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9. 걷히는 장막(2)
표류 무역은 동인도 회사가 의회에서 지속 주장하고 있는 아시아 독점권 유지
의 근거였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최소한의 충돌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체는 바로 자기들뿐이라 자신했다.
“어느 누구와도 교역하지 않는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 조선의 문을 열
려면 세심하고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고압적이고 폐쇄적인 해군이나
관청이 시도해서는 불필요한 전쟁만이 일어날 뿐입니다. 바로 저 미쳐버린 전
쟁광 보나파르트처럼! 존경할 만한 인격을 가진 의원들께서는 그런 일을 용납
할 리가 없으시겠죠.”
물론 영국 의회는 바보들의 사교 모임이 아니었으므로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
한 의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1806년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말로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식한
무역 제재를 감행하자 사정이 좀 달라졌다. 대륙 봉쇄령이 거시적으로 실패한
정책이라지만, 2차 세계대전 때조차 영국의 물가가 그토록 박살 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가 유럽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미친 듯한 폭동과 민심 불
안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은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리고 은은 중국에 많으며, 조선에도 혹시 조금 있을지 모른다.
유서 깊은 화이트하우스 거리와 시티오브런던 곳곳에서는 신사들의 활발한 논
의가 이루어졌다.
“조선 자체에는 별것이 없지만, 과거 매카트니 자작의 분석은 유의할 만하다.
동인도 회사의 사탕발림이야 논외로 하더라도,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 시장을
더 확대하는 방안은 나쁘지 않아.”
“프랑스인들의 만행 때문에 조선과 중국이 모두 프랑스를 꺼려 하는 지금이
기회. 잘만 하면 조선에 영구적인 대중 무역 기지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왐포아에만 의지하니 중국인들의 오만방자함이 시도
때도 없지. 함부로 항구 폐쇄 등의 조치를 하지 못하도록 다변화하는 안은 시
도해볼 만해.”
“그러면 이건 어떻소? 저번 보고서를 보아하니 조선에도 양귀비가 널리 재배
되고 있다고 하던데, 아예 파트나 아편 대신 조선에서 만들어 팔면 더 이익이…….”
“야, 저 새끼 누가 데려왔어? 끌어내.”
“놔라! 아니, 솔직히 아시아에서 우리가 팔 게 아편밖에 더 있어?”
“아는 거라고 다 말하지 않는 게 바로 정치일세. 저 친구 신참이군.”
대강 이런 과정을 거쳐 영국 정계도 조선에 어느 정도 주의를 할애하게 되었
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 왕 조지 윌리엄 프레데리크(George William
Frederick, 조지 3세)의 명의로 된 조선 무역 특허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영국군은 조선 개항에 참가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무역 회사에 대한 허
가였다. ‘조선이 동의한다면’ 무역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동인도 회사의 재주에 달린 일이다.
트라팔가의 패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우스터리츠에서 최고조의 전성기를 보
여준 나폴레옹의 파도에 맞서느라 해군이 정신없기도 했지만, 의회가 이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소(小) 피트가 나폴레옹이 무효 처리해 버린 유럽 지도를 말아다가 처박은 다
음 홧병으로 죽고 나서 새 수상이 된 윌리엄 윈덤 그렌빌(William Wyndham
Grenville)은 휘그당으로서 무역 확장과 제국주의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취임한 지 몇 년 안 되었지만, 차후 무려 반세기 동안 동인도 회
사의 대표이사로 군림하며 중국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통치했던 남자 윌리엄
아스텔(William Astell)의 입장도 같았다.
그는 무차별 합병과 식민지에서의 기독교적 강압을 혐오했고 동인도 회사의
‘상업적’이고 ‘문화적’인 접근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걸 위해서는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독점권이 꼭 유지되어야 했다.
다양한 협의와 막후의 조율이 오간 끝에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금의
여러 현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소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의 의사
를 타진해 보기로 결정했다.
로드 암허스트(The Lord Amherst)호의 공식적 최초 조선 방문보다 이십여 년
이나 빠르고, 더하여 훨씬 대규모의 선단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08년도 한
여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물론 영국 사람들 입장에서나 소규모이고 의사의 타진이지 조선의 입장에서는
대규모의 외계인 침공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무슨 쪽배 같은 병선을 저어 온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
서동(尹序東)은 자기 배와 달리 무슨 못이라도 박아 놓은 듯이 흔들리지 않는
이 말도 안 되는 거선을 올려다보았다. 강화도 주위의 거친 물살을 생각하면
기괴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윤서동은 얼마 전 자기가 백성들 상 내리는 품의(稟議) 잘못한 일로 올렸던
사직서가 왜 여태 수리되지 않았는지 강렬하게 원망했다. 예의상 올린 정사장
이라는 것은 다 잊어버린 뒤였다.
