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6. 죄어드는 그물(1)
‘귀인’이라고 한다면, 지금 당연히 나와 있는 미관 첨사 이존경과 용천 부사
안종후를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봐도 표류선의 몰골이 아니건만, 그들은 이 서양 오랑캐들에 대한 자
애심에 넘쳐 있었다. 근문소에서 분명히 불쌍한 표류인들이라 말하였으니 어
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자애심은 두 관리가 급작스레 해태 눈이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원래 표착한 자를 구휼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조종의 관례였다.
너희들은 부디 안심하고 우리 임금의 은혜를 받으라.”
무위의 치란 별것이 아니다. 쓸데없는 관리의 참견이 없자 일은 물 흐르듯 했
다. 선원 몇몇이 시준의 옆에 선 기랑을 보고 흠칫하기는 하였지만, 이번에는
최초로 별다른 폭력 사태나 고성 없이 거래가 끝났다.
그리고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귀인 하나가 더 도착했다. 시준의 정보 봉
쇄 때문에 뒤늦게 소식 들은 정약용이 만득이와 함께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잔치판은 다 파장이요, 영국 배는 눈이 웬만큼 좋지 않으면 분별
못할 정도가 된 지 오래다. 정약용은 주저앉기라도 하고 싶은 표정으로 수평
선을 노려보았다.
“늦었구나!”
선비 체면에 숨이라도 고르는 정약용과 달리 만득이는 금방 분풀이 대상을 찾
아냈다. 그는 눈을 희번득거리다가 안면 있는 시준을 붙들었다. 아무래도 험
상궂은 만상들은 좀 무서웠다.
“아니, 사제의 도가 무너진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있는가? 이런 큰일이 생겼는
데 스승에게 한 번 아뢰지도 않고 휭하니 가 버리는 건 무슨 경우야?”
어쩌고 떠들던 만득이는 홍총각이 점잖게 그 팔을 잡자 내 팔 부러진다며 나
뒹굴었다. 시준은 혼자 참 잘 논다고 생각하며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가 종놈에게 도리를 들어야 하오? 돈 주는 사람이 급히 오라니 급히 갈 수
밖에.”
여태까지 정약용에게 드나들며 미운 정으로 농지거리 주고받아서 그렇지 둘은
신분이 다르다. 시준은 엄연히 양인이며 서출조차 아니다. 그냥 가난한 집이
었을 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돈도 적지 않다.
아무리 지금 세상이 품팔이꾼도 공명첩 받아 귀에 옥관자 달고 수레 끄는 세
상이라 해도 노비와 양인이 같다 할 수는 없다. 시준도 이제 조선인이 거의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득이는 충격받아서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
준은 별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따 담배 쌈지라도 쥐여 주면 다 풀릴 녀
석이다.
문제는 정약용이다. 그는 적어도 만득이보다는 정교한 논리를 준비했다.
“배우자면 밥 하는 노파에게도 배울 수 있는 법. 이번에는 만득이의 도리가
옳다. 율곡(栗谷) 선생이 『소학』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주석하였고
네가 너에게 『예기』를 힘써 가르쳤는데, 어디 멀리 나갈 때 반드시 부모에
게 아뢰는[出必告] 법이라는 글을 네가 읽지 못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정약용이 이런 구구한 소리밖에 할 수 없는 건, 공식적으로 정약용은 귀양을
왔지 정보 수집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준도 그 점을 들어 말했다.
“스승께 좋은 구경 하게 해드리지 못한 점은 송구하지만 또한 옛 글에 선공후
사(先公後私)라 하였습니다. 제가 글 배우는 일은 사사로운 일이요, 고을 수
령의 공무를 수행하는 장주님(홍득주)은 제가 부친으로 모시는 분이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공무가 어쩌고 수령이 어쩌고 하는 말에 담긴 암시는 정약용도 이해했다. 지
금 그는 귀양 죄인으로, 그가 의주를 떠나 이 용천부까지 올 수 있던 것은 어
디까지나 한통속인 근문소 및 수령들의 묵인 덕문이지 귀양이 만만한 형벌이
라서가 아니다.
