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3화 (13/284)

13화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2)

어찌 보면 유배라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처벌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현대에는

해당이 적은, ‘멀리 떠나는 일은 고통스럽다’는 전근대적 전제를 가지고 시행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대체로 옳았다.

유배는 죄의 경중에 따라 거리가 달라지며, 대명률에 의거하기는 했지만 중국

만큼 영토가 크지 않은 조선에서는 거리를 채우기 위해 여러 고을을 거쳐 가

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정약용의 경우 거리로 따지면 조선의 유배자들 중 수

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허나 정약용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강진에서 의주까지 오는

한두 달 동안 나무칼이며 도류가(徒流枷)를 차지 않았고, 언감생심 큰갓 쓰고

경마 잡히는 일이야 바랄 수 없었지만 자그마한 흑립에 행장이나마 메고 자기

발로 걸어온 것이다.

압송하는 도사는 그저 한 사(舍) 정도마다 잘 가고 있나 들여다보았을 뿐이

다. 관직에 오래 몸담았던 정약용은 전라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대충 서울 돌

아가는 형편을 알 것 같았다.

의주에 다 온 정약용은 주위의 산세를 둘러보며 탄식처럼 말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유배가 되면 좋겠구나.”

죄인 주제에 종놈까지 딸린 것도 큰 특전이었다. 강진은 정약용의 외가가 있

던 곳이라 수발들 사람 한 명을 보내주었는데 도사는 묵인했다.

이쯤 되면 무식한 종놈이라도 사세를 짐작할 만하다. 이천 리 길을 지치지도

않고 따라온 사노 만득(晩得)이가 문득 대꾸했다.

“서방(書房) 마님, 거 뭐라더라, 금의환향(錦衣還鄕)하시어 서울 가시면 이놈

도 꼭 데리고 갑시오. 소인 도성 구경 한번 해 보는 게 소원이외다.”

“이놈아. 내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부(廣州府, 현재의 남양주)다. 이미

들렀다 오지 않았느냐. 선비 집안 종놈은 문자도 바르게 써야 하는 법이니라.”

가볍게 눙치기는 했으나 정약용은 그 뒤에 따라나오려던 말이 목에 걸리는 것

을 느꼈다. 자식들에게 누누이 했던, ‘폐족(廢族) 집안 자식들은 글을 읽고

행실이라도 바르게 해야 대접 받는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가문은 폐족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비록 그의 형제들은

본신의 죄와 소인의 모함 모두에 휩쓸려 목숨과 재산을 건사하지 못하였으나

고래로 목숨줄 위태하다 화려하게 부활하는 명가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정약용은 자신의 행낭을 더듬어 보았다. 말에서 떨어져도 종이 와서 일으켜주

기 전까지는 체면상 꼼짝도 안 하는 게 요즘의 선비라 해도, 정약용은 삼가는

것과 게으른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자기 짐은 자기가 졌다.

이 짐에는 아주 긴요한 간찰이 들어 있어서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아들

학연(學淵)이 입 꾹 다물고 쥐어준 것이고 필체며 쓴 사람 이름도 장남이 확

실하나 아들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비와 학문을 논하는 척하면서 아들이 드문드문 떨어뜨린 고사와 경전의 인

용구, 그리고 이 서신을 조합해 보면 뒤에 반드시 조정이 있다. 이런 교활하

고 남의 손 빌리는 짓을 좋아하는 자라면 필시 지금의 권신, 영안부원군 김조

순이다.

‘용천부에 오랑캐 함대가 드나들고, 수령과 인민은 쫓아내었다고 말하고 있으

나 전후가 수상하다. 어쩌면 천주교인이 불랑국 배를 빌어 중국에 오가는지

모른다. 너의 인맥과 경략을 활용하여 누군가 서양인과 내통한다면 내통자를

잡아내고, 불랑국 사람들이 조선을 도모할 뜻을 두거든 그 방비책을 마련하라.’

김조순은 사실 변방의 계책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벽파

를 내리누르기 위해 정약용을 불러들일 것처럼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

평안도의 일은 그 와중 해결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정도다. 안 되면 김

조순 자신이 자세히 안 알아보고 덮어 놓은 과거의 실책까지 정약용에게 뒤집

어씌우면 그만이고 말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조정에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강진에서의 짧은 유배 생활 동안 저술했던 여러 책과 주석 중 하나를

떠올렸다.

‘『비어고(備禦攷)』의 완성은 내 이 의주에서 보아야 하겠다.’

