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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6화 (26/284)

26화

8. 바뀌는 물살(3)

시준은 하마터면 그 귀한 약과 약 못지않게 귀한 유리병을 다 엎어버릴 뻔했

다. 간신히 몸을 통제한 시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유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

고 있었다.

“어허, 다 큰 처녀가 지금 사내 방에 어딜 스스럼없이! 나가지 못해?”

“얘가 아주 웃기네. 네까짓 게 무슨 사내야. 사람들이 서장관이라 추켜 주어

도 어림없단다. 왜, 무슨 남녀 얽힌 그림이라도 숨겨 놓았니?”

“야, 인마!”

시준이 조선 시대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사대부가나 왕족이 아닌 사람들의 성

관념이 의외로 보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사회적 제약의 남녀 간 낙차도 시준의 생각보다

는 적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가 시준이 아니라면 지유가 이렇게 허물없이

말하기는 힘들었겠지만.

“뭘 그렇게 새빨개져서 고함이야? 아, 그렇지. 시집간 완순이 얘기 들어보니

까…….”

말끝에 지유는 몇 번 기침을 했다. 찬바람 멎은 지도 꽤 됐건만 난데없는 기

침 소리 끝에는 거창한 재채기까지 들어갔다.

시준은 21세기 초반을 살아온 사람답게 숨을 들이켜며 긴장하였다가 곧 여기

가 19세기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차피 지금의 조선에서는 그 역병이 돌아봐야

한두 고을 감염되고 끝나겠지만 말이다.

지유도 그제야 정신 차린 듯 눈을 좀 비비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원래 밥 먹으라고 하려 했는데.”

“밥?”

“그래. 학당 갔다가는 으레 거기서 먹고 왔었잖아. 오늘은 쇠고기 좀 얻어서

너 오면 밤참으로 주려 했었는데 기왕 이렇게 일찍 왔으니 저녁 하렴.”

그렇게 여상한 듯이 내미는 것은 찬합에 담긴 엄청난 밥과 그 밥에 먹기엔 좀

모자란 듯한 너비아니 몇 점이었다. 시준이 이게 웬 거냐는 눈빛을 보내자 지

유가 머릿수건을 풀며 대답했다.

“그 왜, 바깥 서리(홍총각)에게 혼담이 들어왔단다. 중매쟁이가 왔다 갔는데

부모 없이 장삿집 문간방에 붙어먹는 팔자에야 더 바랄 게 있겠니. 기분이 좋

아서 아랫사람들한테 인심 한번 썼고, 그게 여기까지 흘러온 게지. 콜록, 어

흠! 아유. 이거 봄만 되면 왜 이리 기침이 나는지. 아무튼 어서 먹어.”

홍총각은 집안이 가난하여 장가를 오래 못 갔고, 그래서 사회에 불만을 가지

고 있었다.

과연 그런 이유가 반란군의 선봉장이 될 만한 사연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홍경래가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시준이 없었다면 홍득주 산하에서 주먹질이나 하다가 홍경래에게 포섭되었을

것이다. 만상은 아래 부리는 상인에게 따로 급여를 주지 않으며, 몇 년 일하

는 거 봐서 나중에 자본을 주어 독립시키는 방식으로 보상하기 때문이다.

시준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는 밥만 얻어먹고, 지금 모은 돈은 노동에 대

한 보수를 받은 게 아니라 홍득주에게 제안한 여러 사업의 공동 참여자 형식

으로 이문을 갈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홍총각 또한 시준의 사업에 끼어들어 여러 부수입을 잘 챙긴

모양이었다. 장가까지 갈 정도면 말이다.

홍총각이 원래 역사에서 뭘 했는지 모르는 시준은 그저 동료의 좋은 소식에

미소지었다.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 갈 때도 되었지. 잘됐네.”

“늦은 게지. 완순이는 열넷에 갔고 다른 아이들도 내후년이면 성례한다 하더라.”

지유는 그 말을 하면서 시준을 삐뚜름하게 바라보았다. 시준은 너비아니와 지

유를 번갈아 보다가 웃었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장가들어 나가라는 말이냐? 하하. 하지만 나는 아직 멀

었다.”

지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거나 잘 먹고 씻어 놓으려무나.”

