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8화 (28/284)

28화

9. 걷히는 장막(1)

그 안에는 조총 수십 자루와 화살 수백 대가 들어 있었다. 의주 만상들도 무

기를 사들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외국에 내다 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

다. 홍총각마저도 공포 섞인 얼굴로 백대현을 노려보았다.

총도 총이지만, 이 대나무 화살대는 보통 일이 아니다. 평안도에서는 화살을

만들 전죽(箭竹)이 거의 나지 않는다. 이건 남방에서 싣고 온 것이다.

이것은 곧 이 무기 밀매가 일시적이나 충동적 범법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시준은 소름이 끼쳤다.

‘아마도 송상……. 홍경래인가?’

하지만 시준은 곧 고개를 저었다. 홍경래에게 청에 갖다 팔 무기가 있었으면

그 자신이 썼을 것이다. 총과 화살 값으로 주씨가 가져온 물건들 또한 도자기

며 풍경 같은 생활용품과 놋쇠 쟁반, 바라(鳴囉) 등 금속기들로 반란군에게

긴요한 품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조정에서 이 일을 빌미로 대규모 조사를 실시한다면 홍경래는 틀

림없이 발각된다. 그리고 만상도 파멸한다. 애써 건설해 놓은 금점 광산 체계

나 모자 공장도 흔적도 없이 날아가리라.

거기에 생각이 미친 시준은 떨칠 수 없는 위화감에 손톱을 깨물었다.

‘운이 나쁘다고 치부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적절해. 마치 누가 알고 그런 것

처럼…….’

역사는 일반인보다 약간 더 아는 정도지만, 조선에서 이미 십여 년을 살아왔

고 대청 밀무역에 오래 기웃거린 시준은 청의 정세만큼은 자세히 알았다.

청에서 무기를 사들이기로 한 세력은 아마 백련교도 잔당이나 그에 관련된 자

들일 것이다. 홍경래와는 상관없을 터. 하지만 그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조선 왕이라고 청에 굽실대 가며 반성문 써서 바치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

다. 조정은 청과의 복잡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선 국내의 일로 마무리하려

들 것이고, 그 기회에 불온한 평안도에 경고를 준다면 일석이조다.

‘저번에 이서구가 왕에게 우릴 변호해 준다고 했으렷다. 그 말은 곧 왕이 우

리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백가인지 하는 저 장사꾼은 고문을 못 이겨 관이 원하는 대로 진술할 것이 틀

림없다. 그냥 쌀 팔아 이득 챙기려던 무리로 알고 구사대 훈련 겸 가볍게 나

왔던 것이 실수였다.

백대현은 사색이 되어 무릎걸음으로 뒤를 향해 기었다. 저쪽에서 주씨가 조선

말로 악을 썼다.

“우리 아니오! 우리 아니오! 날라 주기만 하였소! 터우무[头目, 두목], 바로

저놈, 이름, 린칭[林淸, 임청]!”

주씨와 같이 꿇어앉아 있던 청인들 중 좀 마르고 간사하게 생긴 자가 벌떡 일

어나더니 강으로 내달렸다.

물론 주위를 지키고 섰던 구사대 청년들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일이 다 끝난

듯하여 방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비스듬히 서 있던 작은 청년은 임청이

변발을 휘날리며 멋들어지게 내지른 일권에 비틀대며 물러났다.

그리고 임청은 그 틈을 비집고서 다시 달렸다. 시준은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무협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서 「남아당자강(男兒当自强)」이 재생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조금 있으면 화환을 싼값에 팔 것도 같았다.

홍총각이 노하여 외쳤다.

“저놈이! 무엇 하느냐, 어서 쏴버려라!”

조선이 활의 나라라 해도 궁술은 엄연히 고급 기예다. 숫자도 부족했거니와

달리는 사람을 자유자재로 쏘아 맞힐 명사수 정도면 여기에서 상단 용역깡패

노릇을 하고 있을 턱이 없다.