“그래. 네 말도 옳다.”
정약용은 그만 관두자는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다만 시준을 타박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지 목적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뭐 여러 가지 두고 갔다마는, 혹시 그들의 책은 없더냐? 예컨대 네가 태워
버렸다는 성문종합영어를 그들이 혹시 가져오지 않았을까?”
‘구휼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놓고 간’ 재물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데도 책부터
찾는 것을 보니 그의 학자적 열정을 알 만했다. 그리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세
우려는 의지도.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준은 책을 내어줄 수 없다. 책은 정보가치가 높
은 만큼 조정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시대 유럽인의 책에서 신앙이 언급되지 않을 가능성은 적고, 현재
의 천주교 탄압 분위기에서 그렇게 되면 간신히 숨겨놓은 이 밀무역이 파헤쳐
질지도 모른다.
일전 성문종합영어 건은 시준에게 힌트를 주었다. 정약용이 그렇게 하는 것처
럼, 시준도 이번에 입수한 책을 적절히 번역하고 로컬라이징해서 금서 취급되
지 않을 부분만 뽑아다가 가공의 서적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준은 매우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정약용을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저도 물어보았으나 아무래도 선원들이다 보니 가지고 있지는 않았
습니다. 차후에 오게 되면 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허어. 지금이야 우연한 사고이지, 나라가 조심스럽게 사대하는데 어떻게 사
사로이 외국 배가 올 수 있겠는가. 아깝구나.”
시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약용을 떠 보았다.
“서양 사람들이 한가지로 배 타고 장사하기를 좋아한다 하니, 이번에 길 알아
낸 것을 기화로 다시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과 장사할 수 있다면 책
도 사올 수 있겠지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사람을 물화(物貨)로 홀려 사학
(邪學)과 요술을 가르치니 대개 황건(黃巾)·오두미도(五斗米道)의 무리다. 너
도 이제 열두 살이나 되었고 신분이 양인이니 과거를 볼 수도 있을 터. 스승
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느니라.”
정약용은 일본 지도를 구해 경위선(經緯線)과 축척에 대해 연구하는 등 해외
사정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건 조선 사람 중에서 그나마 그렇다는 얘
기고 지금 정약용의 처지에서는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도 없다.
시준은 아쉬워서 한 번 더 찔렀다.
“그렇군요. 제가 경솔하였습니다. 중씨(仲氏, 둘째 형. 여기서는 손암 정약
전)께서 흑산도(黑山島)에 계시다 들었는데, 저들이 우리나라 바닷가를 자주
왕래한다면 그 깨끗한 뜻이 의심받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정약용과 달리 정약전은 진짜 천주교도이고 더 엄중하게 의심받는 상황이었
다. 서양인이 하필 우연히도 흑산도에 갔다는 말 따위 아무도 안 믿을 터. 빼
도 박도 못하고 잠통모반이다.
시준의 두 번째 두드림은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정약용의 얼굴은 변함이 없
었지만, 그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균열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삼가고 또 삼가는 수밖에. 우리 손암 형님은 경거망동할 분이 아
니시고, 남만이나 유구에서 제주와 전라도로 표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도 일의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무작스럽게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지요. 어디까지나 표류이니까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괜한 말로 심기를
어지럽혀 송구합니다.”
시준은 장자도의 강바람 속에서 빙긋 웃었다.
어차피 영국은 조선에 대해 조사하고 싶어 한다. 나중에 동인도 회사와 잘 되
면, 그들을 남쪽으로 표류시킨 다음 편지 한 통 정도는 전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홍득주와 시준은 돌아와서 안쪽 일에 매진했다. 지존에 아뢰는 장계는 널리
살펴 빠트린 부분이 없어야 하므로 근문소에서 그 대강이 논의되었다.