“이 작은 걸? 뒀다가 나중에 다른 거랑 같이 씻지…….”

“내가 왜? 너 먹은 거니 네가 해야지.”

그러고 휭하니 나가버리려 하자 시준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설거지야 누

가 하건 별 관계 없지만 친구의 기분이 왠지 상한 것 같았다. 시준이 머리를

굴려 보니 알 만했다.

‘자기도 시집가고 싶은데 홍총각처럼 밑천도 못 모으고 부엌데기 일만 하니

심술이 난 게로군. 애들 다루는 데에는 역시 선물이나 쥐여 주는 게 최고지.’

자못 사람에 대해 아는 척하지만 사실 하나도 모르는 시준은 지유를 잡고 달랬다.

“그러지 말고. 내가 어떻게 지금 빨래터 가서 민망하게 부인네들과 같이 일하

겠느냐? 거기 드나들지 말라고 한 건 너였잖아.”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럼. 당연하지. 자, 그리고 아까 너 보니 기침하던데, 기침하는 데 아주 좋

은 약이 여기 있다. 가져가서 먹어.”

아까 보던 ‘마비산’은 위험해서 지유에게 줄 수 없지만, 시준의 약사 프로젝

트에서 만든 약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준은 서랍을 뒤져 다른 약을 꺼냈다.

지유의 증상은 의학적 전문 지식도 필요 없다. 척 보니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

다. 항히스타민제까지는 언감생심 바랄 수 없으니 기침이나 멎게 하여 주면

되고, 그렇다면 지금 재료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이게 뭔데?”

“용각…… 아니, 감길탕(甘桔湯) 가루야. 물이랑 마시지 말고 목에 그냥 털어

넣어라.”

도라지가 기침에 효과 좋다는 것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감초와 도라지

(길경)의 탕이라 해서 감길탕이라 부르는 이 약제(藥劑)는 2천 년 이상 된 지

식이다.

다만 시준의 처방은 이것을 탕으로 끓이는 것이 아니라 말려다가 가루 내어

배합해 처방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살구씨[杏仁]까지 추가했다. 세네가

(Senega) 가루가 조합되면 완벽하겠지만 그건 캐나다에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원조는 일본 아키타[秋田] 번에서 100년 전부터 내려오던 제조법이며, 80년쯤

후에 메이지 일본에서 양약(洋藥) 형태로 개발되게 되는 이 약이 바로 현대에

서 유명한 류카쿠산[龍角散], 즉 용각산인 것이다.

이 약의 진가는 미세한 분말이 목 점막에 닿아 직접 작용하는 데에 있다. 따

라서 분말이 고울수록 효과가 좋으며, 현대처럼 나노 단위로 만들지는 못하지

만 시준도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수작업을 진행했다.

“내가 책에서 보고 열심히 말려 찧어다가 체에 수십 번이나 거른 것이니 필시

효과가 있을 게다. 네가 매년 봄마다 기침하는 걸 보고 만들었지.”

시준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뻥을 쳤다. 전자는 사실이지만 후자는 시준도

지금 알았다.

“그…… 그래? 그렇게나…….”

지유는 종이 약포를 수줍게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몇

가지 반찬이며 장을 좀 더 내어 왔다.

심지어 탁주까지 한 사발 있었다. 아무래도 이 집의 부엌에서 나름대로 지위

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먹고 그냥 문간에 두어. 내가 이따가 개밥 주러 갈 때 거두어 갈 테니.”

“그래, 그래. 고맙구나.”

시준은 지유가 선물 하나에 얌전해지는 게 아이다워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가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자 지유는 흠칫하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잘 먹을게. 아, 기침이 안 멎으면 또 줄 테니 다시 와라.”

“으응.”

정약용 쪽 일도 잘 되었고, 친구와의 트러블도 해결했다. 지유를 보낸 시준은

잘 구워진 너비아니를 씹으면서 흡족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좀 바쁘지만 평화

로운 삶이 계속될 것 같았다.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으며 반란의 의지도 살아 있다는 사소한 점만 제외된다

면 말이다.

정약횡은 딱히 귀양가지 않고 서울에 살았다. 서자라 제대로 된 일가로 취급

받지 못하는 대신 연좌에서도 벗어난 셈이다.

