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화 (15/284)

15화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4)

상사(商事)란 돈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 진짜 뜻

은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현재 조선 사람들이나 시준에게 있어서 그 말은 본

받아 따를 만한 것이었다.

탐욕 이전에 인의(仁義)를 보라는 아언(雅言)이 아니다. 결국 인맥 없이는 큰

돈도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현실이며, 사람만 잘 잡아 두면 돈이야 나중에 얼

마든지 굴러들어온다는 경험칙이다.

물론 그 방면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의 여러 불문율에 익숙하지 않은 시준보다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홍득주나 차형기가 더 나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

가 없다.

그러나 시준은 이 일에 자기 전직, 그러니까 공무원의 방식을 적용시켜 더 확

대 발전시켰다.

정약용의 학동 노릇한 지 두 달, 시준이 그저 성현의 글만 파고 있던 것이 아

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정약용보다 훨씬 바빴다.

시준은 새로 온 의주 부윤 홍의호(洪義浩)가 만상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을 확인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근자에 청국에서 떠내려온 목재 사백여를 백성 진휼(賑恤)하는 데에 쾌히 내

주었으니 새 부윤의 인품을 짐작할 만합니다. 앞으로 아침저녁 섬기기를 게을

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804년, 청나라는 자기 관리 실수로 조선에 떠내려온 목재를 ‘조선에 하사’한

다며 문서를 보내 갖은 생색을 내었다.

개인 입장에서는 많은 양이나 대국 청나라씩이나 되어서 관리까지 보내 도로

갖고 오기에는 아무래도 체면이 안 서는 정도라 성경부의 처신은 합리적인 것

이었다.

그 전부터 장자도 건으로 청국 관리를 많이 알던 홍득주는 우회적으로 의주

부윤에게 접촉하였고, 의주 부윤 홍의호는 청으로부터 두 번 다시 뒷말이 없

도록 다짐을 받아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다.

홍의호는 이것으로 관청과 학교를 수리하며 나룻배를 보수하고 울타리를 고쳐

백성들이 편하게 쓰도록 했다. 일부 나무는 돈으로 바꾸었는데, 이 시기 툭하

면 일어나던 압록강 범람 때문에 작살난 논밭 앞에서 망연해하고 있던 백성들

에게 겨 섞인 곡식이라도 몇 섬씩 돌아갈 만했다.

백성들은 송덕비(頌德碑)라도 세워야겠다며 춤을 추었고, 의주 만상들도 춤을

추었다. 그 사업을 하청받은 것이 홍득주와 임상옥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세의 선정(善政)에 어찌 다른 말이 있을쏘냐. 즉시 장인들이 모였고 거

창하게 간판부터 내건 진휼소가 설치되었다. 만상들은 수령 번거롭지 않도록

중간에서 많은 몫을 제작비 및 유통 수수료로 떼어 가졌다. 관민이 서로 통하

고 아래위가 화합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홍의호가 만상과 같이 잘 해나가고 싶다는 뜻을 이미 표했으니, 우리도 마땅

히 보답해야 하지 않느냐는 시준의 말은 홍득주에게도 잘 이해되었다.

홍득주는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넣었다.

“그러잖아도 내 여러모로 애써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장사치가 고관에게 동

성(同姓) 운운하며 들이대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뺨 맞을 일이요, 관의 사업하

는 데 여러 돈 들어갈 일을 도우려 해도 한사코 받지 않으니 사람은 훌륭하다

마는…….”

조선의 수령이라고 무조건 자판기처럼 뇌물 받고 이권 내 주던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청백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뇌물은 꼭 돈

만이 아니며, 재물의 욕구만이 아니라 정신적 욕구까지 만족시켜 줘야 진정코

뇌물 쓸 줄 아는 자라는 의미다.

정약용을 두 달간 겪어, 대강 선비들이 어떤지 깨달은 시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바로 그 일에 대해 긴히 주인마님께 아뢸 것이 있습니다.”

홍득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곰방대를 빨았다.

“네 비록 나이 어리나 너의 계책은 엇나감이 없으니, 나도 귀담아 듣겠다.”

며칠 후, 남아도는 목재가 많아진 탓인지 의주부 경내에는 뜬금없이 자그마한

당(堂) 하나가 세워졌다.

요즈음 높은 학문으로 의주에 명성 자자한 희만 정약용 선생의 글을 얻어 현

판을 달기로 근문소(謹問所)라 하였는데, 근문이라 함은 삼가 묻는다는 뜻이다.