비어고란 말 그대로 방비에 관한 고찰이라는 뜻. 친우 이중협(李重協)이 저자

로 명기되어 있지만 실질은 정약용이 편집자다.

한당(漢唐)의 명장 사적은 물론이요, 크게 일본·여진부터 소소하게는 예맥과

가락국(駕洛國)까지 조선 땅 사람들이 싸웠던 투쟁의 기록을 뽑았다.

현 조선의 400여 개 산성에 대한 방어전략을 수립하면서 『기효신서(紀效新

書)』, 『병장도설(兵將圖說)』 등 비교적 근세의 명저도 빼놓지 않았다. 한

마디로 고금의 전쟁기술과 교훈을 총망라하는 정약용의 역작이다.

그렇게 무비에도 조예가 깊었던 정약용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귀에 파고들어온 소리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총포 놓는 소리가 아닌가!”

어디 천재지변이 나서 바위라도 떨어졌는가 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던 만득이는

자기도 이미 그게 무엇인지 다 알았다는 표정으로 낯을 싹 바꾸었다. 그러고

는 짐짓 태연히 말했다.

“서방 마님, 귀양살이 오래되어 간담이 줄어들었는지 놀라는 게 심하십니다.

평안도 놈들 반은 호랑이 간을 씹어먹고 산다는데 이 사냥하기 좋은 겨울에

포수 한둘쯤 없을까요?”

“요 상전 우습게 아는 무식한 녀석 같으니. 들어보아라. 사냥은 수묘선수(蒐

苗獮狩)라 해서 사철 내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가 연병하거나 제왕이 수

렵하는 것이 아니면 포를 놓아 짐승 잡는 사냥꾼은 많지 않다. 화약도 비싸고

총도 때맞춰 개비하기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잘 안 맞기 때문이야. 네놈은 겨

울에 토끼 잡아 별미 할 때 허방다리나 올무를 놓지 총 들고 군사처럼 나서느냐?”

만득이는 상전이 이렇게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잔소리를 해 대니 임금도 귀

양을 안 보내고 배기겠느냐 생각하였다.

“아닙죠. 쇠줄과 노끈만 있으면 되는데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합니까.”

“그렇지. 그런데 총을 쐈다는 건 갑자기 본 큰 짐승을 잡았거나, 아니면 맹수

를 만났다는 게다. 잘 되어 성취했다면 길손이 고기 한 점 얻을 수 있을 터

요, 금수가 사람을 해하려 한다면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어서 바삐 가자.”

“아아니, 총이나 활은커녕 죽창 하나 없는 우리가 이 알량한 지팡이 하나 믿

고 어딜 호표(虎豹) 앞에 나선답니까? 소인네는 못 갑니다요.”

“어허. 죽는 소리 그만두고 따라오지 못할까. 짐승이란 사람이 여럿 나타나면

지레 겁먹고 물러나는 법이니라.”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만득이는 곧 안심하고 자기 발로 걸었다.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시 큰 놈을 잡은 것이리라. 평안도 놈들이 불학무식하고 난폭하다 한들 길

가는 사람에게 고깃점이나마 떼어 주지 않을 정도로 야박할 리는 없을 터였다.

정약용과 만득이가 기대하는 대로 멧돼지나 노루를 잡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

준이 명중시킨 것도 어디 내놔서 부끄럽지는 않은 사냥감이었다.

고을 뒷산의 완만한 능선 속에서, 수풀 아래 엎드려 있던 까투리 한 마리를

멋지게 쏘아 잡은 시준은 기랑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떠냐. 이제 달포나 배웠지만 쓸 만하지 않느냐?”

“그 정도도 못하면 포수로는 굶어 죽기 십상이지. 고개 처박은 꿩이야 우리네

는 총알 쓸 것도 없이 그냥 손으로 잡아채고 만단다.”

시준은 기랑이 아이다운 질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조총의 조작법은 현대 소총

과 전혀 달라서 배우기 꽤 힘들었으나 야무진 손과 뛰어난 이해력의 도움을

받은 시준은 이제 명포수라고도 불러 줄 수 있는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기랑은 허세 부린 것이 아니었다. 아까의 사격으로 놀란 짐승들이 사

방으로 흩어지고, 그 와중 자다 깬 듯한 메추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이리저

리 부딪쳐가며 화닥거리자 기랑은 그곳에 총구를 겨누었다. 이미 화승에 불은

붙어 있었다.

탕!

