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화 (2/284)
  • 2화

    1. 레디메이드 인생(2)

    홈페이지라는 말이 일종의 뒤틀린 유머라고 생각했기에 시준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 신청자란 게 무엇입니까?”

    “항상 이 부분이 문제인데, 그냥 대외용 법령이라도 만들어 둘까 고민하고 있

    답니다. 핫핫. 하지만 제 마음대로 외부 사안을 손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렇게만 말해 두지요. 업보[Karma]와 인과율(因果律)에 의한다고 하면 대강 당

    신들이 느낄 감상이 맞습니다.”

    시준은 점점 자기가 싸구려 장난에 놀아난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과율?”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인이 잘 먹고 잘 살다가 평화롭게 죽는 것을

    보며 어떤 초자연적인 정의는 없다고 느끼지요. 그러나 그건 찻잔이 식는 것

    을 보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는

    여기만이 아니니까요.”

    시준은 이 건방진 관리자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다중우주에 걸친 정의를 당신들이 관리한다는 겁니까? 그러니

    까 착하게 살아라. 악인은 우리가 처벌해 주겠다? 이 세상이 그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는데?”

    관리자는 잠깐 침묵했다. 비우호적인 제스처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시준은 그

    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감탄했다고 생각했다. 시준의 성격상 근거 없는 허세

    가 아니라 확고한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일을 오래 했지만 그것을 지적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

    는데, 그러면 조금 어려운 얘기를 해도 되겠군요.”

    관리자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서류철을 꺼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일종의 연극에 가깝습니다. 근삿값이라고 부르

    기에도 한참 먼 거죠. ‘저승’이라고 당신이 부르는 곳은 당연히 관료제로 돌

    아가지 않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말씀드린 겁

    니다.”

    시준은 괜히 반박했다고 생각했다. 신난 관리자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정의와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을 때린 자의 행동이 악하다

    고 평가되지 않더라도 그의 주먹이 다치는 것은 선악과 관계없는 일인 겁니

    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여기 태블릿을 보십시오. 지금부터는

    수식(數式)으로 설명을…….”

    시준은 손을 들어 관리자의 말을 막았다. 그의 경험상 여기서부터는 알아 봐

    야 민원인에게 이득 될 일이 없다. 민원인들은 혹시 뭐라도 약점을 잡을 수

    있을까 하여 꼬치꼬치 알려고 들지만 관리들이 그런 걸 가르쳐 줄 리는 없으

    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뭡니까? 내가 그 기회라는 것을 신청하는 대신, 저자가

    죽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얘기가 빨라 좋군요. 당신 같은 신청자와는 오래 대화해도 즐겁겠습니다.”

    시준은 아까의 감정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너무 진부하다. 어디의 사기당한

    악마도 아니고 영혼의 거래라는 것은 인류의 여명과 함께 우려먹은 소재가 아

    닌가?

    메피스토펠레스 역할에 심취하기로 한 모양인지, 관리자는 교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드리지요. 어렵지 않은 동의만 하면 됩니다. 저

    자의 목숨을 대신 바치겠노라고.”

    관리자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적혀 있을 거라는 시

    준의 예상과 달리 내용은 허탈하게도 관리자의 대사와 같았다.

    “하찮은 쾌락에 취해 날뛰다가 당신의 모든 인생을 부정하고 박살 낸 저 쓰레

    기 같은 자는 기적적이게도 멀쩡합니다. 화가 나지 않습니까? 설마 당신, 그

    렇다고 다른 희생자를 낼 수는 없다는 결벽주의자는 아니겠지요.”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오, 지금 무슨 ‘수고했네. 다른 사람이 죽는 이 버튼을 그럼 다른 완전한 타

    인에게 가져가도록 하지.’ 정도의 일을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그런 기만은

    없죠. 그가 죽음으로써 정산은 끝납니다. 당신이 대가를 치른 게 아니라, 당

    신이 당한 일에 대해 그가 대가를 치른 거죠.”