고을의 존경받는 학자와 선비, 노인들을 계절에 한 번씩 모시고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고을의 대소사에 대해 지혜를 빌리는 자리였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하여 돕는다.

농사가 상대적으로 중하지 않은 고을이라 이름만 걸려 있던 향약(鄕約)의 갓

찌그러진 문사(文士)를 거의 흡수하여 경쟁자를 없게 한 것은 물론이다. 현대

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자리인 육방 아전들도 자리했다.

그리고 이러한 좋은 모임에, 참으로 바른 목민관인 의주 부윤 홍의호가 참석

하여 자리를 빛내 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홍득주는 홍의호를 상석에 모시고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번 일로 수령의 높은 덕이 온 평안도를 짜하게 울리는 차에, 여기에 오래

산 사람으로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

니다. 공사로 번거로우시겠지만 앞으로는 만물의 생동(生動)이 바뀌는 석 달

마다 한 번씩 긴히 모셔 귀한 말씀을 듣고 명에 따라 여러 크고작은 일들을

옳게 처결할 수 있기 바라옵나이다.”

“어허. 홍 처사(處士)가 음양오행과 흥망성쇠의 이치를 꿰뚫었으니 누가 감히

장사꾼이라 무시하리오. 내가 덕이 엷은 사람으로서 임금의 큰 은혜를 입어

수령으로 왔으니, 마땅히 오래된 향인과 부로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본래 시준이 제안한 이름은 지금 하고 있는 수작들에 걸맞게 자문위원회(諮問

委員會)였다. 그러나 예에 어긋난다는 정약용의 지적으로 이리 바뀌었다.

정약용의 말도 일리는 있다. 위원이라는 말은 당시 청에서, 주로 황제의 임시

임명을 받아 파견하는 관헌을 칭하는 말이다.

또한 통상과 다르게 물음을 받는 사람, 그러니까 수령이 묻는 사람, 다시 말

해 홍득주보다 명백히 높은지라 자문이라는 말은 자칫 건방지게 들릴 수가 있

었다.

시준은 크게 불만이 없었다. 이름이야 어쨌건 그 목적은 21세기 한국의 자문

위원회와 완벽히 똑같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관청에서는 가지각색 자문위원회가 운영되었다.

현안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 풀의 상시적 유지라는 떳떳한 이유와, 외

면하기 힘든 이 바닥 인맥의 부수입 유지라는 별로 떳떳하지 못한 이유 둘 모

두 공히 그 운영을 떠받친다.

중임으로는 대통령에서 하찮기로는 동네 퇴물 깡패까지 이 당당한 부업에 종

사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그러한 ‘자문위원’에게 ‘바쁜 와중 밝혀준 고견에

대한 사례’를 하는 일도 또한 관련 법령과 사무규정에 밝게 나와 있어 양심의

가책이나 업무상의 혼란을 일으킬 일이 거의 없다.

조선에는 그에 관련한 지침이 없었지만 더 해석이 편리한 것은 있다. 이제 홍

득주와 지기(知己)라 할 만한 정약용이 전임 벼슬아치의 자격으로 한마디 했다.

“수사(洙泗, 공자)에게로 가서 가르침을 청하는 자 고기 한 묶음[束脩]을 가

지고 가야 했고, 옛 법에 자그마한 일이라도 하늘에 묻고 조상을 공경하려면

반드시 제물을 차렸습니다. 따라서 밤에 도적처럼 숨어들어 화살통에 담비 가

죽을 쑤셔넣는 일과 떳떳한 예물로 뜻을 표시하는 일은 꼭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민(民)으로서 관청에 일없이 드나드는 짓은 위로 법을 어기는 처사요,

아래로 세인의 쑥덕거림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홍 장주가 천하에 명분을 밝

게 드러내었으니 이는 제가 죄인으로서 반드시 본받아야 할 처사입니다.”

정약용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겠으나, 어둠의 뇌물을 당당한 자문료로 둔갑

시켜 의주 부정부패 네트워크를 양성화시켰다는 업적을 저렇게 포장할 수 있

는 사람은 여기에서 정약용뿐일 것이다. 시동(侍童) 자격으로 배석한 시준은

정약용을 무리해서 데려오길 잘했다며 감탄했다.

홍의호 역시 정약용이 자인(自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배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죄인이 어디서 감히 여기 와 술 마시고 고기

뜯느냐며 호통치기는커녕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정약용의 학식을 칭찬했다.

모두가 덕망 높고 예법을 조심스럽게 지키는 사람들뿐이라 어떤 잡음도 없이

행사는 잘 끝났다. 그리고 의주를 다스리는 새로운 체제도 대강 얼개가 잡혔다.

