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를 얻겠다.
무아(無我).
자신을 잊는다.
존재를 잊는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은 고도의 집중에 의해 다른 일체의 일을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몰입’이라 부르는 것.
그리고 인간은 몰입할 때 자신이 지닌 실력 이상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검술 숙련도 35레벨에 오르자 새롭게 개방된 기술, 무장해제.
사용 가능하다고만 적혀있을 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검기나 검강을 개방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무장 해제’는 단 한 번도 누가 쓰는 걸 본 적이 없는 개념이었으니.
사실상 검기나 검강보다 더욱 난해했다.
‘결(結)과 이어지는 기술이다.’
허나 이제는 알겠다.
무장 해제는 결의 개념을 더욱 고도화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개념’으로만 존재하기에 제대로 쓰기 위해선 입체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개념을 기술에 입혀야 한다는 의미다.
빌헬름이 천지개벽에 자신의 개념을 때려 박은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검술이 아닌 개념 그 자체의 검술을 완성했듯이.
검술 자체에 자신의 존재를 입히고, 모든 묘리를 압축시켜 비로소 ‘천지개벽’을 표현했듯이 말이다.
하여, 무장해제의 개념을 입힐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찾고 또 찾은 끝에.
‘심검.’
나는 무아의 속에 검 한 자루를 그렸다.
처음의 생김새는 ‘지고의 검’이었다.
또 다른 란돌프가 사용하여 빌헬름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검.
그 위력은 내가 사용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으므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다.
마땅히 베어내야 한다면, 그것이 꼭 누군가의 ‘죽음’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러기에 죽음은 너무 흔하다.
내가 베어내고 싶은 건 여태껏 그 누구도 베어내지 못했던 것들이다.
세상을 베고 싶다느니, 신을 베고 싶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나는 불가능을 베고 싶다.’
최초가 되고 싶을 뿐.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싶을 뿐이었다.
이곳 판게니아에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미지(未知).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얼핏 보기에는 완전무결한 것들.
내가 베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다.
《‘무신의 심검(무장해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여, 나는 몰입(沒入)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현재 나의 모두를, 혹은 내가 가진 한계 이상의 힘을 담는다면 어디까지 베어낼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 탓이다.
그렇게 무신의 심검을 심상 속에서 휘두르자.
쩌어어억!
··· 금이 갔다.
세계에.
이곳, 성역에.
그러나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불가의 개념을 파괴하는, 또 다른 개념의 등장을 알리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한 서막이었다.
*
“개념은 누가 만들지?”
한국 영웅연합.
각성자들이 모여있는 연무장의 중심에서, 문득 아린이 물었다.
그녀는 인간의 탈을 쓴 칠군주 바사라였다.
현재 지구에서 ‘아린’이라는 여인으로 유희를 즐기는 중이며, 이곳에서 훈련생들을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신······ 아닐까요?”
그때 한 훈련생이 답했다.
그러자 아린은 역으로 되물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각성자의 관점에서도 과연 그럴까? ‘방어력’과 ‘관통’, ‘회피’ 등의 개념도 신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 그건 ‘시스템’이 만든 것 아닙니까?”
“시스템의 개념은 그럼 누가 만들었지?”
“인간이겠죠?”
“아니, ‘선지자’다.”
“선··· 지자요?”
훈련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인 개념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다.
하지만 아린이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먼저 깨달은 자. 그들이 깨달은 것을 특정한 이름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개념’이 된다.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지. 허나.”
“······.”
“이 개념이란 것은 완전하지 않다. 예를들어 무한의 방어력을 지닌 자가 있다고 해보자. 이를 공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아주 높은 수치의 관통력을 지녀야겠죠.”
“그래, ‘관통력’이라는 개념에 의해 ‘방어’의 개념은 결국 뚫렸다. 하지만 둘 중 어떠한 개념이 먼저 나왔을지를 생각해보거라.”
“방어력일 것 같습니다. 그걸 뚫으려고 ‘관통력’의 개념이 생긴 거고요.”
