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화 (22/284)

22화

7. 평안도 사람들(3)

표류 무역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약용은 한 번도 서양 배를 보지

못했다. 희만당의 공부 시간에 정약용은 다시 제자를 질책했다.

“아니, 영길리국 배가 또 왔었다고? 그 바지를 계속해서 내다파는 것을 보니

천도 다시 실어왔나 보구나.”

“예. 이번에는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습니다.”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는 투였다. 그래서 정약용은 침묵했고 시준은 말을 이었다.

“일전 감사를 뵈었을 때, 자중하고 계시라는 말씀이 있으셨으니까요. 제자로

서 어찌 스승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약용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야 사람들이 알면

서도 모른 척해 준 거지, 귀양 죄인이 어딜 감히 고을을 넘어 유람을 다니는

가 말이다.

그렇게 정약용을 사실상 희만당 연금 상태로 만들어 놓은 시준은 마음 놓고

밀무역에 종사했다. 정약용은 하릴없이 감자나 캐다 곧 서방에 틀어박혀 감자

농서를 쓰기 시작해서 더 이상 시끄럽지도 않았다.

이쯤 표류했으면 황해에는 잘 안 올 만도 하건만 동인도 회사 선박은 지치지

도 않고 계속 떠내려왔다. 시준은 그들에게 이전에 없던 물건을 주문했다.

이번에 장자도에 온 배는 동인도 회사가 전세 낸 선박 캐나다(Canada)였다.

이제 동인도 회사에서 탄탄한 입지를 쌓은 존 레디 선장은 조선의 다른 쪽 해

안을 탐색해 보러 떠나고, 원래 죄수 수송선 겸 화물선이었던 이 배가 중국에

왔다가 호주로 가는 대신 조선에 온 것이다.

캐나다호의 선장은 홍득주 대리로 나온 임상옥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파크(Park)요. 이 배의 선주 겸 선장이지. 파크 선장이라고 부르

시오.”

시준의 통역을 들은 임상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박(朴)?”

파크 선장은 자신의 이름을 제법 알아듣는 것 같은 이 조선인에게 감탄하여

손뼉을 쳤다.

“그렇소!”

임상옥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득출(得出)이. 이자가 박씨라는데?”

“어? 자네 부모가 혹시 평안도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내 육촌 동생인가가 어

릴 때 강가로 놀러 나갔다가 안 돌아왔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오랑캐 땅

에 오래 살아서 그런가 쌍판이 오랑캐가 다 되었구먼. 이역만리에서 고생이

많기도 하지.”

재봉장(裁縫長) 박득출이 장단 맞추어 끼어들었다. 호칭이야 그럴싸하지만 그

냥 임상옥 휘하에서 바지 만드는 여인들을 모집하고 제작을 관리 감독하던 사

람이었다.

시준은 박득출의 말을 굳이 통역하지 않고 바로 업무 얘기로 들어갔다.

“여기 있는 임상옥 행수는 섬유 가공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에게서

수입한 천을 사들여 조선 국내 생산과 판매를 전담하지요. 그래서 말인데, 이

번에는 좀 다른 품목을 받고 싶군요.”

이미 동인도 회사는 이 밀무역의 핵심이 시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파크 선장도 시준을 거래 상대자로서 대우했다.

“아편은 이번에도 안 사시려오? 당신들은 안 피운다 해도, 광저우에서 의자와

책상만 갖다 놓고 팔면 단 하루 만에 족히 5만 스페인 달러를 벌 수 있소. 당

신들은 중국인과 비슷하니 몰래 들어가기도 더 쉬울 텐데.”

“당신들 정말 끈질기군요.”

“핫핫. 우리는 이쪽이 전문이라. 어쨌든, 다른 품목이란 무엇이오?”

시준은 최대한 시장을 잘 아는 척하며 말했다.

“혹시 모직물은 취급하지 않습니까? 담비나 수달 가죽이 필요한 건 아니고 양

털 정도만 되어도 충분합니다. 원래 동북 국경(함경도)을 통해 러시아에서 접

촉이 있었는데 조건이 별로 좋지 않아 동인도 회사에 문의하는 겁니다.”