하민들이 그들을 대표하는 부로를 통해 삼가 목민관에게 청을 올리거나 명을

기다리면, 목민관은 그것을 잘 헤아려 제가끔 분수에 맞게 처분을 내려 준다.

아래위가 서로 막히지 않아 흐르는 물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치도의 근본이었다.

물론 실무적으로 들어가면 조금 더 복잡하다. 만상들이 행정을 장악한 근문소

는 ‘급하고 중한 일’일수록 자문 사례를 더욱 많이 해 주었다. 원래 중한 일

은 먼저, 사소한 일은 나중에 처리하는 것이 순리. 수령 또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다스려지면 백성은 배를 두드린다. 충실한 백성 홍득주

또한 날로 들어차는 곳간을 보고 입이 벌어졌다.

“태평성대라는 게 따로 있겠는가. 우리가 만들면 태평성대지. 핫핫. 앞으로도

이런 날만 같으면 좋겠구나.”

그렇다고 무슨 하늘과 군주 앞에 부끄러울 짓을 한 건 아니다. 그저 수령이

‘억울함을 잘 살펴 폐단을 줄여 주었을’ 뿐이다.

본래 상리(商利)라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 ‘부당한 이득’이었고 어떤 사회 체

제든 상인에게 농민 이상의 이득을 주기는 싫어했다.

그것은 다양한 갈취와 세금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뇌물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이득 환수의 일종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상인도 당연히 육방 아전

과 나졸, 이속들에게 수입의 대부분을 뜯겨야 했다.

하지만 기왕 줄 뇌물이면 더 권세 있는 자에게 집중하는 것이 낫다. 그러면

아래는 저절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잡손실을 효과적으로

막은 홍득주의 곳간은 날로 불어만 갔다.

의주 부윤 역시 도의를 모르는 자 아니라, 사례비 좀 받았다고 표시 나게 여

러 가지 이권을 마구 던져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폐단을 바로잡

을’ 뿐이었다.

“근문소에서 공히 논의한 바 군정의 문란이 있다. 처사 홍득주의 가솔 중 죽

은 자와 열다섯이 안 된 자에게도 군포가 징수되었다 하니 이는 폐단이 아닐

수 없다. 장부를 다시 살피라.”

“압록강가 축동답(築垌畓, 둑을 쌓아 만든 논)은 본래 나라의 둔전으로 전세

가 원래 없는 이 의주부에서 재정의 근본인데, 상고(商賈) 임상옥이 말하길

자기 동리 사람들을 모아 무너진 논을 수리하러 보내겠다 하니 장한 일이다.

보통 품삯으로 하여 일봉을 쳐 주라. 만약 미편하면 거기서 나오는 쌀을 갈라

주거나 하여도 좋다.”

사람들이 그 학식은 칭송하면서도 이런 일에는 은근히 따돌려 물정을 잘 모르

던 정약용이 구상하던 책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크게 참고할 정도의 선정

이었다.

교화는 널리 퍼져야 하는 법이라. 얼마 안 가, 다른 고을 수령인 신임 용천

부사 안종후(安宗厚)도 근문소에 들게 되었다. 국가를 위해 애쓰는 의주의 백

성들은 자기 고을에까지 그 도움이 미치므로 꼭 사귀어 보고 싶다는 장한 이

유에서였다.

그 도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만상 홍총각이 장자도에 지키고 섰다가 –

실상은 영국 배 다시 오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 근래 복수한다고 어정거리던

초수네 식구들을 강에 발 담그기도 전에 쫓아내었으므로 안종후는 원래 역사

처럼 잡혀가 처벌받는 꼴을 면하였다.

그러나 만상들이 입을 잘못 놀리게 되면 안종후는 해방을 잘못한 죄를 추궁받

게 된다. 조선의 포폄은 (권세가에 줄을 대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잘 되었

다고 다 봐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종후가 ‘의주 호걸들을 사귀

기로’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다.

용천 부사 안종후, 의주 부윤 홍의호를 위시한 여러 관헌들은 이제 만상과 얼

키고설켜 함부로 배반할 수 없다. ‘공식적’인 일이니만큼 근문소에서 나눈 이

야기의 기록들은 웬만큼 다 되어 있다. 시준이 공무원 시절 자문위원회 회의

록을 작성하던 솜씨를 좀 발휘한 탓이다.

보통 일이 이 정도까지 되면 평안도 관찰사, 그러니까 평안 감사의 눈길을 걱

정해야 하겠으나 이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감사는 창고

문을 다 열어 보기도 전에 임지를 떠나는 실정이다.

