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0화 (20/284)

20화

7. 평안도 사람들(1)

누구의 분부라고 거역하겠는가. 평안 감사는 지방관 중에서도 조선 안의 다른

왕이라 불릴 정도의 중요한 직책. 나중에 전국구 고위 신료가 될 것이 분명한

지라 어디로 튀기도 마땅찮다.

결국 시준은 평양 소환에 응하기로 했다.

다행인 것은 정약용 역시 지인인 이서구를 만나는 김에 시준을 데리고 가는

형식으로 평양행이 결정되어 부담이 덜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서구는 귀양지를 벗어날 수 없는 정약용을 배려하여 죄인을 감사가 신문하

고 단속한다는 구실로 같이 소환했다.

스승은 말 타고 앞장서고, 제자는 나귀에 올라 뒤를 따르니 사제의 도가 엄정

하다. 당연히 경마 잡고 있는 종놈 만득이만이 귀양 죄인 주제에 승마 유람은

웬말이냐고 속으로만 구시렁댈 뿐이었다.

“그 짐은 다 무엇이냐?”

정약용은 나귀에 실어 놓은 여러 보따리를 보고 물었다. 어떤 건 안장 아래에

서 흔들리는 통이요, 어떤 것은 무거워 뵈는 쇠붙이인데 다 싸매어 놓아서 쓰

임새를 알 수 없었다.

“평양 가서 감사를 뵙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있나요.”

“이공(李公, 이서구)께서는 평소 붓을 쥐고 소매를 떨치면 시상이 물 흐르는

듯 힘차고 고아하며, 관소에 사진(仕進)하여 벼슬을 한다면 대계를 쉼 없이

짜내어 맹진(猛進)하는 기풍이 있다. 네게 재물이나 받을 정도로 비루한 분이

아니시다.”

정약용처럼 대구(對句) 화려하게 하여 대답해 볼까 생각했던 시준은 그냥 귀

찮아져서 관두었다.

“재물은 아닙니다. 그저 약소한 예물이지요.”

정약용은 더 묻지 않았다. 똑똑한 아이이니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서였다.

평안 감사 정도 되면 제아무리 청렴한 사람이라 한들 온 나라의 진귀한 물건

이 들어온다. 이제 촌동네 부잣집 정도에 불과한 시준의 재력으로 감사를 놀

라게 할 뭔가를 마련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정약용이 알게 된 때는 평양부에 입성하고 나서였다.

관서(關西, 평안도)는 국가의 요충이며 평양은 관서의 중심이다. 원칙적으로

이동하며 사무를 처리하는 입장이라 고정된 전속 관소가 없었던(감영은 원래

군사시설이다) 각도 관찰사에 비해 오직 평안도 관찰사만이 국초부터 평양부

에 상시 설치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 군정이며 진휼(賑恤)에 관한 국가 재정 문제는 평양에서 해결사 역

할을 종종 도맡았다. 한마디로 어디서 돈 떨어지면 평양에서 실어오는 일이

잦았다는 이야기다. 영조 때는 평안 감사가 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뻗

대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권한이 세었다.

이는 평안도의 재정 자율성에서 기인한다. 평안도가 중국 사신 접대나 변방

방비 문제로 세금을 조정으로 운송하지 않는 지역이라 그 안에서의 재정은 사

실상 평안 감사의 손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주도나 함경도도 그렇긴 하다. 그러나 자기 살림 감당하기도 허덕일

정도로 가난하고 척박한 그 두 지역에 비해, 평안도는 일찍부터 상업이 흥성

하고 북방치고는 농사도 잘되어 꽤나 부유했다.

게다가 가혹한 서북민 차별 때문에 관서에는 사대부가 별로 없다. 그로 인해

치부의 길에 나서는 준재들이 많았고, 이는 평안도의 부를 더욱 키워 주었다.