그놈 역시 제법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달리기까지 하는 게 아주 잘 논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시준은 기랑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행히 대신 쓸 만한 것이 있었다. 시준은 허리춤에서 양쪽에 매끈한 돌멩이

가 달린 줄을 꺼냈다.

총으로 기랑에게 도저히 미칠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인데 요새 친구

와의 사냥에서 체면을 좀 세워 주고 있었다.

그가 잽싸게 그것을 던지자 볼라(Bola)가 발에 감긴 임청은 실로 황비홍이 부

럽잖은 역동적인 공중 뒤집기를 보여주며 나가떨어졌다.

구사대 청년들이 그를 몇 번 걷어찬 다음 끌고 왔다. 홍총각이 감탄한 표정으

로 시준을 보았다.

“우리 서장관이 유성추(流星錘)도 쓸 줄 알았던가?”

유성추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무기다. 선천적으로 운동 신경과 신체의 협응

이 뛰어난 시준에게는 좀 더 쉬웠지만 말이다. 시준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

답하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포수들에게 배웠습니다. 어서 가죠. 이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임청은 본래 순천부(북경 부근) 사람으로, 여기저기 잡일이나 해 주며 먹고

살던 양아치였다. 많고 많은 그의 흠결 중에서 유독 유난스러운 것을 꼽자면

여색을 탐하는 게 너무 심하다는 점이었다.

양아치가 다 그렇지만 임청은 그중에서도 유별났다. 사창가를 제 집처럼 드나

든 끝에 결국 오만가지 병을 달고 일하는 곳에서도 쫓겨나기를 수차례. 처음

에는 따뜻하게 받아 주었던 친척들도 종당에는 침을 뱉고 외면했다.

결국 남쪽으로 강소성부터 북쪽으로 열하와 만주까지, 업으로는 술집 점원부

터 밀수선 선원까지 별의별 역정을 겪으며 천하를 종횡하던 임청은 결국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 당시 유행하던 반청 종교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정감록 신앙이 그렇듯이, 백련교 또한 홀로 생겨난 집단이 아니다. 태평도부

터 파룬궁까지의 장구한 역사 동안 중국 땅 사람들이 공유했던 반권위주의 신

앙. 그 유구한 흐름의 하나다.

그러므로 백련교가 진압된 이후에도 이름과 형태만 살짝 바꿔 여러 종교결사

가 유행했는데, 임청의 팔괘교(八卦敎)도 그 중 하나였다.

그가 괜히 조선만 오지 않았어도 교주로 출세하여 후천조사(後天祖師)라는 묵

직한 칭호도 받았을 것이다. 뱃사람 경력 조금 있다고 나댄 게 문제였다.

이자가 홍경래와 같은 해에 난을 일으켜, 단 70여 명과 함께 자금성을 습격한

전무후무의 용자라는 사실을 시준이 알았다면 흥미로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런 것을 모르는 지금은 재앙 달고 온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 이놈! 나의 팔괘장법(八卦章法)에 저 북해 끝까지 날아가기 전에 얼른 무

례를 멈추지 못할까! 이것만 없으면 당장 내 신권(神拳) 맛을…….”

매독 때문에 뇌가 이상하게 되었는지 임청은 그렇게 소리지르며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도 조선말이 유창한 것은 신기했다.

아까 임청이 보여준 권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시준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잠깐, 혹시 내가 떨어진 게 실제 조선이 아니라 무협지 세계의 조선인가? 그

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김조순이 썼다는 검협전인가 뭔가를 얻어 읽어봤는데

일대의 권력자가 그런 걸 썼다면 설마……?’

그렇다면 시준도 이름 좀 날릴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영안부원

군 김조순이 그냥 개인적으로 무협지를 좋아했을 뿐이다.