물론 죄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함경도 근처도 오지 못했으며

시준이 아는 것은 러시아의 동진과 그 동기 정도였다. 러시아는 분명 모피를

탐내 동쪽으로 끝없이 뻗어갔고 알래스카까지 다다랐다.

그래서 시준은 조선에서 대량 공급되기 힘든 모자용 양모 천, 그러니까 펠트

를 러시아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생에서 어느 매체를 보건 러

시아 녀석들은 항상 머리에 둥근 털모자 같은 걸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달리 물건 떼 올 데가 없으니 당신들이 러시아 털가죽을 사

서 팔아주시오’ 하면 국제적 호구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준은

허풍을 쳐 본 것이었다.

파크 선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러시아인이라? 안타깝게도 러시아와 영국의 무역은 유럽에서 이루어지지 아

시아에서는 거의 없소. 양모는 아시아까지 실어 와서 팔 물건도 아니고,

흠……. 가격을 맞추기가 쉽지 않겠는걸.”

시준은 혹시 너무 튕겼나 싶어서 급히 다시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통역을

듣고 있던 임상옥이 한 발 나섰다.

“그럼 됐소. 안 되면 할 수 없지. 피차 세월아 네월아 하며 장사할 처지도 아

니니, 원래 바꾸기로 했던 물건들만 서둘러 매매합시다. 양털이야 없으면 어

때. 홍삼은 여기 가져왔소.”

만상도 이득을 보지만, 동인도 회사는 이득이 없더라도 조선 거래선을 놓치기

힘들다. 동인도 회사는 이 표류 무역을 차후의 개항을 위한 포석으로 보고 있

었고, 조선 무역은 동인도 회사가 그냥 중국에 눌러앉아 아편이나 파는 약장

수가 아닌 진취적인 개척자들임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상옥의 배짱은 잘 먹혔다. 파크 선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파

이프에서 연기를 내뿜었다.

“쉽지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안 했소. 당신들은 운이 좋군. 마침 아메

리카의 반란군 놈들이 자기네 털가죽을 팔게 해달라 애걸하던 참이거든.”

애걸이라기보다는 협박이라고 말하는 게 적절하다. 마찬가지로 옷감과 가죽

판로가 필요했던 미국인들은 이 시기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독점권에 대

해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왔다.

지금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묘사하자면 1950년대의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기왕 전쟁까지 했는데 아시아 촌구석에서 영국 배 한둘

가라앉히는 것쯤 못할 게 뭐냐는 암시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이름 좀 날렸다는 교활하고 신중한 미국 상인 존 제이콥 애스터

(John Jacob Astor)가 바로 그 첨병이었다. 물론 미국의 해군력이 그 정도는

안 되지만, 영국도 극동아시아에 별다른 군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피 보기 싫은 동인도 회사와 대프랑스 전쟁에서 미국을 회유하고 싶은 영국

정부의 의지는 일치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미국에게 헛소리 말고 꺼지라는

소리는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파크 선장이 은근히 말했다.

“그래서 일단 물건이나 보자고 회사에서 사들여 놓은 게 마침 있지. 바다표범

이나 해달 가죽도 있는데 이건 얼마 안 되고, 양모라면 선창에 꽤 많이 실려

있소. 당장 드리는 것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이건 원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

서 죄수 방한복 만들 물건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당연히 만상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았다. 돈을 조금만 더 얹어주면, 뼈마디가

좀 시릴 오스 어쩌고 하는 곳의 죄수들만 제외하고 나머지가 다 행복할 것이

라는 의미다.

추가 가격이 대강 조율되자 임상옥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죄를 지었으면 엄중히 반성해야 하는 법. 따뜻한 옷 입고 아랫목에 누

워 지내서야 그게 어찌 죄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의를 조심스럽게 지키는

이 동방에서는 죄수 따윈 한겨울 홑옷도 감지덕지지. 가격은 그 정도면 괜찮

을 것 같소.”

시준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금 아직 가을쯤일 터. 그곳의 겨울이 그리 혹독한 것도

아니니, 털가죽 옷은 좀 나중에 입어도 무방하겠지요. 이 북방은 매우 춥습니다.”

