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7화 (7/284)

7화

3. 대박청래(大舶請來)(3)

시준은 아까까지 사납게 날뛰던 동료들이 숨죽여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같이 상판대기가 사람의 형상이 아닌데다 몸집도 덜썩 크구나. 어디의

도깨비들인가?”

“내 들은 적이 있지! 보니까 알겠군. 바로 대비달자(大鼻㺚子)야. 길리시단

(吉利施端, 크리스천)인지 뭔지 무슨 요술로 혹세무민하다가 도성에서만 수백

명의 목이 날아갔다 하는 그 무리가 틀림없네!”

“자네 정말 견문이 넓군! 어어, 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조창(鳥槍, 조총)

이 아닌가?”

“아니, 화승이 없어. 아마 그냥 빈총인 게 틀림없지. 간담이 눌리면 우리는

끝이야. 허리 펴!”

초수 패거리를 무찌른 그들이었지만 이제 승리의 기세는 올려 보기도 전에 사

라진 듯했다. 조선인들은 방금 싸움의 흥분과 앞으로의 두려움 사이에서 긴장

이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노련한 사람인 차형기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단속하

고 나아가 대담하게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동인도 회사의 극동아시아 파견 함대쯤 되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당

연히 있다. 과거 중국에서 활약했던 패리시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의주 만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차형기와 헨리 윌리엄 패리시는 의사

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패리시 역시 능숙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대영 제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아시아 파견 함선, 넵튠호의 선원들이

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당신들은 누구인가?”

상대가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들이라고 한들 협상의 원칙은 분명하다. 차형기

는 패리시의 질문을 무시함으로써 기선을 잡으려 했다.

“남쪽의 야만인[南蠻人]들이 여기에는 웬일인가? 비바람에 밀려 왔다면 마땅

히 관에 고하여 먹을 것을 내어주고 쉬게 할 터요, 만약 총포를 들고 온 해적

도배라면 곧 몰려들 관군 앞에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니 속히 물러나도록 하라.”

“당신들은 군인인가? 아니면 관리인가? 책임자와 이야기하고 싶다.”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를 뱃놈들이 어찌 수령을 뵐 수 있겠느냐?”

패리시는 한 번만 더 참기로 했다.

“우리 신분은 이미 밝혔다.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은 너희들이다. 우리

는 회사로부터 이 지역의 측량을 위임받았으며, 이는 너희 조선 사람의 군주

인 청 황제의 의사이기도 하다.”

일개 시골 상인이 감당하기에는 좀 큰 직함 탓에 차형기는 실수하고 말았다.

패리시는 차형기의 안색이 바뀌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리고 이왕 쳐

놓은 허풍을 더욱 크게 키웠다.

“애초에 너희는 국가의 관리나 군인은커녕 선량한 시민조차 아닌 것 같군. 너

희가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은 우리가 똑똑히 보았다. 청 황제의 위임

을 받은 자의 자격으로 너희의 짐을 임검(臨檢)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

상자를 열어보도록 하라.”

이것이 동인도 회사의, 정확히는 레디 선장의 목적이었다. 망원경으로 아까의

난장판을 지켜본 레디 선장은 그 상자 안에 필시 귀한 물건이 들었으리라 여겼다.

패리시는 수치를 참으며 레디 선장의 지시를 하사관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이

번에는 영어였다.

“아마 범죄 조직들의 밀거래 현장이라는 것이 선장의 결론이다. 떳떳한 물건

이 아닐 터. 무기나 독극물 등 명백히 위험한 물건이면 몰수하여 압류하고,

그렇지 않다면 배에서 아까 가져온 물건들과 거래를 시도하며 수로 안내를 협

상해 본다.”

이것도 많이 순화한 것이다. 모범적인 영국인답게, 원래 레디 선장이 추측한

거래 물품은 아편이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말은 만국 공통의 진리였다.

저만한 상자에 든 아편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다면 그 이익은 상상을 초월

한다. 동인도 회사와 본국은 아편의 거래를 금지하고 있지만 그건 신문에 그

렇게 발표했다는 말일 뿐이다.

