로 단련되지 않은 능력이었지만, 장사치 생활 십 년 하다
보니 임기응변 하나는 시준이 인용한 말 주인처럼 조자룡 청강검 내찌르듯 하
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
정약용 또한 지금 그 말에 반박할 정신은 없기에 서둘러 걸음을 옮길 뿐이었
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의주 부윤 조홍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홍득주와 홍경래가 광부 모집할 때 농민도 덩달아 모집하였던 그 사람 조홍진
(趙弘鎭)은, 다소 혼동되기는 하지만 홍경래의 난 당시 철산에서 승전한 그때
의 의주 부윤 조흥진(趙興鎭)과는 다른 사람이다.
현대에는 조흥진이 더 유명하나, 이 조홍진도 만상의 일에 슬쩍 끼어들어 축
동답 개간하여 고과 높인 실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꽤 기민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일에도 밝아 올해 말이면 동지사로 파견되기도 한다. 어쨌든 기생 끼
고 뱃놀이하다 중국 사신 바람맞혀서 파직되는 후임 의주 부윤 윤익렬(尹益
烈)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다 보니 정약용에게 내려온 교지가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았다.
“예조 참의라! 참의 영감. 이거 본관이 그동안 섭섭케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
겠소. 핫핫!”
“죄인이 과분한 성총을 입었으니 어찌 삼가지 않겠으며, 하관(下官)으로서 감
히 부윤의 앞에서 오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간 잘 보아주신 은혜에 감사
할 뿐입니다.”
참의는 정3품. 의주 부윤은 관찰사와 동격인 종2품이다. 물론 실질적으로야
내외관의 위상이 다르고 의주 부윤은 사실상 평안 감사의 그림자 아래인 처지
이긴 해도 참의가 막 대할 수 없는 것은 맞다.
그래도 조홍진은 만상과 연결해 재미 많이 보고 있었고, 그 만상의 정신적 지
주이자 근문소 터줏대감이기도 한 정약용 역시 크게 존중하고 있었다.
미묘한 정치적 협의의 결과로, 교지에는 영국 배의 내왕 얘기가 없었다. 아직
은 강화도와 경기 백성들이나 수군대는 소문일 뿐이었다. 그래서 의주부 동헌
은 아주 화기애애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홍진은 정약용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이제야 내가 영감과 한잔 나눈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부디 올라가거든 위
로 임금을 잘 보필하고 아래로 시무에 빈틈이 없게 하시오.”
“이 사람은 그저 두렵기만 할 뿐이니, 앞으로도 부윤 영감의 많은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시준은 귀양살이하면서 대충 죽림(竹林) 선비 비슷하게 되어가던 정약용이 어
느새 완전한 공무원으로 되돌아온 것에 조금 놀랐다. 역시 놀던 가락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조홍진도 알아듣고 ‘가르침’을 주었다.
“내 서울 친구들에게 가만히 이야기를 듣자 하니, 마침 또 예조 참의 자리가
비었는데 의망(擬望, 인사 후보자 추천)할 사람이 부족하여 외임(外任)과 승
지 중에서도 의망해 올렸다 하오. 하늘이 돕는다는 건 이런 게지.”
말끝에 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기분이 과히 좋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귀양 죄인이라 하여 박대하지 않았고, 월권에 가깝게 여러 편의도 봐
주었는데 이제 다시 정3품으로 승차하여 복귀하니 투자가 잘 맞은 기분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웬 뜬금없는 정약용 대신 원 역사에서 이때 예조 참의 자리 얻어야 했을
김회연(金會淵)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으나, 김회연 또한 재정과 군비에 밝
고 선정 펼치기로 명성 자자했던 사람이니 차후에라도 출세는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의주 부윤이며 근문소 사람들과 석별의 정 나눈 정약용은 돌아와서 짐
을 챙겼다. 그냥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이면 천천히 고향 가도 되겠으나, 지금
은 왕명으로 불러올려 관직에 임하는 것이므로 지체할 수가 없었다.
시준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역시 역사를 아는 자기 생각대로’ 고관 출세
하는 정약용에게 그간 자기가 해 준 일을 표나지 않게 되새겨 주며 이제야말
로 본업으로 완전히 돌아갈 준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시준은 한 가지 오판한 게 있었다. 정약용은 실로 의리를 아는 선비
중의 선비였으며, 따라서 자기 출세했다고 제자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졸렬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날 밤, 희만당에서 유용하지만 오래 못 가는 물건 – 대표적으로 먹을 거라
던가 – 들을 이래저래 챙기고 나누어 정리하던 정약용이 시준을 보고 말했다.
“너는 무엇 하느냐? 어서 채비하여야지.”
“아, 저는 예법에 따라 백 리까지 스승님을 바래다 드릴 심산이니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참으로 서운하여 눈물이…….”
“무슨 헛소리냐? 네 얘기가 장계에 다 올라갔다고 하는데 네가 지금 서울에
가서 사은숙배하지 않을 생각이냐? 어서 장주님께 멀리 나간다고 고하고 짐을
챙겨 오너라. 굉보(이강회)에게도 전하여, 다른 제자들도 여기에서 부모 봉양
하고 농사 도울 사람 아니거든 다 오라고 해라.”
부모 없고 농사도 안 짓는 시준의 입가가 경련했다.
“하, 하하……. 그러면 제자는 스승님이 남겨 두신 저어기 감자밭을 버려둘 수
없으므로 농사 때문에…….”
“그건 내가 의주 사는 제자들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네가 그간 만들어 놓은
법식 덕분에 서장관 노릇도 아주 급하지는 않다고 장주님 역시 허락하시더구
나. 뭐 또 중한 일 있느냐?”
정약용은 ‘네가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음서 찍어야 하니 의주에 남아야 한다고
지껄일 수는 없으렷다?’ 하는 눈빛을 보내었다.
시준은 절망했다. 역시 아무리 현대인이라도 그가 일세의 천재 정약용을 넘어
서기는 힘들었다.
작가의 말
1. 명대에는 실제로 엄청난 고수위 동성애 소설이 매우 유행했으며, 사람들도 남색을 즐겼습니다. 보통 문지기(이 시대 문지기는 잘생겨야 했습니다)가 상대였다고 하죠. 원인은 임청이 지적한 바가 큽니다. 지난화에도 나왔습니다만 임청의 엽색행각은 진짜입니다.
2. 18세기경부터 조선에 민간 출판업이 발달하여 한글 소설이 유행하는 등 문화적 촉진의 토양이 마련되지... 만 뒤에서 특히 성행한 것은 위조 족보였습니다. 이제 족보를 엄청난 수고 들여 베끼는 게 아니라 그냥 몇 개 마련하고 통째로 찍어내면 되었거든요. 그 전에는 종친회에 돈 주고 슬쩍 자기 이름 끼우는 식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때부터는 그냥 가문 하나를 처음부터 창조하는 식의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3. 마침 이때 실제로 예조 참의 자리가 비었는데 사람이 없어 외관들 중에서도 끌어모아 추천하긴 합니다.;; (승정원일기) 다만, 시점은 3월경이라 작중과는 석 달 정도 어긋나는데 이것은 전개를 위해 그렇게 서술하였습니다.
10. 서울 가는 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