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4. 용만(龍彎)의 물굽이(1)
소위 강(康, 강희) ‧ 옹(雍, 옹정) ‧ 건(乾, 건륭)의 성세(盛世)라 하는 삼대
의 융성 이후에 즉위했기에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지금 연호를
가경이라 쓰는 청나라 황제 아이신기오로 용얀 역시 충분히 능력 있는 군주였다.
황제가 된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경제의 경력이 일천함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황제 자리에 늦게 올랐을 뿐이다. 불혹을 넘긴
지도 한참 된 이 원숙한 군주는 조선이 무언가를 숨겼음을 눈치챘으며, 조신
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난 너의 계략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단숨에 패를 까보이지는 않았
다. 김조순과 마찬가지로 청 조정 또한 이것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
황제의 비답은 거대한 제국의 체계를 거쳐 내려왔다.
<조정의 각신과 변경의 여러 장군들이 이 불미스러운 일로 그 섬(장자도)에
군진을 둘 것을 청하였으나, 너희 작고 불쌍한 지방[golo, 省]의 백성들이 과
히 놀랄까 염려되고 우리 성조(聖祖, 강희제)께서 번국과의 경계를 정하신 뜻
을 받들어야 하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속국이라도 나라는 나라다. 치세 내내 청 조정은 대
개 조선을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였으며, 조선을 나라(gurun)가 아니라 지방
(golo)으로 취급하는 것은 천문 일력을 만들 때뿐이다.
그래서 가경제의 첫 마디는 상당한 강경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달래
는 말이었다.
<다만 도덕과 의리를 높이 밝히는 것이 한가지로 짐의 뜻인바 대국의 백성들
이 다시 변경에서 참변을 당하지 않도록 지경의 범월(犯越)을 단속하여 기강
을 바로잡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
성경부(盛京府, 심양과 만주 국경지대를 관할하는 관청)의 믿을 만한 사람들
을 뽑아 변경을 순력하는 임무를 맡겨 보내니, 성경장군(盛京將軍) 부곤(富
坤), 흠차부도통(欽差副都統) 책파극(策巴克), 성경공부시랑(盛京工部侍郞)
파영아(巴靈阿) 등은 곧 황제의 위임을 받은 자들이다. 해국(該國, 조선)에서
는 딸리는 여러 사목(事目)과 전범을 참고하여 일을 협조하는 데에 지체가 없
도록 하라.>
말하자면 갑자기 군대를 들여보내거나 하는 강짜는 부리지 않는 대신, 북부
국경지대에서 청 관리의 자유로운 행동을 묵과하라는 뜻이었다.
청이 이렇게 양보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첫 번째는 조선이 생각보
다 국경에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강화된 국경에 대한 인식은 두 차례의 호란에서 만주족에
게 모두 패배한 이후로도 조선으로 하여금 물러서지 않게 하였으며, 결국 숙
종조에 백두산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조선은 청에 큰소리칠 수 없던 입장임에도 조선 경내로 청의 관헌이 들
어오는 것을 극력 거부하고 백두산을 둔 협상에서 오히려 그 전보다 땅을 약
간 더 얻을 수 있었다.
가경제는 이 일을 사소하면서도 오랜 골칫거리였던 일 – 조선의 산삼 잠채꾼
이 만주로 넘어오는 일을 더 꼼꼼히 막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프랑스의 배가 나타났다’는 조선의 말이 일부라도 사실이라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청 주변을 떠돌며 빈틈을 노리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매카트니가 생각한 바를 청 조정이 생각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불량배 몇
놈 죽은 일로 조선과 척을 지기도 힘들다. 그 총 몇 자루로 다 믿는 것은 아
니지만, 조선인이 죽였다는 증거도 마땅히 없지 않은가.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도 연결된다. 이 기회에 조선을 어쩌자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청의 속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전설적 지도자인 총교사(總教
師) 왕총아(王聪兒)가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건
만 끈질긴 항쟁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대의 화신(和珅, 허션)이 흔들어 놓은 국가의 재정도 이제 영 건강하지 못
하다. 세계 최대 국가 대청의 두 자리 햇수 예산에 달하는 금액을 몰수했는데
왜 돈이 없나 싶겠지만, 그 9억 냥의 돈은 국고가 아니라 전부 가경제의 사비
로 환수되었으니 뭐 하나 보탬이 될 리가 없다.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청이 소모한 군비는 약 2억 냥으로 추산된다.