그래서 영조 때는 ‘평안 감영이 조정보다 더 강하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 다 뻔하다. 이 시기의 평양은 그야말로 전국 유

흥의 중심지였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도 이례적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 이훤(李愃) 또한 몰래몰래 평양에서 논 적이 있다.

그러니까, 재작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외성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가던 정약용은 문 밖 기자묘(箕子墓)와 그 인근

에 있는 기생들의 무덤을 지나며 말채찍으로 무너진 집터들을 가리켰다.

“그리 큰 영화를 누리던 곳이었건만, 지금은 하늘의 견고인지 사람의 실책인

지 이리 곰이 후려친 벌집처럼 되었구나. 아! 흥망성쇠의 이치로다.”

대왕대비 김씨를 철렴하게 했던 재앙 중 하나는 평양에도 덮쳤다. 외성은 물

론이요 중성(中城)까지 태워 버리고 관소와 창고가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대화재가 작년과 재작년 평양을 살라버린 것이다.

전소된 민가만 2천 호. 물론 2천 호나 살고 있었던 것에서 평양부의 번영을

짐작케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끝장났다. 최소한 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하

루아침에 삶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꽤 복구되었다. 과거 평양부의 위세를 생각하면 치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중앙 정부와 각도에서 갹출을 받아 공해(公廨, 관아 건물)

약 2천 칸을 새로 건립하며 부흥의 기치를 올리고 있었다.

당시 감영이고 나발이고 다 날아갔기 때문에 정약용 일행이 반년만 일찍 왔어

도 감사의 손님이 노숙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관사야 어찌 만들었다 해도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 평양만 한 도시를 일

년만에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도 평양이 이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수십 년 뒤인 19세기 후반이다.

정약용은 흥하면 쇠한다는 만물의 이치를 들어 탄식하였으나 시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라에서 돈을 내려주고 기부(記簿, 장부. 여기서는 각도의 여유재정 비축)

를 끌어모았어도 일할 사람이 없고 상하 분부와 관문(關文, 공문) 오가는 절

차가 어지러우면 다 쓸 데가 없습니다. 한 해 만에 관소를 영건(營建)한 것으

로 능히 수령과 백성들의 노고를 짐작할 만합니다. 집은 탔어도 사람은 남는

법이지요.”

정약용도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평양의 부는 단지 돈만이 아니

다. 그 돈을 모을 수 있게 했던 지역적 질서와 수많은 인재가 진짜 재산이다.

“네 말이 옳다. 아마 남모르게 돈을 내는 자, 품삯 받지 않고 일을 도운 자가

많았을 터이다. 이 대역사에서 여기저기 검약하기 위해 계책을 짜내는 자들도

있었겠지.”

평안도 전체에서 보이지 않는 착취가 있었을 것이란 말을 품위 있게 마친 정

약용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야 불 때문에 대차게 망했지만 시간만 있으면 복구될 터. 이 대도시를

건설한 평안도의 역량을 보아야 한다. 홍경래도 대책 없는 반란자는 아니었군.’

이 정도의 부를 가진 지역을 그토록 서럽게 차별하는 것은 인정 이전에 두뇌

의 문제다. 칼 든 놈을 괄시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아마 홍경래가 평안도를 안정적으로 석권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리고 평안

도만의 반란이 아니라 계급 차별에 대한 농민 기의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성공

했다면 진짜 조선 왕조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준이 그 반란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

로 생사가 갈리는 것은 양쪽의 최고 수뇌부 정도뿐. 나머지는 이기든 지든 살

해되고 빼앗기고 치욕을 당한다.

‘으음. 다복동에서 바지랑 감자 잘 사가서 여태 일부러 쑤시지는 않았지만 역

시 위험분자야. 여기에서 홍경래가 수상하다고 고변해 버릴까? 그러면 복잡할

것 없이 나중에 홍득주에게 한 재산 분배받아 상가나 차려서 잘먹고 잘살면

되는데.’

