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4. 용만(龍彎)의 물굽이(2)
라이터는 좀 나중에 만들기로 하고, 시준은 홍경래를 안으로 안내했다. 지유
는 다른 집안일도 많은데다 곧 흥미를 잃어버려서 시준의 라이터 시제품만 갖
고 안채로 들어갔다.
괜스레 긴장한 시준의 모습은 성인이라면 홍경래도 경계했겠으나, 시준의 나
이 때문에 아이 특유의 낯가림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시준은 조선에서의 자기 삶에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지도 모르는 이 남자
를 주시했다.
‘홍경래만 없다면 나는 큰 상인의 사환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지
금 관아에 밀고해 버려?’
하지만 지금의 홍경래는 아무 혐의가 없다. 그저 많은 평안도 사람들처럼 지
역 차별에 불만 가진 채 떠도는 청년일 뿐이다. 시준은 일단 정보를 수집해
두기로 했다.
‘홍경래의 난 같은 대규모 사건이 즉흥적으로 일어났을 리 없다. 분명 꽤 오
랫동안……. 지금부터 준비했을 거야.’
이 사회에서는 인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준은 여기 와서야 『허생전』(최
신 소설이다)에 나오는 ‘강호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열전(列傳)에 툭하면 나오는 ‘널리 선비들과 사귀었다’는 말도 마찬
가지다. 전부 동지를 모으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지연은 가장 강력한 인맥 중 하나다. 시준은 홍경래가 지관으로서 돌
아다니며 – 고향 떠나 떠돌아도 의심 안 받는 몇 안 되는 직종 중 하나다 –
상당한 시간을 들여 각지 유력자들을 포섭했을 거라 생각했고 그것은 거의 정
확했다.
홍경래가 홍득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방으로 들어가자, 시준은 두근대
는 가슴을 억누르며 이것저것 심부름하는 척하고 기웃거렸다. 뭔가 긴한 말을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홍경래가 “지금부터 나라를 때려엎을 테니 돈을 좀 대주시
지요.” 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사회관계에 따른 우회적 표현이 많고, 화법이
현대와 크게 다른 지금 조선에서 시준이 대화의 이면적 의미를 다 파악하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장지문의 방음 효과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두 사람도 그다지 보안에 신경 쓰
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이가 연장자를 보는 예를 치르고 주인과 손님
이 자리를 나눠 앉은 뒤에도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여상한 수준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먼. 무슨 일로 왔는가?”
“어른께서는 장사하시는 분이니,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 조카가 특히 아
저씨를 찾아뵙게 된 것은 돈 될 일의 소식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좋은 건수가
있는데 제가 옛날에 신세진 분을 모른 척해서야 어찌 도리가 있다 하겠습니까?”
시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홍득주가 청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은 평안도에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돈 될
일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시준이 파악하기로 현재의 조선에서 대청 무역
이상 가는 돈벌이는 없다.
시준은 거기까지만 생각했지만, 홍득주는 한발 더 생각한 모양이었다. 홍경래
가 요즘 홍득주의 사업을 모를 리 없거니와 그런데도 불구하고 찾아왔다면 인
삼이나 사행길 수발보다 더 좋은 건수가 있다는 얘기다.
홍득주는 짐짓 여유있게 말했다.
“이 사람, 나도 일이 바쁘니 변죽 울리지 말고 속히 말해 보게. 어차피 날 찾
아온 뜻은 뻔하지. 선대(先貸, 여기서는 투자)할 돈이 필요한 게지?”
“핫핫. 이거, 어른의 눈을 속이기에는 이 사람이 아직 일천하군요. 말씀하신
바대로올시다.”
홍경래가 인사치레를 하기는 했지만, 현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공짜로
돈 될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 따윈 없다. 그런 좋은 건수가 있으면 자기가 하
고 입 씻을 테니까. 홍경래는 지금 투자를 설득하러 온 것이다.