곧 이 복잡한 연극의 최종 결과물이 서울에 올라갔다. 관청의 공식 보고와 정
약용이 사적으로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불랑국 배는 그 뒤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 가만히 사정을 들어 보건
대 불랑국은 인민들 스스로가 천륜을 무너뜨리고 도덕을 훼상하여 하늘의 벌
이 미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나라가 저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합니다. 이를 말해 준 것은 본래 청국의 책을 읽었다 하는
어린아이 한 명이라 감히 아뢰지 못하고 의심하였으나, 별도로 치계한 영길리
국 배의 내왕이 있었기로 그들을 문정한 바 그 학동의 말이 과연 사실과 다르
지 않았습니다. …… 신이 거절하였음에도 그들이 한사코 놓고 간 물건은 능직
(綾織), 달화은전(韃貨銀錢, 스페인 달러 은화를 말한다) 등속인데 난파선이
다 보니 물목은 보잘것없으나 성의를 보아 거두었습니다. 이는 별단에 올려
보냅니다. 이로써 보면 영길리국 사람들은 자못 도덕과 염치를 안다 할 수 있
겠습니다.>
<내가 요사이 풍병이 있어 발을 재게 놀리지 못해 늦게 당도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불찰이다. 그들의 길쭉한 돛대는 바다의 저 끝 아래로 사라져 갔는데,
이것으로써 홍덕보(洪德保, 홍대용)와 성옹(星翁, 성호 이익)의 지구설(地球
設)이 옳음을 잘 알겠다. …… 나중에 전하여 듣기로 그들은 불랑국의 죄가 하
늘에 닿음은 곧 이웃 사람인 자신들이 덕을 펼치지 못한 탓이라 사죄하였다
하며, 곧 군사를 내어 역적을 징치하고 인민을 편안케 할 것이라 말했다 한
다. 이는 단지 표류의 고단함을 면하려고 짐짓 해본 말일 수 있겠으나, …… 먼
곳의 오랑캐가 우리 군왕의 성덕에 복종함이 또한 어떠한가? 극기복례하면 천
하가 이처럼 돌아오는 법이니 너 또한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평안도 북부 여러 군현의 수령과 아전부터 민초까지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기
군망상이었으나 아쉽게도 이 성의는 크게 빛나지는 못했다.
이 보고가 연달아 한성부에 도착했을 때쯤 대왕대비 김씨가 승하하였기 때문이다.
비변사에서는 지방관이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묻어 두고 치워 버렸으며, 김조
순 역시 자신의 예측과 사세가 크게 엇나가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내치 – 그러
니까 표 안 나는 반대파 숙청에 더 힘썼다.
만약 비변사와 조정이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했다면 바야흐로 조선 대오각성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인 한 명의 공들인 공작이 그것을 무력화시켰기에, 일은 꼭 좋게
만 흐른다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청 가경 10년(1805년) 맹하(孟夏), 조선국.
대왕대비 김씨는 철렴한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간간이 정사에 참견하였다. 그
래서 조선 국왕 이공은 친정이란 이름뿐, 여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
했다 여기고 있었다.
이공은 자신이 이제야말로 군왕으로서 억조창생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는 조선에서 성인인 15세가 지났기도 하다.
딱히 조선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21세기 아이들도 열다섯 살 먹으면 자기가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지니 인간 본성이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이공의 눈에 이 하수상한 형세에서 나랏일을 걱정하지 못할망정 정순왕
후 사후의 권력 조정에나 몰두하는 신하들은 더할 나위 없이 한심해 보였다.
그러한 인식 자체는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공은 편전에서 자신 있
게 말할 수 있었다.
“예부터 나라가 쇠하려면 내외가 소란한 법이라. 대국에서는 안으로 사교도
(여기서는 백련교도를 말한다)가 날뛰고 바깥으로 서양국 사람들이 슬금슬금
기어든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평안도의 일을 보면 그 독에 우리나라에도 미
치지 아니하였다 할 수 없다. 지난 일을 자세히 살펴서 아뢰되, 처음과 끝이
모두 명징하여 한 점 의혹이 없게 하라.”
