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3)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가산 다복동으로 말할 것 같으면, 뒤로는 경의(京義)
간의 대로가 놓여 사람과 물건을 옮기는 데 수월하며 앞으로는 강이 흘러 오
는 군병을 막기에 좋다.
그 강 부근에서 금까지 나온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좌우로도 그럭저럭 산줄
기가 드리워져 병법의 위지(危地)를 흉내낸다.
그 산줄기의 가슴께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홍경래는 이 이상의 적격지를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기가 쥐고 있는 책, 『정감록(鄭鑑錄)』에
서 말하는 열 군데의 승리할 땅[十勝地]에서도 이런 곳은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터이다.
“신도(新都) 계룡산을 얻는다 하여도 이곳은 성스러운 땅으로서 영구히 부역
과 조세를 면제할 것이다.”
홍경래는 이 엄중한 금서(禁書)를 경전이나 되는 것처럼 여상스럽게 펼쳤다.
내용이야 이미 옛날에 다 외운 지 오래다. 그가 지금 보려는 것은 그 사이에
끼워 놓은 한 장의 낡은 종이다.
종이에 있는 이름은 여러 사람의 명단이었다. 이것이 난 성취 이후 상벌을 가
릴 조정 대신들의 명단이라 한다면 자못 웅혼하겠지만, 서울에 가서 이 종이
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알아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6년 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자들의 명단을 베껴
놓은 목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홍경래의 이름 석 자는 거기 없었다.
다시 보아도 분노가 들끓었다. 여기 있는 자들 중 몇 명은 홍경래도 아는 사
람들이며, 그중 누구도 생원(生員)입네, 진사(進仕)입네 자처할 학문을 이루
지 못했다.
오경은 주석과 과거시험 해설만을 간신히 웅얼웅얼 읊을 뿐이요, 시구로 말하
자면 가장 잘난체하는 자도 어려운 각운(脚韻) 자랑할 줄밖에 모르는 수준이다.
글자는 영자팔법(永字八法) 모두가 치졸하고 엉망이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자들뿐.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름난 귀족 자제와 조카들이므로 방방(放榜)
의 열매를 쉬이 따 가졌다.
“이름뿐인 과거는 차라리 옛 효렴(孝廉)이 나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자연히
묘당을 차고 앉아 있다는 것들도 죄 그런 놈들뿐이겠지. 마땅히 원래대로 되
돌린다. 강기숙정(綱紀肅正) 네 글자를 위해서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전부 태
워버리는 것 외에 없다.”
세상 모든 곳에는 귀가 달려 있으므로 이런 말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홍경래는 마치 여기가 별세계인 것처럼 그렇게 뇌까렸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이 다복동 산자락에 혼자 올라온 홍경래의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듣는다 하더라도 관에 밀고할 사람은 더더욱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홍경래는 밀고자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곡 아래에서 밤을 낮처럼 밝혀 놓은 횃불은 금 캐는 인부들의 탐욕을 나타
내지 않는다. 그들은 인부에게 과연 필요할까 싶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대장이 호령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 모인다. 깃발이 흔들리면 흩어졌다가 앞으
로 세게 펄럭이면 달려간다. 그 손에 창검과 활, 총포가 들려 있기만 하다면
야 이미 국운이 쇠한 이 나라 어느 군병도 그 위세 앞에 버티지 못하리라.
‘총포라.’
홍경래의 머릿속에 얼마 전 용천부 장자도에 대선과 거포를 이끌고 왔다는 불
랑국 함선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정감록을 읽은 자, 해도정출(海島鄭出) 네 글자를 모를 리는 없다. 남해의 섬
에서 난 정씨 진인이 계시를 이룰 것이라는 의미다. 마침 그들도 남쪽 바다에
서 온 야만인이라 하지 않던가.
허나 홍경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홍경래 또한 정감
록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어느 종교를 보아도 성직자 중 교의대로 사는 자는 드물다. 원 역사에서도 그
는 경상도 가야산(伽耶山) 아래 진인을 선전하면서 격문에서는 진인이 이미
평안도를 고향으로 하여 났다고 하는 모순을 보였다.