파크 선장은 이 야만족이 남북반구의 계절 차이까지 아는가 싶어서 한쪽 눈썹

을 치켜올렸다. 다시 한 번 이 동네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한 시준은

추가 지출을 하여 영국 배에서 양모와 다른 모피를 많이 사들일 수 있었다.

이 일의 의미는 또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홍득주 상단의 사업이 아니라는 것

이다.

이 양모 건은 임상옥과 손잡고 벌이는 시준의 개인 사업에 속한다. 대신 홍득

주는 명색이 양부자간이고 자본금을 투자한 바도 있으므로 그 이득 정도는 갈

라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점점 시준 자신의 사업 부피를 키워서 15세 성인이 된 이후 독립

해 나가면 홍경래의 대규모 민폐를 피해 의주에서 잠시 떴다가 돈 모아 돌아

오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나이 스무 살에는 한창 젊어[弱] 관(冠)을 쓰므로 약관이라 하지만, 그때쯤이

면 시준은 이미 은퇴하고 어떤 것에도 유혹되지 않은 채[不惑], 천명을 아는

[知天命] 자세로 대청마루에서 수박이나 씹을 것이다.

이것이 공무원 시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파이어족의 절정. 시준이 바라는 삶

이었다. 그래서 시준은 한층 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모자 만들 사람은 틀림없이 있다고 하셨죠?”

시준이 돌아가는 길에 묻자 임상옥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 뭐, 서장관이니까 내 비밀히 얘기해 줌세. 홍 장주께서 오갈 데 없는

청나라 사람들을 두어 명 보내 주셨거든. 중후소 것하고 감쪽같이 똑같게 만

들 수 있단 말이야. 애초에 그 모자야 조선에도 많으니 갖바치들 좀 모아다가

보여주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네? 청나라 사람을 어떻게 조선에?”

시준도 모르는 얘기였다. 지금 시준의 위치상 홍득주 상단에서 시준이 모르는

일은 홍득주의 개인적인 거래 정도뿐이었다.

만상이 청국과 밀거래를 오래 해 왔으니 그런 밀입국 루트가 있을 수도 있다.

허나 요동의 뒷세계는 이제 조선 상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시준은 홍득주가

어떻게 그것을 부활시켰는지, 그리고 자기는 왜 그것을 몰랐는지 궁금했다.

‘잠깐, 인삼 말고 청에 몰래 팔아먹어 이문 많이 남을 물건이면 아편뿐인데.

그때 차형기랑 뭔가 얘기하는 것 같더니만 설마…….’

시준은 감자 농사할 때 홍득주가 땅 사면서 예상보다 더 많은 지출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홍득주 자신이 미래를 위해 비장하려나 싶어 더 참견하지 않

았는데 양귀비 재배를 알아보고 있었다면 말이 된다.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도 양귀비는 충분히 재배되고, 시준이 알기로도 북한 정

부는 아예 국책 사업으로 아편 농사를 지었다. 소위 ‘백도라지 사업’이 그것이다.

왠지 몰라도 시준이 아편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굳이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시준은 이 개탄할 일에 대해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그만큼 존중해 주

는 홍득주 상단에 감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느 쪽이든 싫어.’

조선은 현대 시민국가의 구성원이었던 시준에게 너무 가혹한 스트레스를 주는

곳이었다. 도덕은 그냥 포기한다 치더라도 만약 아편 흡연이 조정에 걸리면

뒷감당이 안 된다.

시준은 여기에서 홍득주에게 진언하여 양귀비 농사를 그치게 한다는 어리석은

선택지를 택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이미 홍득주 상단과 만상의 치부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자는 중에

홍총각이 찾아와서 머리에 하얀 도끼 하나 고이 박아놓고 나비처럼 가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어쨌든 빨리 튀어야겠어. 점점 위험해진다.’

그러려면 모자 장사가 잘 되어야 한다. 시준은 앞으로 3년 안에, 그러니까 자

기가 15세가 되는 그 순간 의주를 떠서 파이어족의 첫발을 내디딜 계획을 세

우고 있었다.

미성년자의 운신이 불편한 것은 조선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시준은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지금이 1806년이니 홍경래가 난

을 역사보다 빨리 일으키지만 않는다면야 그의 계획은 때가 잘 맞아떨어진다

고 평가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준의 계획은 이미 전생에서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다.