아무리 사표 냈어도 지금 강화 유수는 윤서동이 맞다. 그는 위엄을 담아 호령
했다. 최소한 그 자신의 생각에는 그랬다.
“너, 너희는 어느 나라의 배인가! 배,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말고 내려와서
문정(問情)에 응하라!”
수군에 딸려 온 중군이며 만호(萬戶)는 혹시 강화 유수가 오늘내일하는 중병
에라도 걸렸는지 의심하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영길리국의 깃발은 조선에 알려진 뒤인데 새삼 그걸 묻는 저의도
알 수 없었다. 총체적으로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하들 역시 왠지 하초가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였
다. 서쪽 삼도의 함선을 휘몰아 영길리국 배를 붙잡아 오겠다는 박윤수의 구
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드러났다 할 것이다.
“저놈들이 감히 나라의 관헌을 못 본 체하는구나!”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동인도 회사 선박은 조선에서 접촉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도 잘 안 들리는 소리가 영
국 배에 닿을 리 없다.
이만하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한 윤서동은 대충 ‘오랑캐놈들이 무도하여 문
정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치고 어서 배를 뒤로 저으라고 하고 싶었다. 섬으
로 돌아가면 그래도 돈대(墩臺)가 있으니 변란에도 대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거의 익직(溺職, 직무를 저버림)에 해당하는 죄다. 지금 조선 수
군이 아무리 쇠락했어도 고종 시기처럼 막장이 되지는 않았다.
용기를 짜낸 중군 김택려(金宅礪)가 진언했다.
“배가 크고 멀어 소리가 미치기 어려우니, 마땅히 악기를 불고 깃발을 올려
위엄을 떨쳐야 하오이다. 저들이 꼭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닐 수도 있잖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이 상황에서 위엄을 떨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윤서동은 뒤의 말
에 주목했다. 하긴 저 배는 아직 포 한 발, 화살 하나 쏘지 않았다. 듣기로
평안도에서도 영길리국 사람들은 구휼의 은혜에 감사하고 굳이 사례를 내놓았
다지 않은가.
윤서동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흐흠. 그래도 섬을 경비하는 관리는 있는 모양이군. 대포도 있는걸? 귀엽기
는 하지만 말이야.”
동인도 회사 선박 데이비스 스콧(David Scott)의 선장 존 로크 주니어(John
Locke, jr.)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윤서동이 알았으면 크게 안도했을
일이다.
중국 항해 경력이 몇 차례나 되는 베테랑 선장으로서, 로크는 야만족들의 그
경외와 공포에 찬 시선을 즐기는 편이었다.
야만인들은 이 배의 1,300톤에 달하는 거체에만 집중할 뿐, 38문이나 되는 18
파운드 포의 가치라던가 동인도 회사의 목적에 맞추어 신중히 설계된 이 아름
다운 범선의 기능미까지는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라고 큰소리만 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영국이 당대 최
고 선진국이라고 한들 그건 19세기의 선진국인 것이다.
18파운드 포는 그중 반이나 작동되면 다행인 상태이고, 여기에서 별로 많지도
않은 화약과 탄환을 쓸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러면 마드라스나 봄베이로 돌
아가는 길에 얼씨구나 하고 프랑스 사략선이 덮칠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사략선에 한 번쯤 털리지 않았으면 동인도 회사 배라고 할 자
격도 없다. 해적을 피하기 위해 대포가 더 있는 것처럼 포구 그림을 그려놓
는, 해양강국 영국의 체면 다 깎이는 짓이 동인도 회사의 기본 업무였다.
딱히 무력 공백 때문이 아니라도 동인도 회사는 여기에서 힘을 써선 안 된다.
이제 선장 생활에서는 은퇴하고 동인도 회사군의 소령(Subedar-Major) 직책을
받아 온 영국 내 최고 조선 전문가 존 레디가 그 점을 지적했다.
“이사회(Council)의 지침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자위권 이상의 무력을 사용해
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해군이 개입할 빌미를 주고, 아시아에서 회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겁니다.”
몇 년 전 조선에서 공포탄을 쏘아대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그간 조선에서 재미 본 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파크 선장이 양털 팔고 있을 때 존 레디는 조선 해안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남
하하며 중국의 지도 정보도 참조해 강화도의 항로를 개척했다. 그래서 존 로
크 역시 코웃음을 치는 대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솔직히 군대로 밀고 들어간다 한들 들어가는 화약값이나 나올까
싶은 나라이긴 해. 일단 이번의 목표는 조선 북방(평안도)의 항구 한두 개를
개항시키는 것이었죠?”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는 평안도 지방을 캘커타처럼 사들여서 대중 무역 기지,
다시 말해 아편 생산기지로 개편하는 것이다.