시준은 홍경래의 난이 정확히 몇 년도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그런 걸 달달 외

우고 다니는 사람은 사학과 학생 중에서도 드물 것이다.

알았다면 여유를 좀 가지고 준비할 수도 있겠지만, 시준이 그간 다복동과 계

속 거래하며 탐문해 본 결과는 아무래도 국번없이 어딘가에 신고해야 할 내용

뿐이었으니 초조할 만도 했다.

‘바지 건 때문에 역사보다 우리 쪽과 그쪽의 연결이 긴밀해졌는데, 질질 끌다

가 관군보다 먼저 홍경래 반란군이 들이닥치면 협조를 안 할 수도 없고, 협조

했다가 홍경래가 패배하면 역적을 도왔다고 기둥뿌리 날아갈 거고……. 아, 그

런데 함부로 물증도 없이 고발했다가 조사당하면 그냥 조사 자체로 박살 나는

게 조선이잖아. 어쩌지? 그냥 우리 나와바리 의주나 잘 봐달라고 할까?’

밀고를 하든 청탁을 하든 먹히려면 일단 감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 짐을 대충

푼 시준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후 곧 다시 들어왔다. 만득이가 시준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물었다.

“스승 모시는 도리를 이제야 아는 것 같군! 통통해 뵈는 중평아리일세.”

시준의 예상대로, 망한 평양이라도 닭 한 마리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흡족한 시준은 만득이를 심하게 면박 주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만 타박했다.

“임자는 글을 안 읽어 주객의 예절을 모르는군. 세상 어디에서 손님이 자기

끼니 자기 손으로 잡아온답니까? 이건 감사께 드릴 예물이우.”

만득이는 감영에서 내준 보리밥에 장을 비비며 시준을 욕했다. 그야 멀쩡히

닭 한 마리가 저기 있는데 검박하기 짝이 없는 식단으로 허기를 채워야 하니

그럴 만했다. 정약용이 만득이를 진정시켰다.

“그 말대로 우리가 돈이 없어 이런 걸 먹는 건 아니다. 어려운 때에 밥 한 공

기에 채소반찬, 장 한 종지라도 주신 감사의 은혜를 소홀하다 내칠 셈이냐?

자, 여기에 쌈을 싸서 그저 좋은 젓갈이나 김치와 먹는다 생각하고 삼키면 뱃

속에서는 다 속아 주느니라. 날 따라해 보거라.”

노비 주제에 그 이상 불평하면 경을 친다. 시준도 닭은 내버려 두고 그들과

같은 밥을 먹었기에 만득이도 일단은 참았다. 정약용과 같은 생각이었다.

‘뭘 하는지 한번 보기나 하자.’

감사는 손님을 저녁 때 보겠다고 했다. 마침 사람이 꽤 허기질 시간이다.

밥상을 다 치우고 좀 쉰 다음,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본 시준은 곧 작

업을 시작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잡심부름 경력이 여러 해 되다 보니 안 사실

이지만 요리의 밑준비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보시오, 만득이. 좀 도와주시오. 채비는 내가 할 테니, 저 중평아리 잡아

다가 깃털 뽑고 있으시게. 그리고 이건 따로 얻어온 닭똥집인데 그놈 것과 같

이 씻어서 갈무리하시오.”

“감사께 올린다는 게 결국 닭국물이야? 그걸 가지고 무어 그리 유세 떨 게 있

어? 게다가 뭘 모르는구먼! 삶아 국물 내려면 좀 나이 먹은 놈으로 가져와야…….”

“입은 뭐라고 떠들어도 좋지만 손은 바삐 놀려야 할 게요. 해가 이제 서쪽으

로 가기 시작했으니.”

시준은 코웃음치고 나귀에게로 갔다. 그가 새끼줄로 묶어 놓은 단지의 뚜껑을

열자, 정약용은 시준이 나귀 아래 매달고 온 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유채에서 짜낸 듯한 기름이었다. 그것도 한 끼에 쓴다고는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시준은 이번에도 시중드는 아이 역할을 자처했다. 이유도 있었다. 그는 개인

적으로 프라이드 치킨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닭다리 두 개를 공손히 뜯어 감사

의 앞에 놓았다.