가경제가 복권에서 세금 떼는 수준의 관대함만 보였어도 청은 국고를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를 가지고 대청이 무너진다고 하면 과장이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서 균열이 가고 있음은 분명했다.
흙손을 들고 동분서주해야 하는 가경제로서는 동방에서 갈라지는 금은 아직
내버려둬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는 먼저 안방의 균열을 처리하기로 했다.
“서양 나라들의 간교함은 이번에 조선이 올린 표로 더욱 드러났다. 북경과 광
동의 소위 선교사들, 특히 불랑국의 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추고하되 수상한 자
는 내쫓아라.”
파리 외방전교회와 마카오 대표 르통달(Letondal)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
사들은 이 중상모략에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반발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였지
만 어차피 청도 어느 정도는 알면서 그러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북경은 유럽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각축을 벌이는 상태. 북경
교구의 책임자인 구베아 주교는 포르투갈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인을 보호하
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불리한 암시를 여러 차례 함으로써 이 사태를 악화
시켰다.
“프랑스인은 최근에 왕의 목을 베어 떨어뜨린 극히 불충한 폭도의 무리이며,
이제 유럽 사방 각국을 침공하는 광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의 혐의
를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개연성은 있다고 보여집니다.”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 마카오 대표 장 밥티스트 마르시니(Jean-Baptiste
Marchini)는 이 사태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포르투갈 극동대표부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총독부로 달려간 마르시니는 총독 카에타노 데 소사 페레
이라(Caetano de Sousa Pereira)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찻잔을 그 상판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교황청 고관에 대한 예우로 총독은 좋은 자리를 내주고 다과를 대접했지만 마
르시니는 그에 걸맞은 예절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마르시니는 숨을 몰아쉬며
격하게 말했다.
“이건 나라의 구분 이전에 신앙의 문제요. 지금까지 포르투갈 남경교구에서
중국인 신자를 시켜 우리나라의 신부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막고, 심지
어 구타 및 감금한 사태까지 참았소. 케케묵었다 한들 성하의 칙령(비오 2세
시절 포르투갈에 내린 선교보호권을 말한다)은 칙령이니까. 그런데 이게 뭐
요? 당신들의 중상모략으로 북경에서 신부들이 순교하면 어떻게 책임지실 거
요? 이건 국가간의 문제가 될 수도 있소!”
페레이라 총독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동시에 국가 문제라고 하는
이 프랑스인의 앞뒤 안 맞는 말을 놀리지는 않았다. 대신 놀리는 듯한 부드러
운 표정만 지으면서 말했다.
“많이 흥분하셨나 보오.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겠소이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오해는 무슨 놈의 오해! 쿠치(Kuchi, 베트남 일대)의 선교사들을 통해 본국
으로 연락을 보내겠소. 이 일은 결코 간과하지 않을 거요!”
페레이라 총독은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하시지.”
“뭐?”
“남의 식탁에 거들먹거리며 들어와 손을 뻗친 자들이 누구인가. 성스러운 자
리에 앉아 있다 해도, 국왕을 참하고 상것들이 날뛰는 나라 출신인 것을 숨길
수는 없군. 본국에 일러바치겠다고? 어디 해보시지. 과연 그 공화국 혁명정부
인지 나발인지가 국외에 신경 쓸 겨를이 있다면 말이야.”
아직 전신은 개발되기 전이다. 페레이라 총독이나 마르시니가 아는 가장 최신
의 프랑스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수립된 통령 정부 상태이다. 그래서
페레이라는 마르시니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프랑스인인 마르시니 또한 지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의 관을 쓰려 한
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교회에 부정적인 공화국 정부에게 기대할 것은
많이 없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손가락을 덜덜 떨며 삿대질
하는 것뿐이었다.
