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0화 (10/284)

10화

4. 용만(龍彎)의 물굽이(3)

대청 무역에서 손해를 본 영국이 가경 연간부터 본격적으로 아편을 갖다 중국

에 팔았다는 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아편굴에서 많은 중국인을 폐인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아편 전쟁의 경과를 설명하기 위해 좀 심하게 압축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양귀비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동아시아 내에서 대규모로 국

제 거래되었고, 영국인들 또한 차 무역에서 막대한 손해를 보기 전부터 아편

을 잘 내다 팔았다.

다시 말해, 중국으로의 아편 유입은 어느 날 장벽을 깨고 쳐들어온 침입자가

아니라 천천히 몸을 적시는 가랑비에 가까웠다.

많은 독극물이 그렇듯 아편 또한 흡연자 수에 대비했을 때 실제로 목숨이 심

각하게 침해되는 사람의 수치는 일부다. 중국이 아편 제재에 본격적으로 나섰

던 이유는 표면상 국민 보건이었으나 실상은 영국인이 그러했듯이 무역 적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국보다는 좀 건강에 나은 – 대신 효과도 떨어지는 – 방식으로 아

편을 복용한 유럽에서는 그 누구도 아편이 위험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아편을 법적으로 금지한 유럽 국가는

없다.

그러므로 아편과 함께 아편의 치유제(로 지금부터 정한) 고려인삼을 갖다 팔

겠다는 동인도 회사의 소소한 추가 무역 계획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담배 회사가 암 치유 기금을 조성하는 식이다.

조선 인삼이 아편 중독 치유에 특효라는 이야기는 도광(道光, 1820~1850년)

연간에 본격적으로 퍼지지만 이때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조선 무역을 뚫는다는 동인도 회사의 방침상 조선에서 수입할 물목이 필요했

고, 안 그래도 아편 말고 중국에 팔아먹을 게 도통 없던 영국인들은 홍삼에

주목했다. 아편도 팔고 몸 상하면 이거 먹으라는 식으로 홍삼도 팔고, 그러다

다시 몸 좋아지면 아편도 다시 파는 지속 가능한 장사였다.

그리고 의주 만상들도 그런 관점에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었다.

가경 9년(1804년) 봄, 비방 차형기는 통역 겸 보좌관으로 격상된 시준을 데리

고 나왔다. 그는 시준의 지위를 존중하여 예전에는 심부름꾼 서리 아이가 알

필요 없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제 청인들이 얼씬거리지를 않으니 곤란하던 차에 잘 되었지. 하지만 그런

티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작년, 초수 패거리가 몰살당한 탓에 만상은 별수 없이 예전에 이름만 팔았던

포씨네에 접촉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교활한 조선놈들이 압록강 섬에 사람들을 유인하여 다 죽이고 재물을 뺏는다

는 소문은 암흑가에서 빠르게 퍼졌다.

딱히 누가 만상들을 모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게 대부분 사실이

기에 신뢰성을 얻었을 뿐이다.

청과 조선 모두가 초수 패거리를 죽인 흉수는 프랑스인인 것으로 합의한 사실

은 틀림없다. 그러나 뒷세계 인간들에겐 정부의 공식 입장 따위보다는 신뢰하

는 형제가 보낸 소식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쪽이 더 옳았다.

당연하게도, 의주 만상 패거리들과 밀거래를 다시 하겠다는 청 상인들은 적어

도 현재는 없었다. 책문 후시에서 만나도 의심스러운 눈길로 마지못해 거래할

뿐이었다.

그래서 만상 역시 별로 내키지는 않는 대로 코 큰 오랑캐놈들과 거래를 튼 것

이다.

홍삼이 며칠 만에 상하는 물건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냉장고도 진공포장도 없

다. 잘못해서 곰팡이가 슬거나 하면 끝장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팔아치워야 한다. 책문 후시에 내놓으면 안 되나 싶겠

지만, 아무리 사무역이라도 공인 무역인 만큼 물량이 감시되고 있어 남은 홍

삼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속사정을 내보이는 자는 장사꾼이라 할 수도 없다. 만상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오만가지 생색과 함께 영국인들에게 ‘특별히’ 인삼을 팔아주

겠노라 약속했다.

시준은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청나라 사람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먼 데까지

온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 매매하여 주는 것이지요.”

“오냐. 네가 장히 똑똑하다. 그 편지는 틀림이 없으렷다?”

