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7. 평안도 사람들(2)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에는 허생이 만 냥으로 전국의 온갖
물목을 좌우하여 떼돈을 벌었던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허생이 하던 방식, 그러니까 대량 자본을 이용한 물가 조절과 그로 인
한 이익 창출은 늦잡아도 100년 전부터 조선 상인들이 널리 사용해 왔다.
새로운 방식도 아니거니와, 선비 하나가 안성 내려가서 돈 풀어놓는다고 먹힐
방식도 아니다. 만약 허생전이 진짜였다면 허생은 안성 어디 뒷골목에서 시체
로 발견되고 끝났으리라.
19세기 초까지 오면 이미 경상(京商)들이 수도권 일대의 곡물 유통을 완전 장
악했을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함선까지 제조해서 전국의 쌀값을 떡 주무르듯
하며 미곡을 날라 팔던 시대다.
게다가 조선 상인들은 이 장사가 허생처럼 일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유지
될 수 있도록 면밀한 고려를 더했다.
지나친 독점으로 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알아서 기며 한편으로 긴밀한 정경유
착을 유지한다. 감히 한몫 잡아 보려는 중소 사상(私商)들은 철저히 따돌리
고, 대드는 놈은 안 보이는 곳에 잘 묻어 준다.
그래서 상인들은 동네 보따리 행상으로 만족하지 않으려면 도중(都中, 상인
길드. 특히 송상의 것을 말한다)에 의지하여 거대 단체에 소속되는 수밖에 없
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서울의 경상, 개성의 송상(松商), 의주의 만상 등이
그러한 단체들이다.
시준이 속해 있는 홍득주 상단 역시 그 만상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면면을 자
세히 보자면, 적어도 인삼 무역에 있어서는 만상은 송상에 비교하면 하청업체
수준밖에 안 되었다.
송상은 일찍부터 인삼 유통은 물론 생산에마저 관여했고, 그것은 현대에도 유
명한 개성 인삼을 탄생시켰다. 만상은 이를테면 그것을 청에 넘기는 수출 유
통책일 뿐이었다.
만상이 인삼만 파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전문 분야는 대청 무역. 국내에서는
큰소리를 못 쳤다. 특히 인삼의 국내 유통은 송상이 꽉 쥐고 있었다.
비단 인삼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만상이나 경상과 달리 송
상은 일찍부터 조세 감면 혜택에 힘입어 전국적 유통망을 확보했다.
송상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포구를 장악하고 제주도에서 들어오는 품목을 독점
하여 서울 시전을 거치지 않고 유통시킴으로써, 상인들이 서로 고발하는 사건
이 묘당에서 논의되기까지 했던 영조조의 일은 송상이 전근대 국가에서 있기
힘든 전국구 상단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허생 정도는 엎드려서 형님 소리를 해야 할 능란한 솜씨에 한층 음험하기까지
했다. 홍득주 상단이 홍삼을 갖고도 위험한 대외 밀무역을 시도해야 했던 이
유가 이것이다.
대책 없이 송상을 건드렸다가는 전국에 좍 깔린 송방에서 어떤 녀석이 나와
등에 칼침 꽂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성실근면의 표상으로 알려진 송
상이라 해도 그건 19세기의 성실이고 근면일 뿐이다.
이 동네 송방(松房, 송상의 지역 지점)의 차인(差人) 박광유(朴光有)가 벌게
진 얼굴로 다 낡아빠진 종이를 흔드는 데에도 그런 송상의 막강한 힘에 대한
신뢰가 적잖게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라에서 발간한 이 황첩(黃帖)이 보이지 않느냐 말이야? 엉? 내가 누군지
알아? 지금 외지 사람이라고 깔보나 본데. 개성에서는 박가라고 하면 모르는
자가 없어! 이, 이 선천환(宣川換, 선천에서 유통하는 송상 어음)에 찍힌 도
장을 보라고! 신용이 어쩌고 하는 게 지금 개가 짖는 소린가, 말이 우는 소린가?”
