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7. 평안도 사람들(4)
현장에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홍경래였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왜소한 체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홍경래가 이미
뒤쪽에 덩치 큰 여남은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거니와, 시준은 홍
경래에게서 물리적 체격과 상관없는 거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거대함은 누워서 앓는 소리 내던 송상 주먹들조차 입을 조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이 만상과 송상 중 어느 편인지 알 수 없었던 박광유가 열심히
머리 굴리는 동안, 홍경래는 옆에 서 있는 삿갓 쓴 사내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군칙. 자네가 저자들을 데려가서 정양시키고 좋은 말로 달래게.”
“그러지.”
군칙, 그러니까 점쟁이 우장유는 별말 없이 그 지시에 따랐다. 곧 쓰러진 놈
들은 별로 부드럽지 않게 일으켜 세워져 등에 업히고 들것에 실렸다.
섬돌에 다리 깔린 놈이야 평생 절름발이 노릇해야 하겠으나 나머지는 좀 누워
있으면 괜찮을 듯싶었다. 홍경래는 시준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로군. 아이들 하루 볕이 다르다더니 이제 장정이라고 해도 되겠도
다. 그런데 여기는 누구 집인가?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해도 되겠는가?”
시준은 홍경래를 경계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집주인은 지금 없소이다. 난리판이 난 다음이니 이야기라면 다음에 의주에서
홍 장주를 뵙고 하시지요.”
“허허. 얼마 전에 곽산 김몽초(金夢初, 김창시)를 만났다지.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람들과 벗하고 있는지 알 텐데, 내 개성 사람들과도 연이 닿아 있으면
어찌하려고 이리 데면데면한가?”
홍경래는 평안도 일대의 부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 서울
을 제외하고, 전국 어디서든 상리로 부자 된 자라면 송상과 인연이 없기는 힘
들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박득출은 술상을 봐 오겠노라고 나섰다. 과연 영
길리국까지 연이 닿아 있는 사람답게 손이 야무져서, 남의 집에서 급히 찾아
낸 것치고는 괜찮은 상이 나왔다.
홍경래는 손수 잔을 따라 주었다. 조선 사회에서 어린아이와 겸상하고 술까지
따라 주는 일은 홍경래가 시준을 상당히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준은 그것을 알면서도 확인차 물어보았다.
“홍 장주가 아닌 이 아이에게 용무가 있으시다는 것입니까?”
“열세 살이었던가. 나이 어리나 나는 자네가 준재임을 안다. 대요(大遼) 효선
황제(孝宣皇帝, 요 성종)가 보위에 올랐을 때 12세였고, 최치원(崔致遠)은 12
세에 혈혈단신 중국에 건너가 학문을 이루었으니 이로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지. 일개 상방(商房)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홍득주 상단을 사실상 시준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시준
은 홍경래가 따라 놓은 술을 내려다보았다.
“과찬이십니다. 모든 것은 우리 홍 장주님의 보살핌이지요.”
“옳다. 자네에게 겸양하는 덕이 있다고 치고, 다들 바쁜 몸이니 나도 시작하
지. 한잔 들게.”
시준이 마지못해 술을 마시자 홍경래는 시작했다.
“일전에 인삼을 가로챈 일은 단견이었어. 바지니 모자니 해도 결국 만상이 인
삼 아니면 무엇으로 먹고살겠는가. 송상이 서울 고관들과 친하니 황첩을 독점
하는 것도 어렵잖고, 앙심 품고 인삼을 전혀 팔지 않는다면 어쩔 셈인가.”
“이문보다 앙심을 우선한다면 그들이 돈 벌기는 벌써 글러먹은 게지요.”
실제로 송상은 불만스럽게나마 인삼을 아직 만상에게 넘기고 있었다. 인삼의
국내가와 해외가는 천지 차이이고, 따라서 가장 좋은 판매처가 만상이었기 때
문이다. 홍득주 상단이 송상과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보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만상은 홍 장주님이나 임
행수뿐만이 아니야. 비뚤어진 가지는 쳐버리고 저들 보기에 아름다운 것만 남
기겠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 의주의 세가 약해지면 거기 남은 작은 장사꾼
들이야 송상 마음대로가 아니겠는가.”