지난가을에서 올해 봄에 걸쳐, 영국은 중국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프랑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는 장사하는 무리이며 포교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영국인들의 절

절한 호소와 프랑스인에 대한 필사적, 혹은 철면피적 비난은 어느 정도 먹혔다.

네덜란드가 일본에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인도 회사는

북경에서 책문 후시를 거쳐 의주에 밀서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

매카트니 자작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청의 가장 고급 통역관이라고 해 봐

야 문어체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쓴 이 글을 읽는 것은 무리다. 피진에 가

까운 어눌한 단어를 구사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레디는 안심하고 조선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훌

륭한 비밀 편지를 읽을 사람이 조선에는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청 정부가 작정하고 선교사를 고용하거나 광저우 혹은

마카오에서 찾으면 영어나 프랑스어쯤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때문

에 아주 완전한 보안이라 할 수는 없다.

허나 레디 선장은 페킹 관료들이 그렇게 열성적이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다.

들켜도 서양인들이 그 좋아하는 장사하러 아무 데나 편지 보내는구나 하고 말

테니 어리석은 짓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결과적으로도 잘 되었다. 시준이 그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예. 분명 오늘 여기 장자도로 온다고 했어요. 간단히 만나 물건만 바꾸자는

것을 보니 관에서 야료 부리지 않게 해달라 하는 것 같습니다.”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는 이 인삼 장사를 조선 정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존 레디 선장은 의주 만상이 조선 북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토호라고 판

단했고, 그의 시선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하기만 한 전제군주 정부가 개입되어

괜히 세금만 무느니 말 통하는 자들과 거래하고 싶었다.

그러잖아도 만상들이 제공할 수 있는 물량은 동인도 회사 입장에선 감질나는

것. 각종 세금에다가 아시아 관리들이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뇌물까지 쓰게 되면 차라리 항해를 안 하는 게 나은 정도의 이문밖에 안 남는다.

이번에도 동인도 회사와 만상의 입장은 일치했다. 밀거래라면 대환영. 그것을

대변하는 것은 차형기의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 일은 잘 처리해 두었지. 오랑캐놈들이 제법 도를 알지 않는

가. 하하! 제시간에 오기만 한다면 내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구나.”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저들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다 죽일 수도

있어요. 저번에 그 총 보셨죠?”

“흐흐……. 그런 일까지는 네가 근심할 필요 없다.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그저 말이나 똑바로 전하거라.”

근대병기로써 무력을 저울질하는 현대인인 시준에 비해, 노회한 조선인인 차

형기는 영국인들이 자기를 죽일 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유치한 해적질을 할 거면 더 부유하고 가까운 전라도나 충청도를 터는

게 백배는 낫다. 아니면 중국 해안이나. 도무지 이 거친 서도까지 와서 그런

삽질을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거칠다는 말에는 농사가 잘 안되고 물산이 가난하다는 뜻도 있지만, 인간

들이 그렇다는 말도 포함된다.

평안도와 함경도 양계(兩界)는 세종의 개척과 사민 정책 이래 옛날부터 범죄

자의 유배지로 차별받아왔다. 이중환(李重煥)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평안도

놈’이라면 모두 돌아서고 벗하기조차 꺼려 한다.

그래서 다소 비합법적이고 비문명적인 방식으로 먹고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많

았다. 그런 만큼 무기나 기술이 뒤떨어질 수는 있어도, 일개 장사꾼들에게 안

방에서 당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이 평안도에 아무도 없다. 그런 자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화승 없이 부싯돌로 내쏜다는 그 신기한 총 이야기는 나도 알아보았다. 하지

만 별거 아냐. 숫자가 더 많으면 우리가 이긴다.”

차형기는 영국인들이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경로로 포수들을 고

용하고 조총을 사들였다. 조선이 딱히 총기를 엄금한 나라는 아니며, 이 북변

은 포수질로 먹고 사는 사람이 많다.

물론 화약은 비싸다. 그러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9할은 그냥 모양만 총인

물건을 들고 있었다. 이 대담한 허세에 시준은 감탄했다.

차형기 또한 홍득주가 자기 후계자로 시준을 키울 거라 생각했는지 찬찬히 설

명해 주었다.