수틀리면 제 멋대로 항구를 닫거나 상인을 내쫓고, 뇌물 처먹고도 처리해 주
는 일 없는 청국 관리들은 긴장해야 마땅하다. 동인도 회사도 조선을 건드리
면 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여태까지 참아 준 건 영국인 쪽이다.
레디 소령이 약간 보충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들은 이 나라의 특수성으로 감안해 볼 때 개항이 안 되더
라도 민간 무역을 묵인해 주는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조선에는 민간에도 영어
를 할 줄 아는 자들이 많은 모양이니까요.”
별로 많지도 않을뿐더러 다 의주에나 있다. 시준은 정약용 학당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도 가르쳤는데, 그가 어학 강의만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은
지라 이강회 같은 뛰어난 수재만이 간신히 일상 회화를 할 뿐이었다. 차라리
실전에서 배운 만상들이 좀 더 나았다.
로크가 말했다.
“하기야 내가 일전 파크 선장에게 듣기로 조선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항로
도 알고 있는 모양이더군. 꽤 흥미로워. 어쨌든 그 일은 당신 임무이니 당신
에게 맡기겠소. 소령의 말씀대로라면 관청에는 당연히 제대로 된 영어나 프랑
스어 통역사가 있겠지?”
“그야 당연히 그럴 겁니다. 중국 글씨 필담은 아주 고역이었는데 잘 되었죠.
아, 저기 조선 배에서 깃발이 올라가는군요. 아무래도 저기에 책임자가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모선(母船)이 안 보여. 저거 혹시
종선(從船)이 아니라 조선 군함인가? 그러고 보니 왐포아의 정크선 중 비슷하
게 생긴 것을 많이 보았는데.”
“저는 군함을 본 적은 없지만 대포로 봐서 맞는 것 같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가볍게 웃었다. 일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동인도 회사 직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 첫 접촉[First Contact]은 사실
양쪽의 실무자는 물론 고위층에게까지 굉장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은 애초부터 이것을 큰일로 인식했고 영국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우선 통역 문제 때문에 첫 발자국부터 삐걱댔다. 존 로크 선장은 자신들이 기
껏 구조의 은혜를 갚고 우애에 기반한 교우를 청하러 왔는데, 일개 시골 아이
까지도 영어를 할 줄 아는 나라에서 도대체 통역관이 없어 중국어를 요구하다
니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호통쳤다.
레디 소령 역시 조지 3세가 발급한 동인도 회사의 특허장을 내보이며, 당장
국왕의 전권 위임을 받은 관리가 나오지 않으면 이것은 영국 국왕에 대한 모
독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을러댔다.
조선 배와 그 배에 타서 황급히 도망치는 윤서동을 보고 자신감이 매우 높아
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배를 차치하고라도, 데이비드 스콧 하나를 없애는 데
에도 조선의 전 수군이 명량의 이순신과 같은 각오를 해야 할 테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하지만 이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한 조신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았다.
한성부의 고위층은 ‘파직해야 마땅한 겁쟁이 강화유수와 다르게’ 굳건하게 사
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야 당장 대포가 눈앞에 있지 않으니까 당연하다.
배와 대포가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 군병은 총포와 창검을 들고 육지에서 싸
워야 사직을 위협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저 배의 크기로 미루어 탄 병사는 모
두 합해도 3천 명이 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조선군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방어할 수 있다. 여기는 조선의 (나름
대로) 최정예군이 방비하는 일국의 수도다.
돛단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없는 이치는 자명하니, 육지만 잘 지키면
먹을 것이 떨어져 물러가게 되어 있다고 여긴 것이다. 광저우에서 오는 영국
보급을 차단할 수단이 조선에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김조순 파벌과 그 외 파벌은 오히려 이것이 서로를 공박할 좋
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잘 숨기고 자신들의 전쟁을 개시했다. 전장은 존 로크
명의의 서신이 접수된(통교가 허락되지 않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비변사였다.
“전하의 성려대로 드디어 영길리국 놈들이 큰일을 내지 않았소! 저놈들이 자
칫하면 심도를 떨어뜨리고 도성에 육박할 태세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
가. 과거 이조 참판(박윤수)의 헌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제조들께서는 입이 있
으면 말해 보시오!”