중국의 민간 저항신앙은 교리야 각자 달라도 공통분모가 있는데, 억압에 저항

하는 고대의 협(俠) 개념을 기반으로 의로써 도(道)를 행하는 큰 줄기가 그것

이다.

다만 협객이라는 것은 현대 야쿠자의 자칭에서도 알 수 있듯 명분 포장한 깡

패 집단에 가깝다. 이게 종교 쪽으로 발전하면 황건적이 되고, 정치 쪽으로

나아가면 군벌이 되는데 동시기의 유비나 조조 역시 시초는 그런 동네 불량배

들의 모임이었다.

시초가 시초인 만큼 개인의 무력을 꽤나 중시하였고, 대부분의 중국 민간 종

교결사에 개인 신체 단련법이 꼭 들어가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특히 임청의 팔괘교는 후대의 의화단, 그러니까 기관총에 권법으로 맞서던 그

용맹무쌍한 집단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 무협지가 괜히 중국 배경인 게 아니다.

다만 의화단과 마찬가지로, 이 임청도 김조순의 『오대검협전(五臺劍俠傳)』

에 나오는 것처럼 살기만으로 사람을 몸 안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경지까

지는 다다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저 밧줄에 묶인 채 강가 뻘밭에서 애벌레

처럼 꿈틀대고 있으니 말이다.

시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저놈을 매우 쳐서 자백을 받고, 저 무기를……. 아니, 이제 와서 숨겨 봐

야 소용이 없겠죠. 누구도 손 못 대게 양쪽의 짐을 엄중히 지키십시오. 그리

고…….”

시준은 목소리를 낮추고 홍총각의 귀를 끌어당겨 속삭였다. 얼른 의주로 돌아

가서 만상의 무기를 전부 안 보이는 데에 잘 숨기고, 우군칙을 통해 홍경래에

게도 빨리 일러주라는 말이었다.

“홍경래에게는 잠상이 청에 총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말만 해 주면 됩니다. 알

아들을 겁니다.”

“그러지.”

홍경래를 돕기는 싫었지만 한배를 탄 이상 어쩔 수 없다. 홍총각은 발과 손이

빠른 청년 하나를 골라내어 의주로 보낸 다음 임청을 매우 쳤다.

팔괘권의 달인 임청이라도 묶인 채로 두드려 맞는 데에야 별수가 없다. 대국

청나라에 창봉권술의 묘리가 있다면, 소방(小邦) 조선에는 멍석말이의 지혜가

있다.

“컥! 사람 죽네! 이놈들이, 어억! 그만두지 못, 제발 멈춰 주시오! 아! 아악!

어딜 치는 거냐! 아니, 치는 것입니까? 이러다 죽겠, 죽겠습니다! 대인, 제발

봐주십쇼!”

예절을 배우는 데 일각도 걸리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한 지혜라 할 만했다. 임

청은 곧 침과 눈물을 쏟으며 부모도 팔아먹을 태세를 완비했다.

원래 고문이라는 것은 뭘 물어보고 패는 게 아니라 제발 말하게 해달라는 애

원이 나올 때까지 팬 다음이 시작이다. 그리고 홍총각은 고문이라면 의금부

관헌보다도 많이 해 본 사람이다.

사실 임청 또한 원래 이런 식으로 쉽게 굴복할 사람은 아니다. 자금성 습격

실패 이후로 사로잡히고 나서 인류 최고라 할 만큼 잔혹한 대륙의 고문 앞에

서도 꿋꿋이 버틸 만큼 대가 센 위인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전통 지혜 앞에서는 별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아직 교조로 추

대되기 전이라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지 못했는지 그 심지도 금방 꺾였다.

임청은 일단 아무거나 말하기 시작했다.

“총을 왜 사가는지 알고 싶으신 게지요? 말씀드리겠소. 우리 도를 들어보셨는

지 모르겠지만 본래 인세의 모든 것을 낳은 자는 스스로 불생불멸하는 무생노

모(無生老母)이외다. 노모께서는 사바세계의 혼탁함에 슬퍼하시며 첫째로 연

화불(燃燈佛)을 보내 설법하고 둘째로 석가불(釋迦佛)을 보내셨소. 그리고 이

제 바로 미륵불(彌勒佛)이 올 때인데…….”

