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9화 (19/284)

19화

6. 죄어드는 그물(4)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 1804년 5월, 프랑스 원로원(Sénat, 의회 상원에

해당)은 코르시카 출신 포병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프랑스 국민들의 황

제로 만들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나폴레옹이라는 거인이 밟아간 휘황찬란한 상승가도의 한 단

계에 지나지 않으나, 이 과정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의 반대세력은 혁명을 부정하는 반동분자라고 격렬히 비난하였으며, 국외

의 적들은 군주가 마땅히 가져야 할 고귀한 혈통은 어디로 갔느냐고 비웃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윤색과 기름칠은 필요하다. 볼 것 없는 신분으로 만인지상

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들이 한 번씩은 거쳤던 일이다.

천재적 도박꾼이며 의리는 방해물일 뿐이라고 믿는 교활한 정치가 조제프 푸

셰(Joseph Fouche)가 그 재료를 제공했다.

“혁명의 적인 왕당파는 아직도 프랑스 곳곳에 암약하고 있소. 반혁명분자의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하여도, 단 하나의 사실에 있어서만은 그들

이 옳지. 공화국 정부는 불안정하오. 만약 그들이 어떤 총 든 사내 한 명을

고용하여 통령을 암살한다면 정부는 곧바로 무너질 거요.”

그 해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푸셰는 대답했다.

“지속 가능성은 전망을 부르고, 후일을 차분히 보게 되면 지금의 어리석은 흥

분은 진정되게 마련. 우리는 사람들에게 반석(Pierre)을 줄 필요가 있소. 종

신 통령이 아니라 세습 통령, 뭐…… 황제라고 해도 되겠군.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겠소? 프랑스 인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하오.”

혁명을 지키기 위해 혁명을 부정하자는 말 같지도 않은 논리가 먹힐 수 있었

던 건, 나폴레옹의 인기 덕이기도 했지만 푸셰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에

도 기인한다.

그는 바로 그 로베스피에르 치하 정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도 살아남은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며 끝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쫓

아낸 자다.

또한 아마도 최초의 근대적 정보기관장으로서 소문과 험담, 음모와 쑥덕거림

을 체계적으로 권력에 활용한 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조선에서 있었던 사

건을 놓칠 리는 없었다.

“우리 공화국이 안에서 혁명의 가치를 실현하느라 바쁜 틈을 타서, 저 저주받

을 영국 놈들은 세계 각국에서 우리 신민들의 재산을 좀먹고 있소. 여기서 말

하는 재산이라는 것은 돈뿐만 아니라 신용도 포함됩니다.”

“신용이라니?”

“아직 못 들으신 분이 많을 테지만, 작년 중국의 동부 국경지대에서 중국인

20여 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역 부락민들의 증언은 유럽인을 가

리키고 있으며, 그 해역에서 얼쩡거린 유럽 선박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넵튠

호뿐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파리의 모든 존경받는 신사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영국인이

할 일이란 게 대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또 무지스러운 학살을 일으켰군!”

“두 번 말하면 입만 아픕니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 믿을 수 있습니까? 동인

도 회사는 중국인을 하나 남김없이 죽여 살인멸구한 뒤, 중국 정부와 그 변경

국가 – 고려(Corée)라고 하던가요 – 에 프랑스인이 이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

다고 거짓으로 통보한 것입니다!”

“그, 그게 정녕 사실이오? 오, 하느님[mon Dieu]! 저것들이 이제 아예 인간이

기를 포기한 것인가!”

19세기 초가 혁명과 전쟁으로 물들었다고 하지만 의외로 현재 유럽 전선은 소

강 상태. 프랑스와 전쟁하고 있는 나라는 이 시점에서 영국뿐이다.

딱히 그것이 아니더라도 원래 프랑스인은 영국인을 싫어한다. 파리 유지들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세상에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이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 선교사들

은 모두 중국 당국의 혹독한 심문을 받고 추방되거나 몹시 심한 굴욕을 겪었

으며, 이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이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북경 선교사들,

그리고 마카오 대표부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교차 확인하였습니다.”