“난언을 크게 떠벌려 성총을 어지럽히고 공연히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자 곧
적도와 같소. 저들이 구휼의 은혜를 갚으러 왔다 이미 말했고 실제로 한 사람
도 다치지 않았는데, 큰일은 무슨 큰일이 났다는 말인가!”
“그거야 교언일 뿐. 속셈은 해금을 폐하고 대국 섬기는 도리도 집어치우라는
무도한 장사치들이 아니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정약용이 의주에 이배 간 이
후로 모든 일이 생겼으니, 정약용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일을 주창하신 훈
련 대장(김조순)도 의심스럽소이다! 그 의주에 영길리국 말 한다는 어린아이
도 정약용의 제자라지? 아주 잠통자들의 굴혈이 따로 없군!”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는가! 약용이 제자를 잘 가르쳐서 구휼에 도움 되게 하
여, 저 강대한 서양국의 배가 오히려 공손히 우리 전하 앞에 고개를 숙였으니
우연이라 해도 현명한 처사라 해야 마땅할 터!”
“공손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공손이라는 말이야? 세상에 대포 들이밀고 왕지
(王旨) 받아 나오라는 놈의 공손도 있는가? 더 말할 것 없소. 지금 군무(軍
務) 보는 대신들은 죄 직첩 반납하시오! 옛 이조 참판(박윤수)의 계책대로 팔
도 수군을 전부 모아 저들에게 대적할 것이니!”
“얼씨구. 대원수(大元帥) 나셨군. 대감께서 꼭 장검 휘둘러 앞장서시길 바라
겠소이다. 아니, 그래. 이조 참판 그대는 그래도 염치가 있어서 말씀 안 하는
것이지요? 그때 그 잘나신 헌책대로 의주에 함선을 모았다면 아예 벌거숭이로
저들을 맞이할 뻔했잖소? 적도가 어디로 오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입으로만 해
방(海防) 떠드는 꼴이란!”
“지금 말 다 했어? 이 노망 난 늙은이 같으니!”
“뭐라? 야, 너 방목(榜目, 과거 등방자 명단) 언제 올랐어? 수염에 노란 털도
벗겨지지 않은 게……!”
각각 파벌의 영수(領袖) 노릇 하는 고관 체면으로서 차마 이 난장판에 끼어들
수가 없기에, 김조순과 박윤수 등은 침묵을 지켰다.
공(公)은 자네가 되고 자네는 네놈이 되는 동안 두 영수는 그 상당 부분이 무
가치한 대화에서 일부 가치 있는 부분을 골라내며 그것으로 정국을 구상했다.
김조순은 로크 선장의 한문 서신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용만 장사치 패거리들은 구휼이라 하지만 필시 뭔가 밀매를 했을 터. 그건
나도 알면서 눈감은 터이니 새삼 말할 건 없지. 하지만 영길리국 놈들이 그
일을 뻔뻔하게 숨기는 것으로 봐서 저들은 최소한 장사가 뭔지는 알고 있다.
장사는 신용! 또한, 그렇게 의주 사람을 보호했다는 말은 곧 저들이 바라는
바가 평안도에 있다는 뜻이야.’
박윤수도 마찬가지로 머리를 맹렬히 가속시켰다.
‘사교도? 아냐. 저들은 일관되게 상단이라고 일컬을 뿐 길리시단(크리스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오히려 두령(선장)의 서신에는 불랑국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불랑국과 전쟁하는 중이라 하지 않는가. 조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이야 헛소리지만, 어쩌면 저들은 압록강을 넘어오려는 불랑국 사
교도를 막을 좋은 수단일지도 모른다.’
입장이 반대인 두 대신의 생각은 기이하게도 점점 하나로 모였다.
‘경험 있는 자가 실수하지 않기 때문에 조종의 선비 쓰는 법이 그러했다. 어
차피 이 나라에서 저들 사정 좀 아는 자는 만상들밖에 없어. 이 기회에 정약
용을 불러들여 일 맡기고 공 세우게끔 하면 복권시키기도 쉽고, 저 박윤수가
이끄는 벽파의 찌꺼기를 더 내리누를 수 있을 게야.’
‘정약용을 다시 불러야 한다. 아마 김조순 저자는 찬성하겠지. 영길리국 놈들
과 대면시켜 놓고 잘 살피면 필시 잠통의 꼬리가 드러날 터. 영길리국이 의주
에서 시골 사람들과 매매하는 거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거기에 정약용이나, 정
약용을 쥐고 조종하는 김조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변사가 왕에게 무슨 말을 올릴지 협의한 것은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상황이 화급한지라 밤에도 면대를 허락한 임금 이공은 좌의정 이시수가 대표
로 가지고 온 비변사의 총의에 의문을 가졌다.