    시준은 다음 질문에 들어갔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겁니까? 저 꼴로 보건대 내가 살아

    나면 기적의 생환이라고 뉴스에도 실릴 법한데.”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죽었습니다. 생전의 인간관계나 쌓아둔 자산은 잊어버

    리십시오.”

    다소 차가워진 말투에 시준은 움찔했다. 관리자는 몇 가지 서류를 더 꺼내어

    놓았다.

    “간단히 말해, 당신도 예상하다시피 환생입니다. 규정에 따라 배치는 무작위

    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규정상 복지 대상자의 자격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혜

    택이 제공됩니다.”

    “혜택이요?”

    “예. 그런 상상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튼튼한 몸이나 빛나는 천재성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면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가지고 있든 단 한순간의 사고 때문에 전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그런지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군요. 어디, 주가나 복권 번

    호라도 미리 알고 태어난답니까?”

    “가능합니다만 별로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꼭 슈퍼볼을 굴린다거나

    마음 편하게 스마트폰으로 주식 투자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보

    장도 없거든요.”

    그 말대로 분쟁지역이나 극빈층에서 태어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

    다. 게임 캐릭터 만드는 듯한 분위기가 진지함을 약간 방해했지만, 시준은 그

    때부터 고민에 빠졌다.

    그의 인생은 완성되어야 했다. 가능하다면 태어날 때부터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시준은 자신의 죽음을 잊어버린 채로 관리자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첨언하자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에 무의미한 간격만이 채워지고, 시준은 다섯 장의 서류에

    서명했다. 관리자는 펜을 돌려받고 서류를 정리했다.

    “이것도 큰 의미는 없는 연극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야겠지요. 좋습니다. 이

    제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우리의 복지 대상자이며, 신청인에 대

    한 지원 사항을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평생 해 온 공무원 대신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거니와, 시준이 임용되었던 시대와 그가

    성인이 될 지금부터 2, 30년 뒤는 연금 혜택도 많은 차이가 난다.

    시준은 약간의 긴장감으로 집행을 기다렸다. 이런 불확실성은 그의 삶에서 꽤

    오래간만이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모험심이 재 아래의 숯불처럼 피어올랐다.

    깊이 생각했음에도 그가 어쩔 수 없는 3차원상의 지성체이기 때문에 고려하지

    못한 것은, ‘무작위 배치’가 꼭 공간에 국한된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기 1793년, 대청국 광동.

    초대 매카트니 백작(1st Earl Macartney),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는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모험가이고 유능한 외교관이며 전략적인 관리였다.

    매카트니는 평생 동안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면 바로 꼼꼼히 써 두기를 잊지

    않았다. 요 2년간의 사신행에서 그가 대청국의 허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첩

    자의 간사함보다 학자의 열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매카트니는 생각했다.

    광저우의 관리들이 이 HMS 라이온(Lion)의 짐을 임검하고 트집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매카트니를 간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하여도 반드시 세상 어딘가에는 비슷한 일이 있거든.

    그럴 때는 기록이 전범이 될 수 있네. 그런 수준에서의 이야기지. 중국의 관

    리들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쓸데없는 일에만 집요하군.”

    부사(副使)인 조지 레오나드 스턴튼 경(Sir George Leonard Staunton) 역시

    친우의 평가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번에 모든 분야의 전문가를 데리고 와서

    야심차게 추진한 중국 주재 영국 대사관 계획이 무산된다면 동인도 회사(EIC)

    의 신용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부사인 스턴튼 역시 의사이며 법률가, 식물학자이며 외교관이자 탐험가

    라는 복잡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에 걸맞은 교양도 갖추고 있었다. 스

    턴튼은 정사(正使)의 마음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어떡할까요? 항해 일지와 모든 기록물을 내놓으라는데. 우리 배에 감히 무력

    행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뻗대면 일정이 지체됩니다.”