대신 홍경래가 생각한 것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존하는 부분이었다.
여러 소문과 역정보가 뒤섞이고, 특히 최근에 왔던 임상옥인가 하는 자가 입
싼 척하면서 아무렇게나 떨어뜨려놓은 이야기 덕에 진실을 알 수는 없다. 허
나 어느 소문을 따라가 보아도 그 심부름하는 아이놈의 이름은 꼭 나왔다.
홍경래도 직접 만났을 때 그 편린을 잠깐 느꼈던 것이지만 확실히 비범한 아
이였다. 여기 사람들 1할은 입고 있을 의주 바지를 만든 것도 그 녀석이요,
불 밝히는 일에 소소하게 도움되는 발화철(發火鐵)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발화철은 총 쏘는 일에도 유용할지 모른다. 그리고 홍경래와 친구들은
아마도 앞으로 총 쏠 일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 친부가 정씨(鄭氏)라고 했던가.’
정감록이라는 물건은 고유명사라기보다 일반명사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 아
니라 억압에 지친 조선 민중의 신앙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며, 때와 필요
에 따라 천변만화로 갈라져 창조되고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반역자 마음대로 지어내는 것이 정감록. 어떤 통일적이고 완전한 정
본(定本)이나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훌륭한 반역자 홍경래는 날카
로운 통찰로 표면의 아래를 꿰뚫었다.
도읍 계룡산 외 십승지 전부가 남부에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다양한 정감
록 신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남쪽에 대한 희구(希求). 남쪽을 바라
보는 자라면 그자는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함경도에서 정감록이 나와 난리가 났던 영묘조(英廟朝)의 일이 아니
더라도 진인은 이 북방에서 출현하는 게 맞다.
홍경래는 이제 마무리되어 가는 – 조정의 눈이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할 수는
없다 – 훈련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 튼튼한 바지도 좀 더 사 올 겸 의주에 다시 한 번 가 보아야겠군.”
의주는 고려 때 (다 망한)거란이 의(義)로써 돌려주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요,
그 전에는 용만(龍灣)이라 불렀다. 이는 압록강이 휘어져 들어가는 물굽이
[灣] 모양을 따라 쓴 지명이다.
고려 때는 물론이고 조선까지도 그 명칭은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땅 장사꾼들
을 그래서 만상(灣商)이라 한다.
주위의 이치를 궁구하고 거기에 조화되는 것이 격물(格物)이라. 정약용도 자
기 초막 이름을 희만당(熙灣堂)이라 짓고 여기에서 때때로 짓는 시구나 그림
에 희만이라는 서명을 덧붙였다.
일꾼 몇 보내 희만당을 쓸 만하게 개수하여 준 홍득주의 성의를 선비로서 모
른 척할 수 없었으므로, 성현의 글에서 여러 본받을 만한 절구(絶句)를 뽑아
간추려다 선물한 책자가 그 이름이 처음 올라간 물건이었다.
정약용은 자기가 찾아간다 했지마는 아무리 그래도 선비가 장사꾼에게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다. 홍득주도 그것을 알았기에 먼저 자기가 정약용의 의주 초
막을 방문했다.
사람들 눈이 있어 비단이며 금은 같은 건 없었지만 고기며 쌀에 술까지 하여
튼 먹는 건 후하게 실어 왔다. 홍득주가 원래 돈이 많기도 했는데 요새는 더
욱 쌓여서, 그야말로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그대로 증명되었다.
이름난 학자라 해도, 이쯤 되면 사람인 이상에야 정약용의 눈에 홍득주가 거
짓말을 했는지 보일 리가 없다.
가끔 정약용과 교우하는 동네 사람 중에 만상들이 서양 배와 뭔가 수작하였다
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해외 사정을 대강 아는 정약용으로서는 그쪽이 허황되게 보였
다. 21세기로 치면 시골동네 새마을 청년회가 두바이 경제대표단과 거래했다
는 이야기다.