황첩이라는 것은 당시 호조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인삼 거래 허가증이었다. 이
것을 가진 자만이 해당하는 인삼 산지에서 인삼을 사 와 호조에 보고하고 유
통시킬 수 있었다.
구매와 운송, 유통 과정은 모두 해당하는 장부가 있어 정부가 기록을 관리하
고 지역의 책임자들은 그것을 감독했다. 법대로 되기만 한다면 조선 국내의
인삼 유통은 전부 호조가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법대로 되는 일 따위는 조선에 없었지만 말이다.
박광유가 이렇게 소리를 질러야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황첩은 분명 용
도와 기한이 한정되어 있지만 기한을 넘겨서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심지
어 다른 상인에게 멋대로 팔거나 양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박광유의 경우도 그러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이 강계(江界)의 인삼밭 증포소
(蒸包所)요, 앞에 있는 자가 글줄 모르는 포주(包主)다 보니 그냥 흔들어서
강짜를 부렸으나 이 황첩은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다.
정당하다면 굳이 공격적으로 나올 이유가 없다. 포주 역시 글 따위 몰라도 그
황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쯤 능히 짐작할 만했다.
“이 무식한 놈이 뭘 알겠소. 위에서 요즘 신용 없는 장사꾼들이 나다니니 함
부로 인삼 팔지 말라 단속하는 것이 우심해져서 말이지. 그저 우리 별장(別
將, 여기서는 인삼 수출권을 가진 포삼별장. 주로 만상 관계자였다) 나리 오
시면 다 끝날 것을 왜 이리 난리요? 좀 기다리시우.”
“송방을 이렇게 괄시하고 무사할 줄 아는가!”
“괄시는 누가 괄시를 했다고 그래? 별장 나리가 허락만 한다면 내가 좋은 놈
으로 골라 담아 드릴 테니 엄한 트집 잡지 말고 앉았다 가쇼. 아, 배가 고파
서 그런가? 의주감자라도 하나 드시겠소?”
박광유는 삶은 감자를 씹으며 분을 삭였다. 감자가 맛난 건 맛난 거고 용서할
수는 없다. 그 별장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뭘 모르는 신참임에 분명하니, 자
신이 단단히 혼을 내 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항상 오던 곳이다 보니 오늘은 공교롭게도 힘쓰는 아이들을 딸리지 않았지마
는 웬만한 녀석은 그 자신의 주먹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포주 들으라고
씨부렁댔다.
“이 어르신이 이래봬도 소싯적에 개성 선지교(善地橋, 선죽교) 돌다리 위를
밟고 날아다니며 무려 열일곱 명이나 때려눕힌 몸이다. 어떤 놈인지 오기만
하면…….”
“아, 별장 나리 오셨구려.”
박광유는 벌떡 일어났다. 한 남자가 아이 한 명을 대동한 채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내가 이 동네 포주별장 하고 있는 의주의 홍가요. 그래, 송방에서 오셨다고?
요즘 관에서 영 법금(法禁)이 심해져서 미안하게 됐수. 어디 황첩 한번 봅시다.”
박광유의 결심은 홍총각의 장대한 체구와 험악한 인상을 보고 약간 바뀌었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선배 된 자의 도리다.
“아이고, 뭐 그런 종이쪼가리를 자세히 볼 게 있습니까. 송방에서 인삼 갖다
주고 용만 사람들이 청국에 팔고. 개개의 자리에서 제가끔 열심히 사는 이 아
름다운 법이 대체 몇 대째인데요. 그저 얼굴에 따악 나타나는 신용이 우리네
개성 사람들의 문서고 도장이지요.”
아까 나라에서 발행한 문서가 어쩌고 어음의 도장이 어쩌고 할 때와는 말이
사뭇 달라졌다. 홍총각은 박광유를 흘겨보는 포주의 시선을 한번 따라갔다가
성마르게 손을 내밀었다.