그런 보증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미 파리 사람들은 푸셰의 말을 믿을 준비

가 되어 있었다. 영국 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영국을 응징하는 데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영국을 응징하려면

강력하고 결집된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지도자 – 예를 들면

황제 같은 것 – 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푸셰는 성공적으로 원로원을 설득했다. 어렵잖은 일이었다. 사제였던 동시에

교회 파괴자였으며,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면서도 후에는

거부(巨富)에 공작위까지 가졌다는 간단한 이력만으로도 이 사람이 어떤 남자

인지는 여실히 증명된다.

당사자인 나폴레옹의 경우 불감청고소원이라 당연히 별로 설득할 필요가 없었

지만, 푸셰는 고사하는 제1통령을 정말 힘들여 설득했다고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녔다.

원래 그게 이 바닥의 규칙이다. 고대의 황제들은 물론이고, 좀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대한제국 고종도 엄연히 ‘만민 상하의 추대에 밀려 억지로’ 황제에 올

랐다.

물론 아무래도 서양국 사람들이 예절에 밝지 못한지라 고종 이형(李㷩)처럼

아홉 번씩 사양하는 예까지는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추대의 자세한 경과는 알 도리 없었지만 시준 역시 나폴레옹이 황제로 추대되

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는 정약용의 앞에서 단정히 꿇어앉아 최근의 사세를

설명했다.

“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자가 이제 인민에게 신임 받았다 하며 스스

로 관을 들어 쓰고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그 뜻은 서양 제국(諸國)을 모두 쳐

서 병탄하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지난번에 왔던 영국 표류자들이 전해 준 이야기라는 설정이었다.

지금이 1805년이니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정약용은 시준이 말한,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발음인가 싶은 말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파륜(拿破崙)’이라고 적었다. 음역을 제대로 하려면 중국

어 음운에 밝아야 하지만 정약용에게는 별것 아닌 지식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나폴레옹의 이름이 아닌 그 사람에 대해 말했다.

“장수된 자가 신의를 배반하고 나라를 뒤엎음은 주온(朱溫, 주전충)과 같고,

사람들의 인심을 교묘히 모아 우선 국경(國卿, 통령을 말한다)을 밟고 다시

보위에 앉은 것은 왕망과 같다. 어찌 천명을 받았다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장수 시절 저 강대한 서양국 사이의 수없는 전쟁에서 항상 이긴

상승장군이며, 프랑스 인민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고 하더군요.”

시준은 정약용에게 슬며시 공화정의 대의를 설파해 보려 했다. 하지만 정약용

의 평가는 추상같았다.

“패왕 항적도 해하의 한 싸움에서 지기 전까지는 나가 싸워 이기지 못함이 없

었느니라. 궁병독무(窮兵黷武,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다)한 자 그 끝이

항상 좋지 못했으니, 그 나씨(拿氏)도 궁에서 비단 이불 위에 누워 죽지는 못

할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시준이 놀라는 사이 정약용의 말은 계속되었다.

“또한 네가 인민의 지지를 말하였는데, 좋다. 괴악하기는 하다마는 맹자의 설

이 어찌 서양국이라고 통하지 않겠느냐? 그 나라 인민의 뜻은 네가 일전에 말

하였듯 폭군, 필부 예(芮, ‘시민 루이’를 말한다)를 참하고 백성들이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었다. 맞지? 그런데 이제 와서 스스로 보위에 오른다면 이

는 바로 그 인민의 뜻을 모른 체한 것이 아니겠느냐?”

혁명을 배반한 나폴레옹의 약점을 조선에서 정확히 찌른 정약용의 말에 시준

은 감탄했다. 정약용은 손과 입을 다 쉬지 않았다.

“하늘로부터 명받은 바[天命]가 없으면서, 또 사람마저 외면한데다가 피 흐르

는 싸움질만 좋아한다면 그런 자가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 반드시 십 년 이

내에 모든 영화는 허깨비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장구한 계

책에 있어 그자는 유의할 필요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만 지나면 나폴레옹 천하가 끝나니 정약용의 예측에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시준은 이게 그냥 넘겨짚었는데 맞은 것인지 아니면 자

기는 공감하기 힘든 이 시대의 학문체계로 도출된 논리적 예측인지 궁금했다.