객관적 조사를 위해, 선비 체면 접어 두고 홍득주 집까지 안부인사 핑계로 가
서 가만히 물어보려 해도 물정 다 파악한 만상들은 한목소리로 거짓을 꾸며
대었다. 홍득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 이상 면밀한 조사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아둔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천하의 정약용이라도 자기
놀던 바닥이 아니라면 신참에 불과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새 서양 배 소식 들릴 때나 기다리며 귀양 간 선비의 모범적
일이나 하고 있었다. 나무 심고 텃밭 갈며, 고금의 책에서 참고할 구절을 발
췌해 주제별로 책을 짓는 일 따위다.
막내아들 잃은 슬픔도 먼 여정과 바쁜 일상에 어느 정도 희석되고 의주에서
그럭저럭 자리잡은 정약용은 새로 맞은 제자에게 오늘도 강(講)하는 중이었다.
“본래 본기(本紀)나 열전(列傳)보다는 연표(年表)를 정리하는 것이 사서를 읽
는 올바른 방법이나, 옛사람들이 이렇게 글을 남긴 데에는 또 들추어볼 만한
것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자객전(刺客傳, 사기 자객열전)을 다시 보자. 여기
에 기조취도(旣祖就道,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제사를 지내다)라는 말을 보고
조(祖)가 조상이라고만 읽으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제기랄, 그냥 한자는 통 모르니 천자문부터 하자고 할걸…….’
소학 정도는 떼었다고 무심코 말한 게 화근이었다. 정약용은 고관에 줄 대어
제 아비 방면시킨다, 가산을 보살펴야 한다 하며 공부 게을리하는 아들 둘 대
신 시준에게 그 훈계력을 쏟아붓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글자를 살피면 부수로 시(示)가 들어가는데 이는 하늘에 제물을 보이는[示]
것이어서 이 글자가 있다면 대개 제의(祭儀)를 뜻한다. 옛날 황제(皇帝)의 아
들 누조(累祖)가 길을 가다 객사하였으므로 여행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조라
고 한다. 이때에 비로소 역수장사(易水壯士, 형가)가 어떤 비감(悲感)을 가졌
는지 알 만한 것이다. 이러한 공부 방법을 바로 『대학(大學)』에서 이른 격
물이라 한다.”
오래된 일이기는 하여도 어쨌든 시준 역시 공시 준비를 했던 사람이다. 그때
단련된 시험 기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 준비보다 진정한 공부를 하라 자식들에게 훈계했던 정약용은 개탄하겠으
나 ‘역수장사’라는 말을 들은 시준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예문이 파라락 지나갔다.
‘가을 바람에 역수 장사의 주먹이요, 벌건 대낮에 함양 천자의 머리라[秋風易
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 다음 중 이 시를 읊은 사람이 활동했던 시기의 일
로 적절한 것은?’
“홍경래……?”
시준의 입에서 한 이름이 부지불식간에 새어나왔다. 정약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어느 시절의 문인이냐? 나는 듣지 못한 이름이구나.”
“아, 방금 말씀하신 자객의 비감에 관해 시를 읊었던 사람입니다. 선비는 아
니고 지관 노릇하는 자인데, 우리 주인마님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내용까지는
잊어버려서 무심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간 정약용은 당장 서울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시준은 적
당히 둘러대었다.
아무리 홍경래라 할지라도 만약 이렇게 죄를 썼으면 참으로 억울한 게, 함양
천자의 대갈통이 어쩌고 하는 시는 전설일 뿐 실제 홍경래가 그랬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약용 또한 일개 지관 따위가 말한 시에 무슨 깊은 시상이 담겨 있을
까 싶었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시는 선비의 공부에서 둘째로 친다. 먼저 사서와 경전을 익숙히 하고 나서야
고풍(古風)을 본받을 수 있느니라. 네가 시에 관심이 있거든 먼저 시경 삼백
편을 숙고하거라. 한마디로 말해 전혀 사악함이 없으니[一言以蔽之 曰 思無
邪] 당송의 시풍이 모두 거기에서 나왔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시준이야말로 일언이폐지하고 말하자면, 그는 실학자들에게 가졌던 이미지가
정약용을 통해 처참히 박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개혁적, 실용적. 말로 하자면 그런 것이 공적 역사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실학자들에 대한 인식이다.
