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1)
시준은 도박보다는 조금 나은 근거를 가지고 영국 배가 다시 오리라 장담했
다. 전생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유학한 경험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들 스펙용 유학이 그렇듯이 무슨 대단한 학문을 배워 온 것은 아니고
어학연수가 심화된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그래도 어느 나라든 어학원 단계에
서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대강 배우는 코스를 밟게 된다.
그래서 시준은 적어도 일반적인 한국인들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를 잘
알았다. 지금이 1804년이라면 올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된다.
그리고 워털루에서 화려하게 몰락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유럽 대륙은 전화에
휩쓸린다.
‘내가 아는 한 그 전쟁이 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아직 세계화가 덜 되었
지만……. 중요한 건 대륙 봉쇄령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다.’
1806년의 대륙 봉쇄령은 일반적 인식보다 상당한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결국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원인은 다양한데, 표면적인 것만 꼽아 보자면 상
품은 유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준은 영국이 유럽의 대체재로 아시아 시장을 확대할 것이라는 기대는 안 했
지만, 적어도 동인도 회사가 아쉬운 김에 한 번 더 조선에 들러 볼까 하는 생
각은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거시적인 수준에서 아시아에 괄목할 변화는 없었지. 그러나 조직이란 그런
게 아냐. 외부에서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것으로는 다 들여다볼 수 없는 바쁜
변화들이 있다.’
매대에 가득하게 쌓여 있는 과일은 그 자체로 단순한 상품으로 보인다. 그러
나 조금의 교육이라도 받은 자라면 거기에서 그 묘목과 꺾꽂이, 해충 구제와
유해조수 관리, 포장 및 유통에 관한 수많은 과정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정부의 시책도 마찬가지다. 공무원 생활을 해 본 시준은 다른 많은 공
무원들처럼 뉴스 기사를 냉소적으로 볼 줄 알았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실
제 일과 비유하자면 잘 포장된 과일 선물세트라는 결과 하나일 뿐이다.
교양용 역사책에서는 대륙 봉쇄령이 기껏해야 브라질이나 호주, 독일 정도나
재미를 본 전략적 실패로 간주된다. 영국은 아메리카(미국은 아니다)와 아시
아에서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하면서.
하지만 그 수면 아래에서 영국이 봉쇄령을 극복하기 위해 내린 이 시대의 현
실적 조치는 아마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대영 제국과 만상을 비교하면 인간과 개미라고 해도 관대하다. 사람이 부주의
하게 흘린 부스러기가 개미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듯이 그 정도만 조선에 떨어
져도 막대한 이득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영국은 대륙이 봉쇄됐다고 조선 무역에 기웃거리지는 않
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준은 약간의 행운으로 영국과 조선의 (밀)무
역을 텄으며, 이제 동인도 회사는 보고서에 한 줄 더 쓸 실적을 위해서라도
집적거려 볼 터이다.
그리고 장사는 원래 안면 있는 사람부터 접촉해 보는 것이 순리다. 또한 조선
이라는 ‘새로운 시장’은 그 내실이 실제로는 형편없을지라도 새롭다는 것 하
나만으로 호기심이라는 가점을 얻는다.
시준은 그답지 않게도 천하경략의 웅대한 책략에 젖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더운물을 움켜쥐었다.
“원래 사람은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하게 마련이지.”
“무슨 뜻모를 소리를 중얼중얼하니? 세숫물 다 썼으면 식기 전에 얼른 내어놓
아라. 냇가까지 가기 귀찮으니 여기에서 얼른 그릇 씻고 치우련다.”
웅대한 책략을 와장창 박살낸 것은 지유였다. 시준은 ‘뜨거운 물’을 얻기 위
해 사랑방 아궁이를 장악하고 있는 지유에게 부탁해야 했는데, 지유는 시준
하나만을 위해 땔감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걸 쓰려고?”
시준은 박을 약간 기울여 안의 물을 보여주었다. 물론 시준이 현대인 기준으
로는 아동학대에 해당할 정도로 드물게 씻을 수밖에 없는 탓도 있었으나, 그
와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에 그 박 안에는 허옇고 검은 물이 떠다니고 있었다.
시준은 지유가 기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유는 전혀 저어하는 기색
없이 대야를 채갔다.
“그럼 발 씻은 물도 아닌데 못 쓸 건 뭐냐? 아주 살뜰히 씻었는지 낯은 환하
구나.”
