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6. 죄어드는 그물(2)
잦은 흉년으로 나라에 기민(饑民)은 항상 넘쳐났다. 통계에 따라서는 당시 파
악된 조선의 전 호구보다 유민이 더 많았다고도 한다.
대부분은 그냥 자기를 노비로 팔아버림으로써 호구를 마련하였으나 그것도 깜
냥이 있어야 한다. 자기 먹여 줄 대갓집을 찾는 것도 일이요, 노비도 상품이
라 공급이 많아지면 값이 떨어진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은, 철따라 이동하는 짐승처럼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아
떠돌 수밖에 없었다.
밥벌이할 밑천은 그저 몸뚱이뿐. 그런 사람들이 주로 찾아가는 곳은 사시사철
일거리가 있는 날품팔이나 광산 일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에서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었던 연유다.
그리고 지금 시준의 장사가 잘 되는 연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가난하고 비참하게 산다 한들 사람에게는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꼭
필요한 물건들이 있고, 그런 건 사람이 많은 만큼 많이 팔리게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그렇다.
입을 것으로는 시준의 히트 상품인 의주 청바지가 이미 있다. 임상옥은 시준
에게 웃돈 많이 얹어 주고 영국 천막 천을 몽땅 가져간 다음 아예 자기가 만
들어서 팔기 시작했다.
직조기나 재봉틀은 없지만 조선에서는 아직 사람이 훨씬 저렴하다. 임상옥은
여기에 남녀유별을 가릴 처지가 아닌 유민 부인네들을 모아다가 싼값에 썼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입을 잘 털어서 평안도 병마절도사의 행영(行營)이 있는
창성(昌城)에도 군대용으로 납품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21세기 군대를 겪어
본 시준도 인정했다.
‘하긴, 군대의 본령은 전투보다는 작업이지.’
이런 면에서는 임상옥이 자신보다 확실히 나았다. 아무튼 그래서 바지 사업은
돈만 받고 일단 한발 빠진 시준은 한가해진 시간을 활용하여 ‘먹을 것’에 대
한 새로운 사업에 착수했다.
다름 아닌 감자였다.
이때는 아는 사람이나 아는 수준이고 조선에 널리 퍼지는 건 20년쯤 뒤다. 조
선에 감자가 상당히 늦게 들어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부 입장에서
별로 반가운 식품이 아니라는 점이 컸다.
백성들은 키우기 쉽고 쌀을 대체할 수 있으면서도 세금으로 가져가지 않는(대
신 아전이며 군사들이 용돈 하러 빼앗아 가기는 한다) 이 구황작물을 엄청나
게 심어댔다. 따라서 쌀로 세금을 받는 조선의 경제체제는 흔들리게 된다.
감자뿐만 아니라 담배, 고추 등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다른 식품도 마찬가지
다. 상품작물의 전래는 위정자로서는 대체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시준 역시 군주였다면 감자농사의 유행에 따른 세곡의 급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군주가 아니다. 할 생각도 없다.
나라 경제고 나발이고 일단 홍경래가 헛짓거리 하기 전에 멀리 삼남 어디로
튀어서 부잣집 당주 노릇하며 여생 편하게 보낼 재산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역사보다 일찍 조선에 씨감자를 대량 수입한 시준
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거 대체 어떻게 기르는 거야? 그냥 땅에 묻으면 되나?’
전생에서는 도시 출신 화이트칼라였고, 이번 생도 어려서부터 상단 잡일만 했
던 시준이 농사를 지어봤을 리 없다. 다른 농사라면 마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
도 잘 가르쳐 주겠으나 의주 사람들 역시 감자는 대부분 처음 본다.
다행히 그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해결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대로 두면 금방 상할 텐데. 그냥 먼저 삶아 봐?’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 싸매던 시준에게 홍득주 상단의 행동대장 홍총각이 찾
아왔다.
“서장관(書狀官) 꼬마 있는가?”
어린 나이에도 상단의 행정을 총괄하는 시준을 사람들이 요즘 애정 반 놀림
반으로 부르는 별명이었다. 시준은 서안에 박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용천부에 남아 계신 줄 알았더니 웬일이세요?”
“서양인도 이제 금방 갔는데 뭐 가까운 시일에야 오겠는가. 거기는 이제 할
일이 없고, 요즘 내가 의주에 잘 없으니 건방진 놈들이 살살 고개를 내밀기로
이 어르신이 한번 다잡아 줘야 하겠기에 동리 바깥 좀 돌고 있었지.”
