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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화 (1/284)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코락스

1. 레디메이드 인생(1)

1화

1. 레디메이드 인생(1)

서기 2022년 4월, 대한민국 서울.

역설적인 말이지만, 평범함에는 비범한 재주가 필요하다.

강고한 이념과 피끓는 부르짖음이 가득하던 20세기는 끝났다. 인류 전체가 피

와 강철과 돈으로 광란의 춤을 추었던 그 시절이 지나가자, 근대문학의 종언

(終焉)을 엄숙히 선언하던 일본의 문필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머리는 좀

식었다.

‘평범한 삶’은 이제 야심의 부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아련한 동경의 목적지

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평범보다 못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으며

우선 그 ‘보통’에 도달하기 갈망했다.

생존에서 눈을 돌릴 핑계로서의 대의가 없는 이 시대. 이제 왜 사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사는지 묻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김시준 주무관은 그런 시대를 완벽하게 체화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인생

은 주의 깊은 고려와 약간의 행운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어지간한 악의는 무너

뜨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게다가 시준은 평범함의 단점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비범했다. 아무 걱정 없

다는 말과 평범함을 동의어로 아는 여러 범부들과 달리 그는 감당 가능한 스

트레스를 적절한 삶의 추진력으로 삼을 줄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공무원이 생각보다 격무에 시달리고 보상은 적다는 것을 알면

서도 그 길을 택했다. 그는 예측 가능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옆에서 머리를 긁던 사무관 하나가 뭔가를 쓱 내민 것도 예측

범위 내의 사건일 뿐이었다.

“김 주무관. 대사관에서 전문이 왔는데 지금 빨리 좀 보고해야 해서. 대충 내

용은 알겠는데 번역이……. 젊은 사람들은 영어 잘하지 않나?”

시준은 자신이 어린 시절과 대학 때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입직 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지만 공무원에게는

채용시험 외에 필요 없는 능력이다. 여기가 외교부서나 정보부서도 아니니까.

게다가 공식적인 업무에서 외국어 능력이 필요할 때, 그 사람이 외국어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외국어를 번역하기로 한 보직의 직

원’이 그 일을 맡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건 고루한 형식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 필수불가

결한 신뢰성의 문제다. 대통령이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통역관 없이 이야

기하면 안 되는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시준은 둘 다 뻔히 아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에이, 저도 잘 못해요. 삐끗하면 무슨 소리 들으려고. 옆방에 박 사무관님

있잖아요. 번역은 번역 담당자가 해야…….”

“오늘 연가래.”

실무자들끼리 연가 중에 급한 일 생겼다고 호출하는 것은 금기다. 그렇게 되

면 언젠가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호출할 테니까. 관직 사회에서 가장 강

력하게 지켜지는 불문율 중 하나이고 시준 역시 그것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번역기라도 돌려 보시죠. 어차피 상관없을 겁니다. 윗분들이 영어쯤이야 못

하겠습니까. 이전 건들이나 잘 정리해서 가면 되지요.”

“그렇게 해야 하나?”

어차피 자기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나 다른 사람의 심정적 동의가 필요했던

사무관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시준은 이제 또 하나의 사소하고 귀찮은 일을

무사히 넘겼음을 깨닫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늦게 가서 욕 먹는 것보단 나을걸요? 그럼 전 메일이나 보내고 퇴근하겠습니

다. 저도 오늘 2시간 연가거든요.”

“어휴. 그래. 주말 잘 보내. 난 금요일에 야근해야 되게 생겼네. 여자친구 만

나러 가?”

“그렇죠, 뭐. 다음 주쯤 한잔해요.”

시준은 의례적인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시선 둘 곳이 마땅찮은 엘리

베이터 안에서는 문자를 보내는 일이 가장 적절하다. 시준은 이것이 스마트폰

의 가장 큰 사회적 공헌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해 보았다.

[7시에 봐. 회사 앞으로 갈게.]

마찬가지로 공무원인 여자친구는 2시간 뒤에나 퇴근할 터. 그 정도면 시준은

집에 들렀다가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갈 수 있다.

애인 보고 싶다고 퇴근하자마자 허겁지겁 만나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터지

기 쉽다.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자동차도 깨끗하게 세차해 두었다. 기념일도 아니니 부담스럽지는 않은 정도

의 교외 식당도 예약 완비. 술은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깔끔한 프랜차

이즈 호텔에서 밤을 보낸다. 오전에 느긋하게 일어나 카페에서 상쾌하게 브런

치라도 먹고 헤어져 쉬면 주말 또한 완성이다.

