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7. 죄어드는 그물(3)
조선 시대 향리 차별대우의 핵심은 지역에 대한 봉사를 강요하는 착취 구조였
다. 향리에게 보수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관의 유지에 필요한 돈을 중앙이 향
임에게서 뽑아내는 일이 잦았다.
때려치우면 안 되나 싶겠지만, 안 하고 싶다고 사표 낼 수 없기 때문에 업
(業)이 아니라 역(役)이라 부르는 것이다.
아무리 원래 생계 신경 안 써도 되는 부유층을 주로 뽑는다 하여도, 향리들
입장에서는 울분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 여덟 고을의
성문이 백화점 자동문 열리듯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런 호장, 아전도 낮은 자리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은 멀게
보면 삼국 시대부터 이어진 지역 명가였기 때문에 조선조 내내 그토록 탄압받
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성의 없는 백성을 닦달하는 것은 사극에서
간사함의 대명사인 이방, 호방 같은 자들이 아니다. 그 한참 아래에 있는 서
리며 나졸 같은 사람들이 일차적 수탈자였다.
이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주 바닥을 벗어나 평양 근교까지 세곡 내러 가는
행렬에 따라갔던 시준은 그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서리 형님. 저기 뭔가 싸움이 났어요!”
시준은 대부분의 싸움을 존재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는 남자 홍총각에게 말해
보았으나, 그는 그저 시준의 머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쳐다보지도 말거라. 싸움이 난 게 아니라 가져온 세곡이 영 한심하여 매맞는
거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줄이 있었다. 한 줄은 공명정대하게 평미레질을 하여 됫박
을 재고 온후한 고자(庫子, 창고지기)와 순박한 백성들이 즐겁게 환담을 나누
는 태평성대의 줄, 바로 시준의 일행이 서 있는 그 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줄은 인세에 강림한 지옥이었다.
이쪽의 백성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기라도 한 건지, 세금을 갖다 바치면서도
무작스럽게 채찍과 매를 맞았다.
“이것 봐, 이런 것을 어떻게 받는다는 말이야! 겨와 모래가 반은 섞여 있는데
다 양도 형편없지 않은가!”
“아니, 모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렇게 됫박을 잡아채어 쌀을 다 흘리니 모
자라는 게 당연…… 으억!”
“이 건방진 놈이 어디서 말대꾸야? 어이쿠, 이것 보게, 됫박에 한 홉밖에 안
남았군. 나라의 조세를 포탈한 역적놈 같으니. 죽어라, 이놈! 감히 관헌에게
대들고 살아 돌아가길 바라느냐?”
채찍이 몇 번 물어뜯자 영양이 부족한 피부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고 피가
줄줄 흘렀다. 뒷줄에 서 있던 같은 동리 사람이 용기와 돈을 함께 내어 말렸다.
“사, 사람 죽겠소! 잠시 노여움을 푸시고…….”
그 사람이 소맷자락 붙잡고 말리는 척하며 쑤셔넣은 엽전은 채찍 휘두르는 속
도를 조금 둔하게 했다. 쇳덩어리다 보니 아무래도 팔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나졸은 따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오랜 경험으로 그 액수를 정확하게 파악
했다. 그리고 그 액수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었다.
“흥!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자기 목숨은 또 아까운 모양이구나. 저리 꺼져라, 퉤!”
동리 사람도 가슴팍을 걷어차여 나뒹굴었으나, 그래도 사람은 살렸다고 자위
하며 아까 물정 모르고 대든 젊은이를 일으켰다. 벌써 어깨뼈가 다 드러난 것
이 과연 살 수는 있을까 싶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자기 팔자다.
시준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도 조선에 태어났을 때부터 수많은 부정부패와 야
료를 보아 왔으며 그 자신도 모르는 사람에게 뺨 맞고 걷어차인 정도야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주로 시준이 어린아이였던 탓이 컸다. 조선에 웬만큼 적응하고
나서는 시준도 그다지 심한 꼴은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준은 깨달았다. 시준이 여태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
신의 능력으로 이룩한 성과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세 있는 상인인 홍득주의
피보호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홍득주네 집 사람들은 미리 다 얘기가 되어, 이쪽 순후한 줄의 편에
서 매맞는 사람들을 전력으로 모른 체하는 중이었다.
시준은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다른 ‘세금 잘 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
다. 개인주의는 시작도 안 한 시대건만, 오지랖 넓은 조선 사람 그 누구도 한
마디 나서는 자가 없었다.