신하들은 왕이 대체 눈치 없이 왜 이러나 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임
금은 끝까지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용천 부사와 미관 첨사, 그리고 의주 부윤은 이 국초 이래 없던 큰일이 있었
는데도 짐짓 별것 아닌 듯하게 처결하였다. 글로는 외국 배를 문정하고 표류
한 자를 구해낸다 하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물건을 매매한 것과 다
름없어 대국을 섬기는 뜻에 어긋난다. 군주를 잊고 외국과 교류하며 당여를
이루어 다니는[忘主外交 以進其與, 『한비자』] 자 곧 망조(亡朝)의 신하이니
어찌 엄히 다루지 않을 수 있으리. 벼슬아치는 물론이요, 관계된 상한(常漢)
까지 모두 잡아올려 율문(律文)하라.”
그 숙연한 어명 앞에 비변사 당상들이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임금 말마따나 용천과 의주에서 뭔가 만상이 얽힌 작당이 있는 것 같기는 하
다. 허나 결과적으로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에서 제법 공손해지고 별다른 말썽
이 없으며 부세도 잘 걷힌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 아닌가.
김조순은 정약용의 서신도 때때로 받아보고 있었기에 더욱 그것을 확신했다.
그가 무슨 만고의 충신이고 청백리라고 그 일을 파헤칠 생각은 꿈에도 없었
다. 그저 일이 이렇게 조용히 묻힌 것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왕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 문제였다. 만약 불려온 수령들이 추고의
엄정함을 못 이겨 이상한 말이라도 했다간, 사태를 이렇게 발전시킨 다른 당
상관, 심지어 김조순 자신조차도 위험해질지 모른다. 지금은 미묘한 권력의
격동기였다.
다른 신하들은 네 사위 좀 어떻게 해 보라고 압박적인 눈빛을 보내었다. 그러
자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탐탁찮은 기색을 얼른 숨기고 아뢰었다.
“용천부의 하민들이 불랑국 배를 두 차례 쫓아내고, 이제 수령들은 표착한 영
길리국 배를 거두어 먹여 보내니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도는 전하의 위광 아
래 이미 바로 섰습니다. 전하의 지극한 명을 받든 수령들이 백성을 잘 가르
쳐, 듣기로 이미 상인 모리배들마저 교화되어 압록강 천 리에 다투는 소리 하
나 없다 합니다. 의심나는 자는 쓰지 않되 사람을 한 번 썼으면 의심하지 말
아야 하는 법. 한 번 왕명을 받든 수령을 어찌 명백한 죄 없이 잡아다 힐문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왕은 고집불통이었다. 사춘기에는 원래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아무
래도 초장에 신하들과의 기싸움에서 이겨야 나중에 자기 뜻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야 허수아비에서 사람으로 바뀐 왕이지만, 그래도 군주는 군주다. 그리고
조선은 전제 군주국이다.
결국 의주 부윤 홍의호와 용천 부사 안중후, 미관 첨사 이존경은 나란히 파직
되었다. 이는 만상들 입장에서 위험 신호였다.
홍득주는 시준과 함께 기민하게 움직였다. 백성들을 동원해 덕 높은 수령이니
떠나지 말아달라고 길가에서 몸으로 행렬을 가로막는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책문 쪽의 사람들을 통해 성경부에 몰래 연통을 넣은 것이다.
세 벼슬아치가 각자 발병이 났거나 도로가 진창이 되었다거나 하는 불가피한
사유로 도성 가는 길을 지체하는 동안, 훨씬 빠른 청국 성경부의 공문이 조정
에 도착했다.
<성경 형부(刑部) 아문(衙門)에서 글을 보냅니다. 귀국 의주 부윤, 용천 부
사, 미관 첨사 세 사람은 변경을 지키는 도가 지극하며 막히고 뚫리는 데에
한가지로 법도가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안심하고 장사하며 또 서양 해적들
을 쫓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충신의 절개를 지키는 데에 그릇된 정상이
없으니, 귀국에서 파직시킨 세 관리를 곧 원직(原職)에 복직시키십시오. 이후
로도 수토(守土)를 엄히 하여 법금(法禁)이 잘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원 역사에서 청국 월경민을 함부로 놓아줬다 하여 파직된 이존경을 복직시킨
바로 그것과 유사한 공문이었다. 국왕 이공은 자기 입으로 대국을 섬기는 도
리 어쩌고 하였으나 진짜 대국이 이렇게 나오자 가슴만 칠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의 임금이 누구냐!”