시준은 마음속에서 홍경래를 주식투자방 스팸쟁이로 격하시킬 뻔했다. 그러나
좀 지나친 폄하였다. 그래도 일세의 명사인 만큼 홍경래의 품위가 그 정도로
저질은 아니었다.
홍경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저씨께서도 가산(嘉山) 사람 이희저(李禧著)를 아시겠지요?”
“알지. 두어 번 본 적도 있네.”
홍경래의 난 당시 핵심 자금책으로 알려진 이희저는 역리(驛吏) 출신으로 무
과에 급제한 무골이기도 하다. 허나 그 이전에 평안도에서 알아주는 부호였
다. 당연히 홍득주가 모를 리 없었다.
“팔도의 금맥(金脈)이 요사이 성하여 대정강(代定江)가에서도 물에서 금을 일
어낸 지가 오래되었고, 다복동(多福洞) 인근에서 특히 금(金)이 나오고 있습
니다. 그곳이 바로 이희저의 고향이지요. 제가 마음으로 벗하는 학생(學生)
군칙(君則, 난 당시의 선봉장 우장유의 字)이 그곳에 자주 왕래하여 얻어 들
었습니다.”
“금이라! 나라의 금칙(禁飭)이 수백 년 지엄했는데, 누가 감히 사사로이 야련
(冶鍊)하는 설비를 갖추고 귀물을 캐내려 할 수 있겠는가?”
홍득주의 모른 척은 의뭉을 넘어서 뻔뻔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감히 사사로
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조선 팔도에 널리고 깔렸다. 조정에서 더 이상 금
의 잠채를 어떻게 통제할 수 없어 아예 세금 받고 금점(金店) 개설을 허가하
는 것이 불과 3년 뒤다.
정책은 때에 따라 금하기도 하고 풀기도 하면서 오락가락했지만 결국 마력의
금속, 황금의 채굴은 어차피 이 시대의 조악한 국가 권력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물론 시준은 그 ‘누구나’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
들었다.
‘대정강이 어디야? 평안도의 금이라면 운산(雲山) 얘긴가?’
의주부에서야 좀 날리는 꼬맹이라 하더라도 평양에조차 한 번 가본 적 없던
시준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운산 금광은 그 전부터 그럭저럭 금 산지로 알려지긴 하였으나 시준이 아는
것처럼 동아시아 최대 금광으로 호언하려면 근대식 채굴 방법이 필요해 지금
은 당장 구미 당기는 곳이 아니었다.
대정강은 곧 이희저의 고향 가산의 강이요, 가산은 현대의 박천군(博川郡)을
말한다. 지세가 유리하고 금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 이희저와 홍경래는 여기
에서 사람을 모아 반란을 준비했다.
홍경래가 대답했다.
“『춘추』에 법은 존귀한 데 미치지 않는다 하였고, 왕법(王法)이라는 것은
총애와 아울러 드리우는 것이라. 서도 사람들이 법에 따라 과거에 입격하여서
도 사대부 되지 못하나, 돈꿰미 찬 삼남(三南) 자제들은 서울로 바삐 분경(奔
競, 인사청탁)하러 다녀 과거 없이도 수령과 낭관을 하지 않습니까? 이로써
본다면 금법이라는 것도 형편과 사람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홍경래는 그러면서 평소의 은은한 분노를 내비쳤다. 사정을 대강 아는 시준도
긴장했다.
그러나 별로 아쉬울 것 없는 홍득주는 홍경래의 진의, 그러니까 각처 수령과
서울 조정에 줄을 대어 금령을 무력화시켜 달라는 요청을 모른 척하며 왼고개
를 꼬았다.
“자네 지금 누구를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조정에서 이번에 우리 용만 사
람들을 의민이라 치켜세워 준 것을 모르는가? 곧 좋은 때가 열릴 걸세.”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홍경래가 몸이 달아 바싹 다가앉은 듯했다.