모든 것이 부드럽다. 자기 능력의 일부만 써도 되는 생계 수단, 극단적이지

않고 소소한 취미, 잔병 없이 건강한 몸, 평범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그

것까지 포함해 흠 잡을 데 없는 연인까지 있다. 항상 돌발 상황에 대비할 여

유가 있는, 준비된[Ready-made] 인생이다.

다만 무엇을 위한 준비인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미뤄 뒀던 일은 대개 끝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김시준 주무관이 인생의 재미를 하나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지탄받을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도 건강을 위한

운동과 함께 현대인의 소소한 오락은 즐긴다.

차는 집에 주차되어 있으므로 그는 종로 거리를 가로질러야 했다. 천천히 걸

으며 스마트폰으로 여러 웹툰이며 소설을 보는 일은 남에게 취미라고 말할 것

도 못 될 사소한 유흥일 것이다. 오늘은 보던 작품이 완결되어 새로운 추천을

받아 읽어보려던 참이다.

‘얘는 언제쯤 환생하려나?’

그것이 어느 세계이든, 뒷날의 정보를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는 장르 트렌드

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것이었다. 굳이 수백 년 전이 아니라도, 단 몇

달 전만이라도 과거 회귀가 가능하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준은 굳이 그 일을 자신에게 대입하지는 않았다. 오락은 오락. 그는

자기가 세상의 파도를 막아내기 위해 설계해 놓은 단단한 요새에서 벗어날 생

각이 없었다.

‘왕족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사양이야.’

왕족이, 그것도 권력의 핵심에 다가선 왕족이 편히 사는 경우는 동서고금에

드물다. 스스로 조용히 살려고 해도 주위에는 소위 ‘킹메이커’들이 꼬이게 마

련이다. 면밀하게 배치된 아첨과 의도적인 정보의 혼란이 중첩되면 냉정한 사

람도 판단력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본다.

성공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준은 성공이든 실패든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

다. 혁명을 마주하여 단두대에 목이 내걸리는 것도, 반란자로서 피를 뒤집어

쓰고 내가 이겼노라고 울부짖는 일도 취향이 아니다.

‘소설이니까 좋은 것 아니겠어. 환상은 만질 수 있게 되면 환멸로 바뀐다고

하던가.’

임용된 지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공무원 시험의 지식은 아직 다소나마 남아

있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 압박감이 없는 지금 소설을 보며 그때의 공부로 지

적 유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런 여유 또한 완성된 삶을 위해서는 필수 조건.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것은

오히려 불안한 법이다. 집념 어린 계획이라기보다 차분한 적층(積層)으로 만

들어진 그의 인생은 여백의 미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 톤짜리 쇳덩어리가 그 모든 심찰과 고려를 전부 비웃으

며 짓쳐들어왔다. 그 조소(嘲笑)의 소리는 강퍅한 굉음이었다.

가장 엄격한 사람도 트집 잡기 힘든 그 인생을 쌓아올리는 데에는 30년이 넘

게 들었지만, 그것을 박살내는 데에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극히 악의적인 조롱의 시선으로 본다면 겨울철 김장과 비슷했다.

다만 그 재료가 강철과 알루미늄, 그리고 콘크리트와 사람 살점일 뿐이다. 그

모든 속재료는 잘 갈리고 버무려져 내일 아침 포털 윗줄을 장식할 광경이 되

어 있었다.

통각 신경이 파업해 버릴 정도의 지독한 부상 속에서, 시준은 기묘한 명정 상

태에 빠졌다.

“저런, 끔찍하군요.”

급정거 때문에 강제로 켜진 비상등에도 불구하고 그 형체는 잘 보였다. 단말

마처럼 그르렁대는 불안한 기계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잘 들렸다.

하지만 시준은 그 형체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 목소리에서 성별

조차 구분해 낼 수가 없었다.

시준의 육신이 그런 기능을 수행할 상태가 아니었다는 분석은 이 경우 적절하

지 않다. 시준은 저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빛과 소리에서 일탈

해 버린 존재라는 점을 힘겹게 확신했다.

“흔한 일이죠. 만취한 운전자가 차선을 넘어 폭주. 이 초저녁부터 어디서 놀

다 왔는지 약도 진하게 했군요. 코카인. 부자인가 봅니다. 부친이 어디 높으

신 분일지도. 그러면야 당연히 어디 구치소에서 잠깐 놀고먹다 풀려나 이 ‘재

수없는 경험’을 떠들어 대겠죠.”

시준은 그 말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그다운 생각을 떠올렸다.

‘낫는 데 얼마나 걸릴까? 휴직 1, 2년이면 되려나? 장애가 남지는 않을까? 결

혼 얘기는 뒤로 미뤄야 하나?’

그리고 시준에게 떠들어대던 ‘그것’은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날카롭게

찔러들어오는 것처럼 속삭였다.