“맞다. 방어의 개념이 완전무결했다면, 결코 그것을 파헤칠 개념이 창조되지 않았겠지. 회피 역시도 ‘명중’과 ‘집중’ 등에 의한 개념에게 무력해졌듯이.”
“하지만 무적이나 파괴불가는 이름 그대로 관통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것이다. 진정으로 그러한 것들은 파헤치는 게 불가능한 개념인가?”
훈련생들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불가능 하다는 것.
그러자 아린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방어력’의 개념을 만들어낸 자는 우쭐했겠지. 방어력이 높기만 하면 절대로 뚫리지 않는 개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관통력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며 결국 파훼되었지. 물론, 그랬던 ‘관통력’조차도 넘지 못하는 개념이 생겼다만.”
“그게 바로 무적, 파괴불가 같은 옵션이군요.”
“아아.”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그와 비슷한 개념들.
예컨대 ‘최소 물리 내성’과 같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개념들이 그러하다.
최소 물리 내성은 관통력이 아무리 높아도 뚫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 역시 처음부터 존재했던 개념은 아니다.
“그러니 반대로 생각해보거라. 아직 그러한 옵션들을 파훼할 ‘개념’이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생소하며,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무적과 파괴불가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라면?”
“그 방법을 찾아내는 자가······ 선지자가 되겠죠.”
“선지자가 되거라. 기존의 개념에만 파묻혀 지낸다면 언젠가 크나큰 한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불가능을 진짜 불가능하다 생각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
끊임없이 탐구하고,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기엔 지금이 적기였으니까.
모두의 눈에 이글거리는, 강해지고자하는 욕망.
‘빌헬름 열풍이라.’
지구에는 열풍이 불고 있었다.
투신의 탑을 올랐던, 빌헬름.
그를 보며 감명 받은 수많은 각성자들에게 때 아닌 빌헬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도 빌헬름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투신의 탑에 오르지 않았다.
‘빌헬름. 너는 여전히 빛나더구나.’
마계에서 자신을 상대할 때처럼 빛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때보다 더 크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덕분에 세상 자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서다.
그냥 그가 어디까지 갈지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빌헬름이 답을 내었을 때.
마지막으로 휘두른 검을 보며, 칠군주 바사라는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드디어 완성했구나. 빌헬름.’
그는 마침내 세계를 창조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스스로 뻗어나갔다.
자신과 대결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격을 지닌 채.
하여, 바사라는 그런 빌헬름이 존재토록 하게 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곳 지구에 있을 누군가.
‘팬텀.’
······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리는 자를.
그라면, 오랜세월 품은 자신의 의문에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스승님. 만약 무적과 파괴불가를 파훼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불현 듯 묻는 물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확실한건, 단순한 선지자는 아닐 것이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공략했으나 포기한 개념을 파훼한 것이니.
한 단어로 말하긴 힘들고, 문장으로 설명할 순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걸 손에 쥘 자격을 지닌 자······ 겠지.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을 테니.”
······ 이를테면, 세상의 주인이라던가.
*
“오문의 개방을 멈춰라!!!”
대장로 알비노가 다급하게 외쳤다.
성역에 금이 갔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다.
그리고 성역에 금이 갔다는 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성역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역의 축복이 해제되었다는 의미다.
이는 곧 오문개방을 진행하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십육각주 중 상위 각주들이 오문을 개방하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곳.
바로 ‘세계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성역’으로 지정된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성역이 깨졌다.
“당장 멈춰······!!”
“커억!”
“쿨럭!”
일각주와 이각주가 피를 토해냈다.
오문개방을 멈추었으나, 한발 늦은 것이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단 한 명.
······ 라이가 뿐.
하지만 라이가도 아주 멀쩡한 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그의 눈빛이.
어쩐지 당황한 채 떨리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의 눈은 그들이 아닌 전각의 2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자신의 제자를 말이다.
‘지금, 그건······.’
심검이었다.
틀림없이.
