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4. 용만(龍彎)의 물굽이(4)
시준은 재빨리 차형기에게 다가갔다.
“영길리국 사람들이 팔려는 저 약은 양약이 아니라 극약입니다. 아편이라 하
여 양귀비의 즙을 짜낸 것인데 담배처럼 피우기엔 좋으나 담배와 다르게 사람
의 넋을 흩뜨리고 정신을 떨구게 하여,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하게 되어 끝내 시름시름 앓다 죽습니다. 국법에 적발되면 즉시 물고가 나게
되니 절대로 사들여서는 안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때는 헌종조처럼 아편을 엄격하게 단속하지는 않았다. 아직
아편전쟁 이전이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가지고 오는 그 마약에 대한 경계심이
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편이라면 이미 조선에서도 제조해 먹던 물건이다. 금지한 것은 아편
의 ‘흡연’이며, 이질과 복통에 대해 양귀비 씨방에 상처 내어 채취한 즙을 말
려 복용하는 방법은 이미 『동의보감(東醫寶鑑)』부터 실려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준의 현대인 지식 어필은 실패했다.
차형기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편이라? 아부용(阿芙蓉)이라 하는 그 물건이구나. 나도 안다.”
“그렇다면 비방 어른께서 어서 단속을…….”
말하던 시준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니 이 시대에 마약이 위험하다는 공감
대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19세기는 구미 열강에서조차 애들 투정 귀찮다고
모르핀을 퍼먹이던 시절이다.
게다가 의주 만상의 대부분은 말하자면 뒷세계 인간. 정부의 금령 따위 개똥
만큼도 중히 여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과연 차형기는 느긋하게 말했다.
“연기 빠는 곰방대며 태우는 기구만 가져오지 않았으면 관에서 적발하여도 둘
러댈 수 있다. 네가 똑똑하다 하나 의서를 읽지 않은 모양이구나. 어차피 약
이란 게 과하게 쓰면 독이니라. 서두를 게 뭐 있느냐?”
시준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가 무슨 조선으로 회귀하여 세계 열강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을 가졌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선을 그 자신
때문에 청나라 시즌 2로 만들 수는 없었다.
물론 시준이 너무 기계적으로 국제 관계를 생각한 탓이 크다. 어차피 조선은
원 역사에서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병사들에 의해 들어온 아편 끽연에 의해
골머리를 앓고, 일제시대 일본은 아예 조선을 아편 생산 기지로 활용했다.
청에 아편이 그토록 만연하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조선이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공상이다. 게다가 20세기 초까지 아편은 어디까지나 정상 의약품
이었다. 이 시대에서는 차형기의 반응이 더 정상적이다.
차형기는 안달복달하는 시준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들은 왜 굳이 여기도 있는 물건을 가져왔을까?”
“예?”
“상리(商利)의 이치란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물건을 옮겨 얻는 것이다. 하
지만 양귀비라면 청국이나 조선에도 많아. 네 일전에 말하기로 저들은 수만
리 떨어진 천축국(天竺國)에서 물건을 실어 온다 하였는데, 그래서야 이문이
남겠는가 말이야. 왜 그랬을까?”
“나라의 금령이 엄하여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함부로 많이 길러 팔 수 없기 때
문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저들 땅에서 양귀비를 많이 심어 여기에 파는 것이
지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한번 허풍을 쳐 볼 수 있겠구나.”
차형기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안심이 되지 않았던 시준은 척척 걸
어 나가는 차형기의 옆에 붙어 유학 시절 배워 온 ‘객관적 사실’을 일러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자꾸 귀찮게 해드려 저어합니다만, 영길리국
사람들은 교활하고 악독함이 천하의 제일이라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네가 좀 잔머리를 굴린다 하지마는 아직 멀었다.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배
우거라.”
차형기는 껄껄 웃고 영국인들 앞에 섰다. 그리고 시준은 떨떠름한 대로 그의
말을 통역했다.
“지금 그것이 아편임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값없는 물건을 왜 가져왔느냐?”
“무엇이? 너희 시골 촌놈들이 이게 얼마나 비싼 물건인지 알기나 하는가?”
레디 선장은 비장의 무기가 무시당하자 발끈했다. 동인도 회사의 보증이 있는
파트나 아편이라면 같은 아편이라도 말와(인도 서부의 지방명. 여기서는 동인
도 회사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 아편을 말한다) 따위와는 그 격을 달리한다.
