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3화 (3/284)

3화

2. 여긴 어디 나는 누구(1)

청 건륭 59년(서기 1794년), 조선국 의주부(義州府).

21세기를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아이가 출생만으로 축복을 받은 것은 그리 오

래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활이 대체로 참혹했던 전근대라면 특기할 것도 없다. 왕실이라던

가 후계를 고대하던 반가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는 죽지 않고

큰다면 노동력이 하나 늘어난 정도였고 그 전에는 그냥 군식구였다.

거기에다 사바세계에는 괴상한 풍습이 많아서 숨 쉬는 데만도 부담이 들어간다.

자식이 하나 태어나면 군포(軍布)는 세 명어치가 징수되니 백성들은 애와 한

숨이 같이 나올 지경. 현 시점에서 능신(能臣)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약용(丁若鏞)이 쓴 시가 바로 애절양(哀絶陽)이다.

가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직접 아이를 낳는 사람들의 고생은 더하다. 딱히

이름을 불릴 일도 없어 그저 건넛말 돌밭집 그 아낙네, 혹은 정(鄭)씨네 며느

리라 불리는 여인은 오늘도 밭일을 하던 중 진통을 느끼고 들어갔다.

이웃의 노파를 불러다가 현대 의사들이라면 기겁할 만한 위생 상태로 출산을

한 여인은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자마자 바로 밭에 다시 나갔다.

아이나 산모 중 하나, 혹은 둘 다 죽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산후조리였지만

이 시대에는 일상이다.

남편은 대충 쟁기 지고 끄는 큰일만 해주고 – 소 가진 집이 그리 많지는 않다

– 뒤주에서 보리쌀 됫박이나 끌어다가 나갔다. 말이야 읍내 구경 간다 하지만

노름판일 게 뻔하다. 여인은 남편이 곡식은 탕진하더라도 됫박이나 건사해 왔

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나마 깨끗한 강보에 싸여 뉘인 아기는 그런 사정을 알 도리가 없다. 자기가

이제부터 얼마나 엄혹한 상황을 헤쳐가야 하는지 알기에는 아기의 뇌가 너무

불완전했고 감각 기관도 불충분했다.

아기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기 머릿속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뿐이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좌표 설정에 약간 오류가 있긴 했지만 결국

무사히 배치되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가능하면 다시 만나고 싶군요. 문의

사항은 언제든 연락 주시면 친절하게 상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시준의 지식과 경험은 아기의 뇌에 걸맞은 규모와 복잡

성으로 축소되었다. 곧 그는 기본적 욕구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14세기의 조선이라면 모를까 18세기의 조선은 세계 기준으로 ‘행정이 충실한’

나라라고 말해 주기는 힘들다. 조선이 쇠퇴했다기보다 다른 지역, 특히 유럽

이 거대한 세계제국과 군대, 산업을 다스릴 관료제를 급격히 발달시켰기 때문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어디 가지는 않아서, 조선의 관리들 또한 최소

한 자기들이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호조(戶曹) 낭관을 하고 있는 박일원(朴一源)은 『탁지지(度支

志)』에서 조선의 파악되지 않는 호구를 약 3할로 추산했다.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가 존재조차 인지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다.

모두에게 같은 절차로 제공되는 출생 신고와 호적 등록, 엄정히 관리되는 장

부 인계는 꿈도 꿀 수 없다. 어느 집에서 애가 났다는 이야기는 동네 소문으

로 이속(吏屬)에게 들어갈 뿐이요, 곧 서원(書員) 하나가 헛기침하며 찾아와

서 말할 뿐이다.

“자네 식구가 늘었으니 올 가을부턴 군포도 한 필 더 내야 하네. 에, 그러니

까 여기 똑똑히 적혀 있는 대로 다섯 필이로구먼.”

노름판에서 쌍륙에 돈 날리고 옷까지 잡힌 채 돌아온 의주 백성 정만동(鄭滿

童)은 별로 크지도 않던 득남의 기쁨이 한순간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는 애원해 보았다.

“서원 나리. 애가 삼칠일도 안 지났습니다요. 언제 뒈질지 모르는 애새끼인데

군포는 웬말입니까. 죽은 저 애 형과 누이 몫도 지난해에 거둬 가고선 장부에

서 지워 주겠다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살펴 줍시오.”

“어허. 그거야 나라의 문권(文券)이 엄정하여 도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수령이 허락해야 감히 한 획이라도 고치는 것이지. 아무튼

난 말했네. 부부 금슬 좋은 것을 엉뚱한 데 타발하지 말고 법대로 하게.”