“입에 꿀 바르는 것이야 돈 한 푼 드는 일도 아닌데 왜 못하겠습니까. 조정이
이 일을 다시 잊고 이곳을 예전처럼 분토(糞土)로 알기 전에 살길을 찾아야
하오이다. 아닌 말로, 나중에 오활(迂闊)한 자가 감사(監司)니 부윤으로 와서
사사로이 청인들과 교우하였다며 트집을 잡으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지금이야 조정에서도 필요하니까 내버려두는 것이지, 나중에 심기를 거스르면
지금 홍득주가 하고 있는 여러 사업을 조사하여 전부 뒤엎을 수 있다.
죄는 가져다 붙이기 나름인 것. 처벌받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
벌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제 군주국은 권위주의적 필요에 따라 국가 체계나 법령을 매우 자주 바꾸는
경향이 강하며 조선도 마찬가지다. 고려국의 나랏일은 사흘밖에 못 간다[高麗
公事三日]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시준 또한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에서 아전들이 떼는 자릿세며 허가의 문서가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것을 자주 보아 왔다.
‘근대 행정법상에는 신뢰 보호 원칙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건 개나 주라는 것이 조선의 체제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조선에서 자
생적 자본이 크지 못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백성들은 관헌 마음대로 조변석개하는 ‘법’ 때문에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사
업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돈 벌어 놓으면 웬 이상한 법을 들고 와서 – 때
로는 그냥 법도 없이 – 하루아침에 폐지하거나 심하면 빼앗기는데 어떻게 사
업을 구상하겠는가. 이 시대, 조선의 정교한 관료제는 쓸데없는 부분에서 주
로 위력을 발휘했다.
지금 홍득주가 살살 빼며 금광에 그다지 열성적으로 달려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금은의 채굴은 조정의 판단에 따라 어느 날은 금지했다가 어느 날은
허가하는 등 수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19세기 이전 조선의 부호들은 이 일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
나 홍경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이미 은점(銀店)의 전례가 열성조의 법에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 잠채하는
자들이 매우 성해 아침에 군교와 나졸들이 흩어 놓으면 저녁에 다시 모여들어
일하는 꼴입니다. 조정에 이러한 사세를 잘 설유한다면, 억지로 계속 구부려
금할 바에야 물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세수(稅收) 걷어 군정을 족히 채우
는 편이 낫다고 여길 겝니다. 또한, 이런 좋은 계책을 상주하는 것으로써 의
로운 백성의 아름다운 이름에 향기를 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주가 어쩌고 했지만 장사치 따위가 조정에 시책을 건의한다는 것은 어불성
설이다. 홍경래의 말은, 자신들이 인맥 없는 서울 조정에 대뜸 선물 짐 지고
찾아가기가 뭣하니 홍득주를 통해서 중앙의 강짜를 막아 보고 싶다는 의미다.
홍득주도 고민인 듯했다. 이희저는 평안도 남쪽이 근거지라 압록강가에서 세
를 확보하고 있는 자신과는 영역이 다르다. 인삼 쪽에도 그다지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홍득주가 쉬이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깊은 관계를 맺어 놓는다면 좋은 쪽으로는 든든한 사업 동
지를 얻는 일이요, 나쁜 쪽으로는 약점을 파악하고 자본을 침투시켜 장차 흡
수할 수도 있을 터였다.
같은 맥락에서, 이희저는 홍경래를 보내 자신을 떠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
다. 자신의 동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가 될 것인지를 말이다. 잘못 대
응하면 자기만큼이나 강력한 부호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홍경래가 암시한 사안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홍득주 또한 의주 바닥의 유지로
끝날 생각은 없었다. 인맥이란 서로가 잃을 게 많아야 끊어지지 않는 법. 금
점의 개설을 계기로 서울 조정의 고관들과 자신을 얽어 놓는다면 조정도 이
용만 땅을 함부로 버리기 쉽지 않다.
‘그의 말마따나, 혹시 후에 필요하다면 청에 우리를 바치고 죄를 빌려 할 수
도 있지.’
외교라는 말은 몰랐지만, 그것에 헌신짝처럼 이용되고 버려질 수 있다는 점은
홍득주도 잘 이해했다.