꿩보다 훨씬 작은 메추리가 깃털도 별로 흩날리지 않고 툭 떨어졌다. 시준은

기랑이 주워와 던져놓은 메추리를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메추리는 총으로 노리는 물건이 아니다. 총알을 정통으로 맞으면 안 그래도

조그마한 그 새에 먹을 것이 전혀 없게 된다. 하지만 기랑은 메추리의 대가리

만 깔끔하게 날리는 신기를 부렸다.

반면 시준이 쏘아 잡은 꿩은 허벅지부터 꽁무니가 아예 날아가 있어 고기가

반절도 안 나올 듯했다. 어린애에게 한 방 먹은 시준은 툴툴대면서 자기가 일

곱 살 시절 지유에게 당했던 짓을 거꾸로 시전했다.

“그래도 여기서 바로 요기할 수 있는 건 내 덕 아니겠어?”

김칫국부터 들이마신 두 아이는 벌써 불을 피워 놓았다. 물론 여기서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시준의 라이터와 로켓 스토브였다.

기랑은 그것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비수를 꺼내 배를 가

르고 깃털을 뽑았다.

양념이나 물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 두 아이는 삶는 대신 구워서 먹기로 했

다. 잘 손질된 새 두 마리가 고소한 냄새를 풍길 때쯤 정약용이 도착했다.

“어……. 총소리가 나기에 와 보았는데, 어른은 어디 계시냐?”

갑자기 나타난 웬 가난해 뵈는 선비와 종놈 하나를 두 아이는 멀뚱히 쳐다보

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기랑 대신 시준이 대답했다.

“저는 성을 정(鄭)이라 하며 요 산 아래 홍씨네 집에서 기숙하는 아이입니다.

포수 하는 동무와 놀다가 새를 쏘아 잡았습니다. 선비께서는 이 고을 사람이

아니신 듯한데, 뉘신지요?”

“허어. 이런 어린아이가 총을 다룰 줄 알다니 기이하도다. 나는…….”

정약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만득이가 나섰다. 긴장이 풀려서 허기를 더 참

을 수 없었는지 만득이는 척척 걸어왔다.

“아따, 그것 참 실한 놈으로 잡았구나. 어디 내가 맛 좀 보자. 이게 다 익었

으려나……. 헉!”

만득이가 별 생각 없이 잡아채려던 고기 꼬챙이는 이미 기랑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기랑은 다른 손으로 아까 새 잡던 비수를 들어 만득이의 목을 겨누었다.

“이, 이 화적놈 같은 애새끼 손버릇 좀 보소! 과연 평안도 놈이라더니 그 말

이 참말이었구나! 마, 마님. 이게 무슨 경우랍니까?”

시준은 왜 만득이가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 시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고압적이고 오만방자한지는 시준

도 겪을 만큼 겪었다 생각했으나 아직도 적응이 안 되었다.

만약 기랑이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몇 대 가볍게 얻어맞은 다음 뺏겼으리

라. 조선에서는 딱히 범죄도 아니다.

그러나 조선에도 윤리는 있다. 다만 그게 일부 선비들의 전유물이라서 시대

전체적으로 마치 윤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선비 쪽

을 향해 말했다.

“제가 조실부모하고 팔자 사나워서 경전을 읽지는 못하였으나, 집에서 기르는

개도 밥그릇 건드리면 무는 이치는 압니다. 곡식은 추수한 농부의 것이요, 쏘

아 잡은 새는 포수의 것인데, 성현의 말씀에 아이들을 때리고 가진 바를 빼앗

는다는 법이 있습니까?”

정약용은 동네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저 덜떨어진 종놈은 지금 자기가

왜 의주에 가는지도 망각한 게 분명하다.

일전 권세가 도령들이 무리 끌고 다니며 만만한 집 대문 부수고 쳐들어가 음

식 접대 받고, 그도 모자라 밥 준 사람을 재미로 두드려 패는 일이 있었다.

그때 그런 세태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아랫것의 단속은 상전의 책임. 권세가는커녕 모든 행동을 발자국마다 조심해

야 할 귀양 죄인 주제에 이런 행패를 부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약용이 오

면서 꿈꾸었던 가문의 부활은 한낱 식언이다.

정약용은 우선 만득이를 호되게 꾸짖은 다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나는 본래 조정에서 말직 벼슬하다가 죄를 얻어 귀양 온 사람이

다. 정(丁)씨 성을 쓰나 친구들은 내 눈썹이 이 모양이라 하여 삼미(三眉)라

고들 부른다.”