그래서 의주까지 오는 데에도 강진에 비해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

경 12년(1807년) 늦여름쯤에는 이미 정약횡 의원도 자리를 잡았다.

당대의 한의학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현대의 눈으로 보면 검증되지 않

았거나 위험한 약재도 많다. 시준은 과거에서 부활시킨 마비산과 미래에서 표

절한 용각산을 납품하러 가는 길에 종종 들러 약재를 골라내고 때로는 정약횡

을 대신하여 처방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어김없이 맞아떨어지니 의원은 날로 성황이었다. 의주의 모든

의원들이 질투하며 침을 뱉거나, 아니면 근처를 어정거리면서 비법을 배워 가

려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예전 같으면 그냥 사망 처리하고 무덤자리부터 알아볼 사람도

혹시나 하고 동구 밖 정약횡 집에 오게 되었다.

정약횡이 형 보러 가는 바람에 겸사겸사 자기도 좀 쉴까 하여 의원집에 앉아

서 약첩이나 내어 주던 시준은 급한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급환이오! 중상! 중상이오!”

한쪽 팔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람이 실려 왔다.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

고 있어 사람들이 들것에 아예 꽁꽁 싸매 놓은 상태였다.

몸이 단단한 데다 체격도 한 덩치 해서 날라 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닐 듯싶

었다. 어디 근처 성 쌓는 데에서 기기에 찍혔나 하던 시준은 상처 주변의 옷

이 약간 타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니 한 명이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 송상을

때려눕혔을 때 홍경래의 옆에 있던 삿갓 쓴 사람, 우군칙이었다. 시준은 추궁

하듯이 물었다.

“총에 맞았군. 어쩌다 이리된 것입니까? 설마…….”

그러나 우군칙 또한 말재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그는 전혀 수

상하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산에 갔다가 포수의 총에 맞았네. 아마 짐승으로 잘못 보았겠지! 지금 그게

중한가. 일단 사람이나 좀 살려주게!”

“이래서야 편작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어쩌겠소이까. 인명재천이지. 할 수 있

는 일은 다 애써보겠지만, 잘 되어도 외팔이로 살 각오 정돈 하시오.”

“아무렴, 목숨만 살려 준다면야 그쯤 감지덕지지.”

출혈도 출혈이지만 가장 무서운 건 감염증이다. 시준이 아는 의학은 일반 상

식 정도라 결코 살린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일단 ‘면피’를 해놓은 시준

은 예의 마비산을 가져오게 했다.

우군칙이 남모르게 눈을 빛냈다.

“그게 소문의 그 마비산이군!”

“조용히 하시오. 환자를 깨끗한 방으로 옮길 테니 나머지는 모두 나가 주시길.”

모르핀을 먹은 환자는 곧 잠들었다. 용량도 솔직히 대충이라 부작용이 심하겠

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독한 술을 상처에 붓고 펄펄 끓는 물로 손을 소독

한 시준은 입가를 깨끗한 무명천으로 가렸다.

‘젠장. 내가 무면허 수술까지 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한국이었으면 당장 감

옥에 들어갔겠군.’

그가 무슨 어디 일본의 망토 걸친 근육질 의사도 아니고 ‘이 수술은 내가 집

도한다!’ 하며 자신 있게 메스를 들 순 없었다. 일단 메스도 없었거니와 시준

은 외과 수술에 대한 어떤 경험도 없다.

시준은 제발 총알이 피부 가까이 박혀 있기 바라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벌렸

다. 복지 혜택을 받기 전의 시준이었다면 아무리 원래 성격이 침착하다고 한

들 졸도하거나 도망쳐 버렸을 끔찍한 환부가 드러났다.

‘초보자가 함부로 칼로 상처를 째서는 안 돼. 일단 조심스럽게 찾아서…….’

칼질 막 하다가 상완동맥 같은 것을 건드려 버리면 끝이다. 수혈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 그냥 나머지 모르핀을 다 환자한테 먹여 가시는 길 편안하게

보내 주는 게 낫다.

다행히 총알은 그리 깊게 박히지 않았다. 하기야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유탄

을 맞았다면 유효 사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엇나간 모양이었다.