    광저우의 하찮은 중국 함선과 관리들을 무시하고 출항을 강행하자는 말에 매

    카트니는 고개를 저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좋아할 자들은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정도뿐이야. 페킹(Peking, 베이징)의 성안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신나서 황제를 쑤석거리겠지.”

    “그렇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저들은 우리가 반란을 사주했다고 멋대로

    의심했을뿐더러 우리의 요구를 모조리 거절했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우리의

    힘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 사절단의 일에서 역사에 잘 알려진 건륭제의 삼궤구고두 요구와 그 거부만

    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양한 외교 안건을 주고받았으며, 건륭제와

    청 정부의 의심, 그러니까 얼마 전 티베트에서 맞닥뜨린 예상외의 분전이 영

    국의 지원에 의해 가능했다는 의혹도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스턴튼이 말한

    것은 그 일이었다.

    물론 영국은 관여한 바가 없었지만, 당시 중국도 마냥 세계정세에 대해 무지

    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영국인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았던 데다 매카

    트니를 상대로도 적극적으로 유럽 정세를 수집했다.

    “흠. 확실히 라이온과 힌도스탄(Hindostan)의 포를 합치면 100문에 가까우니

    자네 말대로 뚫고 나갈 수는 있네. 그러나 시기상조야.”

    매카트니는 그렇게 말하고 뱃머리에서 몸을 돌렸다. 그는 어딘가에 기록된 것

    을 – 필시 자기 일지이리라 – 그대로 받아 읊는 듯한 투로 말했다.

    “유능하며 방심치 않는 운전수가 끌고 온 과거 150년간의 중화 제국은 낡고

    상처투성이의 전함과 같다. 만약 무능한 인간이 갑판 위에 서서 지휘하게 되

    면, 이윽고 해안에 처박혀 흙먼지에 덮여 가겠지.”

    스턴튼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 할 때 매카트니는 그것을 끊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황제는 무능한 조타수가 아니야. 나에게 야만인의 저

    속한 예법을 강요한 것이나 서쪽의 일로 트집을 잡은 것은 모두 면밀한 정치

    적 고려이지 그저 오만과 무지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실제로 이 ‘건방진 오랑캐’들을 건륭제가 당당하게 물리친 일은 국내 정치의

    위상에서 적지 않은 권위 제고를 가져올 것이다. 국외에 대한 방위에 자신이

    있다면야 그 선택은 나쁘지 않다. 영국인들이 보기에 청 제국의 군사력은 형

    편없긴 했지만.

    매카트니가 이만 대화를 마무리짓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자네가 황제에게 받은 옷을 보여주고 을러대게. 저들이

    겁먹으면 그때 돈푼이나 쥐여 줘. 그러고 나서 쾌적하게 출항하자고.”

    스턴튼은 건륭제가 하사한 우스꽝스러운 의복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지시사항을 덧붙이려던 매카트니 경은 문득 움찔했다. 동북쪽 바다에서 뭔가

    이상한 게 보였기 때문이다. 좌우를 돌아보며 묻자 곧 고용한 중국인 선원에

    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용오름[Water Spout]입니다. 이 계절에 희한한 일이군요.”

    각종 자연과학에 박식했던 매카트니 경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오래, 그것도 이편에서는 구름 한 조각 떠 있지 않은 회오리가 있다

    는 말인가? 게다가 지금 계속 동북쪽으로 물러나는 것 같은데?”

    “그, 글쎄올시다. 저희도 여기 출신은 아닌지라. 다만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군요.”

    잠시 생각하던 매카트니는 그 방향에 조선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청의 수

    많은 속국 중 하나로서 이 근방의 정세에 대해 공부했던 매카트니가 모를 리

    없는 나라다.

    청은 영국의 벵골 지배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영국이 티베트를 원조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매카트니는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의심이 어느 정도 합리적이

    라는 것을 인정했다.