“그깟 앵속(罌粟, 양귀비) 즙 말려낸 것쯤이야 조선 팔도에 피우지 않는 사람
이 없다. 나라에서도 허락한 것인데 천축에서 수만 리를 건너 가져올 게 겨우
그것뿐이었느냐? 그것으로는 영 값을 치르기 어렵다.”
이때쯤 되자 눈치를 챈 임상옥도 동참했다. 그는 지금 난생처음 보는 생아편
을 마치 잘 아는 척하며 손으로 비벼 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실로 하찮다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그 모습에 레디 선장은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청에서는 금수품인데 조선에서는 허가되었다는 말인가?’
조선이 서양과 공무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국인들로서는 조선이 아편이 싫
어서 수입을 안 하는지 유럽이 싫어서 수입을 안 하는지 분간할 도리가 없다.
허풍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으나, 이 변경 사람이 대번에 인도 아편
의 수입 경로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진짜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나라에서 공식 허가되었다면 별로 기르기 어려운 것도 아닌 아편의 값은 형편
없을 터. 사실 청나라 중신 노곤(盧坤), 허내제(許乃濟) 등이 도광 연간에 주
장한 아편 이금론(弛禁論)의 배경이 그것이다.
차라리 아편을 전면 허가하여 가격을 폭락시키고, 대금을 은이 아닌 홍차 등
으로 치르도록 하면 다소의 아편 중독은 – 어차피 옛날부터 있었으니 – 감수
하고 무역 적자와 은 유출을 크게 만회할 수 있다.
물론 이금론은 채택되지 않았고 영국인들은 아편을 비싼 값에 잘 갖다 팔았
다. 그러나 만약 그때 시행되었으면 꽤나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레디 선장은 신음을 흘렸다.
‘과연, 조선 인삼이 아편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유가…… 이놈들은 예
전부터 아편을 피워서 그 치유법도 벌써 찾아낸 것인가.’
멋대로의 착각이 레디 선장의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아편이 조선에서 통하
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필살기는 봉쇄되었다.
하지만 유서 깊은 대영제국이 가진 절기는 아편뿐만이 아니다. 선장은 손을
들어 올렸다.
슬슬 레디 선장도 짜증이 나던 참이다. 여기에서 총 몇 발 쏴서 저 같잖은 원
시적 화기의 야만족들에게 겁을 주고 덤으로 선원들에게도 엄포를 놓으면 자
질구레한 식료품은 안 사도 된다.
굳이 혈투를 벌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부하들이 분을 이기지 못해 사고 친 것
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레디 선장의 명에 따라 화약만 재어 놓은 병사 한
명이 별로 좋지는 않은 연기를 하며 총을 들어 올렸다.
“너희가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정부군을 불러 통째로 빼앗을 속셈이지? 어림
없다. 야만족 놈들아!”
탕!
레디 선장이 원하는 대로 총은 발사되었다. 그러나 뭔가 좀 이상했다.
조선인들은 겁먹는 대신 살기등등한 얼굴로 화승에 불을 당겼다. 당황한 레디
선장이 뒤를 돌아보자 병사가 총을 떨어뜨리고 손을 감싸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
누군가가 정교하게 플린트락의 부싯돌 부분만을 맞춰 총이 불발되게 한 것이
다. 총탄의 충격과 손에서 터져버린 약실 때문에 병사는 손이 꽤나 아픈 것처
럼 보였다.
시준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쌀자루 뒤에서 비죽이 내민 총신 끝으로 연
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저격을 수행한 사람은 명성 자자한 다
른 평안도 포수가 아니라 열한 살짜리 아이인 기랑이었다.
선제공격과 기선 제압은 싸움의 필승법이다. 차형기는 마치 총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납게 화승을 태우는 만상들의 연기에 만족했다. 동인도 회사군
수병보다 훨씬 그럴싸한 허세였다.
“서양국 총이 다소 뛰어나다 하나, 명검을 쥔 장수라도 백 명의 헌창 든 군사
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쩔 테냐? 여기서 다 뒈져 압록강 고기밥이 될
테냐? 아니면 제값을 내고 물건을 사 가겠는가?”
“이, 이 깡패놈들을 보았나! 너희 눈에는 저 군함이 보이지 않느냐?”