평양 감영 선화당(宣化堂, 관찰사의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이한 이서구는 이

이채로운 식단에 크게 놀랐다.

“허어, 세상에 닭을 이리 통째로 튀겨서 먹는 법도 있었던가. 포계(炮鷄, 간

장과 밀가루로 볶은 조선식 닭고기 요리)만 하여도 웬만한 집에서는 엄두를

못 내거늘. 기름의 낭비가 심하지 않은가?”

“대체로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기름이 많이 나므로 그들에게 이런 습속이 있

습니다. 사치스러운 음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체 높으신 분에게는 진미라고

바치기 부끄럽습니다.”

시준은 그러면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보였다. 감사가 말로야 시준이 창고에서

의를 부르짖고 어쩌고 했지만 어차피 이양선 일 때문에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렇다 해도, 감사 체면에 장사치 사환 어린아이와 직접 이야기하기는 힘들고

정약용에 대한 예도 아니다. 그래서 이서구는 정약용을 보고 물었다.

“역시 기이한 아이라더니 정말이로다. 이 또한 자네가 말한 그 ‘성문종합영

어’라는 책에 나오는 법식인가?”

“사실 저도 오늘 처음 봅니다. 유배 죄인으로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소이다.”

“어흠. 그렇지. 오늘은 내 특히 자네에게 옛 지인으로서 삼가는 말을 전하려

했었지. 일단 들면서 얘기하세.”

척 보아도 식으면 맛없을 것 같은 음식이다. 긴한 자리였기에 이서구는 손수

닭다리를 젓가락으로 찢었다.

그리고 한 입 넣은 이서구는 이 자리를 위해 생각해 두었던 여러 정치적 언사

를 전부 잊어버렸다. 칼로리는 곧 맛이다. 그리고 전근대인들은 현대인보다

훨씬 기름기와 당분에 민감하다.

“음. 따뜻하고 바삭한 것이……. 아무튼 자네 얘기가 많이 들리고 있네. 그 근

문소라는 곳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고 기름질 수가……. 아니, 글 쓰고 학문

권면하는 건 좋지만 너무 뛰어나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 꼴 아니겠는가. 관의

일에는 되도록 머리 들이밀지 말고 반성하며 지내다 보면 군주의 은혜 또한

맛있게……. 아니, 이봐, 거기 누구 없느냐? 술이라도 한 병 가져오너라!”

정약용은 다행히 이성을 되찾았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제가 죄인으로서 분수를 넘었으니 감사 영감의 추상같은 질책을 뼈에 새겨

명심하겠소이다.”

“음. 좋지. 그럼 벌주 한 잔 받게. 역시 내 생각대로 청주와 잘 어울리는군!”

이서구에게 있어 정약용에 대한 훈계는 애초에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충

공무를 끝내자 평안 감사는 시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라 하였느냐?”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은 이서구는 이제 치킨에 정신 팔린 아까의 모습이 아니

었다. 역시 평안 감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시준은 긴장하며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다.

이서구는 예상대로 서양 함대에 대해 물었다.

“네 스승은 나와도 교유가 있으므로 그에게 여러 차례 간찰로 이야기를 들었

다마는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 네가 이미 글을 알고 예법과 기재(器才)

를 갖추었으니 묻겠다. 네가 보기에 그들은 왜 이 땅에 왔으며, 여기서 무엇

을 얻어가려 하느냐? 압록강에 드나드는 것은 혹시 북경의 사교도들과 잠통하

려는 것은 아니겠느냐?”

정약용이 움찔했다. 어떤 식으로든 시준에 대한 질문은 나왔겠지만 이렇게 직

설적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시준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시준은 공식적으로 그들을 한 번 만

나 보았기에 이야기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이 더 넓어졌다.