시준은 홍총각에게 얻어터지거나 심하면 압록강에 돌덩이와 함께 가라앉았을
무허가 조직들을 동정했다.
두리번대며 자리 찾던 홍총각은 시준이 방에 놔두었던 뒤주 하나를 가볍게 들
어 치우고 거기 주저앉았다.
할 얘기가 좀 길다는 뜻이라 시준 역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되사람 하나가 저쪽 위화도(威化島) 근처에 아주 초막까지 얽어 놓고
퍼져 있더란 말이지. 너무 배짱이 좋아서 내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었다.”
“청나라 사람이요? 요즘같이 엄중한 때에 어째서?”
홍총각은 담배 없냐고 묻다가 시준이 고개를 가로젓자 입맛을 다시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인이 산삼 캐러 만주로 넘어가는 만큼 비슷한 이유로 조선으로 넘어
오는 청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담하게도 조선에서 밭이며 집까지 만들어
놓고 일종의 기지를 유지했다. 시준은 이 시대 조선이 쇄국했다는 말이 정말
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같으면 범월의 사죄(死罪)를 받고 싶으냐며 을러대어 은 쪼가리나 우려
내고 강에 장사지내 주었겠지마는 지금은 또 형세가 그렇지 않잖은가.”
홍총각은 그러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컨대, 주먹을 써서 간단하
게 해결하지 않고 뭔가 이득이 될 만한 방향으로 그자를 써먹기 위해 시준에
게 조언을 구하러 왔다는 뜻이었다.
홍총각 같은 양아치마저도 이제 시대가 칼과 주먹이 아니라 금전과 타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시준은 홍총각이 바라는 대로 그의 지혜
를 잔뜩 추켜세워 준 뒤 말했다.
“사또(의주 부윤)께서 아주 좋아하시겠군요. 조만간 성경부에서 또 변경 순찰
하러 사람이 오겠는데, 그때 ‘실적’ 하나 더 올리게 해 주면 이 어찌 변경의
엄수를 성실히 했다 하지 못하겠습니까?”
“내 말이 그거지! 그러면 일 편하게 한 윗분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겠는가 말이야.”
홍총각은 자신의 생각이 똑똑하기로 이름난 서장관과 일치했다는 데에 벌쭉
웃었다. 시준도 따라 웃고는 물었다.
“그럼, 당연히 그자는 잡아왔겠지요? 들켰다는 것을 알면 내빼 버릴지도 모르니.”
“이를 말이겠는가. 우리 애들이 광에서 정양(靜養)시키고 있네. 아, 그러고
보니 되놈들이 먹는 물건인지 뭔가 요상한 게 밭에 있기에 뽑아왔는데, 이게
그 저번에 서양인들이 갖고 온 그거 아닌가?”
시준은 크게 놀랐다. 홍총각이 들고 온 것은 감자였다.
하긴 몰래 월경해서 초막 사는 주제에 벼농사를 짓기는 힘들 거고, 생육 기간
이 벼보다 훨씬 짧은 감자는 비밀기지에서 기르기는 적합하다.
이런 용도로 더 적합한 순무 같은 것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맛없는 것까지
씹어 가며 밀수상 정신을 불태울 자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 건 군인들이나
죽지 못해 먹는 거다.
“그 사람을 제가 한 번 보아야겠습니다. 되말 말고 중국말도 할 줄 알지요?”
“좀 타이르니까 조선말도 술술 하더라고.”
“역시 봉(棒, 몽둥이) 통사가 통사 중 제일이지요.”
물푸레나무 통사는 조정의 어지간한 역관보다 뛰어났다. 이름을 진사뢰(秦士
雷)라 하는 그 한인은 조선에 감자 농사법을 전파하고 씨감자 다량을 제공하
는 대공을 세우고 다시 갇혔다.
그자는 나무하다 도망친 간민(奸民)이었는데, 본래는 2년 전 장자도 사건 때
문에 파견된 책사 부도통 파영아에게 넘겨져야 하나 해당 건이 프랑스 해적
내습 사건으로 대체되어 묻히는 바람에 여전히 조선 국경을 넘나들던 밀수꾼
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대방(홍득주)께서 근문소에 올려 논해 보셔야 할 겝니다.”