확실히 넵튠호의 무장이면 의주 만상은 물론 평안도 수군 전체를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형기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대포가 얼마나 있든 간에 그걸 쏠 자들이 여기 있으니 두려울 것은 없다. 거
래가 끝난 뒤의 보복도 마찬가지다. 저들이 무사히 배로 돌아가기 전 얻을 것
다 얻은 만상들은 잽싸게 달아날 것이요, 강변 모래톱에 실컷 화풀이로 대포
쏘아보았자 저들만 손해다.
결국 레디 선장은 굴복했다. 영국인으로서는 영 체면 안 서는 일이었으나 진
짜 정상적인 무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 역시 궁한 쥐를 끝까지 몰지는 않았다. 그때쯤 해서 차형
기와 논의를 마친 시준이 썩 나섰다.
“그래도 가져온 성의가 있으니 그 나쁜 독약은 여기 한 상자만 놓고 가시오.
우리 조선 사람은 옛날부터 손님에게 밥을 안 먹여 보내는 법은 없었지. 먹을
것은 내어줄 테니, 돈이 없다면 대신 저걸로 합시다.”
시준이 가리킨 것은 선원들이 배에서 끌어내어 땅에 햇빛 가리개용으로 쳐 놓
았던 천막용 천이었다.
물론 저런 다용도의 질긴 천은 배에 잔뜩 있다. 레디 선장은 영국에 좀 더 온
건한 장점도 있었음을 깨닫고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렇다. 영국은 옷감 무
역의 대국이다.
동인도 회사와 의주 만상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밀무역을 마쳤다. 그리고 영국
인과 조선인은 합의한 대로 마지막 행사를 계획했다. 레디 선장은 아니꼬웠지
만 그래도 다음에 거래를 터야 하니 약속을 이행했다.
“닻 다 올렸나! 캣헤드(Cathead, 닻을 고정하는 범선의 부품) 풀리지 않게 단
단히 감아! 조선인들이 예포를 쏠 것인데, 놀라서 응사하지는 마라! 그냥 가
면 된다!”
그 말대로, 넵튠이 출항하자마자 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아무것도 모
르는 동인도 회사 수병들은 예포랍시고 무질서하게 총을 갈겨대는 조선인의
비문명성을 애써 비웃었다.
물론 그것은 조선인이 근대식 예법에 무지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것이
예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서도의 의로운 백성들은 악독한 서양국 배가 오자마자 조총을 마구
쏘아 몰아붙여 쫓아낸 것이다. 존 레디 선장 역시 ‘도망칠’ 때는 프랑스 깃발
을 내걸어 합을 맞춰 주었다.
같은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면 조정에서도 이상히 여길 것이고, 수령과 장수
들에게도 핑곗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미관첨사 이존경도 문서상
으로는 같이 싸운 걸로 처리할 예정이었다.
사정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휴 길런은 이런 굴욕이 어디 있느냐며
짜증 내었으나 그 조수인 윌리엄 자딘은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한 번 올 수 있었으면 좋겠군. 내 사업에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어.
특히 저 수상할 정도로 영어를 잘 하는 저 꼬마도 같이…….’
자딘은 사업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의 아시아 항
해 경력을 바탕으로 파르시 상인과 손잡고 벌인 그의 무역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이 조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하고 몸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
동업을 제안할 만큼 살가운 관계는 아니고, 무엇보다 조선 정부군이 언제 들
이닥칠지 모른다.
영국 동인도 회사, 그러니까 현재 정식 명칭은 명예로운 동인도 회사
(Honourable East India Company)지만 그 이름이 블랙 유머 이상으로 소비되
지는 않는 이 회사는 별로 명예롭지 못한 거래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어쨌든 밀무역이나마 그들은 조선에서 무역을 성사시킨 최초의 함대다. 레디
선장은 조선에서 준 소와 돼지를 잡아 선원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온당하지 못한 고생을 하고 야만족에게 굴욕을 겪긴 했으나…….’
레디 선장은 멀리 보는 사람이었다. 이 일도 잘 되면 아예 이곳 전속으로 장
기 계약을 하는 것도 고려할 만했다. 지금 영국인 중 장담컨대 레디 선장보다
조선을 잘 아는 자는 없으니 몸값도 훌쩍 뛰리라.