“안 보면 나도 중군(中軍) 나리께 경을 치니 어쩌겠소. 의주 근문소 얘기 못
들으셨나 본데 행상이 참빗을 하나 팔아도 다 근문소에 고하는 것이 법식이
되어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소이다. 송방과는 내 안면 깊은 사
이니 문서나 빨리 보여주시면 얼른 보고, 이 무례는 탁주라도 한 잔 내어 사
죄하리다.”
이쯤 되자 박광유도 별수 없이 태연한 척하며 문서를 내밀었다. 홍총각은 그
것을 옆에 있는 아이에게 주었다. 박광유는 여태까지 홍총각의 신발이나 행낭
과 비슷한 정도로만 유의하던 그 아이에게 단번에 주의가 쏠렸다.
‘사환 아이가 무얼 안다고?’
그러나 박광유가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았다면 홍총각 대신 아이에게 설명, 아
니 애원했을 것이었다. 치킨과 닭똥집으로 평안도 일대의 황첩 일제 단속을
이끌어낸 사람인 시준은 황첩을 살피고 능청스럽게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임술년(壬戌年, 1803년) 정월까지인데요. 벌써 삼 년이나 전이 아닙니
까. 그리고 여기에는 허가받은 사람 이름이 장시영(張時永)이라고 되어 있는
데 맞으신지요?”
“아, 맞네. 그러니까…….”
변명을 꾸며대려던 박광유의 옆에서 아까 감자 주었던 포주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이 분명히 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소싯적에 개성 돌다리에서 열일곱
을 때려눕힌 박가라고 하였습죠. 아까부터 아주 염불 외듯이 되뇌어서 소인이
똑똑히 기억합니다요.”
“오호, 손발을 좀 쓰시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박가라면 여기 적힌 것과는 다른 사람인데요.”
박광유는 포주에게 일갈하지도 못하고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다만 박광유는 개성 행수 장시영의 사인(使人)이라 그가 오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그래서 박광유는 장시영의 증빙을 보여주며 애원해 보았으나 시일이 지
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홍총각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라고 이렇게 인정머리 없이 놀고 싶겠소만, 나라의 금법을 어겼다가는 당
장 장하(杖下)에 목숨이 남아나질 않을 판이니 어쩌겠소. 장 행수께 미안하다
고 전해 주시고 새 황첩을 받아 오시구려.”
박광유는 가끔 여진족인지 조선인인지도 헷갈리는 의주 만상 부랑패놈들이 도
대체 언제부터 나라의 금법을 신경 썼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일이 많은 법이다. 상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박광유 또한 만상들이 청나라 사람 수십 명을 잡아 죽이고 입
싹 씻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눈앞의 깡패놈을 보니 그 소문의 진실성은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박광유가 터덜터덜 돌아가자 홍총각도 다시 시준을 데리고 돌아갔다. 물론 그
들의 짐에는 박광유가 가져가려고 했던 인삼도 추가된 채였다.
홍총각이 물었다.
“하지만 송상이라면 금세 진짜 새 황첩을 받아올 수도 있을 게다. 그러면 우
리도 별수 없어.”
시준은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그때가 되면 의당 인삼을 내주어야지요. 하지만 지금은 못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작년 평안 감사 이서구에게 치킨을 튀겨 줬을 때, 시준은 홍경래를 고발하지
않았다. 아직 증거가 없는데 역모에 함부로 엮였다가는 의주 역시 무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귀찮으니 그냥 둘 다 끌어와서 죽어라 패는 게 어떨까?’ 하는 방
책이 채택될 확률이 매우 높다. 흠흠신서는 정약용이나 되니까 쓰는 거지 이
시대의 일반적이고 과학적인 수사 기법은 여전히 매타작이었다.
그래서 시준은 다른 안건을 내밀었다.
‘만상이 인삼으로 먹고사는데, 요즈음 나라의 법을 어기는 잠상들이 너무 많
아 다 굶어 죽을 지경이다’라는 시준의 탄원은 평안 감사를 감동시켰다.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고발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서구는 체직하여 임지를 떠나기 직전 그 일을 마무리해 주었다. 후임자 이
면긍(李勉兢) 역시 법을 엄정히 지킨다는데 뭐라고 제지할 이유도 없어 그대
로 인계받은 참이었다.