의주 부윤은 장부를 본 적도 없으며, 어차피 공식 장부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아전들이 제 맘대로 빼앗아 토색하는 것이고, 법대로 하자면 열여섯 살이 안

된 아이에게 군포를 징수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만동의 입장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야 애를 어디 파묻어서라도 돈을 안 내고

싶었지만 안 될 말이다. 양심의 가책이나 부자의 정 따위 때문이 아니라 관청

은 죽은 사람한테도 돈을 우려내기 때문이다.

결국 보통 사람들의 슬픈 습성대로, 정만동은 만만한 곳에 화풀이를 할 수밖

에 없었다. 그는 군포 내는 데 보탤 수도 있었을 곡식을 홧술로 바꾸고 그것

을 곧 막대한 취기와 분노로 다시 교환했다.

그러고는 방 안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어가, 열이 나서 누워 있던 부인을 걷어찼다.

“이년! 이 원수같은 것이 애새끼는 털썩털썩 싸질러서 화를 만들어 놓고 팔자

편하게 누워 있으면 제일이야!”

“왜, 왜 그래요? 아악! 사람 죽네!”

이 시대에는 사소한 상처로도 불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매카트니가 북

경의 풍광을 기록한 것처럼 당시 세계 최정상급 국가였던 중국에서조차 길거

리에 넘치느니 맹인이고 절름발이다. 그것도 운이 좋은 것이지 대부분은 재수

없으면 그냥 죽는다.

시준의 두 번째 모친도 비슷했다. 비위생적인 출산 환경 때문에 산욕열 증상

에 시달리는 와중 그렇게 얻어맞았으니 무사할 리 없다. 며칠 안가 시름시름

앓던 여인은 지저분한 방에서 목숨을 떨구었다. 비장함도 슬픔도 없는, 이 시

대 사람들 대부분과 같은 동물적 최후였다.

만동은 잠깐 후회했지만 마누라가 애 낳고 죽었다고 몇 군데 얘기해서 살인

혐의를 피한 뒤로는 그냥 잊어버렸다. 출산 후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

대라서 곧 이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아직 30년 가까이 남았고 정약용도 지금 동네 살인

사건을 수사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다. 조선 후기의 발달한 관찰과 자연과학으

로 멋지게 범죄를 밝혀내는 일화는 많지만 그것도 운 좋게 얻어걸려야 하는

거지 대부분은 이렇게 묻히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 사람들이 또 그렇게 삭막하지만은 않다. 곧 오다가다 들여다보는

이웃 사람들은 오지랖 반 걱정 반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보게. 만동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애는 누렇게 떴는데 술이나 마시고 있

으면 어찌하는가.”

“이런 제기럴, 남이사 상관 마쇼. 한 푼 도움도 안 되는 밥버러지이니 뒈지는

게 낫지. 저어기 강 쪽 갈대밭 문둥이들이 애새끼 몇 마리 사들인다더니만 거

기나 팔아버릴까 생각 중이오.”

“그게 사람이 할 말인가! 안 되겠네. 아무리 말 못하는 아이라도 이대로 생사

람 죽는 꼴은 못 보겠네. 우리가 데려가서 품앗이로 젖이라도 물려야지.”

“머슴으로 쓸 거면 돈푼이라도 쳐 주쇼. 헤헤……. 아직도 안 죽은 걸 보니 뼈

대는 튼튼할 겁니다.”

이웃 사람은 진절머리난다는 태도로 가져온 달걀 몇 꾸러미와 닭 한 마리를

던져놓았다. 아기 죽이나 쑤어 먹이라고 챙겨 왔더니만 애비부터가 글러먹었

으니 차라리 이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동은 기대하지 않았던 술이 굴러들

어오자 입이 벌어졌다.

시준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자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별로 극적이지도

않고 비장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그래서 무서운 일상이었다.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에 있어 흔히 순조와 철종의 이름이 따라나오지만,

그 두 왕을 전적인 책임자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다. 조선 세제의 문란

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양란, 또 양란을 논하자면 세조와 명종 시절까지 끌어

들어야 하는 일이다.

만동이 당했던 것처럼 입가에 노란 털도 벗지 못한 아이를 군적에 채워넣거나

[黃口簽丁],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하는[白骨徵布] 일은 그 전에도 규모

가 작을 뿐 있었다.

그러므로 후대에 조선 중흥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 조선국 제22대 국왕 이

산(李祘, 정조)의 시대에도 그런 일은 있었으며, 이산 역시 그것에 과하게 마

음 상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왕의 심려가 의주에 향해 있는 것은 맞았다. 왕은 신하들을 긴장하게 하

는 그의 호쾌한 문체로 유시(諭示)를 쓰고 있었다.