“저번에 표착한 영길리국 사람들이 전해 준 말이라는 것을 먼저 아룁니다. 서

양 나라들은 대개 자기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모함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알겠다.”

“우리나라에 온 두 나라는 곧 영길리국과 불랑국입니다. 모두 북경에서 천자

에게 조공하였으나 한 가지가 다른데 불랑국에서는 말씀하신 사교의 교사를

북경에 파견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적도들이 그곳에 밀서를 보냈다는

일은 저도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시준은 이서구를 위해 맞춤형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 왕에게 올릴 장계를

쓸 수 있도록 말했다. 그런 일이야 시준에게 익숙하다.

보고서란 의사 결정자로 하여금 빠르면서도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며, 따라서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

“영길리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돈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관헌이나 군병이

아니라 주로 제가 몸담고 있는 곳과 같은 대상부고들이 와 있습니다. 반면 불

랑국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신교(神敎)를 널리 퍼뜨리는 것입니다. 저들 나름

대로 천하의 교화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왜’ 그런지까지 물으면 일이 복잡해진다. 외방전교회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거대한 조직과 세계 복음주의에 대비해 영국 성공회는 상대적으로 전도의 성

격이 약하고 정부에 미치는 영향도 적다.

또한 동인도 회사 같은 영국의 해외 정책과, 그에 대비되어 아직 해외 식민지

를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힘든 프랑스 국내 정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시준은 이서구가 더 캐물으면 모른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서구

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수만 리 떨어진 곳에 배를 보내는 일은 상상도 못할 큰돈이 든다. 그들이 굳

이 그러는 이유는 그 비용을 메우고도 남을 이문이 있기 때문이겠지. 네가 스

승에게 배웠는지 모르겠다마는, 일찍이 김 문정공(文貞公, 김육)이나 남 문충

공(文忠公, 남구만) 같은 사람들이 수레를 주장하였고 초정(楚亭, 박제가)은

사백 년 해금(海禁)을 한탄하였다. 상리는 곧 옮기는 것이라. 그래서 장사꾼

아이인 너의 본 바가 궁금하구나.”

정약용은 마치 잘 아는 이름인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으나 시준의 입장에서는

대체 문충공이니 초정이니 하는 사람들이 뭐 하는 인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위 ‘통밥’을 굴려 대충 유통과 무역을 주장한 실학자들 같다고 판단한 시준

은 그에 맞게 대답해 주었다.

“힘센 장정이 한껏 짐을 져 보아야 쌀 한 가마입니다. 그러나 수레는 작은 것

이라도 다섯 섬을 실을 만하고, 조운선(漕運船)은 천 섬을 능히 싣고 나르는

데 수레며 배가 싸지 않다고는 하나 사람 2천 명에 비할 것은 못 됩니다. 장

사하는 이치로 말씀드리자면 크고 많을수록 하나는 싸지고 더 이문도 남는 것

이지요.”

조선 선비들이 규모의 경제조차 이해 못 할 만큼 꽉 막힌 건 아니다. 이서구

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양선이 그리 큰 것은 그것 때문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큰 바다에는 큰 파도가 치는 탓도 있습니다. 조맹덕(曹孟

德)이 적벽에서 전선을 엮어대었던 것처럼 큰 파도에 견디려면 큰 배가 반드

시 필요합니다. 더하여 큰 배에는 큰 화포를 실을 수도 있지요.”

시준은 딴에 말을 좀 맞춰 준다고 고사를 인용하였으나, 삼국 시대는 기실 정

통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시대가 아니거니와 시준이 말한 것은 사서도 아

니고 소설 내용이다. 이서구는 크게 웃었다.

“네가 보아하니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잡서를 읽었구나. 대정강 부교를 혁

파한 일로써 나를 나무라려는 것이냐?”

이서구는 대정강과 청천강의 부교가 툭하면 떠내려가 낭비라 하여 상소로써

철거했다. 당연히 시준이 알 턱이 없다.