라이가는 심검을 깨달았기에, 방금 전 제자가 심검을 휘둘렀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심검은 아니었다.
‘대체······ 무엇을 완성한 것이냐?’
결이 달랐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채 꺼내기도 전에.
《‘성역’이 해제되었습니다.》
《두 번째 ‘세계수’가 세상에 드러납니다.》
《‘판게니아 붕괴’의 속도가 늦춰집니다.》
《심연에 가라앉은 땅들을 ‘세계수의 뿌리’가 끌어올립니다.》
《‘천산’, ‘가라앉은 불멸자의 땅’, ‘불신자의 대지’, ‘광활한 고래의 바다’, ‘아무것도 아닌 곳’, ‘침장의 절벽’, ‘인형의 무덤’, ‘별의 지옥’······.》
《‘명예의 세계수’가 모든 ‘명예로운 자’들을 축복합니다.》
《이제부터 ‘명예의 세계수’에 자격을 확인하여, ‘클래스 업(2차 전직)’을 할 수 있습니다.》
*
천산.
내상을 치유하던 ‘천마’가 눈을 떴다.
구우우우우웅!
······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든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콰르르르릉!
땅이 들썩이며, 들린다.
그리하여 천마가 지배했던 심연의 모든 영역이 하늘위로 떠올랐다.
‘······ 이게 무슨······.’
느닷없는 사태에, 천마조차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건 심연이 천공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천산만이 아닌 수많은 심연영역들이.
수많은 땅과, 수많은 그곳의 주인들이.
‘심연의 땅들이 판게니아에 합류되고 있다?’
강제로 끌어올려진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심연이 생긴 이후로 처음있는 일.
“아악!”
“사, 살려줘!”
결국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여든 수많은 신도들을 향해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도리어 이것은 기회였으니.
놀라고 당황하기보단, 기뻐해야하는 것이다.
천마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양손을 활짝 펼치며.
“지금부터 우리는 새로운 세계와 마주한다. 꿈에도 그리던 오염되지 않은 땅에!”
“······!!”
“그러니 기뻐하며 환호하라! 본좌가 판게니아의 주인이 되겠으니!”
“아아, 천마이시여!”
“천세! 천세! 천천세!”
모든 이들이 조아린 채 지면에 이마를 쉴 새 없이 찧었다.
새로운 땅.
꿈에도 그리던 판게니아의 입성!
그것이 갑자기 가능해진 것이다.
비록 신의 섬은 탈환할 수 없었으나, 그곳에서의 기억도 사라졌으나, 판게니아에 오른다면 신의 섬 따윈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전부를 얻겠다.’
판게니아를.
세상을.
그리하여 천산을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세우겠다.
천마신교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천마가 강한 의지로 눈을 빛냈다.
내 제자에게 맡기겠다.
두 번째 세계수의 등장!
그건 말 그대로 전례 없는 ‘대규모 업데이트’였다.
판게니아의 구도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판도를 뒤흔드는 서막.
심연의 땅들이 대거 판게니아와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심연’이 아닌, ‘심연왕’이라 불리는 절대자들이 지배하는 지옥이었으니까.
천마.
폭풍의 배율자.
무덤의 주인.
가라앉은 황제.
별 부수는 자.
태어나지 않은 존재.
천축의 고래.
그리고 그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또 다른 심연의 괴물들!
“오오······.”
“이곳이 ‘천공의 대륙’!”
“아름답구나!”
“꿈에 그리던 오염되지 않은 세계······.”
“드디어 기회가 왔느니!”
“모두 나의 것이다!”
그들은 흥분했다.
심연에서의 오랜 세월.
신체가 변형되고, 정신이 무너졌다.
수십번, 수백번, 그 이상을 끊임없이 심연에 적응할 수 있게끔 변형시켰다.
그 고통. 그 슬픔. 그 억울함.
감히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와중에도 그들은 오직 천공에 떠올랐던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하고 있었다.
강하게 염원했으며, 또한 원망했다.
심연의 독에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대지.