<떠난 일정을 따져보니 아마 의주 객관에 도착했을 듯한데 힘든 길을 가는 중

에 탈이나 없었는지? ……사행으로서의 책무를 더욱 정돈 신칙(申飭)하기에 마

음을 쓰고, 변경의 금령을 거듭 가다듬고 밝혀서 저 사람들로 하여금 전에 왔

다가 지금 또 다시 오는 훌륭한 정사(正使)임을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경에게 마음을 다해 바라는 바이며, 이어 조심조심 갔다가 평온하게 오기를

바란다.>

얼핏 보면 신하들과 필치로 재주 나누기 좋아하는 왕이 이번에도 별 뜻 없는

격려 서한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지정사(冬至正使) 황인점(黃仁點)

은 왕의 암시를 못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다.

일찍이 시월에 헌서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은 북경의 매카트니 사

절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으며, 그들이 청 조정에 바친 기기에 대해 치계(馳

啟)하였다.

광동 남쪽에 있다는 그 영길리국(英吉利國)에서 정사 마알침니(嗎戛????呢, 매

카트니)와 시당동(嘶噹㖦, 스턴튼)을 보내와 바친 기기는 ‘그 정묘함이 서양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평가되었다. 이는 조선에서 유럽인들의 기술

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고 영국의 새로운 문물을 그것과 비교할 수 있었음

을 의미한다.

조선이 청만큼 영국을 알지는 못했지만, 청이 영국을 경계한다는 것은 알았으

며 그들의 기술에도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황인점은 북경에서 관련된 소

식을 수집해 – 청심환 얼마간이면 충분할 터이다 – 왕에게 보고할 것이다.

다만 이산 역시 조선의 왕. 그 상상력은 조선 사람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

다. 물론 그런 것이 왕의 총명에 대한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

만 말이다.

그의 암시는 주로 서양 세력이 움직이는 북경의 정황에 대한 탐지, 그리고 엉

뚱한 일로 책잡히거나 조선이 서양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하는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타당한 일이다. 천주교는 아직 조선을 위협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이산은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입시해 있던 대사간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

事) 황승원(黃昇源)에게 말했다.

“경에게 동지사(同知事)의 위를 겸직시킨 나의 뜻을 아는가?”

황승원이 대답했다.

“신이 일찍이 전하께옵서 첫 정사를 보실 적에 천둥의 재변에 대해 아뢴 적이

있습니다. 근년에 회오리가 황해를 가로질러 용천부(龍川府, 현대의 룡천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말로 서도(西道)가 소란하였사온데, 아래위를 다잡고 덕

을 닦아 삼가고 또 삼가며 괴이한 재변을 물리치는 것이 미신(微臣)에게 특히

이르시는 뜻인 줄 아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매끄러운 대답은 이산을 만족시켰다. 그는 담뱃대를 들

어 친히 불을 당겼다.

“신해년의 일(1791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을 말한다)은 하나의 징표였을

뿐, 사이한 학문[邪學, 기독교]으로 백성에게 스며듦이 어찌 그 전에는 없었

겠는가. 나라가 열린 이후로 요참(謠讖)과 도술이 아주 없어진 적은 없다 하

지만 종당에는 비가 내려 불을 끄듯 모두 정학(正學) 앞에 사라졌지. 속기 쉬

운 백성들을 잘 가르쳐 다스리는 것이 나의 뜻한 바이다. 경은 특히 도덕과

조화를 살피는 데 정진하라.”

“다시 이르실 말이겠습니까. 전하. 분골쇄신하여 뜻을 받들겠나이다.”

황승원이 말을 이었다.

“명이 계셨으므로 시무(時務)를 아뢰겠습니다. 전하의 지극한 성총에 힘입어

영묘조(英廟朝, 영종, 후대의 영조) 때의 숙원(탕평을 말한다)이 순(舜)의 밭

고랑과 같이 정돈되었으니 이는 안이 깨끗한 것이요, 장용영(壯勇營)의 대오

와 규례가 정비되고 큰 성(수원 화성)도 힘써 짓고 있으니 이는 바깥이 튼튼

한 것입니다. 실로 성인의 때를 맞이했다 할 수 있겠으나, 다만 만무일실(萬

無一失)의 도로 상언하자면 근간에는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북방으로

흘러들어오는 못된 풍습을 경계해야 할 터입니다.”

이산이 특별히 아첨을 좋아하는 왕은 아니었으나 황승원의 말은 왕을 편안하

게 했다.

‘너는 모든 것을 잘하고 있다. 지금 신경 쓰는 사소한 일만 해결되면 완벽할

것이다. 천주교가 걸리적거린다는 점에서는 나도 동감한다.’