어차피 나라가 썩었다 함은 위만 썩었다는 게 아니다. 관민이 합심해야 번영
이 이루어지듯이 타락도 다르지 않다.
‘조선 후기의 정치 문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봤지만, 그게 이렇게 야만적인
형태였을 줄은…….’
삼정의 문란이니 관리들의 수탈이니 하는 키워드 몇 개와 현실은 명백히 달랐
다. 아직 나라가 본격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순조 초기에도 이러니 후대에는
진실로 알 만했다.
홍총각이 그 꼴을 보고 조용히 빈정거렸다.
“맹차(猛差)들의 기세가 오늘은 대단하구먼. 암행어사 오신다니 뭐 갖다 바칠
인정 만들 셈인가.”
맹차란 말 그대로 용맹한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현대의 용역 깡패와 완벽하
게 뜻이 통한다.
다른 점이라면, 현대의 용역 깡패는 관청에서 꼬리 자르기용으로 고용하지만
이들은 하급이나마 진짜 이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백성들로서는
반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시준은 애써서 자신을 달랬다.
‘안 된다.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여기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
쁘다. 내가 무슨 혁명전사라고 역사의 주체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며 나서겠
나. 피곤하기만 하지.’
혁명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나 건실하고 예측
가능한 삶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시준은 그가 죽었을 때의 교훈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할 수 있을 것이
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예측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말은
제반 상황을 전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다.
이번에도 일은 곱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창고 옆 몰려선 사람 중에서 한
선비가 썩 나서 호통치며 증명되었다.
“국법의 어디에 이리 사람을 학대하라는 말이 있느냐. 개돼지도 이처럼 무지
스럽게 때려 내몰지는 않느니라. 그 짓 멈추지 못할까!”
모든 사람들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시준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인인 시준은 혹시 암행어사가 아닌가 하는 기대도 하며 두근두근했지만,
안타깝게도 암행어사는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시준보다 더 잘 아는 맹차들 역시 누가 외쳤는지 보기도 전에 잠
깐 주춤했다. 자기들보다 신분이 높지 않고서야 감히 이런 큰 목소리를 낼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자는 문라건(文羅巾)에 가죽신이요, 검은 띠를 둘러맨 모습이 누가 봐
도 알 수 있는 진사(進仕)였다. 과거 시험에서 갖가지 차별을 받는 이 평안도
에서 진사까지 하였다면 차별을 극복할 정도로 학문이 높거나, 아니면 집안의
지체가 높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졸들은 대개 경험상 후자라고 생각했다. 맹차 사이에서 서로 맹렬한 눈짓이
교환되었다. 그들은 상대의 뒤에 있는 힘이 자신의 뒤에 있는 것보다 큰지 탐
색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물정 잘 안다고 생각하던 홍득주 집 사람들은 혀를 찼다.
“저런, 저 선비가 소과는 입격한 모양이나 벼슬아치도 아닐진대, 감영과 수령
이 뒤에 있는 저자들을 저리 대하면 나중에 후과를 어찌할꼬.”
“내가 여기 벌써 일여덟 번은 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마 외지인인가
보오.”
“그러니 저렇게 저 혼자 의롭다 하여 나섰겠지. 아예 쳐다보지도 마세. 얘,
너도 어서 이리 오너라. 우리 서장관이 똑똑한 아이답지 않게 왜 이리 위험한
데 기웃거리누.”
그러나 시준은 그 선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사람은 꼿꼿이 서서 크게
외쳤다.
“왜, 내가 누군지 궁금하냐. 누군지 알면 문벌(文閥)과 가산을 재어 보고 덤
비거나 꼬리를 말려 하려느냐? 이 비루한 놈들. 알기 쉽게 내 이름을 대어 주
마. 내가 바로 곽산(郭山) 사람 김창시(金昌始)다!”
그가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의 대의를 짓고 북진군(北進軍) 참모로 활약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 본인과 시준을 포함해 여기 있는 자 아무도 몰랐다. 그러
나 김창시가 곽산 일대에서 이름 짜한 부호라는 것은 몇몇 사람이 알아챘다.
이 시대에 부자라는 것은 권력자와 줄이 닿아 있다는 말이었다. 권력 없이 돈
을 번다는 건 불가능하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자는 사흘도 가지 않아
다 빼앗기고 죽어 널브러지게 될 테니까.