바로 도내의 황첩을 엄히 단속하여 잠상을 막는 일이다. 중군과 좌수(座首)는
포삼별장들에게 주로 신고를 받았고 포삼별장 자리야 거의 다 만상의 것이다.
이면긍도 이 일의 필요성에는 동의했다.
강조하지만, 딱히 지금 왕이 이서구를 각별히 아껴 역적 권유의 도당이라 몰
아대는 신하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등 총애를 드러내서는 아니었다.
이서구를 보호하는 왕의 뒤에 파벌 싸움을 좀 수습하려는 김조순의 의지가 있
다는 것도 이면긍이 알고 있으나 절대로 그런 걸 고려하는 간신이 될 수는 없
었다. 법은 엄수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들 사람이다 보니 고을의 민정을 다스리다 보면 가끔 누락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송상에게 팔 예정이었던 인삼의 물량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
제인데, 그런 사소한 일쯤 아랫것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
그래서 그 아랫것, 그러니까 만상들은 지금 송상에게 통상 갔던 인삼을 직거
래로 매입하여 즐겁게 밀무역으로 팔아치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이득은 평안 감사 이면긍도 보게 된다. 뇌물이라는 중상모략은 당치
도 않다. 하민들이 다 나라 생각하는 마음에서 성의를 소소하게 보일 뿐이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조선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관의 일에 쓸 국가 예산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우연히 표착한 서양인들을 구조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영국인의 표류는 그 후로 두어 번 정도 더 계속되었다. 만상들은 ‘사재를 털
어 나랏님의 은덕을 전하고’ 영길리국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한사코 바친 답
례품’을 거두어 구문(口文; 수수료) 좀 떼고 평안 감영에 올렸다.
이 기묘한 교역은 동인도 회사에서 영국인다운 감각으로 명명되었다. ‘표류
무역(Drift trading)’이라고 보고서에 적힌 이 밀무역은, 굉장히 의외이지만
그 후로도 안정적으로 계속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근래 황해 해류의 변화가 있어 이 근해를 지나가다 길을 놓치
면 조류에 휩쓸려 장자도에 표착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 자료를 용천부에 제출
했다.
매카트니 자작이 황해를 남서에서 북동으로 가로지르는 용오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해 놓았고, 조선에도 선왕 정종(정조) 때 마찬가지의 기록이 있다.
영국인들은 조선이 외양 항해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점을 활용하여 괘씸할 정
도로 아귀가 맞도록 조작해대었다.
어차피 동인도 회사가 가짜 논문 휘두르는 게 처음이 아니다. 지금 광저우에
서 아편 치료제로 정평이 나 있는 조선 홍삼 거래에는 휴 길런의 논문이 항상
인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서울 조정에도 요점이 번역되어 올라갔다.
“하기야 그 희한한 용오름이 있었던 뒤로 이양선이 지나치게 평안도에 많이
온다 싶었지. 이제 모든 사정이 밝혀졌소. 불랑국의 배도 그 뒤에 전혀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세 해 전의 해적 얘기 역시 우연히 닿은 배가 놀
라서 가까이 있던 청인에게 행패를 부린 듯싶소.”
김조순은 그렇게 말하며 비변사의 당상관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이제 수수께
끼가 풀렸으니 이 일을 자꾸 들쑤시지 말라는 의미였고 모두가 당연히 알아들
었다.
물론 이 ‘모두’에 왕은 포함되지 않는다. 젊은 국왕 이공은 왠지 신하들이 작
당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 같은 느낌에 고심하다가 제왕다운 책략을 써 보기로
했다.
이공이 노린 것은 의주 만상의 또 다른 주 수입원인 모자였다. 이쪽은 만상이
청에서 사들여 파는 것이었는데, 사치품이라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결국 막을
수 없자 영‧정조 때 관허 무역으로 편입시켜 외교관 소요경비를 충당하게 된다.