그리고 윌리엄 자딘 등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바
다로 좀 나오자 다시 프랑스 국기를 내렸다. 용만의 사나운 물굽이는 곧 넵튠
호를 대해로 놓아주었다.
임상옥은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홍득주의 집으로 찾아왔다.
“분명히 내 물건의 값은 다 물어 주기로 한 거지요? 아무리 홍 당주(當主)께
입은 은혜가 있다 하나 이 큰돈을 떼먹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영국인에게 천 받고 내어 준 여러 먹을 것들의 값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차
형기는 겁 없이 따지고 드는 이 젊은 상인 임상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준
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자도에서 조선의 아편굴화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좀 과도할 만큼 주장하여
이 안건을 관철시켰던 시준이 장담했다.
“제가 대방 어른께 말씀드리지요. 분명히 은 백 냥으로 물어 드리기로 했죠?
그러나 후회하실 겁니다. 그 정도야 우습게 보일 돈이 굴러들어올 테니까요.”
백 냥만 하더라도 솔직히 임상옥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하지만 임상옥
으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면 있고 권세 있는 홍득주 패거리 상대로는 이 정도가 한계지만, 그 물정
모르는 서양 요괴들에게는 원안대로 이삼백 냥을 뜯어낼 수 있었는데 아깝기
그지없었다.
“너 그때 편지 가지고 왔던 그 꼬마로구나. 머리 잘 굴린다는 소리는 들었다
마는, 어린아이가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임상옥의 실수였다. 서양인들과의 큰 거래를 성공시키는 데 무시 못
할 역할을 해내었던 시준을 어린애라고 마음대로 쥐어박아도 되는 것은 차형
기와 홍득주 정도뿐이다.
차형기가 점잖게 제지했다.
“그 아이는 대방이 아들처럼 아끼는 수재일세. 자네야말로 함부로 나서지 말
고 그저 백 냥 먹고 조용히 물러나게.”
“거, 비방께서 섭섭하게 이러시깁니까. 무슨 일을 꾸미는지 한번 보기나 합시
다. 나도 눈이 있소. 그 천 갖고 죄 유막(油幕) 만들어 본댔자 본전이나 간신
히 건질 테니 그건 아니겠고, 대체 무얼 하시려고?”
유막도 조선에서는 고가품에 속하는 물건이다. 영국인들이 내어준 캔버스 천
은 그 용도로만 써도 임상옥이 판 먹을 것을 벌충할 만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시준이 그리 호언했을 리 없다. 게다가 유막은 신분에 관
계되는 물건인지라, 천 있다고 아무 유막이나 크게 만들어 팔거나 쓰다가는
호된 꼴을 못 면한다.
돈이 썩어난다는 홍득주조차 대로에서는 비단옷에 가죽신 하나 마음 편히 꿰
고 다니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찌그러진 갓 쓰고 콧물 흘리는 양반이라도 당
장 벽력처럼 소리 지르며 ‘건방진 장사치’의 뺨을 칠 테니까.
이게 바로 신분이다. 그래서 조선의 장사꾼은 단지 뭐가 잘 팔릴지만 봐서는
안 된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면밀하게 상품을 선정했던 시준은 임상옥에게
미소지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서리께서 다복동에 다녀오셨지요. 어떠합디까? 정말 금
맥이 있습니까?”
“있었지. 뭐, 이 장주(莊主) 그 어른도 허튼소리야 하시겠는가. 부쳐 먹던 땅
떼이고 갈데없는 사람들 모아서 땅 파고 있더군.”
임상옥은 시준이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둘러대었다. 시준은
마음속에서 임상옥의 신용을 한 등급 높게 조정했다.
“바로 그곳에 긴히 소용될 물건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나, 지금 여러 군데에
서 사람들이 금은갱을 몰래 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관에서 아무리 돌
아다니며 붙들어가도 그 수는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판이라지요.”
“허, 일하던 장정들 누워 쉴 차양이라도 만들려는 게냐?”
“그런 거면 제가 이리 큰소리치지도 않았겠지요.”
시준은 자기 성질에 안 맞는 일에 속으로 혀를 찼다. 건실함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성격 자체는 조선에 와서도 그리 바뀌지 않았고, 원래 99% 가능
한 일도 확인해봐야 한다며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공무원의 올바른 업무처리
방식이다.