“야, 박득출이 이 새끼 어디 있어!”

장쾌(駔儈; 중개인) 집에 거래 얘기 차 왔다가, 시준이 일을 다 하는 바람에

마땅히 할 게 없어 영길리국에 내 헤어진 육촌 동생이 있었다는 만담이나 한

창 풀어놓던 만상 재봉장 박득출은 깜짝 놀랐다.

척 보기에도 눈에 독기가 서린 무리들이 대여섯 명이나 사립문을 뭉개고 들어

왔기 때문이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일전에 인삼 사러 강계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송방

차인 박광유 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해 온 박광유는 박득출과

장쾌, 그리고 심부름하는 아이 정도만 있는 것을 보자 호기가 만장이나 치솟았다.

“그 애새끼는 어딜 가나 항상 달고 다니는구나. 어디 뒤라도 닦아 주는 놈이냐?”

사실 시준을 따라온 것에 가까운 박득출은 어이가 없었지만, 시준은 눈짓하여

그를 제지했다.

장쾌는 벌써 자기 집도 내버려두고 도망가 버렸다. 저들은 돈이라면 부모의

간도 빼다 팔아먹을 송상 패거리다. 박광유가 시준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말

했다.

“너 예전에 국법이 어쩌고 했었지. 이게 국법의 엄정함이냐? 나라에서 모자를

함부로 사들이지 말라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평안도에서 개나 소나 사

가고 있는 이 털모자는 무엇인가 말이야! 박득출이 너 아주 요새 재미 좋더

라? 임상옥이도 홍득주와 한 패더냐?”

시준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주었다.

“모자를 청국에서 사 오지 말라고 했지, 어디 평안도 사람은 털모자 쓰지 말

라는 어명이라도 계셨소? 모자 만들어 파는 것이 세상 어디에 떳떳치 못할 것

이 있소?”

“너 지금 우리가 아주 덜떨어진 등신으로 보여? 청국에서 사오지 않았으면 그

럼 이 양털이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땅에서 솟았느냐? 언제부터 의주 놈들이

송방에 고하지 않고 외국에서 물건을 떼다 팔아댔어? 잠상(潛商) 짓을 아주

대놓고 하는구나!”

관모제로 수입한 모자는 만상이 송상에 유통시켜 파는 것이 지금까지의 업무

분배였다. 독점으로 남의 이익을 가로막은 적은 많아도 가로막힌 적은 없던

게 송상인데 이 상황은 억울하고 원통하다 못해 땅을 뒹굴 일이었다.

박광유가 여기에서 더 소리치는 것은 대장의 체신 문제다. 대장이 더 수고롭

지 않도록 서열 3위쯤 되는 덩치 큰 사내가 나섰다.

“형님. 더 말할 것 없소. 어린놈이 아주 고개 똑바로 들고 따박따박 대드는

것이 그냥 여기서 뒈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무리 어리다고 하나 내 잠상 찌

꺼기들은 한 놈도 살려둔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열일곱 명이나 강바닥에 묻

어 준 이 어르신의…….”

‘송상은 원래 다 17:1이 기본 소양인가?’ 하는 시준의 한가한 생각과는 정반

대로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 서열 3위쯤 되어보이는 남자는 다음 순간 땅이 자신에게 덤비는 익숙한 경

험을 하면서 얼굴을 지면에 처박았다. 술도 안 마셨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정면으로 때려 보는 건 처음이네.’

건실한 시준으로서는 전생에서도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정도

는 해야 건실한 남자라고 할 수 있다.

프로 복싱 선수가 내지르는 잽은 인류의 신경 반응 속도보다 빠르다.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턱을 얻어맞은 서열 3위는 뇌진탕을 극복하지 못해 꿈틀거릴

뿐이었다. 시준은 다시 박광유를 보고 말했다.

“청에서 사온다면 관례를 존중하겠으나, 우리가 스스로 갖바치들 모아다 모자

만드는 일까지 송방의 허락을 받아야 하오?”

박광유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보았더라도 이제

물러날 수는 없다. 결국 송상들은 그 상황에서 그나마 최선의 선택을 했다.

“쳐 죽여!”