결국 그 해가 지나자, 평안도 북부는 홍득주를 중심으로 하는 만상 연합체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드물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준은 영국과의 무역을

조금 더 대량으로 하고 싶었다.

임상옥도 닷새에 한 번씩 찾아와서 그놈의 서양 배는 언제 천을 더 실어오냐

묻고 있다. 각지 평안도 광산들과의 중개책 역할을 잘 해주는 임상옥은 그만

큼의 대가를 얻고 있었다. 시준으로서도 자기 혼자 발명한다고 삽질하는 대신

유럽에서 수입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제 해볼 만하겠군. 프랑스 배로 번번이 속일 필요도 없겠어. 수령들과 말

을 맞추면 표면상 표류선을 구휼한 것으로 하고 거래를 틀 수도 있고,’

시준의 바람을 이해하듯, 동인도 회사의 배가 세 번째로 장자도에 온 것은 다

음 해 가경 10년(1805년)이 막 밝았을 무렵이었다.

시준이 예상한 유럽 정세는 어느 부분에서는 맞고, 어느 부분에서는 틀렸다.

우선 대륙 봉쇄령은 당시 유럽 전역을 석권한 나폴레옹의 새로운 강요일 뿐,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혁명 직후부터 서로에 대한 통상 봉쇄를 남발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프랑스가 해군이 약해 표시가 안 났을 뿐이다.

영국에도 멀리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있다. 내각의 여러 조언자들은 향후 유럽

에서 반드시 일어날, 아니 사실상 지금 일어나고 있는 대전쟁에 대비해 무역

경로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 이유로, 이때 영국의 정권을 다시 잡은 윌리엄 피트는 동인도 회사를 향

한 협박을 재개했다. 이대로 실적도 안 나오는 주제에 인도에서 계속 개판 치

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메시지에 동인도 회사의 움직임도 급박해졌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의 전운과 무역 제한 때문에 아시아에 떡고물이 떨어지리

라는 시준의 기대는 맞았다. 그러나 그 원인과 과정은 조금 달랐던 것이다.

그 결과는 장자도에 ‘표류한’ 6척의 영국 배가 ‘우연히 배에 실었던 화물들’

을 내어주고 ‘구조 물자’를 청하는 상황으로 표현되었다.

동인도 회사에 계약직이 아니라 정식 고용되어, 조선 전문가로 대우받는 존

레디 선장은 별로 표류한 사람 같지 않게 밝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연극이라고는 해도 프랑스 놈들의 깃발을 매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는

데, 이제야 좀 탈출구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실로 그랬다. 레디 선장은 조선에 올 때마다 확실한 실적을 하나씩 거두고 돌

아갔다. 이번에도 영국은 최초로 조선에 자국 깃발을 달고 신분을 속이지 않

은 채 들어온다는 상당히 의미 깊은 성과를 내었다.

아직 밀무역이긴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한 단계씩 착실하게 밟아 온 지금까

지의 흐름으로 보면 이 다음 항해는 아마도 공무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소

한 레디 선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홍득주는 아무래도 마뜩찮았으나 시준이 가르쳐 준 대로 손을 내밀어 이 털

덥수룩한 오랑캐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감촉은 정말 진저리쳐지는 경험이었다. 돌아가는 대로 그 비누인지 뭔지

하는 물건으로 손을 박박 씻어야 할 모양이었다.

“아직 보는 눈이 많으니 잘 살펴 행실을 적실하게 갖추시오.”

“아무렴요. 핫핫. 자, 우리가 불쌍하게도 풍랑을 만나 귀국의 해안에 떠밀려

오게 되었으니, 이 물건들을 홍삼으로 바꾸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물

론 지난번처럼 먹을 것도 환영입니다. 여기 천막 천도 다시 한 번 가득 실어

왔소이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된 밀무역 뒤에는 또 극소수 만상 간부들밖에 모르는 이

면의 밀무역이 하나 더 있었다. 존 레디가 광저우에서 몰래 보냈던 연락선 편

으로 조율된 사항은 지켜졌다.

시준이 그들에 대해 알아야 다치지 않을 수 있다며 요구한 서적은 아무 것도

아닌 짐처럼 담겨 건네어졌다. 존 로크와 볼테르, 칸트의 저작부터 시작하여

각종 의서와 기술서까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이 쌓아온 지식의 대강이 만상의

배에 실렸다.