“세모법(稅帽法)은 실로 선대의 지극하신 헤아림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듣기로 몇몇 모리배들이 모자의 개수와 품목을 속여 세를 빼돌린다 한
다. 선대왕께서는 이득에 몰려드는 자들까지 감싸 안으려는 덕을 보이셨으나
비루한 사람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겠다. 심지어 조정의 고관까지 냄
새나는 동전을 만져 그 몫에 끼어든다 하니 통탄할 지경이다.”
‘왕이라고 아주 대놓고 지어내네. 우리가 언제?’라고 말할 수가 없는 김조순
이하 신하들은 잠자코 있었다. 이공이 말을 이었다.
“돌이켜 보면, 조정의 중신이던 옛 대제학 문헌공(文獻公, 홍양호)은 말할 것
도 없고 말직에 있던 부사(府使) 박 모(朴某, 박지원)조차도 산의 한정된 은
을 캐어다가 겨우 석 달 겨울 나는 모자에 버려 버리는 사치를 엄중히 비판하
였다. 사치하면 불손하며 검소하면 고루하기 쉬운데, 불손하기보다는 고루한
것이 낫다[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儉, 『논어』]. 근래 재해가 매우
잦았던 바 이는 하늘의 견고(譴告)이니 삼가고 또 삼가는 도로써 이를 폐하는
방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하들은 그 모자에서 걷는 세금 없으면 모자란 국고에서 돈 꺼내 사신들 가
는 비용 댈 거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대왕의 법을 왜 마음대로 바꾸느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의 의도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모자가 아니라 평안도 자체, 그
리고 왕이 언급한 신하들의 이름에 있었다.
수렴청정 반교서를 썼던 대제학 홍양호의 이름은 이 경우 중요한 것이 아니
다. 중요한 것은 박지원이다. 선대왕 때 이름 날린 문사라 하지만, 그는 조정
에 있어서는 왕의 말처럼 중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박지원의 이름이 왜 나왔는가. 그가 모자 무역을 비판한 것도 사실
이기는 한데, 그보다는 그가 반남(潘南) 박가의 말예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
가문은 이공의 친모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가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공은 지금 외척이 김조순 네놈 하나만 있는 줄 아느냐고 말한
셈이다. 실제로 지금보다는 많이 늦긴 하나, 치세 중기 순조는 어머니 쪽 외
척 반남 박씨와 세자빈 쪽 외척인 풍양 조씨를 적극 등용하여 김조순을 견제
하려 한다.
이공의 다음 말은 그것을 더욱 여실히 드러내었다.
“내 간곡한 뜻을 제경은 어리석다 하지 말고 힘써 심찰하라. 내 서도의 기강
을 바로잡으려 한 지가 오래되었거늘 명이 상하로 잇대어 시행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국(備局, 비변사)에서는 살펴 아뢰라.”
김조순이 거쳐 간 많은 고위직 중에서도 가장 오래, 그리고 끝까지 놓지 않았
던 자리가 비변사 제조다. 비변사 도제조(都提調)는 이름만 걸어 놓는 자리라
는 것을 감안할 때, 비국에서 아뢰라고 함은 김조순에게 말하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왕의 각오에 비해 김조순의 대응은 너무 싱거웠다. 김조순은 선뜻 대
답했다.
“성상께오서 뜻이 간곡하시니 신등은 황공하여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세
모의 법이 연행(燕行)의 소모를 헤아리신 선대왕의 치적이기는 하나, 전하께
서 지금 하교하신 폐단이 있으므로 앞으로는 중후소(中後所, 청나라 모자 공
방이 있는 산해관 부근의 지명)에서 모자 사들이는 일을 엄금해야 하겠습니
다. 또한 서도의 기강에 대해서는, 각지의 수령들로 하여금 정예한 군병을 이
끌고 위엄을 떨쳐 압록강 주변을 더욱 엄히 순찰하게 하는 것이 만무일실일
것입니다.”