물론 패리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차형기의 표정만으로도 ‘황제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황제라는 말이냐?’라는 대사를 읽어낼 수 있었다. 패리시의 손

짓에 따라 병사들이 인도 패턴 브라운 배스(Brown Bess) 머스킷을 치켜들었다.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화승도 없는 조총이 두려울 것은 없어 멀뚱멀뚱 보고 있

을 뿐이었다. 약삭빠른 모리배들인 의주 만상들 대부분은 저놈들이 허세 부린

다고 비웃었다. 수석식 총이 조선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장사꾼들

까지 다 알 정도는 또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총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에 약간 당황하던 패리시는 자신과

협상하던 대장 옆에 웬 어린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더욱 당황했다.

‘심부름하는 아이인가?’

애들이라고 특별 취급 안 해 주는 것은 이 시대 서양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대장은 그 아이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적대하지도 않았는데 총부터 쏴 갈기기는 꺼림칙했다. 민간인을 겁박하

여 재물을 빼앗아도, 없는 권리를 사칭해도 어쨌든 그들은 ‘문명인’이었으니까.

그래서 패리시는 그 아이가 상자 하나를 들고 척척 걸어나올 때까지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때까지의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게 했다.

“Come on, Here is that you want(자, 당신들이 원하는 게 여기 있소).”

“여…… 영어를 할 줄 아는가!”

말로써 신분을 짐작하기가 약간 모호하기는 하였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만했

다. 현대 영어는 셰익스피어 이후로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이니 어색한 것은 당연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토록 정확한 영어 발음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패리시는 자신의 경솔함을 저주했다. 이 아이는 분명 자신이 그다지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아까의 말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상자를 열어 웬 맨드레이크(Mandrake) 뿌리 같은 것을 보여주곤 말

했다.

“이것은 붉은 인삼[紅蔘, red ginseng]이라고 하여 중국에서 귀하게 쳐 주는

약재입니다. 이것을 저 마적단이 공연히 빼앗으려다 싸움이 일어난 것이지요.

깃발을 보니 당신들은 영국인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메리카 인삼에 대해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패리시는 물론 알고 있었다. 인삼이 서양에 알려진 것은 늦게 잡아도 17세기

다. 이미 당시부터 ‘은과 같은 가치’라고 평가되었다.

미국에서 식민지 시절부터 인삼을 중국에 수출해 온 – 당시 중국에 ‘수출’을

성공시킨 드문 나라였다 –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삼을 최고로 친

다는 것도 동양 전문가인 패리시의 지식에 들어 있었다.

시준은 미소지으며 유창하게 말했다.

“이것은 보시다시피 ‘무기’도 아니며, ‘독극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몰수하

여 압류’할 필요도 없지요. 아, 혹시 ‘아편’ 같은 것이라고 의심한 것은 아니

겠지요?”

저 새끼 악마 같은 조선 꼬마는 대화를 모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레디 선장의

생각까지 들여다본 듯했다. 패리시는 시준이 일부러 강세를 넣은 단어를 정확

하게 알아들었다.

패리시는 만상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레디 선장의 추측은 틀린 것이다. 일

개 토착 야만족 범죄조직의 깡패가 시도할 수 있는 교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매카트니 자작의 바람대로 국제 감각을 보유하고 정보력을 갖추

었으며, 이들은 군인이거나 관리, 혹은 그와 긴밀한 연줄이 있는 자들이다.

나무라기는 힘든 결론이었다.

패리시는 여기 있는 조선인을 전부 죽여 살인멸구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싸우

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한 놈도 못 도망치게 하기에는 인원이 적다.

시준도 예의를 알았기에 아편 앞에 ‘당신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까지는 덧붙

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패리시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래 진실일수

록 감당하기 어렵다.

시준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 고개를 돌려 차형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고

민하는 듯했지만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방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준은 패리시에게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 신사적으로 나와 준다면 당신들이 아까 말한 대로……. ‘거래’를 할 수

도 있습니다만. 어떠신지요?”