푸른 숲과 파란 하늘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그들을 심연에 두고간, 도망자들이 사는 땅이었으니.
너무나도 오래되어 본래 자신이 누구였고 어떠한 존재였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그것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그러할진대.
“······ 천공의 땅에 사는 겁쟁이들이여.”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눈을 떴다.
죽어있는 세계수.
수많은 시체의 향연.
산처럼 쌓여있은 해골의 산.
그 위에 세워진 빛바래고 찢어진 구제국의 깃발.
구제국을 이끌었던 대영웅 중 한 명, 육각의 용사들 중 가장 강했다고 전해지던 자.
대전사 오딘.
그가 마침내 눈을 떴다.
허나 그뿐만이 아니다.
오딘의 옆으로 또 다른 육각의 용사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검성 라일리를 제외한 도합 다섯의 용사들이.
오딘은 영역 너머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심연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어차피 봉문은 풀렸을 것이니.”
대장로와 장로들이 모여있는 회의장.
침중한 분위기를 깨고 라이가가 말했다.
강제적인 성역의 해제.
그로 인해 오문을 개방 중이던 일각주와 이각주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대장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각주와 이각주는 죽을 게야.”
둘의 죽음은 팔가에도 굉장히 치명적이다.
그들보다 오랜시간 ‘팔가의 무공’을 익힌 이들은 없었다.
누구보다 더욱 팔가의 정수에 대해 이해한 자들.
라이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오문의 죽음은 극복하면 된다.”
“··· 너조차도 완전하게 극복한 건 아니지 않느냐?”
오문을 개방할 시, 죽는다.
팔가의 태동부터 전해져내려온 절대적인 명제다.
라이가는 오문을 완성하며 수명이 연장됐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걷어진 건 아니다.
결국 죽는다면, 그것을 과연 ‘극복’이라 칭할 수 있을까?
“그야 오문이 끝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
라이가의 말에 대장로 알비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문이 끝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팔가의 초대 선인이 전해준 내용에는 오문이 분명히 끝이었을텐데?”
오문개방.
그로써 완전무결해지는 것.
당연히 뒤의 내용이 더 있을 리 만무했건만.
애초에 팔가의 비기는 초대 선인에 의해 대장로와 장로들에게 전해져 계속해서 전승되어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고 한다.
스윽.
라이가가 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그 책은 생사경······.”
“‘돌연변이 특성’의 저주를 받은 책 아니냐?”
“하지만 별 내용은 없을 텐데?
장로들도 익히 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사경의 원본.
본래 이 책은 해독되지 않았다.다만 특정 조건 하에 히든특성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저주가 담겨있었다.
왜 저주냐하면, ‘돌연변이’를 발생시킨 자는 거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죽어나가는 탓이다.
돌연변이 특성을 지녔다고 해도 글자 몇 개만 겨우 읽을 수 있을 따름이다.
하여 팔가는 이 책을 해독하려 무던히 노력해왔다.
대장로와 장로들 역시도 말이다.
하지만 풀리지 않았고, 결국 ‘별 내용이 없다’는 결론마저 내렸다.
“팔가의 초대선인은 처음부터 비기를 둘로 나누어 전승시켰다.”
그러나 라이가는 해독했다.
그의 제자 덕분에.
이 책에 적힌 진의를 알 수 있었다.
라이가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둘로 나누었으나 찾을 수 있는 힌트는 남겨두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서책이다. 생사경. 오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적혀있다.”
“······ 진정 그 책을 해독했단 말이냐?”
대장로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그가 해독하지 못한걸, 아무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던 걸.
누구의 기대도 받지 못했던 라이가가 해독해낼 줄이야.
“내가 아닌 내 제자가 해독했다.”
“······!!!”
그들의 눈이 다시금 라이가의 제자, 현에게로 닿았다.
세계수의 앞에 서자 펼쳐진 광경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생사경의 해독마저도 해냈다니?
“생사경은 ‘흡성대법’의 무공에 대해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 답이 아니다. 진짜 답은 천산 영역의 주인, 천마에게 있다.”
