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너를 ‘파문’한다.
처음, 튕겨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라이가는 그저 분하고 원통할 뿐이었다.
일평생을 쌓아 올린 명예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서.
스승의 유언과 기대에 못 미친 것 같아서.
결국, 발악해봤자 라이가는 노예인 것이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고,
고고한 기사인 척 검을 휘둘러도,
··· 그 태생은 비천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수가 뿜어내는 붉은색 빛.
명예의 척도.
최초의 빛을 받아들이지조차 못한 까닭이 그 외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최소한의 명예조차 없는 존재.’
세계수는 라이가에게 그렇게 말한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라이가는 제국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연을 돌며 대지를 정화했다.
그리고 정화한 대지를 제국에 편입시켜 대륙을 넓혀왔다.
육체가 잘리고, 부서지며, 정신조차 어그러지는 심연에 계속 발을 들인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로는 불가한 일.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육체에 독이 쌓이기 마련이니까.
라이가가 생명을 갉아가며 계속 심연에 발을 들인 건 오로지 명예를 위해서다.
스승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어 스스로 명예로워지고자!
······ 그렇게 한평생을 일구었는데.
‘내가 해온 일들이···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럼 대체 명예란 무엇인가.
자신이 한 일이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면.
아무도 하지 않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는 게 명예로운 행위가 아니라면!
‘······ 죄송합니다. 스승님.’
팔가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
스승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태생의 신분 따윈 명예와 상관없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결심.
그 모든게 단번에 무너졌다.
자신을 믿고 팔가와 제국을 등졌던 스승님께 폐를 끼쳤다.
못난 제자 탓에.
다시 팔가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
······ 하지만 그러한 비통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단순히 변심을 해서가 아니다.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통해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아드리움의 현.
자신의 제자.
녀석이 세계수의 앞에 섰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무리 무신(武神)의 자질을 지녔다고 한들, 당장은 그것이 명예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
하물며 현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지 않은가.
명확한 신분이 없는, 아드리움의 부랑자.
‘주황색······.’
······ 분명히 그랬을 터다.
자질과 명예는 명백히 다른 것이니까.
허나.
현은 튕겨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명예의 다음 자격을 시험받았다.
빨간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노란색으로.
초록색, 파란색, 남색.
그리고 마침내 일곱빛깔의 찬란한 색을 뿜어내는 세계수.
한 단계가 뻗어나갈 때마다 라이가의 표정은 점차 오묘해졌다.
찡그렸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주름이 펴지고, 눈을 크게 뜬 채, 동공이 확대되며.
“푸른 드루이드의 대족장 ‘알비노’가 대자연의 주인, 하이 드루이드를 뵙습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선.
······ 가만히 입을 벌렸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그 중심에서 장로들과 대장로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자.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그것은 틀림없이 현이었으니.
‘이,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의 제자가 ‘하이 드루이드’라니?
장로와 대장로는 왜 전설속 드루이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
저들이 자연의 힘을 다루며, 영원을 살아가는 이유가 설마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나?
그러나 현은 인간이다.
결코 저들과 같은 드루이드가 아니다.
그때, 현이 대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험은 끝났습니까?”
“······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이 드루이드시여.”
세계수의 주인에게 세계수의 시험을 내렸다.
이보다 더한 무례가 어디있나.
시험을 볼 필요가, 증명을 할 이유가 없는 존재였다.
그는 선지자들을 넘어서는 명예와 영혼의 소유자.
그저 서서 자격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세계수가 활기를 되찾으며 그들의 자격마저 돌려받았다.
가히 기적과 같은 이름의 존재이리라.
“부디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
라이가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장로가 먼저 이름을 묻는 모습은 처음보았다.
그는커녕 자신의 스승에게조차, 더 먼 스승들조차도 먼저 이름을 묻지 않았다고 했다.
제스스로 알려왔을뿐.
한데, 대장로가 먼저 이름을 물은 것이다.
공손히, 극진히 예를 다해서 말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였다.
“현.”
현이 대답하자 대장로 알비노가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현님.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생각해보죠.”
생각해본다는 말.
왜인지 희망적인 말이다.
바로 받아들이자니 눈치가 보이는 것이리라.
하기야 하이 드루이드가 자신들을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하여 알비노가 미소를 머금은채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님. 다시한번 실례이오나······ 그것이 ‘진정한’ 모습입니까?”
“그런데요.”
“그럼 진짜 라이가의 제자 신분이······ 맞습니까?”
다른건 다 재쳐두고서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모습이었다.
그 누구보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존재가 고작 라이가의 제자라니!
명예의 ‘명’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의 제자라는 게 말이다.
세계수의 시험에서 두 번이나 탈락한 자.
팔가의 이름을 잇기도 창피한 신분일진대.
사실은 정체를 숨기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게 아닐까?
혹은 진짜 모습을 감춘 게 아닐까?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지닌채 물은 것이다.
“맞는데요.”
······ 허나 현은 한치의 망설입없이 답했다.
게다가 왜인지 고까운 말투로.
대장로 알비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이 드루이드이시여.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궁금한게 있는데요.”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모든걸 답해드리겠습니다.”