시준은 홍경래의 도발에 한 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홍경래의 뱃속에 있는 것
을 끌어내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저들이 기르는 나무입니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풀 깎
듯 할 수 없습니다.”
홍경래는 웃었다.
“그렇지. 그 말을 기다렸네. 그러나 저들이 서울과 각지 수령에게 갖다 바치
는 수레는 나라의 국고를 능가하며, 아래위가 한가지로 저 전조(前朝, 고려)
의 말예를 싸고도니 어찌할 수가 없지. 선대왕들께서 제정하신 서울의 시전이
저들 때문에 다 말라죽을 지경이야. 개성에서야 저들 뜻대로 하더라도 이 평
안도에서는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시준은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최대한 우아하게 했다.
“홍 선비께서는 글을 읽으신 분이라 알고 있는데, 장사도 업으로 삼으실 작정
이오이까?”
홍경래도 알아듣고 젓가락을 집었다.
“글을 읽었다는 게 뭐 대단한가. 문리와 상리는 통하는 바지. 지금 과거 시장
(試場)이 시장(市長)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야. 직첩(職帖)으로 따지자면 대장
군이라고 해 봐야 술상 하나 값이요, 천금을 실어다 주면 실제로 묘당에 올라
용안도 뵐 수 있으니 이게 장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홍경래는 새삼 화가 치미는지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생선 눈깔을 콱 찍었다.
모자 장사로 중간에서 구문 잔뜩 거머쥔 장쾌 집답게 여기서 구경하기 힘든
석어(石魚 : 조기) 요리였다.
“장사의 이치로 말하자면 자네들은 거울이며 빗이나 파는 행상이 도고(都賈)
를 건드린 꼴일세. 게다가 사람까지 다치게 하였으니 좋은 일은 없을 거야.
아, 물론 나도 저들이 먼저 돼먹잖은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을 봤지. 그러나
자네는 똑똑하니, 옳다고 하여 이기는 건 아니라는 이치 정도야 잘 알겠지?
모자 건도 자네들이 국법을 어긴 것은 없지만, 사치를 금한다는 윗사람의 뜻
을 비웃었다는 죄목은 어찌할 텐가?”
죄 중에 가장 큰 것은 괘씸죄이며 이것은 21세기 대한민국 불문헌법에도 나와
있다. 시준은 침묵했다.
“내 들은 바로는 몇 년 전 장자도 일로 위에서 성려가 있어 국경에 눈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어. 송상이라면 이 판을 좀 키워서 일개 진영(鎭營) 정도 움
직이는 건 일도 아니지. 평안도 놈들, 그중에서도 장사치 따위야 ‘군대가 지
나가는 민폐’로 기둥뿌리까지 날아간들 누가 탄식이나 한 번 하겠는가.”
시준은 홍경래가 자그마한 조기를 입에 가져가 통째로 넣는 것을 지그시 건너
다보았다. 마치 만상의 미래를 암시하듯, 조기는 홍경래의 입에서 머리와 뼈
째로 씹혔다. 우득우득 하는 섬뜩한 소리가 고요한 반상 위를 떠돌았다.
시준이 말했다.
“그러하시다면 홍 선비께 구문을 치러야 하겠군요.”
홍경래는 지금 자기가 송상과의 마찰을 어느 정도 무마해 줄 수 있다고 말한
셈이다. 당연히 공짜는 아닐 터. 시준은 지금 홍경래가 이 충돌을 조장했다는
강력한 의심마저 가졌다.
‘너무 타이밍 좋게 나타났잖아.’
