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3. 대박청래(大舶請來)(1)
예의가 서면 귀천의 차등이 있게 되고 음악의 문체가 같게 되면 아래위가 화
합한다[禮義立 則貴賤等矣 樂文同 則上下和矣, 『예기』 ].
전근대 유교 문화권에서의 예악은 단순히 행사의 정교한 법식과 악기의 교묘
한 음률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유럽의 기독교 철학처럼, 봉건
신분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였고 모든 종류의 교육을 포괄할 수 있는 학문
체계의 기초다.
그러므로 ‘무작(舞勺, 13세 때 배우는 춤)의 나이를 넘지 못했다’는 것은 조
선국 23대 국왕 이공(李玜, 순조)이 수렴청정 반교문(頒敎文)에서 할 수 있는
올바른 겸양이었다.
혹은, 이 명문을 꾸민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붓끝으로 자아낸 운치 있는
권력 조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공은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반교문이라 예의상 보여준 신하들 앞에서 물었다.
“읽어 보니 대왕대비 전하(정순왕후 김씨)께서는 허여(許與)하셨던 듯한데 맞
는가?”
이렇게 하나마나한 질문을 하는 것도 허수아비 왕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다. 아
마도 곧 영의정의 될 좌의정 심환지가 고개를 숙였다.
“신등이 모두 합사(合辭, 한목소리)로써 간절하게 청한 것이 열 차례이나, 대
왕대비 전하의 겸양하는 덕이 지극하시어 누차 거절하시다가 끝내 자애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사직의 복이로다. 내 나이 어리니 무엇을 알겠는가. 대왕대비 전하와 원상
(院相)들의 논의에 그대로 따르겠다.”
4백 년의 조선국 역사상 네 번째로, 구중궁궐의 여인이 발을 치고 정사를 함
께 듣는[垂簾聽政] 결단이 물 흐르듯 성사되었다. 평균을 내 보면 백 년이니
말 그대로 세기의 사건이었다.
이때쯤 해서 당연히 나와 줘야 되는 소리 역시 물 흐르듯 따라나왔다.
“주상 전하께서 영명하시기 그지없으니 신등은 이 하늘이 무너지는[天崩] 슬
픔에도 불구하고 감격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어린 이공은 쟁쟁한 노대신들 사이에 앉아 있는 각신(閣臣) 하나를 바라보았
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조순(金祖淳)이었다.
이공의 바람과 다르게, 김조순은 왕에게 무언가를 진언하지도 않았고 예비 사
위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왕 앞에서의 당연한
자세대로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공은 아버지 이산과 다르게 그런 상태에서도 신하들의 의중을 파악
할 수 있을 만한 관록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공은 여기에서 자기가 영돈
녕부사에게 따로 윤음을 내려도 되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었다.
김조순은 선왕이 안배해 준 그의 장인이자 후세를 부탁하며 남겨준 신하[遺
臣]였다. 어린 이공에게 있어 김조순은 왕실을 옹위하고 반석을 제공해 줄 중
요한 인물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국구(國舅)의 지위에 의해 지탱되는 것. 이산은 세자의 가례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지금 김조순의 지위는 선왕의 낙점으로
만 이루어진 모호한 것이다.
어린 이공은 그 이상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으나, 지금 김조순과 정순왕후는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실제 그렇기 때문에 김조순은 두 번이나 사직하고 정순왕후는 그에게 군권까
지 맡겨 가며 붙잡는다. 파고 들어가면 훨씬 복잡한 지역과 가문간 이권의 엇
갈림이 있지만, 표면적으로만 얼른 봐도 11살짜리가 모두 이해하기는 힘든 일
이다.
이공은 어느새 자신이 죽은 부친의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 뒤의 일 또한 부친상이자 국상이 무색해질 만큼의 풍운이었다. 우선 3년의
수렴 기간 동안 김조순은 병조판서를 거쳐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으로서 일
대 권세가가 되었다. 안동 김씨 백 년 세도의 시작이었다.
왕의 친위군이었던 장용영은 해체되어 분속되었고, 다방면으로 발생하는 재정
악화를 견디지 못한 조정은 6만 6천에 달하는 공노비를 일거 해방시켜 자유와
세 부담을 한꺼번에 선사했다. 4백 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했던 조선이라
는 나라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도 요동의 조짐이 있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 시
기, 명주천에 글을 써서[帛書] 큰 배를 이끌려[大舶請來] 했던 황사영(黃嗣
永)은 오히려 조선 천주교를 거의 멸종시켰다.