시준은 괜히 아는 척했다가 지뢰 밟았다는 생각에 표정이 굳어졌다. 정약용도

제자의 미천한 학문에 부끄러워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 말이 맞다. 부교 또한 이양선만 한 큰 배로 만들어 놓았다면 그까

짓 여름 장마에 떠내려가지도 않았겠지. 내가 너에게 배울 것도 있구나.”

정약용이 헛기침을 하고 끼어들었다.

“제자의 학문이 낮은 것은 저의 가르침이 부족한 탓이오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아이 한 명을 불러 같이 힘써 배우게 하면서 감사께서 말씀하신 그 이양

선의 법식을 연구해 보려 하였습니다. 그때 이양선을 본 자가 매우 많아, 이

미 제가 그림은 그려 두었지요.”

이서구는 그제야 자기가 정약용의 서신을 가로챈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

는 마지막 튀김옷을 음미하면서 말했다.

“그 일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주어 보냈으니 윤가(尹

家)에 능히 서둘러 도착할 걸세. 그래……. 그러면 나도 사은숙배(謝恩肅拜)하

는 김에 서울 올라가서 상감께 아뢰어야 하겠군.”

정약용과 시준은 둘 다 긴장했다. 하지만 이서구는 별로 그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게 평안 감사로 누리는 마지막 호사지. 늙은이가 더 이상 후배들 앞길 막

아 무엇하는가. 곧 체직의 명이 떨어질 거야. 걸해(乞骸)를 허하여 주신 인군

께 어찌 감읍하지 않을 수 있으리. 자네도 암행어사 얘기 들었겠지마는, 내가

그때 힘써 주청 올려 다른 죄가 미치지 않도록 해 줌세.”

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서구는 시준이 정약용의 제자라는 말을 듣자 자기

네 학파를 이을 만한 인물인지 떠보고, 그 뜻이 그다지 삿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암행어사는 이미 평안 감사를 만났다는 거로군.’

그리고 의주 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음에 분명하다. 그것을 변호

해 주겠다고 말하는 이서구는 정약용의 편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정약용이 일어나 읍하여 사은하거나 말거나 이서구는 아쉽다는 듯이 비어버린

쟁반을 바라보았다. 원래 성격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 이만 작파하세. 다음에 연이 닿거든 그때는 큰 놈으로 튀겨서 한잔 더

하지.”

시준이 잽싸게 말했다.

“만복(滿腹)은 운기에 좋지 않고 어린 녀석이 연한 법인지라 닭이 작습니다

만, 입가심하실 만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사실 준비는 만득이가 했다. 시준이 나가자 만득이는 입가에 기름 좀 묻힌 채

로 쟁반을 내밀었다. 시준은 기름에 볶은 닭똥집을 한두 개 양심껏 집어먹은

만득이를 한 번만 흘겨보고 다시 들어갔다.

마침 아쉽던 참이라 이번에도 이서구는 한껏 치하했다.

“허허. 계내금(鷄內金, 닭모래집)이라. 이건 약재가 아닌가. 내가 오늘 보양

한 덕으로 10년은 더 살겠구먼. 내가 권세를 부리려는 건 아니지만, 애썼는데

상이 없는 것도 온당하지 않은 노릇.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시준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작가의 말

1. 치킨은 250도에서 15분 간 튀겼을 때 가장 바삭하다고 합니다. 치킨 하면 맥주인데 조선 시대에서 보리술은 있었습니다마는 치킨에 어울리는 맛은 아니었다는 듯 합니다.

2. 당시 평양부의 화재로 무사했던 것은 대동문 인근 정도로 보입니다. 그 외 자세한 구조 나 사도세자 이야기 등은 홍석주/김버들, <조선 후기 평양부(平壤府)의 도시구조 변화와 평안감영의 특성>, 2021 을 참조했습니다.

7. 평안도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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