그렇다. 여기는 조선 시대다. 자기가 입에 넣어야 할 밥숟갈과 그릇이 그 지
저분한 물에 씻기는 것을 눈앞에서 보자니 시준이 오히려 초조했다.
“내가 관솔이며 삭정이라도 한 지게 져다가 땔감 채워넣을 테니 그건 관둬라.
지금 이걸로 씻어서 그래. 아, 이거 들고 냇가에 나가면 내 얼굴처럼 아주 잘
씻길 게다.”
“이게 뭔데?”
“저번에 마님 잔치 하고 남은 기름이랑 잿물로 만든 거야. 자, 봐라. 이렇게
금방 씻기지 않아?”
이번에도 시준의 소박한 야망은 실패했다. 지유는 “이렇게 금방 때가 씻겨나
가는 물건을 만들다니 대단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시
준의 등짝을 후려쳤다.
“저번에는 바지 갖고 깨작거리지 않나, 일도 안 하고 뭐 하나 싶었더니 이런
짓이나 하고 있었니? 기름이 얼마나 쓸 데가 많은데 멋대로 가져가서 이 장난
이야?”
서울의 고위층도 환상적인 반응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준이 몰라서 그
렇지 이미 효종조 하멜이 표류했을 때 조선에 서양식 비누를 가지고 왔다. 그
저 조선 사람들이 비누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또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 유럽에서 비누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소다의 대
량 추출법이 확립되어, 지금은 지유 말마따나 시준이 아까운 기름 갖고 장난
하는 것보다 그냥 영국 배에서 수입하는 게 낫다.
그러나 그건 국가자본이 있을 때 이야기. 지금 만상이 그런 것을 유통시키기
는 어렵다. 조정의 감시도 있지만, 무엇보다 수지가 안 맞는다.
시준도 영국인들이 비누를 갖고 있다는 건 보았으나 시침 뚝 뗐다. 서양 물건
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 영국인들은 오만가지 감언이설로 잡화를 어마어마한
값에 팔아넘기려 들 게 뻔하다.
게다가 지금 지유처럼 조선인 인구의 절대다수는 깨끗하게 씻는 일에 큰 관심
이 없다. 일제 강점기처럼 국가 보건정책으로 강요한다면 모를까 현재는 그리
절박하지 않은 것이다.
이걸 좀 팔아먹으려면 서양 물건을 수입하기보다 좀 값싸게 국내에서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귀찮고 비싸니까 조선 사람들이 비누를 안 쓰는 거지, 당장
있으면 하다못해 이 시대 제일의 노역인 빨래에라도 안 쓸 리는 없다. 그러려
면 값이 싸야 한다.
그래서 시준은 지금 평안도 각지 광산과 일터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의주고(義
州袴, 의주 바지) 첫 수입으로 사업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첫 시연 고객의 반응이 이따위라 영 잘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시준은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우리 동무들 빨래할 때 편할 텐데. 그러면 저어기 행랑채의 연지나 완순이한
테 한번 줘봐야겠구나.”
갑자기 지유의 눈길이 사나워지더니 시준의 손에서 비누를 탁 빼앗아갔다.
“그 계집애들은 너한테 무슨 더운물 한 바가지 챙겨 준 게 있다고 무어 이런
걸 갖다 바치니? 내 이건 어른에게 이르지 않을 테니, 앞으로 이런 것을 만들
거든 저번의 불똥 튀는 쇠뭉치처럼 꼭 나한테 가져오너라. 그리고 사내가 함
부로 부엌이며 빨래터에 드나드는 게 아니란다. 알겠니? 옷 같은 것도 다음에
또 지으려면 내게 말해.”
“네가 무슨 바느질을 한다고…….”
“안 그러면 주인마님한테 다 일러바칠 테야.”
임상옥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시준을 지유가 귀엽게 모함한다고 해 봐야 무슨
일이 있겠느냐마는, 시준은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러마.”
지유는 다시 한 번 다짐받고 비누를 쥔 채 나갔다. 시준은 수건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얼굴을 문질러 닦고 나섰다.