더 민감한 것은 무기였다. 동인도 회사군에서 ‘폐기 처분’된 머스킷과 페이퍼

카트리지, 군복 등속은 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손질되어 옮겨졌

다. 이것은 의외로 시준이 아니라 차형기와 홍총각 등 만상의 행동대원들이

요구했다.

“그들이 나중에 홍삼을 거저 빼앗아가려 들거든, 우리도 서양 총이 있어야 능

히 대적할 수 있지 않겠소?”

만상다운 이유였다. 물론 영국인들은 홍삼을 굳이 약탈하여 황금알을 낳는 거

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없었다.

홍삼은 의심스러운 풀뿌리가 아니라 엄밀한 레퍼런스에 근거한 양약이었다.

당시 유럽은 수술을 통한 백내장 치료를 시작하는 단계였는데, 소경의 눈도

띄우는 영국인 의사가 논문으로 보증한 것이 홍삼의 약효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 홍삼이 미처 전달되기 어려운 남쪽 광저우에서는 유리창의 다섯 배 가격

으로 홍삼이 팔렸다. 생각보다 더한 호재. 동인도 회사는 필요하다면 군함도

팔아먹을 태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조금 더 강력한 무기’를 대가로 홍삼 나무 농장 – 홍차

나무를 믿었던 영국인들은 홍삼도 따로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알고 있었다 – 의

경영권을 빌리고 싶다는 타전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절되었다.

이때쯤 해서 동인도 회사도 조선의 특수성을 이해하여, 밀무역에 적극 협조했

다. 이 과정에서 서로 문화가 다른 양국 간 교류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막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시준의 공이었다.

시준은 지금 형편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동인도 회사라면 만상이나 다를 바

없는 반범죄자라는 시준의 생각은 편견치고는 정확했다. 그들은 함부로 강화

도 같은 데 가서 ‘우리가 평안도에서 무역을 했으니 여기도 터 주시오’ 따위

의 눈치 없는 소리를 하지 않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역시 레디 선장이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 중 하나였다.

“만약 우리가 그랬다가는 조선 정부에서 홍삼을 전부 몰수하고 그대들을 체포

할 것이니, 우리도 재미 못 보겠지. 하하. 아, 그리고 아편은 더 안 필요하시

오? 그거라면 우리에게 많은데. 싸게 해 드리겠소.”

“필요 없소.”

홍득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시준은 자신의 피맺힌 설득이 잘 먹혔다고 생

각하였으나, 사실 지금 홍득주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양귀비는 조선에도 있다. 우리가 만들어 팔면 되지 무엇하러 너희에게 비싼

돈 주고 사겠느냐?’

홍득주는 시준보다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인에게 흡연용 아편의 비법

을 묻지 않았다. 약점을 잡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것쯤이야 청국의 인맥을 움직이면 훨씬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만상들도 키워다가 팔면 된다.

시준이 말한 대로 그것이 정녕 한 번 맛본 자 절대 끊을 수 없는 요사한 약이

라면 그 얼마나 돈이 되겠는가. 홍득주는 일전 사건으로 쇠한 대청 밀무역 판

로를 이것으로 다시 뚫어볼 생각이었다.

‘듣기로 저들이 세상 제일의 해상(海商)이라 하였지. 핫핫. 하지만 너희들이

이 바닥에서야 나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하였다마는

홍삼이나 실컷 팔아 주고 가거라.’

홍득주에게는 인생 최고의 시절이었다. 옛날, 한때의 동정심으로 불쌍한 아이

를 거둔 것은 정말이지 다시 돌이켜 봐도 잘한 일이었다.

시준에다가 임상옥, 정약용과 여러 각처 수령들이며 이번의 영길리국 사람들

까지 귀인 아닌 사람들이 없었다. 실로 장사란 사람을 얻는 일이라 하는 것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말

1. 축동답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간단히 지나갔습니다만 의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데 있어 후시무역과 함께 중요한 한 축이었습니다. 당시 의주는 군사지역이라 전세는 없었지만 방위세 비슷한 개념으로 군사비용을 감당해야 했으며, 세금은 바치되 그 세금은 알아서 벌어와라;;; 라는 조선의 경제 체제상 수령들은 모두 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후시무역은 정부 시책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열렸다가 해서 불안정했기 때문에 논에도 의지해야 했죠.

따라서 18세기 후반부터 거의 모든 수령이 이 축동답을 개척하거나 유지보수하는 데에 힘씁니다. 관련 연구를 보면 이는 둔전으로 취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작중에 나오듯이... 19세기 전반기 특히 잦았던 압록강 범람으로 툭하면 박살나곤 했습니다.

6. 죄어드는 그물(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