“이, 이 무슨 무도한! 당신들이 그러고도 문명인이고 기독교인인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너희 프랑스인들이 그 버릇을 못 버리고 남
에게 공연히 뒤집어씌운 것이지. 연기는 훌륭하다마는 해적질을 할 거면 좀
깔끔하게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지 않았소! 애당초 프랑스가 아시아에 무슨 함대가 있다는 말이야!
당신들 포르투갈 해적이나, 그도 아니면 영국 동인도 회사의 장사치들이겠지!”
“성직에 있는 분께서 입이 험하시군. 난 총독으로서의 업무가 바빠서 당신 같
은 무뢰배를 상대할 시간은 없소. 얘들아, 손님 가신다!”
총독부의 건장한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마르시니는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페레이라 총독은 마르시니가 두고 간 교리성성의 공문을 힐끗 바라보
았다.
“흥. 프랑스 놈들의 뻔뻔함이라니. 저건 읽을 필요도 없다. 유실된 걸로 하고
태워 버려.”
“예, 총독 각하. 아, 그런데 지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하신 조선 건과 관련이 있다는데요. 들여보낼까요?”
페레이라는 이제 좀 이야기해볼 만한 손님이 왔다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이 프
랑스를 박대하면 동아시아에서 의지할 데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정도인데, 네
덜란드야 이제 쇠퇴한 지 오래고 영국과만 잘 얘기해 두면 프랑스를 아예 고
사시켜 버릴 수 있다. 페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찻잔과 과자도 새로 내오도록 하게. 마르시니가 입으로만 떠들어서 한
시름 놓았군. 그 녀석이 이 중국 도자기를 집어던지기라도 했다면 정말 참을
수 없었을 거야.”
유엔 아동 권리협약을 무참하게 깔아뭉개는 수준의 노동을 강요받는 두 아이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씩 요령 있게 짬을 내서 놀았다. 오늘도 지유와 시
준은 사립문 옆에 쪼그려 앉아 쑥덕대고 있었다.
지유는 시준이 내민 과자를 받아들고 기뻐했다. 종이봉투를 뚫고 나는 달콤한
냄새는 현대라면 흔한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매우 드문 것이었다. 이 정도
향을 내는 향신료와 조미료는 산업화 이전에는 상당히 귀하다.
“이거 당과(唐菓) 아냐? 이 귀한 걸 언제 얻었어?”
“요즘 청나라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하니까 나도 심부름하다 떨어지는 게
있었지. 숨겨놓고 아껴 먹어라.”
“아무렴 여부가 있겠니. 이건 서울의 높은 분들도 함부로 못 먹는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여섯 살바기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외숙 김유근(金逌根)에게 이 과자
좀 더 부쳐달라고 한 땀 한 땀 써서 보낸 것처럼 당시 중국 과자는 – 당대 중
국의 모든 문물과 마찬가지로 – 알아주는 것이었다. 설탕이 여전히 귀했던 조
선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열 살밖에 안 된 시준이 이 과자를 입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과 청의 최
근 협상 때문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도 청이 이 일을 관리 파견 정도로 끝내 준 것에 감사했다. 청
의 관리들은 평안도 근방에서 그냥저냥 참을 수 있을 정도의 행패만 부리고
다녔다.
의주에서 백두산까지의 산삼 잠채꾼과 영세 인삼업자들이 급감하면서 홍득주
는 거래선을 자신에게 맞게 정리할 수 있었다.
홍득주 상단에 납품하거나 친한 자들은 왠지 관청과 청 관리들의 단속에도 무
사했던 반면, 평소 홍득주에게 밉보였던 자들은 불법 월경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덮어쓰고 잡혀갔다. 반죽음이 되어서 관아에서 나오면 이미 재산은 공
중으로 날아간 뒤였다.