시준은 키가 크고 이 시대 평균보다 월등히 자주 씻어 꽤 깔끔했다. 게다가
아이답지 않게 기운까지 좋으니 – 이 시대에서 남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 홍득주 상단에 얹혀사는 집 소녀들의 인기를 차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준의 눈에는 아무래도 아이들의 귀여운 소꿉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
는 면이 컸다. 그래서 지유의 저 나름대로는 의미심장한 말도 곧 잊어버렸다.
이다음에 만날 사람은 딱히 여자도 아니었다.
시준이 동무 삼고 싶다고 특별히 부탁해서 돈 몇 푼 얹어 주고 오라 한 사람
은 얼마 전 장자도에서 영국인 선원을 저격했던 포수 기랑이었다.
기랑은 의외로 혼자 덜렁 와서 문간에 있었다. 어린아이가 총 메고 다니는 것
을 보고 집적대어 보는 자가 많았으나 기랑은 그저 귀찮은 듯 보였다.
기랑이 시준을 보고 눈인사를 하자 시준은 부러 반갑게 말했다.
“혼자 왔구나. 양친은 어디 계시냐?”
“……없어.”
순식간에 사정을 알아챈 시준은 뜨끔했다. 하긴, 아무리 막장 조선시대라도
자기 아이를 좋다고 총 들려 내보내는 부모가 많지는 않을 터이다.
그 재주가 있어 포수 무리 사이에서 어떻게 먹고살기는 하나, 주위 어른들은
이 아이를 좋은 돈주머니 정도로만 취급했을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시준 역
시 훌륭하게 일조했다.
시준은 이 경우 쓸데없는 군말은 상처만 더 준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로 성
숙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기랑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 네 품을 좀 빌려야겠다. 내게 총포 놓는 법을 가르쳐 주렴.”
기랑은 시준이 바라는 대로의 생각, 그러니까 똘똘하여 용돈 좀 버는 부잣집
식객의 취미 생활에 잠깐 어울려주고 품삯 얻자는 생각에 충실한 모양이었다.
기랑은 두말없이 끄덕이고 시준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갔다.
청 가경 9년(1804년) 계추(季秋), 조선국 한성부.
면밀하고 주의 깊은 고려를 했다 하더라도 결국 일개 상단의 재주넘기가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다. 조정에서 의주부와 용천부 땅에 대한 의심이 나오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었다.
그 의심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왜 불랑국 놈들은 죽자고 압록강으로 기어드는가?’
국왕과 비변사 당상들도 지도를 볼 줄 알았다. 아무튼 군주와 이야기해야겠다
는 저 무례천만한 서양 오랑캐놈들 특성상 온다면 강화도로 올 것이요, 그게
아니라도 방향상 오다가 들를 곳은 전라도나 하다못해 제주도가 더 이치에 맞다.
평안도로 오려면 산동(山東)이나 천진(天津) 즈음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곳은 아직 개항장도 아니거니와, 천진에서 굳이 평안도로 온다고 해도 무역
을 하려면 삼화현(남포)을 거쳐 대동강으로 들어오는 게 낫지 깡촌 장자도 같
은 곳으로 오는 건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의심은 작은 돌멩이일 뿐이고 지금 한성부 조야의 상황은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던져 보아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몇몇 장령(掌令)이며 정언(正言)이 머뭇대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보통은
‘지금 그게 중요해?’라는 말이나 듣고 찌그러지게 마련이었다.
실제로 지금은 불랑국 함대가 오건 영길리국 함대가 오건 그게 중요한 게 아
니었다. 작년 겨울 잇따른 재해로 인해 대왕대비 김씨는 끝내 손자 이공의 친
정을 선포하고 물러났다. 그로 인해 벽파가 잠깐 주춤한 틈을 타 시파에서는
대공세를 감행했다.
“일전 대사헌 권유(權????)의 한 상소는 실로 참람된 것입니다. ‘굴뚝을 구불구
불하게 하고 땔감을 옮긴다[曲突徙薪, 재난을 미리 대비하는 일]’는 말은 감
히 국모(國母)에 대한 의심을 피력한 것이요, 대혼(大婚, 순조 이공의 세자빈
가례를 말한다)에 대해 무함하여 훼상하는 일이니 어찌 대역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왕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역적이라는 건 아니다. 당시 세자빈은 정조의
낙점인 만큼 권유의 상소는 선대왕의 뜻을 부정한 것이 될 수 있다. 또한 벽
파의 절멸은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현재 노론 시파의 좌장 김조순을 옹위하는
일이기도 했다.