“일단 사람들이 이렇게 총 들고 벌려서 있으면 오랑캐놈들도 감히 경거망동할

생각을 못 할 게다. 만약 한다 해도 생각이 있지. 저기와 저기, 저곳 보이느

냐? 진짜 호랑이를 잡던 포수들이다. 여차하면 우리가 두목의 대가리를 먼저

날려버리는 거야. 그러면 나머지 놈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전부 뒈지겠지.”

“아하…….”

시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도 병사 2년 경력만 있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보

니 저격수의 존재를 예측하지 못했다. 차형기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저…… 아이는 뭡니까? 저런 조그마한 아이도 총을 쓸 줄 알아요?”

뒤에서 건넛마을 김씨네 사람들이 부려 놓은 – 임상옥을 파견하는 대가로 홍

득주가 여기 한 다리 끼는 것을 허락했다 – 쌀자루 뒤로 조용히 앉아 있는 아

이는 들고 있는 총과 키가 별로 차이 나지도 않아 보였다. 차형기도 혀를 찼다.

“나도 미심쩍다마는 포수들이 말하길 저 애가 열한 살 나이로 설표(雪豹)를

쏘아 잡았다고 하도 우겨대니 별수 없이 오라고 했다. 시간도 없었고. 대신

값은 좀 깎았지.”

시준은 자기 나이도 열한 살이라는 생각을 조금 늦게 했다. 한국에서의 인생

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시준인만큼 무리는 아니었다.

‘대단한데? 나처럼 조선에 온 현대인……은 아니겠지. 현대인이라면 호랑이 잡

겠다고 산을 뛰어다닐 리는 없고.’

현대인이라면 조금 더 안전한 돈벌이를 찾는 게 정상이다. 21세기 한국인이라

면 호랑이는커녕 담비만 마주쳐도 혼이 빠질 테니까.

시준은 저 어린 나이에 돈푼이나 벌려고 살인이 전제된 곳에 나서는 그 아이

가 불쌍했다. 아무리 관서(關西) 포수를 조선에서 알아준다 하여도 열한 살이

아닌가.

‘한 열댓 살만 되어도 여기에서는 성인이니까 그건 모르겠는데 열한 살짜리는

좀 너무하잖아. 저 애 가족들은 제정신인가? 어떻게 뒤로 슬쩍 뺄 수는 없나?’

물론, 외국인과 사통하는 – 그것도 도깨비 같은 서양국 사람들을 상대로 밀거

래를 시도하는 - 시준이 훨씬 위험한 짓거리를 하는 셈이었지만 시준도 자기

와 남을 이중잣대로 재는 인간의 악덕에서 영 자유롭지 못한 셈이었다.

그래도 이중잣대가 다 그렇듯이 시준은 진지했다. 사람이나 호랑이나 둘 다

만만찮은 상대. 자칫 한 발자국이라도 어긋나면 목숨을 잃는다. 시준은 가능

하다면 그 아이를 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시준의 위치가 아무리 올라갔다 한들 무력 사용에 관한 일을 마

음대로 전단할 만큼은 되지 못한다.

영국인들이 상륙하자, 시준은 포수 아이의 이름이 기랑(氣郎)이라는 것만 우

선 기억해 두기로 하고 일에 나섰다.

일전에 ‘불랑국 사람들이 청인 수십 명을 살상한’ 큰일이 있는 만큼 조선 수

군은 원래 이 일대를 방비할 책임이 있다.

김조순을 비롯한 비변사의 고위 신료들은 그 책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작년 가을부터 올해까지 황해 수군을 평안도로 올려보낸다, 전선

을 새로 만든다 하며 북 치고 장구 치고 요란하게 문서를 뿌려 댔다.

하지만 몇 달간 서양국 배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새로 온 미관첨사 이존경

(李存敬)은 다소 경망스러운 성격을 못 이기고 곧 의욕을 잃었다.

그는 원래 역사에서도 붙잡은 청인들을 자기 멋대로 풀어주는 등 일처리가 자

의적이라 다시 파직된 사람이었으나, 작금의 상황에는 비단 그의 품성뿐만 아

니라 한 가지 소통의 문제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비변사는 정확한 해법을 견지하고 있었다. 실제 장자도의 해방(海防)이 시행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성경부에 조선이 애쓰고 있다는 소식

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 판단은 나무랄 데 없다. 문제가 있다면 김조순 이하 비변사 당상들은 그것

을 미관첨사 같은 말직에게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혼자 삽질한 이존경은 부임 두어 달 만에 수군과 근처 어민들의 폭동 조