얼핏 보면 김조순의 항복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이제 사신행 비용 구멍 나
는 문제도 왕의 책임이요, 선대왕의 법을 마음대로 뒤집은 불효도 왕의 책임이다.
게다가 김조순은 ‘우리는 청이 관련되어서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정 그러고
싶으면 네 멋대로 해라. 하는 김에 국경지대에서 병사도 대규모로 기동시켜서
청나라와도 한판 떠 보지그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공은 역시 자신이 김조순보다 관록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
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 불러온 함정에 속으로만 이를 꽉 깨물다가 한발 물러
났다.
“……변경에서 군졸이 많이 몰려다니면 민폐가 심할 터이다. 다만 수령들에게
더욱 꼼꼼히 살피라고 전교를 내리라.”
“전하의 지극하신 헤아림에 엎드려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세모법은 폐지되었다. 왕 말대로 고관은 아니지만, 예조나 사역원 쪽
에서 모자 수입에 한 발 걸치고 있던 몇몇 조신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도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 나라의 법이라는 게 어차피 조변석개. 왕의 짜증이 풀어지면 다시 적당히
주청 올리면 되는 일이다. 세모법도 영종(영조)이 제정하고 폐지한 뒤 정종이
부활시킨 법이 아니던가.
당장 걱정해야 할 사람들은 생계 떨어진 만상들인데, 장사치들 형편 따윌 신
경 쓰는 자는 조정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시준 역시 조정에서 자기 형편을 신경 써 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
이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경로를 따라 전달된 세모법 폐지 예고와 무역 금지
소식을 보고 즐겁게 웃었다.
‘좋지. 방한용 모자란 게 결국 털가죽인데, 그거 꼭 메이드 인 차이나여야 되
는 건 아니거든.’
이 시대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는 곧 명품이라는 뜻과 같다. 그러나 해외 명품
이 없으면 국산을 써야지 어쩌겠는가.
문제는 조선에서 양털이나 그에 준하는 털가죽이 수요를 충당할 만큼 많지 않
았다는 건데, 시준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에게만 방도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은 오히려 호재라고 해야
마땅했다. 원래 독점이란 모든 상인의 로망이다.
‘홍득주가 무슨 일인지 요새 좀 바쁜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일은 임상옥과
해 봐야겠어. 이제 내 사업도 있어야지.’
생각을 정리한 시준은 곧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었다.
작가의 말
1. 모자 무역은 조선 사행길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했으나, 본문처럼 여러 사람이 비판했습니다. 먼저 박지원의 비판을 보면
“모자는 한 사람이 삼동(三冬)을 지내는 데 필요한 물건으로 봄이 되면 해져 버리는 것이다.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화로 삼동을 쓰면 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짓인가.”
주로 은 유출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 또한,
“모자란 물건은 고금의 경사(經史)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천하에 있지도 않던 것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남자들은 관(冠) 위에다가 관을 더 쓰는 것이니, 이미 예법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녀자들에게는 비녀도 아니고 수건도 아니어서 진실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오직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찌 달리할 것이 없어서 하필이면 멀리 딴 나라에서 사와야 하는가.”
본래 입던 것이 아닌 추가되는 의류라 하여 사치라고 지목하고 있죠. 모자 규모라고 해 봐야 한 번에 수천 개 정도로 현대 관점에서는 국제 무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합니다만 이 때는 나라 살림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습니다.
방식은 주로 북경 가면서 산해관 들어가기 전 중후소에 들러 예약하고, 북경에서 볼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모자 찾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2. 인삼 거래 허가증인 황첩의 단속은 중군과 좌수의 책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홍총각 등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3. 장시영과 박광유는 당대 실제 송상의 상인으로서, 역사에서도 본문과 비슷하게 장시영이 박광유를 대리인으로 보내 평안도에서 활동했습니다. 기록상의 활동은 인삼 무역이 아니지만, 당시 조선의 인삼 생산과 국내 유통은 송상의 지분이 많아서 그렇게 묘사되었습니다. 다만 선죽교 17대 1의 전설은 창작입니다.
7. 평안도 사람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