“불필요한 고민입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매체에서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은 말이었다. 시준이 느낀

감상은 ‘올해 성과 등급은 B입니다.’ 정도와 비슷했다.

그러자 ‘그것’은 실망하기라도 했는지, 시준에게 현실감을 느끼게 해 주겠다

는 듯 재차 침투했다. ‘그것’의 존재는 점점 가까워져서 이제는 속삭인다기보

다 시준의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더 이상 의미 없었기에, 시준은 자신이 사무실 비슷한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가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다는 사실에

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곳은 낯설기는커녕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시준은 이제 목소리

를 자아낼 수 있는 폐와 성대를 움직여 말했다.

“우리 사무실 비슷하군요.”

관청 사무실에 하나씩 있는, 회의 겸 간식 테이블 겸 악성 민원인 설득 겸 사

용되는 다용도 테이블이었다. 옆에는 제법 서류철이나 태블릿 PC 같은 것도

있었다. 민원을 상대해 본 적은 있어도 민원인이 된 적은 많지 않았던 시준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요. 동종업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준에게 당혹스러

운 것은 이렇게 모든 것이 또렷한데도 ‘그것’의 형태만은 잘 식별되지 않는다

는 점이었다.

보이지 않거나 가려진 것과는 다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람의 뇌는 여러

1차 감각정보를 조합해서 자기가 상(像)을 스스로 재창조해 낸다. 그러나 눈

앞의 저 자는 뇌가 그 작업을 거부하는 듯했다.

마치 확장자가 다른 파일은 뷰어 프로그램이 없으면 열지 못하는 것과 같았

다. 인류의 인지를 벗어난 무언가였다.

“그럼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은 누굽니까?”

‘그것’은 피식 웃었다.

“서로 다 아는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다시 늘어놓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닙니

다. 그건 당신들의 방식이죠. 알고 있을 텐데요? 이 상황이 당신의 작은 경험

을 초월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얘기가 진전되지 않습니다.”

시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그는 방금 죽었다. 죽지 않았다 한들 이렇게 멀쩡히 서서 말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이곳은 초현실의 갈피이며, 저 자는 시준의 망상이 만들어낸 환

각이든, 어떤 절대자이든 간에 어쨌든 진지한 자리에서 논할 수 있는 일은 아

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애써 생각을 멈추고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자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시준은

상상의 제동을 풀었다.

“소위 저승이라는 그건가요? 어…… 당신은 저승사자 같은 거고?”

“그렇게 해 둡시다. 하지만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고, 나도 그런 호칭을 너

무 많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관리자라고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하긴 죽은 다음에 오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저승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엄밀히

말해 ‘온’ 것은 아니지만.”

그 아리송한 말을 시준은 이해해 보려 애쓰다가 포기했다. 공무원인 그로서는

상대의 직급 호칭이 명백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으로도 약간의 위안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위안은 순식간에 박살 났다.

“저, 저건…….”

불가해한 방식으로 시준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엉망진창이 된 종로 거리였다.

시준은 그의 지갑 안에 있는 장기기증 서약 스티커도 전혀 소용없을 정도로

망그러진 몸을 보고 숨이 멎었다.

“예. 끔찍하죠. 저도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우리 ‘규정상’ 어쩔 수 없

군요. 넓은 해량을 바랍니다. 신청자는 정보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경찰과 구급차가 와 있었다. 시준의 몸은 후송보다는 실어담는다

에 가까운 형태로 구급차에 실렸다. 생명 유지 장치도 필요 없으리라. 이미

유지할 생명이 없으니까.

경찰 쪽도 바빴다. 경찰이 흔들어 깨워서 겨우 일어난 가해자는 전형적인 ‘내

가 누군지 알아?’ 류의 엄포를 시전하며 경찰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여기가 종로가 아닌 브루클린이었으면 – 그리고 그가 유색인종이었으면 – 벌

써 쏟아지는 총탄으로 샤워하고 시준과 자웅을 겨룰 상태가 되었을 만한 행패

였다.

“마약 중독자의 차에 치여서 다발성 장기 파열에 따른 쇼크로 즉사.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겠군요. 유족들의 슬픔에 대해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시준은 관리자가 ‘심심한 위로’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백 번은 할 거라고 확신

했다. 호흡과 별로 차이도 없는 어조였다.

“하지만 당신 본인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규정에 따라 – 자세한 사항은 우

리 홈페이지를 참조하십시오 – 당신은 ‘신청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아니, 하던 말이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약 2개월 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전작 '죽지 않는 왕'을 완결하고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연재 주기는 현재 주 3회이나, 일단 첫날 5 화를 게재하고 다음달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작은 물론 창작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배경은 실제나 전작 등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천천히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레디메이드 인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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