벽파의 차세대 신진 영수인 서용보(徐龍輔)도 홍역을 치렀다. 탄핵 때문에 무
서워 죽겠다며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판중추부사로 복직했다가 다시 곧
사직하는 등 왕과 애절한 밀고 당기기 로맨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연애처럼
위태롭고 두근두근한 벽파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김조순도 아직 세도를 완전히 떨칠 때는 아니었다. 파도는 크게 치려면 물러
나는 법. 동맹자 중 하나인 대왕대비 김씨가 철렴하였으니, 대왕대비의 편에
붙었던 사람과 세력이 자기 편으로 흡수되기 전까지는 천천히 소화를 시켜야
한다.
이러한 폭풍우 속에서 의주 향인들이 두 번이나 서양국 함대를 쫓아버린 일은
그냥 잘했다고 하고 옆으로 치우면 되는 것이지 굳이 파고들어갈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때로는 돌멩이 하나가 파도를 바꾸기도 하는 법이다.
수류의 변동은 서남에서 일어났다. 이 예민한 정국 속에서 전라도 강진현(康
津縣) 현감 이안묵(李安默)이 비리 때문에 유배되었다가 곧 대역부도(大逆不
道)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로 정법(正法)되었다. 하필 권유와 친했던 것이 죄라
면 죄였다.
그 자체는 이 파도 속에서 수없이 일어났다 꺼진 한 가지 포말(泡沫)일 뿐이
라 하겠으나, 이안묵이 노론 벽파의 전위대장으로서 당시 강진에 이배(移拜)
되었던 정약용을 심인성 질환으로 보내버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었다는 사
실과 결합되면 다른 화학 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서용보가 아주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고 이안묵은 세상에서 물러난 지금, 정약
용의 가장 큰 원수 두 명이 사라진 셈이다. 또는 남인의 원수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이 틈을 타 김조순은 거센 공격 사이에 약간의 견제타를 넣기로 했다.
“대왕대비 전하께서 발을 거두시긴 하였으나, 그때 자전의 지극한 덕으로 논
의된 일을 다시 살피고자 하오.”
비변사 중신들은 설마 대왕대비를 다시 내세우려는 것인가 하여 긴장했다. 하
지만 김조순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작년 평안도 백성의 기의(起義)를 본다면 이제 정학이 변방까지 충실하게 교
유(敎誘)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도성과 삼남은 더 말할 것이 없소. 전 형조참
의(刑曹參議) 정약용은 본래 사교 섬긴 죄를 뉘우친 후인데도 일가붙이의 실
태(失態)로 먼 곳에 정배된지라. 선대왕 시절의 공을 보아 다시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론 시파의 중요 인물인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미리 논의된 대로 김조순
을 거들었다. 편들어 말하는 것은 이 경우 초보자의 짓이다. 오히려 반대하는
것이 좋다.
“평안도의 일이라 한다면 의혹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소이다. 불랑국 배
가 기어코 압록강에 오려는 것은 그곳이 이미 저들의 소혈이 되어 있는 연경
(燕京, 북경)과 통하기 때문이요, 과거 윤유일(尹有一)‧황사영(黃嗣永) 등 국
적(國賊)들이 모두 몰래 잠통하였던 길인 탓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약용
을 풀어준다면 무군무부(無君無父)한 무리들이 더욱 기가 살아 날뛸 것이 분
명하오이다.”
이시수는 올해 유월 대왕대비 김씨의 재수렴 시도를 본인 면전에서 강경하게
막아내었다.
그 보람이 있어 김씨는 실패하지만, 일을 조금 확실하게 마무리짓고 그녀의
재시도를 봉쇄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틀어박혀 시위함으로써 의정 대신의 몸
으로써는 이례적인 삭출(削黜) 처분까지 받게 된다.
물론 조선 정치판 특성상 어차피 다 연극. 순조도 대왕대비의 체면을 세워 준
뒤로는 곧 불러들였고, 이시수도 태연히 복귀하여 재상의 반열에 다시 선 것이다.
사람들은 이로써 이시수가 누구의 번견으로 활동하는지 다 알게 되었다. 그래
서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을 논쟁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여기에 없었다.
김조순이 말했다.