평소에도 인맥이 적지는 않았으나, 이번 일로 서도에도 의민(義民) 있음을 과
시한 홍득주 패거리는 삽시간에 용만 제일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의주부의
나졸부터 호장까지 모두 홍득주의 편이니 부윤은 헛기침이나 할 뿐이요, 육방
아전은 문서를 홍득주의 집으로 가져가는 판이다.
청의 관리들 역시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것은 조선인이 대국 사람을 위해 창봉
(槍棒) 들고 나섰다는 말이라, 홍득주를 찾아와 필담하며 명예를 높여 주었
다. 물론 홍득주가 내어주는 선물의 가격도 높았음은 특기할 필요가 없다.
명색이 서울에서 파견되었다는 역관들조차 금세 사세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홍득주를 통해 청인(淸人)들과 편리하게 소통했다.
21세기나 19세기나, 관청이 민간에 외주를 맡기는 이유는 똑같다. 복잡한 일
을 처리하고 책임을 지기가 귀찮아서다.
그런 면에서. 의주 부윤 서유구의 경우 부패한 탐관오리는 아니었지만 홍득주
에게 의지하지 않을 만큼 결벽주의자도 아니었다. 홍득주를 통하기만 하면 아
랫것들의 사소한 시비가 위에서의 심각한 갈등으로 변질되는 일을 모조리 깔
끔하게 막을 수 있는데 왜 사양하겠는가.
결국 서울이나 북경에서 믿는 바와 달리, 잠채꾼 적발하고 조선에 경고하라고
보낸 관리들은 평안도 유람이나 즐기고, 청국 관리들의 행패와 국익 훼손을
막으라는 지시를 하달받은 의주 부윤은 그들과 어울려 놀았다. 국가 간의 외
교로서는 가장 화기애애한 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 홍득주 옆에 붙어 다니며 똘똘하게 심부름하는 시준에게도 그런 과자
하나쯤 떨어지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홍득주는 시준이 자기 아들이라 소개했
고 청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똑똑해 보인다는 빈말을 아끼지 않았다.
지유는 과자를 조금 베어 물어 맛을 음미하듯이 오물거렸다.
“너 중국말도 이제 곧잘 한다고 어른들이 그러더라.”
전생에서의 시준은 중국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배우는 것이 어렵지
는 않았다. 지금은 열 살의 유연한 두뇌가 있고, 사방에 청인들이니 해외 유
학이나 다름없었다.
현대처럼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 과정이 없다 보니 중국말 한다며 푼돈 받고
나선 자들도 시준이 보기에는 당장 해고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흠차대신이나 절도사(節度使) 같은 고위 관리에게 따라붙은 역관들이야 가전
의 학문을 익혀 훌륭하지만 그런 자들이 상단이 관여하는 허드렛일에까지 배
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은 눈치나 손짓, 관례로 우물우물 처리되는 일이 다반사였
다. 시준의 중국어는 그 정도 수준이라면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도달했다.
만주인 고관은 시준 같은 아이와 이야기할 일이 없으므로 관화(官話) 정도만
배우면 되었던 것도 이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불과 반년 정도만에 새 언
어를 익힌 그 능력은 놀라웠다.
“흉내나 내는 정도지. 너야말로 공부는 안 해?”
“계집애가 무슨 공부니? 부엌데기 일에다가 수침(垂針)이나 보고 배우는 게
다야. 네가 부럽구나. 나도 바깥에 따라다니면서 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말이 궁해진 시준은 대답하지 않고 뭔가 쇠뭉치 같은 것을 만지작거렸다. 지
유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그건 뭔데?”
“불씨 꺼뜨리면 얻어맞기 일쑤고, 화로 가지고 다니기도 귀찮으니 하나 만들
어 보았다. 여기를 손으로 누르면 부싯돌이 돌아가서 불이 붙는단다.”