용천 부사 최조악(崔朝岳)과 의주 부윤 서유구(徐有榘)의 급한 연명 장계가

비변사(備邊司)에 접수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자신을 일컫기를 불랑국(佛浪國, 프랑스)의 상자(商子)라 하였습니

다. 불랑국은 영길리국과 이웃하고 있는 나라인데 효종조 때의 나선(羅禪)과

같아, 오곡을 심지 않고 고기를 날로 먹으며 피를 마시는 야만의 무리입니다.

이들은 사교(邪敎)로 백성들을 속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지난 신유

년과 신해년의 일(천주교 박해) 뒤에는 모두 이들이 있었습니다. 서양 나라들

이 대개 야소(耶蘇)의 도를 섬기지만 이들이 가장 극진하여, 오직 불랑국만이

경사(京師, 여기서는 북경)까지 큰돈을 들여 교사(敎士, 사제)를 파견함으로

써 그 뿌리를 내렸습니다.

(……)

용만(龍彎, 의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용천부와 의주 사람들이 큰 화포 소

리를 듣고 장자도에 나가 보았더니 장자도에는 요사이 봉성(鳳城)에서 도망하

였다는 청국의 죄인들이 있었는데, 무언가 다툼이 있었는지 불랑국 사람들이

청인(淸人)들을 함부로 칼로 찌르고 때리고 있었다 합니다.

백성들이 놀라 돌팔매를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함치자 그들은 배로 도

망쳤는데 이는 머릿수가 적었던 까닭입니다.

우리 백성으로 죽은 자는 넷인데 용만의 유학(幼學) 홍득주가 장사차 용천부

로 보낸 사람이 많아, 홍득주는 신에게 애통함을 호소하고 오직 주상 전하께

서 억울함을 풀어주시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용감히 싸워 빼앗아

올린 서양총(西洋銃)과 도검(刀劍) 등 여러 물목은 별단에 기록하였습니다.

적도(賊徒)는 배와 화포가 크고 총과 창이 정예한 것만 믿고, 상국(上國)에게

서 우리나라 모두의 바닷가와 섬, 물길과 파도의 부침, 해안의 방비에 대해

직접 보고 잴 권한을 얻었노라 방자하게 말하였다 하는데 그 거짓이 심하고

내뱉는 소리가 천지에 두려움이 없어 장계를 쓰면서도 손이 떨려올 지경입니다.

하민(下民)들이 다투어 떠드는 말을 다 믿기는 어려우나, 자칭 불랑국 수사라

하는 해적 두목 장모(張某, Jean을 말한다)가 보냈다는 서한에도 마찬가지의

내용이 진서로 되어 있었사온데 차마 위에 올릴 수 없는 패역무례(悖逆無禮)

한 말이라 관소에 두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아무리 죄인이라 하나 중국 백

성을 마음대로 해치고 우리 인민을 놀라게 한 죄는 명명백백한 것입니다.

적의 배가 태산과 같이 크고 병사들은 짐승처럼 사납다 하니, 바라건대 많은

수군과 전선을 평안도에 내리시어 변경의 근심을 없이 하소서. 봉성 우정청

(郵政廳)을 거쳐 피국(彼國, 여기서는 청나라)의 해조(該曹, 담당부서)에도

자세히 앞뒤를 갖추어 써서 서로 말썽이 없게 하는 일은 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이므로 다만 엎드려 명을 기다립니다.>

현재 조선의 지배자, 그러니까 정순왕후는 기어코 짜증을 내고 말았다.

“이 치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올해 초에 평양과 함흥에서 민가 수백 채가 타 버리는 큰불이

났다. 시시각각 죄어오는 위기감에 긴장하던 소론(少論)와 남인들은 ‘여주(女

主)가 활개쳐서 음양의 조화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두고 하늘이 노하였다’는

둥 아주 제멋대로 지껄이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재이설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은 조선에서는 정순왕후의 철렴(撤簾)도 고

려해보아야 하는 상황이며, 실제로 서울에까지 재해가 미치자 올해 겨울 끝내

정순왕후는 수렴을 거둔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이후의 수렴 회복 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코 자의적으

로 철렴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국내의 피해도 수습이 안 된 상황에서 웬 오랑캐들이 지경을 침범했다