그러나 이 사업이 잘될 확률은 관대하게 봐도 4할 정도. 상품 자체는 자신이
있었지만, 조선은 원래 물건 판다고 돈이 정직하게 들어오는 사회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준 자신의 아이디어 정도로는 안 된다. 그래서
시준이 지금 말을 질질 늘어뜨리면서 임상옥을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하는 것
이다. 과연 임상옥은 무언지 보기나 하자고 재촉이 성화였다.
결국 꾸물대던 시준은 임상옥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때쯤 물건을 내놓았
다. 그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도안을 그리고 상단의 부인네들이 솜씨 있게
만들어 준 바지였다. 닳기 쉬운 부분에는 가죽과 쇠징도 덧대어 놓았다.
“천막 천으로 바지를 만들었다고? 이걸 어디다 쓴다는 말…… 아!”
임상옥은 과연 이것의 가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이 시절의 섬유 생산력과
재봉 기술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열악 그 자체. 옷은 그 자체로 재물이며 찢어
지면 꿰매거나 깁는 것이지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시대다.
그러나 이 두껍고 질긴 천이라면 웬만한 거스러미에는 쓸려도 안심이다. 바닥
을 구르고 진창에 담그는 험한 일을 해도 연 단위로 버틸 수 있을 터다.
세탁이 어렵다는 게 흠이지만 옷을 제때 빨아 입을 정도의 형편이 되는 인간
이면 광산 따위 가지도 않는다. 게다가 시준은 그것까지 배려하여 영국인들이
준 여러 가지 천을 그냥 다 검게 물들여 버렸다.
“서리께서는 다복동에서 벗을 많이 사귀셨겠지요. 그 때문에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쪽의 사람들을 통해 이것을 팔아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은자 백
냥보다 더 큰 것을 보신다면, 우리 집과 같이 일해보시지요.”
얼른 생각하기에 바지 몇 벌이 뭐 그리 남겠나 싶었지만 임상옥은 과연 달랐
다. 물론 조선에 원숭이 꽃신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임상옥은 대번
에 그것과 비슷한 개념을 떠올렸다.
이제 이 편리함을 맛보고 나면 그냥 무명천 바지는 불편해서 입을 수 없게 된
다. 그렇다고 그냥 무명옷으로 버티자니 그것도 툭하면 해져서 돈이요, 돌에
찔리고 쇠에 긁혀서 살갗이 쓰라리고 곪게 되면 별수가 없을 터다.
“확실히 기동(奇童)이로다. 하지만 그 서양국 천이 무궁한 것이 아니니 그 바
지를 다 팔고 나면 이제 더 팔 것이 없을 터인데…….”
데님 천이라고 해도 어차피 화학 섬유가 없는 시대이니 면직물이기는 매한가
지다. 조선에서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허나 실질적으로는 어렵다. 직조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청바지를 만드는
트윌, 그러니까 능직(綾織)이 조선에서는 옷감용으로 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실과 날실을 어떻게 놓아 짜는지 모른다면 만들 수 없는 것과 다름없다. 게
다가 조면기도 방직기도 없는 판이라 천의 대량 생산이 안 되어 단가를 맞추
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이건 그 영국 배가 계속 와야 가능한 사업이다.
서양국 배가 앞으로도 계속 와서 그 천을 날라 온다면 모를까. 지금 한철 반
짝 팔아서야 은자 백 냥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시준은 다시 한 번 장
담했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올 겁니다. 아니, 오게 해야지요.”
작가의 말
1. 명예 동인도 회사라는 이름은 제 견문이 좁은 탓인지 저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허나 분명히 정식 명칭 중 하나였고, 아무래도 별로 명예로운 짓을 안 한 탓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군요.
2. 당주니 장주니 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현대 한국에서 나이 좀 있는 남자를 '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1960년대 정도까지 시골에서는 동네 유지 집 어른을 '마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3. 아시다시피 조선에서도 신분에 따라 (돈이 있다 해도) 의식주에 다양한 제한이 존재했으며, 법적 제한 말고 사회적 불문율까지 하면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연장자 앞에서는 안경을 쓰면 안 된다거나) 개중 유막의 경우는 상당한 정치적 이슈도 여러 번 일으킨 민감한 문제였죠. 왕실용으로 관청에 두었던 유막을 꺼내가서 썼다가 철퇴를 얻어맞는다거나..
5.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