황사영과 조선 천주교인들이야 유럽인들이 포교의 열정에 넘쳐 당장 군함을
끌고 올 거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파리 외방전교회와 북경 주교 알렉산데르
드 구베아(Alexander de Gouvea)는 조금 더 현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천주교 문제는 잠시 잠잠해질 일이다. 하지만
10년 전쯤 일어났던 단 하나의 별 것 아닌 자연 현상과 그에 깊은 인상을 받
은 영국 사람 – 그것도 지금은 죽은 – 때문에 역사는 바뀌게 되었다.
청 가경 8년(서기 1803년), 조선국 평안도 용천부 인근.
장자도(獐子島)는 현대의 평안북도 신도군, 그러니까 압록강 최하류에 있는
섬이다. 강이 쌓아올린 이 퇴적지는 조선과 청의 접경이면서도 관의 손이 얼
른 닿기 힘든 곳이라 무법자와 밀수꾼, 도망 범죄자에게 매우 사랑받았다.
순조 초기에 청의 압력으로 이 문제를 인지하고 진(鎭)을 설치하지만 나중에
사라진다. 그리고 지금은 그 문제가 불거지기 불과 한두 달 전이었다.
그래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군함인 넵튠(Neptune)의 선장 존 레디(John
Reddie)는 이 바다가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것도 없는 깡촌에 매카트니 자작은 왜 그리 신경을 썼는지 모르
겠군.”
그 말은 승선해 있던 제임스 딘위디(James Dinwiddie)로 하여금 뭔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기계 공학과 천문학, 수학의 전문가
로서 10년 전 매카트니 사절단에 동행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작고한 자작 각하의 고려는 면밀한 것입니다. 저 거대한 중국을 흔들고, 러
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면에서 조선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지요.”
레디 선장은 이죽거리며 파이프를 물었다.
“말이 모순되지 않소. 지금 러시아를 막아서고 있는 것은 중국이오. 조선을
이용해 중국을 불안하게 하여 러시아가 아무르강 남쪽으로 내려올 기회를 제
공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중국을 돕는 게 낫지.”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아직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를 점거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디 선장의 말은 일리 있는 것이었다. 딘위디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번 더
반박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중국 무역 조건은 맞출 수 없게 됩니다. 이
항해가 매카트니 자작 한 사람만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
니겠지요? 인도의 회사령(會士領)은 솔직히 이제 위태롭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국가적 사업을 시도했다가 휘청이게 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제 새
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딘위디는 그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레디 선장은 어디까지나 고용된 사람이라 동인도 회사에 대한 애사심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또한 이 항해가 동인도 회사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하
다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시대가 바뀌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2세기 전 초탄을 쏘아올린 상
인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규모와 내실을 모두 거대하고 정교하게 다진 ‘제
국’은 충분히 그 역할을 대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레디 선장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었다.
“무역 조건? 왜 맞출 수 없지? 왐포아(Whampoa, 여기서는 파저우 인근)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회사 소속’ 배 한 척에 맞설 만한 배를 하나라도 보
았소? 내 장담하지. 이 배 한 척이면 페킹을 들이치고 황제를 개처럼 줄에 묶
어 끌고 올 수도 있소.”
딘위디는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황제가 그들의 작은 군함에 직접 타고
지휘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 안 된다. 실제로도, 원 역사의 넵튠은 불과 4년
뒤 다시 왐포아로 돌아왔다가 폭동을 겪은 뒤, 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중
국인 살해범을 내어준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이 없는 지금, 과거 이 지역에서 프랑스 함대를 멋지게
쫓아냈던 전함 넵튠의 위용은 그런 만용을 부릴 만도 했다.
1,470톤에 달하는 거체, 32문에 달하는 12파운드와 6파운드 주포는 이 극동아
시아의 미개인들이 상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속국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의 시골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듯한 광경일 것이라는 점이야 딘위디 역시
동감이었다.
레디 선장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젠장할. 원래 지금쯤이면 난 브리스톨에서 돈이나 세고 있었어야 한다고. 이
짜증을 풀기에는 딱 적당하지. 어디 해볼까? 원하는 게 조선이라면 더 남쪽으
로 내려가지요. 거기에 이들의 왕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딘위디는 그쯤에서 선장을 말렸다. 아마 레디 선장이 원하는 것도 그것일 테니까.
“잊으셨습니까, 선장? 무력 사용은 절대 금지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조선 해
안에 대한 측량과 해로의 탐사예요. 우리는 전쟁에 관한 어떤 권한도 부여받
고 있지 않습니다. 저들이 평화적으로 통상하고자 한다면 회사 차원의 각서
(Memorandum) 정도만을 교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거야 문명인을 상대로 할 때 얘기지. 만약 조선인들이 여기로 화살이라도
쏘아댄다면 나는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을 명령할 거요. 이거야 원……. 지
루한 항해가 되겠군.”