‘다만 장기 계획에 있어 프랑스를 유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지.

아시아에 집착했던 나폴레옹 3세가 있으니까. 가만 있어 보자. 병인양요가 언

제더라? 순조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년이 병인년(1806년)이니까 그럼

1866년인가?’

시준이 역사를 다 외우지는 못해도, 조선 후기의 십간십이지가 붙은 여러 사

건은 이런 식으로 추론할 수 있었다.

시준도 일단 프랑스 건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병인양요는 그의 나이 칠십

을 넘긴 때이니 그때 재수없게 강화도에 있지만 않으면 된다.

어쨌든 프랑스의 아시아 잠식을 제외하더라도 정약용의 통찰력이 상당함은 부

정할 수 없다. 붓을 내려놓은 정약용은 다른 백지 묶음을 집어들었다. 요즘

책을 많이 써서 신난 모양이었다.

“반면 저번에 와서 바지 만들 천이며 여러 물건을 놓고 간 영길리국 사람들은

한번 사귀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라의 방침에는 맞지 않으나, 내 소견으로

는 그들이 불랑국을 무찔러 대의를 드높인다면 그때는 상국을 통해 작은 교우

를 맺을 만하다고 본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다산 선생이 아편에 관심이 있나?’

다행히 정약용은 마약을 하지 않았다.

“내 외가 쪽의 후예 중 어려서부터 바다를 보고 자란 똑똑한 아이가 있다. 나

이는 너보다 한 대여섯 살 많으려나. 그 애를 여기로 불러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사람들에게서 배에 대한 일을 배우고 바다 여러 나라의 사정을 듣

는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터이다.”

정약용이 말하는 사람은 유명한 다산 18제자 중 형과 함께 수제자의 반열을

차지하는 운곡(雲谷) 이강회(李綱會)다. 정약용의 외가 해남 윤씨와는 또 외

가 쪽 자손이 되어 사실 혈연은 가깝지 않다.

당대 조선의 해외 정보 서적으로는 필리핀 표류자 문순득(文順得)의 여행기를

채록한 정약전의 『표해시말(漂海始末)』이 유명하나, 이강회가 그 문순득을

소흑산도(우이도)까지 찾아가서 필리핀과 류큐 등지의 선박 제도를 담아낸

『운곡선설(雲谷船說)』 또한 학술 가치가 높다.

다만 정약용이 이강회를 제자로 맞이하는 때는 다산 초당으로 옮긴 뒤인 1808

년경이다. 정약용이 그 전에 강진을 떠나 버렸으므로 학문을 전해 줄 수 있을

지는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멀리 보면 친척이 되는 사람이라서

아주 인연이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군요. 선생님이 칭찬하실 정도면 필시 수재일 것입니다.”

“음. 그렇지 않아도 너 또한 일세의 재능이 있어,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면 좋

을 듯 싶어서 서신을 보내었다.”

“예?”

만득이가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약용은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 수염을 쓰

다듬었다.

“아마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회신이 오겠지. 내 알기로 그 아이는 일개 과거

시험 따위보다 더 큰 학문의 뜻을 품고 있으므로, 그가 오면 너와 같이 사경

(四經, 시, 서, 역경 및 춘추)을 다시 세밀하게 공부하자꾸나.”

시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난 돈 벌어야 한다고! 내 연줄이나 신분으로 관리 할 것도 아닌데 경전 파고

있을 시간 없어!’

사실 여기 오는 것은 정약용을 통한 선비 사회의 연줄 유지가 제일 컸다. (물

론 최근에는 감자 농사도 더해졌기는 하다.) 시준은 과거 시험에는 아무 관심

이 없었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시준도 전직이 공무원이니만큼 조선에서도 양인 신

분으로 과거라도 볼까 하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조선의 관료는 한국의 공무원과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직업

관료제가 없는 조선에 있어 그것은 오히려 국회의원 같은 정치가에 더 가깝다.

아주 특출나지 않은 이상 대부분 태생적 사회 계급이나 금력이 있어야 가능하

다는 점,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적 지식이 아닌 포괄적 대의에

따라 통치에 관여한다는 점, 정치적 부침에 따라 물러났다가 복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 등이 그렇다.