정약용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익살스럽게 자기 천연두 흉터를 가리켰다. 안타

깝게도 시준이 약간 미소지었을 뿐 기랑은 웃지 않았으며 칼도 치우지 않았다.

“가문이 폐하였다 보니 종놈 하나 바로 다스려지질 못하였다. 그저 무식하여

그런 것이지 무슨 강도 같은 마음은 없느니라. 이만 그 흉한 물건을 치워 다

오. 내 사과하는 뜻으로 차고 온 술병을 내놓을 테니, 너희는 안주를 내어 가

지고 공평무사하게 요기하여 보지 않겠느냐?”

정약용은 한 잔씩 따라 가지고 아이들에게 돌렸다. 풀려난 만득이는 불퉁스럽

게 툴툴대었으나 그에게는 술이 돌아가지 않았다.

“너희가 어려 아직 주도(酒道)를 모를 것인데 내가 간략히 설하마. 한 잔을

마셔 취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보아 주량을 우선 가늠한다. 일불삼소오의칠과

(一不三少五宜七過)라 하였지만 본래 선비는 말술을 마실 줄 알더라도 반 잔

보다 과하게 마셔서는 아니 된다.”

시준은 정약용을 보며 아까 만득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거 참 잔소리 많네.’

정약용과 달리 두 아이는 별 군소리 없이 고기를 떼어 주었다. 시준은 전생에

술을 많이 마셔 봤는지라 자연스럽게 쭉 들이켰고, 기랑은 냄새를 좀 맡아 보

다가 입술을 적셨다. 정약용이 시준을 보고 허허 웃었다.

“요놈, 어린 녀석이 보통 마셔 본 솜씨가 아니로구나. 술을 많이 마시면 패가

망신하게 되느니라. 내가 벼슬에 있을 때 임금님이 붓통에 한 가득 술을 담아

주셨지만 나는 퇴청할 때까지도 취하지 않았지.”

대놓고 허세를 부리는 정약용을 아련하게 쳐다보던 시준은 문득 그 일화를 어

디서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선비님께서는 호를 다산(茶山)이라 쓰시지 않는지…….”

“다산이라? 내 귀양살이하던 탐진(耽津, 강진의 옛 이름) 인근에 차밭 동산이

있기는 하다마는, 내 재명(齋名)이나 당호(堂號) 삼은 적은 없다. 다른 사람

과 헛갈린 것 아니냐? 내 이름은 약용(若鏞)이라 하는데 이 의주에는 잘 알려

지지 않았을 게다.”

정약용은 다산이라는 호를 1808년경에야 쓰기 시작했으며, 정약용 하면 다산

부터 따라나오는 21세기와 달리 정약용 자신은 그 호를 대외적으로 별로 사용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건 시준이 알 도리 없었다.

그래도 정약용이 친절하게 자기 실명을 밝혀 주어서 시준은 그런 사소한 의문

은 넘어갈 수 있었다. 여기 와서 현대 유명인이라고는 홍경래나 임상옥 정도

밖에 못 만나본 시준은 정말 과거로 돌아간 현대인의 사치를 맛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정약용이야? 그런데 하는 짓은 그냥 동네 시골 훈장님 같은데…….’

그야 지금 정약용은 한창 책 쓰고 아들들에게 공부하라 잔소리하는 등 훈장질

하고 있을 때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시준은 머리를 잽싸게 굴린 다

음 말했다.

“호는 제가 잘못 알았으나, 선비님의 이름은 이 땅 끝에 사는 어린 저도 예전

부터 들어 왔습니다. 여러 학문으로 이름이 드높으시고 저 수원성도 쌓으셨다

고…….”

어디서 들어 본 얘기를 모아 끌어대는 시준에게 정약용은 기분이 좋아진 모양

이었다.

“아니, 어떻게 궁벽한 시골의 한낱 어린아이로서 네가 그것을 어찌 들었느냐?

내 예전에 의주 땅 선비에게 종두(種痘)하는 책을 얻느라 교우한 적이 있는데

그때인가?”

시준은 정약용이 종두법도 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 보니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말을 들어 본 것도 같았다.

“그 일은 제가 자세히 모르나, 다만 우리 주인마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사꾼 출신이라 학식 있는 선비에게 가르침을 듣지 못해 한스러웠는

데, 듣기로 책략을 부려 대성을 쌓은 정공(丁公)이 서울에 있다 했다. 한 번

은 만나 뵙고 싶구나.’ 하셨습니다.”