딘위디는 그것이 그냥 해 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레디 선장도 마음
속으로는 동의했다. 그러니까, 여섯 시간 후까지는 그랬다.
이제 열 살이 된 시준은 ‘꽤 똘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명색이 대방(大房) -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 인
홍득주의 얼굴을 보고 일할 기회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그 아래에서 지역 유
지 체면에 나서기는 뭣한 일들을 도맡아하는 비방(裨房, 부두목쯤 되는 직위)
차형기(車亨基)의 지시를 받았다.
험악한 시대 상황상 소위 상단(商團)이라 하는 무리는 폭력 조직과 분간하기
힘들다. 그래서 남에게 떳떳하기는 힘들지만 꼭 필요하기는 한 어둠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방면에서 홍득주의 많은 신뢰를 받는 사람이 차형기였다. 실록에야
홍경래의 난 때 의연금을 낸 숙천(肅川) 향인(鄕人) 중 한 명으로 간략하게
기록되지만 이때부터 홍득주와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차형기는 오늘도 장자도에서 비밀스러운 거래를 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는 장
사치 겸 폭력배치고는 자못 위엄 있게 사방을 둘러보며 바다와 강이 뒤섞인
이곳의 내음을 맡았다.
그러다가 자기 옆에 사환(使喚)처럼 따라붙은 시준을 돌아보고 물었다.
“다 쌓아 놨느냐?”
“예, 비방 나리. 틀림없이 열 상자에 여섯 근씩 홍삼 육십 근이 담겨 있습니다.”
시준은 자기가 직접 엮어 만든 수첩을 들고 그렇게 대답했다. 키는 나이에 비
해 서너 살쯤 더 커 보이지만 팔랑거리는 댕기머리 하며 여물지 못한 목소리
역시 아직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조선 팔도에 이 나이 어린아이로서 이 정도 재물을 논하는 아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이 시대 대청 홍삼 연간 무역량의 절반에 달하는 양이다.
돈으로 바꾸면 조선 정부가 정한 공식 국내 가격만 해도 천은(天銀) 6천 냥.
당연히 실 거래가는 그 몇 배에 달한다.
밀무역이라고는 해도, 아니, 밀무역이기 때문에 이 정도 대량을 한 번에 거래
하는 홍득주의 위세를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큰 건에 따라붙는 여러 부수적 행정 소요를 무사히 처리한
시준의 성장도 족히 짐작할 만했다.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태 전 글을 가장 먼저 깨쳐 다른 고아보다 조금 높은 지위로 올라갔을 때,
시준 역시 처음에는 여러 가지 ‘후진적’인 조선의 문물을 소소하게 개혁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조선 사람들을 너무 깔본 것이었다. 이세계 천재의 길은 쉽지 않
았다.
예를 들어, 야심차게 복식부기(複式簿記)를 가지고 온 시준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조선인들이 그것을 써 왔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단지 자기가 그
게 복식부기인 줄도 못 알아보았을 뿐이다.
당시 시준은 차근차근 다시 시작했다. 그를 여태까지 죽지 않고, 또 미치지
않게 해 준 ‘복지 혜택’이 소소한 도움을 주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역사의
지식보다 더 쓸모가 있었다.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자. 역사 쪽은 옛날 시험 볼 때 외운 것들로 어떻게
버텨 봐야지.’
시준이 과거 고심 끝에 선택한 ‘혜택’을 포괄적으로 요약하면 심기체(心技體)
전체에 걸친 강건하면서도 유연한 자질. 그것은 지유에게 보여주었던 뛰어난
손재주나 지치지 않는 체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굳센 심지와 뛰어난 오성은 그의 경험과 맞물려 금세 해결책을 찾아냈다.
첫 번째는 역시 수를 다루는 일이었다.
다들 타박하는 와중에 시준이 꿋꿋하게 쓴 아라비아 숫자는 주산 교육의 마지
막 세대인 그의 행운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다만 명색이 상단이니만큼 암산과 암기쯤이야 현대인인 시준도 놀랄 만한 자
들이 많았다. 전근대인의 두뇌 능력은 어떤 면에서 문명의 대가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현대인보다 뛰어난 면이 많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의 시준이 어릴 때만 해도 사업 한다는 사람들은 수백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지만 그가 입직했을 무렵에는 자기 가족 전화번
호도 잊어버리는 사람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계산속도 자체는 별 빛을 못 보았지만 홍득주는 시준의 숫자가 암호로
써 쓸모 있겠다고 판단했다. 곧 홍득주 패거리의 비밀 장부는 모두 아라비아
숫자를 쓰게 되었다.
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10년간의 공무원 재직이었다.