시준은 종로 3가쯤에서 인상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떠오르는 기시감을 느끼

며 말을 끊었다.

“간결하게 말하시오. 열 자를 넘으면 넘은 숫자만큼 매를 칠 테니.”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교도를 모아 간신배를 척결하려 하였습니다.”

뒷감당이 무서워서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반청복명, 즉 아예 황조를 뒤집어엎

으려는 속셈이다. 팔괘교에 대해 모르던 시준도 그 정도는 짐작했다.

더 캐물어 보니 청 국내에서 무기 거래에 대한 단속이 심했는데, 마침 임청도

살았던 적이 있는 만주 쪽 인맥에서 사람이 와서 이르기로 ‘조선 사람들이 총

포 빼돌릴 곳을 찾고 있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한다.

“그게 누구요? 책문에 갈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를 리 없는데.”

시준이 묻자 임청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들키면 그대로 사죄인데 누가 자기 이름이며 고향을 똑똑히 말하겠소이까.

소인도 몇 다리 건너 안 사람이라, 그저 김모(金某)라는 것만 들었지 어디 사

는 누구인지도 모르오이다.”

조선에서 김씨라니 그냥 이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홍총각이 말했다.

“의주 바닥에서 압록강 넘을 수 있는 놈들이 뻔하지. 한번 몇 놈 잡아다가 족

쳐 볼까?”

“우리가 족치지 않아도 곧 조정에서 수많은 관헌이 난리판을 치고 다닐 겁니

다. 우리는 그저 쥐죽은 듯이 있으면 됩니다.”

과연 그 말대로 토포사 한응검(韓應儉)이 도착했다. 원래 역사나 바뀐 역사나

똑같은 사람에게 잡혀갈 마당인 백대현은 그저 통곡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준도 솔직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만 있었어도 차라리 이 둘을 그냥 보내 주고 총이며 화살은 다 묻어버린

다음 적당히 쌀만 후려다가 밀무역 적발했다고 바치면 되는데.’

하지만 본래 관청에 실적 좀 올려주고 만상과 근문소의 기여도 강조하고자 시

점 맞춰 고변케 한 것이라 멈출 틈이 없었다. 갑자기 오지 말라고 하면 얼마

나 수상하게 보겠는가.

여기서부터는 관의 일. 어린아이인 시준이 건방지게 나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홍총각이 한응검을 오래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청에 인맥 많은 임청을 어디 써먹을까 하여 홍총각을 시켜다가 한 대 되게 후

려쳐 기절시켜 놓고 시체로 처리해 버린 시준은 초조하게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준은 어느새 백대현이 곡하기를 멈추고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

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조 참판 박윤수는 신이 나서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비변사에 들어섰다.

“이제야말로 마각(馬脚)이 드러났소! 평안도 바다야말로 반적의 굴혈. 황상이

이 일을 빌미 삼아 힐책하면 어쩌실 생각이오이까? 관련된 자들을 전부 잡아

올리고, 의주와 용천, 강계를 샅샅이 뒤져 영길리국과의 잠통모반을 밝혀내야

합니다!”

“우리 참판께서 어째 아주 흡족하신 듯하구먼.”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하는 병조 판서 김이익이 박윤수를 가늘게 노려보

았다.

조정에서 닳고 닳은 대신들이 수상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건마는, 박윤수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나 너구리 같던 너희들이 뭘 알겠냐는 심산으로 기세를 올

렸다.

“이거 늙으신 여러 공(公) 앞에서 무례천만하오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우책

이 틀리지 않았음은 이제 밝게 드러나지 않았소이까. 여러 노신들께서 아뢰지

않겠다면 이 사람이 대벽(大辟, 사형)을 각오하고 직청을 올려 서쪽의 수군을

모두 한데 모으십사 청할 것입니다!”