삶아 둔 족집게로 총알을 빼내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집중력이 들어갔다. 눈썹

이나 수염을 뽑는 것보다 백 배는 되는 시간이 소요된 끝에 시준은 총알을 끄

집어낼 수 있었다.

당장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총알을 타구에 던져놓은 시준은 역시 잘

끓여 둔 명주실과 바늘을 준비시켰다.

시준을 따라왔다가 여기서 잡심부름 하던 소질개가 그것을 내밀었으나, 시준

은 이미 소질개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 봉합에 기괴한 일이었다.

소질개가 채근함에도 불구하고 시준은 타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총알은 둥근 조총 탄환이 아니었다. 아직은 유럽에도 없는 물건. 시준이

다큐멘터리에서 본 지식으로 고안해 만상 구사대의 비밀 조직인 총포수들에게

만 일부 지급한 원추형 탄환, 즉 미니에 탄이었다.

불안하게 서성이던 우군칙 앞에서, 시준은 성마르게 말했다.

“다행히 총알이 안에서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소. 나머지는 이 사람 체력에 달

렸지만, 하늘이 돕는다면 죽지 않고 깨어날 거요.”

하늘이 돕는다는 말로 뭉뚱그렸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혈관에 손댈 기술이 없는 시준이 겉만 꿰매 놓았던 상처가 속에서 썩지 않아

야 하며, 대량 출혈과 모르핀이 일으키는 저혈압의 상승 작용을 극복할 만큼

기력이 왕성해야 한다.

하지만 우군칙에게는 상황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신의(神醫)일세! 팔을 자르지도 않다니 그게 어딘가. 하하! 고맙

네, 고마워.”

시준은 여기에서 ‘포수는 거짓말이고 그 총알을 너희가 빼돌렸으렷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쪽의 패를 다 까보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대신 일반

적인 의원처럼 말했다.

“앞으로 힘쓰는 일은 어렵겠지. 일 없거든 임 행수네 재봉소에서 옷감이나 엮

으면서 정양하며 살게 하시오. 몸을 보니 무부(武夫) 같던데 딱하게 됐군. 이

사람 이름이 뭡니까? 홍 처사(홍경래) 댁의 사람이오?”

말하면서 우군칙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한 시준은 거기 나타난 위화감을 놓치

지 않았다. 우군칙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만한 정도의 틈만 보이

고 곧 유창하게 대답했다.

“이자는 내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로 평양 사람인데 이름을 양시위(楊時緯)라

고 하네. 무부랄 것은 없고 그저 근래 내가 권하는 말 듣고 광산 일하러 온

사람이지. 나도 명색이 저어기 가산 금점 덕대 아닌가. 기운 세고 일 잘해서

산남도 아끼는 젊은이였는데 어쩌다가 그만 이렇게 되었는지.”

시준이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 양시위가 홍경래 휘하의 편장으로서 난에

서 활약했던 또 하나의 반란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준으로서는 총알이 들킬 각오를 하고라도 살려야 할 만한 사람이라

는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준은 다른 것을 캐물었다.

“가산에서 일하던 사람이 왜 의주에? 그리고 총 쏜 자는 어디 있소?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죄를 물어야지요.”

“허어, 내가 의주에 있었으니 잠시 보러 온 게지. 억울하게 총 맞은 사람을

두고 왜 이리 곰상스럽게 따지고 드는가. 포수를 알았다면야 요절을 냈겠지만

산을 타고 도망쳐 버려서 찾을 길이 없었네.”

더 의심을 드러내면 꼬리가 밟힌다. 시준은 그쯤 해 두기로 하고 몸을 돌렸다.

“아무튼 깨어나기 전까지는 여기에서 돌보겠소. 가 보시지요.”

“어찌 그렇게 수고롭게 하리. 사람 몇을 딸려 줄 터이니 마음대로 부리게.

자, 여기 사례 하려고 돈냥이나 싸 왔네. 만상 서장관께는 흡족할지 모르겠지

만. 핫핫!”

돈이야 한 푼이라도 흡족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시준은 영 찜찜했다. 사

람을 딸려 준다는 것은 양시위의 입을 막겠다는 뜻이요, 돈을 많이 내어 준다

는 것은 시준의 입도 단속하려는 심산이다.