나졸들은 자기에게 뇌물 바친 사람들의 줄, 그러니까 시준이 있는 쪽을 황급
히 돌아보았다. 홍총각이 코끝을 잠깐 찡그리다가 속삭였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마는 감영의 아전바치들
하고는 안면이 없지는 않아서 말이지. 저 선비에게 내 주먹맛을 한 번 보여줘
야 할 테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시준은 사람들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떠들었다.
“아닙니다. 저 선비의 말씀이 구구절절 모두 옛 법에 어긋나지 않고 밝은 뜻
은 더할 나위 없이 엄정합니다. 무슨 죄를 짓고 패악 쓰는 것도 아닐진대, 잘
모르고 부족한 일을 하였으면 타일러 깨닫게 할 일이지 무작정 채찍으로 치고
때리는 것은 어떻게 인의(仁義)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시준은 홍총각과 잽싸게 조금 거리를 두었다. 어차피 그는 이번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이니, 모르는 사람인 척함으로써 홍총각의 체면도 세워 주는
것이다.
홍총각이 나중에 맹차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자발없는 어린아이는 그저 심부
름꾼인데 글줄이나 읽었다고 나서서…….’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었
다. 사회생활 쉽지가 않다.
홍득주 집안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눈치 보다 감탄했다.
인의를 아는 순후한 백성들은 맹차 역시 공정하게 외면했다.
아무리 이 시대가 짐승의 시대라도 명분이 이토록 없어서야 역성 들어주기 어
렵다. 게다가 향촌의 교화는 진사의 임무가 맞다.
터져 나오는 불평불만은 그래서 외침이라기보다 우물거림에 가까웠다.
“벼슬 못 한 사정을 알 만하구먼! 한갓 무관무직 선비로서 나랏일 하는 사람
을 핍박하려 드시오?”
“곧 호방(戶房) 나리라도 오면 경을 칠 것이 틀림없지! 그때 도망가지나 마시오!”
김창시는 코웃음을 치며 됫박 위를 쓸어내리는 일을 감독했다. 나졸들은 손길
과 말만 거칠 뿐 어느새 꽤나 공정한 세곡 수납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새 진사 어른 모신다고 온 그 집 건장한 하인놈 여남은 명도 그 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 분명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김창시는 창고 줄에서 시선을 떼어 시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시준과 김창시의 눈이 마주쳤다.
“네가 홍 처사가 말했던 그 아이로구나. 준재라더니 사실이로다. 의를 보고
능히 행할 수 있으니 바로 용(勇)이다.”
시준도 조선 시대의 예법을 대강 익혔다. 공화국 시민이었던 그에게는 아직도
영 고약스러웠지만, 그는 단정히 나아가 땅바닥에 절했다.
“제가 부친으로 모시는 홍 장주님과 친밀한 사이신지요?”
“부친?”
김창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내가 말한 것은 내 벗인 홍 산남(홍경래)이다. 스무남은 살 된 청년이지. 너
희 집에 가끔 들러 본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저도 그분을 압니다. 우리 주인마님 댁에 자주 찾아뵙곤 하지요.”
‘홍경래의 친구라. 그 인간 참 발 넓네. 얘도 반란군인가?’
반란군이 맞다. 시준은 김창시에게서 반역자의 징조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며 그와 환담했다. 그러고 있던 사이 홍총각은 의주부 호장을 도와, 의주부
를 대표해 처리해야 할 여러 잡일들을 마무리했다.
저녁때가 되자 세곡 수납 행렬도 끝났다. 시준이 힐끗 길가를 보니 한참 전
김창시가 나타났을 때부터 평양성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던 사람들 몇몇이
돌아오고 있었다. 시준은 척 봐도 권세 있을 것 같은 높은 아전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것에 유의했다.
‘오호, 일이 뜻대로 안 된 모양인데.’
시준의 위치도 서장관이라 불릴 정도이다 보니 아주 자잘한 심부름까지 신경
쓰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도 이것저것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있다. 언제까지나
막내는 아닌 것이다.
시준은 그런 일을 도맡아하는 노비 아이를 불렀다.
“얘, 솔개야. 눈치껏 볼일 있는 척하고 가서 좀 엿들어 보렴. 이따가 약과라
도 하나 주마.”
소질개(召叱介)는 이름대로 재빠르고 영리한 아이였다. 그들의 숨죽인 대화를
살피던 소질개는 쪼르르 달려가 그 앞에서 철퍽 엎어졌다.