고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보통 변경이 아니라 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압록강 장자도

에서 청국 사람 이십여 명이 죽었다. 당시 청나라 죄인들 몇몇을 압송하는 데

에도 상당히 골치를 썩여야 했던 조선 정부로서는 하늘이 노래진다고밖에 말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대국의 진노를 사 심각한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 조정은 고민에 빠

졌다. 그리고 그 고민의 원인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

다’는 것이었다.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사상자를 빼고는 장계에 참말은 하

나도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 막 나폴레옹 전쟁의 깃발을 올렸을 프랑스 사람

들이 들었으면 과연 악독한 영국놈들이라고 뒷목을 잡았을 조작이었다.

시준이 패리시 대위, 그리고 레디 선장과 거래하여 도출해 낸 내용은 대략 장

계와 비슷했다.

지역의 강력한 유력자인 것처럼 꾸민 만상들은 동인도 회사의 약탈 시도 행위

를 발설하지 않으며, 그들을 프랑스인으로 속여 조정에 보고해 둔다. 세계사

전문가는 아니어도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 정도는 아는 시준의 조언하에 꾸민

계획이었다.

‘네가 어찌 그리 서양 나라들에 대해 잘 아느냐?’

급히 달려온 홍득주의 물음에 시준은 대답했다.

‘의주로 흘러드는 청의 책 중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말은 청나라 사람

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수상쩍기 그지없지만 실제로 시준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니 홍득주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시준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준은 이 기

회에 아예 영국 배에 타서 조선을 뜨자는 생각마저도 해 보았지만 홍득주는

레디가 요청한 해로 안내를 거절했다. 만상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큰 위험부담

을 지는 일이다.

호되게 당한 레디 선장도 욕심을 더 부리진 않았다. 자신들의 실수를 없던 것

처럼 만회하고 추후에 다시 ‘프랑스의 사악한 식민주의를 정의의 이름으로 제

지하는’ 영국인들로서 올 수 있으니 이쯤에서 만족했다.

대신 동인도 회사는 평안도의 양민을 손대거나 겁략하지 않으며, 중국인에게

못 판 홍삼을 고가에 사들였다. 또한 조정의 눈을 속일 증거품으로 삼아야 하

니 배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산 소화기와 칼 몇 자루를 내어주었다.

시준은 이때부터 만상의 무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새 의주의 서양

전문가로 출세한 그는 홍득주에게 다시 조언했다.

‘두 자루의 총과 세 자루의 검은 조정에 바치되, 나머지 여덟 자루 총과 영길

리 사람들의 총, 그리고 칼은 잘 비장해 두십시오. 반드시 후일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병장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네 어찌 주인을 공연히 의심받게 하려 하느냐?’

‘박도가 조총이 된다 한들 더 의심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또, 장사치란 원래

의심받건 신임받건 권세 있는 자의 손가락질 한 번에 적몰되고 맞아 죽는 것

이 예사인데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어린 녀석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 방정맞은 주둥이를 조심하지 못할까.’

그렇게 타박은 주었으나 홍득주도 시준의 말을 옳다 여겼다. 그래서 그는 시

준이 아직 관록 모자라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권력자들과의 연계에 매진했다.

용천 부사와 의주 부윤은 가까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눈치를 채었으나 그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장자도의 밀매를 적발하지 못한 주제에 조선인이

청인을 죽였다는 대형 사고를 공론화하면 관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모가지가

날아간다.

특히 일전 변경 보냈다고 삐쳐서 뻗대고 임지에 안 가다가 조직의 쓴맛을 볼

뻔한 의주 부윤 서유구는 또다시 밉보이게 되면 상당히 곤란했다. 거기에 홍

득주가 뿌린 재물과 여러 인맥이 합쳐지니 이런 대규모 기군망상이 완성된 것

이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이 그리 쉽게 속을 청맹과니였으면 조선은 훨씬 일찍 망

했을 터이다. 예조 판서 윤광보(尹光普)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사대(事大)와 관계되므로 소홀히 살필 수 없습니다. 미관첨사(彌串