영국인들이 홍삼 받고 넘겨준 총은 솔직히 당장 쓸 데가 없었다. 시준이 총기
를 역설계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있다고 한들 전쟁할 것도 아닌데 무
슨 쓸모가 있겠는가 – 조정의 눈에 띄면 당장 집안이 송두리째 날아갈 물건을
그냥 두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게다가 총기는 관리를 조금만 안 하면 금세 못쓰게 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시
준은 홍득주의 허락을 얻어 총 하나를 분해했다. 시준이 주목한 부분은 플린
트락 머스킷의 부싯돌 발화 장치였다.
‘조금만 손보면 라이터를 하나 만들 수 있겠는걸.’
물론 오산이었다. 결과물은 형편없었다.
크기는 현대의 라이터보다 아주 많이 크며 손이 부서져라 방아쇠를 당겨야 불
이 겨우 붙는다. 객관적으로 봐서는 부싯돌을 튕기는 기존의 공정을 조금 쉽
게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유치한 발명품이었다.
라이터가 성냥보다도 먼저 발명되었다는 사실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만, 되베라이너의 램프(Döbereiner's lamp)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라이터와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들은 20세기 발명된 론슨 라이터쯤은 되어야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름이야 같은 부싯돌이라도 현대식 라이터의 부싯돌은 의외로 고급
금속공학이 요구된다.
시준도 이번에 라이터를 만들어 보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기원전도 아니고,
그 혼자 19세기 문명에서 뭔가 대박 칠 발명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소소한
용돈벌이쯤은 되겠지만.
“어머나. 불씨라고? 나 주려고 만든 거야?”
그럴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시준은 귀여운 친구의 초롱초롱한 눈에 미소지었다.
“……저기 읍내 딱쇠(대장장이) 집에 맡겨서 비슷한 걸 좀 작게 만들어 달라 하
러 가는데, 같이 갈래? 다 만들고 돌려받으면 이건 너 주마.”
“정말? 갈래!”
아이답게 결정을 빨리 내린 지유는 발딱 일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주위를 둘
러보며 눈치를 보았다. 숙부로부터 여자가 어딜 바깥에 나다니려 하냐는 호통
을 또 들을까 봐서다. 지금까지 몰래 빠져나가려다가 된통 혼난 것이 한두 번
이 아니다.
그래서 지유는 사립문에 다가선 그림자를 더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자그마
한 체구에 강퍅해 뵈는 얼굴. 중갓을 쓴 그 사내는 아무래도 신분이 높지는
않아 보였다.
의주에서 세 떨치는 홍득주 집에 드나드는 손이며 식객이 한두 명은 아니지
만, 시준은 이 사람이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뒤로 싹 숨어버리
는 지유를 가리듯이 서며 물었다.
“어떤 분이 오셨다고 전해드리오리까?”
한 스무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한 그 젊은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용강군(龍岡郡) 사람으로 홍가(洪家) 성 쓰는 지관(地官)이다. 산남(山
南)이가 밥 한술 청하러 왔다고 일러드리면 주인께서 알아들으실 게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유는 그 말을 듣고 혹시 홍득주의 친인척
이 아닌가 해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시준의 생각은 달랐다. 친척이라면 관계
를 먼저 밝혔을 것이다.
그리고 용강군 출신의 풍수쟁이 하던 홍씨 남자라면 짚이는 데가 있었다. 시
준이 조선사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순조조 최대의 내란 사건
을 일으킨 이 남자는 국사 공부를 해 봤다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홍경래!’
작가의 말
1. 추후 다시 언급될 것 같습니다만, 사실 이 시대의 역관들은 자주 접하는 이웃나라의 말은 그럭저럭 잘 했지만(가문 단위로 직업이 이어진 탓도 크고) 서양과 접촉할 시에는 상당히 고생했습니다. 어차피 지적할 사람도 없어서 그랬는지, 매카트니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앞에서도 기껏해야 피진 수준의 통역이 빈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인이 청에 그때 처음 온 것도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굳이 서양까지 안 가더라도, 박지원의 기록에 판첸 라마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도 몇 중의 통역을 거쳐야 간신히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양쪽 모두 청의 속국으로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2. 산남은 홍경래의 별명입니다. 호라고 해도 되겠군요.
4. 용만(龍彎)의 물굽이(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