국경의 방비는 엄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이 중차대한 일을 논의한 근문소에
서는 수령에게 자문을 구했고, 놀란 의주 부윤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거기에는 진사뢰가 몰래 캐었다는 조선 인삼 여러 근이 증거로 제시되었다.
밀수는 했어도 잠채는 안 했던 진사뢰는 당연히 거품을 물었으나, 간민 따위
가 뭐라고 지껄이던 간에 양국 조정 관헌들이 아뢰는 바가 한가지로 일치하니
더 뒷말이 있을 수는 없었다.
인삼은 ‘증거품’으로 의주부에 압수되었고, 당연하지만 수사에 잘 협조해 주
고 자국민의 실태를 민망해하며 정중한 태도를 보인 청국 관리들에게도 우정
으로 희사되었다.
그리고 관련자 모두는 이 모든 일이 의주 만상의 공임을 마음속에만 새겨두었다.
진사뢰가 압송되어 조선 국경을 떠난 날과 일생을 마친 날은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홍총각은 다시 진사뢰의 초막으로 가서 그의 유품인 남은 감
자와 가재도구까지 알뜰히 챙겨왔다.
그리고 그때쯤, 진사뢰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린 시준은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들어가 있으시라는 시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와서 일하던 정약용은
숨을 길게 내쉬며 허리를 폈다.
“내가 원래는 어딜 가나 매년 나무를 열 그루, 스무 그루씩 심고, 국화며 치
자(梔子)나 담배 기르기에도 게으르지 않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힘들구나. 오랜 관직 생활에 몸이 쇠하였던가.”
‘이보쇼. 당신 나이면 공무원 중에서는 아직 실무자야. 아니, 정약용 정도면
고시 출신일 테니 과장쯤은 하고 있으려나?’
시준은 그 말을 삼키면서 호미를 들었다. 흙덩이를 까부수고 파헤치자 백 일
이 지나 이제 먹을 만하게 된 감자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정약용은 흡족해했다.
“좋다. 좋아. 나도 처음 보지만 아마 이것은 근본이 감서(甘薯, 고구마)와 같
은 물건일 터. 상처 나지 않게 조심조심 캐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이것으로 요기를 하시지요.”
“그래, 심부름 나간 만득이 돌아오거든 불러 삶도록 하자. 요즘 시무룩한 것
같던데 너도 그리 쌀쌀맞게만 대하지 말려무나.”
만득이의 기분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시준 자신도 요즘 식품사업 일이 생각처
럼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요 석 달간 시준은 여러 가지 감자 요리를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시준이 아
는 감자 요리는 거의 튀김 종류였으며, 조선에는 기름이 항상 부족했다. 전
요리가 괜히 명절 때나 먹는 것이 아니다.
기름을 짜낸다는 것은 그 물건이 기름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 그런 고칼로리
음식은 귀중한 식량이지 입을 즐겁게 하자고 식용유를 짜낼 것이 못 된다. 대
표적으로 콩 같은 것이 그렇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참기름은 21세기에도 비싼 물건이며 돼지기름이나 소
기름은 말할 가치도 없다. 미국에서 치킨 튀기던 면실유(棉實油)라면 나쁘지
않겠으나 이 북방에서는 목화를 대량 재배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렌치 프라이의 야망이 좌절된 시준은 요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유
채(油菜)를 구하는 중이었다. 교역 제재를 대차게 먹은 북한에서 자력갱생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사업이지만, 북한만도 못한 현재 조선의 상황에서는 쓸 만
해 보였다.
하지만 농사일에 근본적으로 지식이 별로 없어 정약용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일전의 일로 버성기는 만득이와 시준 사이를 화해시키
고자 했다.
시준은 자기를 통해 만상과 연결하여 북방 계책을 마련해 보려는 정약용의 건
전한 책략을 모른 척했다.
“제 동무와 칼부림까지 한 사이라 될지는 모르겠지마는 스승님 말씀이니 받들
겠습니다.”
옆에서 같이 감자 캐고 있던 기랑이 안 들리게 콧방귀를 뀌었다. 시준은 그것
도 못 본 척하고 다시 호미를 쥐었다.
수렵보다야 농사가 떳떳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포수인 기랑의 입장에서 감자
는 쪄서 말린 쌀이나 말린 토란, 경단 따위에 비해 갖고 다니기가 편했다.