僉使) 한석기(韓錫箕)는 제때 도달하지 못하여 오랑캐가 그대로 달아나게 한

죄가 있으므로 파직이 마땅하다고 하나, 바닷가를 재러 왔다면서 공연히 싸움

질만 하고 관헌이 문정하기 전에 달아난 적도들도 앞뒤가 수상합니다. 모든

일을 오직 서토(西土) 하민들의 입으로 들을 수밖에 없으니 어찌 사리를 분별

하겠습니까? 유학 홍득주 외 관계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거짓을 말하지 못

하도록 엄히 묻되, 그 연후에야 대국에 글을 보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고 하여 다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심지어 윤광보의 말

이 정론이라는 것을 정순왕후를 비롯한 모두가 아는 상황이라도 그렇다.

시준은, 그리고 홍득주는 서울 조정에서 이 일을 자기들이 꾸민 대로 덮어 둘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서유구와 비슷하다. 만에 하나 조선인들이 청인을 죽인 것이었으면 조

선은 그날로 망할 수도 있다. 목숨 값이 헐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청도 엄연히

자국민을 보호하는 나라이며 이 일은 중국인들이 목숨보다 중시하는 체면에

직접 연관된다.

요 3년 사이 오만가지 고관을 거쳐 지금은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어 있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그것을 암시했다.

“무릇 사체(事體)에서는 옛일을 살피면 앞날을 짐작할 수 있고, 사람의 품성

을 살피면 그가 할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불랑국은 예의도덕이 금수와 같아

말은 좋은 교(敎)를 퍼뜨린다 하지만 실상은 백성의 도의를 흩고 그 사이에

군병(軍兵)과 행상(行商)을 넣어 이득을 취할 생각뿐인데 저 신유년의 일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도 능히 그들이 할 만한 짓인 것입니다. 다만 연

이은 재해로 나라가 소란하고, 민심이 동요할 수 있어 가혹한 형벌과 색적(索

敵)은 미편합니다.

또 백성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정도를 지킨 이번 일로 보면, 어찌 선대왕께

서 내리신 ‘정학(正學)이 바로서면 사학(邪學)은 스러진다’는 윤음이 옳지 않

다 하겠습니까? 나라의 아랫사람들조차 선대왕의 지극한 덕에 교화된 바가 이

토록 크니, 오히려 상을 내려 위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몰수한 병장기 등을

증거로 올리면 피국에서도 따로 힐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괜히 수풀을 들쑤셔 뱀을 놀라게 하지[打草驚蛇] 말고 입 다물어라. 반대하는

자는 선대왕 정종(정조)의 교화를 부정하는 자다. 어차피 무슨 죄를 저질렀다

한들 놀랄 것 없는 것이 저 금수와 같은 서양인들. 누가 의심하겠는가?

김조순의 말을 못 알아들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순왕후도 당연히 거기에

찬성했다.

다만 이 대박청래(大舶請來)가 강력히 의심되는 사건에서 천주교도가 무사히

지나갈 수는 없었기에 원래 역사의 관대했던 김조순식(式) 천주교 정책과 달

리 조선의 천주교도 색출 자체는 엄해졌다.

영국, 의주, 서울의 의지가 합쳐지자 별달리 방해물은 없었다. 아무튼 프랑스

인이 나쁜 놈들이다. 곧 의주에서 봉성 간에 사람과 말이 바쁘게 오갔고, 의

주 상인들도 좀 재미를 보게 되었다.

레디 선장도 이대로 해로 측량을 강행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왐포아로 돌아가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동인도 회사 또한 레디 선장의 임

기응변을 평가하여 계약을 연장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정리하자면, 날벼락을 맞은 북경 교구의 선교사들만 빼고 모두가 행복했다.

작가의 말

1. 미국 인삼은 독립전쟁 이전부터 중국에 수출되었습니다. 유명한 '중국 황후' 호의 항해도 있고.. 당시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은 중국에 하나도 수출을 못하는데 우리만이 수출품이 있어서 다행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영국을 비웃었다고 하지요. 다만 고려인삼보다 한끗발 낮은 취급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4. 용만(龍彎)의 물굽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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