아까 반응으로 봐서 박광유가 홍경래의 부하 같지는 않지만, 사람을 조종하는
일은 꼭 직접 말해야만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홍경래의 역량이라
면 소문을 선택적으로 흘리는 것만으로도 송상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준은 조건을 들어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홍경래는 빠르게 진행되는
논의에 만족하며 조기를 삼켰다. 시준은 목에 가시나 걸려 버리라고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구문이라고 할 것은 없고, 아까 말한 대로 자네 얘기나 들어보지. 요즘 장자
도에 툭하면 떠내려오는 그 영길리국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 보세.”
술까지 털어넣은 홍경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준으로서는 아쉽게도 가시
가 목에 걸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홍득주는 자욱한 담배 연기 아래에서 음산하게 물었다.
“대가는?”
“선대(선투자)하는 조건으로 인삼을 지금보다 1할 더 주겠답니다. 그리고 모
자 판매에 대해서는 향후 일절 시비하지 않으며, 용만 사람들에 대해 어떤 해
코지도 없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홍득주 역시 ‘홍경래가 뭔데 그런 약속을 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홍득주
는 시준보다 훨씬 홍경래와 오래된 사이이며, 그의 역량도 잘 알고 있다.
곽산 선비 김창시와 가산의 부호 이희저는 그 거래 규모상 둘 모두 송상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리고 시준은 몰랐지만 둘 다 홍경래와 문경지교
(刎頸之交)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이였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원하는 게…… 자기도 영길리국 배가 또 오면 구
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장자도의 밀매 건에 끼고 싶다는 얘기는, 곧 만상의 영역인 의주와 용천에 홍
경래의 손발을 뻗치겠다는 이야기다. 홍득주는 그저 입담 괜찮은 거간꾼 정도
로 알았던 홍경래가 이토록 무섭게 컸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홍득주는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이자가 알고 있다고 봐야겠구먼. 병장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렷다?”
“제가 어찌 감히 그랬겠습니까. 다만 냄새를 맡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정부 기밀조차 줄줄 새어나가는 시대. 애초에 시준도 이 표류 무역의 비밀이
계속 지켜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도 처벌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놓으려고 노력했다. 근문소로 수
령들을 엮어 놓은 결과가 지금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알력 다툼이요, 암행
어사로 인한 평안 감사와의 면담이며, 송상과의 마찰이다.
시준이 시끄러운 일 생기지 말라고 해 놓은 여러 조치들은 자연스럽게 의주
만상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새롭게 번거로운 일을 불러왔다.
시준 또한 이제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마련한 체제
는 더 많은 돈이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
이제 와서 멈추고 원래의 시골 상단으로 돌아갔다가는 남은 평생을 그간의 죄
가 들킬까 두려워 떨면서 살아야 한다.
홍득주는 사태를 간단히 정리했다.
“산남이 그 친구가 제법이군. 무슨 천지 뒤집힐 일을 꾸미는지 몰라도, 송상
과 우리를 한 손에 쥐고 흔들어 돈을 우려내려는 속셈일 터. 사람과 돈이 필
요한 일이라면 어지간한 대업(大業)이 아니겠지.”
“대업이라고 하시니 말씀입니다만, 필시 불온한 일이 분명합니다. 영길리국
사람들의 화포와 선박이 정예하다는 것이야 널리 알려졌으니 그쪽으로는 병장
기를 탐내는 것이겠지요.”
“네 생각은 어떠하냐?”
“두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첫째는 지금 당장 홍경래의 일을 고변하는 것입니다. 다복동에서 사람들이
대열을 맞추어 소리 지르고 깃대 내미는 일은 이미 임상옥 행수가 오래전에
몰래 들었습니다. 뭣하면 잠채 건으로도 엮을 수 있지요. 다만 이들이 자꾸
소혈을 옮기고 서신이나 격문 같은 것을 남기지 않아 물증을 갖추기는 어렵습
니다.”
시준은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홍득주도 알아들었다. 어차피 조정에서 조사가
들어오면 만상 또한 무사하기 어렵다. 만상도 반역할 생각만 없었을 뿐 홍경
래와 비슷한 일을 해 왔기 때문이다.