그때처럼 멍청한 꿩이 풀숲에 엎드려 있는 일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게 아니
다. 사냥꾼의 일이란 정약용의 말처럼 놓아 놓은 덫이며 올무를 살피러 다니
는 게 대다수. 사냥할 것 믿고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가는 산속에서 굶어
죽기 일쑤다.
그래서 특별히 산 타지 않는 날은 정약용 집에 드나들며 잡일 품 팔고 감자
농사를 돕고 있었다. 간간이 글도 같이 배웠다.
여기저기 용병이나 대리 포수로 팔려가며 남의 돈이나 벌어주던 기랑이 고향
동리에서 독립하게 되면 좋은 일이다. 정약용도 시준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금
세 깨달았고, 포수들의 불만 – 우리 애를 왜 데려가느냐 – 을 이치로써 잘 타
일러 묵살했다.
포수 천 명이 읽은 글을 다 합해도 정약용 한 사람만 못하다. 정약용이 늘어
놓는 여러 고사와 인간의 도리에 주눅 들고, 어느새 행세깨나 하게 된 근문소
향사(鄕師, 여기서는 자문위원) 이름에 눈치 보던 포수들은 기랑을 놓아주었다.
정약용은 희만당 옆의 창고를 고쳐 방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 하였으나, 기랑
은 거절했다.
그러고는 홍득주 집, 그러니까 시준이 살고 있는 곳 근처에 따로 오막을 얻었
다. 의주 바닥에서 그나마 가장 친한 자가 시준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얘가 참 어지간히 붙임성 없기는 하지. 오늘도 나 따라왔는데 나만 훌쩍 가
버릴 수도 없고…….’
어쨌든 시준 역시 오늘 만득이와 겸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도 바쁘고, 만득
이에게 아쉬울 것도 딱히 없다.
정약용이 혹시 밥 먹고 가라고 할까봐 걱정되었던 시준은 기랑을 끌어들였다.
“기랑아, 일하느라 땀 한 번 좋이 흘렸는데 개울에서 멱이나 감지 않을 테냐?
내가 비누도 가지고 왔단다.”
“……싫어.”
의외의 대답에 시준은 놀랐다. 기랑의 입장에서도 여기 있다가 붙들려서 불편
한 감자 씹는 것보다 – 그리고 정약용의 장광설을 듣는 것보다 –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옆에서 정약용이 또 참견했다.
“그 비누라는 것은 옛날부터 말하던 비루(飛陋)를 일컫는 것일 테지? 몸을 정
히 깨끗이 하기에 그보다 좋은 것이 없으나, 때로 지나치게 쓰면 살갗을 벗겨
내어 약해지게 하니 조심하여야 한다.”
‘살갗이 아니라 묵은 때겠지.’
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랑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묵묵히 땅을 팔 뿐이었다.
시준 역시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누를 껄
끄럽고 낯설게 여겼다. 만드는 대로 지유가 상당량을 빼앗아가서 빨래할 때나
잘 쓰는 수준이었다.
기랑이 비누가 싫어서 멱 감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생각하던 시준은 조선 사람
들에게 영 먹히지 않는 비누 영업에 탄식했다. 저러다 어느 날 식중독이나 독
감 같은 거라도 걸려서 훅 가면 어쩌자는 말인가.
결국 시준은 내키지 않는 대로 정약용 식구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어차피 유
배 죄인이라서 그런지 정약용은 종놈과 겸상하는 것도 그다지 크게 꺼리지는
않는 듯했다.
“이것 참, 대여섯 개만 자셔도 이리 든든하네그려. 달지도 않아서 자꾸 들어
가는데, 나중에 돌아갈 때 꼭 갖고 가야겠소.”
만득이도 애초에 심지가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찐 감자를 수저로 푹
푹 떠먹으며 그렇게 좋아했다.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기랑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시준은, 그러나 별로 화기애애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암행어사라고요?”
“쉿. 세상 천지에 그렇게 떠들어대는 암행어사가 어디 있느냐?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게다.”
홍득주는 소문이 어쩌고 했지만 시준은 금세 짐작했다. 암행어사의 기밀이 투
철하다는 것도 옛날 얘기. 어쨌건 비변사에서 암행어사를 모를 수는 없고, 비
변사 당상은 절반 이상이 김조순의 부하나 다름없다.