사람 여러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시준의 체구도 이제 웬만한 열다섯 살짜

리 정도는 되었기에 격투전에서 그다지 꿀릴 것은 없었다.

필요한 것은 때리거나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싸움박질의 경험

을 무슨 관록이랍시고 자랑하겠느냐마는,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이것 때문에

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시준은 진취적 감정이 별로 없는 대신 공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는 복지 혜택으로 받은 신체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러고는 그에 따라

서 업무 처리를 하듯 깡패들을 때려눕혔다.

‘어디 보자. 처음에는 얼굴이었나.’

코뼈가 부러지거나 눈두덩이를 얻어맞으면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피 하나는

아주 거창하게 난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면 기력이 쭉 빠지고 싸움을 계속

하기 어렵다.

시준은 상대방의 상투를 잡고는 그대로 당기며 무릎으로 얼굴을 찍었다.

뻑!

무릎에 느낌이 왔다. 그놈이 죽는 소리를 하며 나뒹굴자 시준은 발을 들었다.

머리는 함부로 걷어차면 안 된다. 죽는 사람이 나오면 골치 아프기도 하고,

두개골은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라 잘못하면 시준의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데 조선 시대에는 평생 장애가 될 수도 있는 부상이다.

시준은 쓰러진 놈의 가슴팍을 세심하게 걷어찼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호흡을

막고 일어설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커, 커억!”

시준은 지금 용천부 공방에서 모자 만드는 것처럼 절차와 필요에 따라 계획적

으로 다섯 명의 깡패를 망가뜨렸다. 비수를 빼들었던 마지막 놈은 시준이 섬

돌을 집어다가 던지자 다리가 깔려 으스러져 버렸다.

어느새 혼자가 된 박광유는 뒤로 세 걸음쯤 물러났다. 그때가 되자 완전히 기

세를 회복한 박득출은 거의 어깨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바람이 들어가

건들대며 나섰다.

“너희야말로 평안도 사람들을 등신으로 보지 마라. 언제까지 송상이 여기에서

제 집처럼 거들먹거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원 세상에, 우리가 알아서 만들

어 파는 일도 건방지다고 야료를 부려? 우리가 네놈들 노복이라도 되느냐?

어? 종놈이냐고?”

시준은 그때가 되어서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해 보

니 만상은 사실상 전국을 장악하고 있던 송상을 적으로 돌린 것이다.

시준이 이번에 송상을 두들겨 패서가 아니다. 이미 송상은 그 전부터 만상을

적으로 인식하고 이번에 시빗거리가 생기자 쳐들어왔을 뿐이다.

원인은 일전 인삼 건에 있었다. 송상이 집요하게 추적한다면 자기가 못 산 인

삼이 어디로 갔는지 정도야 모를 리 없다.

그 후에 송상에서 황첩을 새로 받아오고 나서, 거래선도 원래대로 되돌아갔기

에 시준은 송상이 계속 원한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준의 헤아림이 모자란 것이었다. 이 면에서는 홍득주 역시 놓친 것

이 있었다. 전국구 상인이었던 적이 없는 그들은 송상이 자신의 전국 지배를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실수다! 이래서야 내가 다 내버리고 튈 수가 없잖아? 책임 문제도 있고!’

박광유는 그 실수를 정확히 지적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너, 너, 너희가 이러고 무사할 줄……. 내 당장 와주(窩主, 전주)에게 달려가

고하여서…….”

“어…… 말 못하게 그냥 여기서 죽여야 되나?”

시준은 너무 머리가 복잡해진 나머지 그 말을 실수로 입 밖에 꺼내놓고 말았다.

거기에 대답한 사람은 이제 거의 혼절한 박광유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이자들이 평안도에 사람이 없는 줄로 깔보는 바가 괘씸하고 그

품성이 비루하다 해도 그건 너무나 무도하지 않은가.”

바깥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준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작가의 말

1. 캐나다호의 선장 파크는 실제로 1806년 중국에 왔습니다. 단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뿐... 캐나다호는 주로 죄수나 화물 수송선으로 많이 활동했습니다.

2. 당시 미국인들은 북서 태평양에서 획득한 바다표범과 해달 가죽의 판매처를 찾고 있었고, 당대의 백단향 무역 거상인 존 애스터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지속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7. 평안도 사람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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