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오각성(大悟覺醒)
“라이가?”
“설마 단탈리안 가주의 직전제자?”
“성역이 거부했다고 들었는데?”
“단탈리안 가주도 봉문을 조건으로 스스로 가주의 직위를 내려놓았잖아.”
“사실상 팔가랑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 아니야 그럼?”
성역이 시끌벅적했다.
라이가의 이름이 대장로 알비노에게서 튀어나온 순간.
이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팔가의 가주, 단탈리안.
그는 라이가를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성역을 방문했다.
하지만 성역은 라이가를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다.
라이가의 신분은 노예였으니까.
아무런 명예도 없는,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하지만 단탈리안은 라이가를 제자로 받아들이기 위해 팔가를 봉문했다.
이는 스스로 가주의 직위를 내려놓음과 같았다.
단탈리안은 더 이상 팔가의 가주가 아니니, 사실상 그의 제자인 라이가 역시 팔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럴진대.
뻔뻔하게 수십년만에 나타나, 가주의 자리를 탐하고 있다니.
“조용히-.”
우우우웅!
대장로 알비노의 목소리가 성역에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고막을 뒤흔들고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의 성량에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가주의 의식’을 진행하겠다. 참가를 희망하는 십육각주는 앞에 서도록.”
결국, 가주의 의식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가 본인이 희망하는데 대장로의 직권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대장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생명의 원천은 본래 늘릴 수 없는 것이거늘.’
생명의 원천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총량을 늘리지 못한다.
이곳 성역에서 ‘멈추게하는’ 방법 외엔 말이다.
대장로와 장로들이 성역에서 오랜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다.
십육각주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인간의 수명보다 오랜시간을 살아갈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멈춰있을뿐, 밖으로 나가거나 강제로 끌어낸다면 소모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원천의 힘을 모조리 끌어내는 오문의 개방.
‘원천의 총량이 늘어났다.’
세계수의 시험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라이가는 죽기 직전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찰나와 같은 순간 벽을 넘어섰다.
심지어 일반적인 벽조차도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
그 깨달음은 찰나와 같아서, 지나간 순간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내고자 오랜시간을 명상해야만 한다.
그런데 라이가는 한순간에 각성했다.
‘대오각성(大悟覺醒).’
진실된, 진정한 깨달음은 체득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만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벽을 넘고, 거친 대해(大海)를 건너다보면, 채워넣은 것에 고집이 생기기 마련.
특히 라이가와 같은 정도의 강자는 모두 고집이 강하다.
오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길만이 맞다고 여긴다.
그러한 고집을 버리고, 전부 비우고, 다시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일.
말은 쉬우나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진정으로 깨달아야만 각성할 수 있으므로.
‘······ 완숙의 경지에 들어섰구나.’
생사경.
살아서는 도달할 수 없다고 전해지는 경지.
라이가는 그러한 경지의 완숙에 도달했다.
처음 보았을 땐 초입에 불과했으나, 모든 걸 비워내고 다시 채워넣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졌다.
생사경 완숙.
단일로서 문명 하나를 지울 수 있는 재앙적인 무위의 단계.
멸망이 출현하기 전, 가장 찬란했던 문명을 지녔던 세계에서도 생사경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강자는 몇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확하게 이해한 자는 말이다.
지금 라이가는 살아서 신선(神仙)이 된 것이다.
오문을 완성하고, 정해진 죽음으로부터 멀어졌다.
“십육각주 전원, ‘가주의 의식’에 참가를 희망하는 바이오.”
······ 하지만.
십육각주.
특히 상위의 여덟 각주는 수백년 이상을 성역에서 수련한 고수다.
다음 멸망의 출현을 대비하고자 대장로가 직접 키운 괴물들이었다.
이전 멸망의 출현 때처럼 허망하게 패배할 수는 없으니까.
그만큼이나 강자가 많고,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막강한 문명을 지녔던 세계.
그러나 ‘멸망’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아무리 대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모두가 제잘난 맛에 취해 각개격파 당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알비노는 울분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직 멸망을 죽이고자 수천년의 시간을 살아왔다.’
팔가와 손을 잡은 것도 그래서다.
대장로 알비노는 몇 안되는 ‘멸망’을 직접 겪은 자.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팔가의 힘은 멸망과 대적하기에 적합하다.’
하여, 팔가와 손을 잡았다.
팔가의 초대가주였던 그 선지자와.
대장로가 되고, 팔가가 계속 계승될 수 있도록 하며, 제자들을 양성한 건 오직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멸망을 죽이기 위해!
그래서 정수의 정수만을 뽑아내어 각주들을 수련시켰다.
하위 각주는 간혹 교체되었으나, 상위 각주는 오랜세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아무리 생사경의 완숙에 도달했다 한들, 자신이 성심성의를 다해 키운 각주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까?
“잠깐.”
그때였다.
대결이 시작되기 직전.
라이가가 말문을 열었다.
“정정할 게 하나 있다. ‘완전한 명예’를 달성한 건 내가 아니다.”
“라이가······!”
대장로가 다급히 막아세웠다.
한 번 실패한 라이가를 가주로 만드는 일이다.
하필이면 지금 굳이 구태여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라이가의 의지는 확고했다.
라이가는 위를 바라보았다.
전각의 2층.
구석진 곳에 있는 현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 ‘제자’다. 나는 처음의 자격조차 이루어내지 못했으니.”
······ 끝내 사고를 쳤다.
대장로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오롯이 실력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
허나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상위 각주들은 ‘멸망’을 죽이고자 수련해왔으니까.
“헌데, 제자가 말하더군. 제자의 명예가 곧 스승의 명예라고.”