실제 역사에서 이존경이 즉각 복직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으나, 나중에 서울
에서 더 높은 자리로 등장하는 것만은 분명하고 후에는 수군절도사에 병마절
도사까지 한다. 이것이 대국의 위엄이다.
하지만 그건 일개 무관 하나이고, 이번에 의주 부윤과 용천 부사, 미관 첨사
세 사람에게 동시에 그런 일을 하려면 부담스럽다. 결국 이공은 조용히 패배
를 인정하고 이번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관(記事官)의 엄정함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 왕의 부덕을 논할 수야 없
으니, 이 일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고 기록은 사초부터 사라졌다.
새롭게 덧씌운 글은 ‘왕이 변경의 일을 감독하러 어사와 도사를 뽑아 파견하
였다’ 하나뿐이었다. 첫 사업부터 망신당한 왕이 원한 품을까 봐 염려한 신하
들이 대신 감독할 관리들을 왕의 이름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청나라 눈치 보느라 변경 관리들의 죄를 물으러 간다고 할 수는 없고,
대신 평안도에서 걷히는 세곡이 원래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니 그 사용처를 감
독한다는 핑계였다.
김조순 이하 신하들은 자신들이 왕을 충실히 보좌하여 폭주를 막았다고 생각
했다. 만약 어린 왕이 청까지 무시하고 일을 강행하였다면 나라마저 위험해질
뻔했지 않았던가. 절대로 권력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왕께서 총명하시나, 아직 연소하시므로 미처 살피지 못하거나 혈기에 일을
그르치시게 되는 일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럴 때 간하는 것이 바로
바른 신하이다. 이래서 상제(上帝)조차도 좌보(左輔)와 우필(右弼)의 도움을
받는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국충정에 가득한 세도가 김조순은 앞으로도 자신이 함부로 저 범용한 선비
들처럼 은거하여 물러나거나 하면서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작가의 말
1. 정약용은 공재 윤두서가 직접 베낀 일본 지도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정약용의 외가가 해남 윤씨라서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이 지도의 출처에 대해 '아마 왜란 때 일본군의 진지에서 얻은 것 같다'는 추측을 합니다.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아야 축척과 경위선 모눈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언급도 했었죠.
2. 이존경의 일은 본문처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존경은 장자도의 청나라 사람들을 잡았는데 아무래도 그냥 무고한 백성들이 실수로 온 것 같아 풀어주었고, 짤립니다.
허나 청나라가 복직시키라는 공문을 보냈죠. 작중과 같이, 황제 명의도 아니고 성경부 명의였습니다.
다만, 어차피 파직 처분이란 게 별 것 아니었던 조선의 관례를 감안했을 때, 청나라가 이존경 자체를 주목했다기보단 '조선 정부는 그 청나라 사람들이 불법 월경한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압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합니다.
조선으로서도 청나라 공문에 화들짝 놀라 이존경을 복직시켰는지... 는 실록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몇 년 후에야 서울에서 무겸(중앙군 무관들의 관청인데 현대에 대입시키기가 애매하네요. 선전무관 쯤이었던걸로 보입니다.) 소속으로 얼굴 비췄다가 최종적으로는 본문처럼 병마사에 절도사까지 잘 하고 은퇴합니다.
3. 어째 순조가 좀 어린아이처럼 나왔는데, 나이로야 어리긴 하지만 순조는 치세 초기 꽤 의욕적으로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홍경래의 난 이후로 멘탈이 털려버렸는지 영 안 좋게 돌아가기는 하지만요.
6. 죄어드는 그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