시준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정약용을 통해 조정에 줄을 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그가 추진하는 대 서양 (밀)무역도 정약용이라면 인정해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실학자들이 개혁적이라는 건 당대의
다른 선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간찰
을 통해 유추하자면 ‘꼰대’ 중에서도 이런 상꼰대가 따로 없다.
그래서 시준도 고통받는 중이었다. 시준은 대충 눈치 보다가, 이제 장사일이
있어 일어나야겠다고 말할 시점을 재 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정약용은 정약용이었다. 학문을 이룬 뒤에는 일관되게 고풍을
옹호하고 신유행을 배척하며, 서신에서 자식들을 빡빡하게 훈계하긴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부족함도 솔직하게 인정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흥미를 잃은 것 같은 시준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문득 말했다.
“내 듣기로 네가 청국의 책을 들여다가 서양 말을 익숙히 공부한 준재라 하던
데, 그 책의 제목이 무엇이냐?”
시준은 갑자기 화제가 바뀐 것을 뒤늦게 느끼고 긴장했다. 솔직히 그런 것까
진 생각해 두지 않았다. 장사꾼들 중 아무도 책 이름 같은 것엔 흥미가 없었
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받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준의 두뇌가 고속 회전했다. 그러나 임기응변이 대개 그렇듯, 결국
꺼내놓은 것은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서…… 『성문종합영어(成文綜合英語)』입니다. 근세 청나라 사람으로 성문(成
文)이라는 선비가 지었고 영길리국 사람들의 말[英語]을 설명하여서 책 이름
이 그렇습니다.”
복지 혜택이란 것도 받는 사람이 잘못 쓰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 정약용은
진지하게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문이라. 그건 아마도 휘가 아니라 자(字) 같은데 내가 들어보지 못한 사람
이구나.”
“저도 견문이 좁아 그 사람의 벼슬한 자리나 고향을 모릅니다. 책의 이치를
간신히 깨달았을 때쯤 해서 익히 아시는 불랑국 사람들의 도래가 있었으므로,
관의 추궁을 두려워해 태워버려 이제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헛소리도 처음이 어렵지 그 뒤는 방언 터지듯 청산유수였다. 정약용은 아쉽다
는 듯이 말했다.
“그 책이 남아 있었다면 반드시 내가 요목(要目)을 간추려 사역원(司譯院)에
널리 쓰일 책을 만들었을 텐데. 차후 불랑국에서 왜인처럼 관헌을 보내온다면
필히 쓸모가 있을 터이다.”
현재 시준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 자체는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영국인과
대화했다는 사실은 그때 장자도에 따라 나왔던 일부 사람만 안다. 그래서 정
약용도 거기서 말을 끝내고 책을 덮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 하고 네 이야기를 듣자꾸나. 이제부터는 네가 스승이다.”
“예?”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한 그 바지는 네가 만들었다 하더구나. 네
가 비록 모리배의 일에 젖었다고 해도, 의복 짓는 일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떳떳한 산업이다. 옷이 튼튼하여 능히 고된 일을 감당하므로 적삼도 곧 해져
떨어지던 백성들이 바지 여러 벌을 두어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염숙도(廉叔度, 한나라 촉군태수 염범)의 일을 본받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리.”
염범이 촉군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지 다섯 벌을 두고 노래하게 해 줄 수 있었
던 이유는 야간노동의 장려이지 튼튼한 바지의 발명은 아니었으나 정약용은
일단 아무거나 끌어대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
문이다.