책임을 피할 수 없는 훈련대장 김조순, 병조 판서 김이익은 당연히 그 병력

동원에서 나설 자리가 없다. 병권은 자연스럽게 국왕과 척신에게 넘어가고 이

것은 왕권 강화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중앙 집권이란 게 그렇게 쉬웠으면 조선의 역대 제왕이 항상 그 일로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설 때가 언제인지 잘 아는 노련한 정치가 김조순이 묵직하게 말했다.

“그리하시오. 정말 대벽의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지만.”

“예?”

“지금 드러난 것은 조총과 화살을 잠매하려 한 일개 장사치이지, 영길리국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소. 내가 아는 바로 조총은 평안도 포수들이

쓰던 것을 그러모은 것에 지나지 않고, 화살대는 삼남에서 자라는 전죽인데

영길리국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서 그걸 사다가 다시 평안도에 팔기라도 하였

다는 말인가?”

박윤수는 자기밖에 아는 사람 없을 정보가 김조순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크게

당혹했다. 지금 평안 감사 조득영(趙得永)이 김조순의 파벌이라는 것은 박윤

수도 알지만, 이건 평안 감사도 몰라야 할 일인 것이다.

물론, 조득영이 근문소의 비상임 자문위원이며, 용만 근문소에서 조득영에게

간결하면서도 상세한 21세기 공무원식 보고서로써 낱낱이 고해바쳤다는 것까

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박윤수의 실책이지만 말이다.

박윤수는 큰일 만들고자 화살까지 대어 준 자신의 어리석은 행각을 깊이 후회

했다. 김조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일[兵者 國之大事, 『손자병법』]. 무릇 열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공충·경기·황해의 모든 배를 모아 장대하게 저 한

산도(閑山島)의 일을 다시 이루려 하는지 몰라도, 분명하지 않은 의혹으로 육

수군을 집결시킨다면 지금 사방에서 반군 토벌하느라 좌불안석이실 대국 천자

께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가경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조선이 되도 않는 명분으로 뭔가 군사 행동을 하

려 한다는 예측에 수렴할 것이 분명하다. 장자도에서 배 띄우면 천진이 지척

이요, 천진에서 북경은 옆동네다.

박윤수가 잠시 멈칫했다. 그 뒤에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아, 가는 길에 파도에 쓸려 가라앉을 배와 들어가는 돈 문제도 있군. 아마

대간은 괜한 쟁단을 일으켜 사직에 누를 끼친 간신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지.

어디 그렇게 해보시오. 하는 김에 이 사람의 지난날 했던 말도 밝게 아뢰어,

잠통모반한 적을 아래부터 위까지 한가지로 용서하지 않는 기강을 부디 엄정

히 보이기 바라겠소. 누구 목이 날아가는지는 다 밝으신 성총하에 결정될 일

이지.”

‘대간’과 ‘밝으신 성총’을 같이 언급한 김조순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한 협박

이었다. 청요(淸要)라고 해 봐야 김조순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으니 탄핵은

네가 받을 것이요, 임금의 총애가 있다고 나대지만 결국 임금이 외척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힘의 과시다.

물론 박윤수도 멀리 보면 외척이긴 하다. 하지만 왕의 외가쪽 먼 친척과 왕의

장인 중 누가 더 가까운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만약 김조순이 말한 대로 영길리국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안 나오고, 그에

힘 얻은 대간의 상소가 파도처럼 몰아닥치면 왕은 그냥 사람 잘못 택했다고

입맛 다시고 박윤수를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보 통제가 제대로 되었다면 박윤수가 백대현을 몰래 빼내면서 입맛대로 장

계를 조작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드러난 것처럼 김조순은 이미 박윤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여러 곳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창백해진 박윤수의 앞에서, 김조순은 날카롭게 이죽거렸다.