전화도 없고 신문도 없는 시대다. 예를 들어 당장 근처에서 전쟁이 터져도 시

준이 지금 알 수단은 없다. 그래서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상상력만 가속되었다.

‘설마 이 새끼들 벌써 반란 일으켜서 관군이랑 충돌한 건 아니겠지?’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런 일을 저지를 준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압록강가의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기다리던 홍경래는 돌아온 우군

칙의 보고를 받고 감자를 베어 물었다.

“그 아이가 냄새를 맡았을지 모르니 주의해야 하겠군. 영길리국 사람들이 병

장기를 영 갖고 있지 않은 것도 수상했는데, 미리 알고 중간에서 막았다면 보

통 놈이 아냐. 지금 후환을 없이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실제로 홍경래의 사람들도 표류 무역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영길리국 배에선 총포를 팔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도 생각이 있지 노점에서

간식거리 팔 듯 무기를 아무에게나 줄 리는 없다. 그건 오랜 신뢰관계를 쌓은

만상 핵심부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경래 일당은 만상 구사대원 중 일부를 포섭해 무기를 조금씩

빼돌렸다. 포수들에게 사들이는 조총보다 월등히 성능이 좋고, 특히 그 꼬마

가 만들었다는 총알은 더욱 멀리 나가는 것 같았다.

바로 그래서 귀중한 인재인 양시위가 총 안 닿는 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얼쩡거리다 훈련 중 팔에 총 맞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상 서장관을 미리 제거해 버리자는 홍경래의 말을, 우군칙은 좀 과한 생각

이라고 여겼다.

“별일 없을 거야.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 사람을 어찌 그리 정성 들여 봐

주겠는가. 그냥 어쩔 도리 없다 하고 내버려두어 죽게 하면 그만이지. 그리고

지금 사세에서 홍득주가 아끼는 아이를 없애기는 쉽지 않아. 만에 하나 들키

면 만사 다 끝장일세.”

홍경래 일당이 자신을 따르는 상인들을 소모품으로밖에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게 진실이기에 들키면 위험하다. 만약 홍득주가 분노하여 돌아서거

나 최악의 경우 자신들을 적대한다면 일은 몇십 배로 어려워진다.

같은 상인이라 그런지 이미 이희저와 김창시도 만상과 거래를 튼 모양이었다.

국내 판로를 빼앗길까 다급해진 송상도 뒤늦게나마 만상에 많은 이득을 약속

하며 협상에 나선 참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었던 만큼 친구들도 믿었던 홍경래는 뭔가 잘못된 만남이었

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자기만 믿

고 모인 평안도의 수많은 열사들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물러나면 홍경래에게는 죽음밖에 남

지 않는다. 홍경래는 남은 의주감자를 한입에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 말이 옳군. 자네는 역시 나의 장자방일세. 조용히 때를 기다리지. 흐름이

바뀔 때까지.”

작가의 말

1. 도라지, 살구씨, 세네가 가루 등은 모두 전통적으로(세네가의 경우 캐나다 원주민) 보통 감기와 기침에 썼던 약재들입니다. 감초는... 그냥 약방감초답게 아무데나 들어가고요. 세네가가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가루 형태의 용각산은 서구화 이후, 그러니까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개발되었습니다.

2. 정약횡은 지난 편과 이번 편의 서술대로 의원이었는데, 정약용은 정약횡에게 의원의 도리를 설하면서 대감집이나 정승집에서 말 보내어 오라 하고 동시에 그냥 평민의 집에서 사람이 급하게 찾아왔거든 우선 평민의 집에 가서 정성을 다하여 보아 주고 그 다음 대갓집에 가라고 합니다.

사이 좋았다는데 왜 그런 도움도 안 되는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잘못하면 건방지다고 매맞을 일이었거든요.

3. 미니에 탄은 체내에서 깨진다고 합니다만, 원래 그런 의도로 만든 총탄이 아니라서(본래는 강선총에 장전을 편하게 하고 멀리 나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죠) 품질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습니다. 시준이가 야매로 만든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4. 실제로는 아무리 급해도 수술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하.

8. 바뀌는 물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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