정약용은 시준을 흠뻑 칭찬한 다음 에둘러 말했다.
“나는 비록 관헌이 아니나,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의 마음은 한가지다. 어린
네게 할 말은 아니다마는 이제 불랑국 해적도배가 이 나라까지 침노해 오는
차에, 전선은 낡고 병사는 쇠하였으니 바다 방비할 계책을 찾아야 할 것이 아
니겠느냐? 그 성문종합영어의 말을 생각나는 대로 인용하고, 네가 아는 그들
의 역사와 형편을 내게 가르쳐 다오.”
“제, 제가 출신이 천한 몸으로 학문이라고는 이룬 것이 없는데 어찌…….”
시준은 한발 빼 보았으나 정약용은 요지부동이었다.
“근세의 일가를 이룬 자들은 그 출신이 하천(下賤)에서 나온 바가 많다. 너의
근골이 강건하고 비위가 편협하지 않아 능히 대장부라 할 만하다. 다른 아이
들 같으면 불쏘시개로 쓰거나 방 벽이나 발랐을 그 책을 네가 굳이 읽은 것만
보아도 너의 큰 뜻을 알 수 있느니라.”
사람은 거짓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결국 그것을 가리기 위해 더 큰 거
짓말을 하게 되고, 끝내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닫기 때문이다. 시준은
인생의 교훈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아연해하고만 있을 시준이 아니다. 시준은 혹시 이 일이 정약용의 함
정수사가 아닌지 의심했다. 아무튼 상대는 조선 후기 수사 매뉴얼을 정리한
사람이며, 시준이 알 리가 없는 것들을 말한다면 그로써 서양과 사통했다는
증거를 잡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준은 ‘근래 득한 청국의 책’에 있을 법한 내용만을 드문드문 말해주
기로 했다.
“제가 서양국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책에 있었던 근세의 내용뿐입니다. 아마
공(公)께서는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니
그를 믿고 난삽하게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약용은 자세를 바로한 다음 옆의 백지 묶음을 끌어왔다. 시준은 최대한 함
정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근래, 불랑국의 국운이 쇠하고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이 왕을 끌어다가 참했
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조정을 꾸려 왕이 없이 나라를 다스렸으나 오래가
지 못할 것이 필연이라. 자연 주변 사방의 제후들이 존왕(尊王)의 기치로 그
들을 토멸하려 하였는데…….”
시준이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집중하는 것도 모르는 채 정약용은 그 구술을
성실하게 받아쓰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스승과 제자의 연배만 바뀌었을 뿐
모범적인 학동의 모습이었다.
작가의 말
2. 정약용이 말한 촉군 태수 염범의 일화는 이렇습니다. 당시 촉군 백성들은 돈 벌기 위해서 밤에 일을 많이 했는데, 횃불을 밝혀 놓으니 화재가 자주 나서 관에서는 이를 엄금했습니다. 현대라면 옳은 처사이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백성들은 왜 돈 못 벌게 하냐고 원성이 높았지요. 염범은 야간작업을 허락하는 대신 방화수를 많이 비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은 '이전에는 적삼 한 벌 없었는데 이제는 바지가 다섯 벌이다' 라 노래하며 염범을 칭송했다 합니다.
예, 뭐... 저 개인적으로도 야근 시키며 야식 가져다주는 건 복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옛날 얘기입니다.
2. 희만이라는 호는 작중 창작입니다. 한편으로 정약용은 고대 임금의 치세를 나타내는 희(熙)라는 글자에 대한 종래 해석 - 덕치로 절로 빛나게 다스려진다는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불 화 변이 아래에 들어 있으므로, 당대의 사서와 상세히 고찰하면 오히려 정약용 시대 당시보다 훨씬 엄정하고 세세한 정치가 불 밝히듯 하였다는 의미죠. 저 자신도 한학에 대한 이해가 짧습니다만, 재미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이를 순 임금 앞에서 신하들의 논의한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발전시켜, 포폄 제도에 대한 개혁 대안까지 확대합니다.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