송상의 일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만상은 최근의 외연적 확장 와중 여기저기서
충돌할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차형기와 홍총각은 영국에서 수입한 총칼로 만
약의 일에 대비할 패거리를 꾸린 지 오래되었다.
칼을 두드리며 총을 깎아대는 일은 꽤 규모가 커야 하므로 조선 국내에서 들
키지 않게 하기는 어려우니, 밀수된 무기는 최고의 조건인 셈이다.
물론 이걸 가지고 관군과 겨뤄 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추고가 그런 사정을 봐줄 리는 없다.
홍경래가 같이 죽자고 끌고 들어가면 꼼짝없이 망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게
다가 홍득주는 아편 밀매 건도 같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홍득주는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둘째는?”
“둘째는 홍경래가 우리에게 하려 했던 일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아
마 평안도의 거상부고들로 하여금 자기 치중을 대게 하고 싶나 본데, 의주 사
람들이 그렇게 손쉽게 삼킬 수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범의
배 안에서 오장육부를 먹어치운다는 활(猾)처럼 말입니다.”
활이라는 짐승은 뼈가 없이 부드러워 범이 씹을 수 없으므로, 먹혀도 다치지
않는다. 그렇게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활은 뱃속에서 위장을 다 먹어버
리고 나온다고 한다.
송상을 움직여 만상을 제어하고, 그 대가로 송상에게 많은 이권을 받으며 만
상에게도 빚을 지워 놓는 홍경래의 책략은 날래고 변화무쌍하기가 표범과 같다.
표범에게 정면으로 대어들면 그 발톱과 이빨에 찢긴다. 이럴 때는 순응하는
책략을 써야 한다.
시준은 홍경래에게 숙여 주고 협조하는 척하면서 홍경래의 휘하 부자들, 그리
고 더하여 평안도의 송상 세력과 그 판로까지 안에서 전부 집어삼키자고 말한
것이다.
반란 때문에 인망을 얻어야 하는 홍경래는 최초로 자신에게 적극 협조하는 만
상을 박대할 수 없다. 시준은 여기에서 얼마 안 되는 역사 지식을 동원하여
홍경래의 반란 캐치프레이즈를 계획에 결합시켰다.
‘홍경래는 평안도의 차별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송상은 어차피
믿을 파트너가 아냐. 평안도에 거점을 둔 우리를 유일하게 의지하게 만들면
그 뒤는 쉽지. 배반은 일이 성취되기 직전이 가장 치명적이다.’
홍경래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 최후의 발악을 하
거나, 아니면 얌전히 자기가 만상 휘하로 들어오거나.
시준은 홍경래가 첫 번째 선택을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쯤
세력을 상당히 잃었을 홍경래에게 단검 든 양아치 하나 보내면 되는 일이니
까. 그러면 시준의 은퇴 계획을 방해할 자 아무도 없다.
홍득주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옳다, 요놈. 네가 내게 온 뜻도 알겠다. 내가 산남을 불러 잘 얘기해 보마.
마침 몇 년 전 너도 아는 그 다복동 금광 일로 산남이 온 것에 대해 어물쩡
넘겨 버렸었지. 기억나느냐? 그 핑계가 좋겠구나.”
“과연 장주님이십니다.”
시준은 빙긋 웃었다. 조선 사람들은 역시 그의 생각보다 훨씬 똑똑했다.
한 달쯤 뒤, 홍경래와 홍득주는 서로 시침 뚝 떼고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근문소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과연 장주님께서 다시없는 덕
을 보이고 계십니다. 범중엄(范仲淹)이 보릿섬을 배에 실어 내어준 일[麥舟]
정도는 어찌 비교되겠습니까?”
과연 지금 홍득주가 풀어버린 재물의 규모는, 범중엄이 아들로 하여금 희사하
게 한 보리 500석 ‘따위’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홍경래는 요 몇 년 사
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만상의 저력이 자기 예상보다도 훨씬 더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 돈 상당 부분은 만상의 정규 회계가 아니라 책문 뒷골
목에서 아편 팔아 번 돈이니까. 시준은 조금 복잡한 심회였지만 여기 모인 엄
청난 수의 유랑민들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홍득주 또한 능청을 떨었다.