짐만을 이끌어 낸 채 지치게 되었다. 그리고 근처의 유지인 홍득주는 그런 이

존경을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무에 밤낮 분골쇄신하는’ 그에게 ‘향인들이 조금이나마 경의를 표하고자’

들어간 은자와 선물들은 이존경으로 하여금 장자도 외에 다른 곳도 살피러 가

야겠다는 장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21세기의

경구가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지금 장자도에는 약속대로 관군이 없었다. 만상 쪽에서도 오랜

벗이며 동네 아저씨, 아는 형님의 인맥을 동원하자 이 일대 고깃배들도 오늘

하루 영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주의 깊은 포석에 의해 마련된 조선-영국 자유무역의 장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홍삼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마땅찮지만 자리했던 의사 휴 길런의 옆에서,

젊은 외과의 조수 윌리엄 자딘(William Jardine)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밀무역인데도 조선인들이 사기를 치지는 않는군요. 약간 비싸게 부르긴 했지

만…….”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중국인을 통해서 서신을 들려 보낸 뜻을 모르

겠는가. 이미 중국 내 인삼 가격은 우리가 파악하고 있다는 신호도 알아채지

못할 멍청이였으면 그냥 전부 노예로 잡아가는 게 낫지.”

길런은 여전히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동인도 회사가 의사와 의사 조수에게 보장하는 ‘특권 보장 화물’을 챙기

려면 선장에게 협조해야 한다.

이 경우 의사는 3톤, 조수는 2톤이다. 레디 선장은 휴 길런을 달래기 위해 홍

삼의 일부를 거기 포함시켜 주겠다고 약조했다. 자연히 조수인 이 스코틀랜드

젊은이에게도 몇 뿌리가 떨어졌다.

자딘은 조선 도자기 하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역시 중국산만은

못해 보이나 이것도 중저가 상품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예. 근방에 공권력이 오지 못하게 막은 것도 그렇고 꽤 머리를 굴리는군요.

결국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한가 봅니다. 파르시(Parsi,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도. ‘인도의 유대인’으로 불렸다)인들처럼 동아시아 사람들도 만만치는 않

네요. 고물처럼 보이긴 하지만 저 총도…….”

자기 톤수의 대부분을 광동의 민간 상인에게 불하하고 신경 안 쓰던 휴 길런

은 그냥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자딘은 할당량을 자기가 직접 관리했다. 그러면 위험도 크지만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자딘은 조선 상품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

졌다. 2류 상품은 또 2류대로 팔 데가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홍삼만 가져간다면 너무 손해 보는 장사다. 그래서 만상은

일부 끈이 닿는 청나라 사람과, 영국에 대해 대강 알던 시준의 조언에 따라

차(茶)와 도자기도 많이 준비했다.

조선에는 홍차가 없기 때문에 녹차이긴 하지만 이것도 그럭저럭 수요는 있다.

레디 선장은 시골치고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 물건들을 접수했다.

제대로 된 부두나 하역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 소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데에도 시간은 꽤 걸렸다. 밀무역치고는 상당히 느긋한 행태로 거래가 거의

진행되었을 무렵에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려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허기를 느꼈다. 조선인이건 영국인이건 이것은 만

국공통이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통역에 정신없던 시준은 문득 김씨네에서 온 젊은 계원

(契員) 임상옥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

임상옥은 작년 홍득주의 제안을 받고 이희저 소굴에 갔다 왔다. 그러나 아직

홍경래의 난이 본격적으로 준비되는 상황이 아니고 이희저의 경계심도 상당했

기에 이렇다 할 증거를 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쪽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금광 파기로 한 인부들이 밤에 뭔가 뛰어

다니는 일에 대해서도 알아오는 성과를 가져왔다. 금광은 진짜이긴 했으나 뭔

가 수상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홍득주는 일단 이 정보를 묵혀 두기로 했다. 그리고 임상옥은 그 대가로 상품

을 불하받아 이 밀무역에 끼게 되었다.

포목상 김씨뿐만이 아니라 슬슬 독립 생각하는 임상옥 역시 제안에 감사했다.

홍득주는 이런 식으로 의주 상인 전체를 시나브로 범죄에 엮어 넣어 정신 차

리고 보니 아무도 밀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임상옥은 일단 돈을 벌 수 있다면 관계없는 듯 보였다. 시준이 그쪽으

로 가기도 전에 임상옥은 중국어로 크게 소리쳤다.