“정약용이라. 그 사교도와 연관된 자가 아닌가. 그자를 불러올려 영길리국과
의 일을 맡기자는 것은 경솔하지 않겠소?”
상대가 의정 대신이라 젊은 왕도 반존대를 해 주긴 했으나 이공은 의아한 표
정이었다.
사실 정약용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선대왕 때는 이공이 어렸고, 그가 즉위하자
마자 귀양 갔으므로 이공의 입장에서 인상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약용이 아주 늦게야 유배에서 풀려난 가장 큰 이유는 죄가 끔찍해서
라기보단 왕과 조정이 정약용을 잊어버려서이다.
당대 최신 정쟁과는 별 관련이 없다 보니 해배할 사람 명단을 보고하는 실무
관청도 초기 단계에서 ‘컷’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이시수가 말했다.
“정약용은 선대왕께서 아끼시어 각신(閣臣)으로 중용하신 자로서 견문이 문무
두루 넓고 학문을 좋아합니다. 집안이 사교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는 하였으
나 그 자신은 사교도가 아닙니다. 이번에 온 영길리국 배가 구휼의 은혜를 입
었다 하는 바는 의주 향민(鄕民)이 예를 지키며 도리에 맞게 처신한 일에 많
이 힘입었는데, 이는 약용이 학당을 열어 백성을 가르친 때와 일치합니다. 그
제자가 통변을 맡았다는 사실은 일전의 장계에도 있습니다.”
“그래. 나도 보았소. 이자가 과연 그런 재주 있다면, 선대왕께서 박지원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도 작은 죄는 지우고 문임(文任, 홍문관, 예문관의 제
학)이라도 주기 마다할 리는 없소.”
사실 하라는 대로 반성문 썼는데도 정조는 박지원에게 홍문관 제학을 안 줬
다. 본인도 남행(南行, 음서)이라 사양했지만, 실학파는 문장 솜씨가 부족하
다고 평가받아 당시 청요에는 거의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박지원과 달리 대
과 합격자인 정약용 정도라면 또 다르다.
그리고 이번에도 박지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왕 체면에 ‘이거 박윤수도
동의한 거 맞아?’라고 물을 순 없으므로 친척 되는 박지원 얘기가 또 나온 것
이다.
이시수 역시 좌의정 자리 투전해서 딴 게 아니어서 금방 알아들었다.
“이조의 참판(박윤수)과 정랑 등 인사(人事) 보는 대소신료 또한 전하의 성총
이 궁벽한 선비에게 내리기를 바란다고 한목소리로 입을 모았습니다. 전하께
옵서 옛 죄를 용서하시고 불러 쓰신다면 정약용 역시 어찌 감히 견마지로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공은 만족했다. 박윤수가 그리했다면 생각이 있을 터였다.
이공 또한 무슨 원한에 차 장인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며 이빨 갈아붙이는 단
계까지는 아니었다. 김조순 독주 체제만 이리 조금씩 견제해 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강화 유수 윤서동이 평생의 재주를 동원하여 영국 배가 허튼짓 못하게 막는
동안, 곧 빠른 말이 평안도로 출발했다. 역사보다 십 년은 빠른 정약용의 해
배를 알리는 파발이었다.
작가의 말
1. 존 로크 주니어 선장도, 그 아버지 존 로크(이 사람도 동인도 회사 배를 몰았습니다)도 그 유명한 철학자 존 로크와는 동명이인입니다. 철학자 존 로크는 한참 전 죽었습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당시 중국을 오가던 이 회사 배 중 항로상 나와 줄 만한 배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2. 소령이라고 번역된 Subedar-Major는 동인도 회사군의 직책으로, 영국군 출신자들이 보임되곤 했습니다. '모든 인도인 병사'보다 높은 직책이었고, 인도인은 이 위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3. 조정 대신들의 대화에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이 당시 조선도 대강 서양에 대해 알았습니다. 효명세자가 20여년 뒤에 영국과의 통상을 허락하는 것도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지요.
4. 백탑파라고 불린 실학파는 문장(고문)이 부족하다 하여 청요직에서 철저히 따돌려졌는데 그것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가 김조순이었습니다. 어느 날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가 박지원을 두둔하자 김조순은 “그대가 이 정도까지 문장을 모르는구나. 내가 있는 동안 홍문관과 예문관에 근무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홍길주, ‘수여난필(睡餘瀾筆)')
9. 걷히는 장막(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