“좌상의 말씀이 극히 지당하십니다. 허나 또 오랑캐는 오랑캐로 제어하는[以
夷制夷] 법이라. 저 사학도들과 맥이 닿은 약용의 가문이라면 거꾸로 그들에
대해 잘 알 터요, 정약용의 행실로 보건대 이제 입신(立身)하기보다 그 두 아
들의 학문을 권면하기 힘쓰니 무슨 사단을 일으키지는 않을 터입니다.”
사람들이 슬슬 ‘정약용이 어제 김조순네 집에 담비 가죽 꽉 채운 화살통 수레
라도 들여보냈던가?’ 하는 생각을 할 즈음, 김조순이 날카로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므로 이 사람도 그를 이제 와서 벼슬 주어 도성으로 불러들이자는 이야
기를 하는 건 아니오이다. 그 문제의 의주로 다시 이배하여 지난 죄를 더욱
반성케 하고 긴히 그쪽 사람들과 교유하도록 하면 수령이 알지 못하는 거짓말
과 참말을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암행어사까지 한 자가 아니오이까?”
그리고 만약 정약용이 공을 세우면 신분의 회복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김조순
이 하지 않은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잘 들렸다.
이는 아직 남인 다 안 죽었다는 경고다. 특히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활약하며
고발한 사람이 지금 자리에 없는 벽파의 중신 서용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또 정약용의 마지막 직위인 형조참의는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벽파에
보내는 경고로 꽤 적절하다. 죄가 풀려 관직에 복귀할 경우 웬만하면 그 전보
다 낮은 직위는 잘 안 주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시파로의 정권 교체를 막 시작한 시기. 아직 벽파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다. 대표적으로 우의정 김관주(金觀柱)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이한 계책과 위태한 재주는 군자가 행할 바 못되니, 권도(權道)는 한때요,
상례(常禮)는 만세인 것이오. 의주의 사세가 수상하다면 한 사람 도사(都事)
와 군졸들을 차견할 일이지, 왜 죄인에게 헛된 꿈을 품게 하고 불측한 무리들
이 요동할 틈을 주는 것이오이까?”
말이야 정론이다. 허나 김관주도 어차피 국혼 방해 사건으로 곧 쓸려나갈 운
명이고, 김조순은 이 시점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껏 몸을 낮추는 척하
며 비웃었다.
“우상의 헤아림은 만리를 내다본 것입니다. 허나 뜻이 너무나 고아하신 나머
지 비루한 자들의 수작을 알지 못하시는 바가 있는 듯하오이다. 하관(下官)은
학문이 엷고 절개가 낮아 향리와 모리배들의 농간에 쉽게 넘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으나, 오히려 귀양 가서 궁벽한 선비는 저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터이니
장자도에서 있었던 일의 전말을 털어놓을 수도 있지요.”
김관주는 다시 반박하려 했으나 김조순은 그 말을 잡아챘다.
“거기에 약용은 제가 듣기로 일본국의 주석서를 모아 간추렸다 합니다. 선비
로서는 말류에 골몰하는 것이 본받을 만하다 할 수 없지만 불랑국의 기묘한
행태에 대해 알아올 자로 그보다 적당한 자도 달리 없소이다.”
김관주는 우의정이나 되는 자신의 말을 깔아뭉개는 김조순에게서 그 뒤의 거
대한 권력을 느꼈다. 그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가 사교도에 부화뇌동한다거나 하여 실패 볼 시에는…….”
“핫핫.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약용은 두 아들로 하여금 과거는 그만두더라도 사
서와 장구를 부지런히 읽으라며 연일 독촉이라 합니다. 이미 그는 사교에 뜻
이 없습니다.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인데 그리 매정해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멍청한 사람이라도 김조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두 아들은 훌륭한 인질
이 될 것이다. 김조순은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허나 만약 그렇다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은혜를 두 번 배반한 꼴이니 어찌 가
문이 남아나기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자아, 변방을 방비하는 관사[備邊司]로서
는 할 일이 태산입니다. 변경이 평안도뿐은 아니니, 그쪽 일은 이것으로 논의
를 끝내시지요.”
조선의 역사도 사소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1. 서용보의 정치적 상황, 이언묵의 숙청 등은 당대 그 시점 실제로 이루어졌던 사건이 맞습니다. 순조의 국혼에 재앙을 대비해야 한다며(왕비가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한 대가로, 꽤 파장이 컸습니다. 이 이후로도 여러 명 쓸려나가죠.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