“뭐 하시오. 아마 글월은 벌써 다 정서(正書)까지 하여 갖고 들어왔겠지. 비

변사 제조고 뭐고 다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니 그냥 곧장 정전에 나아가시라

니까?”

김조순이 무협지를 쓸 정도로 소품(소설)과 기예에 조예가 있다 하나 19세기

사람이고, 명색이 영안부원군으로서 품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쫄리면 뒈지

시던가?’라는 말까지는 못 하였지만, 박윤수는 정확히 그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김조순에 비해 달릴 뿐이지 결코 멍청하지 않았던 박윤수는 패를 엎기로 했

다. 그는 여러 현명한 노인들의 말을 들으니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며 우

물우물 물러났다. 돌아가거든 주둥이 함부로 놀린 놈을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

게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윤수와 순조가 그렇게 매번 패배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북방은 불안했다.

먼저, 그해 삼월에 평안도는 아니지만 함경도 북청(北靑)에서 실제로 변란이

일어났다. 시달리다 못한 향임들이 들고 일어나서 좌수(座首)를 인두로 지지

고 수령의 지팡이를 빼앗아 의자에 앉는 대사건이 터진 것이다.

과거 국경인(鞠景仁)이 저지른 순화군과 임해군의 일이 어찌 다시 일어나지

않겠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대하게 인식된 사건이었다.

다만 근문소가 잘 통제하고 있는 평안도는 평화로워서 이것으로 이공이 뭔가

입지를 다지기에는 부족했다. 이공의 말이 맞으려면 영길리국과 관련된 일이

어야 했다.

그래도 이공은 이 기회에 굳센 왕의 면모를 보일 수는 있었다. 북청에서 학정

이 있었다는 것을 참작하여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귀양 보낸 원 역사와

는 다르게, 왕권 과시를 위해 전원 참수의 강단을 내린 이공은 얼마 안 가 기

다리던 일을 마주했다.

김조순이나 김이익 등 노론 시파는 물론, 현대인인 시준도 전혀 예측하지 못

했지만 박윤수가 그렇게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영길리국 배가 진짜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변방 평안도가 아니라 이 나라 중추의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심도

(沁島, 강화도)에 말이다.

작가의 말

1. 전죽은 화살을 만드는 용의 대나무를 말합니다. 이게 평안도에선 안 자라고 남쪽에서만 자라서 태종 대부터 이걸 좀 어떻게 평안도에서도 길러 볼까 하는 기록이 있고, 일부 지형에 따라 북방이라도 좀 따뜻한 곳에서는 성공한 적도 있습니다.

2. 팔괘교는 의화단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태평천국의 권력 구조도 팔괘교와 매우 비슷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무술을 중시했던 것도 맞지만 팔괘장법 운운은 창작이고... 무술 팔극권과의 관계도 아마 없는 듯 합니다.

3. 멍석말이는 실제로는 정말 위험한 짓이니 따라하면 안 됩니다.

4. 조득영은 김조순을 도와 안동 김문 내의 벽파 파벌을 쓸어내는 데 기여한 사람입니다. 김조순의 파벌이라고 나온 것은 그 때문이죠.

5. 김조순은 정말로 어릴 때 무협지를 썼습니다. 오대검협전은 오대산에서 들은 검협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검술에서 목이나 허리를 베는 것은 하품의 경지고 숨결 기운으로 침투하여(내공?) 몸 속을 찢어서 흔적도 안 남게 죽이는 것이 진정한 고수다' 라는 말도 실제로 나옵니다. 파워밸런스 대차게 망한 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딱히 숨기지도 않아서 후에 김조순의 문집에 당당히 포함되게 됩니다. 현대로 친다면 중고등학교 때 쓴 판타지 소설이 나중에 자서전에 들어가는 격일까요. 오대검협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외로 사회 비판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9. 걷히는 장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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