당시 조선의 배타적 시선은 유럽 자체라기보다는 기독교, 그중에서도 가톨릭

에 향해 있었다. 그것도 증오스러운 적이라는 표현보다는 귀찮은 불온 집단이

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하지만 평안도에서 관찰된 기이한 용오름은 왕의 심기에 아주 작은 흠을 만든

모양이었다. 황승원은 고개를 숙인 채로 왕을 관찰하는, 이 시대 신료라면 필

수 소양인 기술을 발휘했다.

이산의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했고 체구도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 많다

할 수 없는 나이에도 기력이 쇠한 것은 측신들이라면 느끼고 있었다.

황승원이 탕평이 완성되었다 말하였으나 그건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다. 어

떤 면에서 정조의 탕평은 조화가 아니라 평탄화에 가까웠으며 조정의 당색(黨

色)은 이미 물에 물 탄 듯 희미해졌다.

그리고 물은 단 한 방울의 먹만으로도 검게 물들일 수 있는 법이다.

왕이 직접 제어하는 다섯 명의 중신 –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전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총융사(摠戎使) 겸 장용영 제조

(提調) 정민시(鄭民始), 거기에 세 해 전 작고한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

善) – 과 그 무리는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 하

지만 왕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조정은 낫으로 풀을 베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 형세다. 만약 제초

(除草)하는 자가 없다면 옛 우익(右翼, 홍국영을 말한다)과 같은 세도(世道)

가 성할 터이다.’

그런 일을 왕이 모를 리는 없다. 그렇다면 후사가 염려될 것이 자명하다.

황승원은 왕이 어린 아들 – 얼마 안 가 세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

하다 –을 걱정하는 마음이 저 먼 변경까지 가 닿았다고 생각했다.

가톨릭은 조정으로서도 속 시원하게 박멸해 버리자니 여러 문제 – 당장 왕의

총신인 정약용에 대한 문제 등 – 가 걸린 일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영길리국의 일이라도 얻어 듣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황승원이 보기에 제왕은 대체(大體)를 조화해야 하지 그런 사소한 일

까지 골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왕이 중점을 두는 사업을 쓸데없다고 내칠 수

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황승원은 왕을 보좌하는 직분에 충실하여, 왕에게 간단한 길을 제시했다.

“의주를 지나는 사신들은 옛날부터 여덟 꾸러미[八包]의 삼(蔘)을 노자로 삼

게 하였사온데 지금까지 제도는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서양국(西洋國)의 사

세로 천심(天心, 황제의 생각)이 요동한다면 필시 우리와 친하려 들 것입니

다. 마침 근래 둔전의 세수(稅收)가 부족하여 여러 절목이 올라왔으니 개성과

의주의 장사하는 무리에게 명해, 사행길에 관헌들이 가져가는 삼의 매매에서

세를 거두면 또한 변경 방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신기한 해결책은 아니다. 그냥 북경이 신경 쓰이는데 뭔가 일 했다는 기

분을 주게 하는 정도의 제언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산에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왕은 초인이 아니고, 이런 복잡한 위안

도 필요한 법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책이 주효할 것 같으니, 묘당에서 논해 보는 것이 옳겠다.”

왕명은 즉각 실행되었다. 그러나 역사보다 조금 빠른 포삼제(包蔘制)의 논의

는 기대와 성과 둘 다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의주 만상(灣商)의 성장을 촉진한다거나 하는 바람직한 결과도 불러오기 힘들

었다. 어차피 조선의 대청 홍삼 무역에 있어 그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밀무역이었지 공무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만상 몇몇을 몰락하게 했다. 포삼제가 직접 사적 무역을 허락

하는 것이 아니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조정에서 잠매를 적발하고 세금을

물리자 그 조치는 여태까지 탈세로 재미 보던 상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그리고 시준의 인생에도 괘 많은 영향을 끼쳤다.

탕평의 완성, 세도의 경계, 그리고 붕괴 조짐을 보이는 군대와 재정은 제왕이

실로 천착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산은 어느 정도 모범적인 왕이었다.

그래서 의주의 어느 고아가 자기 정책의 결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가 알

바도 아니요, 알 수도 없었다.

작가의 말

1. 헌서 재자관이란 일종의 연락관입니다. 품계는 통상 그리 높지 않습니다. 홍택복이 보고한 기록에는 이름이 '마알침'과 '이시당동' 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마알침니(매카트니)'와 '시당동(스턴튼)'의 오기로 짐작되어 작중에서는 그렇게 표기했습니다.

2. 동지경연사 황승언은 정조 재위 초기 천둥의 예를 들며 정치에 대해 간언한 적이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직언을 자주 한 인물로 보이며, 흑산도에 유배 갔다 온 적도 있지요.

2. 여긴 어디 나는 누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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