라이가가 웃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여유를 되찾은 모습.
“차마 제자보다 못한 스승이 될 수는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야겠으니.”
그리고 선언했다.
사정을 봐주지 않겠노라고.
있는 힘껏 부딪히겠다고.
그러니.
씨익!
“부디, 죽지들 말거라.”
*
라이가의 검(劍).
그의 검은 항상 절도(節度)가 있었다.
격식이 있었고 스스로 정해놓은 틀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검은 달랐다.
‘검무.’
검의 춤.
십육각주와의 대결이 시작되며 보인 라이가의 모습은 마치 검무를 추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팔가의 검에는 검무가 없다.
모든 기술이 결을 끊어내는데 특화되어 있다.
‘아름답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감탄했다.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호흡도, 검을 대하는 자세도.
여유가 있다.
맺고, 끊는게 보다 자연스러웠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검과 검을 맞대며 흘려보낸다.
‘강해.’
하지만, 십육각주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맨 앞열에 섰던 상위의 여덟 각주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의 라이가와 맞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쿠우우웅-!
성역이 뒤흔들린다.
검의 파장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대장로와 장로들이 마력을 펼쳐 막고는 있지만, 진공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이미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저 멀리 멀어진 상태였다.
‘이게 팔가의 진정한 힘······.’
제국을 이루는 네 개의 대표가문.
그중 하나인 팔가의 힘이 이정도일진대 나머지 가문들은 또 어떨까?
황가 아르혼, 이자벨라의 성인 데르시안, 그리고 라혼.
분명한 건 나머지 모든 가문을 합쳐도 지금 팔가의 신비함만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팔가를 갖게되면, 전례없는 세력을 등에 업게 된다.
여태껏 내가 지니지 못한 거대한 무력집단을!
드루이드들까지도 말이다.
칼날용신 하나와 두 아이들, 그리고 마혈종들도 만만치않게 큰 세력이긴 했지만, 정면에서 부딪힌다면 팔가가 더 강할 듯싶었다.
뿐만인가.
팔가의 힘은 확실히 매혹적이었다.
‘여덟명이 오문을 개방했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뒤덮인 전장.
라이가를 포함한 아홉이 오문개방을 행했다.
나머지는 사문을 개방한 상태다.
허나 의아했다.
‘오문을 켜면 무조건 죽는 게 아니었나?’
그럼 죽음을 무릅쓰고 라이가를 상대하는 건지.
아니면 라이가가 ‘반쪽’이라 제대로 오문을 못 다뤘던 건지 말이다.
‘결, 결, 결······.’
그러나 그러한 의문은 곧 잊혔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라이가의 검.
그리고 십육각주가 다루는 모든 결은 달랐다.
그것들이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 검을 쥐어보았다.
무언가 잡힐 것 같았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
벨 수 없는 것.
이제는 볼 수 있고, 벨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조금만 더······.’
휘익!
천천히.
나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라이가를 따라, 라이가와 함께 검무를 췄다.
그 순간 라이가가 검무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어디 한 번 따라와 보라는 듯.
찬란히 빛나는 황금의 물결이 더욱 강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음······!”
한 명이 쓰러지고.
또 한 명이 쓰러지고.
계속해서 라이가의 검을 받아낸 이들이 버티지 못한 채 패배해간다.
순식간에 모든 하위각주가 장외로 떨어져나갔다.
마침내 상위각주만 남게되자 싸움은 훨씬 더 격렬해졌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그의 새로운 경지에 나는 그저 매혹되었을 따름이다.
라이가는 끊임없이 수위를 늘렸다.
팔가에 계승되어온 모든 힘을 풀어헤쳤다.
나도 최선을 다해 그의 검을 좇았다.
“오문의 완성을, 극의(極意)를 달성했단 말이냐?”
두 명.
십육각주 중 고작 두 명만이 남았을 때.
그들은 놀라하며 물었다.
라이가의 실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으니.
대장로의 눈빛도 흔들리긴 매한가지였다.
단순한 완숙의 경지라 하기엔 무언가 달랐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더 있다.
라이가를 완성시킨, 라이가가 완성한 무위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묘리를 담고 있었다.
팔가가 계승해온 결이 아니었다.
허나.
“나는 아직 극을 이루지 못했다.”
라이가는 고개를 저었다.
진정한 극.
투신의 탑에서 보았던, 빌헬름이 펼쳐냈던 마지막 검.
비록 한 번 펼쳐냈을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극의였기에.
그 검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무엇보다 라이가도 멀쩡하진 못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난무했다.
만약 진정으로 극의에 도달했다면, 이러한 상처도 없었을 터.
또한 남은 저 둘은 괴물 중의 괴물이다.
라이가가 입은 상처 대부분을 저 둘이 낸 것이다.
“자, 계속 놀아보자꾸나.”
라이가는 미소를 지었다.
강자와의 대결은 역시나 즐거웠다.
하지만 제자를 가르치는 건 더 즐거웠다.
그는 이들과 대련을 펼침으로서 제자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투쟁 속에서.
‘아······!’
《‘결’에 대한 심득을 체득했습니다.》
《이는 숭고하며 고결한 것.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무신의 그릇’이 ‘심검’을 담습니다.》
《‘무신의 심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신의 심검’은 검술의 숙련도 레벨에 영향을 받습니다.》
《현재 검술 숙련도 레벨 35.》
《‘무신의 심검(무장해제)’을 사용해, ‘파괴불가’를 베어낼 수 있습니다.》
대오각성의 순간.
나는 천천히, 체득한 깨달음을 손 끝에 담아.
스팟-!
《‘성역(파괴불가)’을 베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