애비도 모르는 시준의 출신으로는 응시부터가 지난한 일이다. 이 시대의 과거

는 힘쓰는 하인들을 대여섯 명 대동하지 않고서는 과장에 들어가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시험장을 작게 만들고 행정을 개판으로 하는 것만으로도, 응당 뽑혀야 할 명

가 자제들을 자연스럽게 추려내니 이것도 조선 사람들의 지혜라 할 만했다.

또 시준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거벽(巨擘)이니 사수(寫手)니 하며 아예 대리

시험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들어오는 양반집 자제들의 답안에는 비할 것이 못

된다. 그걸 극복하려면 정약용 정도의 학문을 이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과거 시험에 합격해 보았자 중앙 정계에 뒷배가 없는 시

준은 절대 임용될 수 없다. 임용된다 하더라도 한직이나 전전하다가 위험한

일에 투입되어 끝이 좋지 못할 것이 뻔했다.

어느 모로 봐도 과거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내 취향에 가장 맞는 직업은 공무원이 아니다. 권력자는

더더욱 아냐. 결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논밭 마지기깨나 쥐고 사는 지방

지주 정도면 충분해.’

아직 사회가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땅과 쌀, 집과 옷만 있으면 그 이외의 것

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물론 그것도 고향 인맥이 있어야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뜨내기 지주가 대접

못 받는 건 현대와 같으므로 시준은 다중의 계획을 세웠었다.

먼저 홍경래의 난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간 뒤 그간 쌓은 경험으로 장사를 한

다. 그러고는 의주로 돌아와 고향 사람들에게 거하게 잔치 한 번 먹이고, 논

밭이나 많이 사들여 소작 주고 대청마루에 높이 올라앉아 세월이나 보낼 생각

이었다.

그걸 위해서 시준은 현재 많은 사업을 추진하는 중인 것이다.

의주 바지는 2차 성황기를 맞았고, 감자는 세금으로 바칠 필요가 없다는 점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홍득주 역시 상단 차원에서 재배 중이었다.

나라가 쌀을 돈으로 쓰다 보니 흉년 비슷한 소리만 나도 쌀값은 금값이 된다.

일차 수확한 감자는 안정적인 가격과 운송, 요리의 편리함을 무기로 다복동이

나 운산 부근의 품팔이판과 광산에 잘 팔렸다. 홍득주는 이런 농담까지 할 지

경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괄시받는 장사치 대신 떳떳한 농사꾼이 되어도 좋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상인이었다. 홍득주와 시준은 말을 맞추어, 감자

재배법을 절대 누설하지 않았다.

의외로 식물이란 게 꽤 연약한데다 ‘씨감자’라는 게 괜히 따로 있는 게 아니

라서 감자를 그냥 갖다 땅에 심어 본 사람들은 대부분 별로 좋지 못한 결과를

맞았다.

아무튼 그렇게 감자도 잘 팔리고 바지도 잘 팔려서 시준도 돈푼깨나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웬 선비 도련님이 와서 같이 꿇어앉아 하루 종일 경전 읽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시준은 필사적으로 방해해 보았다.

“강진에서 여기까지 보통 먼 길이 아닌데 어찌 쉽게 올 수 있겠습니까? 골골

마다 표범과 호랑이요, 길과 주막에는 도적들로 가득한데 어린 서생이 감당할

재난이 아닙니다.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차후 선생님께서 해배(解配)되시면

서울쯤으로 불러서…….”

거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정약용과 시준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분명 강진으로 갔어야 할 만득이였다.

정약용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어찌하여 벌써 갔다 온 것인가? 네가 축지법(縮地法)이라도 썼느냐?”

“아니, 어디 객줏집에서 쌍륙이나 하다가 여비 날려먹은 게 분명하지요.”

만득이는 어린놈이 입도 참 험하다는 말을 꿍얼거리며 바지를 툭툭 털었다.

이 또한 시준이 하나 선물한 의주 흑바지였다.

“저는 도술 부린 것도 아니요, 노름질 한 것은 더더욱 아니올시다. 아, 가는

길에 감영에서 나왔다 하는 군사들이 가로막고 끌고 가는데 저도 아찔하였다

니까요. 아이고, 우리 주인마님이 기어코 무슨 대죄를 글로 써가지고 애먼 나

까지 치도곤 맞아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안 들고 배기겠습니까?”