아이가 콧물 질질 마시며 훌쩍거리고 있자 주변 맹차 한 명이 발을 쾅 굴러
쫓아내려 했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지금 주변을 차박차박 뛰어다니고 뭣 하는 짓이냐! 누
가 여기에 어린애를 데려왔어!”
그러나 소질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정거리다가 한 번 더 호
통을 듣고서야 무섭다는 듯 도망쳤다. 과연 시준 일행과는 반대쪽이었다.
조금 후에 안 들키게 돌아온 소질개는 시준에게 나지막이 귀띔했다.
“다른 말은 못 들었지만, ‘어사가 출도’라는 말은 똑똑히 들었다우. 하는 꼴
들을 보아 하니 감영에 무언가 난리가 난 듯싶소.”
엄밀히 말해 암행어사는 관찰사(감사)와 동급이므로 감영에 출도할 수는 없
다. 암행어사가 감영에 왔다면 그건 보통 관직 선배인 감사에게 인사를 차리
러 온 것이다.
때려 부수고 봉고파직(封庫罷職)까지는 못 하여도 감사의 비리 역시 규찰해야
하는 게 암행어사이거늘 인사가 웬 말이냐 묻는다면,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
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암행어사 한 번 하고 관직 생활 끝낼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사정까지는 모르는 시준이라도, 지금 평안 감사가 수없는 곡창 중 하
나의 소란 따위 어찌할 여유가 없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감사 입장에서도
자기 얘기를 뭐라고 써낼지 모르는 암행어사는 요주의 대상이다.
시준은 약속대로 소질개에게 돈냥이나 쥐어 주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암행어사가 지금 앞질러서 평양 감영에 온 모양인데, 그러면 시준이 할 일
은 정해져 있다. 그는 홍총각에게 말했다.
“빨리 돌아가지요. 아마 북쪽 고을을 다 돌고 평양에 들른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걱정 안 해도 되는 거겠지?”
“물론이죠. 실컷 허탕쳤을 테니 우리는 눈에 안 띄게 다시 의주로 가면 됩니다.”
암행어사는 통상 오마패(五馬牌)를 수여받는다. 직관적 이해 그대로 역참에서
말 다섯 마리를 징발할 수 있으며, 그럴 일은 별로 없지만 의정 대신급이나
임금이 암행을 나간다면 말 수가 추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방자(幇子) 한둘 딸린 암행어사 이원팔의 기동력이 우마차 끌
고 느릿느릿 나아가던 시준 일행보다는 훨씬 빨랐다.
홍득주가 소문을 들었을 때는 이미 운산(雲山)과 삭주(朔州) 두 고을의 아전
들이 어사출도(御史出道) 날벼락을 맞고 어디 뒀는지도 모르는 직인이며 서류
를 찾느라 부산했다. 이원팔은 여기에서 국왕 이공이 봉해 준 밀지 외의 일반
적인 암행어사의 업무를 수행했다.
빙 돌아 의주에 도착한 이원팔은 반나절 만에 의주에서 캐낼 만한 것을 다 캐
내었다. 면밀한 고려에 따라, 이원팔은 의주에서는 출도하지 않았다.
이건 이미 의주와 용천부만의 일이 아니다. 더 윗선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이원팔은 평양 감영으로 직행했다. 그는 평안 감사 이서구(李書九)와
마주 앉아 말했다.
“의주 부민들은 선정이라 칭송하나 자세히 보면 모두 모리배와 주먹패의 무리
들이요, 둑 쌓는 일이 희한하게도 엄정하고 본래 역에 주게 되어 있지 않은
돈냥이며 쌀주머니들을 받아가는 품이 필시 관의 일이 아닙니다. 어느 면을
들어보나 이번에 귀양 간 선비 정 참의(정약용)의 이름과 함께 소위 근문소라
는 말이 들리던데, 영감께서는 아시는지요?”
일이 잘되면 관청이 했을 리가 없다는 슬픈 현실은 둘 다 굳이 말하지 않았
다. 이서구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을 뿐이었다.
“하민들이 질서 있고 산업(농사)에 힘쓴다면 그야말로 교화가 이루어졌다 할
일이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사람들을 모으려면 돈을 푸는 것도 한 방
편이 아니겠는가.”
평안 감사 이서구는 태만한 관리가 아니었다. 정조 때에는 이를테면 소방수
역할로서 여기저기 방백으로 파견되어 책임 뒤집어쓰고 귀양 가기도 하였으
나,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자였다. 평안도에서도 치수
문제로 상언하였다.