“자, 어느 나라 사람이건 밥 먹어야 사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배 타고

바다 나가는 데에 가장 귀한 것이 먹을 것. 산 짐승이며 오곡과 채소가 전부

여기 있소. 배고프다고 그 인삼 씹어 먹고 멀건 찻물로 요기할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레디 선장을 비롯해 몇몇 중국어를 알아듣는 선원들은 솔깃했다.

이런 장거리 밀무역의 단점이 바로 보급. 영국인들이 아무리 지옥 같은 쉽비

스킷과 염장고기에 단련되었다고 하나 신선한 고기와 채소의 유혹은 선원에게

뿌리치기 힘들다. 임상옥이 여태 가만히 있었던 이유였다.

“이맥(耳麥, 귀리)이 예순 석이요, 소가 3두, 돼지가 13구(口), 닭 30척(隻)

에 닭알이 이백마흔두 개, 좋은 술이 쉰 동이입니다. 거기에 담배와 고추,

파, 마늘이며 각색 절인 채소까지 모두 해서 천은으로 이백 하고도 팔십다섯

냥이올시다.”

말도 안 되는 폭리다. 소를 세 마리나 끌어온 것은 임상옥의 수완이 대단하다

하겠으나 조선 후기쯤 가면 소 값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요, 유럽에서는 말이

나 혹은 말보다 못한 하층민들이 먹는 귀리 값이 그따위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레디 선장이 이문만을 생각하는 자였다면 꺼지라고 하고 그냥 배 돌려 갔을

것이다. 장기 보존 식량은 배에 충분히 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다. 중국에서 실은 채소는 다 먹

었고, 고기는 후각의 경고를 억지로 무시해야 할 지경이 되어 있다. 여기서

레디 선장이 제안을 거절하면, 선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장 몫으로 남아

있는 신선한 고기를 빼앗으려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저녁때 되었으니 끼니를 자셔야겠

다며 털퍼덕 앉아 계란을 볶고 고기를 삶는 등 아주 보란 듯이 음식 냄새를

과시했다. 레디 선장은 밀무역 하는 주제에 저렇게 잔칫상까지 차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으음…… 인삼값에 비하면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비싸다. 동인도 회사의 좀 부정한 예산도 이제 여유가 없다. 사비로

사들이는 것도 자유이긴 하나 원래 법인카드는 막 써도 자기 돈은 아까운 법

이다. 하물며 다시 이득 보고 팔 수도 없는 식료품이니 말이다.

레디는 그때 중국에 갖다 팔려고 했었던 물건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조선

에 팔면 안 될 게 무엇인가. 파트나(Patna) 지방의 상표가 붙은 이 아편 상자

는 고작 먹을 것의 대가로 내주기에는 아까울 지경으로 상품(上品)이다.

영국과 아편은 일심동체. 영국인이 거래에서 손해 볼 때의 필살기가 만상 앞

에 내밀어졌다. 시준 또한 저들 영국인의 ‘약재’와 먹을 것을 바꾸자는 제안

을 듣고 대번에 상황을 짐작했다.

‘이 새끼들이?’

작가의 말

1. 이 당시 청의 아편 흡연자는 남성의 절반, 여성의 1/4에 달했다고 하나 그 중 중독성이 있을 정도의 중증 흡연자는 약 1%라고 합니다. (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물론 1%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이긴 하죠.

덧붙이자면 아편은 복용시에는 흡연시보다 위험성이 덜합니다. 중국에서는 흡연 방식을 썼고 그래서 유해성을 심각하게 인식하여 금지하긴 하였지만, 유럽에서는 19세기 말까지 금지한 나라가 아무데도 없습니다.;; 아무 약국에서나 아편과 모르핀을 구할 수 있었지요.

2. 윌리엄 자딘은 의사 조수 출신의 무역상으로, 외과의로서 여러 차례 아시아에 항해했고 여러 사람과 손잡으며 동인도 회사의 중국 독점권을 교묘히 피해 부를 쌓았습니다. 지금 어느 나라에서 제재 회피용으로 쓰는 선박 환적 세탁 같은 수법을 처음 대규모로 쓴 게 이 사람입니다.;; 2022년 현재도 이 사람과 동향(스코틀랜드인입니다) 동업자 메디슨이 설립한 자딘 매디슨 그룹(Jardine Matheson Holdings Limited)이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죠.

4. 용만(龍彎)의 물굽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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