만득이의 묘사에 따르면 평양 감영의 나졸들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솟아오른

마귀들이요, 하늘에서 떨어진 신병이었다. 짜증난 정약용은 손사래를 쳤다.

“친척 아이더러 나 보러 오라는 게 무슨 대죄겠느냐. 잡설일랑 관두고 빨리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그래서 호랑이같이 버티어 앉았는 감사또 나리 앞에 고개도 못 들고 엎드려

있는데 그놈의 편지를 찬찬히 보시더니만 이건 내가 남쪽 가는 인편에 부쳐

제대로 전하겠노라 하시더라고요.”

정약용은 ‘감사또 나리’가 누군지 잘 알았고, 그래서 의아했다.

“척재(惕齋, 평안감사 이서구) 그 어른께서 왜 난데없이? 한가로이 제자 부르

겠다는 일도 귀양 죄인의 처신이 아니기는 하다만……. 따로 힐책하는 말씀은

없으시던가?”

“그런 건 없었소이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따로 간찰을 써 주시면서 이걸 주

인마님께 전하라 하셨습죠. 그 건인즉슨 바로…….”

“이놈아, 그럼 그것부터 내어놓아야지. 네 늘어놓는 타령을 다 듣다가는 굉보

(紘甫, 이강회)가 벌써 이 의주까지 오겠다.”

정약용은 만득이에게서 냅다 서신을 빼앗았다. 시준은 주인과 종이 한가지로

말 많이 하는 건 좋아하면서도 남의 긴 말 듣기는 싫어한다는 점에서 비슷하

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정약용은 시준을 돌아보았다.

“……일전 네가 평양 갔다고 했었지?”

시준은 불안해하며 한 발 빼 보았다.

“성내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인근의 군자창(軍資倉)까지 세곡 내러 갔다 왔습

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고?”

잠깐 머리를 굴리던 시준은, 서신에 무슨 말이 써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

고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심하게 행패를 부리던 색리(色吏)들을 김 모라 하는 한 선비가 제지하였는데

제가 그 자리에 있다가 찬동하여 나섰습니다.”

“과연 서신과 틀림이 없구나. 네가 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으니 장하다. 허

나 그 일로 평안 감사께서 어린 나이에 용기를 보인 학동을 보고 싶다는데 어

찌할 테냐?”

시준은 자기 방이며 여기저기 비장해 두었던 재산을 떠올렸다. 그냥 그거 다

캐어다가 야반도주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가 평온한 삶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그물은 더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작가의 말

1. 조제프 푸셰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죠. 본문에 서술되었으니 다른 말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커피 하루에 수십 잔씩 마시다가 죽은 그 사람 맞습니다)도 그를 '나폴레옹이 가진 유일한 명대신' 이라 평했습니다. 물론 배신했지만..

2. 문순득은 무학자였습니다만, 타고난 관찰력과 총명한 머리로 여송(루손 섬)에 표류했던 때의 일을 세세하게 기억해 전했습니다. 작중 시점(1800년대 초반) 당시 표착해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라 제주도에서 그냥 살고 있던 필리핀 사람들이 정체가 밝혀지고 고국 찾아가게 된 게 이 사람 덕분입니다.

해당 지역의 여러 풍속과 해로는 물론, 필리핀 방언과 조선말을 대조하여 간이 사전을 만든 정약전 등의 기록은 현재도 귀중한 사료입니다.

3. 이강회는 제주도 지역의 실태를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한 저서 '탐라직방설'에서 제주도를 국제 무역항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 선구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거설답객난'에서는 수레를 통한 유통의 편익 증진을 주장하는 등 실학파의 맥을 이은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4. 씨감자가 아니라도 감자 심으면 (재배법을 지켰다는 전제 하에)감자가 자라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상품성 있는 물건이 나오기 어렵죠. 다른 농작물도 마찬가지.. 현대쯤 되면 수확한 열매로 종자 삼아 심는다는 건 취미 아니면 보기 드물지요.

7. 평안도 사람들(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