“그 말은······?”
“천마신공을 대성한 천마를 ‘흡성대법’으로 흡수하는 것. 그래야 오문의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팔가의 선인이 반쪽으로 나누어둔 이유다.
천마신공, 그리고 오문개방.
둘은 원래 하나였다.
다만 양립할 수 없기에 따로 익혀서 대성해야만 한다.
그렇게 대성한 둘 중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흡수하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오문을 완성한 자를 천마가 흡수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물론 그럴 경우 재앙이 벌어지겠지.”
천마에게 라이가가 흡수당하거나, 혹은 오문을 익힌 자를 흡수하기만 하더라도, 천마는 비교할수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그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대재앙이 벌어질 건 불보듯 뻔한 일.
그때 대장로 알비노가 말했다.
“천산이 떠올랐다. 천마도 함께 나타났을진대.”
라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초대선인의 안배다.”
“초대선인이 처음부터 ‘성역의 해제’를 염두에 두었단 말이냐?”
“아아. 팔가의 초대선인은 처음부터 성역의 해제를 염두에 두었다. 성역을 베어내는 자, 그리하여 세계수로 하여금 ‘천산’을 대륙으로 끌어올리는 것까지 모두 계산되어 있었을 터.”
오문의 개방을 완성하고,
더 나아가 파괴할 수 없는 ‘결’을 베어내는 것.
심연영역에 있는 천산이 떠오르는 것 모두를 초대선인은 안배했다는 의미다.
물론, ‘성역해제’를 한 건 라이가가 아니지만.
장로들은 그것을 라이가가 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렇게 해야만 ‘멸망’을 상대할 수 있다고······ 초대선인은 생각한 건가?”
그 사이 대장로 알비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는 기색도 함께하고 있었다.
팔가의 비기는 멸망을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부터 반쪽에 불과했던 게다.
무언가 부족했다 여겼던 부분이, 실타래가, 마침내 풀린 것이다.
대장로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더없이 진중한 말투로 말했다.
“가주. 팔가의 봉문을 풀고,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 팔가의 다음 행보는 내 제자 ‘현’에게 맡기겠다.”
“······?”
대장로가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다.
당연한 일이다.
무려 가주의 첫 번째 행보다.
가주가 된 자의 첫 행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마련이었다.
한데, 그것을 제자에게 맡기겠다?
“······.”
“······.”
하지만 아무도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침묵한 채 모두가 시선을 옮길 따름이었다.
약간의 경외감마저 어린 눈빛으로.
라이가의 제자.
명예를 완성한 자, 세계수의 주인 하이 드루이드를 바라보았다.
*
나는 생각중이었다.
성역의 해제와 세계수의 출현.
그로 인해 떠오른 무수한 심연들.
지금 저들이 이야기하는 ‘천산’과 ‘천마’는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으니까.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있군.’
천마는 문제다.
하지만 천마만 문제가 아니다.
신의 섬에서 벌어졌던 일들.
그걸 기억하는 건 나와 이자벨라뿐이었으므로.
그렇다고 그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신의 섬에서 경쟁한 괴물들의 영역이 전부 떠올랐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신의 섬에서 경쟁한 괴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등장한 것이다.
심연영역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 천축의 고래, 가라앉은 황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이 셋이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판게니아를 전부 먹어치울 수도 있는 노릇이다.
천축의 고래는 사흉과 마찬가지인 멸망의 권속이었고.
특히 가라앉은 황제.
라이가는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보고 ‘황제폐하’라 칭했다고 했다.
잠들어있는 제국의 황제.
그와 같은 얼굴을 한 자라니.
‘신의 섬에서 겪은 일과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다스리는 휘하들도 모조리 출현했다는 것.’
그때와 같은 요행을 바랄 수도 없다.
규칙이 있는 게임으로 그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들 세력 전부를 나 혼자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힘을 키워야한다.
세력을 만들고, 전체적인 무력의 상승을 노려야했다.