현대에도 그 명성 자자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그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인 이서구의 입장에서는 의주 부윤 홍의호의 업적은
오히려 품의 올려 상을 줘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서구는 정약용이 의주에 가고 나서 근문소가 생긴 것을 보아 아마
정약용이 귀양 가서 학문을 펼쳐 백성들을 위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정약용과 친한 사이라 안 보이게 이것저것 돌봐 주던 참이니만큼 이원팔의 말
이 곱게 들릴 리는 만무했다.
물론 이원팔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이다. 왕은 압록강 건을 누구보다 빠르고
비범하게 알아챈 예지를 보이려 한다. 왕의 밀지를 받은 이원팔로서는 뭔가
하나라도 건져 가야 했다.
이원팔은 급하게 다가들었다.
“감사께서는 압록강에 불온한 기운이 도는 것을 모르십니까? 잠채하는 검은
바지의 무리[黑袴黨] 하며, 전일 장자도에서 이양선을 쫓아냈다는 무리도 한
가지로 의주의 대상부고들입니다. 이들이 필시 수령은 허울뿐으로 만들어 놓
고 고을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의주 부윤(홍의호)도 선대왕 때 승지까지 했었고, 자네보다 한참 먼저 묘당
에 오른 사람인데 말이 심하구먼.”
“어찌 저 혼자만의 말이겠습니까? 상(上)께서도 장계의 어린아이 하나조차 유
의하고 계십니다. 천안(天眼)이 그물눈처럼 총총한데, 만약 태만하였다가는
감사께서도 억울한 일을 피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젊은 후배의 충언을 어리석
다 물리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서구는 그냥 물리치고 싶었다. 이원팔이 아무래도 모르는 듯한데 이
서구는 벌써 조정에 나 때려치우겠다고 상소한 뒤였다.
실제 역사에서도 순조가 이 청을 받아들여 유월이면 평안 감사가 바뀐다. 물
론 이서구 정도 되는 인사이므로 곧 다시 불러올려 경직에 임하기는 한다.
퇴직할 날 얼마 안 남은 평안 감사는 잘 돌아가고 있는 일을 괜히 트집 잡는
암행어사가 귀찮았다. 잠채야 어디 하루이틀 일이겠으며, 그럼 그 깡촌 장자
도까지 갈 사람이 상인들 말고 더 있겠느냐 말이다.
왕이 어쩌고 했지만 필시 노론 무리들의 지시를 받고 정약용의 남은 목숨줄마
저 끊으려는 듯하여 영 보기도 안 좋았다.
“내 부덕하여 아랫사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닐세. 영해부
(寧海府, 영덕)까지 유배도 가 보고 삭직(削職)도 당하여 보았는데 내 죄 내
가 받는다면 무엇을 사양하리. 자네는 그저 규찰한 대로 옳게 아뢰면 되네.”
이서구는 더 말하지 않고 장죽에 불을 댕겼다. 연기가 방 안을 채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이원팔은 곧 포기하고 물러나왔다.
이서구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어린아이라. 미용(美庸, 정약용)의 제자라는 그 아이로군……. 미용은 근래의
이양선 건에서 아무것도 못 본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아이가 무언가 통변 노
릇이라도 하였겠지.’
이서구는 왠지 그 아이에게 관심이 갔다. 정약용의 사람됨으로 보아 아무나
제자로 받지는 않았을 터이다.
평안 감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소한 재량권을 개인적 호기심을 위해 써 보
기로 했다.
작가의 말
1. 이 시대에는 한 고을에도 여러 가지의 창고가 설치되어 거기서 세납을 받았습니다. 기실 작중에 나온 홍득주 상단의 특수한 위치가 아니면 의주 사람이 평양까지 가서 세금 낼 일은 잘 없습니다.
또한, 세곡 내는 곳의 저 참상은 19세기 조선에서 자주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19세기 후반 함안 군수 오희문의 기록입니다. ( '함안군총쇄록', '뇌물의 역사'에서 인용)
"... 가보았더니 채찍과 매가 낭자하고 장형을 치라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었다 ... 납부를 시작한 지 8일 만에 매를 한 대도 대지 않고 일을 마쳤다. 아마 이 조운창을 설치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고 한다."
2. 곽산 사람 김창시는 잘 알려진 대로 홍경래의 난 당시 일종의 사상교육과 선전 담당을 맡았던 북진군 참모 그 사람 맞습니다. 꽤나 학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6. 죄어드는 그물(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