    ‘만약 그 의심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그러니까 우리 군대가 벵골을 넘어 티

    베트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제국의 서쪽 국경에는 큰 소란이 일어난다. 그때

    조선이 누런 바다[黃海]로 군함을 띄워 청을 견제하며 독립을 회복하려 할 수

    도 있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안타깝게도 조선에 대해서는 조사가 부족했던 매카트니의 착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청에 대적할 생각이 없었고 군함이라고 할 만한 물건은

    더더욱 없었다.

    매카트니는 동인도 회사 소속인 스턴튼을 돌아보고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동인도 회사로서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조선 서부 해안을 측량하

    고, 가능하면 조선 정부와 접촉해 보는 것은 어떤가?”

    스턴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페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안이 검토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은 중국의 속국입니다. 중국인들은 봉건적 체면에 민감하죠. 프랑스인이

    인도인들과 작당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황제는 영국이 중국을 분열시키려 한다

    고 생각할 겁니다.”

    “영국 정부가 한다면 자네 말대로겠지.”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어디까지나 민간 회사이지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 어

    쨌든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이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은 그 짓이 상당한 효과를 보장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지금 곧바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요. 최소한 벵골에 타진해 보아야

    합니다.”

    매카트니는 그런 소극적인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

    지만 스턴튼도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동인도 회사는 군사적 절정기. 7만에 이르는 대군은 회사 단독으로도 어

    지간한 미개국은 정복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적을 늘리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 이는 벌써 아메리카

    에서 입증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동아시아 무역도 엉망진창이 된 것을 똑똑

    히 보았는데 더 싸움질만 할 수야 없다.

    게다가 본국에서도 동인도 회사의 비도덕적인 행태와, 그러면서도 수익이 갈

    수록 악화되는 사세를 마땅찮게 여기는 상황. 젊은 피트(Pitt the Younger,

    수상 윌리엄 피트)는 동인도 회사에게서 인도의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박탈하

    려는 작업의 마무리 단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래서 스턴튼은 발을 뺐다. 매카트니 역시 친우를 그 이상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는지 우아한 동작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그래. 마치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해서 닥치는 대로 자포자기식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 신중해야 한다는 말도 옳군. 알겠네. 이 일은 나

    중에 다시 논의하세.”

    스턴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국 매카트니의 사절단은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광저우를 출항했다.

    그러나 내실은 달랐다. 불가사의한 이 용오름은 영국 주요 인사의 주의를 끌

    어당김으로써 역사를 아주 약간 바꾸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변화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직진하는 역사의 본성으로 인

    해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의 격차로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우주의 법칙은 냉소적인 면에서는 꽤나 잘 맞아 들어간다. 시준은 주로

    동양적 설화로 들었던, 사후세계 관리자들의 유쾌한 실수가 자신에게 일어나

    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환각과 몽상의 퍼레이드 속에서 자신에게 들린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야. 삑사리났는데.’

    ‘상계(相計) 처리하자. 걔 저기로 보냈으니 한 놈 다시 여기로 끌어오면 되

    지. 숫자만 맞으면 위에서는 신경 안 써.’

    시준이 상황을 빨리 파악한 것은 이것이 그도 해 본 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러

    니까, 민원인 상대로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동료와 황급히 의견을 교환하는 듯

    한 상황이었다.

    시준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지독한 동족 혐오였다.

    “공무원 놈들, 일 이 따위로 할 거냐!”

    작가의 말

    1. 이 전에도 영국은 광저우 등지에서 무역을 하고 있었으나, 건륭제 정부는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무역을 공식화, 상설화, 확대화하기 위한 사절이 유명한 매카트니 사절단입니다.

    정사 매카트니 경을 비롯하여 이 사절단은 당대 영국의 각종 분야 전문가로 이루어졌습니다. 관련 기록을 보면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는 첩보의 역할도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사절단의 스케치 전문가 헨리 윌리엄 패리시 중위가 그린 그림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2. 여긴 어디 나는 누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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