란돌프로 변신하면 승산이야 있겠지만 그 여파를 짐작하기 어렵다.
아직 빛과 어둠의 균형을 잡지 못했으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힘을, 박현명의 힘과 성향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다음 행보가 중요하다.
시선의 중신.
모두의 눈빛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말했다.
“‘명예의 세계수’를 전면개방하겠습니다.”
“······!”
“그, 그게 무슨······.”
장로들은 당황했다.
세계수는 성스러운 것.
그것을 전면으로 개방하겠다니.
하지만 명예의 세계수는 2차 전직을 시켜주는 중요한 요소다.
판게니아 대륙인들이 힘을 키울 수 있고, 저들과 대항할 수 있게끔 해줄 것이다.
뿐만인가.
‘잊힌 명예의 던전에 입장할 파티원을 찾아야한다.’
세계수의 중심에 생겨난 잊힌 명예의 던전.
그것을 본 순간 왠지 모를 사명감이 생겨났다.
그러기 위해 나는 ‘세계수의 전면 개방’을 택했다.
하루라도 빨리 파티원을 찾기 위해서.
*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명예의 성소.
그곳에 숨겨진 진짜 성역이 드러났다는 말에.
종족을 불문하고 수많은 이들이 행렬을 이어갔다.
그중에는 예상치도 못한 괴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화종들?”
“레비아탄도 있어!”
“해수왕 터틀럼! 와······!”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신화종부터, 넓은 땅을 지배하는 자들까지.
하지만 그들에게 전투의지는 없었다.
이곳은 세계수가 있는 곳.
중립의 지역인 명예의 성소이었기에.
이곳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싸우는 것은, 실로 불명예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고 있을 때였다.
“잠깐, 저 백호······.”
“서, 설마, 백왕?”
“그런데 백왕이 왜 인간이랑 같이있지?”
그를 본 모두가 경악하며 경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출현한 괴물들은 이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북부의 주인, 백왕!
크람델의 왕이며 북부 괴물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하는 그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허나 의외인 건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인물이다.
인간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가, 인간과 함께 있었으니.
“······ 기다려야하나?”
“예, 백왕님. 줄을 서셔야 합니다.”
“끄응.”
그것도 왠지 어려워하는 기색으로 말이다.
백왕을 곤란케한 남자의 정체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캬캬캬캬!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작은 사신이 나타났다.
그 사신을 본, 백왕의 옆에 선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헬님. 오랜만입니다.”
캬캬캬캬캬캬!
“같이 오신 분들은······ 아아.”
“앤드류님!”
“세렝게티님. 이자벨라님. 그리고 허드슨님 아니십니까?”
정통의 사신, 헬과 동행한 3인.
그를 본 앤드류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앤드류를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앤드류님 그런데 왜 머리카락이······.”
“하얗게······.”
“누, 눈은 왜 붉어지셨습니까?”
앤드류의 모습이 이상하다.
성스러우며, 초탈하던 성직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전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그리고 피처럼 붉게 물든 눈동자.
앤드류가 씽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여신교의 사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제님이 사제가 아니라니요?”
허드슨이 묻자, 대답은 옆에서 들렸다.
백왕.
그가 입을 연 것이다.
“······ 그는 ‘복수자’가 되었다. 나와 같은 적, ‘흑왕’을 죽이고자.”
복수하는 자.
태초의 숲으로 향했던 앤드류 사제가 타락한 것이다.
흑왕에게 강렬한 적의를 가진 채.
그때였다.
“제국인들도 많이 보이는데?”
“데르시안 가문도 있어!”
“사신교도······!”
“여신교도 왔어!”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수많은 행렬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프들이다!”
“와, 미친! 나 엘프 처음봐!”
“여태껏 등장한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자, 잠깐만, 저 가운데······ 엘프 여왕 아니야?”
“여왕까지 나타났다고?”
엘프 여왕의 등장에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그 와중, 누군가가 한 방향을 바라보곤, 전율하며 기함을 쏟아냈다.
“카, ‘칼날용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