비록 지금 다루는 것은 잡일이라 해도, 기록에는 사소한 것까지도 번호와 제
목을 붙인다. 속사(屬使)들의 번거롭다는 투덜거림이나 타박, 심지어 압력에
도 불구하고 양식은 반드시 한 가지로 통일하며 예외는 없다. 예외를 둘 만큼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통일 안에서의 분류는 정리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그 결과로 시준은 홍득주
와 차형기가 원하는 기록이며 장부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갖다 바칠 수 있
었으며 보고할 때 절대 실수나 누락이 없었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정도였다. 어쨌든 그래서 시준은 이 밀거래에도 따라나올
만큼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이곳에 동원하는 사람이며 배, 그것에 딸려오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체계적으로 동원하는 일도 모두 시준의 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부터는 어른들의 일이다. 차형기는 시준에게 턱
짓을 했다.
“수고했다. 이제 애는 저기로 가 있어라.”
시준은 호기심을 보이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인생 철학에 어긋나
는 일이다. 그는 조용히 아무 말 하지 않고 물러났다.
곧 저쪽에서 시준의 댕기와 비슷한 머리꼬리를 늘어뜨린, 그러나 이마부터 뒤
통수까지가 깨끗하게 밀린 청인(淸人)들이 나타났다.
“근에 팔백 냥이라, 그건 얘기가 다르지 않소? 분명히 육백 냥이라 듣고 왔는데.”
이름을 초수(樵豎)라고 하는 – 필시 별명이리라 – 한인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
다. 처음에는 근에 칠백 냥으로 정하고 사람을 보냈었던 차형기는 코웃음을
쳤다. 결국 양쪽 모두 후려칠 생각을 한 셈이다.
“칠백오십 냥까지는 타협을 볼 수 있소. 그 밑으로 팔아넘길 것 같으면 우리
는 저쪽 포씨(鮑氏)네 패거리와 다시 얘기해 보지.”
“아무리 허풍이라곤 해도 혀는 몸을 치는 도끼라. 조심하는 게 좋겠소. 육백
오십 냥.”
“沒門(안 돼). 지금 누구를 만만히 보는 거요? 유리창(琉璃廠)에서는 물정 모
르는 유학(幼學)들이 붉은 도라지도 천금을 주고 산다는 이야기를 모를 줄 아
는가? 그런 헐값에 뺏기느니 자리에서 죄다 태워 버리고 말지.”
차형기는 그러면서 정말 태울 것처럼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옆의 젊은이 하나
가 험악한 얼굴로 자작나무 껍질에 부싯돌을 쳤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그
비싼 홍삼 상자 바로 옆에 들이대어지자 중국인들의 인상도 구겨졌다.
초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강아지를 부르듯 혀를 똑 하고 찼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듯이 주변의 장정들이 일제히 목을 풀거나 차고 온 박도(朴刀)며
몽둥이를 어루만졌다.
“이제 와서는 돈보다는 체면이 더 중하게 되었소. 우리 아이들은 대대로 포씨
네에게 처자를 잃거나 재물을 뺏기고 구타당한 자가 적지 않은데 그 앞에서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떠벌렸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바라건대 현형(賢兄)은
몸 간수 잘 하소.”
초수는 다소 욕심을 부렸다. 거래선을 다른 조직인 포씨에게로 빼앗기지 않으
려면 이번 거래에 양보해야 하고, 아니라면 만상의 으름장을 어느 정도 인정
해 줘야 하는데 둘 다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차형기는 그런 욕심을 다 받아줄 정도로 마음씨 좋은 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말로 벽력처럼 소리쳤다.
“총각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뒤에서 돌아앉아 속세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술잔 기울이고 있던 청년 하나
가 부스스 일어났다. 현대인인 시준마저도 감탄할 만한 체격과 팔뚝, 그리고
얼굴과 온몸에 새겨진 흉터는 이 사내가 가진 폭력의 정도를 짐작하게 했다.
차형기의 말대로 아직까지 돈 없어 장가를 못 가고 – 그것이 정말 이름의 연
원인지도 모른다 – 상단 주먹잡이로 붙어 있던 홍총각(洪總角)이었다.
첨언하자면 그 이름은, 홍경래의 난 때 선봉장으로 맹위를 떨쳐 관군을 벌벌
떨게 했던 용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작가의 말
1. 차형기 또한 실록에서 홍득주와 같이 언급되는 부호입니다. 홍경래의 난 때 역시 관군의 편에 섰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홍득주의 아래 있었다는 부분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홍총각 역시 집안 문제로 장가를 못 갔다는 부분은 사실이나, 홍득주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창작입니다.
3. 대박청래(大舶請來)(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