“스승의 명예가 제자의 명예 아닙니까?”
“그, 그건······.”
“제자의 명예가 곧 스승의 명예 아닙니까?”
순간 알비노는 당황하고 말았다.
스승의 명예는 제자의 명예로 직결되긴 한다.
그렇다면 제자의 명예 역시 스승의 명예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지간한 격차 내에서의 일이다.
라이가와 현의 차이는 명백했다.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한데 묶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원해서 물어본 건 아닐 터.
대장로 알비노의 얼굴에선 어느덧 여유와 미소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
“제가 따르는 분을 거절한 곳입니다. 제가 그대들을 이끌 이유도,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습니다.”
척!
현이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동시에 모든 장로와 대장로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 안 돼!’
막아야한다.
현이 돌아가는 일만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그가 없으면 세계수는 다시 마를 테고, 자신들의 모습도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뿐만인가.
세계수에 생긴 던전.
저곳에 분명히 ‘길’이 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던전에 자신들이 오랜시간 찾고 있던 ‘답’이 있으리라고.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장로 알비노가 급히 현을 멈춰세웠다.
그러나 현은 멈춰서지 않았다.
그대로 전각을 나가, 성역을 벗어나, 영영 떠나버릴 기색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저 발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하이 드루이드라 불렀던 대족장은 있었으나, 세계수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진정한 하이 드루이드는 나타난 적이 없다.’
드루이드의 대족장들.
세계가 멀쩡하던 시절, 그들중 몇몇은 스스로를 ‘하이 드루이드’라 부르며 드루이드의 대통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작 세계수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없다.
자격을 확인받고, 일곱빛깔의 무지개를 띄워내는 자만이 ‘하이 드루이드’라 인정받을 수 있으나, 실상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후 그들은 ‘멸망’에게 멸망당했다.
통합되지 않아서, 그들이 따를 진정한 주군이 없었기에.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드디어 나타났다.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토록 허무하고 허망하게 놓쳐선 안 된다.
“······.”
대장로 알비노는 라이가를 쳐다봤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답은 그에게 있었다.
성역이 거절한 자.
모든 장로와 자신이 거부했던 남자.
그러나 팔가와 함께 공존했던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다.
역대 어떤 팔가의 후계자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하물며 두 번이나 거부한 이를 받아들이라고?
‘······.’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성역과 명예의 근간이 흔들리는 문제였다.
라이가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태껏 행해왔던 모든 자격의 확인이.
자신들의 역할이 잘못 되었었노라고 말이다.
“현.”
그때였다.
라이가.
그가 불현 듯 입을 연 것은.
우뚝!
동시에 현이 멈춰섰다.
라이가는 그런 현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니.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너는 너의 삶을 살거라.”
라이가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이 정리된 듯.
현현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의 제자가 아니어도 좋다. 나라는 이름의 족쇄를 차지 않아도 돼. 억지로 묶이긴 했으나, 정작 내가 너에게 준 것은 별 게 없지 않느냐?”
기껏해야 이름뿐이다.
팔가기사단 라이가의 제자라는 타이틀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타이틀이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지금처럼 발목만 잡을뿐이다.
······ 그래.
저 녀석이 나아가는데 자신의 이름은 필요없다.
무신의 자질을 갖췄으며 대장로와 팔가를 갖게 된다면 굳이 자신의 이름이 없어도 창공을 훨훨 날게 될 터이니.
차라리 없는게 낫다.
제자가 아닌 게 나았다.
그것을 알텐데도, 현은 끝까지 라이가가 스승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 충분하다.
지금, 라이가는 구원받았으니.
자신은 비록 닿지 못했지만, 자신의 제자가 성역의 주인이 되었다.
인정을 넘어 정점에 섰다.
장로와 대장로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현. 지금부터 너를 파문······.”
“자, 잠깐!”
말을 끊고 다급히 끼어든 이.
그건 다름아닌 대장로 알비노였다.
알비노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여기서 파문을 시켰다간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승을 위해 떠나는 제자.
그런 제자를 위해 떠나려는 스승!
이보다 더 끔찍한 그림은 없었다.
이대로 진행이 된다면 하이 드루이드는, 현은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적대감만 생기리라.
그것만은 막아야한다.
그리고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라이가를 팔가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장로들이여, 그대들도 동의하는 바이겠지?”
물었으나 사실상 강제다.
이윽고 열명의 장로들이 한결같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동의합니다.”
“예, 예. 라이가는 팔가를 잇기에 충분한 인물입니다.”
“그러고말고요.”
“하, 하. 반대하는 자가 있을 리가 없지요.”
모두가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그러나 방법은 이뿐이었다.
비록 내부적인 반발이 있을지언정.
대장로 알비노가 라이가를 다시금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가. 팔가 가문의 수장이여.”
“······.”
“그대가 성역의 축복과 함께 묻히는 것을 허락한다. 원한다면, 그대의 스승 ‘단탈리안’ 역시도.”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라이가가 고개를 들었다.
묘한 표정. 일렁이는 눈빛.
그리고 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이 이빨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스승님.”