“백성이 되어 나라의 뜻을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야 내 법금
이 두려워 자네 서운하게 했지마는 이제 그것이 풀렸고, 게다가 나라에서 걱
정하는 유민(流民)까지 생업에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겠지.”
가경 11년(1806년), 조선 정부는 드디어 사적 채광에까지 세금 납부를 조건으
로 금점 개설을 허용하게 된다.
흔히 덕대(德大)라 하는 자는 주로 사금 채굴의 운영자를 이르고, 혈주(穴主)
역시 비슷하지만 말 그대로 구멍을 파는 귀금속 광산의 경영자를 말하는 점이
약간 다르다.
이 혈주와 덕대는 보통 지역 유지이고 광업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허가는 그런 사람에게 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령에게 허가를 받아내어 줄 수 있는 뒷배 겸 투자자가 필요했는데
이 사람들을 물주(物主)라 한다.
물주는 신분이 상민보다는 높으면서도 돈이 많고 관청에 아는 사람도 많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이 평안도에서 홍득주보다 더 적당한 자도 거의
없다.
그래서 홍득주는 이전에 홍경래가 제안했던 다복동 금광 투자를 확대하여, 가
산군 및 운산군을 비롯한 대여섯 개 고을에 설점(設店) 허가를 받아내었다.
어차피 평안도에서 잠채에 종사하고 있는 유민들은 썩어넘치는데 유민 모아
금 캐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홍득주는 ‘나라의 허가’라는 강력한 무기를 휘둘렀다. 원래 어느 시대
건 관청이 어쩌고 하며 복잡스러운 문서와 증서 내보이면 뭔가 권위가 있어
보인다.
덕대와 혈주들을 홍득주가 구워삶는 동안, 수령과의 협상은 시준이 맡았다.
시준의 조언과 그에 따른 피나는 노력으로 여기 모인 유민들의 명부는 광산별
로 전부 작성된 뒤다.
이 서류는 관청과 만상, 덕대며 혈주들이 각자 사본을 보관하여 함부로 변경
할 수 없다. 따라서 관청은 광산의 유민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잠채 단속 얘기하면서 어느 고을에 광산이 몇 개 있는지 보고서에 꼭 써야 한
다는, 공무원 입장에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논의가 묘당에서 이루어지는 게
지금의 조선이다.
이리 세세히 파악하고 자랑스레 장계를 올릴 수 있다면 지방관으로서는 군계
일학. 게다가 떠돌아다니는 팔자가 마음에 흡족할 사람이야 많지 않으므로,
장기적으로 고을의 호구로 정착시키기도 쉽다.
수령들은 서로 홍득주에게 허가를 내어 주고 싶어 안달할 지경이었다.
‘책상머리 펜대라고 하면 자칭 실용주의자들은 우습게 보지만, 문서와 장부라
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위에서는 문서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준은 시커메진 눈밑을
꾹 눌렀다. 피곤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작가의 말
1. '활' 이란 교활하다고 할 때 그 '활' 자입니다. 원래는 짐승의 이름이었죠. 아마 박지원의 '호질'에서 익숙하신 이름일 겁니다.
2. 범중엄은 송대의 명재상입니다. 어느 날 아들 요부를 시켜 고향에서 보리 500석을 배로 실어오게 하였는데, 아들이 중간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처자식이 다 죽었는데 상 치를 돈도 없다고 하소연하자 요부는 그냥 500석에다가 배까지 통째로 주고 빈손으로 덜렁 옵니다. 범중엄은 아들에게 '잘했다.' 라고 할 뿐 탓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통 크게 적선하는 것을 뜻하는 '맥주', 즉 보리 실은 배라는 숙어가 나왔습니다.
8. 바뀌는 물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