그러나 먼저 찾아와서 이득을 주겠다는 자를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 홍득주
정도 되는 자가 많은 것을 주려는 자는 항상 더 많은 것을 가져가려는 자라는
간단한 이치도 모르고 늙었을 리는 없다.
홍득주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준은 상관의 바람을 잘 이해
하는 똑똑한 심부름꾼이었다. 시준은 장지문 밖에서 가소로운 헛기침을 하고
아이치고는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 술상을 보아 왔습니다.”
홍득주는 반색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시준을 치하하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오냐. 따로 이르지도 않았는데 네가 퍽 기특하구나. 이거, 손님이 왔으면 상
부터 내어야 하는데 내가 무식한 출신이 되어놔서 소홀했구먼.”
홍경래는 차마 ‘이제 거의 넘어왔는데.’ 하는 표정을 안색에 드러내지는 못하
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홍득주는 시준과 마찬가지로 시침 뚝 떼고 상을 받
으며 능숙히 말을 돌렸다.
“나 대신 똘똘한 아이놈이 알아서 차려왔으니 한잔 들면서 천천히 얘기하지.
자네와 나는 의리가 숙질과 다름없는데 재미없는 일 얘기밖에 할 것이 없겠는
가. 그래, 자네 장가는 들었던가?”
홍경래는 공손히 잔을 받으면서도 곁눈질로 시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증
오에 차서 노려본다기보다는 인상적인 꼬마에 대한 관심 정도였다. 시준은 그
것을 강철같이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흥. 우리 집을 그깟 실패한 반란에 끌어들일 수 있을 줄 아느냐. 홍득주가
머리가 있다면 소식을 좀 더 모아 본 다음 거절하겠지.’
시준이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실제 홍득주를 비롯해 평안도의 상인들은 대
부분 홍경래에게 협조하지 않았거나 협조했더라도 금세 등을 돌렸다. 이재(理
財)에 밝은 그들은 일찌감치 홍경래의 끝이 좋지 못할 것임을 내다본 셈이다.
일은 대략 시준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구렁이 담 넘듯 둘러대어 홍경래를
일단 보낸 홍득주는 아는 장사꾼들에게 연통을 넣어 홍경래 및 우군칙, 이희
저 등의 평판과 상황을 조사했다. (그동안 시준은 모은 용돈을 털어 소형 라
이터를 만들었으며, 시제품은 지유에게 뺏겼다.)
홍득주가 내린 결론은 원 역사와 약간만 달랐다. 그는 시준 혼자만 옆에 두고
서류를 이것저것 정리했다. 아이라서 안심한 것도 있지만, 이미 홍득주 상단
의 여러 기밀 문서는 시준이 없으면 정리가 안 됐다.
“아직 이렇다저렇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도 역시 꺼림칙해. 역시 나한테만
찾아온 게 아니었어. 목적하는 바가 금에만 있다면야 탄할 것도 없고 쉬이 알
수 있는 축재(蓄財)의 심산이겠으나…….”
홍득주는 지관이랍시고 돌아다니는 홍경래가 실제로 땅을 본다거나 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긴다는 것은 뭔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뜻이다.
보아하니 그 우군칙이라는 자도 아내와 함께 점쟁이 행세를 하며 다니는데,
글을 약간 읽은 홍득주는 이런 무리의 뜻이 대개 좋지 못한 데 있다는 것 정
도야 사적(史籍)으로써 짐작할 수 있었다.
“늙은이가 교활하다고 하나 빠르고 재치 있게 눈과 손발을 놀리는 데에는 젊
은이만 못하다. 그러니 알아볼 사람을 하나 보내야겠어.”
시준은 그 ‘젊은이’가 자기만은 아니기를 빌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서신을 보내시겠습니까?”
다행히 홍득주도 열 살짜리를 이희저의 예비 반란군 무리에 잠입시키자는 황
당한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
“네가 내 뜻을 미리 아는구나. 편지를 써 줄 터이니 저 건넛말 김씨네 집에
가서 전해라. 너도 알지? 그 쌀이랑 포목을 크게 하는…….”