따라서 김조순이 눈만 찡긋하면 그 중 한 사람이 여러 경로를 거쳐 의주에 전
달할 것이다. 암행어사가 갔으니 일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는 분부는 부윤과
백성 모두가 알아들었다.
홍득주가 시준을 부른 것도 그 일 때문이었다.
“가만히 듣자 하니, 지금 암행어사는 진주 목사를 하였던 이원팔(李元八)이라
하는 자로서 인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여러 고을에서 캐묻고 다니
는 정상이 심상찮은데 그 양이(洋夷)에 대해 잘 안다는 학동이 누구냐고 묻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본래 근문소에서 만상의 공을 확대하려고 장계에 끼워 넣었던 시준의 일화가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평안도 건으로 신하들에게 선견지명을 과시하고 싶었
던 국왕 이공의 칼날은 엉뚱한 시준을 찔렀다.
홍득주와 시준 둘 다 몰랐지만 이원팔이 처음부터 유능하고 청렴한 사람은 아
니었다. 그는 3년 전 진주 목사 시절 다른 암행어사의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후 각성이라도 하였는지, 얼마 안 가 평안도 암행어사로 발령 나
일곱 개 고을 수령을 먼지 나게 털어 버린다. 나중에는 제주도에서 선정을 베
풀어 송덕비까지 얻게 된다.
지금도 만상들이 다양한 경로로 접촉하려 했으나 바늘도 안 들어가는 상황이
었다. 시준은 자꾸 자기 생각과 반대로 흘러가는 인생에 진저리쳤다.
“잠깐 희만 선생(정약용)의 집에 몸을 숨겨도 되겠습니까?”
“암행어사가 어찌 유배 죄인에게 한번 유의하지 않겠느냐? 그건 별로 좋은 계
책이 아니다. 갑자기 도망치는 것도 여러 사람의 눈에 띌 터. 어차피 암행어
사 차견이야 우리 같은 백성들은 모르는 일이니, 회록(會錄) 건으로 평안 감
영(監營) 가는 행렬에 끼도록 해라. 집안일로 공교롭게도 자리를 비우는 게
지. 그사이 우리들이 말을 맞춰 보마.”
조선 후기 의주부는 대청 최전방 기지로서 상당 부분 재정의 자율을 보장받고
있었다. 의주부의 소작민은 전세를 면해줌으로써 사람을 모으고, 의주부 자체
적으로 은을 대출하여 이자 수입으로 고을을 운영한 기록도 확인된다.
그 과정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여러 행정 처리는 반드시 평안 감영에 모아
서 기록, 그러니까 회록되어야 했다. 근래 부유해진 의주부에서는 이것저것
감영에 갖다 바치는 게 많았으므로 상당한 재물도 같이 실려 갔다.
의주부에서 돈이 얽힌 일이라면 홍득주 상단이 빠질 수 없다. 그들은 행렬에
일꾼으로 포함되어 재물 나르며 잡심부름 하는 건 물론이요, 먼저 달려가 주
막 손님 다 쫓아내고 아전들 쉴 자리 마련하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의주에서 평양까지의 길이 가깝지는 않다. 충분히 암행어사가 갈 때까
지 몸을 사릴 수 있을 터. 이는 홍득주가 얼마나 시준을 아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시준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께서 이리 생각해 주시니 그 은혜는 부모보다 넓어 잊을 수 없겠습니다.”
작가의 말
1. 미국에서 목화 산업의 부산물인 면실유로 치킨 튀겨 먹던 것은 작중 시점과 큰 차이 없는 시기입니다. 치킨이 미국 남부에서 가난한 흑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면실유는 냄새도 있고 색도 시커먼 데다 발암물질도 있어서 근대적 정제기술이 없이는 식용유로 쓰기가 난감합니다.
2. 조선에 감자와 그 재배법이 유입된 경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작중에 나온 '월경 청나라인이 만들어놓은 감자밭' 설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물론 진사뢰라는 인물 자체는 벌목하다 도망친 일꾼이라 감자하고는 실제 관련이 없지요.
확실한 건, 어찌됐건 청나라에서 들어왔으며 고구마보다는 한참 나중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원래 감자란 고구마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때는 북에서 온 감자라 하여 '북감자'라고도 불렀지요.
7. 죄어드는 그물(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