정약용이 누군지도 모르는 홍득주는 지금 자기 집 아이가 이런 거짓말을 늘어

놓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정약용도 이쯤 되니 그 홍씨라는 자가 동리 입구부터 귀 따갑게 들었던 부자

유학 홍득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건 정약용으로서도 기회였다.

단지 부자 친구 사귀어서 귀양살이 팍팍하지 않게 하려는 얄팍한 의도는 아니

다. 홍득주는 자기가 받은 밀명의 중심에 서 있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정약용은 되도록 자기가 아쉬운 처지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점잖게 수염

을 쓰다듬었다.

“사람은 책을 읽고 목욕재계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것. 장사가 군자

의 떳떳한 일은 아니지마는, 팔자로 가업이 그렇게 되었다면 그 사람만 탄할

수는 없지. 내가 조만간 찾아보아야 하겠네.”

훈훈한 분위기에서 몇 마디 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해도 어지간히

기울었다. 삐쳐 있던 만득이도 나중에 마지못해 따라 준 술 한 잔에 풀어졌다.

술을 마셔보지 않았던 기랑이 곯아떨어져 시준에게 업혀 온 것만 제외하면 그

럭저럭 좋게 끝난 술자리였다.

시준의 위치 정도 되면 방도 따로 하나 행랑채에 받을 수 있었다. 자기 방에

대충 기랑을 던져 놓은 시준은 그길로 홍득주를 보았다.

“허어, 서울에서 귀양 온 선비라고?”

“예. 사람들의 소문을 가만히 듣자 하니 이분은 선대왕의 총애를 받은 중신이

랍니다. 어차피 유배 왔던 선비가 풀려나면 정승 되는 것이 고금의 이치 아니

겠습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 되더라도 분명 관직에 벗한 자가 많을 것이요,

그러면 잘 보여두어 나쁠 것은 없습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가는 것으로 정치 커리어가 끝난다.

나중에 유배가 풀리기는 하지만 고향에서 얌전히 책 쓰다가 여생 마치는 게

정약용의 일생인 것이다.

하지만 시준이 무슨 조선사를 달달 외우는 것도 아닌데 정약용이 관직에 나중

에 복귀했는지 어땠는지 물으면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남인이 거의 멸종했다

는 것도 모르는 시준은 정약용 정도 유명인이면 나중에 왕이 다시 부를 가능

성이 높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랬으니 훗날에 저술이 많이 남았겠지!’

오히려 판단 빠르고 머리 좋은 게 탈이었다. 문제는, 시준의 청산유수같은 말

에 홍득주조차 솔깃하였다는 것이다. 요새 시준이 벌어 주는 돈이 보통이 아

니니 솔깃할 만도 했다.

이번 일도 그럴싸했다. 그 정약용인지 뭔지 하는 선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면 지금까지의 간접적인 방법보다 더 다각적이고 직접적인 인정(人情, 뇌

물) 펼침이 가능할 것 같았다.

“네가 기이하다. 좋아. 그까짓 궁벽한 선비 하나 먹이는 데 많은 재물이 들진

않을 터. 그 정도야 잃어버리는 셈치고 대어 줄 테니 이 일은 네게 일임하마.”

“제게요?”

“그래. 내가 초장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면 필시 내가 바라는 게 있어 그리하였

다고 생각할 게 아니냐. 너도 이제 열한 살이고 머리 잘 돌아가니, 글을 배워

도 늦지 않았다. 이 참에 학동(學童) 노릇 해 보는 게 어떠냐?”

시준은 아연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조선 시대에 온 뒤부터 여러 가지

인생 설계를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그중 대학자 정약용의 제자라는 것은 전

혀 없었다.

작가의 말

1. 정약용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길게 말하는 말의 대부분은 그가 자녀와 형제,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 등 실제로 한 말에서 참조했습니다.

2. 삼미는 정약용의 어린 시절 별명입니다. 병 때문에 생긴 흉터로 눈썹이 세 개처럼 보인다 하여 못되게 붙인 별명입니다만 정약용 자신은 대범하게 넘어갔다 합니다.

3. 만득이는 창작 인물입니다. 물론 종이 한 명은 아니었고, 정약용의 서신에서 드러나는 종 이름으로는 석(石)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돌쇠라는 뜻이고 해서... 여기는 안 나올 것 같군요.

4. 수묘선수는 각자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하는 사냥으로, 제왕의 업무 중 하나였으며 각자 세세한 예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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