“물론입지요.”
“그곳에서 서리 일 보는 임상옥이라는 젊은이가 있을 게야. 나이는 예전에 다
녀간 산남(홍경래)이 그 친구랑 비슷하지. 가는 길에 읍내 구경도 하고 오너라.”
홍득주는 그러면서 일전의 눈치빠른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돈냥이나 몇 닢 쥐
어 주었다. 임상옥의 위명을 좀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던 시준은 그라면 잘
해낼 것이라고 별 근거 없이 짐작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선에서 크게 실책할 뻔했으나,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실수를 쾌거로 – 그
중에서도, 프랑스 놈들에게 엿을 먹이는 쾌거로 – 바꿔 놓은 레디 선장은 그
재치와 민첩함을 높이 평가받아 이번에도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는 복잡한 추억이 섞여 있는 누런 바다(Yellow sea)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순풍에 돛 단 듯하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군.”
동인도 회사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총독부와 교섭했다. 혹시 포르투갈이 프랑
스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포르투갈 또한 프랑스인이 거품 물며
뿜어대는 변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선교에는 관심이 없다.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일은
장사꾼인 우리가 할 테니, 그동안 너희가 시비 안 걸고 가만히 있어 주면 차
후 우리가 개척한 조선 선교 루트는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 저무는 국력이라 동아시아에서 그렇게 이 악물고 확장할 동기까
지는 없던 포르투갈로서는 괜찮은 거래다.
그렇다면 동인도 회사는 무엇을 얻는가가 문제인데, 그 해답은 레디가 같이
오기 싫었지만 임무 때문에 또 동승해야 했던 의학박사 휴 길런(Hugh gillon)
이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매카트니 자작의 함대에 딸려 왔었던 인물이었다. 길런 박사는 제임
스 딘위디처럼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성격은 더했다.
길런은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그의 외눈 안경이 마뜩찮다는 듯이 빛났다.
“다 되었소. 내 학자적 양심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주 근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더군.”
레디 선장은 그 논문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런은 내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그것을 선장에게 떠넘기고 기지개를 켰다. 레디는 그 긴 글을 다
읽어보는 대신 자기가 필요한 것만 물었다.
“틀림없이 회사에서 요구한 내용이겠지요?”
길런은 ‘이 무식한 뱃놈 같으니.’ 라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레디는 길런
을 당장 자루에 포탄과 같이 넣어 바다에 쑤셔 박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길런이 대답했다.
“아편 중독에 의한 병리 증상과 그 해독……. 다양한 관찰과 임상 결과로 미루
어 보건대 인삼은 분명히 한 가지 해법이 될 수 있소. 사실이 아니라 해도 안
심하시오. 중국의 야만인들은 모두가 믿을 테니. 당신들의 빌어먹을 밀무역은
충분한 대가를 얻을 테고. 됐소?”
“고맙군.”
레디 선장은 거기서 말을 끝내려 했다. 이제 저놈에게 볼일은 끝났다. 이제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그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러나 휴 길런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돌아서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그 논문을 가지고 있다 해도 당신들이 연구를 훔칠 수는 없소. 성분
추출 같은 여러 자료가 부족해서 아직 특허는 무리야. 그건 내가 아니고서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cast pearls before swine]지. 특히 당신들에게는.”
침을 뱉듯이 말한 길런은 선장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레디 선장은 고려인삼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화기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말
1. 신뢰 보호의 원칙이란, (설사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정부가 이미 행한 행정이나 언명은 위법이 아닌 한 다음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자면 정부가 법에서 어떤 일정한 사업에 대한 허가 판단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했을 때, A라는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사유를 판단하여 사업을 허가해 주었다면, 같은 사유를 가지고 있는 B라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불허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여담입니다만 '신의성실의 원칙'과 자주 혼동되어 공시 도전자들에게 헷갈림을 선사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2. 인삼의 효과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인삼의 유효 성분을 밝혀낸 건 거의 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서양 의학계는 오랫동안 인삼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용만(龍彎)의 물굽이(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